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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제11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얘 금분아."

"네에."

"넌, 저 달이 뭐만큼 커 뵈니?"

"……양푼만해요."

"넌? 창례는?"

"……맷방석만헌데요."

"아유! 가지뿌렁허지 마라 얘. 어쩌문 저 달이 맷방석만허다니?"

"쟨 누구더러 가지뿌렁이래. 아, 그래 저 달이 양푼만허문, 고 속에서 옥토끼가 어떻게 방아를 찧는단 말이냐?"

"그럼 얘야, 맷방석 속에선 어떻게 방아를 찧니?"

마루 끝에 걸터앉아서 송편을 빚던 두 소녀는 팔월 열나흗날 밤 구름 한 점 없는 중천에 둥두렷이 떠오른 달을, 눈 하나를 째굿 하고 손가락으로 재보다가 서로 호호거리며 웃는다.

"그렇죠, 네? 선생님. 그런데 참 정말 저 달 속에서 옥토끼가 방아를 찧는대유?"

영신은 바늘을 잡았던 손을 쉬며 달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그건 옛날버텀 전해 내려오는 얘기란다. 그런 건 없어두, 커다란 망원경이란 걸 대구 보면은 사람이나 짐승 같은 건 없지만 달 속에두 산이 있구 시내 같은 게 있단다."

"그럼, 그 물이 어디루 쏟아진대유?"

"아이구 어쩌나. 우리 머리 위루 막 쏟아지문……."

"아냐, 달 속의 냇물은 바짝 말러붙었단다."

"날이 가물어서요?"

"그럼 달 속엔 줄창 숭년만 들겠네."

"참 햇님은 신랑이구, 저 달님은 새색시라죠? 그게 정말이야유?"

계집애들이 줄달아 묻는 말에 영신은,

"글쎄…… 그런 건 다 지어낸 말이니깐……."

하고 웃으며 우물쭈물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주의 신비에 눈을 뜨기 시작한 천진덩이인 아이들의 질문에, 영신은 똑바른 대답을 해줄 만한 천문학의 지식도 없지만, 설명을 해준대도 계집애들이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 동안 한곡리에서는 농우회관을 낙성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영신은 슬그머니 성벽이 나서,

'청석골은 그버덤 곱절이나 큰 학원집을 짓고야 말겠다.'

는 야심이 불일듯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기부금도 걷지 못하게 되어서, 백방으로 생각하다가 추석날을 이용해서 이 시골 구석에서는 처음인 학예회 같은 것을 추석놀이 겸 열고, 다소간이라도 집을 지을 밑천을 얻으려고 두 달째나 그 준비에 골몰해 왔었다.

오늘 저녁은 학예회에 출연할 아이들을 마직막으로 연습을 시켜서 돌려보내고, 유희하는 데 나오는 여왕에게 씌워 줄 종이 면류관을, 마분지로 오리고 금지로 배접을 해서는 그것을 꿰매고 앉은 것이다. 그날 입힐 복색까지도 영신이와 원재 어머니가 며칠씩 밤을 새우며 꿰매 놓았다.

한편으로는 부인 친목계의 회원들이 조석으로 한 숟가락씩 모은 쌀을 빻아 풋밤과 호박고지를 넣고 시루떡을 찌고, 그들이 손수 심고 거두어들인 햇팥과 콩으로 소를 넣어 송편을 빚는데, 금분이랑 창례랑 집 가까운 아이들이 모여 와서 한몫을 본다. 이 떡은 내일 추석놀이가 끝이 나면 아이들에게 상금처럼 나누어 주려는 것이다.

영신은 달빛에 번쩍번쩍하는 가위를 놀리다가 몇 번이나 그 손을 쉬고 머리를 떨어뜨렸다. 금분이나 창례만할 때에, 그때도 추석 전날 오늘처럼 달이 초롱같이 밝은데, 낮에 동산에서 주워다 둔 밤과 풋대추를 가지고 마루에서 사촌동생과 공기를 놀던 생각이 났다. 그것을 죽은 오라비에게 송두리째 빼앗기고 몸부림을 치며 울다가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듣던 생각이 났다. 울다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과 대추가 대소쿠리에 소복이 담겨서 머리맡에 놓여 있지 않았었던가.

그 신기하던 생각이 바로 어제런 듯 눈에 선하다.

"얘들아, 창가나 하나 허렴."

향수에 잠긴 영신은 면류관을 집어 던지고 방으로 들어가 손풍금을 들고 나왔다. 그것을 본 계집애들은 미리 신이 나서,

"선생님 뭘 허까유? '이태백이 놀던 달아'를 허까유?"

하면서 손뼉을 쳐서 떡가루를 털며 영신의 앞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왜 요전번에 가르쳐 준 거 있지? 낼 저녁에 너희 반에서 헐 거 말야. 그 창가를 날 따라서 불러 봐."

"옳지, 난 알어. 그 창가 난 알어."

맨 꼬랑지에 앉았던 복순이가 내닫는다. 손풍금은 처음에는 '조선의 꽃'을 타다가, 어느덧 '갈매기의 노래'로 멜로디가 옮겼다. 제 손으로 고요히 반주를 해가며 그 처량한 노래를 나직이 부르는 영신의 눈에는 고향의 산천과 한곡리 바닷가의 달밤이 번차례로 지나간다. 안개 속과 같이 아련히―--- 꿈속처럼 어렴풋이―---

그러다가 영신은 노래를 그치고 손풍금을 힘없이 무릎 위에 떨어뜨리며 기다란 한숨과 함께 눈을 내리감았다.

계집애들은 멋도 모르고,

"아이 재밌다! 재밌다!"

하고 손뼉을 치는데, 평생을 외롭게 사는 원재 어머니도 처량한 생각이 들어서 행주치마 끝으로 눈두덩을 누르며 돌아앉았다.

그날 밤 영신은 어머니를 꿈속에 만나서 마주 붙들고 느껴느껴 울었다. 그러다가 새벽녘에는 동혁이와 첫날밤을 치르는 꿈을 꾸었다. 엄마가 그리워 헤매어 다니던 어린 물새처럼 지쳐 늘어진 날개를 그의 따뜻한 품속에 조심스러이 깃들인 꿈을…….

추석날은 장거리에서 물 위와 물 아래 동리를 편을 갈라서 줄을 다린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그리로는 장정들만 한 십여 명쯤 갔을까, 그 밖에 청석골의 남녀노소가 모두 예배당으로 모여들었다. 몇십 리 밖에서 단체를 지어 온 사람도 수십 명이나 된다. 말똥구리 굴러가는 것도 구경이라고, 구경이라면 머리악을 쓰고 덤벼드는 여편네들은, 정각 전부터 예배당 마당이 빽빽하도록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시집올 때 입었던 단거리 비단 저고리 치마를, 개켜 둔 자국도 펴지 않은 채 뻗질러 입고, 두 눈구멍만 남기고는 탈바가지처럼 분을 하얗게 뒤집어쓴 새댁네도 섞였다.

