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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몽/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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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일이가 십여 년 동안을 두고 심택의 집에 붙이어 있음은 의탁할 곳이 없어 그곳에 수양(收養)됨이라. 그 모친은 수일이 어렸을 때에 세상을 버리고 그 부친도 어린 아들의 소학교를 졸업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오랫동안을 병으로 신음하다가 드디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니 수일의 애통함은 다시 말할 바이 아니어니와, 그 부친의 신체를 장사지내는 동시에 자기의 전도(前途)의 소망도 한가지로 장사치 아니치 못할 불행한 경우를 만났도다. 그 부친이 살아 있는 날에도 매삭 월사(月謝)로 기십전씩을 지출하기에 피를 흘리는 것 같은 곤란을 겪는 곤궁한 형세라. 그때는 수일의 나이 십 세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학교에 다니며 공부하기보다 급한 일은 호구(糊口)할 계책이요, 호구할 계책보다 또한 급한 것은 부친의 신체를 안장할 일이요. 이보다 더욱 급한 일은 그 부친의 병중에 간호의약(看護醫藥) 등이 모두 급하였더라. 능히 독립자활(獨立自活)을 경영치 못하는 어린아이가 어찌 이와 같은 급한 일을 구함이 능하였으리요. 원래에 수일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할 바이요, 다만 심택의 힘으로 인하여 호구지책과 약용범절과 초종제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은혜를 입었더라.

심택이라 하는 사람은 전에 수일의 부친에게 두터운 은혜를 받은 은인인 고로 이전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자 하여 이와 같이 친절히 하였음이니, 다만 수일의 부친이 병중에 있을 때뿐이 아니라 평일에도 항상 수일의 월사도 내주며 살림에 부족한 것도 보조하였더라.

수일은 부친이 돌아간 후 더욱이 가세가 곤란함을 면치 못하여, 또는 좌우에 강근지친이 없으므로 부모 없는 외로운 아이를 가긍히 여겨 심택은 자기의 집에 데려다가 양육하니, 한편으로는 전일 은혜를 보답하기에 살아 있을 때뿐 아니라 사후까지라도 계속하여 이수일로 하여금 장성하여 장래에 유위인물(有爲人物)이 되도록 성인(成人)을 시켜 그 망인(亡人)이 일일이라도 잊지 못하던 심지(心志)를 갚고자 함이라.

수일의 부친이 일찍이 말하되, 우리 집은 원래 문벌가의 집안이라, 무슨 면목으로 내 아들 수일로 하여금 남에게 업심을 받게 하리요, 세상은 날로 변천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다만 전일 구습의 안목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나의 아들도 학교에 공부시켜 멀리 해외에까지라도 유학하여 다시 우리 집으로 하여금 사민(四民)의 두목(頭目)이 되게 하리라, 하는 말로 수일을 항상 경계하고 또는 심택을 만날 때마다 이 말로써 부탁이라. 그런 고로 임종하여는 다시 별로 부탁함이 없으되 평일 부탁이 즉 유언(遺言)과 같이 되었더라.

그런 고로 수일이가 심택의 집에 있는 것은 결코 부지 군으로 있어서 집안사람의 눈살 찌푸리는 얼굴은 당치 아니하고 도리어 친자들보다 더욱 애지중지하므로, 보는 사람들은 이수일의 행복을 일컬으며 심택의 의리 있음을 청도(稱道)한다.

심택의 부부는 수일 은인의 기념(紀念)으로 더욱더욱 친절하고 정중히 대접한다. 그러므로 저와 같이 수일을 사랑함을 보는 사람은 심택의 부부가 수일로 하여금 사위(女壻)를 삼고자 함인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 당시는 심택의 부부의 마음이 아직 그곳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그러나 이수일의 위인이 단아정직(端雅正直)하며 학업을 독실히 하여 시험마다 우등의 자리를 점령하는 고로 점점 사위를 삼고자 하는 마음이 맹동하여 수일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에는 성례(成禮)를 시키고자 결정하였더라.

수일의 이와 같은 위인과 이와 같은 성질에 더욱 학문을 열심 연구하는 고로 일후 성공하는 날에는 진실로 다시 얻기 어려운 사위라고, 늙은 부부는 그윽히 기뻐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이수일은 원래 문벌가의 자손으로 초년(初年)에 신운(身運)이 불길하여 비록 남의 집에 몸을 부치어 있어 여러 가지로 신세는 지고 있으나, 타일에 입신양명하면 이와 같은 후은은 당연히 보답할지라. 남아로 이 세상에 출생하여 어찌 남의 데릴사위로 비루한 처가살이를 하리요? 이와 같은 굴욕은 이수일의 성질로 능히 하고자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그러나 순애와 같은 아름답고 정숙한 여자와 한가지로 백복의 근원(百福之源)을 맺게 됨은 수일로 하여금 처가살이한다는 수치도 능히 잊어버리고 다시 돌아보지 아니하게 되었더라. 그러므로 이수일은 심택의 부부의 즐거움보다 더욱 즐기어 더욱 더욱 학문을 면려(勉勵)한다.

