사랑의 동명왕/제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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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命[편집]

1[편집]

『예도.』

하고 대소는 무안한 낯으로 예도를 불렀다. 애매한 강월의 피를 본 대소의 마음에 무엇인지 모르게 죄다 하는 생각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위험 속에도 지극히 태연한 위엄을 잃지 않고 그린 듯이 서 있는 예랑의 태도에 놀라움을 느끼 지 아니할 수 없었다.

『예.』

예도는 비록 냉랭은 하나마 높은 자에 대하는 공경하는 위 의는 차렸다.

『어찌하면 좋소? 나는 그대의 누이가 주몽에게 몸을 허하 고, 그뿐 아니라, 주몽의 씨까지 배었다는 말에 상기하였소.

주몽은 나와는 원수야. 내가 마음에 사랑하고 내 아내로 알 았던 여자를 하필 내 원수 주몽에게 빼앗기다니, 이것은 진 실로 참을 수 없는 일이 아니요? 그래서 그대의 누이를 죽 여 버린다는 것이었어. 더군다나 저 뱃속에 든 아이가 계집 이라면 몰라도, 만일 사내라면 필시 내 원수가 될 것이야.

내 원수면 이 나라의 원수가 아닌가. 나는 그 아이가 칼을 들고 내 앞에 선 것을 보는 것 같아. 예도, 어찌하면 좋소?

예도는 나와 누이와 어느 편을 더 위하려는가? 누이 편을 들어서 나를 원수로 삼으려는가? 내 편을 들어서 누이를 버 리려는가? 예도, 어디 말해 보오.』

예도는 대소의 말에는 대답 아니하고 예랑을 돌아 보면서,

『누이야, 동궁마마 말씀대로냐? 네가 정말로 주몽아기의 씨를 배었느냐?』

하고 물었다.

예랑은 눈을 내리깔며,

『예. 그러하오. 이몸이 주몽아기의 아내요, 이 뱃속에 든 아기가 주몽아기의 씨라는 것은 햇님·달님·별님이 다 아시 오.』

하고 눈을 들어 예도를 바라 본다.

『저 말 들었나, 예도?』

하고 대소는 방바닥에 떨어졌던 피묻은 칼을 다시 들어 예 랑을 치려 한다.

『참으시오. 동궁마마.』

하고 예도는 죽이려거든 나를 죽이시오 하는 듯 대소의 칼 앞을 몸으로 막는다.

대소는 와락 성을 내어,

『예도야, 비켜라. 아니 비키면 너를 먼저 죽일 테다. 예도 야, 저리 비켜, 너도 대대로 이 나라의 녹을 먹은 신하가 아 니냐. 「내 일보다 나라 일」이라는 조상의 가르침을 너도 네 아비게서 배웠을 것이 아니냐. 반역자의 씨를 밴 음탕한 누이를 두둔해서 감히 네가 내게 거역하는 게냐? 이놈 그래 도 안 비켜? 이 칼로 네 몸을 두 동강에 내고 네 집이 쑥밭 이 될 줄을 모르고.』

하고 예도를 피하여 예랑을 겨누다가, 예도가 날쌔개 몸으 로 예랑을 가리우는 것에 더욱 화를 내어, 높은 소리로,

『이봐라, 다들 들어오너라. 예도가 나를 해하려 드니 들어 와 이놈을 찍어라.』

하고 부르니, 문 밖에 있던 대소의 호위 장졸 사오인이 칼 을 빼어 들고 들어 온다.

2[편집]

예도는 칼을 들고 덤벼 드는 무리를 거들떠 보지도 아니하 고 여전히 판연하게 대소를 향하여,

『동궁마마, 잠간만 참으시오. 소인은 손에 병장기를 들지 아니하였소. 예백의 아들 예도가 아무러한 일이 있기로 동 궁마마를 해할 마음을 가질 리가 있소/ 소인의 가문이 비록 미미하나마 대대로 충의로 업을 삼은 것은 위로는 상감마마 께서와 아래로는 천하 백성이 다 알 것이요, 천지 신명이 다 알 것이요. 동궁마마께서 이 자리에서 소인의 누이를 죽 이시더라도 소인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곱게 받겠소. 소인의 누이도 비록 미거하나마 동궁마마의 칼에 애매하게 죽을지언정 원망하는 말 한마디도 아니하오리다.