그네들은 사철 동이를 이고 논 귀퉁이의 샘으로 물을 길러 다니고, 이웃집에 마실을 다녀 본 것밖에 소위 명절날이라고 구경을 나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예배당 벽을 의지하고 송판 쪽으로 가설한 무대 좌우에는 커다란 남포를 켜고 검정 장막을 내리쳤다. 흙방 속에서 면화씨만한 등잔불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전등이란 구경도 못 하였지만 이 남폿불만 하여도 대명천지로 나온 것만치나 눈이 부시도록 밝았다.

청년회(그것도 근자에 영신이가 발설을 해서 조직을 한 것이다)의 회원들과 부인 친목계의 회원들은 가슴에다가 종이꽃을 하나씩 꽂고 나섰다.

아이들은 앞줄에다 앉히고, 물밀듯이 달려들며 떠드는 구경꾼들의 자리를 정돈시키느라고 거진 한 시간 동안이나 걸렸다. 동네에 있는 멍석과 가마때기를 깡그리 몰아다가 깔았건만, 땅바닥으로 밀려나간 사람이 태반이다. 나중에 온 사람들은, 그때 쫓겨 나간 아이들처럼 담 밖에서 넘겨다보고 뽕나무로 올라가는 성황을 이루었다.

영신이도 새 옷을 깨끗하게 갈아입고 처음으로 분때를 다 밀었다.

"얘, 오늘 저녁엔 우리 선생님이 여간 이뻐 뵈지 않는구나."

"언젠 우리 선생님이 숭허드나? 분 한번 안 바르시니깐 사내 얼굴 같지."

무대 앞에 앉은 계집애들이 개막할 시간이 되어서 쩔쩔매고 오르내리는 영신을 쳐다보고 소곤거린다. 아닌게아니라, 오늘 저녁의 영신은 달빛에 보아 그런지 담 밖을 넘겨다보는 한 송이 목련화처럼 탐스러워 보였다.

"따르르……."

목각종 치는 소리가 나더니 막이 드르르 열렸다. 선생이 막 뒤에서 반주하는 손풍금 소리를 따라, 공작새처럼 색색이 복색을 한 계집애들이 나와서 창가를 한다. 눈이 푹푹 쌓이는 날도 홑고쟁이를 입고 다니던 금분이가 연분홍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와서 유희를 해가며 가냘픈 목소리로 동요를 한다.

"흥, 아무튼 가르치구 볼 게여."

"여부가 있나. 선녀들 놀음 같은걸."

늙은이 축에서도 매우 감탄하는 모양이다. 막은 몇 번이나 열렸다 닫혔다. 손뼉도 칠 줄 모르고 떠들던 구경꾼들은 평생 처음 구경하는 아이들의 재롱에,

'내 딸은 언제 나오나.'

하고 마른침을 삼키며 다음 순서를 기다린다.

휴식 시간이 지난 뒤에 학예회는 제이부로 들어갔다. 여자 상급반의 아이들이 나와서 가극 비슷한 여왕 놀음을 하는데, 황금빛이 찬란한 면류관을 쓰고 옥좌 위에 가 점잖이 앉았던 옥례가, 서캐가 무는지 자꾸만 뒷머리를 긁다가 그 관이 앞으로 벗어졌다. 황급히 집으려는데 마침 바람이 홱 불어 종이 면류관은 떼굴떼굴 굴러서 무대 아래로 떨어지려고 한다.

옥례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애구머니! 절 어쩌나."

하며 그 관을 집으려고 허겁지겁 달려들다가 그만 미끄러졌다. 넘어졌다 일어나 보니, 면류관은 자반처럼 납작하게 찌부러졌다. 그것을 보자 마당에서는 떼웃음이 까르르 하고 터졌다.

어떤 마누라는 부처님 앞에 절을 하듯이 연방 합장을 하면서 허리를 잡는데, 옥례는 엉엉 소리를 내어 울면서 무대 뒤로 뛰어들어갔다.

끝으로 남학생들의 '흥부 놀부' 놀음도 여러 사람의 웃음보를 터트렸다. 흥부가 어색하게 달고 나온 수염이 붙이면 떨어지고 붙이면 떨어지고 하다가, 나중에는 머리카락으로 만든 수염이 콧구멍을 간질어서, '앳취!' 하고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수염은 몽땅 떨어져 달아났다.

여러 사람의 웃음은 한참 만에야 진정이 되었다. 이번에는 올해 일곱 살밖에 아니 된 갓난이란 계집애가, 반은 선생에게 떠다밀려서 무대 한복판으로 나왔다. 커다란 리본을 단 머리를 숙여 나비처럼 곱다랗게 절을 하고는, 딱 기착을 하고 서서 두 눈을 깜박깜박하더니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오늘 저녁에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는데, 이처럼 여러분께서 많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부자연하게나마 글을 외듯이 한마디를 하고는 말문이 막혀서 할낏할낏 뒤를 돌려다본다. 선생이 막 뒤에 숨어서,

"우리들이 살기는 구차하지만……."

하고 뚱겨 주는 소리가 여러 사람의 귀에까지 들린다.

"우리들이 살기는 구차하지만, 열심으로 배우면 이렇게 창가도 하고 유희도 할 줄 안답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우리 강습소를 도와주시고, 하루바삐 새 집을 커다랗게 짓고, 내년에는 그 집에서 추석놀이를 썩 잘하게 해주십쇼."

하고는 다시 예를 납신 하고 아장아장 걸어들어간다.

앵무새처럼 선생의 입내를 내는 것이 어찌나 귀여운지,

"아이 고것 앙증두 스러웨. 조게 사봉이 딸년이지?"

하고 어떤 마누라는 한번 안아나 주려고 무대 뒤로 쫓아들어간다.

끝으로 손풍금 소리가 다시 일어났다. 아이들은 무대 위와 아래로 가지런히 벌려 서서 일제히 목청을 높인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이 주신 내 동산

하고 제이백십구장 찬송가를 부른다.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하고 후렴을 부를 때, 아이들은 신이 나서 팔을 내저으며 발을 구르며 목청껏 소리를 지른다.

어느 틈에 원재를 위시하여 청년들과 친목계의 회원들까지 따라 불러서 예배당 마당이 떠나갈 듯하다. 이 노래는 한곡리서 애향가를 부르듯이 무슨 때에는 교가처럼 부르는 것이다.

찬송가가 끝나자 원재 어머니는 회원들을 대표해서 먹글씨로 커다랗게 쓴 백지를 무대 정에다가 붙이고 내려간다.

