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 너머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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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편집]

전화를 끝내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 인준이는 벌써 묶어 두었던 자기의 짐 몇 개를 소춘이와 나누어 들고 아파트를 나섰다. 아파트 앞에는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짐도 짐이려니와 김소춘이를 대낮에 큰길로 데리고 다니기가 좀 힘들어서 택시를 미리 준비할 것이었다.

“소춘 씨.”

“네?”

“나도 이삼 일 내로는 상해로 가서 다시 소춘 씨를 만나겠지만 아예 다시는 좋지 못한 생각을 내지 마시오.”

“….”

가까운 거리─ 두어 마디의 이야기를 할 동안 택시는 벌써 목적지에 이르렀다. 강습소의 앞이었다.

들어서서 보매 벌써 모두들 제 짐을 이리로 가져오고 당원들도 죄 모여 있었다.

“다 됐구료.”

“다 됐읍니다.”

적적한 문답이었다. 비록 고국이라 하나 객지와 같이 와 있던 그들 인제 바야흐로 자기네들의 지도자 서인준 박사 하나를 남겨 놓고 자기네들은 한걸음 앞서서 상해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짊어지고 들어왔던 사명도 다하지 못하고 그것까지 서 박사에게 전임해 버리고 자기네들만 안전 지대로 안전한 동안에 먼저 떠나려는 것이었다.

여러가지의 사정으로 먼저 돌려보내기는 하나 인준이의 마음도 섭섭하였다.

일을 같이 하기 위해서 들어왔던 동지들─ 자기의 심산으로는 자기도 내일이면 넉넉히 이 땅을 떠날 수 있겠고 먼저 떠난 동지들보다 자기가 도로혀 목적지에는 먼저 도달할 듯하나 장래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이 사람의 세상에서 어찌 그것을 똑똑히 믿으랴.

“당국에서도 묵인키로 됐으니까 표면은 탈출이라 하나 공공히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외다.”

“선생님은?”

“내일 떠나겠소이다.”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이 장소에서 자기네들의 안전을 도모키 위해서 몸소 혼자 남아서 일을 결행하려는 것이라 생각하고 당원들은 더욱 섭섭하였다.

“자 시간이 어떻게 됐나?”

인준이는 시계를 꺼내어 보았다. 기차 시간이 거의 되었다.

“구루마를 불러서 짐을 싣도록 하시오. 누구 한 사람은 인천 양 공께 이 차로 간다는 전보를 치시오. 여러분이 타실 택시도 세 대쯤 부르시오.”

그리고 인준이는 안 군을 불러 가지고 외딴 데로 가다 거기서 남에게 들리지 않을 만치 안 군에게 몇 가지의 당부를 하였다.

“그럼 나는 다른 일이 바쁘니까 여러분을 인천까지 전송도 못하고 여기서 작별합니다. 안녕히들 가십시오. 삼사 일 내로 상해서 만납시다.”

인준이에게 몇 가지의 당부를 받은 안 군은 다른 당원들과 강습소에서 작별을 하고 그냥 강습소를 나가버렸다.

“인천까지 산보 겸 여러분을 전송이나 할까?”

안 군이 나간 뒤에 인준이는 적적한 가운데도 미소를 띠고 당원들이 짐을 꾸리는데 조력을 하였다.

“박사는 내일 떠나나?”

동생을 위험한 곳에 남겨 두고 먼저 떠나는 누님은 가까이 와서 귓속말로 물었다.

“네.”

“비행기로 간다지?”

“네….”

“비행기로 가면 황해를 넘어갈 테니 우리 배를 찾아 보아서 찾거든 그 위에서 저공 비행이라도 하여서 무사히 먼저 간다는 것을 알려나 주게.”

“그러지요.”

누이와 오라비는 서로 눈을 마주 보았다. 잠시의 작별이나마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작별─ 서로 마주 보는 눈에는 눈물이 어리었다.

짐은 먼저 정거장으로 구루마로 내어보내고 이 한 무리는 세 대의 택시에 분승을 하여 정거장으로 갔다.

인준이는 정거장에서 필호를 보았다. 아닌 체하기는 하지만 자기네들이 분명히 떠나는지 어떤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보고도 못 본 체하였다.

