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배송지 주)/권30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편집]

  《상서》(尙書)[1]에서 ‘만이(蠻夷)[2]가 중국을 어지럽힌다’했고[3] 《시경》[4](詩經)에서 ‘험윤(玁狁)[5]이 매우 강성하다’했으니[6] 그들이 오랫동안 중국의 우환이었던 것이다. 진(秦)나라[7]·한(漢)나라[8] 이래, 흉노[9]가 오랫동안 변경에 해를 끼쳤다. 비록 효무제[10]가 밖으로 사이(四夷)와 일을 벌여, 동쪽으로 양월(兩越)[11]·조선(朝鮮)을 평정하고 서쪽으로 이사(貳師)·대완(大宛)을 토벌하고, 공(邛)·작(苲)·야랑(夜郎)으로 통하는 길을 열었으나, 이들 모두는 황복(荒服)[12]의 바깥쪽이므로 중국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흉노는 중국〔諸夏〕과 가장 가까우니 호기(胡騎)[13]가 남침하면 삼변(三邊)에서 적을 맞이하는 것이다. 때문에 위청(衛靑)[14]·곽거병(霍去病)[15] 같은 장수들을 여러 차례 보내 북쪽으로 깊이 들어가 정벌하고, 선우(單于)[16]를 끝까지 추격해 그들의 풍요로운 땅을 빼앗았다. 그 후 (흉노는) 마침내 요새를 지키며 번(藩)이라 칭하고 대대로 쇠약해졌다. 건안(建安)[17] 연간에, 남(南)(흉노의) 선우(單于) 호주천(呼廚泉)[18]이 조정에 들어와 (중국에) 머물며 궁중에서 시중들고 우현왕(右賢王)[19]을 시켜 그 나라를 위무하게 하니, 흉노가 자신을 굽혀 (스스로를 낮춘 것은) 예전에 한(漢)이 (흉노에 대해 했던 것)보다도 지나쳤다. 그러나 오환(烏丸)·선비(鮮卑)가 점점 다시 강성해지고 또한 한(漢)나라 말의 혼란으로 인하여 중국은 일이 많아, 밖으로 토벌할 겨를이 없었으니 이로 인해 (오환·선비는) 한나라의 사막 남쪽 땅에서 제멋대로 굴 수 있었다. (오환·선비가) 성읍을 침략하고 인민을 죽이고 약탈하니 북쪽 변경은 이에 곤란을 겪게 되었다. 때마침 원소(袁紹)가 하북(河北)을 아우르자, 삼군(三郡)에 있는 오환을 달래고 그 이름 높은 임금을 높이 평가해 주고 그 정예로운 기병을 거두어 들였다. 그 뒤, 원상(袁尙)과 원희(袁熙)[20]는 다시 답돈(蹋頓)[21]에게로 달아났다.[22] 답돈은 또한 날래고 용맹스러워, 변방의 장로들은 그를 묵돌(冒頓) [23]에 비견하였다. (답돈은) 그 (땅이) 험하며 멀다 믿고, 용감한 백만(百蠻)으로서 구태여 (원상과 원희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태조(조조)는 몰래 군사를 내어 북벌하였는데, (적이)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출격하여 [24] 한번 싸움으로 이를 평정하니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고, 그 위세는 북쪽 땅에 떨쳤다. 마침내 오환의 무리를 이끌고, 정벌에 복종하게 하니, 변방의 백성들이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뒤이어 선비의 대인 가비능(軻比能)이 다시 여러 북적(北狄)을 부리고 흉노의 옛 땅을 모두 거두어 운중(雲中)‧오원(五原)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요수(遼水)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비의 영역으로 삼았다. 여러 번 요새를 범하고 변방을 약탈하니, 유주(幽州)‧병주(幷州)가 이로부터 고통받았다. 전예(田豫)는 마성(馬城)에서 포위당하였고, 필궤(畢軌)[25]는 형북(陘北)에서 패배하였다. 이에, 청룡(青龍) 년간에[26] 황제는왕웅(王雄)의 (말을) 듣고, 검객을 보내 그((가비능))를 찔러 죽였다. 그 뒤, 무리와 마을은 떨어지고 흩어져 서로 침벌하니, 강자는 멀리 달아나고, 약자는 복종을 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변경은 거의 안정되었고, 한나라 사막 남쪽은 일이 적어졌으며, 비록 때때로 조금 노략질하고 도적질하기는 하였으나, 다시는 서로 선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환·선비는 곧, 옛부터 동호(東胡)라 불리던 바이다. 그 습속과 예전에 있었던 일은 《한기》(漢記)를 편찬한 자가 이미 그것을 기록하고 기재하였다. 그러므로 단지 한말 위초(漢末魏初) 이래의 (것을) 거론하여 사이(四夷)의 바뀐 것을 보충함으로서 말해 둔다.

오환전(烏丸傳)[편집]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오환은 동호이다. 한나라 초, 흉노의 묵돌이 그 나라를 멸하고, 나머지 무리들이 오환산(烏丸山)을 지켰으므로 (그들의) 이름으로 삼았다. 그 습속은 말을 타고 다니며 활쏘기를 잘 하고, 물과 풀을 따라 방목하며 일정하지 않은 거처에서 살았다. 빈약한 갈대 오두막[27]을 집으로 삼아 (입구를) 모두 동향(東向)으로 하였다. 낮에 금수(禽獸)를 사냥하여 고기를 먹고 젖을 마시며, 털과 솜털로 옷을 해 입었다. 젊은이를 귀하게 여기고 늙은이를 천대하였고, 그 성품이 사납고 오만했으며, 노여우면 아비와 형을 죽였으나 끝내 그 어미를 해치지는 아니하였으니, 어미에게는 일가(一家)가 있으나, 아비와 형은 그들의 몸으로서 종자(種子)가 될 뿐이어서, 보복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결투나 침범을 서로 다투는 것을 능히 다스리는 용맹하고 강건한 자를 추대하고 뽑아서 대인(大人)으로 하였고, 읍락은 각기 작은 우두머리를 가지는데, 세습하지는 않는다. 수백에서 수천개의 마을로써 일부(一部)를 이루었고, 대인이 부를 일이 있으면 나무에 새겨 신표(信標)로 삼고 읍락은 이를 전하고 행하였으니, 문자는 없어도 부중(部衆)이 감히 (그 전달받은 바를) 위범(違犯)하지 아니한다. 성씨(姓氏)는 일정한 것이 없고, 대인에 의하여 강건한 자의 이름 글자를 성(姓)으로 삼는다. 대인 이하(以下)는 각자 목축(牧畜)하고 생산(生産)을 다스리며, 부역(賦役)을 돕지는 않는다. 그 결혼은 모두 먼저 (중매 없이) 사통(私通)하여 여자를 빼앗아 가고, 그리고 나서 반년이나 백일 후에 중매인을 파견하고 말·소·양을 보내어 장가드는 예법으로 삼았다. 남편은 아내를 따라 되돌아가는데, (남편은) 처가(妻家) 사람들을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뵙고, 아침에 일어나 모두에게 절하였으나, (자기의) 부모에게는 몸소 절하지 않았다. 처가의 머슴이 되어 이년(二年)을 사역(使役)하면, 처가는 후하게 여자를 시집 보내는데, 거처와 재물이 오로지 처가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그 습속(習俗)은 부인(婦人)의 계책(計策)을 따르나, 전투할 때가 되면 그것을 스스로 결정한다. 부자(父子)와 남녀가 서로 마주보고 쭈그려 앉고, 모든 머리카락을 깎아서, 가볍고 편하게 한다. 부인은 시집갈 때가 되면 머리카락을 기르고 나누어 상투로 하여, 구결(句決)[28]을 붙이고, 금과 푸른 옥으로 꾸미니, 중국에 있는 보요관(步搖冠)[29]과 같다. 아비나 형이 죽으면, 계모를 처로 삼거나 형수를 취한다.[30] 만약 형수를 취할 자가 없으면 자기 아들(로 볼 때), 관계가 밀접한 순서〔親之次〕에 따라 (조카가) 백모나 숙모를 처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절차에 따라 처로 삼은 자가) 죽으면, 그 옛 지아비에게로 돌아간다.[31] 풍속을 (살펴보면,) 조수(鳥獸)가 잉태하고 수유하는 것을 알아차려 사계절로서 때를 맞추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릴 때에는 언제나 뻐꾸기의 울음을 써서 징후(徵候)로 삼았다. 땅은 푸른 기장과 동장(東牆)을 (기르기에) 적합한데, 동장은 쑥과 비슷하고, 열매는 아욱과 같으며, 시월에 이르러 익는다. (그들은) 백주(白酒)를 만들 줄은 알았으나, 누룩은 만들 줄을 몰랐다. 쌀(에 있어서는) 늘 중국에 의존하였다. 대인은 활·화살·안장·굴레를 만들 수 있었고, 쇠를 두드려 병기를 만들었으며, 가죽을 바느질하여 무늬와 수를 놓았고, 모직물을 짠다. 병이 나면 쑥찜을 쓰는 것을 알았고, 또는 돌을 데워서 찜질을 하거나 흙을 데워서 () 위에 엎드렸고, 또는 아프고 병든 곳을 따라, 칼로 맥을 터뜨려 피를 냈고, 또한, 천지산천(天地山川)의 신에게 빌었으나, 침(鍼)과 약은 없었다. 전쟁에서 죽는 것을 귀하게 여기었고, 시신은 염(殮)하였으며, 관(棺)이 존재하였다. 애초에 죽을 때에는 곡(哭)을 하나, 장례를 지낼 때는 곧 노래하고 춤추며 함께 (망자를) 보낸다. 개를 살찌게 길러 이로써, 채색한 노끈으로 목에 걸고 끌어내고, 또한, 죽은 자가 타던 말·옷·기타 일용품·생전의 장신구를 거두어 모두 불태워 이로써 그에게 보낸다. 특히 묶인 개를 거느리는 것은 죽은 자의 신령(神靈)을 호위하고 적산(赤山)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적산은 요동(遼東) 서북쪽 수천리에 있는데, 중국인이 죽음의 혼신(魂神)이 태산(泰山)[32]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장례 치르는 날짜에 이르면, 밤에 친척·친구 무리가 모여 앉아, 끌려온 개와 말을 모두 세워 두고, 혹은 노래하고 곡(哭)하는 자가 그들((개와 말))에게 고기를 던져 주었다. 두 사람에게 주문(呪文)을 입으로 외우게 했고, 죽은 자의 혼신(魂神)이 곧바로 가서 험하고 막힌 곳을 넘게 하였으며, 제멋대로 하는 귀신이 막지 못하도록 보호하여, 그 적산에 다다르도록 하였다. 그런 연후에 개와 말을 죽이고, 옷과 기타 일용품을 불살랐다. 귀신을 공경하고, 하늘과 땅, 해와 달, 별, 산천(山川)에 제사 지냈으며, 또한 돌아가신 대인 중에서 굳센 명성을 가진 자에도 또한 소와 양으로 제사를 지내고서, 제사가 끝나면 모두 이를 불살랐다. 음식(을 먹기에) 앞서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 그들이 맺은 형벌은, 대인의 말을 어기면 사형이고, 도적질을 멈추지 아니하면 사형이다.그들이 서로 죽이면, 모든 마을이 스스로 서로 앙갚음하게 하고, 서로 앙갚음이 그치지 아니하면 나아가, 대인이 이를 정(定)하였다. 죄가 있는 자가 그의 소나 양을 내어 이로써 죽을 목숨을 속죄하면 (형벌을) 멈춘다. 스스로 그의 아비나 형을 죽이는 것은 무죄이다. 만약 도망하거나 배반한 자가 대인에게 사로잡히면, 모든 마을이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모두가 (그로) 하여금 옹광(雍狂)의 땅에 이르도록 쫓아냈다. (옹광) 땅에는 산이 없고, 사막·흐르는 물·초목과 많은 살무사·뱀이 있으며, 정령(丁令)의 서남쪽이자 오손(烏孫)의 동북쪽에 있어서 외지고 빈곤하였다. 그들의 선조가 흉노에게 패배한 뒤로부터 사람들의 무리가 고립되고 약해져 흉노의 신하가 되어 복종하고, 늘 해마다 소·말·양을 날랐는데, 기한이 넘도록 준비되지 않으면 번번이 그들의 처자식을 잡아갔다. 흉노의 일연제(壹衍鞮)[33] 선우(單于) 시대에 이르러, 오환이 강성해 지자 흉노 선우의 무덤을 파헤쳐서 원하건대 묵돌에 의하여 격파된 치욕을 보복하고자 하였다. 일연제 선우가 크게 노하여 기병 이만명을 보내어 오환을 무찔렀다. 대장군 곽광(霍光)이 이를 듣고, 도료장군(度遼將軍) 범명우(范明友)을 보내, 기병 삼만명을 이끌고 요동에서 나와 흉노를 추격하게 하였다. 범명우의 병사가 도달함에 견주어, 흉노는 이미 물러나 가버렸다. 오환이 새롭게 다시 흉노병에게 피격을 받았으므로, 그들이 쇠퇴하고 피폐해짐을 틈타, 결국, 나아가 오환을 무찌르고, 육천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세 명의 우두머리를 붙잡아 귀환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다시 (오환이) 요새를 침범하니, 범명우는 번번이 이를 정벌하고 격파하였다. 왕망(王莽) 말기에 이르러, (오환은) 흉노와 함께 (중국을) 쳐들어왔다. 광무제(光武帝)가 천하를 평정하고,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보내 (마원은) 삼천명의 기병을 이끌고, 오원관(五原關)으로부터 요새를 나가 정벌하였는데 이득이 없었으나, 말 천여필을 죽였다. 오환이 드디어 번성하여, 흉노를 노략질하고 공격하니, 흉노는 천리 (떨어진) 사막 남쪽의 빈 땅으로 옮겼다. 건무(建武) 25년 (서기 49년), 오환의 대인 학단(郝且) 등 구천여명이 무리를 이끌고 궁궐로 와 배알하니, 그 우두머리 팔십여명을 후왕(侯王)[34]에 봉하였고, 요새 안쪽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요동속국(遼東屬國)·요서(遼西)·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광양(廣陽)·상곡(上谷)·대군(代郡)·안문(鴈門)·태원(太原)·삭방(朔方) 여러 군[35] 경계에 줄지어 벌여놓고, 부족 사람들을 불러들여 그들에게 옷과 먹을 것을 주고, 교위(校尉)를 두어 그들을 다스리고 지켰으니, (그들은) 마침내 한(漢)나라의 정탐(偵探)과 방비(防備)가 되어, 흉노와 선비를 공격하였다. 영평(永平)[36] 연간에 이르러, 어양(漁陽)의 오환 대인 흠지분(欽志賁)은 부족 사람들을 거느리고 모반하고, 선비가 되돌아와 노략질하고 해를 끼치자, 요동태수(遼東太守) 제융(祭肜)은 (병사를) 보아 흠지분을 죽이고, 마침내 그들 무리를 패배시켰다. 안제(安帝)[37] 때에 이르러, 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안문(鴈門)의 오환 솔중왕(率衆王) 무하(王無何) 등이 다시 선비·흉노와 합세하여 대군(代郡)·상곡(上谷)·탁군(涿郡)·오원(五原)을 노략질하고 침략하니, 대사농(大司農) 하희(何熈)를 행거기장군(車騎將軍)[38]으로 삼아, 우림(羽林)[39] 오영(五營)의 병사(兵士)들을 다스리고〔左右〕, 변방 칠군(七郡) 여양영(黎陽營)의 병사를 일으켜 〔發緣〕 도합 이만명이 이를 공격하였다. 흉노는 항복하고 선비·오환은 각각 요새 밖으로 돌아갔다. 그뒤, 오환은 점점 다시 친하게 따르니, 그 대인 융말외(戎末廆)에게 벼슬을 내려 도위(都尉)로 삼았다. 순제(順帝) [40] 때에 이르러, 융말외가 왕후(王侯) 돌귀(咄歸)·거연(去延) 등을 거느리고, 오환 교위 경엽(耿曄)을 따라 요새를 나가 선비를 공격한 공(功)이 있으니, 돌아와 모두에게 솔중왕(率衆王)의 벼슬을 내리고, 묶음 비단을 하사하였다.