一金 貳百七拾圓也 靑石洞婦人親睦契員 一同

이 종이쪽을 보고 놀란 것은 비단 학부형뿐이 아니다. 이때까지 여러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던 영신이도 무대 뒤에서 제 눈을 의심할 만치 놀라서,

"저게 웬일이야요?"

하고 한달음에 원재 어머니의 곁으로 갔다.

"아까 회원들이 다 모인 김에 우리가 입때꺼정 저금헌 걸 새 집 짓는 데 죄다 내놓기루 했어요."

한다. 영신은 감격에 겨워 눈을 딱 감고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섰다. 영신의 덕택으로 호미와 절굿공이와 오줌동이밖에 모르고 지내던 자기네부터 글눈을 떴거니와, 오늘 저녁에 자기네가 금지옥엽같이 기르는 자녀들이 그처럼 신통하게 재주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평생 처음으로 크나큰 감동을 받은 그들은,

'오냐, 우리네 자녀도 가르치면 된다. 남부럽지 않게 개화를 한다.'

하는 신념을 얻었다. 그래서 원재 어머니의 발설로 몇몇 해를 두고 별별 고생을 다 해가며 푼푼이 모은 저금을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송두리째 학원을 짓는 데 기부를 하게 된 것이다.

"허허, 이거 부인네들이 저 어려운 돈을 내놨는데, 사내 코빼기라구 가만 있을 수 있나?"

하고 늙은이들은 주머니 털음을 하고 타동 사람까지도 지갑을 뒤져서 당장에 칠 원 각수가 모였다. 몇백 명 틈에서 단돈 칠 원! 그러나 그네들이 시재 가진 돈이라고는 그밖에 없었다. 그것도 뜻밖의 큰돈인 것이다. 구경꾼들은,

'좀더 구경헐 게 없나.'

하고 서운한 듯이 떠날 줄 모르다가 하나씩 둘씩 흩어졌다. 영신은 아이들의 옷과 유희하던 제구를 챙겨 넣은 뒤에, 어젯밤 밤늦도록 빚은 송편과 시루떡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아, 저이들두 인제는 저만치나 깨어 가는구나.'

하니 저의 헌신적 노력이 갚아지는 듯 다시금 감격에 겨워 몇 번이나 그 떡이 목에 넘어가지를 않았다.

일년 중에도 가장 밝고 맑고 서늘한 추석날 저녁의 달빛은 예배당 마당으로 쏟아져 내린다. 영신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그 달이 기울도록 노래를 부르며 어린애와 같이 뛰놀았다. 기쁨과 행복이 온몸에 넘쳐서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 보이기만 하면 와락 달려들어 한바탕 머리를 꺼둘러 주고 싶었다. 뺨을 대고 그 기쁨을, 그 행복을 들부벼 주고 싶었다.

영신은 그 돈 이백칠십 원 중에서 반만 학원을 짓는 데 쓰리라 하였다. 그 돈을 다 들인대도 도저히 설계한 대로 지을 수는 없지만, 근근자자히 모은 근로계의 돈을 내놓았기로, 냉큼 송두리째 집어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위선 이것만 가지고 시작을 해보겠어요. 시작이 반이라는데, 설마 중간에 못 짓게야 될라구요. 기부금 적은 것만 들어오면……."

하고 회원들의 특별한 호의라느니보다도 일종의 희생적인 기부금을 굳이 반만 쓰겠다고 사퇴를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아무리 같은 통속이래도 잔약한 그네들에게만 의뢰를 하는 것은 근본 취지에 어그러진다. 내 힘으로 해야지, 내 힘껏 해보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드래도, 전수이 남의 도움만 받으려는 것은 우리네의 큰 결점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 이젠 집을 짓는구나!'

하니, 그는 미리부터 흥분이 되어서 잠이 아니 왔다. 어떻게 무엇부터 시작을 해야 할는지 엄두가 나지를 않아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니 교회에 관계하는 사람도 집 짓는 데는 모두들 손방이라, 누구와 의논조차 해볼 데가 없다.

'동혁 씨나 핑계 김에 공사 감독으로 불러 댈까? 한번 집을 지어 본 경험이 있으니…….'

하다가,

'아니다. 그건 공상이다.'

하고 어떻게든지 한곡리 회관보다 번듯하게 지어 놓은 뒤에, 낙성식을 할 때에나 버젓이 초대를 하리라 하였다. 그때까지는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꽁꽁 참으리라 하였다.

동네에 지위 명색이 두어 사람 있기는 하지만 닭의 장, 돼지우리나 고작해야 토담집이나 얽어 본 구벽다리뿐이다. 영신은 생각다 못해서 삼십 리 길을 걸어서 장터로 목수를 부르러 갔다. 재목은 마침 근동에서 발매를 하는 사람이 있다니까, 생목을 잡아 쓸 셈만 치고, 우선 안목이 있는 목수를 불러다가 의논이라도 해볼 심산이었다.

영신은 수소문을 해서, 면역소나 주재소 같은 관청 일을 도급으로 맡아 지었다는 젊은 목수 한 사람을 찾아보고는 무작정하고 데리고 왔다. 데리고 와서는,

"여보 피차에 젊은 터이니 품삯 생각만 허지 말구 모험을 한번 헙시다요. 우리 둘이서 이 학원 집을 짓는 셈만 치구 시작을 해서, 성공만 허면 당신의 이름두 나구 큰 공익사업을 허는 게 아니겠소?"

하고 학원을 시급히 지어야 할 사정과 돈이 당장에는 백여 원밖에 없다는 것을 툭 털어놓고 이야기를 한 후, 서랍 속에서 여러 가지로 그려 본 설계도를 꺼내어 보였다. 설계도를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앉았던 서글서글하게 생긴 목수는,

"그러십시다. 제 힘껏은 해봅죠. 돈 바라구 허는 일두 있구, 일 재미루 허는 일두 있으니깐입쇼."

하고 선뜻 대답을 하였다. 바다 밖으로까지 바람을 잡으러 다녀서 속이 터진 목수는 영신의 활발한 첫인상도 좋았거니와 자기의 사사로운 일이 아닌데, 물정을 모르는 신여성이 삼십 리 밖으로 저를 데리러 온 열성에 감복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핫비를 걸치고 짜개발을 하고는 남의 지청구만 받으며 따라다니던 사람이라, 처음으로 도편수가 되어서 제 의사껏 일을 해보게 되는 데 미리부터 어깻바람이 났던 것이다.

재목도 우거지 같은 떼를 써서 헐값으로 잡아서 실어 오고, 벽련하는 꾼에 자귀질 톱질꾼까지 불러다가는 엉터리로 일을 시작하였다.

