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흥법/보덕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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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 이암 1[편집]

三國遺事3卷-3興法-寶藏奉老/普德移庵-01

高麗本記云: 麗季武德/貞觀間, 國人爭奉五斗米敎. 唐高祖聞之, 遣道士送天尊像, 來講道德經, 王與國人聽之. 卽第二十七代榮留王卽位七年, 武德七年甲申也. 明年遣使往唐, 求學佛老, 唐帝[謂高祖也]許之. 及寶藏王卽位, [貞觀十六年壬寅也] 亦欲倂興三敎, 時寵相蓋蘇文說王以儒釋*<竝,並>熾而黃冠未盛, 特使於唐求道敎.

삼국유사 제3권 - 제3 흥법 - 보장봉로 - 보덕 이암 1

삼국유사 제3권 - 제3 불교를 융성하게 하다 - 보장왕이 도교를 중시하다 - 보덕이 절을 이동시키다(고구려를 떠나다) 1

고려본기(高麗本記: 일반적으로 삼국사기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인 것으로 추측함)》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구려(BC 37~668) 말기인 당나라 고조(高祖) 무덕(武德: 618~626) 때와 태종(太宗) 정관(貞觀: 627~649) 때에 고구려 사람들은 다투어 오두미교(五斗米敎)를 믿었다. 당나라 고조가 이에 대해 듣고는 원시천존상(天尊像)과 함께 도사(道士)를 고구려로 파견하였다. 파견된 도사는 고구려에 도착한 후 《도덕경(道德經)》을 강론했는데 고구려의 왕(영류왕)과 나라 사람들(왕족들과 귀족들인 것으로 여겨진다)이 함께 그 강론을 들었다. 이 때가 고구려 제27대 왕인 영류왕(榮留王: 재위 618~642)의 재위 7년이자 당나라 고조(高祖)의 무덕(武德: 618~626) 7년인 624년(갑신년)이다. 이듬해인 625년에는 고구려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불교(佛)와 도교(老: 노자)를 배울 수 있게 (유학생들을 보내는 일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는데 당나라 황제 고조(高祖: 재위 618~626)는 이를 허락했다. 그리고 당나라 태종(太宗: 재위 626~649) 정관(貞觀: 627~649) 16년인 642년(임인년)에는 고구려의 보장왕(寶藏王: 재위 642~668,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 즉위했는데, 보장왕은 (영류왕이 취한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또한 유교 · 불교 · 도교(儒佛道)의 삼교(三敎)가 모두 나란히 흥한 상태가 되게 하고자 하였다. 당시에 보장왕(재위 642~668)의 총애를 받고 있던 재상 연개소문(蓋蘇文: 603~663?)이 다음과 같은 건의를 했다: "지금 유교(儒)와 불교(釋: 석씨 즉 석가)는 둘 다 융성하지만 도교(黃冠: 도사의 관)는 융성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도교를 배워올 수 있게 하십시오."

보덕 이암 2[편집]

三國遺事3卷-3興法-寶藏奉老/普德移庵-02

時*<普>德和尙住盤龍寺, 憫左道匹正, 國祚危矣, 屢諫不聽, 乃以神力飛方丈, 南移于完山州[今全州也.]孤大山而居焉. 卽永徽元年庚戌六月也. [又本傳云: 乾封二年丁卯三月三日也.] 未幾國滅. [以*<總,摠>章元年戊辰國滅, 則計距庚戌十九年矣.] 今景福寺有飛來方丈是也云云[已上國史]. 眞樂公留詩在堂, 文烈公著傳行世.