이 십여 명의 일꾼은 기차를 탔다. 가지각색의 형색을 한 일꾼은 다른 승객들의 눈에는 기이하게 비친 모양이었다. 승객들의 눈이 연하여 이 무리로 날아왔다.

자기네가 떠나는 길을 경찰에서 미행이나 하지 않나 하고 주의해 알아보려 하였으나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그 눈치로서야 비로서 자기네의 미행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는데 웬 승객의 눈이 연하여 자기네의 위에 부어지므로 누구가 사복 경관인지 아닌지 경관이 미행하는지 안하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인천에 내리면서는 분명히 형사로 인정되는 사람 둘이 그들의 뒤를 멀리 밟았다.

인준이는 벌써 눈치채었다. 다른 당원이 슬쩍 인준의 곁으로 오면서

“붙었나 봅니다.”

할 때에 인준이는 대답 대신으로 눈을 한 번 꺼벅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 간섭도 없었다. 뒤에서 멀리 감시를 할 뿐 간섭치는 않았다. 간섭한댔자 좀 시끄러울 뿐이지 현재로는 아무 범죄도 없는 그들에게는 무서울 것은 없겠지만 간섭하지 않는 것이 매우 좋았다.

부두에까지 이르렀다.

양 군이 미리 와서 마련해 둔 배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탈 사람이 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양 공.”

인준이가 불렀다.

“네?”

“다 됐지요?”

“다 됐읍니다.”

“즉시로 떠날 준비가?”

“네, 그런데 안 공은?”

“쉬!”

동지의 귀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행하는 사람의 귀를 경계하는 것이었다. 조선 땅 안에는 서인준 한 사람만 남는다. 표면으로는 이렇게 되었으므로 안이라는 사람 하나가 더 남아 있다는 것을 경찰이 알면 이상히 여길 것이다. 여기 대한 경계였다.

인준이는 다시 돌아서서 사람을 세어 보았다. 안 군 한 사람 이외에는 조선 잠입하였던 사람이 전부 여기 모였다.

배는 비교적 큰 배였다. 풍랑 심한 황해 바다를 무사히 넘기 위하여 좀 비용을 많이 삭혀서라도 큰 배를 구한 것이었다.

“배가 저만하면 웬만한 풍랑에는 무사하겠구먼.”

“무사하리라고들 하기는 합디다만.”

“황해의 풍랑이 너무도 클 때가 있으니까!”

“선생님, 뒷일은 걱정 없읍니까?”

“글쎄, 내 심산으로는 걱정은 없을 터인데.”

망망한 바다─ 저편 멀리서 일고 잦는 묏더미 같은 물결들을 바라보면서 인준이는 자기의 뒷일보다 동지들의 탄 배를 걱정하였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 황해의 물결이 삼킨 배가 몇 만 척이나 될까. 그들도 모두 떠날 때는 자기보다도 남은 가족들을 걱정하며 떠나지 않았을까.

“내일은 대개는 걱정이 없겠지만 황해의 물결이 근심됩니다.”

“글쎄올시다.”

“자, 좌우간 배에들 올라가십시다. 나도 잠깐 같이 타고 점심이라도 함께 나눕시다.”

“축연 겸 석별연의 준비도 시켜 두었읍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양 군이 미리 준비한 배로 모두 올라갔다.

배에는 양 군이 준비해 둔 음식이 있었다.

당원이 다 배에 오른 뒤에 음식상이 벌여졌다.

축연이라면 축연이랄 수도 있었다.

석별연이라면 석별연이랄 수도 있었다.

특별히 의미가 없는 이 상 앞에 정좌에는 서인준이가 앉고 그 당원들이 둘러앉았다.

여기는 부두와도 달랐다. 밀행하던 경관들도 그만 부두에 떨어지고 당원끼리만 상을 둘러앉았다.

“가장 어려운 일을 선생님께 맡기고 우리가 먼저 가기가 퍽 미안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당원의 말에 인준이는 고맙기는 하나 걱정 말라고 위로 하였다.

이 이별을 가장 설워하는 사람은 서인준의 누님 서씨였다. 일이 하루만 되면 인준이가 도로혀 먼저 상해에 도착하게 될 것이로되 이 부인은 왜 그런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박사 괜찮겠나?”

“왜 염려하세요?”