  한나라 말, 요서(遼西)의 오환 대인 구력거(丘力居)와 무리 오천여 마을, 상곡(上谷)의 오환 대인 난루(難樓)와 무리 구천여 마을은 각기 왕을 칭하고 요동속국(遼東屬國) 오환 대인 소복연(蘇僕延)과 무리 천여 마을은 스스로 초왕(峭王)을 칭하고, 우북평(右北平) 오환 대인 오연(烏延)과 무리 팔백여 마을은 스스로 한로왕(汗魯王)을 칭하고, (이들) 모두는 계책이 있고 용감하며 건장하였다. 중산태수(中山太守) 장순이 배반하여 구력거의 무리 속에 들어가 스스로 미천(장군)(彌天將軍)·안정왕(安定王)이라 부르고 삼군(三郡)의 오환 원수(元帥)가 되어, 청주(青州)·서주(徐州)·유주(幽州)·기주(兾州)의 4개주를 노략질하고,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영제(靈帝)말[41]에, 유우(劉虞)를 유주목(幽州牧)으로 삼고[42], 오랑캐를 모아 장순의 머리를 치니, 북쪽의 주(州)가 안정되었다. 그 뒤 구력거가 죽자, 아들 누반(樓班)의 나이가 어리고 종자(從子) 답돈(蹋頓)이 무력과 지략을 가졌으니 대신하여 즉위하여 삼왕부(三王部)를 거느리고 가지니, 무리들이 모두 그의 교령(教令)을 따랐다. 원소(袁紹)가 공손찬(을 상대로) 연전하였으나[43] 결판이 나지 않았는데, 답돈이 보낸 사신이 원소를 뵙고 화친(和親)을 구하니,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공격하여, 이를 깨뜨렸다. 원소는 거짓으로 꾸며 답돈(蹋頓)·초왕(峭王)·한로왕(汗魯王)에게 인수(印綬)를 하사(下賜)하여, 모두를 선우(單于)로 삼았다.

  영웅기》(英雄記)에 이르기를, 원소는 사신을 보내, 곧 오환의 삼왕(三王)에게 선우의 벼슬을 내리고, 모두에게 안거(安車)·화개(華蓋)·우모(羽旄)[44]·황옥(黃屋)·좌독기(坐纛旗) 〔左纛〕를 (내렸다.) 版文曰:「使持節大將軍督幽、青、并領兾州牧阮鄉侯紹,承制詔遼東屬國率衆王頒下、烏丸遼西率衆王蹋頓、右北平率衆王汗盧維:乃祖慕義遷善,款塞內附,北捍玁狁,東拒濊貊,世守北陲,為百姓保鄣,雖時侵犯王畧,命將徂征厥罪,率不旋時,悔愆變改,方之外夷,最又聦慧者也。始有千夫長、百夫長以相統領,用能悉乃心,克有勳力於國家,稍受王侯之命。自我王室多故,公孫瓚作難,殘夷厥土之君,以侮天慢主,是以四海之內,並執干戈以衞社稷。三王奮氣裔土,忿姦憂國,控弦與漢兵為表裏,誠甚忠孝,朝所嘉焉。然而虎兕長蛇,相隨塞路,王官爵命,否而無聞。夫有勳不賞,俾勤者怠。今遣行謁者楊林,齎單于璽綬車服,以對爾勞。其各綏靜部落,教以謹慎,無使作凶作慝。世復爾祀位,長為百蠻長。厥有咎有不臧者,泯於爾祿,而喪於乃庸,可不勉乎!烏桓單于都護部衆,左右單于受其節度,他如故事。」

  뒤에 누반(樓班)이 커서 초왕(峭王)은 그 부중(部衆)을 거느리고 누반을 선우로서, 답돈을 왕으로서 받들었다. 연후에 답돈은 많은 계책을 꾀하였다. 광양(廣陽) 사람 염유(閻柔)는 어려서 오환·선비 속에 숨어 있었으니, 그 종족이 믿게 되는 바가 되었고, 염유는 선비의 무리를 의지하여 오환 교위(烏桓校尉) 형거(邢舉)를 죽이고, 그를 대신하였다. ,紹因寵慰以安北邊。 그 뒤, 원상(袁尚)이 패하여 답돈에게로 달아나,[45] 그 세력을 믿고, 기주(兾州)를 다시 도모하였다. 때마침, 태조(太祖)는 하북(河北)을 평정하였고, 염유가 선비·오환을 이끌고 귀부(歸附)하니, 마침내 이로 인하여 염유를 교위(校尉)로 삼고, 그대로 한나라 사신의 부절(符節)을 지니고, 예전처럼 광녕(廣寗)을 다스렸다. 건안(建安) 11년 ((206년))[46], 태조가 스스로 유성(柳城)에서 답돈을 정벌하여, 군사를 감추고 길을 속였으나,[47] 100여리도 미치지 않아, 오랑캐는 곧 깨달았다. 원상은 답돈과 무리를 이끌고 범성(凡城)에서 응전했고, 병마(兵馬)는 매우 번성하였다. 태조가 높은 곳에 올라 오랑캐 진영을 바라보니, 유성(柳城)의 군 〔柳軍〕이 아직 다가오지 못하였으나, 그 작은 움직임을 보고는 그 무리를 격파하였고, 진영을 공격하여 답돈의 머리를 쳐내니, 사자(死者)는 들판에 버려졌다. 속부환(速附丸)·누반(樓班)·오연(烏延)등이 요동으로 달아났으나, 요동(태수가) 그들 모두 참수하여, 그 머리를 (조조에게) 전송(傳送)하였다. 그 나머지 남은 자들은 흩어져 달아나고 모두 항복하였다. 유주(幽州)·병주(并州)의 염유(閻柔)가 다스리는 오환의 만여 마을이 모두 옮겨 그 족속은 중국에 살았고, 帥從其侯王大人種衆與征伐。그리하여 삼군의 오환은 천하의 이름난 기병이 되었다. 위략》(魏畧)에 이르기를, 경초(景初) 원년((237년)) 가을,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여러 군사를 이끌고 요동을 토벌하였다. 우북평(右北平)의 오환선우(烏丸單于) 구루돈(寇婁敦)·요서(遼西)의 오환도독(烏丸都督) 솔중왕(率衆王) 호류섭(護留葉)은 앞서 원상(袁尚)을 따라 요서로 도망쳤었는데, 관구검의 군사가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 무리 오천여 명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구루돈이 아우 아라반(阿羅槃) 등을 보내어 예궐(詣闕)하고 조공(朝貢)하니, 거수(渠帥) 30여 명을 왕에 봉하고, 많은 말·비단·벼슬을 각기 차등을 두고 하사하였다.

선비전(鮮卑傳)[편집]

  선비(鮮卑)는위서에 이르기를: 선비 역시 동호의 나머지 무리로서, 따로 선비산을 지켰으니, 이로 인해 선비라 불리었다. 그 언어와 습속은 오환과 같다. 그 땅은 동으로는 요수(遼水)에 접하고, 서로는 서성(西城)에 이른다. 항상 늦은 봄에 크게 모이는데, 작락수(作樂水)에 가서 여자를 시집보내고 아내를 맞고, 머리를 깎고 마시며 잔치한다. 其獸異於中國者,野馬、羱羊、端牛。端牛角爲弓,世謂之角端者也。又有貂、豽、鼲子,皮毛柔蠕,故天下以爲名裘。鮮卑自爲冒頓所破,遠竄遼東塞外不與餘國爭衡,未有名通於漢,而自與烏丸相接。至光武時,南北單于更相攻伐,匈奴損耗,而鮮卑遂盛。建武三十年,鮮卑大人於仇賁率種人詣闕朝貢,封於仇賁爲王。永平中,祭肜爲遼東太守,誘賂鮮卑,使斬叛烏丸欽志賁等首,於是鮮卑自敦煌、酒泉以東邑落大人,皆詣遼東受賞賜,青、徐二人州給錢,歲二億七千萬以爲常。和帝時,鮮卑大都護校尉廆帥部衆從烏丸校尉任尚擊叛者,封校尉廆爲率衆王。殤帝延平中,鮮卑乃東入塞,殺漁陽太守張顯。安帝時,鮮卑大人燕荔陽入朝,漢賜鮮卑王印綬,赤車參駕,止烏丸校尉所治甯下。通胡市,築南北兩部質宮,受邑落質者二十部。是後或反或降,或與匈奴、烏丸相攻擊。安帝末,發緣邊步騎二萬餘人,屯列沖要。後鮮卑八九千騎穿代郡及馬城塞入害長吏,漢遣度遼將軍鄧遵、中郎將馬續出塞追破之。鮮卑大人烏倫、其至鞬等七千餘人詣遵降,封烏倫爲王,其至鞬爲侯,賜采帛。遵去後,其至鞬復反,圍烏丸校尉於馬城,度遼將軍耿夔及幽州刺史救解之。其至鞬遂盛,控弦數萬騎,數道入塞,趣五原(寧貊)〔曼栢〕,攻匈奴南單于,殺左奧鞬日逐王。順帝時,復入塞,殺代郡太守。漢遣黎陽營兵屯中山,緣邊郡兵屯塞下,調五營弩帥令教戰射,南單于將步騎萬餘人助漢擊卻之。後烏丸校尉耿曄將率衆王出塞擊鮮卑,多斬首虜,於是鮮卑三萬餘落,詣遼東降。匈奴及北單于遁逃後,餘種十餘萬落,詣遼東雜處,皆自號鮮卑兵。投鹿侯從匈奴軍三年,其妻在家,有子。投鹿侯歸,怪欲殺之。妻言:「嘗晝行聞雷震,仰天視而電入其口,因吞之,遂妊身,十月而產,此子必有奇異,且長之。」投鹿侯固不信。妻乃語家,令收養焉,號檀石槐,長大勇健,智略絕衆。年十四五,異部大人卜賁邑鈔取其外家牛羊,檀石槐策騎追擊,所向無前,悉還得所亡。由是部落畏服,施法禁,曲直,莫敢犯者,遂推以爲大人。檀石槐既立,乃爲庭於高柳北三百餘-{里}-彈汗山啜仇水上,東西部大人皆歸焉。兵馬甚盛,南鈔漢邊,北拒丁令,東卻夫餘,西擊烏孫,盡據匈奴故地,東西萬二千餘-{里}-,南北七千餘-{里}-,罔羅山川、水澤、鹽池甚廣。漢患之,桓帝時使匈奴中郎將張奐征之,不克。乃更遣使者齎印綬,即封檀石槐爲王,欲與和親。檀石槐拒不肯受,寇鈔滋甚。乃分其地爲中東西三部。從右北平以東至遼,(遼)接夫餘、貊爲東部,二十餘邑,其大人曰彌加、闕機、素利、槐頭。從右北平以西至上穀爲中部,十餘邑,其大人曰柯最、闕居、慕容等,爲大帥。從上谷以西至敦煌,西接烏孫爲西部,二十餘邑,其大人曰置鞬落羅、日律推演、宴荔遊等,皆爲大帥,而制屬檀石槐。至靈帝時,大鈔略幽、並二州。緣邊諸郡,無歲不被其毒。(嘉)平六年,遣護烏丸校尉夏育,破鮮卑中郎將田晏,匈奴中郎將臧旻與南單于出雁門塞,三道並進,徑二千餘-{里}-征之。檀石槐帥部衆逆擊,旻等敗走,兵馬還者什一而己。鮮卑衆日多,田畜射獵,不足給食。後檀石槐乃案行烏侯秦水,廣袤數百里,停不流,中有魚而不能得。聞汗人善捕魚,於是檀石槐東擊汗國,得千餘家,徙置烏侯秦水上,使捕魚以助糧。至於今,烏侯秦水上有汗人數百戶。檀石槐年四十五死,子和連代立。和連材力不及父,而貪淫,斷法不平,衆叛者半。靈帝末年數爲寇鈔,攻北地,北地庶人善弩射者射中和連,和連即死。其子騫曼小,兄子魁頭代立。魁頭既立後,騫曼長大,與魁頭爭國,衆遂離散。魁頭死,弟步度根代立。自檀石槐死後,諸大人遂世相襲也。 보도근(步度根)이 즉위한 후 점점 쇠약해져 중형(中兄) 부라한(扶羅韓)도 따로 수만 명의 무리를 이루고 대인(大人)이 되었다. 건안(建安) 중에 태조(太祖)가 유주(幽州)를 평정하였는데, 보도근과 가비능(軻比能) 등이 오환의 교위(校尉) 염유(閻柔)를 통하여 공물을 바쳤다. 후에 대군(代郡) 오환의 능신저(能臣氐) 등이 모반하여 부라한에 복속되기를 구했다. 부라한은 만여 기(騎)를 거느리고 이를 맞이하였다. 상건(桑乾)에 이르렀을 때에 그들이 의논하기를, 부라한 무리의 위금(威禁)이 느슨하니 큰일을 이루어내지 못할 것이다 하여, 다시 사람을 보내 가비능을 불렀다. 비능이 즉시 만여 기를 거느리고 도착하자 함께 맹서를 하였다. 비능은 회의하는 곳에서 부라한을 죽이고, 부라한의 아들 설귀니와 그 무리를 다 복속시켰다. 비능 스스로가 귀니의 아버지를 죽였으므로, 특히 그를 좋게 대우해주었다. 보도근은 이를 이유로 비능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

