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정획점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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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정획점고인(掃雪庭獲覘故人)[1]

一[일][편집]

성세창(成世昌)은 부친의 엄하고도 인자한 향념으로 이 망월암(望月庵)으로 나온지 벌써 열흘이 넘었다.

부친 성판서가 아들에게 말하기는

『망월암은 문안서 그리 멀지두 않을 뿐 아니라 너의 벗될 만한 사람들이 거기서 글을 읽고 있다니 두말 말고 너두 거기나 가서 글이나 좀 읽어라.』

하는 것이었지마는 기실 성판서의 내심은 공부에 칭탁하여 피접을 보내자는 것이었다. 평안감사로 아들 세창이를 데리고 서경에 오래 유하고 있던 성판서가 내직으로 승차가 되어 올라온 이후로 아들 세창은 나날이 초췌하여 갔다. 일문에 영화가 빛나고 주인 판서의 신색도 오히려 날로 젊어 가듯이 화려하고 유쾌스러움에 정반하여 세창이는 작은 사랑 컴컴한 방구석에 책만 끼고 앉아서는 글을 읽는지 꿈을 꾸는지 다만 응얼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으로 책장을 넘기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얼굴은 나날이 창백하여 가고 몸은 야위어 간다.

자식을 사랑함에 한층 더 자상스런 모친은 조석을 자시러 들어오는 판서를 보고는 말끝마다

『대감 어쩌실라구 그리시우. 큰 애가 요새는 도무지 밥도 잘 먹지 않고 얼굴에 핏기가 없구려. 약을 좀 먹일 생각을 아니 하시고 내버려 두시니 쌍말씀에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구 이편에서 어떻게 좀 해 주셔야죠.』

하고 조를라치면 성판서는 쓰린 웃음을 지으며,

『그놈이 약을 먹으려구 하겠소. 공연히 헛돈만 없애는 게지. 가만 내버려 두. 좀 생각하는 일이 있으니.』

하고 말을 막아 버린다.

『생각이 무슨 생각이슈. 몸이 편치 못하길래 그렇게 말라가는 게죠.』

『부인은 모릅낸다. 좀 더 두고 봅시다.』

하여 말을 들어 주지 않는다. 부인은 남편 판서의 말 뜻을 충분히 헤아릴 수는 없지마는 점잖은 남편이 생각하여 하는 일을 여자의 몸으로 자꾸 캐물어 볼 수가 없어서 일상 불만하면서도 그대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참을 수가 없어서 아들을 보고 직접으로 약을 먹으라고 권하면,

『왜 어디가 아픈가요.』

하고 이것은 애초에 코대답을 해 버리는 통에 더 붙여볼 나위도 없다.

과연 아버지 되는 성판서의 관찰은 틀림 없었다. 세창이는 아버지를 따라서 평양 감영으로 내려가서 책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 탈도 없었다. 그런 것이 어느듯 감영에 출입하는 옥소선(玉蕭仙)이를 알게 된 후부터는 딴 사람이 되고 말았다.

초저녁에는 글을 읽는체 하며 남의 눈을 속이고 밤만 이슥하면 남몰래 빠져 나와서 옥소선의 집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어느 때는 서로 짜 놓았던 통인 놈이 초저녁잠에 빠져 시간을 어기기 때문에 세창은 하는 수 없이 담을 넘어간 일까지도 있었다.

옥소선도 역시 처음에는 감사의 아드님이라는 것에 대해서 동료에 대한 허영도 있었고 호기도 있어 은소반에 받들다시피 융숭한 대접을 하였지마는 차차 날이 갈수록 옥소선이는 이제 한 개의 성세창이라는 인간과 정이 들게 되었다.

감사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세창이란 청년에 대한 애착이 날로 깊어 갔다.


