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4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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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정류장에서 생긴 일

그 날, 영란은 점심시간과 방과 후 한 시간 동안 오 선생의 친절한 지도를 받으며 피아노 연습을 했다. 오 선생은 은주의 건강을 몹시 걱정했지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은주가 콩쿠르에 참가한다는 말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자아, 그럼 내일 보자. 오늘 밤엔 일찌감치 자는 게 좋아. 그리고 오늘 저녁엔 은주가 밥을 먹어도 괜찮을 거라고, 아까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가서 은주에게 그렇게 전해다오.”

“네, 선생님. 염려 마세요.”

영란은 내일을 생각하며 희망에 찬 걸음걸이로 학교를 나섰다.

‘내가 왜 은주를 싫어했을까?’

은주를 싫어했던 지나간 날이 영란에게는 옛날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종로 4가에서 돈암동 행으로 바꾸어 탈 생각으로 전차에서 내린 영란은 사람들이 줄지어 늘어선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걸어가다가 무심코 돌린 영란의 시선은 일터에 앉아 있는 은철의 눈과 마주쳐 버렸다.

“......”

“......”

그러나 아침때와 마찬가지로, 두 소년 소녀는 여전히 말없이 서로 눈길을 외면해 버렸기 때문에 은주의 아름다운 부탁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었다.

영란은 은주가 좀 어떠냐고, 은철에게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그러고는 정류장을 향해 또박또박 걸어갔다.

정류장에는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영란은 빨리 은주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새치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영란의 성격으로는 그런 짓은 죽어도 하기 싫었다. 아침 등교 때도 지각을 하여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을망정, 새치기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모두 영란의 거만한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하나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은철에게 어떤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남의 돈을 훔친 것을 영란으로선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신문요! 내일 아침 신문요!”

신문을 파는 소년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신문, 한 장 줘요.”

영란은 소년 하나를 불렀다.

“네.”

소년은 뛰어와 신문 한 장을 영란에게 내주다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은주 아니니?”

그것은 민구였다.

영란은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뇨, 전 은주가 아닌데요.”

그러자 민구는 바로 알아차리고, 영란을 아는 체했다.

“아, 그럼 네가, 네가 바로 그 은주의 쌍둥이 언니......?”

“네, 맞아요. 제가 바로 은주의 언니 영란이에요.”

“아, 정말로 몰라보겠다!”

은주에게 쌍둥이 언니가 있다는 것을 민구는 벌써 알고 있었다.

“은주를 잘 알아요?”

“아는 게 다 뭐야? 은주가 바로 우리 옆집에 사는데.”

“아, 그래요?”

그러다가 영란은 궁금한 듯 다시 물었다.

“옆집이라고요? 언덕 위엔 은주네 한 집밖에 없던데......”

“아니, 그 언덕 밑에 있어.”

“언덕 밑에도 집이 없던데......”

“헤헤!”

민구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방공호가 있지 않아?”

“아, 거기가 집이에요?”

“응, 난 거기 사는 민구야.”

영란은 차츰차츰 가난한 사람들의 살림살이에 알 수 없는 친근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은주네 살림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여태까지 자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이, 멀리 떨어져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영란의 눈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야, 얼핏 보면 정말로 몰라보겠다!”

민구는 신기한지 영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래위로 자꾸만 훑어보았다. 영란이 창피할 정도였다.

“자, 돈 받아요.”

영란은 교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20원을 내주었다.

“됐어, 그만둬.”

민구는 은주를 생각하면서 선심을 썼다.

“안 돼요. 받아야죠.”

“그만둬.”

“그러면 싫어요.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아야죠.”

영란은 무슨 일이든지 불분명하고 흐리멍텅한 것을 제일 싫어했다. 민구는 하는 수 없이 돈을 받았다.

영란의 지갑에는 10원짜리와 100원짜리로 모두 500원이 들어 있었고, 그 밖에 금장의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아까 학교에서 줄이 끊어졌기 때문에 지갑에 넣어 두었는데, 은주 생각으로 바쁘지 않았더라면 시계포에 들러서 줄을 고쳤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사건이 생겼다. 민구와 영란이 돈을 받으라거니 그만두라거니 서로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영란의 바로 뒤에 서 있던 텁수룩한 소년이 영란의 지갑을 들여다보았다. 민구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바로 그때, 돈암동행 전차가 왔다.

“그럼 잘 가.”

“네, 많이 팔아요.”

영란과 민구는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신문요! 내일 아침 신문요!”

민구는 다시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치면서 쭉 늘어선 승객들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기 시작했다.

‘거참, 똑같이도 생겼네!’

민구는 신문을 팔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영란과 은주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돌아다보니 영란은 벌써 전차 승강구 앞까지 밀려가고 있었다.

“내일 아침 신문요!”

민구는 소리치며, 신통하게도 똑같이 생긴 영란의 얼굴을 한 번 더 볼 생각으로 전차 옆으로 달려갔다.

밀고 덮치고, 사람들은 저마다 먼저 타려고 앞 다투었다. 게다가 새치기꾼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전차 입구는 굉장한 혼잡을 빚고 있었다.

“새치기하지 말아요!”

영란은 약이 올라서 빽 고함을 쳤다. 영란이가 차에 오르려 할 때, 새치기꾼들은 옆으로 뚫고 들어와서 발을 올려놓았다가 떨어지곤 했다.

게다가 뒤에선 자꾸만 밀어 대어, 영란은 그 틈에 끼여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새치기하지 말아요! 아이 참......”

영란이가 또 한 번 그렇게 소리를 치는데, 바로 등 뒤에 서 있던 소년의 손길이 순식간에 영란의 교복 단추를 풀고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살짝 빼냈다.

“앗, 저 자식 소매치기다! 영란아! 지갑, 지갑......!”

그 순간, 고함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것은 분명히 민구의 목소리였다.

영란은 화닥닥 놀라며 안주머니에 재빨리 손을 넣어 보았다.

“앗, 내 지갑,......”

단추는 풀어지고 안주머니는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