  文帝踐阼,田豫爲烏丸校尉,持節並護鮮卑,屯昌平。步度根遣使獻馬,帝拜爲王。後數與軻比能更相攻擊,步度根部衆稍寡弱,將其衆萬餘落保太原、雁門郡。步度根乃使人招呼泄歸泥曰:「汝父爲比能所殺,不念報仇,反屬怨家。今雖厚待汝,是欲殺汝計也。不如還我,我與汝是骨肉至親,豈與仇等?」由是歸泥將其部落逃歸步度根,比能追之弗及。至黃初五年,步度根詣闕貢獻,厚加賞賜,是後一心守邊,不爲寇害,而軻比能衆遂強盛。明帝即位,務欲綏和戎狄,以息征伐,羈縻兩部而已。至青龍元年,比能誘步度根深結和親,於是步度根將泄歸泥及部衆悉保比能,寇鈔並州,殺略吏民。帝遣驍騎將軍秦朗征之,歸泥叛比能,將其部衆降,拜歸義王,賜幢麾、曲蓋、鼓吹,居並州如故。步度根爲比能所殺。

가비능전(軻比能傳)[편집]

  軻比能本小種鮮卑,以勇健,斷法平端,不貪財物,衆推以爲大人。部落近塞,自袁紹據河北,中國人多亡叛歸之,教作兵器鎧楯,頗學文字。故其勒-{御}-部衆,擬則中國,出入弋獵,建立旌麾,以鼓節爲進退。建安中,因閻柔上貢獻。太祖西征關中,田銀反河間,比能將三千餘騎隨柔擊破銀。後代郡烏丸反,比能復助爲寇害,太祖以鄢陵侯彰爲驍騎將軍,北征,大破之。比能走出塞,後復通貢獻。延康初,比能遣使獻馬,文帝亦立比能爲附義王。黃初二年,比能出諸魏人在鮮卑者五百餘家,還居代郡。明年,比能帥部落大人小子代郡烏丸修武盧等三千餘騎,驅牛馬七萬餘口交市,遣魏人千餘家居上穀。後與東部鮮卑大人素利及步度根三部爭鬥,更相攻擊。田豫和合,使不得相侵。五年,比能復擊素利,豫帥輕騎徑進掎其後。比能使別小帥瑣奴拒豫,豫進討,破走之,由是懷貳。乃與輔國將軍鮮于輔書曰:「夷狄不識文字,故校尉閻柔保我於天子。我與素利爲讎,往年攻擊之,而田校尉助素利。我臨陳使瑣奴往,聞使君來,即便引軍退。步度根數數鈔盜,又殺我弟,而誣我以鈔盜。我夷狄雖不知禮義,兄弟子孫受天子印綬,牛馬尚知美水草,況我有人心邪!將軍當保明我於天子。」輔得書以聞,帝復使豫招納安慰。比能衆遂強盛,控弦十餘萬騎。每鈔略得財物,均平分付,一決目前,終無所私,故得衆死力,餘部大人皆敬憚之,然猶未能及檀石槐也。

  太和二年,豫遣譯夏舍詣比能女婿郁築鞬部,舍爲鞬所殺。其秋,豫將西部鮮卑蒲頭、泄歸泥出塞討鬱築鞬,大破之。還至馬城,比能自將三萬騎圍豫七日。上谷太守閻志,柔之弟也,素爲鮮卑所信。志往解喻,即解圍去。後幽州刺史王雄並領校尉,撫以恩信。比能數款塞,詣州奉貢獻。至青龍元年,比能誘納步度根,使叛並州,與結和親,自勒萬騎迎其累重於陘北。並州刺史畢軌遣將軍蘇尚、董弼等擊之,比能遣子將騎與尚等會戰於樓煩,臨陳害尚、弼。至三年中,雄遣勇士韓龍刺殺比能,更立其弟。

  素利、彌加、厥機皆爲大人,在遼西、右北平、漁陽塞外,道遠初不爲邊患,然其種衆多於比能。建安中,因閻柔上貢獻,通市,太祖皆表寵以爲王。厥機死,又立其子沙末汗爲親漢王。延康初,又各遣使獻馬。文帝立素利、彌加爲歸義王。素利與比能更相攻擊。太和二年,素利死。子小,以弟成律歸爲王,代攝其衆。


동이전(東夷傳)[편집]

  《상서》에서 칭하기를 ‘동쪽으로는 바다에 다다랐고 서쪽으로는 사막에 이르렀다’[48]고 하였으니, 구복의 제도[49]〔내에 있는 것은〕 가히 말할 수 있으나, 변방의 밖은 통역을 거쳐야 이르게 되니, 발자국도 수레 자국도 닿지 않는 곳에는, 그 나라의 풍속과 다른 것을 아는 자가 없다. (虞) 때부터 (周) 때에 이르기까지 서융은 백환(白環)의 공물이 있었고, 동이는 숙신(肅愼)의 공(肅慎)의 공물이 있었는데, 모두 오랜 세월에 걸쳐서야 이르니, 그 아득히 멂도 그와 같았다. 한(漢) 때에 이르러 장막(張騫)을 서역에 파견하여, 황하〔河〕의 근원까지 다다르고, 여러 나라를 지나니, 마침내 도호(都護)를 두어 영토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 후로 서역의 일들이 잘 보존되고 따라서 사관(史官)이 상세한 이야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위(魏)가 일어났을 때, 서역은 비록 전부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그 큰 나라인 구자(龜茲), 우진(于寘), 강거(康居), 오손(烏孫), 소륵(疏勒), 월씨(月氏), 선선(鄯善), 차사(車師)가 속하였으니, 조공을 바치지 않던 때가 없고 한나라가 옛날에 하던 것과 같이 다스렸다. 공선연(公孫淵)이 아버지 할아버지 삼대로부터 요동(遼東)에 있었는데, 천자(天子)가 그 지역과 단절하고 해외의 일을 맡겨버렸다. 이에 마침내 동이와 완전히 단절되어 여러 왕조들이 이들과 서로 통하지 못하였다. 경초(景初) 중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 연(淵)을 쳐서 군대를 바다에 수장시켰고,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의 군(郡)을 거두어 들이니, 후에 바다가 고요해지매 동이가 굴하여 복속하였다. 그 후 고구려가 모반하자 다시 군사를 보내어 이를 치고, 먼 곳을 끝까지 쫓아갔는데, 오환(烏丸)과 골도(骨都)를 넘어 옥저(沃沮)를 지나 숙신(肅慎)의 땅까지 밟으니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였다. 나이든 노인이 말하기를 얼굴이 다른 이가 있어, 해가 뜨는 곳 가까이에 있다 하였으니, 이에 두루 여러 나라들을 보고 그 법과 습속을 기록하였는데, 크고 작은 구별이 있고, 각각 이름이 있으니, 가히 상세히 기록하는 것이다. 비록 이적(夷狄)의 나라이나, 조두(俎豆)와 같은 그릇이 있다. 중국이 예(禮)를 잃었으니 사이(四夷)로부터 구한 것을 차라리 믿는다. 이에 그 나라들에 관해 써서 그 같고 다름을 열거하고, 이로써 이전의 역사가 갖추지 못한 것에 더하고자 하는 것이다.

부여전(夫餘傳)[편집]

  부여만리장성 이북의 현도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으로 고구려, 동으로 읍루, 서로 선비와 접하며, 북으로 약수가 있다. 둘레가 가히 이천 리다. 가구는 팔만이다. 그 주민들은 토착민이다. 궁실과 창고와 감옥이 있다. 산, 언덕, 큰 못이 많다. 동이(東夷) 땅 중에서 가장 평평하고 탁 트였다. 토지가 오곡(五穀)에 적합하나, 오과(五果)는 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거칠고 (덩치가) 크다. 성품은 강하고 용감하며 조심스럽고 중후하다. 약탈하지도 노략질하지도 않는다. 나라에는 임금이 있다. 모두 여섯 종류의 짐승 이름으로 벼슬아치 이름을 삼는다.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豬加)‧구가(狗加)‧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가 있다. 읍락[50]에는 우두머리가 있다. 신분이 낮은 백성들은 모두 머슴이라고 부른다. 제가(諸加)들은 각자 사출도(四出道)를 맡는다. 큰 구역〔道大〕을 맡은 이는 수천 집을 다스리고 작은 구역을 맡은 이는 수백 집을 다스린다. 음식을 먹을 때는 모두 제기(祭器)를 사용한다. 모이면 술잔에 절하고 술잔을 씻고 서로 절하고 사양하면서 (술잔을) 들었다 놨다 한다. 은(殷)나라 정월달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데 나라 가운데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며칠 동안 계속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춘다. 이를 영고(迎鼓)라 부른다. 이때는 벌 내리는 것을 그치고 죄수들〔囚徒〕을 풀어준다. 그 나라에서는 흰 옷을 숭상한다. 흰 베로 넓은 소매, 도포, 바지를 만들고, 가죽 신발을 신는다. 나라 밖으로 나가면 비단 옷과 비단 방석을 높이 친다. 지체 높은 사람들〔大人〕은 여우, 삵, 흰원숭이, 검은 담비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덧대 입고, 금과 은으로 모자를 꾸민다. 통역자가 말을 전할 때는 모두 무릎을 꿇고 손으로 땅을 짚고 조용히 말한다. 형벌을 집행할 때는 엄격하고 신속하게 한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집안 사람들은 잡아들여 노비로 만든다. 물건을 훔치면 하나에 대해 열두 배로 갚게 한다. 음탕한 남녀와 시샘하는 여자는 모두 죽인다. 시샘하는 것을 특히 싫어하여 (시샘하는 여자가) 이미 죽었어도 나라 남쪽의 산 위에 송장을 버리고 썩도록 내버려둔다. 여자 집에서 (송장을) 거두려 하면 소와 말을 가져가야 송장을 내준다. 형이 죽으면 (동생은)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이는) 흉노와 같은 풍속이다. 그 나라는 가축〔牲〕을 잘 기른다. 훌륭한 말·붉은 옥·담비·원숭이·영롱한 구슬이 난다. 구슬이 큰 것은 멧대추 만하다. 무기로는 활·화살·칼·창이 있다.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를 갖추고 있다. 그 나라의 늙은이들은 자신들을 "옛날에 도망친 사람"이라고 일컫는다. 성(城)과 목책〔柵〕은 모두 둥글게 만든다. (생김새가) 감옥과 흡사하다. 길을 갈 때는 밤낮으로 늙은이, 젊은이 구별없이 모두 노래 부르니 하루종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싸움〔軍事〕이 있을 때도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소를 잡아 발굽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져 있으면 나쁜것으로 여기고 발굽이 붙어 있으면 좋은 것으로 여긴다. 적이 있거든 뭇 우두머리들〔諸加〕은 자진해서 싸우러 간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모두 양식을 짊어지고 가서 병사들을 먹인다. 사람이 죽으면 여름철에는 모두 얼음을 쓴다. 사람을 죽여 순장(徇葬)하는데 많게는 백여 명에 이른다. 장례〔葬〕를 성대히 치를 때는 관(棺)을 쓰지 않고 덧널무덤〔槨〕을 쓴다. 위략(魏略)에서 이르기를, 그 나라 풍속에 다섯 달 동안 〔주검을 묻지 않고〕 상(喪)을 멈춘다. (이 기간이) 길면 길수록 훌륭하다 여긴다. 죽은이를 제사 지낼 때는 (음식으로) 날 것도 쓰고 익힌 것도 쓴다. 상주(喪主)는 상(喪)을 서두르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독촉한다. 늘 밀고 당기며 다투는데 이를 예의〔節〕로 여긴다. 상(喪)을 치를때 남녀 모두 순백(純白)의 옷을 입는다. 여자들은 베로 짠 얼굴 가리개를 한다. 가락지와 노리개는 버린다. 대체로 중국(의 풍속)과 서로 비슷하다.

  부여는 본래 현도군[51]에 속한다. 한말(漢末), 공손탁[52]이 해동에서 세력을 키워서 외이(外夷)를 위엄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53]는 (소속을) 바꾸어 요동군[54]에 복속했다. 이 때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여 공손탁은 부여가 이들 두 나라 사이에 끼여 있음을 보고 왕실의 딸을 위구태 왕에게 시집보내었다. 위구태왕이 죽자, 간위거[55]가 왕이 되었다. 간위거는 적자가 없고, 서자인 마여[56]가 있었다. 위거가 죽자 제가(諸加)들이 함께 마여를 왕으로 세웠다. 우가(牛加)[57]의 형의 아들 이름도 위거(位居)인데, 대사(大使)가 되어서 재물을 아끼지 않고 잘 베푸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따랐고 해마다 (위나라)[58] 수도 (낙양)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정시(始中)[59] 년간에 유주자사인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면서 현도 태수 왕기를 부여에 보냈고, 위거는 견사를 보내어 교외에서 (왕기를) 맞게 하고, 군량을 보내었다. (위거의)[60] 계부인 우가가 딴 마음을 품자, 위거는 계부 부자 (즉, 우가와 위거)를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몰수하여 사신을 보내어 재산 목록을 만들어 관청에 보내었다. 옛 부여의 풍속에 장마와 가뭄이 연이어 오곡이 익지 않을 때 그때마다 왕에게 허물을 돌려서 혹은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혹은 ‘왕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하였다. 마여가 죽고, 그의 아들 의려(依慮)[61]가 여섯살로 왕이 되었다. 한 나라 때, 부여왕 장례에는 옥갑(玉匣)을 사용하였는데, 상시 현토군 부근에 예비해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곧 헤아려 취하고 장례에 사용하였다. 공손연[62]이 형벌을 받아 죽었어도, 현토군의 창고에는 옥갑 일구(一具)가 남아 있었다.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으로 만든 벽(璧)·규·찬과 같이 수대에 걸쳐 전해 내려와 보물로 여겨지는 것이 있는데, 노인들이 말씀하시기를, 선대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라 하였다. 위략에 이르기를, 그 나라는 국력이 강하여 선대부터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 인장의 문구에 말하기를 ‘예왕의 인장’이라 하고, 나라에는 ‘예성’이라는 옛 성이 있으니, 생각건대 본래 예맥의 땅이기 때문이다. 부여가 그 중에 왕이므로, 스스로를 ‘망명한 자’라 일컫는 것은 아마도 그래서인 것 같다. 위략에 이르기를, 옛 기록이 또 이렇게 말한다. 일찍이, 북쪽에 고리[63]의 나라가 있었다. 그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자, 왕은 그를 죽이려 하였다. 시녀가 말하기를, “달걀과 같은 기운이 내려와 제가 아이를 밴 것 같사옵니다.” 하였다. 뒤에 아이를 낳자, 왕이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가 입으로 입김을 불어주었다. 마굿간으로 옮기자 말이 입김을 불어넣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천자(天子)가 아닐지 괴이하게 여기고는, 이에 그 어미에게 거두어 그를 기르게 명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불렀다. 언제나 말을 기르게 명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그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웠기에 그를 죽이려 하였다.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시엄수(施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가 되어, 동명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이내 흩어졌으므로 쫓던 병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동명이 이로 인하여 부여(夫餘)의 땅을 도읍으로 삼아 왕이 되었다.[64]

고구려전(高句麗傳)[편집]