이몸이 천만 번 죽더라도 예씨 가문의 충의의 이름을 더럽 힐 생각은 털끝만치도 있지 아니하오.』

하고 잠간 말을 끊었다가,

『동궁마마 소인의 누이를 죽여야 하겠다고 마마께서 생각 하시거든 소인더러 네 누이를 죽여라 한 마디만 분부하시 면, 소인의 칼로 죽이오리다. 동궁마마께서 연약하고 애매한 여자를 둘이나 죽였다는 말이 나면, 젛사오나 상감마마께옵 서는 어떻게 생각하오시며, 어리석은 백성들은 무에라고 생 각하오리까. 그것을 생각하여 보시오.』

하고 말을 맺는다.

이 말에 대소는 칼 들었던 팔이 내리고 고개가 숙는다. 인 자하기로 이름난 금와왕은 반드시 대소의 일을 가만 두지 아니할 것이다. 대소 외에도 왕자가 여럿이 있으니, 대소가 왕의 눈 밖에 나면 태자의 자리도 대소에서 떠날 수도 있는 것이다. 대소의 손에 병마의 대권이 있거나 또는 나라 백성 들이 대소의 덕을 사모한다 하면 금와왕과 대항할 수도 있 겠지마는, 대소에게는 이 두 가지가 다 없었다. 왕이 과히 늙거나 병이 나기 전에는 병마 대권이 대소의 손에 돌아 오 지 아니할 것이요, 또 무구와 같은 악한 자를 좋아하여 주 색을 탐하고 포학을 일삼기 시작한 대소에게 민심이 모일 까닭도 없었다. 게다가 주몽아기에 비겨서 백성들은 대소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중 이번에 주몽아기를 몰아 낸 것으로 더욱 민심을 잃고 말았다. 대소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 니요, 덕은 부족하나 지혜로는 도리어 영리한 사람이기 때 문에, 이런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지금 예도의 참되고도 정성스러운 말을 듣고 보니, 아무리 대소 의 교만으로도 수그러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할뿐더러, 한편으로는 예도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칼 쓰기나 활 쏘 기로 주몽 다음에 간다는 예도가 만일 칼을 빼는 날이면, 대소로서는 그것을 당할 수 없는 줄도 잘 알기 때문이다.

주몽은 패기가 있어 왕자들과 겨룰 때에도 양보함이 없이 재주를 다 보이지마는 예도는 겸손의 훈계를 지켰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예도의 재주는 깊이를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대 소는 이것을 아는 것이다. 아무리 분김이라 하더라도 대소 가 이 자리에서 마음 놓고 칼을 빼어서 예도 남매를 밴다고 뽐낸 데는, 예도의 충성이 결코 동궁과 대항하지 아니할 것 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 예도에게 지는구나.』

하고 대소는 이를 갈았으나 예도의 말을 듣는 것이 제이익 이니 어찌할 수 없었다.

3[편집]

『황송하오.』

하고 예도는 대소의 앞에 읍하고 무릎을 꿇며,

『소인의 어리석은 말씀을 용납하시와 칼을 들이우시니 감 격하오. 과연 장차 성군이 되실 어른이시오.』

하고 머리를 조아리니 대소는 더욱 무료하여 깊이 고개를 숙이며,

『예도, 일어나오. 내 그대 아버지의 제자가 아닌가. 그대 나와 장난 동무요, 글 벗이 아닌가. 내 그대게 지나친 말을 하여서 무안하오. 일어나오.』

하고 예도의 팔을 들어 일으켰다.

예도는 더욱 머리를 조아려 감격한 뜻을 표하고 일어나서 대소를 향하여 말한다.

『동궁마마. 소인의 원하는 것을 하나 더 들어 주시오.』

『무엇인가. 그대 누이의 목숨을 살려 달란 말인가?』

『아니요. 소인의 누이가 마마 앞에 죄인이 되었는디, 죽이 시나 살리시나 마마 처분이시라, 소인이 어떻게 살려 줍소 사 발괄하리까.』

『그러면 무슨 원이요? 말해 보오.』

『소인의 집 종 강월을 죽이신 것은 소인이 죽인 것으로 하옵고.』

예도는 잠간 말을 끊었으나 대소는 한번 한숨을 쉬일 뿐 말이 없이 예도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동궁마마 뜻을 거스리고 주몽아기의 씨를 밴 불충한 누 이는 소인의 손으로 처치하여서 동궁마마 근심을 덜게 하겠 사오니, 그것을 허하여 주시오.』

