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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무지개 뜨는 언덕/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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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놀라운 소식

민구가 돌아오기만을 은주는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으나, 민구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때 복도에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리면서 한 발을 들여놓는 것은 민구가 아닌 낯선 중년 부인이었다.

부인은 신사와 잠깐 서로 마주 쳐다보고 나서, 흰 붕대로 머리를 동여매고 창가 침대 위에 조용히 누워 있는 은주의 얼굴을 놀란 듯 바라보았다.

“오오―”

부인은 너무 놀랍고 기쁜 나머지 벌떡벌떡 뛰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조심조심 침대 앞으로 다가왔다. 부인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 여보, 잠깐......”

그 때 신사가 부인을 막으며 귓속말로 가만히 속삭였다.

“당신이 이 애의 어머니라는 말은 아직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부인은 남편의 말을 알아듣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다가 다시 한 번 놀라며 짧게 외쳤다.

“오, 세상에! 이럴 수가...... 이 애가...... 이 애가 바로......”

자기 딸 영란이의 얼굴과 똑같은 또 하나의 얼굴이 지금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겠다는 듯이 비둘기처럼 말똥말똥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는 영란이의 동생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리를 다쳤어요?”

“내가 탔던 차에 치였소.”

“아유...... 저런 저런......”

부인은 은주의 조그만 손을 와락 잡아 쥐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렇다. 내 딸이다. 분명히 내 딸이다. 15년 전, 내 옆을 떠나 누군지도 알 수 없는 그 어떤 사람의 손으로 갔던 영란이의 동생이 틀림없구나.’

병과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에게 주었던 가여운 딸. 그 아이가 지금 눈앞에 자기의 친어머니가 있는 줄도 모르고 눈만 깜박이면서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는 것이 부인은 한없이 원통하고 슬펐다. 자기 어머니를 눈앞에 두고도 딸이 몰라본다는 사실에 부인은 자꾸만 슬프고 눈물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오, 가엾은 내...... 내......”

감정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부인 옆에서 남편이 “여보!” 하고 막는 소리에 부인은 말끝을 꿀꺽 삼켰다.

“네 이름이 뭐지?”

부인은 울음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은주예요.”

“은주, 무슨 은주지?”

“서은주예요.”

“서은주. 아이, 어쩜 이름이 이처럼 예쁠까! 은주!”

은주는 이 낯선 부인이 왜 자꾸만 우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은주는 신사의 얼굴과 부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가만히 물었다.

“아주머니, 제 이름 정말 예뻐요?”

“예쁘고말고! 은주, 은주, 은혜 은, 구슬 주?”

“네.”

은주는 이처럼 자기 이름이 예쁘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칭찬해 주는 사람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은주는 집이 어디지?”

“돈암동이에요.”

“어머니는 계시니?”

“네, 지금 앓아누우셨어요.”

“아버지는 무얼 하시지?”

“제가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어요.”

“아아, 그래?”

“4년 전, 제가 열 살 때 만주에서 돌아가셨어요.”

“만주에서?”

“네.”

“그럼 서울엔 언제 왔지?”

“해방되고 왔어요.”

“고향은 어디지”

아까 신사에게 대답한 이야기를 은주는 또다시 그대로 되풀이했다.

“평양이에요.”

“평양! 그래 아버지는 평양서 무얼 하셨지?”

“커다란 포목상을 하셨었대요. 그러다가 그만 장사에 실패를 하고 만주로 떠나가셨대요.”

“오오, 그래?”

부인은 다시 한 번 깊은 감격에 사로잡혀 나직이 말했다.

“세상이란 참 모를 일이로구나. 잘살던 사람이 못살게 되고, 못살던 사람이 잘살게 되고...... 사람의 운명은 정말 모를 일이다!”

정말로 그랬다. 행복하게 살아 달라고 잘사는 집으로 보낸 은주가 도리어 불행한 아이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래, 동생은 없느냐?”

“없어요. 대신 오빠가 있어요.”

“그럼 오빤 무얼 하지? 학교에 다니니?”

은주는 대답을 안 했다. 이처럼 친절하고 상냥한 부인에게 오빠가 구두를 닦으러 다닌다는 말을 하기가 싫었다. 아니, 그보다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오빠가 구두를 닦으러 다닌다는 말을 했다가 혹시 어제 저녁에 오빠가 저지른 그 일이 탄로가 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운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은주는 은철이의 예전 직업을 말했다.

“방직공장에 다녀요.”

“오오, 그래? 그런데 너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구나!”

부인은 은주의 상처 난 머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그 때 옆에 섰던 신사가 입을 열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일부러 차에 치이려고 뛰어든 것 같소.”

“네? 일부러라고요?”

부인은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것 같소. 하여튼 그런 건 차차 묻기로 하고......”

“아니......”

무슨 말할 수 없는 깊은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어린 소녀가 죽음을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딱한 사정을 생각하니 어머니 되는 부인은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인은 계속 울기만 했다.

“아주머니, 왜 자꾸만 우세요?”

은주도 어느새 글썽글썽 눈물을 지으며 부인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자꾸만...... 은주의 이름이 하도 예뻐서 자꾸만 눈물이 나오는구나.”

이름이 예뻐서 눈물이 나온다는 부인의 말을 은주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 은주는 무얼 하지? 학교에 다니니?”

“네...... 아니...... 네......”

은주는 대답을 갈팡질팡했다.

“무슨 학교지?”

“저 동신여자중학교......”

그러다가 은주는 갑자기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베개 위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모두 다 그 중학교 때문이다. 그 중학교 때문에 오빠가 그런 무서운 일을 저지른 것이다.

“동신여자중학교?”

부인은 깜짝 놀랐다. 그곳은 오늘부터 영란이가 다니는 학교였기 때문이다.

그때 문이 휙 열리면서 민구가 뛰어 들어왔다.

“은주야, 은철이가...... 은철이가 봉팔이 자식 때문에 붙들려 갔다! 경찰서에 붙잡혀 갔어!”

“오빠가?”

은주는 고함을 지르면서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가, 그만 얼굴이 핼쑥하게 핏기를 잃으며 다시 침대 위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앗, 은주야, 은주야!”

부인은 놀라 쓰러진 은주를 부둥켜안으며 외쳤다.

“여보, 빨리 의사를, 의사를 불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