  고구려는 요동(遼東) 동쪽 천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조선·예맥과, 동쪽으로는 옥저와, 북쪽으로는 부여와 접하였다. 환도(丸都)의 아래에 도읍하였고, 사방은 가히 이천 리(里)이며 삼만 호(戶)가 있다.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은데, 벌판이나 호수는 없다. 산골짜기를 따라 거주하며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은 없고, 비록 힘써서 농사를 짓지만 구복(口腹)을 채우기에는 부족하다. 그 풍속은 먹을 것을 절약하고, 집을 관리하기를 즐겨, 사는 곳의 좌우에 큰 방을 세우고, 귀신에게 제사지내며 또한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을 기린다. 그 사람들의 성품이 흉하고 급하여, 훔치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그 나라에 왕이 있으며, 그 관직에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가(古雛加), 주부(主簿), 우태승(優台丞), 사자(使者), 조의선인(皁衣先人)이 있으니, 그 높고 낮음에 등급이 각각 있다. 동이의 오랜 말에 부여의 별종이라 하였으며, 언어는 여럿이 있는데 많은 것이 부여와 같다. 그 기질과 의복에는 다름이 있다. 본래 다섯 종족으로 연노부(涓奴部), 절노부(絕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가 있었다. 본래 연노부가 왕을 하였으나 점점 미약해져 지금은 계루부가 대대로 왕을 한다. 한나라 때 고취(鼓吹)하는 기인(技人)을 하사하고 항상 현도군(玄菟郡)이 조복(朝服) 의책(衣幘)을 받았으니, 고구려를 우두머리로 하여 그 이름을 기록했다. 후에 점점 교만 방자해져 군에 와서 조아리지 않고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쌓으니, 조복 의책을 그 가운데 두면 해마다 와서 이를 가져갔다. 지금은 오랑캐〔胡〕조차 그 성을 책구루(幘溝漊)라고 부른다. 구루(溝漊)는 구려가 성을 이르는 말이다. 이곳에 관리를 두는데, 대로를 두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를 두면 대로를 두지 않았다. 왕의 종족(宗族)은, 그 대가(大加)를 모두 고추가(古雛加)로 칭했다. 연노부는 본래 나라의 우두머리인데, 지금은 비록 왕을 하지 않아도, 적통(適統)의 대인(大人)은 고추가를 칭할 수 있고, 종묘를 세워 영성과 사직을 기릴 수 있다. 절노부는 세세토록 왕과 혼인하여 고추(古雛)의 이름을 얻었다. 여러 대가들도 스스로 사자, 조의선인을 두고 그 이름을 모두 왕에게 알리는데, 경(卿), 대부(大夫)의 가신(家臣)과 같이, 회동에 모였을 때 왕가의 사자, 조의선인과 같은 열에 들지는 못한다. 그 나라의 대가(大家)는 농사를 짓지 않으며, 앉아서 먹기만 하는 자가 만여 명으로, 아래 백성들이 멀리서 쌀, 양식, 생선, 소금을 들고 와서 공급해준다. 그 나라의 백성은 가무(歌舞)를 즐기며, 나라의 읍락들이 어둔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 서로 노래하며 논다. 큰 창고는 없으며, 집집마다 제각각 작은 창고가 있어, 이를 부경(桴京)이라 부른다. 그 사람들은 스스로 깨끗이 하며 술 빚기를 좋아한다. 무릎 꿇고 절할 때 한쪽 다리를 뻗는데 부여와는 다르며, 길을 갈 때는 모두 달린다. 시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이 나라의 큰 모임으로, 이름하여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 공적인 모임에서는, 의복을 모두 금수(錦繡)로 하고 금은으로 스스로를 장식한다. 대가(大加)와 주부(主簿)는 머리에 두건을 쓰는데, 남은 부분이 없는 책(幘)과 같다. 그 소가(小加)들은 절풍(折風)을 쓰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어, 이름을 수혈(隧穴)이라 하는데, 시월의 나라의 큰 모임에서, 수신(隧神)이 돌아옴을 맞이하고 나라의 동쪽에서 이에 제사지내는데, 나무를 쌓아 수신의 자리를 만들어 둔다. 감옥은 없으며, 죄가 있으면 여러 가(加)가 의논하여 이를 죽이고 처자(妻子)를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그 혼인하는 풍속은, 말로 미리 정하여 두고, 여자 집의 큰 방 뒤에 작은 방을 짓는데, 이름을 서옥(婿屋)이라 한다. 사위가 저녁에 여자 집의 문 밖에 이르러 이름을 밝히고 무릎꿇고 절하며 여자와 하룻밤 자기를 청하는데, 이를 세 번 다시한다. 여자의 부모가 이를 듣고 작은 방에서 잘 수 있게 하면, 곁에 돈과 비단을 준다. 자식을 낳아 장성하게 되면, 이내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 풍속은 음란하다. 남녀가 결혼만 하면 바로 장례에 쓸 옷을 조금씩 짓는다. 장사는 후하게 치르는데, 금은과 재물을 모두 죽을 때 함께 보내며, 돌을 쌓아 봉하고 나란히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그 말은 모두 작은데, 산을 오르기에 편하다. 나라의 사람들이 기력이 있고 싸우기를 배우니, 옥저, 동예를 모두 복속시켰다. 또 소수맥(小水貊)도 속하였다. 구려가 나라를 만들 때 큰 물에 의지하여 살았는데, 서안평현(西安平縣) 북쪽에 작은 물이 있으니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이 작은 물〔小水〕에 의지해 나라를 세웠으니, 이에 이름을 소수맥(小水貊)이라 하였는데, 좋은 활이 나오니 소위 맥궁(貊弓)이라 한다.

  왕망(王莽)[65] (재위) 초기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변방을 넘어가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죽는 바가 되었다. 주군현(州郡縣)이 고구려의 후(侯) 도(騊)에게 허물을 덮어 씌우자, 엄우(嚴尤)가 아뢰기를, “맥인(貊人)이 법을 어기었으나, (그러한) 죄는 도(騊)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장차 (도를) 안심시키고 위무(慰撫)함이 마땅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씌웠다가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망(莽)이 이를 듣지 않고 우(尤)에게 그들을 치라고 하였다. 우는 구려후(句麗侯) 도(騊)를 꾀어내어 기다리다가 그의 목을 베고, 그 목을 장안(長安)으로 보내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여 천하에 포고하기를 고구려(高句麗)를 하구려(下句麗)라 다시 이름하게 하였다. 이 때에 후국(侯國)이 되었는데, 한(漢) 광무제(光武帝) 8년 고구려 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매 보니 이미 왕(王)을 칭하고 있었다.[66]

  상제(殤)와 안제(安) 대 사이에 이르러 구려 왕 궁(宮)이 자주 요동(遼東)을 노략질하니 다시 현도(玄菟)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 태수(太守) 채풍(蔡風)과 현도 태수 요광(姚光)은 궁이 두 군에 해가 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였다. 궁이 거짓으로 강화를 청하자 두 군은 진격하지 않았다. 궁이 비밀스레 군대를 보내어 현도를 공격하니, 후성(候城)을 불태우고 요수(遼隧)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였다. 후에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니, 채풍이 경솔히 군사를 이끌고 이를 토벌하려 쫓다가 군대가 패하여 죽었다.

  궁이 죽자 아들 백고(伯固)가 즉위하였다. 순제(順), 환제(桓) 대 사이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고 신안(新安)·거향(居鄉)을 노략질하였고, 또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도중에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하여 사로잡았다.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에 현도 태수 경림(耿臨)이 그들을 토벌하여 수백 급의 머리를 베고 사로잡으니,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가평(嘉平) 중에 백고가 현도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공손도(公孫度)의 세력이 해동(海東)에 있을 때 백고가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어 공손도를 도와 부산(富山)의 도적 떼를 격파하였다.

  백고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으니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는 선대의 덕망을 닮지 못하였으니 곧 나라의 사람들이 함께 이이모를 왕으로 세웠다. 백고 때부터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고 또 망명한 호(胡) 오백 여 가족을 받아들였다. 건안(建安) 중에 공손강(公孫康)이 군사를 내어 그들을 치니, 그 나라를 파괴하고 읍락들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임에도 왕에 즉위하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고 연노가(涓奴加)와 함께 각각 하호(下戶) 삼만 여 명을 거느리고 강(康)에게 나아와서 투항하였고, 돌아와서는 비류수(沸流水)에서 살게 되었다. 항복했던 호(胡) 또한 이이모에 모반하자 이이모는 다시 새로운 나라를 만드니, 바로 오늘날 있는 그것이다. 발기는 마침내 요동으로 갔으나 구려국에 남은 아들이 있으니, 바로 지금의 고추가(古雛加) 교위거(駮位居)이다. 그 후 다시 현도를 치니, 현도와 요동이 힘을 합하여 이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이모가 아들이 없자 관노부(灌奴部) 여자와 간통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위궁(位宮)이라 하였다. 이이모가 죽자 그가 왕으로 즉위하니, 바로 지금의 구려 왕 궁(宮)이다. 그 증조(曾祖)의 이름이 궁(宮)이었는데 태어나서부터 눈을 뜨고 볼 수 있으니 나라 사람들이 이를 악하게 여겼고, 그가 장성해지자 과연 흉학(凶虐)하여 자주 노략질하다가 나라가 잔혹히 파괴된 바 있다. 지금의 왕도 태어나자마자 눈을 뜨고 사람을 볼 수 있었는데, 구려가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 부르니, 그가 조상과 닮았다 하여 위궁(位宮)이라 이름한 것이다. 위궁은 힘이 잇고 용맹하여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활을 잘 쏘았다. 경초(景初) 2년 태위(太尉) 사마왕(司馬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니 궁이 주부(主簿) 대가(大加)를 보내어 수천 명을 이끌고 군대를 도왔다. 정시(正始) 3년 궁이 서안평을 노략질하였고, 그 5년에는 유주(幽州) 자사(刺吏) 관검구(毌丘儉)에게 격파당했다. 그 이야기는 검전(儉傳)에 써있다.

동옥저전(東沃沮傳)[편집]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麗)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으로 큰 바다를 접하였다. 그 지형이 동북으로는 좁고, 서남으로는 길어서 천 리나 된다. 북쪽으로는 읍루(挹婁)·부여(夫餘)와, 남쪽으로는 예맥(濊貊)과 접한다. 호(戶)는 오천이고, 대군(大君)이나 왕은 없으며 대대로 읍락마다 장수(長帥)가 있다. 그 언어는 고구려와 대략 같으나, 때때로 조금씩 다르다. 한(漢)나라 초에, 연(燕)의 망명자 위만(衛滿)이 조선(朝鮮)의 왕이 되었을 때 옥저(沃沮)가 모두 복속하게 되었다. 한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조선을 정벌하여 만(滿)의 손자 우거(右渠)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사군(四郡)으로 삼았는데, 옥저성(沃沮城)을 현도군(玄菟郡)으로 삼았다. 나중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니, 지금 소위 현도(玄菟) 고부(故府)라 하는 바로 그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樂浪)에 속하게 된다. 한나라는 그 땅이 넓고 멀리 있으므로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 지역을 나누어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고 치소를 불내성(不耐城)으로 하여 별도로 영동(領東) 7현(縣)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 때 옥저 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한 광무(光武) 6년 변경지대의 군을 줄였으니, 이로 인해 도위(都尉)는 표지되었다. 그 후로 그 현의 거수(渠帥)들로 하여 현후(縣侯)를 삼으니, 불내(不耐), 화려(華麗), 옥저(沃沮)의 여러 현이 모두 후국(侯國)이 되었다. 이 이적(夷狄)들이 다시 서로를 공격하고 정복하였는데, 유일하게 불내예후(不耐濊侯)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직 공조(功曹), 주부(主簿) 등 여러 조(曹)를 가지고 있으니, 모두 예(濊) 사람이 이들을 맡았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거수는 모두 스스로를 삼로(三老)라 칭하였는데, 이는 옛날 현국(縣國) 때의 제도이다. 나라가 작으니, 대국들 사이에서 핍박을 받다가 마침내 고구려의 신하로서 복속되었다. 고구려가 그들 중 대인(大人)을 사자(使者)로 삼아 함께 땅을 다스리게 하고, 또 대가(大加)를 시켜 그 조세를 총괄 책임지게 하여 맥포(貊布), 생선, 소금, 바닷속의 먹을 것을 천리(千里)나 지고 날라오게 하고, 또 그 땅의 미녀를 보내게 하여 여종이나 첩으로 삼으니, 그들을 마치 노복(奴僕)과 같이 대우하였다.

  그 흙은 비옥하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오곡에 적합하며 밭농사에 좋다.[67] 사람들의 기질이 소박하고 정직하며 굳세고 용감하니, 우마(牛馬)가 적어 창을 들고 보전(步戰)하기를 잘하였다. 식음(食飲), 거처, 의복, 예절은 고구려와 흡사하다.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其嫁娶之法,女年十歲,已相設許。婿家迎之,長養以爲婦。至成人,更還女家。女家責錢,錢畢,乃復還婿。其葬作大木槨,長十餘丈,開一頭作戶。新死者皆假埋之,才使覆形,皮肉盡,乃取骨置槨中。舉家皆共一槨,刻木如生形,隨死者爲數。又有瓦䥶,置米其中,編縣之於槨戶邊。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할 때, 고구려 왕 궁(宮)이 옥저로 도망하자 군사를 진격하여 이를 치게 하였다. 이에 옥저의 읍락이 모두 파괴되었고, 목베이고 포로로 잡힌 이가 삼천 여 급(級)이었는데, 궁(宮)은 북옥저(北沃沮)로 도망하였다. 북옥저(北沃沮)는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에서 팔백여 리(里)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남북이 모두 같고 읍루(挹婁)와 접한다. 읍루는 배를 타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가 이들을 두려워 하여 여름 때에는 항상 깊은 산골의 굴에 거하면서 수비하고, 겨울 때에 얼음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그제서야 내려와 촌락에 거한다. 왕기(王頎)가 별도로 군사를 보내어 궁을 치러 쫓다가 동쪽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곳의 늙은 노인에게 물어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있는가?」 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일찍이 이 나라 사람이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다가 풍랑을 만났는데, 수십 일 바람부는 대로 가다가 동쪽에서 한 섬에 이르렀다. 섬에는 사람이 있었는데 언어를 서로 이해할 수 없었고, 그 습속이 항상 칠월이 되면 여자아이를 바다에 빠뜨렸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또 한 나라가 있는데 여자만 있고 남자가 없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한번은 베옷을 입고 바다에 떠다니는 이를 건졌는데, 그 몸이 중국인 같이 옷 입고 그 양 소매 길이는 세 장(丈)이었다. 또 한번은 난파된 배가 파도를 따라 해변에 나와 있는 것을 보았는데, 한 사람이 있어 그 목에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 그를 산채로 구하였으나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니, 먹지 않다가 죽었다." 하였다. 그 지역들은 모두 옥저 동쪽의 대해(大海) 가운데에 있다.