순애도 수일을 가장 사랑한다. 그러나 수일이가 순애에게 향한 마음에는 능히 지나지 못하리로다.

순애는 스스로 자기의 자색이 아름다움을 아는 연고라. 무릇 세상에 남녀를 물론하고 자기의 얼굴이 아름답고 아름답지 아니함을 어찌 모르리요마는, 다만 염려하는 바는 순애는 자기의 아름다움을 과히 지나게 믿음이라.

순애는 자기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가치가 되는지 스스로 짐작하는 바이라 그런 고로 친가의 재산을 물려 근근히 내외가 살아가고자 함은 결코 순애의 소망이 아니라. 그 여자는 일찍이 미천한 몸으로 귀인(貴人)의 부인 된 일을 보았으며, 또는 재산가(財産家)로 아내의 추한 얼굴을 싫어하여 돌아보지 아니하고 꽃과 같이 아름다운 소실(小室)을 구하여 친일(親昵)하는 모양도 보았는지라, 남자가 재주와 학식만 있으면 임의로 입신(立身)함과 같아여, 여자는 자색으로 능히 부귀(富貴)를 얻으리라 깊이 믿었으며, 또는 아름다운 용모로 하여 용이히 부귀를 겸득(兼得)하는 여자의 약간(若干)을 보았으되 자기와 같이 아름다운 여자는 보지 못하였던 생각도 한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모두 그 남편에게 사랑을 받아서 아름다운 얼굴을 사람마다 칭찬 아니하는 자가 없음을 은근히 자기와 비교하였더라.

그 외에 또 한 가지 순애의 마음을 굳게 한 일이 있으니, 이는 순애의 나이 세 때의 일이라. 그때는 순애가 서양사람이 경영하는 모 여학교에 다닐 때이니 그때에 어떠한 서양사람이 순애의 미려(美麗)한 얼굴에 흠모하여 일일은 그 서양사람이 순애에게 염서(艶書)를 보냈는데, 그 편지는 결단코 일시의 욕심을 채우고자 함이 아니라 영원히 부부의 언약을 맺고자 함이라.

그 후 며칠이 아니 되어 그 학교의 교장이 마침 상처하고, 다시 후취코자 하여 사방으로 적당한 재목을 구하더니 일일은 순애를 조용히 방으로 불러들여 간절히 말한 일이 있었더라. 그때에 순애의 어린 가슴은 어쩔 줄을 알지 못하고, 다만 울렁거리며 부끄러운 얼굴을 감히 들지 못하고 집으로 도망하듯이 돌아왔더니, 그 후로부터 자기의 아름다움이 사람에 뛰어남을 깨달아 자기의 자격이 능히 부귀 겸전한 사람의 아내 되기 어렵지 아니함을 믿었더라. 자기를 아름다이 보는 사람은 다만 서양사람들뿐이 아니라, 내외국인을 물론하고 순애를 한 번 보는 사람이면 흠모 아니하는 자가 없음은 순애도 스스로 아는 바이라.

그 후로도 그 서양사람들은 자주 그 부모에게 사람을 보내어 간청하되, 집안 자세와 습관상으로 인하여 거절하였더니, 그러나 순애는 한 번 가슴에 받은 허영(虛榮)의 마음이 해로 좋아 점점 성하여 낮이든지 밤이든지 항상 꿈꾸는 것은 허영심이라. 지금이라도 귀하고 부(富)하고 명망 있는 사람이 나를 맞으러 옥교(玉橋)를 보내어 데려가고자 하는 인연이 반드시 돌아올 줄을 믿었더라. 그러므로 수일이가 순애를 사랑함과 같이 순애는 수일을 사랑치 아니함이 모두 이와 같은 헛된 생각을 잊지 못하는 까닭으로 인연함이라. 그러나 결코 수일을 싫어하여 반대함은 아니오, 항상 생각하기를 수일과 같은 정다운 남자와 평생을 지내면 그 가정의 즐거움이 어떻다 말할 수 없으리라 하여, 한편으로는 허영(虛榮)의 악마(惡魔)를 생각하면서도 수일의 위인을 사랑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수일의 마음에는 저 순애는 나를 사랑하는 외에는 그 가슴 속에 다른 물건은 하나도 없는 줄로 생각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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