삼국유사 제3권 - 제3 흥법 - 보장봉로 - 보덕 이암 2

삼국유사 제3권 - 제3 불교를 융성하게 하다 - 보장왕이 도교를 중시하다 - 보덕이 절을 옮기다(고구려를 떠나다) 2

당시에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반룡사(盤龍寺)에 있었는데 (보장왕과 연개소문이 시행하려고 하는 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좌도(左道: 도교를 뜻함)가 정도(正: 불교를 뜻함)에 맞서 싸우게 되어 국운이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하였다. 이에 보덕화상은 잘못을 바로 잡아 줄 것을 여러 번 요청했으나 보장왕은 간언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보덕화상은 자신이 거처하고 있던 방장(方丈: 지위가 높은 승려의 처소)을 신력(神力)으로 날려 남쪽으로 이동시켜 지금(참고: 일연(1206~1289)이 《삼국유사》를 지은 때는 고려(918~1392) 말기인 1281년이다)의 전주(全州)인 완산주(完山州)의 고대산(孤大山: 고덕산 · 高德山)으로 옮긴 후, 거기에서 거처하였다. 이때가 당나라 고종(高宗: 649~683, 제3대 황제)의 영휘(英徽: 650~655) 원년(元年)인 650년(경술년) 6월이었다. 또는 《본전(本傳)》에 의하면 당나라 고종(高宗: 649~683)의 건봉(乾封: 666~668) 2년인 667년(정묘년) 3월 3일이었다고 한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구려(BC 37~668)가 망했다. 당나라 고종(高宗: 649~683)의 총장(總章: 668~670) 원년인 668년(무진년)에 고구려가 망했으니 그 사이 기간을 계산해 보면 650년(庚: 경술년)으로부터 668년(戌: 무진년)까지는 19년이다. 지금의 경복사(景福寺)에 있는 비래방장(飛來方丈: 고유명사이며 문자 그대로의 뜻은 "날아서 온 방장"이다)이 바로 이렇게 하여 생겨났다고 한다. 이상은 《국사(國史)》에서 전하고 있는 내용이다. 진락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 1061~1125, 고려 중기의 학자이자 거사, 청평거사로 불림, 사리탑이 있음)은 보덕화상에 대한 시(詩)를 지어 당(堂: 집 또는 법당)에 남겨 두었고, 문렬공(文烈公)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보덕화상의 전기를 저술하여 세상에 전했다.

보덕 이암 3[편집]

三國遺事3卷-3興法-寶藏奉老/普德移庵-03

又按唐書云: 先是隋煬帝征遼東, 有裨將羊皿, 不利於軍, 將死有誓曰: “必爲寵臣, 滅彼國矣.” 及蓋氏擅朝, 以盖爲氏, 乃以羊皿是之應也.

삼국유사 제3권 - 제3 흥법 - 보장봉로 - 보덕 이암 3

삼국유사 제3권 - 제3 불교를 융성하게 하다 - 보장왕이 도교를 중시하다 - 보덕이 절을 옮기다(고구려를 떠나다) 3

또한 《당서(唐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보다 앞서 수나라(隨) 양제(煬帝)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수 양제(재위 604~617)의 막료급 장수(裨將: 비장)로 양명(羊皿)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다. 그는 (고구려와의) 전쟁(612년 1월의 을지문덕살수 대첩)에 패하여 죽게 되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다시 태어나면) 나는 반드시 고구려의 총애받는 신하(寵臣)가 되어 고구려가 멸망되게 할 것이다." 연개소문(蓋氏)이 조정의 권력을 홀로 차지하여 마음대로 휘두르게 되었다. 연개소문이 개(蓋)를 자신의 성으로 바꾼 것(즉, 연개소문으로 태어나게 된 것)은 곧 양명(羊皿 = 蓋)이 되어 이전의 전쟁(살수 대첩) 때의 죽음(是)을 보복한(應) 것이라 하겠다.

(역자 주: 인과응보와 윤회를 믿는 승려로서의 일연은, 한 개인의 역사적 또는 객관적 사실이나 위업보다는, 양명과 연개소문의 이야기를 통해 한 개인이 원수를 원수로 갚는 것 또는 피의 보복을 맹세할 정도로 마음 속 깊이 원한을 가지는 것은 결국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곳을 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원인을 뿌리는 것이라는 점에 더 착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연은 양명으로서의 삶이건 연개소문으로서의 삶이건 모두 번뇌에 묶여 자신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보는 것 같다. 한편, 당시의 불교 지도자로서의 일연은 보장왕의 유불도 삼교 정립 정책에 동의했을 뿐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불교 사찰을 도교의 도관으로 삼는 등 불교를 탄압한 연개소문에 대해서 탐탁치 않게 보고 있는 것 같다 (참고: 한국의 도교#연개소문의 억불양도책). 만일 지금 시대에서, 어떤 위정자가 기독교가 너무 융성하다는 이유로 기독교의 교회를 도교의 도관으로 삼겠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그 신자들도 목숨을 걸고 저항할 것이며 오히려 그 위정자가 자리에서 내쫓길 것이다. 당시의 고구려 불교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보덕이 고구려를 떠난 것은, 최소한으로 생각하여도, 고구려에 극심한 국론 분열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런 면에서 보장왕과 연개소문의 종교 정책은 불교측 정치 세력을 일시적으로 약화시키는 이득은 있었을 것이나 결과적으로 득보다 실이 많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보덕 이암 4[편집]