읍루전(挹婁傳)[편집]

  읍루(挹婁)는 부여(夫餘)에서 동북쪽으로 1천리에 있고, 큰 바다에 닿아있으며, 남쪽으로는 북옥저(北沃沮)와 접하며, 그 북쪽으로 다하는 바는 알지 못한다. 그 토지가 많고 산이 험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과 닮았으나, 언어는 부여·고구려와 같지 않다. 오곡(五穀)·소·말·삼베가 많이 (산출된다.) 사람들이 매우 날래고 힘이 세다. 대군장(大君長)은 없고 읍락마다 각각 대인(大人)이 있다. (그들은) 산림 사이에 머무르고, 언제나 혈거(穴居)하였으며, 큰 집의 깊이는 아홉 단〔梯〕인데, (단이)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긴다. 그 지방의 기후는 추워서 부여보다 혹독하다. 그들은 돼지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철에는 돼지 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를 몇 푼이나 되게 하여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철에는 알몸에다 한 자 정도의 베조각으로 앞뒤를 둘러서 형체만을 가린다. 그들은 위생이 불결하여 (집)한가운데에 변소를 만들고 그 주위에 빙 둘러 모여 산다. 활의 길이는 4자인데 그 위력은 쇠뇌(弩)와 같다. 화살대로는 호목(楛)을 쓰는데 길이는 한 자 여덟 치나 되며, 청석(靑石)으로 화살촉을 만들었으니, (이는 읍루가)옛 숙신씨(肅愼氏)의 나라 (이기 때문)이다. 활을 잘 쏘아 사람을 쏘면 어김없이 명중시킨다. 화살에는 독약을 바르기 때문에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 적옥(赤玉)과 좋은 담비가죽이 산출되는데, 오늘날 이른바 읍루의 담비(挹婁貂)가 그것이다. 한나라 이래로, 부여에 신하로서 예속되었는데, 부여가 세금과 부역을 무겁게 물리자 황초 연간(A.D.220~226; 고구려 산상왕 24~30)에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에서 여러 번 정벌하였으나, 그 무리가 비록 수는 적지만 험한 산 속에 거주하는데다가, 이웃 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활과 [독]화살을 두려워하여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그 나라는 배를 타고 다니면서 노략질을 잘 하므로 이웃 나라들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동이들은 음식을 먹을 적에 대부분 조두(俎豆)를 사용했으나, 오직 읍루만은 그렇지 못했으니, 그 법도나 풍속이 [동이 가운데에서] 가장 기강이 없었다.

예전(濊傳)[편집]

  예(濊)는 남으로 진한(辰韓)과, 북으로 고구려(高句麗)·옥저(沃沮)와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큰 바다와 접하였으니, 지금 조선(朝鮮)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호(戶)는 2만이다. 옛날 기자(箕子)가 이미 조선으로 가서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지어 이를 가르쳤으니, 문호를 잠그지 않아도 백성이 이를 도둑질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십여 세(世) 뒤에 조선후(朝鮮侯) 준(淮)이 왕을 참칭했다. 진승(陳勝) 등이 들고 일어나 천하가 진(秦)나라에 반기를 들었을 때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 수만 명이 조선으로 피난하였다.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상투를 틀고, 이(夷)의 의복을 입고, 다시 돌아와 그들을 다스렸다.[68] 한무제(漢武帝)가 조선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사군(四郡)을 설치했다. 그 후부터 호(胡)와 한(漢)이 서서히 구별되었다. 대군장(大君長)이 없고 한나라 때부터 이미 관리가 있어 후(侯), 읍군(邑君), 삼로(三老)가 아래 백성들을 다스렸다. 그곳의 노인이 예로부터 스스로 말하기를 고구려와 동종(同種)이라 하였다. 그 인성이 성실하고 순박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어 빌거나 구걸하지 않았다. 언어와 법속은 대저 고구려와 같지만 의복에는 다름이 있다. 남녀 모두 곡령(曲領)을 입으며, 남자는 너비가 수 촌(寸) 되는 은화(銀花)로 장식한다. 단단대산령(單單大山領)의 서쪽은 낙랑(樂浪)에 속하고, 그 령(領)의 동쪽은 칠현(七縣)에 속하니, 도위(都尉)가 이를 주관하고 모두 예(濊)를 백성으로 한다. 후에 도위(都尉)를 폐지하고 그 거수(渠帥)를 후(侯)로 봉하였으니, 지금 불내예(不耐濊)가 모두 그 종(種)이다. 한나라 말에는 다시 고구려에 속하였다. 그 습속은 산천(山川)을 중시하고, 산천에는 각기 부분이 있어 서로 함부로 건너들어갈 수 없다. 같은 성(姓)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 기휘(忌諱)가 많은데, 병질로 사망하면 쉽게 엣 집을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짓는다. 마포(麻布)가 있으며, 누에와 뽕으로 면을 만든다. 별자리를 살필 줄 알아, 그 해의 풍약(豐約)을 예지한다. 주옥(誅玉)을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 항상 시월에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야(晝夜)로 음주가무하니 이름하여 무천(舞天)이라 하며, 또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지낸다. 그 읍락이 서로 침범하면 곧 서로 벌하여 생구(生口)·우마(牛馬)를 물리니 이름하여 책화(責禍)라 한다. 사람을 죽인 자는 죽어서 갚게 한다. 도적이 적다. 길이 3장(丈)의 창을 만드는데, 간혹 수 명이 이를 함께 들기도 하며, 보전(步戰)에 능하다. 낙랑(樂浪)의 단궁(檀弓)이 이 땅에서 난다. 그 바다에서는 반어피(班魚皮)가 나고 토지에는 문표(文豹)가 많다. 또 과하마(果下馬)가 나며, 한나라 환(桓) 때 이를 바쳤다. 신(臣) 송지(松之)가 생각컨대: 과하마(果下馬)는 키가 3척(尺)으로 이를 타고 능히 과수(果樹)의 아래를 지날 수 있으니, 이에 과하(果下)라 일컬었다. 박물지(博物志)와 위도부(魏都賦)를 보라.

  정시(正始) 6년에 낙랑(樂浪) 태수(太守) 유무(劉茂)와 대방(帶方) 태수 궁준(弓遵)이 영동(領東)의 예(濊)가 고구려에 복속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이를 치니 불내후(不耐候) 등이 마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그 8년에는 궐에 나아와서 조공하니 조서를 내려 다시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며 사시(四時)로 군(郡)에 나아와서 조공 알현하였다. 두 군(郡)에 군정(軍征)이나 부조(賦調)가 있을 때마다 이를 공급하고 역사(役使)하였으므로, 이들을 군의 백성들처럼 대우하였다.

한전(韓傳)[편집]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서로는 바다를 경계로 하고 남으로는 왜(倭)와 접하는데, 사방이 가히 4천 리이다. 세 종(種)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이라 한다.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이 서쪽에 있다. 그 민족은 토착민으로, 씨를 심고 누에를 칠 줄 알아 면포(緜布)를 만든다. 각자 우두머리가 있는데, 큰 자는 스스로 신지(臣智)라 이름하고, 그 다음가는 자는 읍차(邑借)라 이름하니,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있었고, 성곽은 없었다. 원양국(爰襄國)·모수국(牟水國)·상외국(桑外國)·소석삭국(小石索國)·대서삭국(大石索國)·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신분활국(臣濆沽國)·백제국(伯濟國)·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일화국(日華國)·고탄자국(古誕者國)·고리국(古離國)·노람국(怒藍國)·월지국(月支國)[69]·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소위건국(素謂乾國)·고원국(古爰國)·막로국(莫盧國)· 비리국(卑離國)·점리비국(占離卑國)[70]·신흔국(臣釁國)·지침국(支侵國)·구로국(狗盧國)·비미국(卑彌國)·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고포국(古蒲國)·치리국국(致利鞠國)·염로국(冉路國)·아림국(兒林國)·사로국(駟盧國)·내비리국(內卑離國)·감해국(感奚國)· 만로국(萬盧國)·벽비리국(辟卑離國)·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일리국(一離國)·불미국(不彌國)·지반국(支半國)·구소국(狗素國)·첩로국(捷盧國)·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신소도국(臣蘇塗國)·막로국(莫盧國)[71]·고랍국(古臘國)·임소반국(臨素半國)·신운신국(臣雲新國)·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일난국(一難國)·구해국(狗奚國)·불운국(不雲國)·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원지국(爰池國)·건마국(乾馬國)·초리국(楚離國)이 있어 모두 오십여국이다. 큰 나라는 일만여 호(戶), 작은 나라는 수천 호이고, 총 십만여 호였다.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을 다스렸다. 신지는 간혹 더욱 우대하여 부르기를 신운견지보안야축지분신리아불례구야진지렴(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으로 호칭하였다. 그 관직에는 위솔선(魏率善), 읍군(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郎將), 도위(都尉), 백장(伯長)이 있었다.

후(侯) 준(準)은 왕위를 참칭하였는데 연(燕)나라 망명인 위만(衞滿)에게 공격당해 빼앗겼다.

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見周衰,燕自尊為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為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潘汗為界,朝鮮遂弱。及秦并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準,準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綰為燕王,朝鮮與燕界於浿水。及綰反,入匈奴,燕人衞滿亡命,為胡服,東度浿水,詣準降,說準求居西界,收中國亡命為朝鮮藩屏。準信寵之,拜為博士,賜以圭,封之百里,令守西邊。滿誘亡黨,衆稍多,乃詐遣人告準,言漢兵十道至,求入宿衞,遂還攻準。準與滿戰,不敵也。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 魏略曰: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準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其後絕滅,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漢時屬樂浪郡,四時朝謁。魏略曰:初,右渠未破時,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至王莽地皇時,廉斯鑡為辰韓右渠帥,聞樂浪土地美,人民饒樂,亡欲來降。出其邑落,見田中驅雀男子一人,其語非韓人。問之,男子曰:「我等漢人,名戶來,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為韓所擊得,皆斷髮為奴,積三年矣。」鑡曰:「我當降漢樂浪,汝欲去不?」戶來曰:「可。」鑡因將戶來,來出詣含資縣,縣言郡,郡即以鑡為譯,從芩中乘大船入辰韓,逆取戶來。降伴輩尚得千人,其五百人已死。鑡時曉謂辰韓:「汝還五百人。若不者,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辰韓曰:「五百人已死,我當出贖直耳。」乃出辰韓萬五千人,弁韓布萬五千匹,鑡收取直還。郡表鑡功義,賜冠幘、田宅,子孫數世,至安帝延光四年時,故受復除。

  환제(桓)·영제(靈) 말에 한(韓)·예(濊)가 강성하여 군현이 능히 제압하지 못하였으니,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건안(建安) 중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을 나누어 남쪽의 황무지를 대방군(帶方郡)으로 삼고, 공손막(公孫模), 장폐(張敞) 등을 보내어 유민들을 수집(收集)하여 병사를 일으켜 한·예를 정벌하니 구민(舊民)들이 서서히 나타났고, 이후로 왜(倭)와 한(韓)이 마침내 대방(帶方)에 복속하게 되었다. 경초(景初) 중에 명제(明帝)가 대방 태수(太守) 유흔(劉昕)·낙랑 태수 선우(鮮于嗣)를 비밀리에 보내어 바다를 건너 두 군(郡)을 평정하고, 여러 한국(韓國) 신지(臣智)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하여 하사하여 주고, 그 다음가는 자에게는 읍장의 것을 주었다. 그 습속이 의책(衣幘)을 좋아하니, 하호(下戶)들이 나아와서 조공 알현하면 모두 의책을 주었는데, 스스로 인수와 의책을 입은 자가 천 명 남짓 있었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이 본래 낙랑이 한국을 통괄하였다 하여 진한의 팔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주었는데, 사역(吏譯)의 전달에 잘못이 있어 신지(臣智)가 격노하고 한(韓)이 분개하여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때 태수 궁준(弓遵)과 낙랑 태수 유무(劉茂)가 병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니, 준(遵)이 전사하였으나 두 군이 마침내 한을 멸하였다.

  그 풍속에 기강이 적고, 나라의 읍락에 주수(主帥)가 있으나 읍락에 섞여 살아 잘 다스리거나 제어하지 못한다. 무릎 꿇고 절하는 예절도 없다. 거처는 풀로 지붕을 흙으로 집을 만드는데, 모양이 무덤과 같다. 그 문은 위로 나 있고, 온 가족이 함께 그 속에 거하는데, 장유(長幼) 남녀(男女)의 구별이 없다. 장사지낼 때에 곽(槨)은 있으나 관(棺)은 없으며, 우마(牛馬)를 탈 줄을 몰라 죽은 자를 보내는 데 쓴다. 영주(瓔珠)를 재보(財寶)로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걸기도 하는데, 금은(金銀)과 비단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이 강하고 용맹하며, 머리에 상투를 트는데 마치 경병(炅兵)과 같다. 베의 도포를 입으며, 발에는 가죽 신발을 신는다. 그 나라에 일이 있으면 관가(官家)가 성곽을 쌓도록 시키고, 여러 용맹하고 강건한 소년들이 다 등가죽을 뚫어 큰 밧줄에 꿴 후 큰 나무로 이를 붙들고 종일 떠들썩하게 소리치며 힘을 쓰는데, 이것을 아파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힘쓰는 것과 강건함을 권하는 것이다. 항상 오월 씨뿌릴 때가 되면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무리지어 모여 음주가무하기를 주야로 쉬지 않는다. 그 춤이, 수십 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라가며 땅을 높게 밟았다 낮게 밟았다 하는데 손발이 서로 응하니, 가락이 있어 택무(鐸舞)와 흡사하다. 시월 농사일을 마치면 다시 이같이 반복한다. 귀신을 믿으며, 나라의 읍락마다 각기 한 사람이 천신(天神)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주관하는데, 이름하여 천군(天君)이라 한다. 또 각 나라에 특별한 읍이 있어 이름하여 소도(蘇塗)라 하니,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달고, 귀신을 부린다. 여럿이 그 중으로 도망하면 모두 돌아오지 않으니 도둑이 잘 일어난다. 그 소도(蘇塗)의 의의가 부거(浮屠)와 흡사한데, 행하는 선악에는 차이가 있다. 그 북방에 있는 군에 가까운 여러 나라들은 예의를 조금 알지만, 먼 곳은 죄수 떼처럼 노비와 함께 모여 산다. 그 밖에 진귀한 보배는 없다. 짐승이나 초목은 대략 중국과 같다. 큰 밤이 나는데 크기가 배와 같고, 또 꼬리가 가는 닭이 나는데 그 꼬리의 길이가 다해서 5척 남짓이다. 남자들은 때때로 문신이 있다. 또한 주호(州胡)가 있는데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으로, 그 사람들이 조금 키가 작고 언어는 한(韓)과 같지 않으며 모두 머리를 깎은 것이 선비(鮮卑)와 같다. 옷은 가죽뿐이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 옷이 위는 있으나 아래가 없어 거의 벌거벗은 것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에서 사고 판다.