二[이][편집]

온후한 성품이면서도 남자다운 위엄과 잘못하면 콧대가 억세다고 욕을 먹을 만치 꾿꾿한 의지, 그리고도 어느 때는 천진한 어린애 같은 귀염을 가진 세창은 오랜 기간에 몸이 매어달리어 세상을 백안(白眼)으로 훑어보아오던 옥소선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필경에는 피차에 하나가 없어서는 살지 못하리 만치 깊은 구렁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당시 일등 명기로, 서경 굴지의 인물로 이름이 높은 옥소선이라 은근히 꼬이는 사람도 많고 또는 돈을 쌓아 놓고 자기의 것을 만들려고 졸라대는 작자도 적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소선이는 한 번도 고개를 바로 끄떡인 적이 없었다.

칭찬은 욕으로 변하고 욕은 저주로 변하여,

『그년, 죽일년.』

하고 공연히 샘이 나서 까닭 없는 년자를 놓는 놈.

『그년 삿도의 책방 맛에, 흥 나중에 헌 짚신짝 같이 버리게 되면 그 꼴 좋겠다.』

하고 비웃는 놈.

그런 저런 욕을 먹을수록 옥소선이는 정성과 애정을 다하여 세창의 마음을 꽉 잡았다.

이렇게 지내 오기를 햇수로 삼년이나 하여 오던 끝에 청천에 벼락이 내리고 말았으니 그것은 감사의 내직 승차였다.

둘의 사이에는 전례에 의하여 울며 불며 죽네 사네의 법석이 있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소선이는

『함께 서울로 올라가자.』

는 사나이의 말에 눈물을 걷우며

『정으로 말씀하면 서방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하다못해 말 고삐에 목을 매고라도 함께 데려가 주십사라고 하겠지오마는 시하에 계신 몸으로 외첩을 데리고 봉행한다는 것이 외모 조시에 체통이 사나웁고, 아드님 되신 도리에 어그러지오니 다음날 잊지 마시고 불러 주시면 설혹 분골이 될지라도 기어 승순하오리다.』

하고 도리어 달래었다.

그 소리를 전해들은 부중 사람들은 비로소 옥소선의 지개를 알고

『허어 참 무던헌 계집야. 명기다운 지개지.』

하고 칭찬을 하였다.

세창이 역시 하는 수 없이 소선과 애 끓는 생이별을 하고 아버지 일행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성판서는 전부터 아들의 일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도 사람의 한 평생 가운데에 한번은 있어도 무방한 경험이란 생각으로 못 본체 못 들은 체 하였지마는 서경을 떠나게 된 때에 속으로

『저놈 처음 경력에 혼 좀 나느니라.』

하여 은근히 아들의 심리를 추상하고 미소를 금치 못하였다.

그랬더니 올라온 후의 아들의 상태가 위에 이야기한 바와 같다.

까닭을 모르는 사람들은 약이니 무엇이니 하지마는 성판서는 약보다도 심기전환을 시키어 보자는 생각이기 때문에 송파나루머리 산꼭대기에 있는 망월암으로 보내어 피접겸 공부겸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어 보려는 것이었다.


三[삼][편집]

망월암에는 예기 방장한 젊은 학도가 사오인 두류하고 있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 틈에 새로 낀 세창이 역시 처음에는 운에 딸려 주야로 글 읽기에 골몰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한창 장난하기 좋아하는 젊은이들이라 차차 본색을 들어내기 시작하여 장기 두기, 바둑 두기, 윷놀기, 씨름하기, 필경에는 술을 사 올려다가 밤을 새고 술먹기가 이틀에 한번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세창이만은 그러한 유희에 한데 섞이지 아니 하였다. 침울한 낯으로 한 구석에서 노는 양을 바라보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밖으로 슬그머니 나가 버리거나 한다.

처음에는 그것을 이상스럽게 본 여럿도 나중에는 의례의 일로 알아서 누구나 괴이쩍게 보는 이조차 없었다.

오늘 밤에도 세창이는 큰 방에서 떠들썩하고 술을 먹고 노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고 혼자 밖으로 나와서 법당 뒤 큰 바위 위에 올랐다.

달이 밝다 ── 보름이 지난지 이틀이 되어 다소 기운 달이었지마는 얼음덩이 같이 맑고 찬 달이 중천에 높이 떠 있고 냉냉한 초겨울 바람은 수백 척 산 아래 마을의 상녀(商女)의 노래 소리를 아득히 실어다가 들려준다.