집터는 온 동리가 내려다보이는 예배당 맞은쪽 언덕에다가 잡았다. 어느 교인의 소유로 삼백여 평이나 되는 것을, '돈이나 땅을 많이 가진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기는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도 어렵다'고 예수가 말한 비유까지 해가면서 사뭇 강제로 빼앗다시피 하였다.

집터를 닦는 날은 한곡리만치 풍성하지는 못하였다. 인심도 다르거니와 한창 벼를 베고 한편으로는 바심을 하기 시작한 때라 장정은 얻어 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영신은 청년회원들과 아이들까지 총동원을 시켰다.

'체면이구 뭐구 다 볼 때가 아니다!'

하고 그는 다리를 걷고 버선까지 벗어 던지고 덤벼들었다. 주춧돌을 메고 목도질을 해오려면 어깨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이 아팠다. 키동갑이나 되는 거성(큰톱)을 다려 주고, 껍데기도 아니 벗긴 물먹은 기둥 나무를 이리저리 옮기고 하느라고, 해 뜰 때부터 어둑어둑할 때까지 봉죽을 들어 주고 나면, 허리가 참나무 장작이나 댄 것처럼 꼿꼿하고 뼈끝마다 쏙쏙 쑤셔서 그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저러다 큰병이나 나면 어떡허시료?"

하고 부인네들은 쫓아다니며 한사코 말리건만, 영신이 자신부터 그런 일까지 나서서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어정버정하고 일들을 아니 한다. 또는 모군꾼 한 사람의 품삯이라도 절약을 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달밤을 이용해서 영신은 모래를 날랐다. 들것을 만들어 가지고 청년들과 마주잡이를 해서, 시냇가의 모래와 자갈을 밤늦도록 나르기를 여러 날이나 하였다.

한창 기운의 남자도 힘이 드는 일을 하다가 몹시 피곤하면 시냇가 모래밭에 두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서, 지쳐 늘어진 다리 팔을 제 손으로 주물렀다.

그것을 본 계집아이들은,

"내 주물러 드리께유."

"선생님, 내 주물러 드리께유."

하고 달려들어 다투어 가며 선생의 팔을 주무르고 다릿마디를 쳐준다.

영신은 마전을 한 통무명을 펼쳐 놓은 것같이 달빛에 비치는 시내를 내려다보다가 소녀 시대의 생각이 어렴풋이 나면은,

"얘, 우리 소꿉질허련?"

하고 사기그릇 깨진 것이나 조약돌을 주워 모아 제단을 만들었다 허물었다 하기도 하고, 모래로 성을 쌓기도 한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주께 새 집 다구."

해가며 도두룩하게 쌓아 올린 모래를 토닥토닥 두드리기도 한다. 그러면 참 정말 소녀와 같은 기분으로 돌아가서 지나간 그 옛날을 추억하느라고 비록 잠시나마 극도로 피곤한 것을 잊을 때도 있었다.

토역을 할 때에도 손이 째이면 맨발로 들어서서 흙을 이기고, 죽가래를 들고 진흙을 섬겨 주노라면 땀이 철철 흘러서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틈만 있으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네들은 집 짓는 것을 조금이라도 거들어 주려고 오는 것이 아니요, 젊은 여자가 아슬아슬한 데까지 걷어붙이고 상일을 하는 것이 신기해서 구경차로 모여드는 것이다. 남은 죽기 기를 쓰고 일을 하는 것을 입을 헤― 벌리고 바라다보는 것을 보고,

'왜 저렇게 얼이 빠진 사람처럼 머엉허니들 섰을까.'

하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그는 비릿비릿하게 일을 도와 달라는 말은 한마디도 아니 하였다.

……그럭저럭 집을 짓기 시작한 지 한 달이나 지나갔다. 젊은 목수는,

"이런 일은 번갯불에 담배를 붙이듯이 해치워야지 오래 끌수록 내 손해다."

하고 다른 봉족꾼들을 휘몰아서 일은 여간 빨리 진행이 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벌써 중방까지 꿰고 욋가지를 얽게 되었다. 이때까지 구경만 하던 동네 사람들도 영신이가 진종일 매달려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매우 감동을 받아,

"우리가 사내 명색을 허구, 그대루 볼 수는 없네."

하고 바심이 끝나자 와짝 모여들어서 청솔가지를 꺾어다가 두툼하게시리 물매를 잡아 새를 올리며 일변 초벽까지 끝이 났다.

그 중에도 부인 친목계의 회원들은,

"채선생님 혼자서 저렇게 일을 허게 내버려뒀다간 참말 큰일나겠구려. 집안일은 못 해두 위선 저 집버텀 지어 놔야 맘을 놓겠수."

하고 자기네 남편을 하나씩 끌고 와서 일이 부쩍부쩍 늘었던 것이다. 영신은 평생 소원이던 학원집이, 비록 설계한 대로 되지는 않았어도 한간 두간 꾸며 나가는 데 재미가 나서 여전히 침식을 잊고 지냈다. 늙으신 어머니를 그리워할 겨를도 없고, 토요일 저녁이면 무슨 일이 있든지 동혁에게 꼭꼭 써 부치던 편지도 두 번씩이나 거르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동혁에게서는,

"너무 과도하게 노력을 하다가 병이나 나지 않었느냐."

고 매우 궁금히 여기는 편지가 연거푸 왔다. 영신은,

"아이, 내가 집 짓는 데만 절망구를 해서……."

하고 어느 날 밤은 속눈썹이 쩍쩍 들러붙는 것을 참으면서 그 동안의 경과를 소상히 적고 인제는 만날 날이 가까워 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두 달 열흘 남짓해서 '청석학원'은 문패까지 걸게 되었다. 가장 돈이 많이 드는 내부의 수장은 손을 대지도 못하고 창에 유리도 끼지 못하였지만, 인제는 마루까지 놓았으니까 급한 대로 쫓겨간 아이들도 수용할 수는 있게 되었다. 아이들은 재벽한 것이 미처 마르기 전부터 모여들었다. 그 아이들이 우리 속에서 뛰어나온 토끼처럼 넓은 마루에서 깡충깡충 뛰고 미끄럼을 타고 뜀박질을 하다 못해서, 펄떡펄떡 재주를 넘으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을 볼 때, 영신은 기쁜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 자리에 쓰러져 죽어도 눈이 감길 성싶었다.

……낙성식을 하기 닷새 전기해서 영신은 동혁에게,

"무슨 일이 있든지 그날 꼭 와달라."

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좋은 일에 마가 든다는 것은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일까. 영신은 그 이튿날 아침 천만뜻밖에,

'모친위독즉래.'

라는 급한 전보를 받았다.

