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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무지개 뜨는 언덕/4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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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아름다운 부탁

그날 밤, 영란은 어머니와 함께 돈암동 은주네 판잣집을 찾아갔다. 영란은 오늘 하루 동안에 생긴 일을 조금도 숨김없이 이야기하여 어머니를 무척 기쁘게 했다.

아버지는 며칠 전 대구로 출장을 가고 없었다.

은주는 자꾸 설사를 했을 뿐, 다른 데는 별 탈이 없었다. 그저 힘이 쭉 빠지고 기력이 없을 뿐이었다.

“은주야, 제발 빨리 나아줘.”

영란은 은주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아은주의 손을 꼭 쥔 채 말했다.

“너희들이 이처럼 사이가 좋아지다니, 엄마는 꼭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구나!”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버지가 이 일을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니?”

어머니에게는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영란의 마음이 이처럼 갑자기 돌아선 것은 참으로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은주의 노래가 얼마나 훌륭하기에 그토록 까다롭던 영란의 마음이 이렇게 갑자기 부드러워졌을까? 음악의 세계를 통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로서는 꿈을 꾸듯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은주야, 하루속히 나아서 엄마가 네 노래를 한번 들어 볼 수 있게 해줄래? 영란이가 그처럼 감동할 만큼 네 노래가 훌륭하다니, 어쩌면 네가 그렇게......”

어머니는 기쁨과 근심 어린 얼굴로 은주의 손을 꼭 쥐었다.

“어머니!”

은주는 비로소 이창훈 씨 부인을 어머니라고 불러 보았다.

“그래, 은주야. 네가 날 보고 드디어 어머니라고 불러 주었구나! 이 엄마는 참으로 기쁘다.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쁘다.”

“어머니, 정말 제 노래를 듣고 싶으세요?”

“그럼! 듣고 싶다마다! 네가 노래를 부르고 영란이가 반주를 하고...... 그 얼마나 기쁜 일이야?”

“정말 그러시다면 빨리 나을게요.”

“암, 꼭 나아야지! 내일 하루만 가만히 누워 있으면 모레는 꼭 나을 거다.”

그 때까지 은철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세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영란에 대한 은철이의 감정이 쉽게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철이는 계속해서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꼭 다물고 앉아만 있었다.

한편, 영란이도 역시 어딘가 마음에 가시가 하나 걸린 것 같은 태도로 은철을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주에게 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감정이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은철에게 조금 너무했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렇다고 자기 쪽에서 먼저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생각은 아직 없었다.

영란은 은철이가 먼저 자기에게 부드러운 말을 건네 오기 전에 자기 쪽에서 먼저 말을 붙이기는 싫었다. 은주에게는 음악을 사랑하는 동지로서 씻은 듯이 감정을 풀어 버렸지만, 은철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못했다. 그것은 영란이와 은철이가 서로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대단히 나쁜 탓이었다.

은철이가 경찰에게 끌려 혜화동 영란의 집으로 왔을 때의 첫인상이 서로 너무 나빴었다. 은철이는 남의 돈을 훔친 죄인의 신분으로 영란을 만났고, 영란은 또 영란대로 그러한 죄인의 신분을 가진 은철을 너무나 꼬장꼬장한 태도로 대했던 것이다.

그러한 두 사람의 감정이 그리 쉽게 풀리긴 어려운 일이었다. 영란이도 물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들은 것이 있어, 은주를 그처럼 귀여워해 준 은철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나이가 어린 영란으로서는 은철이의 성실한 성품을 잘 모르고 있었다. 더구나 자기의 구두를 묵묵히 닦아 준 은철의 태도를 영란이 아직도 비굴하게만 생각하는 것이 탈이었다.

“은철이도 이제부터는 영란이와 사이좋게 지내야지. 아직 영란이가 철이 없어서......”

어머니가 둘의 사이를 가깝게 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을 때도, 은철이와 영란은 벙어리처럼 입을 꽉 다물고만 있었다.

“영란이도 이제부터는 은철이를 오빠처럼 생각하고...... 서로 믿고 서로 아끼고, 그래야 된다.”

그래도 두 소년 소녀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때 은주가 은철을 불렀다.

“오빠!”

“응?”

은철은 은주를 향해 얼굴을 들었다.

“영란이 언니를 사랑해 줘, 응?”

“......”

“남이 잘 못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훌륭하다고, 오빠는 나보고 늘 그런 말을 했었잖아?”

“으, 음.”

은철이는 대답도 거절도 아닌 괴상한 신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 언니!”

은주는 그다음에 영란을 찾았다.

“응?”

영란도 얼굴을 들었다.

“은철 오빠를 사랑해줘, 응?”

그러면서 은주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은철 오빠는 절대로 언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사람이 아니야. 두고 보면 알겠지만, 우리 오빠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이야. 언니가 나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우리 오빠도 같이 좋아해 줘, 응?”

아름다운 부탁이었다.

영란은 입술을 꼭 깨문 채 은주의 얼굴을 보면서 손을 한층 더 힘주어 잡았다.

그러나 그것 역시 대답인지 거절인지, 은주로서는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영란은 학교에 가는 길에 돈암동 은주의 집에 들렀다. 영란은 맛있는 죽을 조그만 냄비에 하나 가득 가지고 와서 은주에게 권하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좀 어떠니?”

“이젠 좀 괜찮아. 오늘 하루만 지나면 나을 것 같아.”

“이 죽 먹어봐. 내가 끓인 거야.”

“언니, 고마워.”

은주는 빙그레 웃었다. 영란도 같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대구로 아버지한테 전보 칠래.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 밤엔 꼭 돌아오시라고...... 그래야 내일 음악 콩쿠르에 구경 오실 수 있잖아.”

둘은 서로 마주 쳐다보며 생긋 웃었다.

“언니, 학교 가면 오 선생님한테 말씀 잘 해줘. 내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나가겠다고......”

“응, 염려 마. 오 선생님, 무척 기뻐하실 거야. 그럼 나 학교에 갈게. 가만히 누워 있어. 이따 12시쯤 어머니가 또 먹을 것 가지고 오실 거야. 바이, 바이.”

“바이, 바이.”

영란은 방을 나섰다.

그 순간, 두부를 사러 나갔던 은철이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둘은 마당 한복판에서 딱 마주치게 되었다.

“......”

“......”

두 소년 소녀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그러나 어느 쪽에서도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다.

다음 순간, 둘은 무슨 약속이나 한 듯이 몸을 홱 돌리며 하나는 책가방을 들고, 하나는 두부 그릇을 들고 각기 제 갈 길을 갔다. 하나는 대문 밖으로, 하나는 부엌 안으로.

끝끝내 둘은 단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헤어지고 말았다. 은주의 간곡하고도 아름다운 부탁도 끝내 허사로 돌아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