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4장
침침한 칠야에 이수일의 공부하는 방에는 책상 위에 있는 면각종(眠覺鍾)이 밤 열 시를 가리킨다. 수일이는 학교에서 파하여 돌아온 후 오후 사오 시쯤이나 하여 학교에 함께 다니는 동료와 한가지로 나아간 후 지금까지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심택이는 원래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이라, 이날도 아침 일찍부터 심택의 부부는 새해의 복을 빌고자 하여 어떠한 절로 나아가서 불공을 하느라 돌아오지 아니하고 집에는 이수일과 순애로 하여금 집을 지키게 하였는데, 수일은 친구에게 끌려나가고 문간 행랑에는 사내 하인 하나이 홀로 있어 울고 짜증 부리는 어린아이를 달래며 저의 계집이 절에 따라가서 늦도록 아니 옴을 중얼거리며 욕한다.
휘휘한 넓은 방 안에 남포의 불을 돋우고 적적히 앉아 있는 순애는 옆에다가 화로를 놓고 그 화로 안에는 찌개 그릇과 물그릇을 올려놓았는데, 그 찌개와 숭늉이 식을까 염려하여 숯이 작을 만하면 섬섬한 옥수로 다시 숯을 집어넣으며 먹을 사람 돌아오기를 고대한다.
순애는 등잔 앞에 가까이 앉아 게을리 바늘을 움직이고 있으며, 때때로 문간에서 신발 소리 나는 귀를 기울여 듣더니 홀연 깜짝 놀란 듯이 반짇고리 속에 있던 성냥을 집어 가지고 일어서며,
『아이고머니, 깜짝 잊어버렸네. 자리도 아니 깔아놓고 화로의 불도 아니해 놓았지.』
혼자 말하고 문을 열고 나아가 뜰 아래로 내려서더니 대청 맞은쪽으로 간 반이나 되는 방 하나이 있는데, 그 방문을 열고 성냥을 그어 불을 켜며 다시 화로 불을 피워 놓는다.
이 방은 이수일이가 거처하는 방이라, 아침 이후로 사람의 기운이 끊어졌던 방이라, 살을 에이는 듯한 찬 기운은 지금에 홀연 사람의 따뜻한 살을 얻음을 즐겨 맹호 같이 몰아와서 물고 뜯는 것같이 몸에 핍박(通迫)한다. 순애는 급히 화로에 피어오르는 불을 두 손으로 쪼이며 고개를 돌려 책상 위의 시계를 바라본다.
밤은 깊고 고요한데 등잔 빛은 홀로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어 더욱 한없이 아름답다.
불치불검(不侈不儉)하게 입은 옷과 약간 단장한 얼굴은 이슬을 머금은 해당화 한 가지가 월색(月色)에 비추임과 같아여 등 뒤로 벽에 비추는 그림자까지 향기가 듣는 듯하다.
순애는 전일 금강석 광채에 현황하던 눈으로 지금은 고요히 시침(時針) 돌아가느라고 재깍재깍하는 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다. 그러나 명주 저고리 앞자락·속자락 두 겹으로 싸여 있는 그 여자의 가슴을 생각할지라도 그 가슴 속에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가 볼지니, 그 여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뿐이로다.
방안에 찬 기운이 조금 감하매 순애는 다시 일어서서 이불을 내어 아랫목에 깔아놓고 그 이불 위에 올라앉아 머리맡으로 있는 책상 위에 수일이가 보는 책을 뒤적거리며, 그림도 보며 글도 보며 홀로 웃는다. 지금가 순애 깔고 있는 금구(衾具)는 순애가 정력을 들여 아무쪼록 춥지 말라고 축원하여가며 지은 이불이라.
그 부모는 사찰로 불공 갔으므로 그날 돌아오지 아니할 줄을 알고 순애는 다시 기다리지도 아니한다.
홀연 먼 곳으로부터 딱딱거리는 인력거 소리는 점점 가까이 오더니 자기 집 문간에 이르러 뚝 그친다. 순애는 수일이가 타고 옴인가 하여 문을 열고 나오려 할 때에 그 인력거 타고 온 사람은 취한 목소리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무엇이라고 지껄인다.
