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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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운동장에서

이튿날, 은주는 일찌감치 아침을 해 먹고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은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빠, 어머니와 오빠가 다 같이 고생하는데, 나 혼자 새 옷을 입고 학교에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하늘이 무섭고, 땅이 무서워......”

“아냐, 은주야. 그렇게만 생각할 게 아니야. 네가 이처럼 수월하게 학교를 다니게 된 것은 말하자면 다 네 복인 거야. 너를 낳아주신 네 부모님이 너를 공부시키는 건데, 조금도 달리 생각해서는 안 돼. 학교에 못 가는 사람도 살지만, 다닐 수만 있으면 학교를 다니는 것이 옳은 일 아니니?”

“그래도 오빠가 고생하는데...... 나만......”

“그런 말 하면 못써! 둘이 다 갈 수 없으면 하나라도 가는 게 옳은 것이야. 집안 생각은 아예 말고 너는 그저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된다.”

“그럼 오빠, 다녀올게요.”

“응, 전찻길 조심해서 건너야한다.”

“그럼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어서 갔다오너라.”

어머니는 기쁘면서도 한없이 쓸쓸했다.

새로 맞춘 교복에다 새 구두를 신은 은주의 모습이 어찌 영란이보다 못할 리가 있으랴.

“야아, 은주 정말 멋쟁이다!”

은철은 사라져 가는 은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그렇다. 옷만 잘 입으면 은주도 영란이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는 분명한 증거를 눈앞에서 본 것이다.

“사람의 운명이란 참 모를 일이야.”

은주는 입 속으로 조용히 종알거려 보았다.

“이 세상에 어머니가 두 분 계신다니!”

은주는 낳아 주신 어머니와 길러 주신 어머니, 두 분 중 어느 어머니가 은주에게 진짜 어머니인지 통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정으로 말하면 길러 주신 어머니가 더 두터웠으나, 또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낳아 주신 어머니가 더 고마운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은주는 굳은 결심을 했다. 두 분의 어머니를 똑같이 정성껏 모실 것을 굳게 굳게 맹세했다.

“그러나 언니는...... 영란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언니는......”

은주는 영란을 생각하면 울고 싶었다. 자기는 언니가 생겨서 이렇게 기뻐하는데......

‘언니는 나를 왜 그렇게 싫어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은주는 통 알 수가 없었다.

그 때였다. 은주가 학교 교문을 들어서려는데 등 뒤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영란이가 아니냐?”

그 순간까지도 영란의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주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영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가방을 든 신사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은주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낯익은 얼굴이다.’

은주는 어디선가 한 번 본 듯한 얼굴이라고 생각하다가, 깜짝 놀랐다.

참! 이 분은 학교 음악 선생님이 아닌가! 그리고 언젠가 종로 4가에서 신문을 팔아주신......

그렇다. 낯익은 그 사람은 이 학교 음악 교사 오상명 선생이었다.

은주는 이상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공손히 인사를 했다.

“영란이가 오늘은 어찌 이리 얌전해졌을까?”

오 선생은 마치 어깨동무라도 하듯이 은주의 등에 손을 올려놓고 현관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말에 은주는 멈칫 걸음을 멈추고 힐끗 오 선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영란인 노래를 잘 부르니까, 이다음에 보컬리스트로 성공을 해야지?”

그러면서 오 선생은 은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은주는 보컬리스트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고, 그보다도 오 선생이 영란과 자기를 혼동한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은주가 결석을 한 이 주일 동안에 영란은 벌써 음악 교사인 오 선생과 친해진 모양이었다.

“보컬리스트란 말 알아?”

“모, 몰라요.”

은주는 모기 소리 같은 대답을 했다.

“성악가라는 말인데, 앞으로 대성악가가 될 사람이 그런 말을 모르면 되나?”

오 선생에게 벌써 이처럼 인정을 받은 영란이라면, 영란은 노래를 얼마나 잘 부를까 생각하며 은주는 부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자기 언니가 그처럼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은 은주의 체면이 서는 것 같아서 기쁘기 한량없었다.

“영란이는 통 알 수가 없어. 어느 때는 무척 명랑하고 건방지고, 어느 때는 우울하고 공손하고...... 대체 어느 편이 정말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선생님!”

은주는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응?”

오 선생도 우뚝 멈추었다.

“저...... 선생님, 저는 영란이가 아니에요.”

영란 언니의 명예를 일시나마 자기가 가로채는 것 같아서 은주는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뭐야?”

오 선생은 눈이 둥그레졌다.

“저는 선생님이 알고 계시는, 그 영란이가 아니에요.”

“영란이가 아니라고?”

오 선생은 마치 꿈꾸는 사람처럼 멍하니 은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영란은...... 제 언니이고, 저는 은주예요.”

“은주?”

그러다가 오 선생은 이제 생각난 듯이 말했다.

“옳지! 그럼 저번 날 종로 4가에서 신문을 팔던 애가 바로 너로구나.”

“네.”

“오오, 그랬던가! 그래서 영란이에게 물어도 그런 일 없다고 하고...... 나는 혹시 영란이가 부끄러워서 그것을 감추는 거라고만 생각하고 더 묻지 않았지만...... 그런데 영란이와 은주가 자매라면, 은주가 신문을 팔고 있던 사실을 영란이가 모를 리 없을 텐데......”

영란은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문을 팔러 다니는 그런 거지와 같은 동생이 있다는 것을 영란은 숨겼을 따름이었다.

은주는 대답을 못하고 한참 동안이나 망설이다가, 오 선생에게 지나간 이야기를 대강 했다.

“언니는 언니인데...... 한집에 살지 않아요.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서......”

“아, 그랬던가!”

오 선생은 머리를 끄덕끄덕하며 물었다.

“그래, 은주는 몇 반이니?”

“1반이에요.”

“1반? 그런데 나는 1반에서도 은주를 못 봤는데......”

“입학식 날만 나오고, 2주일 동안 앓다가 오늘에야 처음 나왔어요.”

“오오, 그랬군.”

오 선생은 은주의 기구한 지난날에 대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바로 그 때 친구들과 함께 걸어오던 영란이가 오 선생을 발견하고는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반가이 뛰어왔다.

“아, 선생님!”

“오, 영란이냐!”

오 선생도 뛰어오는 영란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나 깡충깡충 뛰어오던 영란의 발걸음이 중도에서 갑자기 얼어붙은 듯이 오뚝 멎었다. 영란의 시선이 무서운 속도로 격렬한 감정을 싣고 은주의 얼굴을 매섭게 쳐다보았다.

“아, 영...... 영란 언니!”

반가운 얼굴로 은주가 한 걸음 영란의 앞으로 나섰을 때, 영란은 홱 하고 얼굴을 돌리며 교실을 향해 뛰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 뛰어가는 영란의 뒷모습을 은주와 오 선생은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은주야, 어떻게 된 일이니?”

오 선생이 물었으나, 은주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