진한전(辰韓傳)[편집]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고, 그 어르신들이 세상에 전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옛 도망자들이 진(秦)나라의 부역(賦役)을 피하여 마침 한국(韓國)으로 와서, 마한이 그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누어 그들에게 주었다’ 하였다. (그곳에는) 성(城)과 울타리가 있었다. 그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아서, 나라〔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弓〕을 호(弧)라 하고, 도적〔賊〕을 구(寇)하고, 술을 (권하는) 행위〔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를 때 모두 ‘도(徒)’라 하니, 진(秦)나라 사람들과도 비슷하며, 단지, 연(燕)나라·제(齊)나라의 (사람들이) 사물에 (붙이는) 이름〔名物〕과만 (비슷한 것이) 아니다.[72] 낙랑(樂浪) 사람을 아잔(阿殘)이라 이름하였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我〕’를 ‘아(阿)’라 이름하였으니, 낙랑 사람은 본디 그 ‘남아 있는〔殘餘〕 사람, 또는 부여(扶餘)의 유민〔殘餘〕 ’을 가리킨다. 지금도 이 (진한(辰韓)을) 이름하여 진한(秦韓)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 육(6)국(國)이 있다가 점점 나뉘어 십이(12)국이 되었다.

변진전(弁辰傳)[편집]

  변진(弁辰) 또한 십이(12)국이고 또한 여러 소별읍(小別邑)[73]이 있었고, 각기 우두머리를 가졌는데, 큰 것은 신지(臣智)라 불렀고, 그 다음은 검측(險側)을 가지고, 그 다음은 번예(樊濊)를 가지고, 그 다음은 살해(殺奚)를 가지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를 가졌다. 기저국(已柢國)·불사국(不斯國)·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근기국(勤耆國)·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염해국(冉奚國)·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변악노국(弁樂奴國)·군미국(軍彌國)·변군미국(弁軍彌國)·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여담국(如湛國)·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호로국(戶路國)·주선국(州鮮國)·마연국(馬延國)·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사로국(斯盧國)·우중국(優中國)[74]이 있었다. 변·진한 합하여 이십사(24)국이고[75], 큰 나라는 4~5천 호, 작은 나라는 6~7백호이고, 총 4~5만호였다. 그 십이(12)국은 진왕(辰王)에 속하였다. 진왕은 항상 마한(馬韓)인을 옹립하는 것이 세세토록 이어져 왔다. 진왕은 스스로 왕으로 즉위하지 못한다.

  위략에 이르기를: 분명히 그들은 유입되어 들어온 사람들이므로, 따라서 마한에게 통제받는 것이다.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좋고, 누에를 칠 줄 알아 겸포(縑布)를 만들며, 우마(牛馬)차를 탄다. 결혼하는 풍속은 남녀 간에 구별이 있다. 큰 새의 날개를 죽은 자에게 보내는데, 이는 죽은 자가 높이 날아가기를 바라며 하는 것이다. 위략에 이르기를: 그 나라에서는 집을 만들 때 가로로 나무를 쌓아 이를 만드니, 감옥과 흡사한 점이 있다. 나라(國)[76]에서 철이 나니, 한(韓)·예(濊)·왜(倭)가 모두 쫓아와서 이를 취한다. 모두들 팔고 살 때, 철을 사용하는데 이는 마치 중국에서 전(錢)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또 이로써 두 군(郡)에 공급한다. 그 습속이 음주 가무하기 좋아한다. 거문고(瑟)가 있는데 그 모양이 축(筑)과 흡사하고 이를 칠 때에도 음곡이 있다.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려 하기 때문에, 지금 진한 사람의 머리는 모두 납작하다. 남녀(男女) 모두 왜와 비슷하게 역시 문신한다. 보전(步戰)을 잘하며 병장(兵仗)이 마한의 것과 같다. 그 습속이 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나면 모두 길을 양보한다.

  변진(弁辰)은 진한(辰韓)과 함께 섞여 살며, 역시 성곽이 있다. 의복과 거처는 마한의 것과 같다. 언어와 법속(法俗)은 서로 닮았으나, 귀신에 제사지내는 것에는 차이가 있어, 모두 문의 서쪽에 조(竈)를 차린다. 그들 중 독로국(瀆盧國)은 왜와 접하는 경계가 있었다. 12국에 역시 왕이 있으니, 그 사람의 형체가 모두 크다. 의복은 깨끗하고, 머리카락이 길다. 또한 폭이 넓은 세포(細布)를 만든다. 법속이 유독 엄준(嚴峻)하였다.

왜인전(倭人傳)[편집]

  왜인(倭人)은 대방(帶方)의 동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산과 섬에 의하여 국읍(國邑)을 이룬다. 예전에 백여국이 있었는데, 한나라 때에 조공하러 알현한 자가 있으니, 오늘날 사역(使譯)이 통하는 것이 삼십국이다. 군(郡)에서 왜에 이르려면, 해안을 따르며 물길을 돌아, 한국(韓國)을 지나, 남으로 갔다가 동으로 갔다가 하면, 그 북안(北岸)인 구사한국(狗邪韓國)에 이르는데, 이것이 7천여 리(里)이다. 이제 바다를 한번 건너면 천여 리만에 대마국(對馬國)에 이른다. 그 대관(大官)은 비구(卑狗)라 하고 부관은 비노모리(卑奴母離)라 한다. 절도(絶島)에 거소하는데, 사방이 사백여 리로, 토지와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으며 도로는 짐승이 다니는 길과 같다. 천여 호가 있으며 좋은 밭은 없고 해물(海物)을 먹어 스스로 살아가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다니며 쌀을 사들인다. 또 남쪽으로 한번 천여 리 바다를 건너, 이름하길 한해(瀚海)를 건너면, 한 대국(大國)에 이르는데, 역시 그 관리를 비구(卑狗), 부관을 비노모리(卑奴母離)라 한다. 사방이 삼백 리이며, 대나무와 나무가 많이 모여 숲을 이루는데, 삼천 가량의 가구가 있으니, 밭이 있다는 점이 다르나 경작하는 것으로는 식량이 부족하여 역시 남북으로 다니며 쌀을 사들인다. 또 한번 바다를 건너 천여 리 가면 말로국(末盧國)에 이르는데, 4천여 호가 살고 산이 있는 바닷가에 거주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다닐 때에 앞의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물고기와 전복 잡기를 좋아하는데, 물이 깊은 곳 없이 얕아 모두 물에 들어가 잡는다. 동남쪽 육지로 오백 리를 가면 이도국(伊都國)에 이르는데, 관리를 이지(爾支), 부관을 설모고(泄謨觚), 병거고(柄渠觚)라 한다. 천여 호가 살고, 세를 잇는 왕이 있는데, 모두 여왕국(女王國)에 속하여 고을에 사신이 왕래하고 상주한다. 동남쪽으로 노국(奴國)까지 백리인데, 관리를 시마고(兕馬觚), 부관을 비노모리(卑奴母離)라 하며 이만여 호가 있다. 동쪽으로 백리 가면 불미국(不彌國)에 이르니, 관리를 다모(多模), 부관을 비노모리(卑奴母離)라 하며, 천여 가구가 있다. 남쪽으로 물길을 이십일 동안 가면 투마국(投馬國)에 이르니 관리를 미미(彌彌), 부관을 미미나리(彌彌那利)라 하며 가히 오만여 호가 산다. 남쪽으로 여왕의 도읍인 사마대(邪馬壹國)국에 이르려면 물길을 십일, 육지길을 한 달 동안 가야 한다. 대관을 이지마(伊支馬), 그 다음을 미마승(彌馬升), 그 다음을 미마획지(彌馬獲支), 그 다음을 노가제(奴佳鞮)라 하며, 가히 칠만 여호가 있다. 여왕국보다 북쪽은, 그 호수와 거리를 가능한대로 얻어 대략 기재하였는데, 그 나머지의 주변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어 자세한 바를 알 수 없다. 그 다음에 사마국(斯馬國), 다음에 이백지국(已百支國), 다음에 이사국(伊邪國),다음에 도지국(都支國), 다음에 미노국(彌奴國),다음에 호고도국(好古都國),다음에 불호국 (不呼國),다음에 저노국(姐奴國),다음에 대소국(對蘇國),다음에 소노국(蘇奴國),다음에 호읍국(呼邑國),다음에 화노소노국(華奴蘇奴國),다음에 귀국(鬼國),다음에 위오국(爲吾國),다음에 귀노국(鬼奴國),다음에 사마국(邪馬國),다음에 궁신국(躬臣國),다음에 읍리국(巴厘國),다음에 지유국(支惟國),다음에 오노국(烏奴國),다음에 노국(奴國), 그 다음이 여왕의 경계가 끝나는 곳이다. 남쪽에는 구노국(狗奴國)이 있는데 남자가 왕을 하고 그 관리가 있어 구고지비구(狗古智卑狗)라 하는데 여왕에 속하지 않는다. 이 고을에서 여왕국까지는 2천여 리에 이른다.

  남자는 대소를 가리지 않고 얼굴과 몸에 문신을 한다. 이는 예로부터 이어진 것으로, 그 사신이 중국에 이르렀을 때 모두 대부(大夫)를 자칭하였다. 하나라(夏) 후대에 소강(少康)의 아들을 회계(會稽)에 봉하였을 때 단발(斷髮)하고 문신하여 교룡(蛟龍)의 해(害)를 피하였었다. 오늘날 왜의 바닷사람들이 물에 들어가 물고기와 조개를 잡기를 좋아하므로, 이와 마찬가지로 문신하여 큰 고기와 바닷짐승들이 피하게 하였으니, 후에 점점 꾸미게 된 것이다. 여러 나라의 문신은 각기 달라, 어떤 곳은 왼쪽에 어떤 곳은 오른쪽에 하고, 어떤 곳은 크게 어떤 곳은 작게 하는데, 존비(尊卑)에 따라 차이가 있다. 길을 헤아려볼 때 이곳은 마땅히 회계(會稽), 동치(東治)의 동쪽에 있다. 그 풍속은 음란하지 않은데, 남자는 상투를 드러내어 목면(木綿)으로 머리를 묶는다. 그 옷은 가로로 펼치고 단지 서로 연결하여 묶으며, 대개 꿰메지 않는다. 부인은 머리를 풀어헤쳐 묶어올리는데, 옷을 홑으로 짓는 듯 하여 그 중앙에 구멍을 뚫고 머리를 넣어 옷으로 입는다. 種禾稻、紵麻,蠶桑、緝績,出細紵、縑綿。其地無牛馬虎豹羊鵲。兵用矛、楯、木弓。木弓短下長上,竹箭或鐵鏃或骨鏃,所有無與儋耳、硃崖同。왜의 땅은 온난하여 겨울에나 여름에나 생나물을 먹고 모두 맨발로 다닌다. 옥실(屋室)이 있는데 부모 형제가 다른 방에 누워 쉰다. 주단(硃丹)으로 그 몸을 칠하는데 중국에서 쓰는 분(粉)과 같은 것이다. 식음에는 변두(籩豆)를 쓰고 손으로 먹는다. 사람이 죽으면 관(棺)은 있으나 곽(槨)은 없고, 흙으로 무덤을 쌓아 봉한다. 처음 사람이 죽으면 상(喪)을 십여 일 치르는데, 그 동안 고기를 먹지 않으며, 상주는 곡읍(哭泣)하고 다른 사람들은 음주가무한다. 장례가 끝나면 집안 사람이 다 물로 나아가서 목욕하는데, 연목(練沐)과 같은 것이다. 其行來渡海詣中國,恆使一人,不梳頭,不去蟣虱,衣服垢汙,不食肉,不近婦人,如喪人,名之爲持衰。若行者吉善,共顧其生口財物;若有疾病,遭暴害,便欲殺之,謂其持衰不謹。出真珠、青玉。其山有丹,其木有柟、杼、豫樟、楺櫪、投橿、烏號、楓香,其竹筱簳、桃支。有薑、橘、椒、蘘荷,不知以爲滋味。有獮猴、黑雉。其俗舉事行來,有所雲爲,輒灼骨而卜,以占吉凶,先告所卜,其辭如令龜法,視火坼占兆。其會同坐起,父子男女無別,人性嗜酒。魏略曰:其俗不知正歲四節,但計春耕秋收爲年紀。見大人所敬,但搏手以當跪拜。其人壽考,或百年,或八九十年。其俗,國大人皆四五婦,下戶或二三婦。婦人不淫,不妒忌。不盜竊,少諍訟。其犯法,輕者沒其妻子,重者滅其門戶。及宗族尊卑,各有差序,足相臣服。收租賦。有邸閣國,國有市,交易有無,使大倭監之。自女王國以北,特置一大率,檢察諸國,諸國畏憚之。常治伊都國,於國中有如刺史。王遣使詣京都、帶方郡、諸韓國,及郡使倭國,皆臨津搜露,傳送文書賜遺之物詣女王,不得差錯。下戶與大人相逢道路,逡巡入草。傳辭說事,或蹲或跪,兩手據地,爲之恭敬。對應聲曰噫,比如然諾。

  그 나라도 본래 남자가 왕을 하였는데 칠·팔십 년 있다가 왜국에 난이 생겨 서로 공격하고 정복하기를 몇 해, 이내 함께 한 여자를 왕으로 세웠다. 그 이름이 비미호(卑彌呼)라 하고, 귀도(鬼道)를 행하며 능히 백성을 미혹하는데, 나이가 많이 먹도록 남편이 없었으나, 남동생이 있어 치국(治國)을 도왔다. 왕이 된 이래로 그녀를 본 자가 적었다. 여종 천 명이 이를 시중들었고 오직 남자 한 명이 음식을 공급하며 말을 안팎으로 전했다. 거하는 궁전의 망루에서 감시하고, 성책을 엄중히 지었으며, 항상 무기를 둔 수위가 지켰다.

  여왕국의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천여 리 가면 다시 나라가 있으니, 모두 왜의 종(種)이다. 또 그 남쪽에 주유국(侏儒國)이 있는데, 그 사람의 키가 3·4 척(尺)이고 여왕국으로부터 4천여 리 떨어져 있다. 또 다시 그 남쪽에 나국(裸國), 흑치국(黑齒國)이 있는데, 배로 일년을 가야 가히 다다른다. 왜의 땅을 헤아려 보건대, 바다 위에 섬들이 떨어져 있고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주위를 돌면 가히 5천여 리에 달한다.