원래 이수일이는 술도 먹지 못하거니와 조금이라도 술기운이 있어 가지고 집에 돌아온 일이 없었는 고로 순애는 이웃집에 오는 사람인가 하고 다시 근력 없이 털썩 주저앉으며 시계를 바라보니 열한 시가 거의 되었더라.
조금 있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라 하더니, 행랑으로서 사내 하인이 나와 문을 여는데 취한 사람의 걸음 소리가 문간에서 요란하며, 하인은 취한 사람을 붙들어 들이는 모양이라. 순애는 어쩐 일인지 알지 못하여 황망히 남포를 들고 밖으로 나와 문간을 향하여 바라보니 걸음은 능히 발을 가누지 못하고 동서로 비틀거리며 머리에 쓴 모자는 한편 모로 붙어서 조금 하면 땅에 떨어질 듯한데, 행랑 하인에게 몸을 실려 들어오는 것은 이수일이라. 얼굴은 대추빛 같이 되었는데 한 손에는 수건으로 싼 것을 하나 들고 입이 조하여 헛침을 뱉으며,
『어, 참 늦었다. 등불 가지고 나오는 사람은 누구야? 아이 고마워라.』
하인은 취한 사람이 실리는 몸을 능히 이기지 못하여 맷돌 위 마루 앞 섬돌 위에 이르러서는 취한 사람과 함께 하인도 쓰러진다.
『여봅시오, 아씨, 이 서방님 좀 방으로 모셔드립시오. 다치시겠습니다.』
순애는 손에 들었던 남포를 툇마루에 내려놓고 먼저 방으로 들어가서 툇마루에 걸터앉은 수일의 곁을 두 손으로 잡아 일으키며,
『여보, 일어나오. 오늘은 이게 웬일이요?』
수일은 다시 정신이 나는 듯이 눈을 번쩍 뜨며,
『응! 이게 내 방인가? 오늘은 참 취했어.』
하며 다시 그 자리에 드러눕는다. 순애는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여,
『아이, 이게 웬일이요? 맨 흙바닥에 가서 드러눕는단 말이요. 어서 일어나요.』
『여보, 구두를 신어서 방에 어찌 들어갈 수가 있소? 아, 취해.』
문지방을 베개로 삼고 툇마루 끝에 비스듬히 누워서 발은 섬돌 위에 올려놓았는데, 순애는 얼른 툇마루로 나와서 발바닥으로 섬돌을 딛고 수일의 구두를 벗겨 준다.
이때 하인은 어린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아갔다.
『여보, 인제 구두도 벗겼으니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시오.』
『응, 내 일어날 테야 일어나기는 일어나겠지마는 누가 내 손을 좀 붙들어 주어야 방으로 들어가지, 나 혼자는 걸을 수 없어.』
순애는 할일 없이 수일의 손목을 이끌매 수일은 끌리어 일어나서 비쓱거리며 한줌 만한 어깨에 매달리니, 순애는 연약한 힘으로 간신히 취한 사람을 붙들어 들이었다.
수일은 깔아놓은 이불 위에 함부로 주저앉아 몸은 책상머리에 의지하고 반쯤은 누워, 청아한 목소리로 고시(古詩) 일 수를 읊는다.
『燈耿耿 漏遲遲 寒風撼惟夕 飛雪撲欄時 卿莫愁只今寂寞我心唯有我心知.』
『여보, 전에는 술 먹는 것을 보지 못하겠더니 오늘은 어디서 그렇게 잡셨소?』
『대단히 취하였지, 응, 여보 순애씨, 정말 오늘은 술이 단단히 취하였어. 오늘은 다행히 장인·장모가 다 아니 계시니까 아주 훌륭했네.』
『취하고 말고 여부가 있소? 그다지 취하도록 잡술 것이 무엇이요? 아마 속이 괴란하시지요.』
『괴란하고 말고, 가슴이 울렁거려서 제일 못 견디겠소. 내가 본래 술을 먹을 줄 아는 사람이 못 되는데, 이렇게 취하도록 먹은 것은 다 까닭이 있다네. 그 까닭을 말할 것 같으면 순애씨도 나더러 술 먹었다고 나무라지 못하고 도리어 술 취한 나를 잘 구원해 주어야 옳을걸.』
『나는 그렇게 술 먹는 사람 싫어요. 전에는 술이라면 아주 대기를 하시더니 오늘은 이다지 잡수셨단 말이요? 누가 그렇게 권합디까? 백낙관(白樂觀)씨도 함께 가셨을 터인데 어찌해서 이렇게 취하도록 말리지 아니하고 두었을까? 잠깐 다녀오마고 가시더니 열한 시가 되도록 아니 오신단 말이요. 나는 혼자 어찌 기다렸는지 모르는데…….』
『정말 기다리고 있었소, 나를 기다리고? 아이구 고마워! 정말 나를 기다렸으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한이 없겠소. 내가 오늘 이렇게 취하고 온 것도 다 우리 두 사람의 일로 인연해서 난 일이라오.』
하며 수일은 순애의 옥수(玉手)를 붙들고 정(情)에 이기지 못하여 한참 동안을 꽉 쥔다.