그날 밤으로 부랴부랴 길을 떠난 영신은 자동차에 시달린 몸을 기차에 실린 뒤까지도 놀란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다.

기차는 그믐밤의 어둠을 가르며 북으로 북으로 숨가쁘게 달린다. 한정거장 두정거장이 휙휙 뒷걸음질을 쳐서 고향이 가까워 올수록, 불안과 초조는 점점 더해 가는데 앞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거들떠보지도 않고 두 눈을 꽉 감은 채 생각에만 잠겼다.

'전보까지 쳤을 땐 암만해두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야.'

하는 방수끄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다지도 못 잊어하던 딸의 얼굴을 끝끝내 보지 못하고 외로이 숨을 거두는 어머니의 임종을 눈앞에 그려 보니 쌓이고 쌓였던 묵은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김정근과의 혼인 일로 청석골까지 오셨을 때 이틀 밤을 울며 밝히시다가,

"넌 내 자식이 아니다."

하고 돌아서실 때의 그 쓸쓸하던 뒷모양! 자동차가 떠날 때 차창을 스치는 저녁 바람에 한가닥 두가닥 휘날리던 서릿발 같은 머리털! 정처없이 굴러다니는 가랑잎처럼 마르고 찌든 그 노쇠한 자태!

'아아, 그 얼굴이 마지막이로구나!'

영신은 차창에 이마를 들부비며 소리를 죽이면서 흐느껴 울었다. 저 하나 공부를 시키려고 육십이 넘도록 생선 광주리를 내려놓지 못하시던 홀어머니를, 다만 몇 달 동안이라도 제 곁에 따뜻이 모시지 못한 생각을 할수록 저의 불효하였음이 뼈에 사무치도록 뉘우쳐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슨 병환이 드셨는지는 몰라도 노환일 것 같으면 급작히 위독하다는 전보까지는 치지를 않았을 터인데, 수산조합엔가 다니는 외삼촌이 한집에 모시고 있으면서 여지껏 엽서 한 장 아니 해주었을 리야 없지 않은가. 그럼 어느 해 여름처럼 뇌빈혈로 길거리에 졸도나 하지 않으셨을까.

오둑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들끓어서 영신은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하였다. 창 밖의 그믐밤보다도 마음속이 더 캄캄한데 입술이 타도록 조바심이 나서 좀 눕는 체하다가는 다시 일어앉았다 하는 동안에 기차는 북관 천리를 내처 달렸다.

기적은 동해변의 조그만 항구의 새벽 공기를 새되게 찢었다. 밤새도록 차창에 들부빈 머리를 빗어 올릴 사이도 없이 뛰어내렸건만, 플랫폼은 기차가 떠난 뒤처럼 휘덩그렇게 비었는데, 마중을 나온 몇 사람 중에서 영신을 맞아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출찰구에는 여관 이름을 쓴 초롱을 켜든 차인꾼들이 양 옆으로 벌려 서서 졸린 듯한 목소리로 손을 끄느라고 법석이건만, 거기서도 영신의 손을 잡아 줄 사람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눈에 띄지 않았다.

'마중을 나와 줄 경황두 없나 보다.'

하니 영신은 한층 더 불안해졌다. 그는 마악 전깃불이 나가서 황혼 때와 같이 으스레한 정거장 넓은 마당에서 머리를 들었다.

삼 년 만에 우러러보는 고향의 하늘! 그러나 영신은 아침볕이 벌겋게 물들어 오는 동녘 하늘을 빡빡한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이렇다할 감상이 일어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일분 일초가 바쁘게 집으로 가고는 싶건만, 바다와는 반대 방향으로 오 리나 되는 언덕 밑까지 타박타박 걸어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점방의 문도 열지 않은 길거리를 도망구니처럼 바스켓 하나를 들고 줄달음질을 쳐서 수산조합까지 왔다. 그러나 외삼촌이 다니는 사무소의 문은 굳게 닫혀 있지 않은가.

영신은 문을 흔들어 보다가 돌쳐서서 언덕길로 올라가다가 뿡뿡 하고 달려드는 버스와 마주쳤다.

'참, 그 동안 버스가 댕기게 됐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었네.'

하고 혼자말을 하고는 되돌아오면 타고 갈 양으로 정류장 앞에 가 비켜 서는데 등뒤에서,

"영신 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영신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홱 돌렸다.

버스가 미처 정거를 하기도 전에 허둥지둥 뛰어내리는 사내―---그는 틀림없는 김정근이었다.

"아, 웬일이세요?"

영신은 창졸간 부르짖듯 하였다. 여기서 만나기는 천만뜻밖이면서도 얼떨김에 정근이가 반갑기도 하였다.

"……"

검정 세루 신사 양복을 입은 정근은 모자를 벗고 은근히 인사를 하면서도 우물쭈물하고 얼핏 말대답을 못 한다.

"언제 이리루 오셨에요?"

영신은 정근이가 그 동안 이곳의 금융조합으로 전근이나 해온 줄 알고 채우쳐 물었다. 정근은 여자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면서 지난봄에 결혼 문제를 해결지어 달라고 청석골까지 갔을 때보다도 더 여윈 얼굴에 아침볕을 모로 받으며,

"저…… 지금 마중을 나가는 길인데요, 버스가 고장이 나서……."

하고는 계집애처럼 머리를 숙이고 말끝을 맺지 못한다.

"마중을 나오시다뇨? 누굴요?"

영신은 더욱 이상스러워서 연거푸 묻는다.

"영신 씨가 오실 줄 알구……."

"아아니, 내가 올 줄 어떻게 아셨에요?"

영신은 한길에서 정근에게 불심신문(不審訊問)이나 하듯 한다.

"얘긴 차차 허구 집으루 가시지요."

정근은 영신의 집 방향으로 돌아서며 무슨 죄나 지은 사람처럼 비실비실 걷기를 시작한다.

영신은 그 뒤를 바싹 대서며,

"그럼, 우리집엘 가보셨겠군요?"

하고 조급히 물었다. 정근은 어려서부터 이웃집에서 자라나서 영신의 어머니를 '아주망'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터이라, 무슨 일로든지 여기까지 왔으면야 저의 집에를 들렀을 듯해서 물어 본 것이다.

정근은 여전히 선선하게 대답을 못 하고 버스를 기다리는 듯이 연방 정거장 편만 돌려다본다.

"아, 어머니가 위독허시단 전보를 받구 오는 길인데요, 왜 말씀을 못 허세요?"

영신은 갑갑해 못 견디겠다는 듯이 발을 멈추며 정근을 돌려다보았다. 정근은 그제야,

"아무튼 같이 갑시다. 대단친 않으시니 안심허시구요."