염려스러워서 물어 볼 때마다 인준이는 탓하지 않는 듯이 이렇게 안심을 시키지만 누님에게는 결코 안심되지 않았다.

일찌기 부모를 잃고 자기가 손수 길러 낸 동생─ 여자의 약한 손으로써 한 사람을 길러 내고 교육까지 시키자니 공력이 얼마나 들었으랴. 이 사랑하던 동생을 고국─ 비록 고국이라 하나 인준이에게는 위험키 짝없는 곳이다─ 에 홀로 남겨 두고 그 위에 가장 위험한 일을 맡겨 두고 자기만은 먼저 안전 지대로 피해 간다 하는 것은 차마 하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박사는 그렇게 말하지만 내 마음은 왜 그런지 불안할세그려. 일이 마음대로 되기나 했으면….”

“되기뿐이리까. 아무 염려 마세요.”

“무사히 일이 돼서 떠나게만 되면 우리 배를 찾아서 저공 비행은 잊지 말고 해주게.”

“네.”

술렁거리는 바다의 위에서 석별을 겸한 축하연. 기뻐하여야 옳을지 설워하여야 할지 모두들 몰랐다.

“선생님.”

“네?”

“LC당은?”

“내일 오전 열시까지로 전부 드러낼 예산이외다.”

“우리 목적물은?”

“오늘 밤 열두 시 LC당 최고 고문의 한 사람인 어떤 여자의 손에서 내 손으로 분명히 넘어올 예산.”

“그럼 상해 가거든 그렇게 보고할까요?”

“내가 아마 먼저 도착할걸요.”

이십 일 이내로 일을 끝내려고 몸소 들어왔다가 중도에 LC당이 가로들기 때문에 그 예산을 한때 연기는 하였지만 본시의 계획대로 이십 일이내로 전 사건이 끝나게 된 이 자리에서 인준이는 임시의 석별보다도 일이 순조롭게 된 것이 기뻤다. 방해물로 생각하였던 LC당이 도로혀 간접으로나마 일을 보조케 된 것은 기이한 운명이었다.

“그럼 안녕히들 가십시오. 풍파 심한 황해 바다를 무사히 건너시기를 심축합니다.”

간단한 연회가 끝난 뒤에 인준이는 이런 인사를 던지고 배에서 내렸다.

“선생님, 그럼 보실 일을 어서 다 보시고 상해로 돌아오세요.”

동지들은 뱃전에서 인준이와 작별하였다.

“누님, 안녕히 가세요.”

“박사, 무사하기만 바라네.”

이리하여 인준이는 뭍에 동지들은 배 위에 서로 갈리었다.

닻 감는 소리.

돛 올리는 소리.

배 젓는 소리.

당원들을 실은 배는 부두를 떠났다.

배 위에서 흔드는 손수건과 부두에서 흔드는 손수건, 바람에 나부끼는 이 손수건들 그들의 작별을 대언하였다.

배는 부두를 떠나서 차차 바다로 향하여 나아간다.

순풍이었다. 순풍을 받은 배는 크고 잔 물결들을 타고 넘으면서 황해로 향하여 차차 속력을 더 하였다.

인준이는 부두에 서서 손수건만 연하여 흔들고 있었다.

─ 풍랑 심한 황해 바다를 무사히 타고 넘으시오. 나는 내일 문명의 이기인 비행기로써 그대들의 머리 위를 넘어서 먼 상해로 들어가겠소.

잠시의 이별이나마 그래도 함께 떠나는 것보다는 마음이 좀 언짢아서 인준이는 그냥 부두에서 차차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평선을 향하여 차차 속력을 더하던 배의 동무들이 인제는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서야 인준이는 부두를 떠났다.

터벅터벅 인천역으로 향하여 갈 동안 동지들을 작별한 섭섭한 감정과 금명간 열릴 거대한 사건이 뒤섞이고 얽히어서 다른 사람으로 보자면 퍽이나 이별을 아끼는 사람으로 보였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있는 경인 열차─ 인천역에서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 인준이는 기차에 몸을 싣게 되었다.

기차에 몸을 실으면서는 인준이는 인제 바야흐로 일어날 사건에 대하여 더 관심케 되었다.