하는 예도의 말에 대소는 너무 의외여서 놀라는 동시에 하 도 예도의 충성과 지혜를 기특히 생각하였다. 진실로 이 자 리에서 예도가 예랑의 목숨을 살려 달라 할 것을 가장 겁내 었던 것이다. 그래라 할 사정은 못되고 그렇다고 이 경우에 그 청을 거절하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천하가 무에라 하여 도 하늘이 무에라 하여도 예랑의 뱃속에 든 주몽의 씨는 살 려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대소는 이렇게 꾀를 꾸미고 있었다. 만일 예도가 예랑을 살려 달라 청하면 어름어름 이 자리에서는 허락하는 모양을 보이고, 나중에 다른 꾀를 쓰 자고. 그리 하였던 것이 예도의 말대로 하면, 실로 게서 더 좋은 일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소는 얼굴에 웃음을 가 득 띄우고,

『과연 충의 가문의 아들이요. 허락하고말고. 그렇게 하오.

그대 누이 처치도 예도 그대게 맡기오. 그렇게 하면 상감께 서 그대 아버지 예백을 오래 믿듯이 나는 예도를 믿을 것이 요. 안 그러오, 예도. 그럼 나는 내 칼을 꽂소. 충신의 말 한 마디가 천금 같아서 변할 리가 없어.』

하고 호위하는 장졸을 돌아 보며,

『자 너희들도 다 칼을 거두어라. 너희들은 지금 예도의 말을 다 들었지?』

하고 대답을 구한다.

『예. 예도의 말을 다 들었소.』

하고 호위 장졸들이 일제히 대답한다.

『강월은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예도가 죽인 것이요, 예 랑의 처치도 예도가 한다고─다 그렇게 들었겠다.』

『예.』

『인제 나는 가오, 예도.』

대소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섰는 예랑을 한번 다시 보고 나간다.

4[편집]

대소를 보내고 예백은 부인과 함께 강월의 시체가 누워 있 는 사랑으로 들어 왔다.

예랑은 강월을 붙들고,

『강월아, 강월아.』

하고, 느껴 울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대체 이게 다 웬 일이냐. 강월이를 누 가 찌르고 무슨 일로 찔렀단 말이냐. 동궁마마가 장히 당황 하시고 앞가슴에 피가 묻었길래 웬 일이요 하였더니, 아무 것도 아니야 사냥 갔다가 묻은 사슴의 피야 하시더니, 대체 어찌 된 일이냐 말해 보아라. 예랑은 저렇게 강월의 시체를 붙들고 울고. 예도야, 네 말해 보아라. 이게 모두 웬 곡절이 란 말이냐.』

부인도 뒤 이어서,

『원 세상에 이런 일도 있나. 다 저년이 도고하고 안자서 생긴 일인 게지. 어디 시원히 말이나 들어 보자. 예랑아. 그 렇게 울지만 말고 저 강월이 눈이나 감기고 무엇으로 얼굴 을 좀 가리워 주어라. 보기 흉하다.』

하는 말에 예랑은,

『어머니, 아직 가만 두게 하시오. 아직도 강월이가 살아 있는 것 같은 걸요. 눈도 살빛도 고대로 있는 걸요. 강월아, 한번 휘유하고 숨을 내 쉬어 보려무나. 그렇기만 했으면 살 아날 텐데. 숨이 끊어지고 몸이 식는 것이 죽는 것인가. 네 코에 내 숨을 불어 넣어서 너를 다시 살릴 수는 없나. 강월 아, 너는 내 대신 죽었고나. 나를 아니 죽게 하려고 네 몸으 로 그 칼을 막았고나. 제 목이 찔리면서도 나를 막으려고.』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 쪽을 바라 보며,

『아버지, 어머니. 강월이가 예랑을 안 죽이려고 제 몸으로 칼을 받았소. 목에 칼을 맞고도 그리고도 칼이 이 몸에 못 오게 하노라고 뒤로 쓰러지지 아니하고 동궁마마께 매어 달 렸소. 제가 죽으면서도 나를 못 잊어서. 아버지 어머니, 이 렇게 제 대신 강월이가 죽었소. 이를 어찌하오?』

하고 강월의 가슴 위에 쓰러져 운다.