한다. 다년 책상 앞에 꼬부리고 앉아서 주판질을 하고 철필 끝만 달리느라고 워낙 잔졸하게 생긴 사람이 허리까지 구부정해졌는데, 팔꿈치와 양복 바지 꽁무니는 책상과 의자에 반질반질하게 닳아서 걸음을 걷는 대로 번쩍거린다. 영신은 한 걸음 다가서며,

"정말 대단친 않으세요?"

하고 정근의 말을 흉내내듯 하였다. 어머니가 그 동안 돌아가지 않으신 것만은 확실해서 우선 마음이 놓이면서도,

'그럼, 어째서 전보까지 쳐서 바쁜 사람을 불러내렸을까?'

하는 의증이 더럭 났다.

"대체, 전본 누가 쳤어요?"

하고 의심에 빛나는 눈초리로 정근의 옆얼굴을 노려보는데, 등뒤에서 버스가 달려왔다. 정근은 대답할 것을 모면하고 손을 들어 버스를 세우더니,

"타구 가십시다."

하고 저부터 뛰어오른다. 영신은 잠자코 그 뒤를 따라 올랐다.

영신은 멀찌감치 떨어져 외면을 하고 앉았다. 어머니의 소식을 대강이나마 안 담에야 여러 사람 틈에서 이말 저말 묻기도 싫어서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얼마나 이상이 맞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갖은 복록을 다 누리며 사나 두고 보자.'

고 저주까지 하던 남자가 어쩌면 저다지도 떡심이 풀린 것처럼 풀기가 없을까? 왜 말대답도 시원히 못 할까? 대관절 여기는 무얼 하러 와서 나를 마중까지 나왔을까? 하니 눈앞에 앉은 정근이가 점점 더 의심스러워졌다.

어려서부터 학교에 다닐 때 보아 오던 거리에는 초가집이 거진 다 헐리고 얄따란 함석 지붕에 낯선 문패가 붙었다. 무슨 양조장이니 조선 요리 무슨 관(館)이니 하는 커다란 간판만 눈에 띄는데, 어머니가 생선을 받아 가지고 다니던 수산조합 도매장을 지날 때에 생선 비린내만은 여전히 코에 끼쳤다.

'아하, 우리 고향두 어지간히 변했구나!'

영신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금할 수 없었다.

영신을 불러내린 것은 정근의 조화였다. 영신이가,

"어머니!"

하고 집으로 뛰어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병들어 눕기는커녕 정지에서 아침 반찬을 할 것인지 생선을 다루고 섰지 않은가.

"앙이 우리 영싱이!"

하고 반색을 하며 마당의 아침볕을 받으며 내닫는 어머니의 눈물이 글썽글썽해진 얼굴은 지난봄에 보았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영신은 어머니가 반가운 것보다도 정근에게 속은 것이 몹시 불쾌해서, 어머니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며 바스켓을 마루 끝에다 내던지고는,

"난, 어머이가 돌아가신 줄 알았구려!"

하고 저의 뒤를 따라와서 구두끈을 끄르는 정근을 돌려다보고 눈을 흘겼다.

"어미래 숨으 몬다구나 해야 집에 오지비."

딸의 성미를 잘 아는 어머니는 눈 하나를 찌긋하고 심상치 않은 영신의 기색을 살피면서,

"어서 구둘루 들어가자야."

하고 어름어름한다.

"자네두 들어오랑이."

어머니는 정근이가 정말 사위나 되는 듯이 불러들였다. 정근이가 슬금슬금 곁눈으로 저의 눈치를 보며 들어와 윗목에 가 앉는 것을 보자, 영신은 발딱 일어서고 싶도록 불쾌해졌다. 양회 푸대로 바른 장판만 들여다보고 입을 꼭 다물고 있으니까, 어머니는,

"어째 저리 실룩해 썼소? 너 ? 해 만에 집에 온 줄 아능야? 그러다간 과연 에미래 죽어두 모르지 앙켕이."

하고 흥분한 딸의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앙이 어째 저러구 앉었기만 하오?"

하고 정근이더러 무슨 말이라도 꺼내라고 재촉 비슷이 한다. 그래도 정근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넥타이만 만지작거리고 앉았는데, 영신은 무릎을 세우며,

"어머니가 저렇게 정정허신데 전보를 친 사람이 누구야요?"

하고 반쯤은 정근을 향해서 새되게 쏘아붙인다. 속고 온 것보다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나 보아 애절초절을 하던 것이 몹시 분하였다. 그보다도 어머니를 살살 꾀고 어수룩한 늙은이와 짬짜미를 해가지고 거짓말 전보를 친 정근의 비열한 태도가 주먹으로 그 핏기 없는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도록 밉살스러웠다.

"그거사 차차루 알지비. 아척이나 먹으면서 천청이 얘기하지비……."

하고 어머니는 정지로 내려가서 수산조합에 다니는 동생의 댁과 아침상을 차린다.

조금 있자 생선 굽는 냄새가 풍겨 들어오건만, 방 안의 두 사람은 피차에 쓰디쓴 얼굴을 하고 말은커녕 마주 쳐다보지도 않는다. 밤새도록 기차 속에서 시달리면서 불안과 초조에 지지리 졸아붙은 듯하던 영신의 신경은 다시금 불쾌한 흥분으로 옥죄어 드는 것 같다.

정근은 양복 앞자락의 먼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튀기고 있다가,

"너무 불쾌허게 생각은 마세요. 전보는 어머니가 치라구 허셔서, 치긴 내가 쳤지만……."

하고 간신히 한마디를 꺼낸다.

"알았어요!"

영신의 대답은 얼음같이 차다.

"지낸봄의 그 편지 한 장으루는……."

"단념을 할 수 없었단 말씀이죠?"

"네……."

"그래서 어머니를 꼬드겨서 말짱헌 노인이 돌아가신다구 가짓말 전보를 쳤군요?"

영신의 눈초리는 마주 쳐다보기가 매섭도록 날카롭다.

방 안의 공기는 찢어질 듯이 빡빡한데, 어머니는 손수 딸의 아침상을 들고 들어왔다.

밥상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영신은 발딱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세수를 하고 들어왔다. 잠시 자리도 피할 겸 머리를 식히기 위함이었다.

오래간만에 모녀가 겸상을 하고, 정근은 산지기 모양으로 윗목에 가 외상을 받았다. 영신은 어머니가 그 동안 지낸 일과 수다스레 늘어놓는 잔사설을 귀 밖으로 흘리며 입맛이 깔깔해서 밥은 두어 술 뜨는 둥 마는 둥하고 물러앉았다.

어머니는 정근이가 너를 불러내린 것이 아니라는 발뺌을 뿌옇게 하고는,

"여러 말 할 거 없당이. 이번에사 귀정으 내야지 어찌겠능야. 앙이 몇몇 해르 두구서리, 너만 고대한 사람으 무쉴에 마다능야. 그건 죄 앙이 되갠? 난 이젠 저 사람이 안심치 않아 못 보겠다."