『우리 학교에 나와 한 연급에 있는 친구들은 우리가 졸업한 후에는 성례한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여러 사람이 모두 알고는 축하를 한다고 사면 팔방으로 축배가 들어오는데, 축배라 하는 것을 아니 받아먹을 수가 없어서 주는 대로 받아먹었더니 이 모양이 되었소구료.』
순애는 그윽히 웃음을 띄우고 잠착하여 수일의 하는 말을 듣고 있다.
『그리하고 더 우스운 말이 또 하나 있지? 너는 팔자와 복이 어떻게 좋으면 꽃 같은 미인을 데리고 평생을 즐기게 된단 말인가? 아무쪼록 그리로 장가가거든 원만한 가정을 만들어, 전일의 구습은 내버리고 학식 있는 부부가 모였으니 신식가정(新式家庭)으로 화락(和樂)하게 지내기를 축수하네 하고, 만세를 부르며 또 술을 권하는구료. 여러 사람들은 실없은 장난 겸해서 하는 말인 줄은 모르는 것이 아니지마는 하는 말들이 모두 그러할 듯해서 사양치 아니하고 받아먹었지…… 여보 순애씨, 아무쪼록 이러한 못난 놈이라도 멀리 버리지 마시기를 바라오.』
『아이고, 망측도 하여라. 별안간에 그것은 무슨 소리요?』
『인제는 친구들도 모두 알아놓았으니 우리가 아무쪼록 부부가 되어서 살아야지. 만일 그렇지 못하는 날에는 나는 아주 사람값에 가지 못할 모양이요.』
순애는 부끄리는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왜 이리해요? 벌써 다 정해 놓은 일을 지금 다시 그런 소리는 왜…….』
『아니오, 그렇지 않소. 요사이 장인 장모의 기색을 가만히 보니까 암만 하여도 나는 미덥지 못…….』
『그럴 리가 있소? 그것은 게서 자격지심이지.』
『실상 말하면 장인 장모의 마음은 어떠하게 가지고 계시든지 당자되는 순애씨의 마음 하나 가지기에 달린 일이지.』
『내 마음은 벌써 정하였는데 다시 정할 것이 또 있어야지요.』
『응, 그리하며는 고마운 일이지마는 확실히 그러할까?』
수일이는 취함을 이기지 못하여 순애의 무릎을 베고 쓰러진다. 순애는 불같이 뜨거운 이마를 손으로 짚어주며,
『여보, 저녁 좀 잡숫지 아니하시려오. 속이 갑갑하거든 숭늉을 잡수시오………. 아이, 잠 들었나베. 여보시오, 여보.』
연애라 하는 것은 신성한 물건이라. 이때에 순애의 가슴 가운데는 전과 같이 비루한 희망은 자취도 없어졌으며 그 어여쁜 눈에는 다른 물건은 보이는 것이 없고 다만 이수일의 자는 얼굴에 향하여 부와 귀와 내지(乃至) 이욕(利慾)의 마음은 그 무릎에 깨닫는 따뜻한 기운에 녹아 없어지고 황홀히 꿈결같이 취하는 듯 깨는 듯 앉아 있다. 그 여자의 제반 망상(妄想)은 봄해에 눈 녹듯 없어지고 한 집안 한 방안에 다만 두 사람이 이 세상에 홀로 광명을 얻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