오늘 밤에는 LC당에서 활동을 하리라. 자기가 수년간을 고심을 해서 꾸며놓은 거액의 공채는 오늘밤으로 LC당의 손으로 넘어가리라.

그 넘어간 공채는 즉시로 (당수에게 권리를 맡은) 미스 영의 손으로 들어가리라. 그러면 미스 영은 자기에게 그 사연을 알린 뒤에는 즉시로 비행기 은닉소로 몸을 감추리라.

내일 아침 이필호를 불러 내 가지고 미리 준비했던 경관의 힘을 아울러 LC당원 전부를 검거해 버릴 때의 그 통쾌미─.

경찰에서는 LC당이라는 거물을 잡아 내기 때문에 다른 일에는 잠시 방심할 동안 자기는 안 군과 함께 자동차로 이 오백 년의 도회 경성을 달아나서 미스 영이 기다리고 있는 비행기 은닉소로 가리라.

십오 분 뒤에는 자기네들은 공중에서 커다랗게 둥그러미를 그리면서 대륙을 향하여 이 반도를 떠나리라.

사십만 원에 가까운 거액의 공채가 분실된 것을 경찰이 알 때쯤은 자기네는 상해에서 축배를 들고 있으리라.

그 얼마 뒤에는 미스 영은 변하여 미세스 서로 될 것이다.

─ 이러한 생각에 잠겨서 인준이는 눈을 꾹 감은 채 인천서 경성까지 이르렀다. 형사 이필호가 인준이의 계획을 짐작하고 그 예방책을 강구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경성역에서 기차를 내려서 플랫폼을 걷는 인준이의 걸음은 가벼웠다. 인준이는 정거장 밖에 나섰다. 거기서 문득 이필호 형사와 마주쳤다.

“아, 이 공.”

어떻게 보자면 경악의 부르짖음이며 어떻게 보자면 반가운 이 인사에 필호도 놀란 모양이었다.

“어떻게.”

“인천 다녀옵니다.”

“참 오늘 선생님 친구들이 떠나신다지요? 무사히 떠나셨읍니까?”

“네 무사히….”

여기서 필호는 떨어질 줄 알았더니 그러지 않았다.

“선생님 어디로 가십니까?”

“피아노 강습소로….”

“같이 모시고 가도 괜찮겠지요?”

“마음대로….”

그러나 어조로 보아서 쾌락이 아니었다.

그들은 피아노 강습소로 왔다.

무론 인준이도 이 시간에는 무슨 특별한 용무는 없었다. 그러나 오늘밤 바야흐로 자기의 임무를 결행하려는 때에 형사가 함께 온 것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강습소로 들어왔다. 잠시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인준이도 무슨 생각에 잠겼다. 필호도 무슨 생각에 잠겼다.

좀 뒤에 필호가 먼저 말하였다─.

“선생님 피아노도 하십니까?”

“할 줄 모르면서야 강습소를 내겠소?”

“한 곡 어디─ 문외한이라 듣는댔자 알지는 못합니다마는 한 곡조 들려주시면 좋겠읍니다.”

“그러지요.”

인준이는 피아노 앞에 갔다. 뚱뚱 두어 번 의미 없이 두드려 보았다. 그런 뒤에 보통 널리 알리워 있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는 인준이의 손끝에서 울리어 나왔다.

전문적 지식은 못 가졌으나마 그래도 고등한 교육을 받은 필호는 피아노를 들을 줄은 알았다.

필호는 놀랐다. 과학자로 알리워 있는 인준이가 피아노도 이만치 능하리라고는 의외이었다.

처음에는 단지 한 개 인사로서 듣기를 청했던 필호로되 피아노의 소리가 차차 격렬하여 감을 따라서 마음에 떠오르는 감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한 곡조 끝이 났다.

“선생님, 피아노는 언제 그렇게 배우셨읍니까?”

“그래뵈어도 독일 국립음악학교 피아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소이다.”

그 뒤에는 말이 끊어졌다. 한참을 두 사람은 다 각기 아래만 굽어보고 있었다.

또 필호가 먼저 말했다.

“선생님.”

“네?”

“저!”

말이 막혔다. 한참을 주춤거렸다.

“그!”

무슨 매우 하기 어려운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인준이가 채근하였다.

“뭐 말씀이에요?”

“선생님.”