三國遺事3卷-3興法-寶藏奉老/普德移庵-04

又按高麗古記云: 隋煬帝以大業八年壬申, 領三十萬兵, 渡海來征. 十年甲戌十月, 高麗王[時第三十六代嬰陽王立二十五年也.]上表乞降, 時有一人密持小弩於懷中, 隨持表使, 到煬帝舡中. 帝奉表讀之, 弩發中帝胸. 帝將旋師, 謂左右曰: “朕爲天下之主, 親征小國而不利, 萬代之所嗤.” 時右相羊皿奏曰: “臣死爲高麗大臣, 必滅國, 報帝王之*讎”. 帝崩後, 生於高麗. 十五聰明神武, 時武陽王聞其賢, [國史, 榮留王名建武, 或云建成, 而此云武陽, 未詳.], 徵入爲臣. 自稱姓盖名金. 位至蘇文, 乃侍中職也. [唐書云盖蘇文自謂莫離支, 猶中書令. 又按神誌秘詞序云, 蘇文大英弘序幷注, 則蘇文乃職名有文證, 而傳云文人蘇英弘序, 未詳孰是.]

보덕 이암 5[편집]

三國遺事3卷-3興法-寶藏奉老/普德移庵-05

金奏曰: “鼎有三足, 國有三敎, 臣見國中, 唯有儒釋無道敎, 故國危矣.” 王然之, 奏唐請之, *大(太)宗遣*叙(敍)達等道士八人. [國史云, 武德八年乙酉, 遣使入唐*永(求)佛老, 唐帝許之. 據此則羊皿自甲戌年死, 而托生于此, 則才年十餘歲矣, 而云寵宰, 說王遣請, 其年月必有一誤, 今兩存.] 王喜, 以佛寺爲道*舘(館). 尊道士坐儒士之上. 道士等行鎭國內有名山川, 古平壤城勢新月城也. 道士等呪勅南河龍, 加築爲滿月城, 因名龍堰城, 作讖曰龍堰堵, 且云千年寶藏堵, 或鑿破靈石. [俗云都帝嵓, 亦云朝天石, *<盖,蓋>昔聖帝騎此石朝上帝故也.] 盖金又奏築長城東北西南, 時男役女耕, 亦至十六年乃畢.

보덕 이암 6[편집]

三國遺事3卷-3興法-寶藏奉老/普德移庵-06

及寶藏王之世, 唐*大(太)宗親統, 以六軍來征, 又不利而還. 高宗總章元年戊辰, 右相劉仁軌/大將軍李勣/新羅金仁問等, 攻破國滅, 擒王歸唐, 寶藏王庶子率四千餘家, 投于新羅. [與國史*小(少)殊, 故幷錄.]

보덕 이암 7[편집]

三國遺事3卷-3興法-寶藏奉老/普德移庵-07

大安八年辛未, 祐世僧統到孤大山景福寺飛來方丈, 禮普聖師之眞, 有詩云: “*涅槃方等敎, 傳受自吾師”云云. 至“可惜飛房後, 東明古國危.” 跋云: “高麗藏王*<感,惑>於道敎, 不信佛法, 師乃飛房, 南至此山. 後有神人現於高麗馬嶺, 告人云: “汝國敗亡無日矣.” 具如國史, 餘具載本傳與僧傳. 師有高弟十一人, 無上和尙與弟子金趣等創金洞寺, 寂滅/義融二師創珍丘寺, 智藪創大乘寺, 一乘與心正/大原等創大原寺, 水淨創維摩寺, 四大與契育等創中臺寺, 開原和尙創開原寺, 明德創燕口寺. 開心與普明亦有傳, 皆如本傳. 讚曰: 釋氏汪洋海不窮, 百川儒老盡朝宗. 麗王可笑封沮洳, 不省滄溟*徒(徙)臥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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