예랑의 말을 듣고 있던 예백은 무엇을 짐작하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예도를 향하여 묻는다.

『저 애 말을 들으면, 동궁의 칼에 강월이가 죽은 모양이 로구나.』

『예, 그런 모양이요.』

하고 예도는 제가 아는 대로의 사정을 예백에게 고한다.

『제 마음에도 무엇인지 모르게 마음이 안 놓여서 저 뒷문 밖에 몸을 감추고 어떻게 되는 것인가 동정을 보고 있었소.

동궁마마는 누이더러 혼인 허락을 재촉하고 누이는 다른 데 허락하였으니 동궁마마의 청을 못 듣겠노라고 거절하는 모 양이어서, 말이 잘은 안 들리나 대개 그런 뜻으로 말이 오 고 가는 모양으로 동궁마마가 성을 내시는 소리도 들렸소.

그러더니 벼란간 으악 하고 강월이가 소리를 지르기로 문을 열고 들어 와 보니, 강월은 이렇게 쓰러지고 동궁마마는 피 묻은 칼을 들고 여기 이렇게 서 계시다가, 제가 들어오는 것을 보시고 내가 네 누이를 죽인다는 것이 잘못 강월을 죽 였다 하셨소.』

5[편집]

예도의 말에 예백은 깊은 한숨을 지고, 부인은 놀람과 무 서움으로 몸을 떤다.

『그래서?』

하고 예백은 예도에게 더 말할 것을 재촉한다.

『그래서 제가 누이더러 정말이냐고 물었소. 다른 사람에 게 너의 마음과 몸을 허하였다는 말이 정말이냐고 누이더러 물었더니, 누이가 정말이라고 대답하였소.』

『정말이라니? 몸을 허하다니? 아가, 그게 웬 말이냐. 그게 정말이냐?』

하고 예백이 소리를 높인다.

예랑은 강월의 시체의 옆에서 일어나 읍하며,

『예, 정말이요.』

하고 떨리는 소리로 대답한다.

『그래, 그 사람이란 누구냐? 네가 몸을 허하였다는 그 사 람이란 누구냔 말이다. 원 저런 계집애가 있나. 그래 예백의 딸이 부모 모르게 다른 남자와 가까이 한단 말이야? 백 번 죽어 마땅한 일이다. 동궁마마의 칼에 안 죽었으면 이 아비 의 칼에 죽어야 해. 그래 그 사내가 누구인지 바로 아뢰어 라.』

예백은 눈을 부릅뜨고 예랑을 노려 보았다.

부인도 발을 구르며 내달아 머리채를 끌어 예랑을 땅에 쓰 러뜨리며,

『이년아, 이 집안 망할 년아. 그래 동궁마마를 마다하고 어떤 놈을 따랐단 말이냐. 들어오는 복을 박차고 집안 망치 려 드니 이러라고 이 어미가 너를 낳아 길렀단 말이냐. 이 년아, 그놈이 누구냐? 대라, 네년과 그놈을 한매끼에 묶어 놓고 내 손으로 때려 죽일란다. 아이고 하나님 맙소사. 어쩌 다가 이런 년이 이 가문에 태어났단 말인가, 아이고 이년 아!』

하고 저항 아니하는 딸을 잡아 뜯고 쥐어 박고 하는 것을 예도가 달려 가 뜯어 말린다.

『어머니, 진정하시오. 이것을 놓으시오. 누이가 홀몸이 아 니요.』

하여 겨우 부인을 붙들어 호피 자리에 옮겨 앉히고 예도는 부모의 앞에 무릎 꿇고 아뢴다.

『누이의 잘못도 아니요. 누이가 몸을 허한 사람은 여느 사람이 아니라, 주몽아기시오. 주몽아기를 누이와 알게 한 것은 이 자식이요. 천하에 인물을 고른다면야 누이의 배필 로 주몽아기를 두고 또 어디 있사오리까. 주몽아기가 나라 에서 쫓겨 나지만 않았던들 예를 일러서 혼인도 하였으련마 는, 갑자기 쫓겨 도망하는 몸이 되니 예를 이룰 사이가 없 고 또 누구보고 말할 수도 없어 그리된 모양이요.』

이렇게 예도는 예랑을 위하여 부모께 변명하니, 예백은 듣 기만하고 말이 없이 한숨만 쉬나 부인은 딸을 버린 것이 주 몽이란 말에 더욱 노하여 펄펄 뛴다.