  景初二年六月,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求詣天子朝獻,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其年十二月,詔書報倭女王曰:「制詔親魏倭王卑彌呼:帶方太守劉夏遣使送汝大夫難升米、次使都巿牛利奉汝所獻男生口四人,女生口六人、班布二匹二丈,以到。汝所在逾遠,乃遣使貢獻,是汝之忠孝,我甚哀汝。今以汝爲親魏倭王,假金印紫綬,裝封付帶方太守假授汝。其綏撫種人,勉爲孝順。汝來使難升米、牛利涉遠,道路勤勞,今以難升米爲率善中郎將,牛利爲率善校尉,假銀印青綬,引見勞賜遣還。今以絳地交龍錦五匹、臣松之以爲地應爲綈,漢文帝著皁衣謂之弋綈是也。此字不體,非魏朝之失,則傳寫者誤也。絳地縐粟罽十張、蒨絳五十匹、紺青五十匹,答汝所獻貢直。又特賜汝紺地句文錦三匹、細班華罽五張、白絹五十匹、金八兩、五尺刀二口、銅鏡百枚、真珠、鉛丹各五十斤,皆裝封付難升米、牛利還到錄受。悉可以示汝國中人,使知國家哀汝,故鄭重賜汝好物也。」

  正始元年,太守弓遵遣建中校尉梯俊等奉詔書印綬詣倭國,拜假倭王,並齎詔賜金、帛、錦罽、刀、鏡、采物,倭王因使上表答謝恩詔。其四年,倭王復遣使大夫伊聲耆、掖邪狗等八人,上獻生口、倭錦、絳青縑、綿衣、帛布、丹木、𤝔、短弓矢。掖邪狗等壹拜率善中郎將印綬。其六年,詔賜倭難升米黃幢,付郡假授。其八年,太守王頎到官。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弓呼素不和,遣倭載斯、烏越等詣郡說相攻擊狀。遣塞曹掾史張政等因齎詔書、黃幢,拜假難升米爲檄告喻之。卑彌呼以死,大作塚,徑百餘步,徇葬者奴婢百餘人。更立男王,國中不服,更相誅殺,當時殺千餘人。復立卑彌呼宗女壹與,열세살의 나이에 왕이 되니, 나라 안이 마침내 안정되었다. 政等以檄告喻壹與,壹與遣倭大夫率善中郎將掖邪狗等二十人送政等還,因詣台,獻上男女生口三十人,貢白珠五千,孔青大句珠二枚,異文雜錦二十匹。

  평한다: 사(史)·한(漢)은 조선(朝鮮), 양월(兩越)에 관해 저술하고 동경(東京)은 서강(西羌)에 관해 기록하였다. 위(魏)나라 대에 흉노(匈奴)가 마침내 쇠락했으나 다시 오환(烏丸), 선비(鮮卑)에 더해 동이(東夷)가 나타났다. 사역(使譯)이 때때로 통하여 사안에 따라 기술한 것인데, 모든 것이 변함없을 리 있겠는가! 魏略西戎傳曰:氐人有王,所從來久矣。自漢開益州,置武都郡,排其種人,分竄山谷間,或在福祿,或在汧、隴左右。其種非一,稱槃瓠之後,或號青氐,或號白氐,或號蚺氐,此蓋蟲之類而處中國,人即其服色而名之也。其自相號曰盍稚,各有王侯,多受中國封拜。近去建安中,興國氐王阿貴、白項氐王千萬各有部落萬餘,至十六年,從馬超爲亂。超破之後,阿貴爲夏侯淵所攻滅,千萬西南入蜀,其部落不能去,皆降。國家分徙其前後兩端者,置扶風、美陽,今之安夷、撫夷二部護軍所典是也。其(太)守善,分留天水、南安界,今之廣魏郡所守是也。其俗,語不與中國同,及羌雜胡同,各自有姓,姓如中國之姓矣。其衣服尚青絳。俗能織布,善田種,畜養豕牛馬驢騾。其婦人嫁時著衽露,其緣飾之制有似羌,衽露有似中國袍。皆編發。多知中國語,由與中國錯居故也。其自還種落間,則自氐語。其嫁娶有似於羌,此蓋乃昔所謂西戎在於街、冀、豲道者也。今雖都統於郡國,然故自有王侯在其虛落間。又故武都地陰平街左右,亦有萬餘落。貲虜,本匈奴也,匈奴名奴婢爲貲。始建武時,匈奴衰,分去其奴婢,亡匿在金城、武威、酒泉北黑水、西河東西,畜牧逐水草,鈔盜涼州,部落稍多,有數萬,不與東部鮮卑同也。其種非一,有大胡,有丁令,或頗有羌雜處,由本亡奴婢故也。當漢、魏之際,其大人有檀柘,死後,其枝大人南近在廣魏、令居界,有禿瑰來數反,爲涼州所殺。今有劭提,或降來,或遁去,常爲西州道路患也。敦煌西域之南山中,從婼羌西至蔥領數千里,有月氏餘種蔥茈羌、白馬、黃牛羌,各有酋豪,北與諸國接,不知其道-{里}-廣狹。傳聞黃牛羌各有種類,孕身六月生,南與白馬羌鄰。西域諸國,漢初開其道,時有三十六,後分爲五十餘。從建武以來,更相吞滅,於今有二十道。從敦煌玉門關入西域,前有二道,今有三道。從玉門關西出,經婼羌轉西,越蔥領,經縣度,入大月氏,爲南道。從玉門關西出,發都護井,回三隴沙北頭,經居盧倉,從沙西井轉西北,過龍堆,到故樓蘭,轉西詣龜茲,至蔥領,爲中道。從玉門關西北出,經橫坑,辟三隴沙及龍堆,出五船北,到車師界戊己校尉所治高昌,轉西與中道合龜茲,爲新道。凡西域所出,有前史已具詳,今故略說。南道西行,且志國、小宛國、精絕國、樓蘭國皆並屬鄯善也。戎盧國、扞彌國、渠勒國、(穴山國)〔皮山國〕皆並屬於寘。罽賓國、大夏國、高附國、天竺國皆並屬大月氏。臨兒國,浮屠經-{云}-其國王生浮屠。浮屠,太子也。父曰屑頭邪,母-{云}-莫邪。浮屠身服色黃,發青如青絲,乳青毛,蛉赤如銅。始莫邪夢白象而孕,及生,從母左脅出,生而有結,墮地能行七步。此國在天竺城中。天竺又有神人,名沙律。昔漢哀帝元壽元年,博士弟子景盧受大月氏王使伊存口受浮屠經曰復立者其人也。浮屠所載臨蒲塞、桑門、伯聞、疏問、白疏間、比丘、晨門,皆弟子號也。浮屠所載與中國老子經相出入,蓋以爲老子西出關,過西域之天竺、教胡。浮屠屬弟子別號,合有二十九,不能詳載,故略之如此。車離國一名禮惟特,一名沛隸王,在天竺東南三千餘-{里}-,其地卑濕暑熱。其王治沙奇城,有別城數十,人民怯弱,月氏、天竺擊服之。其地東西南北數千里,人民男女皆長一丈八尺,乘象、橐扆以戰,今月氏役稅之。盤越國一名漢越王,在天竺東南數千里,與益部相近,其人小與中國人等,蜀人賈似至焉。南道而西極轉東南盡矣。中道西行尉梨國、危須國、山王國皆並屬焉耆,姑墨國、溫宿國、尉頭國皆並屬龜茲也。楨中國、莎車國、竭石國、渠沙國、西夜國、依耐國、滿犁國、億若國、榆令國、損毒國、休脩國、琴國皆並屬疏勒。自是以西,大宛、安息、條支、烏弋。烏弋一名排特,此四國次在西,本國也,無增損。前世謬以爲條支在大秦西,今其實在東。前世又謬以爲強於安息,今更役屬之,號爲安息西界。前世又謬以爲弱水在條支西,今弱水在大秦西。前世又謬以爲從條支西行二百餘日,近日所入,今從大秦西近日所入。大秦國一號犁靬,在安息、條支西大海之西,從安息界安穀城乘船,直截海西,遇風利二月到,風遲或一歲,無風或三歲。其國在海西,故俗謂之海西。有河出其國,西又有大海。海西有遲散城,從國下直北至烏丹城,西南又渡一河,乘船一日乃過。西南又渡一河,一日乃過。凡有大都三,卻從安穀城陸道直北行之海北,復直西行之海西,復直南行經之烏遲散城,渡一河,乘船一日乃過。周回繞海,凡當渡大海六日乃到其國。國有小城邑合四百餘,東西南北數千里。其王治濱側河海,以石爲城郭。其土地有松、柏、槐、梓、竹、葦、楊柳、梧桐、百草。민속은 밭에서 오곡을 심고, 畜乘有馬、騾、驢、駱駝。桑蠶。俗多奇幻,口中出火,自縛自解,跳十二丸巧妙。其國無常主,國中有災異,輒更立賢人以爲王,而生放其故王,王亦不敢怨。其俗人長大平正,似中國人而胡服。自-{云}-本中國一別也,常欲通使於中國,而安息圖其利,不能得過。其俗能胡書。其制度,公私宮室爲重屋,旌旗擊鼓,白蓋小車,郵驛亭置如中國。從安息繞海北到其國,人民相屬,十-{里}-一亭,三十-{里}-一置,終無盜賊。但有猛虎、獅子爲害,行道不群則不得過。其國置小王數十,其王所治城周回百餘-{里}-,有官曹文書。王有五宮,一宮間相去十-{里}-,其王平旦之一宮聽事,至日暮一宿,明日復至一宮,五日一周。置三十六將,每議事,一將不至則不議也。王出行,常使從人持一韋囊自隨,有白言者,受其辭投囊中,還宮乃省爲決理。以水晶作宮柱及器物。作弓矢。其別枝封小國,曰澤散王,曰驢分王,曰且蘭王,曰賢督王,曰汜復王,曰于羅王,其餘小王國甚多,不能一一詳之也。國出細絺。作金銀錢,金錢一當銀錢十。有織成細布,言用水羊毳,名曰海西布。此國六畜皆出水,或-{云}-非獨用羊毛也,亦用木皮或野繭絲作,織成氍毹、毾㲪、罽帳之屬皆好,其色又鮮于海東諸國所作也。又常利得中國絲,解以爲胡綾,故數與安息諸國交市於海中。海水苦不可食,故往來者希到其國中。山出九色次玉石,一曰青,二曰赤,三曰黃,四曰白,五曰黑,六曰綠,七曰紫,八曰紅,九曰紺。今伊吾山中有九色石,即其類。陽嘉三年時,疏勒王臣槃獻海西青石、金帶各一。又今西域舊圖-{云}-罽賓、條支諸國出琦石,即次玉石也。大秦多金、銀、銅、鐵、鉛、錫、神龜、白馬、硃髦、駭雞犀、玳瑁、玄熊、赤螭、辟毒鼠、大貝、車渠、瑪瑙、南金、翠爵、羽翮、象牙、符采玉、明月珠、夜光珠、真白珠、虎珀、珊瑚、赤白黑綠黃青紺縹紅紫十種流離、璆琳、琅玕、水精、玫瑰、雄黃、雌黃、碧、五色玉、黃白黑綠紫紅絳紺金黃縹留黃十種氍毹、五色毾㲪、五色九色首下毾㲪、金縷繡、雜色綾、金塗布、緋持布、發陸布、緋持渠布、火浣布、阿羅得布、巴則布、度代布、溫宿布、五色桃布、絳地金織帳、五色鬥帳、一微木、二蘇合、狄提、迷迷、兜納、白附子、薰陸、郁金、芸膠、薰草木十二種香。大秦道既從海北陸通,又循海而南,與交趾七郡外夷比,又有水道通益州、永昌、故永昌出異物。前世但論有水道,不知有陸道,今其略如此,其民人戶數不能備詳也。自蔥領西,此國最大,置諸小王甚多,故錄其屬大者矣。澤散王屬大秦,其治在海中央,北至驢分,水行半歲,風疾時一月到,最與安息安穀城相近,西南詣大秦都不知-{里}-數。驢分王屬大秦,其治去大秦都二千里。從驢分城西之大秦渡海,飛橋長二百三十-{里}-,渡海道西南行,繞海直西行。且蘭王屬大秦。從思陶國直南渡河,乃直西行之且蘭三千里。道出河南,乃西行,從且蘭復直西行之汜復國六百里。南道會汜復,乃西南之賢督國。且蘭、汜復直南,乃有積石,積石南乃有大海,出珊瑚,真珠。且蘭、汜復、斯賓阿蠻北有一山,東西行。大秦、海西東各有一山,皆南北行。賢督王屬大秦,其治東北去汜復六百里。汜復王屬大秦,其治東北去于羅三百四十-{里}-渡海也。于羅屬大秦,其治在汜復東北,渡河,從于羅東北又渡河,斯羅東北又渡河。斯羅國屬安息,與大秦接也。大秦西有海水,海水西有河水,河水西南北行有大山,西有赤水,赤水西有白王山,白玉山有西王母,西王母西有脩流沙,流沙西有大夏國、堅沙國、屬繇國、月氏國、四國西有黑水,所傳聞西之極矣。北新道西行,至東且彌國、西且彌國、單桓國、畢陸國、蒲陸國、烏貪國,皆並屬車師後部王。王治于賴城,魏賜其王壹多雜守魏侍中,號大都尉,受魏王印。轉西北則烏孫、康居,本國無增損也。北烏伊別國在康居北,又有柳國,又有岩國,又有奄蔡國一名阿蘭,皆與康居同俗。西與大秦東南與康居接。其國多名貂,畜牧逐水草,臨大澤,故時羈屬康居,今不屬也。呼得國在蔥嶺北,烏孫西北,康居東北,勝兵萬餘人,隨畜牧,出好馬,有貂。堅昆國在康居西北,勝兵三萬人,隨畜牧,亦多貂,有好馬。丁令國在康居北,勝兵六萬人,隨畜牧,出名鼠皮,白昆子、青昆子皮。此上三國,堅昆中央,俱去匈奴單于庭安習水七千里,南去車師六國五千里,西南去康居界三千里,西去康居王治八千里。或以爲此丁令即匈奴北丁令也,而北丁令在烏孫西,似其種別也。又匈奴北有渾窳國,有屈射國,有丁令國,有隔昆國,有新梨國,明北海之南自復有丁令,非此烏孫之西丁令也。烏孫長老言北丁令有馬脛國,其人音聲似雁騖,從膝以上身頭,人也,膝以下生毛,馬脛馬蹄,不騎馬而走疾馬,其爲人勇健敢戰也。短人國在康居西北,男女皆長三尺,人衆甚多,去奄蔡諸國甚遠。康居長老傳聞常有商度此國,去康居可萬餘-{里}-。魚豢議曰:俗以爲營廷之魚不知江海之大,浮游之物不知四時之氣,是何也?以其所在者小與其生之短也。餘今氾覽外夷大秦諸國,猶尚曠若發蒙矣,況夫鄒衍之所推出,大易、太玄之所測度乎!徒限處牛蹄之涔,又無彭祖之年,無緣讬景風以迅遊,載騕褭以遐觀,但勞眺乎三辰,而飛思乎八荒耳。

참고 문헌[편집]

역주[편집]