“저 제가 한 마디 말씀드릴 게 있읍니다.”

“말씀하세요.”

“선생님, 저한테 한 가지 맹서해 주실 수가 없읍니까?”

“무슨 맹세?”

“….”

“네?”

“일본 국법에 금한 일을 아직껏은 행하시지 않은 것은 잘 압니다. 그렇지만 장래에도 행하시지 않겠다는….”

“나는 내일 조선을 떠나는 사람이외다.”

“LC당은?”

“내일 오전 일곱시로 시작해서 열시까지 끝이 나도록 조력하지요.”

“그동안을 무사히 국법을 무시하는 행동을 안하시겠다는 맹서를….”

이것은 딱한 문제였다.

거짓 맹서는 인준이의 양심이 허락치 않는 바였다.

자기의 하려던 일은 또한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준이는 잠잠하여 버렸다.

무거운 공기가 두 사람의 새를 흐르고 있었다.

맹서치 못하겠노라고 하였다가는 이 뒤부터 필호가 자기를 엄중히 감시할 것이다.

그렇게 엄중히 감시하면 자기의 목적은 수행키가 힘들었다. 다른 당원들이라도 많이 있으면 되려니와 이미 다 돌려보낸 지금에 있어서는 경찰의 엄중한 감시 아래서는 수행키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잘못하다가는 자기만 아니라 미스 영까지도 위태롭게 될지도 알 수 없었다.

맹서치 않을 수도 없고 맹서할 수도 없게 된 인준이다. 한참을 아래만 굽어보고 있었다.

필호도 역시 어려운 듯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더 채근할 기력은 없는 모양이었다.

필호가 또 먼저 말했다.

“선생님.”

“….”

“제 입장이 참 괴롭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플랜을 짐작합니다. 윤 백작 댁 공채도 압니다. 일단 LC당의 손을 빌어서 훔쳐 내게 하고 그 뒤를 선생님께서 다시 맡으시려는 플랜─ 그리고 그 때문에 선생님 동지들을 먼저 상해로 돌려보내신 심경─ 모두 짐작합니다. 그러니깐 제 마음이 더 괴롭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숭배합니다. 숭배하기 때문에 차마 선생님 어깨에 이 손을 얹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경찰관이라는 제 직업은 어찌할 수가 없읍니다. 집의 아버님이 범죄를 하신대도 체포해야 할 의무가 있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 마음은 어떻다 형용키 힘들도록 아픕니다.”

인준이는 들었다. 필호의 마음도 짐작하였다. 인준이도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만치 아신다니 더 할 말이 없소이다. 그러나 남아로소 일단 맡은 일─ 이 공은 경관 당연히 할 일을 위태롭다고 슬쩍 피하실 수 있소이까. 이 공께 이미 간파(看破)가 된 이상에는 내가 하려던 플랜도 인제는 위태롭게 되었소이다마는 그렇다고 일단 맡았던 임무는 내어던질 수 없소이다. 인제는 서로 저 갈 길을 갈 밖에는 도리가 없겠소이다.”

“무론 선생님께서 그렇게 대답하실 줄은 모른 바가 아니올시다. 그렇지만 차마 저는 제 손으로 선생님을 체포할 수가 없어서 말씀이올시다.”

“그렇지만 각기 길이 다른 이상에야 할 수가 없겠지요.”

“무론이올시다. 무론 선생님께서 범죄를 하시면 선생님의 어깨에 손을 얹을 사람은 저 밖에 없읍니다.”

“나도 같이 체포되는 이상에는 이 공의 손에 잡히고 싶소이다.”

필호와 인준이는 다시 머리를 수그렸다.

하나는 바야흐로 벌어지려는 범죄 사건을 사정으로 말하여 미리 막아보려는 이 형사 또는 하나는 모든 일이 다 마음대로 진척돼서 오늘 밤이면 공채가 자기의 손으로 들어올 줄 믿고 있다가 의외에도 그것은 좀 과도한 망상인 줄 깨달은 인준이─.

이 두 사람은 머리를 푹 가슴에 묻은 채 다른 말이 없이 앉아 있었다.

한참 뒤에 인준이가 먼저 말했다─.

“그럼 오늘 이 공은 부러 그 당부를 하시러 나를 따라오셨구료.”