며칠 지나서 예백의 집에서 장례 둘이 나갔다. 세상에 말 하기는 예랑이 급한 병으로 죽고 그 몸종 강월은 예랑을 따 라서 죽으려고 칼을 물고 자결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늦은 가을 낙엽지는 수풀 속에 가지런히 새 무덤 둘이 생겼다.

6[편집]

강월의 어머니는 예랑의 유모였다. 예랑은 강월과 한 젖을 빨아 먹고 자랐다.

강월보다 두 살 위로 괴유(怪由)라는 오빠가 있었다. 괴유 는 기운이 장사요, 몸이 날쌔어서 예도의 장난 동무요, 자라 서는 예도의 사냥 동무였다. 그는 칼 쓰기로나 활 쏘기로나 뉘게 지지 않는 솜씨였으나, 그 아버지는 북명(北溟)사람이 어서 부여의 귀족들과 섞일 수가 없었다. 다만 예도만이 괴 유를 알아 주어서 표면은 주종이라도 친구로 대우하였기 때 문에 괴유는 예도를 위하여 목숨을 아니 아낄 의리를 느끼 는 것이었다. 게다가 괴유의 위인이 극히 충직하고 의기가 있어서 예도는 그를 믿음이 컸다.

강월이 죽은 날 예도는 외따로 괴유를 불러서 단 둘이 만 났다.

『괴유, 내 부탁이 있으니 듣겠나?』

하는 것이 예도의 첫말이었다.

『말씀하시오. 괴유가 서방님 말씀을 안 들으면 이 모가지 가 부러지겠소.』

『내 누이를 맡아 숨겨 주게.』

『아가씨를 맡아 숨겨요?』

『그래. 강월이가 내 누이를 살리려고 제 몸을 죽이지 않 았나? 나는 강월을 내 누이로 작정했네. 죽은 사람을 누이 로 작정하기로 무슨 소용이 있겠나마는, 그것이 내 정성야.

그러니 자네도 내 누이를 누이로 작정해 주게. 그리고 그것 을 데리고 멀리로 피해 주게. 그러려나, 괴유? 내 청을 들어 주겠나?』

『그것은 과남한 말씀이요. 천한 괴유가 어떻게 감히 상전 댁 아가씨를 누이라고 부르겠소. 마음에 생각인들 하겠 소?』

예도는 괴유에게 자기의 계획을 말하였다. 그것은 이 밤으 로 괴유 모자가 예랑을 데리고 가섬벌을 떠나 멀리로 달아 나고 세상에는 예랑이 죽었다고 소문을 내어서 헛장사를 지 내자는 것이다. 그리고 괴유는 예랑이 낳을 아기를 보호하 여서 주몽과 다시 만나게 할 날을 기다리게 하자는 것이다.

괴유는 예도의 말을 듣고 이윽히 생각하더니, 생각 깊은 낯빛으로,

『알아 들었소. 그리하오리다. 아가씨를 소인의 누이로 삼 아서 반드시 어느 뉘가 터럭 끝 하나 못 건드리도록 지키오 리다. 하늘 두고 맹세하고 해 달 두어 맹세하오. 소인은 어 리석은 생각에 먼저 강월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소.』

하고 한번 이를 갈고 치를 떤다.

그날 밤 괴유는 그 어머니와 예랑을 데리고 배를 띄웠다.

참으로 우연하고 신기하게도 괴유가 가져 온 배는 주몽이 예랑을 태우던 그 배요, 배를 맨 곳도 그때와 거의 같은 자 리였다.

그러나 강월도 죽었으니 이제 그때 일을 알 사람은 예랑과 주몽뿐이었다. 그런데 주몽은 지금 어디 있는가, 죽었는가 살았는가. 예랑은 과연 주몽과 살아서 다시 한번 만날 것인 가. 만난다면 언제 어디서 만날 것인가.

늙은 부모님과 사랑하는 오빠 예도와도 만날 기약을 두지 못하고 집을 떠나는 예랑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흘렀 다. 강월이도 살아서 같이 가는 것이면 다소 위로가 될 것 같아서 더욱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