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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포도주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하루는 어떤 벗으로부터 자친(慈親)이 회갑이니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하루저녁 이야기나 하자는 청을 받았다. 그 벗은 죽마의 고우일 뿐더러 벗의 자친 또한 나를 퍽이나 사랑하여 주시는 이로, 나는 반갑게 그러마고 승낙을 하였다.

그리고는 같은 청을 받은 역시 동향 친구인 한 사람의 동무와 같이 그 시각에 대여 가기로 하고 우리는 우선 진고개 백화점으로 향하여 나섰다. 이 갑파(甲婆)에게 무슨 기념이 될 만한 그러한 물건이 없을까 그것을 물색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백화점을 두루 돌아가며 찾아보아야 눈에 띄는 그럴듯한 물건이 없었다. 과자나 쟁반 같은 것은 어떠냐는 동무의 의견도 있었으나, 그런 것들은 그저 빈손이 뭣하여 들고 가는 보통 인사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어서 마음이 내키지를 않아 다시 한 바퀴 물색을 하여 볼까 하는데 눈을 두리번거리던 동무는 별안간 좋은 것이 눈에 띄었다고, 그리고 그것이면 의의만점(意義滿點)이라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질을 하기에 보니 그의 손가락은 과즙류의 진열 속에 포도주병을 가리키고 있다.

포도주 나도 그것이 그럴듯이 생각되었다. 이러한 축의(祝意)에는 척 떠오르는 것이 술이긴 하였으나, 여인에게는 그것이 합당하지를 않아 망설이다 못해 무슨 물건으로라는 생각만에 헤매던 나는 술은 술이면서도 알콜 성분이 적어 술을 전연(全然)히 마실 줄 모르는 여인네라도 몇 잔간은 연거푸 마셔도 괜찮을 정도의 포도주라면, 그리하여 그것으로 축배를 드리는 것이 무엇보다 의의가 있는 일 같아, 나도 두말없이 그 포도주에 동의하고 점원에게 그것을 달라 명하여 한 병씩 옆에 끼고 벗을 찾아갔다.

그러나 좌석은 우리로 하여금 그 자리로 곧 축배를 드리게 되지 못해 기회만을 엿보며 그저 술을 먹고 있었다. 최고 오륙배(五六杯)면 족한 내 주량이었건만 즐거운 이날을 다 같이 얼큰히 취해서 즐겁게 노는 것이 이 모임이라 참석을 안 했으면 모르거니와 한 이상에는 아니 먹을 수 없었고, 그렇지 않은지라 내 마음도 즐거워 사양 없이 잔을 들게 되니 약한 내 주량은 그만 남보다 먼저 취하게 되어 축배 드리기를 잊는 무례를 범하고 돌아왔다.

이것을 나는 그 이튿날에야 깨닫고 벗에게 예를 잃은 것보다 내 마음이 지극히 섭섭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몇 달을 두고 잊혀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루는 그때 그 좌석에서 같이 잔을 나누던 한 친구를 만나 그때 그 포도주는 군(君)이 가지고 갔던 것이냐고 하기에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더니 이 친구 대답 끝에 하는 말이 그날 내가 돌아간 후에도 아직 덜 취한 사람들은 그대로 앉아서 술을 계속하다가 포도주를 가져온 사람이 있으니 별미로 그것을 한 잔씩 하자는 누구인가의 제의로 주인은 포도주병을 들여다 뚜껑을 그것을 떼고 잔마다 돌아가며 한잔씩 가득 부어 놓고 권하였다 한다. 그러나 좌석은 잔을 들어 입에 댔다가는 포도주의 그 이상한 맛에 다시 잔들을 놓고는 의심쩍어 차마 삼키지를 못하고 상(床)귀에 뱉어 놓기를 일제히 하면서 서로 그 이상한 맛을 따져 물으니 그저 신맛 한 가지밖에 모르겠다는 것이 누구의 입에서나 일치하게 나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포도주가 썩은 것은 아닌가 하여 병엣것을 큰 그릇에다 쏟아서 검사를 하여 보았더니 그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초(酢)로 판명이 되는 바람에 ‘애―에―’하고 들 돌려 놓으니 건넌방에 모여 앉았던 근처 집 여인네들이 “우리 집에 초가 없더니 우리 집에 초가 없더니”해서 모두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점원은 필시 포도주를 초로 잘못 바꾸어 싸 주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그러지 않아도 예를 잃어 미안한데 뜻도 않았던 이러한 미안까지 이중의 미안을 겹쳐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니 그때 만일 그 좌석이 나로 하여금 그 갑파(甲婆)에게 축배를 드릴 만한 여유를 주었으면 얼마나 나는 무안하였을까 하니, 그리고 그것은 축배를 잊음으로 잃은 예보다 얼마나 더한 무례였을까 하니 취중에 잊어버린 예가 오히려 다행하기 짝이 없는 일같이 생각도 되었다.

그러니, 이제 바라고 싶은 것은 다만 그 초가 포도주 이상의 축의(祝意)를 가진 성분이 세상 사람 모르게라도 지니고 있었으면 하는 것이나, 그것이 안타까운 억지임을 다시금 깨달을 땐, 그저 세상사란 묘하게도 된다는 한탄밖에 더 해 볼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