세창이는 추운 줄도 모르고 우두커니 바위 위에 서서 있노라니 달은 하늘 뿐이 아니라 소리 없이 흐르고 있는 한강물 속에도 있어, 어화(漁火) 두 개 세 개가 그 달과 달 사이를 역시 서으로 서으로 흐르고 있다. 어디선지 떠들어 오는 뱃노래.

세창은 문득 서경에 남아 있는 옥소선이 생각이 나며 하염없는 눈물이 막을 사이 없이 좌르르 흘렀다.

동시에 아버지 어머니 할 것 없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는 한 치 한 푼의 동정이 없는 것 같아 별안간 야속한 생각이 솟아 오르며 동시에 이 세상에서 자기를 잘 알아주는 사람이라고는 옥소선이 하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 소선아, 소선아.』

하고 세창은 공중을 바라보고 애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럴수록 참을 수 없이 보고 싶어 뛰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에라 내 불효망측하다 할지라도 소선이 한번만 더 보고.』

하는 생각으로 세창이는 몰래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넣어둔 돈을 꺼내어 몸에 지니고 그 밤으로 망월암을 탈출하였다.


四[사][편집]

세창이 하룻밤 사이에 연기 같이 사라진 사건은 성판서집 사람들을 극도로 놀라게 하고 장안 남녀의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별별 소문이 다 돌았다. 호랑이한테 물려 갔다느니 산신이 감추었느니 강에 내려가 빠졌다느니 ──

더구나 성판서의 아내는 미칠 듯이 날뛰며 비교적 이번 사건에 대하여 태연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남편을 만만한 불평으로 공격하였다.

『대감처럼 자손에게 무심한 양반도 없소. 어쩌면 단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부지거처가 된 것을 태연하게 계시우.』

하며 눈물로써 책망을 한다. 그러나 심중에 무엇을 생각하는 바가 있는 성판서는 태산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이 있소. 나도 당신만큼이나 자식을 귀여워하는 사람요. 입에 올려 말은 하지 않지마는 세상에 자식 귀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차차 어디가서 있는 것이 판명될 날이 있으니 너무 망동 말고 기다리고 있으오.』

남편의 말에 저으기 마음이 놓이기는 하지마는 한편으로 생각하면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편하게 하느라고 임시 수작이 아닌가 하고 초조함을 마지 않았다.

성판서의 생각에는

『이놈 필연코 평양으로 도망을 하였지.』

하는 것이었다. 망월암은 뒤에 장산이 있는 것도 아니오 단 한 봉우리의 산이 불쑥 솟은 꼭대기에 있는 암자이니 그러한 외로운 산, 더구나 높이가 남산의 반도 되지 못하는 산에 범 같은 큰 짐승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는다. 산신이 감추었다는 것은 더구나 믿지 못할 말이어니와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말이다.

이 놈 필연 옥소선이란 계집의 생각이 못 잊어져 차마 애비에게는 그런 말을 할 수도 없거니와 평양에 다녀온다는 무슨 구실을 만들 수 없으니까 몰래 망월암을 탈출한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람을 평양으로 보내어서 붙들어 올릴가 하는 생각을 먹었다가도

『아서라 그 놈의 한 짓은 괘씸하지마는 그것도 경험이니 인제 얼마 있으면 슬슬 기어 들어 오지. 젠들 별 수 있나.』

하는 생각으로 전인을 띌 생각도 하지 않고 내던져 두었다.

그 뿐만 아니라 만일에 전인을 띄어서 잡아 올린다 하면 자연 소문이 날 것이오, 소문이 나면 다른 일과 달라서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이로운 소문이 아닐 것이니 자연히 열이 식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五[오][편집]

세창이는 허위단심으로 일로 평양을 향하였다.

집에서 붙들러 보내지나 않았을가 하여 먼 길을 걸어 보지도 못한 몸이 하루에 백리를 걸었다.

평양부중에 당도하기는 망월암을 탈출한지 엿새 후 해질 무렵이었다.

『아이구머니 이게 뉘시오, 서울 서방님이시구려. 그런데 웬 일이시우 머나먼 평양엘 무슨 일이 있어서 행차하셨소?』

하며, 소선의 모친은 세창의 아래 위를 훑어 본다.

