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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실직기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아침 여덟시 치는 소리를 그대로 이불 속에서 무시하고, 한껏 단잠에 취해도 출근에의 초조가 없어 좋다.

정성을 다하여 마음껏 일에 힘을 들여도 그 성의가 무시되는 데 불쾌함이 없어 좋고, 사사(私事)에 일을 쉬게 되는 주위의 사안(斜眼)에 미안을 느낄 필요가 없어 좋다.

자식들의 학비에 쪼들려도 실직을 빙자로 없다는 대답이 헐히 나와 좋고, 원고 아니 모이는 걱정, 책이 늦어질 걱정, 기사 쓸 걱정, 검열 걱정, 다 안 해도 좋다.

나는 이즘 산마(山馬)와 같이 마음이 자유를 행사한다.

밤이 깊은 줄도 모르게 독서와 사색에 마음껏 잠겼다 늦어진 잠이 이튿날 오정을 넘어도 거리낄 데 없고, 진종일을 거리로 싸다녀도 내 자유를 구속하는 건 오직 ‘고·스톱’밖에 없다.

한밤 동안 우리 안에 갇히었던 병아리가 오력(五力)을 펴느라고 마음껏 날개를 펴고, 마당이 좁다 춤을 추며 돌아가듯이, 나도 거리가 좁다 활개를 펴고 돌아간다. 이것이 나의 굶주렸던 생에의 욕구이었던가 싶다.

자유의 아름다움―그것이 한껏 아름다울 때 내 생은 빛나며 있을 것이 아닐까? 비로소 생존에의 영역을 벗어나 생활에의 문을 두드리는 도중에 선 것 같은 감이 조금도 아쉬움 없이 실직에의 위무(慰撫)를 준다.

더욱이 밤과 자유―나는 이 밤의 자유에 얼마나 주렸던 것인고. 만뢰(萬賴)가 잠든 고요한 밤, 혼자만이 앉아서 주위의 의식 없는 숨소리를 들으며 마음껏 정신을 가라앉히고 책상을 기대어 좌우에 쌓아 놓은 애서(愛書)의 탐독에 자신을 잊는 여유와 자신을 찾는 사색에 이튿날의 늦잠에도 근심을 잊는 자유 그것은 더할 수 없는 나의 행복을 말하는 시간이다.

읽고 싶은 책에 손이 멎을 여유를 못 가지는 때처럼, 자신을 찾는 마음에 시간의 초조가 방해를 한 때처럼 고민인 것은 없다.

나는 이제 여기에 자유를 가졌다.

서적의 유혹에 가난한 지갑귀를 글키우고, 창작에의 유혹에 어찔하도록 사색이 붙들어도 오히려 싫지 않다. 내 마음은 제멋대로 살쪄 볼 욕망에 불붙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침묵이란 결국은 고민의 표백인 것이다.

그 어떤 비약을 꿈꾸고 자진하여 사색 속에 깊이 침묵을 지키게 된다 하여도 그것이 창조충동의 제어인 점에선 역시 마찬가지의 고민일 것이거늘, 하물며 주위의 사정이 그것을 허치 않음에랴. 작가가 직업을 아니 가져서는 안 되는 때처럼 비극은 없을 것이다. 지난날에 있어서의 나와 직업은 참으로 우울 그것이었고, 고민 그것이었다.

그래도 다른 것과는 달리 비교적 창작과는 인연이 가까웠다고 볼 수 있는 붓 노름이 직업이었건만 그것이 창조적인 참을 수 없는 그 무슨 충동에서의 그러한 붓이 아니었고 그날이 그날 같은 기계적으로서의 역할에 아니 충실할 수 없는 직업적 책임이 정력에의 소비, 붓끝에의 권태를 아쉬움 없이 가져다 주어 여극(餘隙)에의 이용에도 실로 창작에의 붓은 들리지 않았다.

이제 직업과 같이 눌리었던 창작에의 만만한 야심―그것은 마치 눌러도 눌러도 기어코 땅속을 뚫고 나와 마침내 아름다운 꽃을 피어내고야 마는 한떨기의 봄풀과 같이 누르려야 누를 수 없는 형세로 해직(解職)조차 기회를 만난 듯이 머리를 들고 일어선다.

나는 이제 이것을 어느 정도까지 살려 가며 만족해 볼 것인가, 녹슨 붓끝, 사색에의 둔감, 표현에의 치졸은 끝없는 수련을 요해 마지않건만 철없이 서두는 참을 수 없는 충동, 두려운 붓대를, 부끄러운 붓대를 나는 다시 들어야 되나 보다.

신문사가 깨어져 한가하겠으니 창작을 달라는 잡지 편집자들이 주는 자극, 그대는 나더러 무엇을 쓰기를 요구하는 것인고, 그리고 나는 또 무엇을 쓰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인고, 창작과 제재의 빈곤, 나는 무엇을 써야 되나? 여기에 창조적 고민이 다시금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