하고는 연방 딸의 눈치를 살핀다. 영신은 속아서 내려온 분도 채 꺼지지 않았는데, 들어단짝 그런 말을 꺼내는 어머니의 태도가, 뚜쟁이만치나 비열한 것 같아서 입술만 자근히 깨물고 있다가,

'직접으로 단판을 하고 말리라.'

하고 입 속으로 양치질을 하고 있는 정근의 편짝으로 반쯤 돌아앉았다.

"날 좀 보세요!"

여자의 말에 따라 정근은 뇌란 얼굴을 쳐들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다시 무릎 위로 떨어졌다.

"아무튼 위조 전보까지 쳐서 날 불러내리신 건 비겁한 행동이야요. 더군다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줄 알구 속구 온 게 몹시 불쾌허지만, 될 수 있는 대루 냉정허게 얘길 허겠어요."

하고 헛기침을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원체 사랑이라는 건요, 한편 쪽에서 강제헐 수도 없는 거구요, 또는 상대자의 사정을 봐서 제 몸을 바칠 수두 없는 줄 알어요. 그건 동정이지 진정헌 사랑은 아니니까요."

하고 설교를 시작하듯 한다. 정근은 그제야 영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만치 용기를 내었다.

"나두 그만 걸 모르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어려서버텀 단단히 믿어 오던 터에, 편지 한 장으루야 첫번 사랑허든 사람을 단념헐 수가 있어요? 그런데 집에선 결혼 문제루 너무나 귀찮게 구니까, 좌우간 탁방을 내려구, 일테면 비상수단을 쓴 겐데……."

하고는 바늘방석에나 앉은 것처럼 불안해한다.

영신은 남자의 앞으로 조금 몸을 다그며 눈을 아래로 깔고,

"나 역시 정근 씨헌테 미안헌 생각이 없진 않어요."

하고 진심으로 동정하는 빛을 보이더니,

"허지만,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첨버텀 나뻤어요. 당자의 장래는 어떻게 될는지 모르구, 부모들이 덮어놓고 혼인을 정했다는 건 다시 비판할 여지두 없지만, 개성에 눈을 뜬 우리가 옛날 어른들의 약속을 지켜야만 헐 의무는 손톱끝만치두 없어요. 그렇지 않어요?"

하고 억지로 평화스러운 얼굴빛을 짓는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야요?"

"난 오늘까지두 영신 씨 한 사람만을 사랑허구 있는데……."

"……"

이번에는 영신이가 대답에 궁한 듯 입을 뾰족이 다물고 있다가,

"나 같은 여자를 그다지 꾸준허게 사랑해 주신다는 데는 고맙다구 해야 헐지 미안스럽다구 해야 헐지 모르겠어요."

하고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목소리 보드러이,

"정근 씨!"

하고 손톱 여물을 썰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런데 두 사람 중에 한편의 짝사랑만으로 결혼이 성립될 수가 있을까요?"

그 말에 신경질인 정근의 눈꼬리는 샐쭉해졌다.

"그야 성립될 수가 없겠지요."

하고 영신의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이 똑바로 노려보더니,

"도대체 어째서 뭣 때문에 나를 사랑헐 수 없다는 거야요? 그 까닭이나 똑똑히 말해 주세요."

하고 바싹 다가앉는다.

단둘이서만 이야기할 기회를 주려고 어머니는 자리를 피해서, 영신과 정근은 피차에 최후의 담판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무슨 까닭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

는 어리석은 듯하고 거북한 질문에는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 영신은 잠시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인력으룬 억지루 못 허는 거야요. 허지만 난 인간적으룬 정근 씨를 싫어허지 않어요."

"그럼요?"

정근은 약빨리 말끝을 채뜨린다.

"일이 기왕 이렇게 됐으니 솔직허게 말씀허지요."

하고 영신은 무슨 셈을 따지듯 엄지손을 꼽는다.

"첫째, 돈을 모아서 저 한 사람의 생활안정이나 꾀하려는 정근 씨의 이기주의가 싫어요!"

"이기주의가 싫다구요? 우리에겐 경제생활의 토대가 없으니까 따라서 문화두 없는 게지요. 그러니까 우린 첫대 돈을 모아 가지구 모든 걸 사야만 해요. 결국은 모든 걸 돈이 지배허구 해결짓는 게니까요."

"그건 퍽 영리허구두 아주 현실적인 사상인진 모르지만요, 제 목구녁이나 금전밖에 모르는, 호인이나 유태 사람은 되구 싶지 않어요! 저라는 개인 이외에 사회두 있구 민족두 있으니까요."

"암만 사회를 위허느니 민족을 위허느니 허구 떠들어두, 위선 돈을 안 가지군 무슨 일이든지 손두 대볼 수 없는 게 엄연한 사실인데야 어떡허나요?"

"물론 돈이 필요허지요. 그렇지만 우린 필요한 것과 귀한 걸 구별헐 줄 알어야겠어요. 더군다나 계몽운동이나 농촌운동은 다른 사업과 달러서, 오직 정성으로 혈성으로 허는 게지, 돈을 가지구 허는 건 아니니까요. 실상 우리 같은 새빨간 무산자가 꿈에 광맥지나 발견허기 전엔, 돈을 모아 가지구 사업을 헌다는 건 참 정말 공상이지요. 사실 남의 고혈을 착취허지 않구서 돈을 몬다는 건 얄미운 자기 변호에 지나지 못허는 줄 알아요."

이 말에 정근은 불복인 듯이 상체를 뒤흔들며,

"천만에, 그렇지 않……."

하는데, 영신은 급작히 손을 들어 정근의 말문을 막으며,

"여러 말씀 헐 게 없어요. 누가 무슨 말을 허든지 내 신념만은 굽히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구 둘째는요……."

하고 바로 정근의 턱밑에서,

"난 지금 연애니 결혼이니 허는 문제를 생각헐 겨를이 없어요! 오해허시면 안 됩니다. 이것두 핑계가 아니구 사실이야요. 내가 청석골다가 이일 저일 벌여 논 걸 직접 보셨지만, 지금 학원집을 엉터리루 지어 놓구 허리가 휘두룩 빚을 졌는데요, 바루 낼모레가 낙성식을 헐 날이야요. 한눈을 팔기는커녕 죽을래야 죽을 틈이 없는 터에, 연애는 뭐고 결혼은 다 뭐야요."

말이 여기까지 이르자 부드럽던 영신의 말씨는 점점 여무져 가고, 잠 한숨도 못 자서 흐릿하던 눈에서는 영채가 돈다.