“네. 숭배하던 선생님이 영어의 몸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고맙소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마치 내가 이 공께 향해서 내가 그 공채를 훔쳐 내어도 모른 체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니까 그 문제는 집어치워 버립시다.”

필호의 입에서는 기다린 한숨이 나왔다.

“그러면 선생님. 이것 하나뿐은 명심해 두십시오. 선생님의 일거일동을 이제부터 제가 경찰관으로서 감시를 하겠다는 점을… 선생님께서 상해로 돌아가실 때까지 저는 선생님께서 그 일에 손을 붙이실 기회가 없으시도록 감시를 해야겠읍니다. 선생님을 형무소로 보낸다는 것은 제게는 너무도 가슴쓰립니다.”

“그 마음은 감사하외다.”

서로 환경과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또한 서로 적시(敵視)하지 않을 수 없는 두 사람은 탄식을 연하여 하며 마주 앉아 있었다.

한참 있다가 필호는 일어섰다.

“선생님 제 비록 간다 할지라도 역시 감시는 게을리지 않습니다. 그 점을 아시고 양해해 주세요.”

“고맙소이다.”

필호는 이리하여 그 강습소를 나섰다. 그러나 무론 직무상 엄중히 감시는 할 것이었다.

필호를 돌려보낸 뒤에 방으로 돌아오는 인준이의 얼굴에는 고민하는 표정이 역연히 나타났다.

일에 착오가 생겼다.

순조로이 진척되는 줄만 깊이 믿고 내일 정오 이전으로는 미스 영과 안 군을 데리고 목적물을 가슴에 품은 뒤에 황해 바다를 타고 넘을 수가 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데 거기 착오가 생겼다.

아직껏 허수룩히 보았던 이필호가 인준이의 상상과 같은 숫보기가 아니고 꽤 깊이 이 사건을 파고 들어가 있던 것이었다.

인제부터는 무론 자기의 위에 엄중한 감시가 붙은 것이다.

엄중한 감시가 붙기만 하면 비록 미스 영이 계획대로 오늘 밤 공채를 손에 넣는다 할지라도 허사로 돌아갈 것이다. 공채를 손에 놓은 미스 영은 비행기 은닉소까지 가서 인준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다려보아서 인준이가 오지 않으면 도로 경성으로 들어올 것이다. 경성으로 들어와서는 인준이 자기를 찾을 것이다. 자기를 찾기만 하였다가는 그때는 자기뿐 아니라 미스 영까지 이필호의 손에 검거가 될 것이며 검거가 된다 하면 공채는 도로 경찰의 손을 거치어 윤 백작 댁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준이 자기가 검거가 된다든가 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 들어올 때부터 미리 각오한 바였다. 대개는 감쪽같이 일을 결행케 될 것이나 불행히 검거된다 하여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쯤은 미리부터 각오하였던 바였다. 그러나 자기는 비록 검거된다 하나 목적하였던 공채는 릴레이식으로 상해로 보낼 자신은 있었다.

그랬더니 지금 뜻밖에 일이 생겼다. 일을 그냥 진행시키다가는 자기도 검거가 될 것이며 뚱딴지 미스 영(미스 영을 생각할 때는 인준이의 가슴은 더욱 우기어 내는 듯하였다)까지 검거가 되겠고 목적물인 공채조차 손에 넣지 못하기가 쉽게 되었다.

이 일을 어찌하나?

이필호는 자기가 아직껏 생각하고 있더니보다는 훨씬 더 깊이 이 사건의 이면을 안다. 인제부터는 이필호의 감시의 눈이 자기 위에 부어질 것은 정한 이치다.

미스 영과 공채뿐은 혹은 모면케 할 도리가 있을지도 알 수 없다. 오늘밤 LC당의 손에서 공채를 미스 영이 넘겨받기만 하면 인준이는 내버려둔 채 상해로 도망쳐 버리면 미스 영과 공채는 안전히 상해로 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연을 어떤 방식으로 미스 영에게 통지를 하나? 자기가 상상하였던 바보다는 썩 더 영리한 이필호 형사가 자기를 엄중히 감시하는 동안은 이 갑작스러이 생긴 착오를 미스 영에 알릴 방법이 없다. 미스 영에게 알릴 방법은 생각나지 않고 미스 영에게 알리지 않기만 하면 꿩도 알도 다 놓치게 될 이 어려운 처지에서 인준이는 자기의 활로를 발견하려고 애썼다.