초췌한 행색이다. 절에서 뛰어나온 그대로의 의표이니 그 동안 도중에서 볼 수 없이 더러워지고 꾸기고 하였을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그래 혼자 오셨소?』

『혼자 걸어 왔소.』

『걸어서…』

하고 소선의 모친은 눈을 흡뜬다.

세창은 소선 모친이 입으로는 반기면서도 들어오란 말 한마디 없이 일각문양 기둥을 팔로 막아 집고 의외라는 낯을 하는 것을 보고 이제껏 긴장하였던 머리에 큰 떡메로라도 얻어 맞은 듯한 낙담과 불쾌를 느꼈다.

『소선이는 잘 있소?』

하고 간신이 물었다.

『잘 있죠.』

하고 세창의 눈을 들여다 본 모친은 그제야 비로소 세창이가 평양으로 내려 온 이유를 알았다는 듯이 냉냉한 미소를 지으며,

『잘 있기는 하죠 마는 만나 보실 수는 없읍니다.』

한다.

『…………』

세창이는 소선 모친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하여 아무 말을 못하고 뒷말을 기다리었다.

『소선이는 지금 감사의 수청을 드느라고 집에두 한 달에 두 번 나오기가 어렵다오. 만나보실 생각 말고 하루 바삐 올라 가시우.』

소선의 모친은 될 수 있으면 세창을 곧 쫓아 보내고 싶었다. 왜 그러냐 하면 딸 소선이 감사의 수청을 들게 되기 때문에 필육 전곡이 진진히 들어와 쌓이고 일년을 먹고도 남을 땅까지 생겼다. 그런데 만일 세창이가 소선이를 보러 내려왔다는 소리가 감사의 귀에 들어가도 좋지 못할 것이오, 또 딸 소선이는 일상 서울 서방님 서울 서방님하고 한번 보기를 그리고 있는 것을 아는지라, 세창이가 왔다는 소리만 들으면 수청이고 무엇이고 다 내던지고 뛰어 나올 것을 안다. 그리고 보면 오래 두고 울거먹을 큰 자리를 잃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소선 모친은 세창이를 냉대하여 올려 쫓을 생각을 하였다.

『그 년두 지금 삿도에게 잔뜩 홀려서 어미를 찾아 볼 생각도 아니 한다우. 당신 생각은 고사하고 요전에두 나왔길래 너 서울 서방님 생각이 나지 않니 하고 물었더니 그때 철이 없어 그랬지 그까짓 어린애 같은 사람을 누가 생각하겠느냐고 코대답을 합디다. 해로운 말 하지 않으니 내일 아침에라도 곧 회정허시우.』

세창은 대답할 말이 없고 더 청할 용기가 없었다.

『몸이나 성하다니 다행이오. 소선이 마음이 그렇게 변했다는 걸 찾아 보면 무얼 하겠소. 그러나 이 다음에 만나거들랑 내가 다녀 갔다는 말이나 전하슈.』

하고 세창이는 그 집 문간을 떠났다. 악이 치받쳐 눈물도 아니난다.

『저녁이나 자시고 가시우.』

하는 모친의 헛생색 소리를 등으로 받고 세창이는 지향없이 큰 길로 나섰다.

『아 ── 뭣하러 내려 왔던고, 이 창피와 이 설음, 이 욕을 당하자고 부모를 버리고 반 천리를 왔던가. 계집이란 믿을 수 없는 괴악한 것이다. 철석같이 굳은 맹서를 피눈물로 맺은 년이』

하고 세창이는 아래 입술을 죽어라 하고 깨물었다.

세창이는 그 밤으로라도 회정길에 오르고 싶었다. 그따위 계집을 오늘까지 미칠 듯이 그리워하였던 천하에 어리석은 자기의 형용이 눈앞에 떠오른다.

분하다느니보다 세상에 살맛이 없었다. 무슨 꼴을 더 보려고 이 세상에 살아갈 것이냐.


