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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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병실에서

여기는 대학 병원 외과 진찰실이다. 진찰대 위에 누운 은주의 머리를 간호사가 하얀 붕대로 동여매고 있었다. 그 옆에서 젊은 의사가 진찰을 끝마치고 허리를 펴면서 영란의 아버지에게 조용히 말했다.

“심한 충격으로 잠시 혼수상태에 빠졌을 뿐이니, 안심하십시오.”

“다른 데는 다친 데가 없습니까?”

영란의 아버지는 근심에 가득 찬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

“다행히 다른 데는 다친 데가 없습니다. 머리에 타박상을 입고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이니까요.”

의사는 은주의 팔을 걷어 올리고 주사를 한 대 놓고는, 다시 한 번 안심시키듯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곧 정신을 차릴 테니까요.”

“고맙습니다.”

의사에게 대답한 후, 영란의 아버지는 민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애의 집은 어디냐?”

“돈암동이에요.”

“은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 계시니?”

“어머니만 계세요. 그리고 오빠하고......”

“미안하지만, 지금 곧 은주 어머님을 좀 모시고 와 주겠니?”

민구는 휙 돌아서서 복도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그 때까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쌔액쌔액 숨소리만 들리던 은주가 헛소리를 했다.

“죽으면 되지. 나 하나 죽으면 되는 거야!”

“응...... 죽으면 된다고?”

영란의 아버지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이 애가 일부러 죽을 셈으로......?”

의사도 긴장한 표정으로 이창훈 씨를 쳐다보았다.

“으음......”

영란의 아버지는 깊은 신음을 했다.

“오빠는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그런 무서운 짓을...... 그러니까...... 나만 죽으면...... 나 하나만 죽으면 되지 뭐!”

모두들 벙어리처럼 입을 무겁게 닫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 못할 복잡한 사정이 있는가 봅니다.”

의사의 말에, 영란의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이 아이는 좀 어떤가요? 머리 상처는 심하지 않은가요?”

“다른 곳은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두개골(머리뼈)이 제법 심한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완전히 치료를 하자면 얼마나 걸리지요?”

“아무래도 2, 3주일 정도는 걸릴 겁니다. 그러나 일어나 다니기에 큰 지장은 없을 겁니다.”

“비어 있는 입원실이 있을까요?”

은주는 곧 침대에 실려 입원실로 옮겨졌다.

입원실은 창 너머 창경궁의 울창한 수목이 바라보이는 깨끗한 곳이었다.

은주는 이윽고 침대 위에서 감았던 눈을 간신히 뜨고 하얀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오오, 눈을 떴구나! 정신을 차렸구나!”

그 말에 은주는 가만히 얼굴을 돌렸다. 점잖은 신사 한 사람이 자기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은주야!”

낯선 신사는 와락 달려와서 은주의 손을 잡아 쥐었다. 은주는 가만히 생각했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나라로 간다는데, 여기가 바로 하늘나라일까?’

눈을 떴으나 심한 충격으로 말미암아 은주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은주, 네 이름이 은주라지?”

이처럼 자기를 반겨 맞아 주는 낯선 신사를 은주는 의아스런 얼굴로 비둘기처럼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디예요?”

은주는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는...... 여기는 병원이다.”

“병원요?”

은주는 그 말에 방 안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왜 제가 병원으로 왔나요? 죽으면 하늘로 간다지 않아요?”

“하늘?”

신사는 마음이 아팠다. 내 혈육을 받은 내 딸이 어찌하여 이처럼 죽기를 원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은주야!”

신사는 애처롭고도 감격에 차서 눈물이 글썽글썽한 얼굴로 다정히 불렸다.

“은주야, 네 이름이 은주라지?”

“네, 그런데 선생님은 누구신데......?”

“나는...... 나는 네가 뛰어들었던 바로 그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다.”

“차라고요?”

“그래. 네가 덕수궁 대한문 밖 큰길에서 내가 탄 차 앞으로 갑자기 뛰어 들어왔잖니?”

그러자 은주는 “아!” 하고 가늘게 외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가 그만 머리의 상처가 아파 털썩 누워 버렸다.

“일어나면 안 된다! 너는 그 때 차에 떠받혀서 머리를 다친 거야.”

은주는 그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손으로 머리를 만져 보았다. 머리는 붕대로 여러 겹 동여매져 있었다.

“선생님!”

은주는 부르짖으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아니다! 나는 네 아버지란다!’ 하고, 자기가 이 불쌍한 소녀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생각이 불길처럼 일어났으나 신사는 꾹 참았다. 갓난아이를 내줄 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아이를 다시 찾아가지 않겠다고 굳은 약속을 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아이의 어머니 되는 사람을 만나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은주의 아버지라는 말을 경솔하게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잘못하면 은주를 불쌍하게 만들고, 은주를 이제껏 길러 준 양모에게도 약속을 어기는 행동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은주야, 울지 마라. 울지 말고 네 사정을 나한테 말해다오. 무척이나 알고 싶구나.”

똑같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세상에 나온 자기 딸이 하나는 걱정 없이 자라고 하나는 불쌍하게 자라는, 이 기구한 운명을 생각할 때 아버지 되는 사람으로서 어찌 눈물겹고 가엾지 않겠는가.

아버지는 은주의 흐느껴 우는 어깨를 다사롭게 쓰다듬어 주었으나, 은주의 울음은 언제까지나 그칠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