뜻안한 착오라도 생기면 그때의 보조자로는 안 군 한 사람뿐은 그냥 경성에 남아서 어떤 곳에 숨어 있지만 이필호의 엄중한 감시 아래서는 안 군을 방문할 수도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에는 빈 손 들고 상해로 돌아갈 수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는 듯싶었다.

우두커니 앉아서 궐련을 빨고 있는 인준이나 그의 마음은 여간 어지럽지 않았다.

“뒷일은 염려 말고.”

먼저 떠나라고 동지들을 떠나보낸 직후에 이런 괴로운 문제가 갑자기 튀어져 나온 것이었다.

인준이는 소리까지는 내지 않았지만 일이 너무도 뚱딴지 방향으로 어그러지기 때문에 소리를 내어 울고 싶기까지 하였다.

석양녘이 되었다.

피아노 강습소에도 누런 봄날의 저녁해가 담벼락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때에 웬 행상 한 사람이 들어왔다.

“비누나 양말 안 사렵소.”

능란한 솜씨로 외치면서 행상은 중대문 안까지 들어섰다.

인준이는 생각난 듯이 문을 벌컥 열어

“양말 한 켤레 삽시다.”

고 하였다.

행상은 마루로 왔다. 그리고 자기의 짐을 내려놓았다.

“선생님, 왜 부르셨읍니까.”

안 군이었다.

아까 인준이는 국수를 사 먹으러 갔다가 국수집 중머리에게 몰래 돈 오원짜리를 심부름 삯으로 집어주고 안 군에게 편지 한 장을 전한 것이었다.

“행상 차림을 하고 지급히 오시오.”

이 간단한 명령에 의지하여 안 군이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었다.

“개스 양말 한 켤레 봅시다.”

이렇게 말하고 양말을 꺼내는 동안 인준이는 작은 소리로

“이 근처에 누구 숨어서 감시를 안합디까.”

고 물었다.

“이필호.”

안 군은 간단히 대답하였다.

양말 한 켤레를 사고 돈과 함께 편지 한 장을 안 군에게 내어 주었다.

그 편지는 미스 영에게 전하는 편지로서 인준 자기는 어떤 특수한 사정으로 같은 비행기로 갈 수가 없으니 목적물만 손에 들면 안 군과 둘이서 먼저 상해로 향하여 즉시 출발해 달라는 뜻을 적은 것이었다.

인제는 되었다.

목적물이 손에 들기만 하면 미스 영과 안 군은 곧 상해로 돌아갈 것이다.

그 뒤에 윤 백작 댁 공채가 강탈되었다는 것을 경찰에서 안댔자 그때는 벌써 공채는 높은 하늘을 날라서 상해로 향하는 도중일 것이다.

이필호가 아무리 자기를 의심한다 할지라도 이필호의 감시 아래 있던 서인준인지라 자기에게도 어찌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자기는 하룻밤을 더 이 강습소에서 쉬고 내일 아침에는 경찰을 조력하여 조선에 들어온 LC당 전부를 검거케 한 뒤에 경찰 당국의 송별을 받으면서 공공히 경성 역에서 상해로 향해서 출발을 할 것이다.

새로운 플랜은 여기 다시 섰다.

설혹 공채 강탈의 혐의가 자기에게 내려서 자기는 구금이 된다 할지라도 미스 영과 안 군과 공채는 무사히 상해 본부로 가게 될 것이다.

이필호가 자기의 계획을 세우면 자기는 또한 다시 새로운 계획을 꾸밀 뿐이다.

두려울 것이 없다!

자기에게 꽤 많이 호의를 쓰는 이필호를 감쪽같이 넘긴다는 것은 좀 불쌍하기는 하지만 이필호의 가진 바 사명과 자기의 가진 바 사명이 서로 등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행상인인 안 군을 돌려보낸 뒤에 인준이는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잠시 무거워졌던 기분은 다시금 가벼워졌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뛰노는 그의 열 손가락─ 그것은 그의 마음의 가벼움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엄중한 감시 아래서도 그냥 일을 진행시키는 줄도 모르고 이필호는 지금도 이 근처 어떤 모퉁이에 숨어서 자기의 동정을 엿보고 있을 것이다.