六[육][편집]

이날 저녁밥을 어느 객주에서 사서 먹은 세창이는 부중에 사는 독고일(獨孤逸)이란 사람을 찾았다.

그 날 밤을 객주집에서 새우고 이튿날 곧 회정할 생각이던 세창이는 단 한사람 독고일만을 찾아 이 분하고 설은 사정이나 이야기하고 돌아가려한 것이었다.

독고일이는 세창이가 평양감사 책방에 있을 때에 대소사를 막론하고 그에게 의논하여 왔던 사람이었다. 독고일 역시 손익을 무시하고 세창이에게는 십분의 호의를 가지고 정성으로 뒤를 보아준 사람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후에도 그와는 수차 서신의 왕복이 있었다.

과연 독고일이는 세창의 손목을 잡고 자기 방으로 들여 앉힌 후에

『이렇게 만나 뵙기는 꿈밖에 일이외다마는 대관절 무슨 일로 이렇게 혼자 아무 선문도 없이 행차하셨소.』

하고 묻는다. 같은 묻는 말에도 소선모친의 말과는 소양지판이다. 정이 가득히 실린 구조이었다.

세창이는

『만나 보기를 잘 했군.』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옥소선이를 만나보고 싶어 망월암을 탈출하여 내려온 내력을 이야기하였다.

독고일이는 껄껄대고 웃으며,

『서방님두 대체 어지간허시오. 소선이가 들으면 오죽이나 반가워하며 고맙게 여기겠소. 계집으로서 사내한테 그만큼 정을 받으면 죽어도 한이 없지.』

『그래야 할 것이 사람의 길이언마는 소선이는 나를 잊어버린 듯합니다.』

『그건 또 웬 말씀요. 대관절 소선의 집에 가서 보셨소?』

『가긴 갔었지마는.』

하고 세창이는 소선의 모친이 하던 일절을 다 이야기하고

『그래서 난 내일 아침에라도 곧 떠날 생각요. 그까진 썩은 년을 만나선 무얼 하겠소.』

『그럴 수가 있나. 그럴 수가 있나.』

독고일은 의외라는 얼굴로 이렇게 뇌며 무슨 말로 세창이를 위로하여야 옳을지 몰라 하였다.

『그러나 서방님 이왕 이 먼 데를 오셨다가 아무리 계집이 그렇게 맘이 변하였다 한들 한 번도 못보고 가셔서야 되겠소. 나는 암만해도 그 계집이 그렇게 변했다고는 믿을 수 없소. 아닌게 아니라 지금 삿도가 옥소선이만을 붙잡아 앉히고 하루도 내놓지 않는다는 말은 들었지마는.』

『글쎄.』

『이렇게 됐으니 그간 눈이 오면 감영에서는 눈쓰는 막벌이 군이 돼서 감영내하에 들어가서 한번이라도 얼굴을 보이시우, 그래서도 아무 동정이 없으면 그 년은 죽일 년이지.』

『글쎄.』

『그럴 용기가 계시겠소?』

세창이는 한동안을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미상불 직접 한번 말을 들어 보는 것이 시원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 그래 보지.』

『그럼 내 일을 꾸미어 드리리다.』

이렇게 약속을 하고 세창이는 며칠을 독고일의 집에서 묵기로 하였다.

전과 다름없이 독고일의 친절에,

『세상엔 괴악한 인물뿐이 아니로구나.』

하고 생각을 돌리어 먹게 되었다.

그러자 일이 되느라고 이튿날 저녁때부터 함박같은 눈이 쏟아지기 시작하여 온밤을 계속하였다.

『인제 일이 됐소. 어쩌면 안성마침으로 눈이 온단 말요. 하느님이 무심치 않아.』

하고 독고일이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였다.


七[칠][편집]

세창이는 곱은 손을 훅훅 불어 녹이어가며 눈을 쓸었다.

그러나 눈을 쓰는 체 하며 슬금슬금 돌아서 내하 가까이 들어갔다.

긴 마루로 고은 옷을 입은 여자가 수 없이 왔다 갔다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혹시나 하고 마루 위를 쳐다본다.

아니다. 모두가 전에 보지 못하던 계집뿐이다.