  1. 상서》(尙書) 또는 《서경》(書經)은 중국 유교의 5경(五經) 가운데 하나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2. 오랑캐. 옛날 한인(漢人)이 중국 남쪽에 있는 종족(種族)과 동쪽에 있는 종족(種族), 즉 남만동이(南蠻東夷)을 일컫던 말이다.
  3. 상서》 〈순전(舜典)〉 “帝曰皋陶蠻夷猾夏寇賊姦宄”(황제가 이르시기를, 고요여! 만이가 중국을 어지럽히고, 도둑 떼들이 안팎에 들끓고 있소.)
  4. 《시경(詩經)》은 중국 최초의 시가집이다. 공자가 문하의 제자를 교육할 때, 주나라 왕조의 정치적 형태와 민중의 수용 태도를 가르치고 문학·교육에 힘쓰기 위하여 편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주나라 때, 흉노를 일컫는 말이다.
  6. 《시경》 〈小雅‧南有嘉魚之什‧六月〉“玁狁孔熾,” (험윤이 매우 강성하다.)
  7. 진나라(秦,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6년)는 시황제에 의해 전국 시대를 통일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제국이다.
  8. 한(漢, 기원전 206년 ~ 220년)은 진 이후의 중국의 통일 왕조이다.
  9. 흉노(匈奴)는 기원전 3세기부터 5세기까지 몽골 및 중국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민족이다.
  10. 한무제 유철(漢武帝 劉徹, 기원전 156년 ~ 기원전 87년)은 전한의 제7대 황제(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이다. 해외 원정을 펼쳐 흉노, 위만조선 등을 멸망시켜 당시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만들어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
  11. 양월은 동월(東越: 지금의 절강(浙江), 복건연해(福建沿海)) 및 남월(南越: 지금의 광동(廣東), 광서(廣西) 및 베트남 북부(越南))를 일컫는다.
  12. 황복은 중화사상에 있어서 가장 바깥 쪽에 해당한다. 《상서》 〈우공〉 참조: “五百里荒服:三百里蠻,二百里流。”((요복과 황복의 경계로부터) 300리 이내는 만족(蠻族)이 (거주하게 하고, 그로부터) 200리 이내는 유배지로 삼았다.)
  13. 흉노의 기병.
  14. 위청(衛靑, ? ~ 기원전 106년)은 전한의 한 무제의 장군으로 장평후(長平侯)가 되었다.
  15. 곽거병(霍去病, 기원전 140년 ~ 기원전 117년)은 전한의 무제 시대의 무장으로 무제의 처조카이다.
  16. 선우는 흉노제국의 황제를 나타내는 말이다. 선우 밑에 여러 명의 왕을 두었는데, 이 왕은 평화 시에는 번왕이나 제후로서 다스리고 전쟁 시에는 장군으로서 싸웠다.
  17. 건안(建安)은 중국 후한(後漢) 헌제(獻帝)의 세 번째 연호이다. 196년에서 220년 3월까지 24년 3개월 동안을 말한다.
  18. 호주천(呼廚泉, ? ~ ?, 재위 195년 ~ 216년)은 중국 후한과 삼국시대에 걸친 흉노의 선우로, 남흉노의 선우 강거(姜渠)의 아들이며 어부라(於扶羅)의 동생이다.
  19. 흉노의 정치제도에 있어서 지위의 하나.
  20. 원상과 원희는 원소의 아들들이다.
  21. 답돈(蹋頓, ? ~ 207년)은 오환(烏丸)의 왕이다. 구력거(丘力居)의 조카이며 누반(婁班)의 사촌형이다.
  22. 205년 1월, 원희의 부하 장수 초촉(焦触)과 장남(張南)이 원희를 배반하여 공격했기 때문에 원상과 원희는 원소에게 우호적이었던 오환족의 답돈에게 피신해야 했다.
  23. 묵돌이라는 이름은 투르크어의 Bayatur(바야투르, 용감한 자)를 한자로 음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4. 손자병법》 〈시계제일〉 (始計第一) “攻其無備 出其不意”(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곳을 공격하고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출격하라.)
  25. 필궤(?~249년)의 자는 소선(昭先)이고, 예주 동평국(현재의 산동성 동평현) 사람이다.
  26. 청룡(靑龍)은 중국 조위(曹魏) 명제(明帝)의 두 번째 연호이다. 233년 2월에서 237년 2월까지 4년 1개월 동안 사용하였다.
  27. 원문은 穹廬. 이를 현대의 유르트(yurt)에 연관짓기도 한다.
  28. 부인(婦人)의 머리 치장을 뜻한다.
  29. 관(冠)의 일종으로, 걸어다니면 흔들리는 장식으로 만들어 머리에 쓰는 관(冠)을 말한다.
  30. 아비가 계모를 남기고 죽으면 그 아들은 계모를 처로 삼고, 형이 죽으면 형수를 처로 삼는다. w:형사취수(兄死娶嫂) 참조.
  31. 즉, 옛 지아비와 합장(合葬)한다.
  32. 태산(泰山)은 중국 산둥 성 타이안 북쪽에 있는, 중국 본토의 대표적인 산 가운데 하나이고, 산둥성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최고봉은 1535 미터 높이의 옥황봉이다. 중국의 다섯 명산인 오악 가운데 하나로, 예부터 신령한 산으로 여겨졌으며, 진 시황제나 전한 무제, 후한 광무제 등이 천하가 평정되었음을 정식으로 하늘에 알리는 봉선의 의식을 거행한 장소이다.
  33. 한서에서는 호연제(壺衍提)라고 표시되어 있다. 재위는 기원전 85년 ~ 기원전 68년이다.
  34. 작은 나라의 왕
  35. 요동속국(遼東屬國)·요서(遼西)·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광양(廣陽)· 상곡(上谷)·대군(代郡)은 유주(幽州) 에 속하는 지명이고,안문(鴈門)·태원(太原)·삭방(朔方)은 병주(幷州)에 속하는 지명이다.
  36. 영평(永平)은 중국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연호이다. 서기 58년에서 75년까지 18년 동안 사용하였다.
  37. 한 효안황제 유호(漢 孝安皇帝 劉祜, 94년 ~ 125년, 재위 106년 ~ 125년)는 후한의 6대 황제이다.
  38. 거기장군(車騎將軍)은 전한 이후의 관직명으로써 군을 이끄는 장군 중 하나이다. 간혹 차기장군이라 부르기도 하나 거기장군이 맞는 독법이다. 전통적으로 한나라에서는 외척이 이 지위에 많이 취임했다.
  39. 우림은 전한 때 설치된 황제 직속의 부대명칭이다.
  40. 한 효순황제 유보(漢 孝順皇帝 劉保, 115년 ~ 144년, 재위 125년 ~ 144년)는 후한의 8대 황제이다.
  41. 재위기간은 168년 ~ 189년이다.
  42. 188년 음력 3월의 일이다.
  43. 원소가 한복을 협박하여 기주를 빼앗는 데 공손찬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원소와 공손찬이 대립하게 되었다.
  44.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에는 ‘覆’(덮을 복)라 표기되어 있으나, 중국어 위키문헌의 영웅기에 표기된 ‘旄’(깃대장식 모)를 취한다.
  45. 205년 음력 1월의 일이다.
  46. 범엽 (5세기) 《후한서》 〈권90 오환선비열전(烏桓鮮卑列傳)〉 에는 건안 12년 (207년)이라 기록되어 있다.
  47. 당시 독자적인 세력을 이끌면서 오랫동안 재야의 명사로 지냈던 전주(田疇)는 평소 오환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조조가 오환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리를 모아 조조에게 합류했는데 그는 2백년 동안 이용이 끊겨 잊혀져 있던 고로를 안내하며 진군할 것을 권했고, 이를 받아들인 조조는 작전을 완전히 수정하여 노룡(盧龍)방면의 길을 통해 오환의 본거지를 향해 잠행한다. 이때 조조는 퇴각을 위장하고 있었고, 오환은 노룡을 통한 샛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48. 상서》 〈우공(禹貢)〉 “東漸于海西被于流沙朔南暨聲教訖于四海”(동쪽은 바다에 다다랐고 서쪽으로는 사막에 이르렀다. 북과 남쪽으로는 명성과 교화가 세상에 모두 미치었다〔達〕.)
  49. 구복(九服)의 제도(制度)는 중국 고대제도의 하나로서, 왕기(王畿)의 외부(外部)를 나누어 9개의 지역을 설정한 것이다. 《주례》(周禮) 〈하관사마〉(夏官司馬) 직방씨(職方氏) 조(條) “九服之邦國,方千里曰王畿,其外方五百里曰侯服,又其外方五百里曰甸服,又其外方五百里曰男服,又其外方五百里曰采服,又其外方五百里曰衛服,又其外方五百里曰蠻服,又其外方五百里曰夷服,又其外方五百里曰鎮服,又其外方五百里曰藩服。”(구복의 나라는 둘레 천리를 왕기라 하고, 그 바깥쪽으로 오백리를 후복이라 하고, 그 바깥쪽으로 오백리를 전복이라 하고, 그 바깥쪽으로 오백리를 남복이라 하고, 그 바깥쪽으로 오백리를 채복이라 하고, 그 바깥쪽으로 오백리를 위복이라 하고, 그 바깥쪽으로 오백리를 만복이라 하고, 그 바깥쪽으로 오백리를 이복이라 하고, 그 바깥쪽으로 오백리를 전복이라 하고, 그 바깥쪽으로 오백리를 번복이라 한다.)
  50. 삼국(三國) 시대(時代) 성립(成立) 이전(以前) 우리나라의 여러 부족(部族) 국가(國家) 시대(時代)에 존재(存在)했던 지역(地域) 공동체(共同體)를 말한다.
  51. 현도군(玄菟郡)은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기원전 107년에 세운 한사군(漢四郡) 중 하나이다.
  52. 공손탁(公孫度, ? ~ 204년)은 같은 군 출신인 동탁(董卓)의 수하 장수 서영(徐榮)의 추천을 받은 뒤 요동 태수가 되었으나, 중원 지역이 혼란해지자 왕을 자처하며 독립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는 산동 반도의 동부 지역 및 주변 지방을 공략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
  53. 위구태왕(尉仇台王, ? ~ ?)은 부여의 왕으로 이름은 위구태(尉仇台)이다. 구태(仇台)라고도 하며, 백제 건국 시조로 전하는 구태(仇台, 또는 우태(優台)와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또한 위구태왕 이전에 위구태라는 부여의 왕자가 사료에서 나타나는데, 위구태왕과 다른 인물로 보인다.
  54. 요동군(遼東郡)은 고대 중국의 왕조들이 랴오닝 성 동부에 설치한 행정구역이다.
  55. 간위거(簡位居王, 생몰년 및 재위년 미상)은 부여의 왕으로 이름은 간위거(簡位居)이다. 위구태왕(尉仇台王)의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되었다.
  56. 마여(麻余王, 생몰년 미상, 재위년 미상)은 부여의 왕으로 이름은 마여(麻余)이다. 간위거왕의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되었다.
  57. 제가(諸加) 중 하나이다. 사람 이름이 아니다.
  58. 위(魏, 220년 ~ 265년)는 후한이 멸망한 후 삼국 중 하나로 삼국 중 가장 강대했던 나라였다. 조위(曹魏)라고 부르기도 한다.
  59. 정시(正始)는 중국 위나라의 황제 조방(曹芳)의 첫 번째 연호이다. 240년에서 249년 4월까지 9년 4개월 동안 사용하였다.
  60. 앞선 문장에서 우가의 형의 아들이 위거라고 하였으므로, 위거의 계부(막내 삼촌)가 우가인 것이다.
  61. 의려(依慮王, 생몰년 미상, ? ~ 285년)은 부여(夫餘)의 왕으로 이름은 의려이다. 선비족 모용외의 침입을 받아 나라가 멸망당하고 자살하였다.
  62. 공손 연(公孫淵, ? ~ 238년 8월 23일)은 서기 3세기 요동 지방의 세력가이자 연나라(燕)의 왕으로, 자는 문의(文懿)이다.
  63. 왕충(1세기),《논형》(論衡) 〈제9편〉에서는 ‘탁리’(橐離)라고 표기하고 있다.
  64. 왕충(1세기),《논형》(論衡) 〈제9편〉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王欲殺之。婢對曰:「有氣大如雞子,從天而下,我故有娠」。後產子,捐於豬溷中,豬以口氣噓之,不死;復徙置馬欄中,欲使馬借殺之,馬復以口氣噓之,不死。王疑以為天子,令其母收取奴畜之,名東明,令牧牛馬。東明善射,王恐奪其國也,欲殺之。東明走,南至掩水,以弓擊水,魚鱉浮為橋。東明得渡,魚鱉解散,追兵不得渡,因都王夫餘。故北夷有夫餘國焉。” (북이(北夷)의 탁리(橐離) 국왕의 시녀가 임신하자, 왕이 그를 죽이려 하였다. 시녀가 대답하기를, “닭걀과 같은 큰 기운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제가 임신하였사옵니다.” 하였다. 그 뒤에 아이를 낳아, 돼지 우리 중에 버렸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옮겨 마굿간 가운데에 놓아 두어, 말을 핑계 삼아 그것을 죽이게 하고자 하였으나, 말이 다시 입김을 불어 넣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천자(天子)가 아닐지 괴이하게 여기고는, 그 어미에게 거두어 그것을 기르게 하였으며,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라고 명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그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웠기에 그를 죽이려 하였다.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엄수(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가 되어, 동명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으므로 쫓던 병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부여(夫餘)를 도읍으로 삼아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북이(北夷)에는 부여국이 존재하게 되었다.)
  65. 왕망(기원전 45년 ~ 기원후 25년 10월 6일)은 중국 전한(前漢)의 관료이자 신(新)나라의 황제이다.
  66. 후한서 고구려전: 왕망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는) 고구려의 후(候)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
  67. 범엽, 《후한서》(5세기), 〈제85권〉 “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흙은 비옥하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오곡에 적합하며 밭농사에 좋다.)
  68. 사마천(기원전 1세기),《사기》〈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王之,都王險。” (위만(魏滿)이 망명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의복을 입고 [...] 왕이 되어 왕검(王險)을 도읍으로 삼았다.)
  69. 목지국(目支國)을 말한다.
  70. 고비리국(古卑離國)을 말한다.
  71. 앞에서 이미 한번 언급되었다.
  72. 연나라는 지금의 베이징 부근, 제나라는 지금의 산둥성 부근에 있던 나라이고, 중국 통일 전의 진나라는 이들 연·제보다 내륙에 있었으므로, 한반도에서의 위치는 연·제가 더 가깝다.
  73. 소국 정도의 세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규모의 독자적인 정치 집단을 말한다.
  74. 다른 기록에는 우유국(優由國)
  75. 이상 나열한 24개국 중 "변진~", "변~"으로 된 12개국이 변진(변한)에 속하고 나머지 12개국이 진한에 속한다.
  76. 이덕일 (1999). 《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 세종서적. 18쪽. ISBN 89-8407-020-3. "여기서 '국(國)'이 어디를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문맥상 가야가 위치했던 변한일 가능성이 높다. 그 중에서도 김해의 구야국(가락국)이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라이선스[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