이필호에게 대하여 결코 악감은 가지지 않으나 그래도 이필호의 방해를 이렇듯 감쪽같이 번복시키게 됨에 대하여 인준이의 마음은 십분 만족하였다.

저녁 일곱시쯤 인준이는 어떤 레스토랑에 갔다. 저녁을 먹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저녁을 먹다가 인준이는 문득 생각난 일이 있었다.

아까 안 군에게 부탁해서 한 미스 영에게의 편지에 반드시 써야 할 한가지의 당부를 잊었다. 그때 일이 너무도 급격히 변하였는지라 급한 생각만 하고 반드시 할 급한 당부를 잊었다.

내일 LC당원 전부를 검거한다 할지라도 그 검거당한 사람들이 LC당원이라는 근거를 할 수가 없다.

무론 그들은 증거품을 가지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경찰에 잡힌다 할지라도 LC당원이라는 증거는 없을 것이다. 너희가 LC당원이지? 하고 묻더라도 그렇게 대답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새 잡힌 세 명의 LC당원도 LC당원이라는 증거가 없어서 경찰 당국에서도 쩔쩔매고 있는 것은 뻔히 인준이도 안다. 내일 전부를 다 잡는달지라도 역시 매일반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며칠을 구류를 하였다가는 그대로 석방해 버릴 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몇 사람의 외국인과 몇 사람의 조선인이 어떤 혐의로 잡혔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당하였다. 이 이상은 못 될 것이다.

그들이 LC당원이라는 증거품을 가지고 있을 미스 영이 그 증거품을 제공해 주기 전에는 공연히 사회의 비웃음이나 살 밖에는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는 날에는 경찰의 비난은 자기의 위에 쏟아질 것이다.

쏟아진대야 그때는 자기는 상해에 돌아가 있을 때일 터니까 무서울 것은 없으나 그래도 겨우 자기의 힘으로 체포케 하였던 LC당을 그냥 석방해 버린다는 것은 인준이에게 자미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그 증거품을 남겨 두기를 미스 영에게 부탁을 해야 할 터인데 어떤 방식으로 미스 영과 만나나?

자기의 뒤에는 지금도 미행이 달려 있다. 자기가 미스 영과 회견이라도 하였다가는 미스 영에게까지 귀찮은 폐가 미칠는지도 알 수 없다.

잠시 그 방법을 연구해 보았으나 이번에는 신통한 지혜가 나오지 않았다. 미스 영에게 아까 안 군에게 한 것과 같이 편지를 전하려다가는 다른 당원이 그 편지를 받았다가는 큰 일이 생긴다. 안 군에게 또 하자니 지금쯤은 안 군은 어디 있을지 알 수 없다.

잠시 생각한 뒤에 인준이는 드디어 전화를 하기로 하였다. 전화로 간단히 LC당의 증거품을 남겨 두 시오 한 마디만 하면 비록 미행 경관이 들을지라도 꺼림이 없을 것이다. 공공히 경관을 시켜서 그런 전화를 할지라도 괜찮을 것이다.

인준이는 전화로 갔다. 그리고 미스 영의 번호를 불렀다.

찌르르 찌르르 부르는 소리가 한참 났다. 그러나 좀체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삼 분 사 분─ 종내 교환수가

“암만 불러도 대답이 없읍니다.”

고 한다.

그러나 인준이는 다시 부탁하였다─.

“좀더 불러 봐 주세요. 반드시 있을 테니….”

또 찌르르 찌르르 전화의 벨을 울리는 소리가 연하여 났다.

여전히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암만 불러도 나오지 않으므로 혹은 미스 영이 외출이라도 하였나 하고 인준이는 수화기를 걸어 버리려 하였다.

그때였다. 저편에서 덜걱덜걱 하는 소리가 수화기를 통하여 들렸다.

“누구세요?”

의외에도 미스 영이 아니고 남자의 목소리─ 꽤 굵은 성량의 주인이었다.

“미세스 매켄지 계세요?”

“당신 누구요?”

질책하는 듯한 굵은 소리였다. 인준이는 왜 그랬는지 전화를 탁 끊어버렸다. 온몸에 까닭 없는 소름이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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