『소선이는 어디 있노.』

속으로 초조히 굴며 그는 탐탁치 않은 눈을 쓴다.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동저고리 바람이다.

이때이다. 어느 방속에서 여자 기침소리가 들린다.

앗! 소선의 기침소리다. 그리웁고 미운 소선의 음성이다. 기침을 두세 번 하더니 가래침을 뱉으려고 미닫이를 열어젖히고 이 편 마당을 내다본다.

틀림없는 옥소선의 얼굴, 소선은 가래침을 마당에 뱉는 동시에 거기에 서서 있는 세창의 눈과 마주쳤다.

『앗.』

소선이는 나즈막히 이렇게 부르짖었다. 세창이 역시 일순 전까지는 죽일 년 썩은 년하고 미웁게 생각하였지마는 죽도록 그립던 소선의 얼굴을 보매 미운정은 어디가고 부지중,

『소선이.』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거의 입 밖에 나올 번하였다. 한두 걸음 그는 앞으로 달려갔다. 그 동시에 소선이는 ── 안색이 싹 변한 소선이는 매정스럽게 미닫이를 탁 닫쳐 버리었다.

그러고는 다시는 얼마를 기다려도 아무 동정이 없다.

『죽일 년.』

세창이는 두 번째 주먹을 부르쥐고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이 사람은 눈은 안 쓸고 멍하니 무얼 하고 섰어.』

하고 사령이 등을 탁 치는 서슬에 그는 비로소 자기 정신이 돌았다.

『어찌 추운지.』

『춥다고 서서 있으려면 뭘 하러 들어왔어 방속에 누어 있지.』

하고 핀잔을 준다.


『못 만났소?』

『만났어.』

『그래?』

『죽일 년.』

하고 세창이는 시종을 이야기하였다. 독고일이는

『그럴 리가 없는데. 세상 인심이란 참 알 수가 없군 ── 서방님 세상에 계집이 하나 뿐이랍니까. 그만 내버려두우. 그렇게 의리를 모르는 년이면 얼마 못가서 빌어먹을 게니.』

하고 함께 욕설을 하며 분히 여기었다.


일루의 희망조차 끊어진 것을 안 세창은 누구를 미워하고 할 것 없다는 경지에 도달하였다.

계집 하나 때문에 부모를 버리고 나선 자기의 불만 불평이 가슴을 여이는 듯이 뉘우쳐진다.

『천하에 못생긴 놈.』

스스로를 이렇게 책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혼자 자리에 누워 있으면서도 어리석었던 자기의 몰골이 눈앞에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이다. 밖에서 조심조심하여 가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 좀 여세요.』

여자의 음성이다. 세창이가 누어 있는 방은 문간방이었다.

『누구요.』

『앗, 서방님 문 좀 여서요. 소선이올시다.』

『앗 소선이.』

세창은 머리가 빙 돌았다. 천지가 뒤집힌 것 같았다. 어떻게 되었는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정신을 차린 때는 소선이가 자기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어깨에 물결을 치며 느끼어 울고 있을 때이었다.

『서방님 어쩌면 그렇게 무정하게 서신 한 장이 없으셨소. 죽을 듯이 기다리고 있는 내 속을 모르고…… 반가와요. 서방님을 이렇게 뜻밖에 만날 줄을 뉘 알았겠에요.』

하고, 기뻐서 웃는 소선이었다.

그의 뺨에도 눈물이 흘렀다.

『난 네가 변심헌 줄만 알고 내 내일이라도 여기를 떠나려고…….』

하고는 소선의 등을 어루만지며 울었다.

『변심이란 무슨 말씀요. 아까도 서방님이 막버리군이 되어 날 보러 들어오신 것을 알고 맨발로 뛰어 내려가고 싶었지마는 그러고 보면 되려 서방님께 화가 미칠 것 같아서 매정하게 군 것이지요.』

『그런 줄 뉘 알았나. 도시 내가 생각이 부족했어. 소선이 울지 말게.』

하는 세창이는 기쁨에 젖어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씻었다.