정근은 질문할 말도 대답할 말도 궁해서 과식한 사람처럼 어깨로 숨만 가쁘게 쉬고 있다가,

"그럼 모든 게 안정된 장래까지두 생각을 다시 고칠 수가 없을까요?"

하고 은근히 후일을 기약하자는 뜻을 보인다. 영신은 그 말대답도 서슴지 않았다.

"장래까지두 다시 생각헐 여유가 없어요! 난 내 맘대루 약혼헌 남자가 있으니까요."

"네? 정말요?"

정근은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몸을 반쯤이나 일으켰다. 영신이가 약혼을 하였다는 것을 여태까지 한낱 핑계로만 여겼던 것이다.

"박동혁이라구 저어 한곡리라는 데서 농촌운동을 허는 사람인데요, 돈은 한푼두 없어두 황소처럼 튼튼허구 건실헌 동지입니다. 올봄에 그이의 일터루 찾어가서 앞으루 삼 년 계획을 세우구 왔어요. 그래서 정근 씨한테 단념허라는 편지를 헌 거야요."

하고는,

"마지막으루 한마디 해두구 싶은 말이 있어요."

하고 목소리를 흠씬 낮추어 가지고,

"어려서버텀 한고장에서 자라났구, 또는 여러 해 동안 나 같은 여자를 유념해 주신 정분으루 충고를 허는 건데요, 정근 씨가 지금 같은 개인주의를 버리구 어느 기회에든지 농촌이 아니면 어촌이나 산촌으로 돌아가서 동족이나 같은 계급을 위헌 일을 해주세요! 우리 같은 청년 남녀가 아니면 뉘 손으로 그네들을 구원해 냅니까?"

영신의 목소리에는 정근의 머리가 저절로 수그러들 만한 열과 저력이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묵묵하였다. 그러다가 영신은 인제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난 좀 자야겠어요."

하고 일어서더니 윗간으로 올라가 턱 누워 버린다.

점심때가 훨씬 겨워서 영신은 동혁이가 청석골로 와서 기다리는 꿈을 꾸다가 소스라쳐 깨었다. 눈을 부비며 아랫방으로 내려가 보니, 정근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는데, 어머니 홀로 벽을 향해서 훌쩍훌쩍 울고 누웠다.

"어머니 그이 어디 갔수?"

하고 딸은 어머니의 어깨를 흔들었다.

"뉘 아능야. 내게두 말없이 가방으 들구 나갔당이."

어머니는 돌아누운 채 울음 반죽으로 대답을 한다. 영신은 그 곁에 한참이나 잠자코 앉았으려니, 저에게 너무나 매정스러이 퇴짜를 맞고 다시 머나먼 길을 인사도 아니 하고 떠나간 정근이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차차 그이헌테두 좋은 배필이 생기겠지.'

하고 눈을 내리감고는 그의 장래를 마음속으로 축복해 주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뼈만 남은 손을 잡으며,

"어머니!"

하고 불렀다.

"어째 그리능야?"

어머니는 그제야 반쯤 돌아눕는다.

"너무 그렇게 섭섭해허지 마슈. 그 사람버덤 더 잘나구 튼튼헌 사윗감을 보여 드릴게, 응."

하고 영신은 응석조로 어머니를 위로한다.

"사윗감이사 어디 없겡이. 그러나 정긍이만치 어려서부터 정이 들구 얌전스리 구는 사람이 그리 쉬운 줄 아능야."

하더니,

"네 그럴 줄이사 몰랐지. 에미 마지막 소원두 끊어지구……."

하는 어머니의 눈은 또 질금질금해진다.

"글쎄 그렇게 언짢어허지 마시라니깐. 어느새 무슨 소망이 끊겼다구 그러슈? 몇 해만 눈 꿈쩍허구 기다려 주시면 내가 잘 뫼시구 살 텐데……."

"듣기 싫다야. 내사 하두 여러 번 속았다. 이전 금방석으 태운대두 곧이 들리지 않는당이."

하고 한숨만 들이쉬고 내쉬고 한다. 영신은 동혁이와 약혼을 하기까지의 자세한 경과와 청석학원을 짓느라고 죽을 힘을 다 들인 이야기를 좌악 하고 나서,

"나는 물론 어머니가 낳어서 길러 주신 어머니의 딸이지만, 어머니 한 분의 딸 노릇만은 헐 수가 없다우. 알아들으시겠수? 어머니 한 분헌텐 불효허지만, 내 딴엔 수천 수만이나 되는 장래의 어머니들을 위하지 일을 허려구 이 한몸을 바쳤으니까요. 그러는 게 김정근이 하나헌테만 이 살덩이를 맡기는 것버덤 얼마나 거룩허구 뜻있는 일인지 몰라요. 네 그렇죠? 어머니!"

어머니는 일어나 앉으며 파뿌리 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올리더니,

"모르겠다. 내사 평생으 이렇게 혼자 살란 팔자지비……."

하고는 다시 말이 없다.

"어머니, 우리 청석골루 갑시다. 아무럭허문 어머니 한 분이야 굶겨 드리겠수."

"싫당이, 싫어!"

어머니는 그것도 생각해 보았다는 듯이 체머리를 앓는 사람처럼 머리를 흔든다.

"밥술으 놓는 날꺼지는 내 앙이 벌어먹으리. 네 입 하나 감당으 하게두 어려운데, 이까지 쓸데없는 늙응이, 무쉴에 쫓아가겡이? 네 출가허는 날꺼지 살기나 하문 그제나 구경을 가지비."

그 말에 영신은 참았던 눈물이 핑 돌았다. 얼핏 저고리 고름으로 눈두덩을 누르고 온몸의 용기를 내어,

"아무튼 내가 없인 낙성식을 못 헐 테니깐 저녁차루 떠나야겠수."

하고 차마 하기 어려운 말을 꺼냈다.

"앙이, 오늘 나조루 떠나? 정말잉야? 어미허구 하룻 나조 자보지두 앙이하구……."

마르고 주름 잡힌 어머니의 얼굴은 무한한 고독과 섭섭한 빛에 뒤덮인다. 딸은 그 얼굴을 마주 쳐다보다가,

"그럼 어떡허우! 어머니, 그럼 난 어떡허우?"

하고 목소리를 떨다가 어머니의 무릎에 이마를 들부비며 느껴느껴 울었다.

……어머니는 정거장까지 전송을 나왔다.

호각 소리가 들리고 기차바퀴가 구르기 시작하는데, 치맛자락을 들추어 다 떨어진 주머니를 끄르며 따라오더니 딸이 얼굴을 내민 차창으로 그 주머니를 들여트리고는 잠자코 돌아섰다.

그 주머니 속에는 생선 광주리를 이고 다니면서 푼푼이 모아 넣은 돈이 묵직하게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