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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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꿈과 같은 일

경찰에게 끌려 은철이가 다시 혜화동 영란의 집 정문 밖으로 사라진지 얼마 후, 영란의 아버지 이창훈 씨는 대학 병원에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때르릉, 때르릉......”

영란은 뛰어가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오, 영란이냐? 나다, 아버지다.”

“아, 아버지.”

“어머니 계시냐?”

“네, 어머니 있어요. 그런데...... 왜......?”

“있어요가 뭐냐? 윗사람보고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말을 써도 괜찮으냐, 응?”

“아이, 아버지도. 나 꾸중하려고 일부러 전화 걸었어요?”

“요것이, 제법 아버지에게 대들기 일쑤고...... 그런 버릇 못쓴다.”

“헤헤헤헤. 아이, 무서운 아버지야. 아버지가 그처럼 무서우면 아이들이 기를 못 펴서 성질이 나빠진대요.”

“아, 정말 요것이 말만 늘어서 못쓰겠어.”

“네네, 아버지.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세요. 헤헤헤헤......”

“어머니 좀 바꿔다오.”

“네에......”

그러다가 영란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을 이었다.

“아참, 그런데 아버지, 빨리 돌아오세요.”

“왜 무슨 일이 생겼느냐?”

“네, 아주 굉장한 일이 생겼어요.”

“뭔데?”

“어제 아버지 가방에서 돈을 훔친 그 도둑이 잡혔어요, 잡혔어!”

“응?”

“경찰에 잡혔어요. 조금 아까 경찰이 그 도둑을 잡아가지고 왔었어요. 아버지께서 돌아오시거든 곧 경찰서로 오시라고요.”

“아, 글쎄 어떻게나 무서운지 몰라요. 그 도둑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무서운 얼굴로 나를 쏘아보지 않겠어요? 아이, 생각만 해도 떨려요. 아버지, 빨리 좀 돌아오세요, 네?”

“오냐, 잘 알았다. 하여튼 어머니를 좀 바꿔다오.”

“네.”

“어머니, 아버지한테서 전화 왔어요.”

영란은 커다란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이윽고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 아 글쎄, 어제 그 돈을 훔친......”

그러자 아버지는 영란의 어머니가 이야기하려는 것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알고 있소. 영란이에게서 다 들었소. 그런데 여보!”

아버지의 목소리도 어머니 못지않게 흥분되어 있었다.

“예.”

“여보!”

“글쎄, 왜 그러세요?”

“여보, 기뻐하오! 기쁜 일이...... 온 세상을 얻은 것보다도 더 기쁘고 반가운 일이 한 가지 생겼소!”

“기쁜 일이라고요? 무슨 일인데......”

“아 글쎄, 여보!”

“글쎄, 얼른 이야기 좀 해 보시구려.”

“여보! 이게 대체 꿈이요, 생시요?”

“꿈인지 생시인지 이야길 들어 봐야 알죠.”

“여보, 아무 말 말고 빨리 대학 병원으로 오시오.”

“대학 병원요?”

“그렇소. 대학 병원 외과 16호 병실로 오시오. 빨리 와야 하오!”

“아니, 대학 병원에는 왜 갑자기......”

“글쎄, 와 보기만 하라는데도...... 당신이 깜짝 놀라 기절할 일이......”

“아이 참......”

“찾았소, 찾았소!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우리 딸을 찾았단 말이오!”

“옛?”

“귀여운 내 딸! 귀여운 내 딸을 오늘에야 찾았소!”

“정말이에요?”

“영란이가 어제 자기와 똑같이 생긴 아이를 보았다고 한 말이...... 그것이...... 그것이 사실이었소!”

“그게...... 여보, 정말이에요?”

“글쎄, 빨리 오래도......”

“오오, 하늘이...... 하늘이 마침내 우리들을 도우셨군요!”

“어서 좀 빨리 오구려.”

“네, 곧 가겠어요.”

“아직 아이들에겐 아무 말 하지 말고 오시오.”

“네, 네, 알았어요.”

어머니는 전화를 끊고 잠시 동안 얼빠진 사람 모양 멍하니 섰다가, 영란에게 말했다.

“영란아, 영민이하고 싸우지 말고 잘 데리고 놀아야 한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

“아이, 어머니도. 내가 언제 영민이하고 싸웠어요?”

영란은 언제나 한 번도 부모님의 말을 순순히 듣는 적이 없었다.

“넌 말마다 대꾸를 하니? 그래 가지고야 뭣에 쓰겠니?”

“아이, 어머니도. 딸 길렀다가 뭣에 꼭 써먹어야만 하겠어요?”

“저거 저거...... 네가 그러니까 영민이도 널 따르지 않는 거야. 누나면 누나답게 동생을 귀여워하고 그래야지.”

“귀엽게 굴어야 귀여워하지, 귀엽지 않은 것도 귀여워해요?”

“누난 저만 잘났다고 뽐내는 게 제일가는 재주지, 또 뭐가 있어요? 깍쟁이가!”

영란은 영민에게 주먹을 들었다.

“깍쟁이를 보려면 네 그림자를 봐라.”

“요것이!”

영란은 마침내 주먹으로 영민이의 뒤통수를 쥐어박았다.

“아얏, 엄마야.”

영민은 그만 울음보를 터뜨려 버렸다.

“오, 영민이 착하다 내 잠깐 나갔다 올게, 그 동안 누나하고 싸우지 마라.”

“누나가 자꾸만 때리는걸, 뭐.”

“그럼, 넌 누나 방에 올라가지 말고 안방에 들어가서 가만히 공부나 해라.”

“네.”

그 때 2층 영란이의 방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울려 나왔다.

“누난 공부는 안 하고 밤낮 피아노만 쳐요. 무슨 대음악가가 된다고요. 제까짓 것이 폼만 잡았지 무슨 대음악가야?”

영민이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흘겨보고는 인사를 하면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안녕히 다녀오세요.”

“오냐, 언제 봐도 영민인 착하지.”

영란의 어머니는 바삐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