옥소선의 말을 듣고 보면 내아에서 세창을 만나 보고는 삿도에게 자기 모친이 병이라고 칭탈하고 한달음에 집에 와서 본즉 어머니는 몹시도 냉냉하였다. 문간에서 잠깐 만났을 뿐이오, 어디로 간 것도 모른단 말에 모든 것을 상상한 소선이는 어머니에게 발악까지 하였다. 그리고 뛰어 나와서 가만히 생각하니 필연 독고일의 집에 한번은 갔었을 듯한 생각이 나서 찾아 온 것이었다.

『자아 서방님 이것 보슈.』

하고, 소선이는 가지고 온 보퉁이를 끌른다. 거기에는 금은보화만이 가득하였다.

『이것만 가졌으면 우리 둘이 평생은 못 살망정 몇 해 살기에야 부족하리까, 자아 이걸 가지고 어디든지 남모르는 곳으로 가서 둘이서 살아 가십시다. 나는 남의 집 길쌈을 하더라도 서방님 한분 굶기지 않을 터이니.』

『음.』

세창이는 뜨거운 무엇이 목구멍으로 치미는 것 같아서 말이 아니 나왔다.

다만 소선의 손을 잡고 느끼어 울었다.

『네가 그런줄 모르고 난, 난, 너를 죽일 년이라고 했다. 소, 소선이.』

둘은 서로 굳게 부등켜 안고 한동안을 꿈속에서 울었다.


세창이가 부지거처가 된지 한 달이 넘도록 아무 소식이 없으매 세창의 부친 판서는 비로소 불안에 달리어 전인을 띄어 수소문한 결과 옥소선을 만나 손을 잡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는 회답을 받았다. 판서는 아내를 앞에 앉히고

『나는 그놈을 그래도 자식으로 여겼더니 인제는 일이 끝났소. 그 놈은 내 자식이 아니오 계집을 만나러 평양까지 간 것도 용서하려 했더니 계집과 어디로 도망을 하였다니 그 놈, 이제 아주 뼈까지 썩은 놈이니 어디 자식이라고 생각하겠소. 그 놈은 죽어서 없어진 셈만 치우.』

하는 선언을 하여 버리었다.

그 후 일 년이 지나 이태가 되는 해 봄이다.

팔도의 유생들은 정시(庭試)를 받으러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상감은 시관들이 뽑아 올린 경탄할만한 시문 한 장을 앞에 놓시고 무릎을 치시며 탄복하신다.

『아직도 조선에 인재가 남아 있어.』

하시며, 시문 끝에 쓰인 응시자의 이름을 보시고 깜짝 놀라신다.

『성세창, 성세창.』

하고 두어 번 외우시고는 마침 어전 가까이 시립하였던 성판서를 청하신다.

『세창은 경의 아들이 아니오?』

『그렇습니다마는 아마 동성동명…….』

『아니 그럴 리가 있오.』

상감은 이미 성판서의 아들이 행방불명이 된 채로 있는 사실을 아신다.


이 신기한 이야기의 결과는 독자의 상상으로 충분하다.

허나 여기에 상감 어전에 전개된 인정 희비극의 일막, 부자상봉의 장면이 있었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감은 그 희비극의 이면에 절부 옥소선의 노력이 있었음을 아시고 자세히 하문하셨다.

과연 옥소선은 절부이었다. 그는 사랑을 끝까지 살리었다. 깊은 산중으로 애인을 데리고 들어간 옥소선은 주야로 남편을 동독하였다. 어느 때는 글 읽기를 하더라도 태만하면 나아가 우물물로 목욕을 하고 하늘에 애소하였다.

이 정성의 정열에 감격한 세창이 일심으로 글 읽기에 정력을 다하였을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알성장원 ── 이것 하나만이 부모에게 끼친 불효를 상쇄하는 유일의 길인 것을 소선은 매양 남편 머리 속에 부어 주었다.

이리하여 이 신기스런 일편의 이야기는 절부 옥소선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

몸은 비록 부실에 지나지 않았으되 그의 꽃다운 이름은 백재 후 오늘까지 우리의 머리에 새로운 느낌을 줌으로써 영원히 살아 있다.

  1. 눈을 쓸며 마당에서 옛 친구를 훔쳐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