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21장
21. 친절한 아주머니
이윽고 간호사 한 사람과 의사가 달려왔다.
“선생님, 이 아이를 제발 좀 살려 주세요.”
부인은 애원하듯이 의사에게 말했다.
의사는 정신을 잃은 은주를 살펴보고 나서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워낙 몸과 정신이 모두 쇠약해서 빈혈증이 일어났습니다. 조금만 그대로 누워 있으면 정신을 차릴 테니 안심하십시오.”
“고맙습니다. 정말 괜찮을까요?”
부인은 은주의 싸늘한 손발을 계속해서 주무르며 근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괜찮습니다. 곧 정신을 차릴 것입니다.”
그 때 이창훈 씨가 당황한 어조로 민구에게 물었다.
“은주의 오빠 이름이 뭐지?”
“은철입니다.”
“은철이? 혹시 서은철이......”
“그렇습니다. 서은철입니다.”
그러자 이창훈 씨는 뭔가 생각난 듯이 얼굴을 번쩍 들면서 그 어떤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말했다.
“서은철! 음, 틀림없는 그 소년의 이름이다. 바로 어제 내 가방에서 돈을 꺼냈노라고 편지를 써 넣은 바로 그 소년이 아닌가!”
그제야 부인도 뭔가 기억난 듯 말했다.
“아참, 그래요. 지금 생각하니 그 편지에는 분명히 서은철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럼 그 소년이...... 아까 경찰에게 끌려 우리 집으로 찾아 왔던 바로 그 소년이 은주의 오빠?”
생각하면 정말로 이상한 인연이었다.
“그 은철이라는 소년은 분명히 종로 4가에서 구두를 닦고 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민구는 이창훈 씨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럼 바로 선생님이 그 가방...... 그 돈가방의 주인 되세요?”
“그래, 내가 바로 그 가방의 주인이다.”
“아아, 그러세요?”
민구는 깜짝 놀라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시다면 선생님, 은철이를 좀 구해 주세요. 은철이는 절대로 나쁜 아이가 아닙니다. 그건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냐,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어떤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 이창훈 씨는 민구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으며 은근히 물었다.
“그 딱한 사정이 무엇인지 나에게 말해 줄 수 없을까?”
“아, 그것은요, 다른 것이 아니고...... 은주가 중학교 시험을 치르고 합격은 됐으나 3만 원이라는 돈을 내지 못해서 입학수속이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개학날은 오늘이고, 어머니는 앓아누워 계시고...... 은철이가 아무리 노력해도 3만 원이라는 돈이 그리 쉽게 마련이 안 되고, 겨우 1만 원은 마련했으나 2만 원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자기네가 살고 있는 판잣집을 3만 원에 팔고, 우리가 들어 있는 방공호를 1만원에 사면 2만 원이 남으니까 그렇게 해 보자고 저희 아버지를 자꾸만 졸랐답니다. 그러나 저희 아버지도 2만 원을 쉽게 만들지 못하셔서 집을 바꾸지 못했어요.”
“은철이는 어떻게 해서라도 동생을 학교에 보내려고 애썼지만, 마음먹은 대로 안 되었어요. 그러던 참에 선생님이 어제 돈가방을 잃어버리고 가셔서......”
“잘 알았다, 잘 알았어!”
이창훈 씨는 잠깐 동안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다시 민구에게 물었다.
“그래, 은주는 왜 죽으려고 했느냐?”
“아, 그것은 봉팔이 자식이...... 은철이가 가방에서 돈을 꺼내는 걸 봤답니다. 그런데......”
“아 잠깐, 봉팔이가 누구지?”
“은철이 옆에서 같이 구두를 닦고 있는 아이예요.”
“아, 그 콧등에 곰보알 붙은 아이 말이냐?”
“그 깨알곰보가 은철이를 자꾸 협박해서, 훔친 돈을 나눠 갖자고요. 만일 그러지 않으면 경찰에 일러바치겠다고요. 그러나 은철이는 그것은 안 된다고, 그 돈은 훔친 것이 아니고 잠깐 빌린 거니까 그럴 수 없다고, 둘이서 무섭게 싸웠어요.”
“그래서?”
“그래서 오늘 3만 원을 가지고 입학 수속을 했는데 말이에요, 봉팔이 자식이 계속 경찰에 일러바친다고 협박해서 제가 은주한테 가서 그런 사정을 말하고, 오늘은 종로에서 신문을 팔지 말고 진고개 입구에서 팔아야겠다고 했더니, 은주는 울면서...... 자기 때문에 오빠가 그런 짓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죽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아마 그랬을 거예요.”
“음, 고맙다! 똑똑히 이야기를 해주어서 고맙다!”
그 때 싸늘한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은주가 눈을 반짝 뜨더니 부인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아주머니, 오빠를 구해 주세요! 아주머니, 우리 오빠를 구해 주세요! 오빠만 구해 주신다면 저는 아주머니가 하라는 대로 무엇이든 할 게요. 아주머니 집에 가서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애도 보고...... 아주머니 집에 갓난애 없으세요? 아기 울리지 않고 잘 볼게요. 아주머니, 네? 아주머니!”
은주는 그러면서 부인의 손을 열심히 더듬어 잡았다.
“오오, 은주야! 내 딸 은주야!”
부인은 와락 달려들어 은주를 꼭 껴안고는, 은주의 눈물 어린 볼에다 수없이 입을 맞췄다.
“아주머니, 울지 마시고 제 부탁 꼭 들어주세요.”
“오오, 은주야! 아, 아주머니가 아니고...... 내가 바로 네 엄마란다!”
부인은 마침내 슬픈 감정을 이겨 내지 못하고 자기가 은주의 어머니라는 말을 그만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