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탑/17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17. 悲運

실로 사람의 운명이란 알수 없는 일이었다. 하늘은 어이하여 악한 자를 돕고 선한 자를 물리치시는고?

해산물 무역상으로서 남포바닥을 쩡쩡 울리던 모상회는 결국 하늘이 돕지 않은 까닭에 기우려저 갔다. 十여척의 무역선이 하나하나씩 모두 풍랑에 까라앉고 인제는 단하나 남은 희망이라고는 중국무역을 간 태양환이 예상대로 장사를 하여 가지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밖에 없었다.

그처럼 많던 사무원들도 인제는 하나하나씩 모상회를 떠나가고 늙은 회계 한사람과 모영택씨의 딸과 약혼을 한 고영수(高永秀) 청년 한사람이 쓸쓸히 드넓은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한 어떤날 상해교역은행의 사원 허달준이가 모영택씨를 찾아 왔던 것이니, 여러분은 이미 전번 형무검찰관 최성문씨의 응접실에서 이 허달준이란 인물이 이봉룡 그사람의 변성명인 사실을 알고 있을 줄로 믿는다.

허달준은― 아니, 이봉룡은 모상회에 한발을 들여놓자, 가슴이 터질것 같아 견딜수가 없었다. 몰락의 일로를 일직선으로 굴러 내려오고있는 비참한 광경을 눈앞에 본 까닭이었다.

五십에 가까운 모영택씨의 쇠잔한 얼굴에는 깊고 어두운 우수의 빛이 도사리고 있었다.

『모상회의 곤경은 저번 형무검찰관의 입으로 대략 들었습니다. 만일 최후의 한줄기 희망인 태양환이 무사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때 모영택씨는 신음하듯이

『파산입니다! 모상회는 파산선고를 하는수 밖에 별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당신을 구해줄 만한 친구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장사에는 친구라는 것이 없습니다.』

『음!』

하고 봉룡은 깊은 신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튼 우리 상해교역은행에서 사 들인 당신에 대한 채권중 아까 말씀드린 최성문씨의 채권 二十만원의 기한이 내달 보름날인데, 그날까지 지불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모든것은 태양환이 무사히 돌아 오느냐 안돌아 오느냐에 달렸습니다.』

그때 문이 왈칵 열리며 모영택씨의 딸 인애(仁愛)가 뛰여 들어 왔다.

『아버지! 태양환이...... 태양환이.......』

하고 부르짖으며 종이장처럼 하—얗게 변한 핏기 없는 얼굴을 아버지 품안에 파묻었다.

『뭐, 태양환? 아니, 태양환이 또 까라앉았다는 말인가?』

『네.......』

『그래 태양환에 탔던 선원들은 어떻게 됐대드냐?』

『선원들은 무사히 돌아 왔어요. 지나가던 배에 구원을 받았대요.』

『음! 인명의 손실이 없다니 다행이다! 손해는 나 혼자만이 질머지면 그만이니까. 으음!』

모영택씨의 얼굴도 딸의 얼굴 이상으로 창백하다. 운명이 모영택씨에게 최후를 선고한것이다.

그때 九사一생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태양환의 선원들이 기운 없이 들어왔다. 모두 헐벗은 몸에다 극도의 피곤으로 말미아마 기진맥진한 태도로 모선주 앞에 머리를 숙이었다.

『면목 없습니다. 남지나해(南支那海)에서 모진 풍랑을 만나.......』

그중 나이가 많은 광삼(光三)이라는 늙은 선원 한사람이 다른 선원들을 대표하여 태양환의 최후를 상세히 설명한 후

『우리들은 무엇 보다도 태양환을 사랑하였습지요. 그러나 아무리 태양환을 사랑한다고 하여두 제 목숨이 더 귀중하여서...... 저이들은 만 사흘동안을 물 한모금 먹지 못하고...... 처음에는 그래두 태양환과 함께 죽을것을 각오했습지요만 그러나 결국 목숨이 아까워서...... 용서하십시요. 면목이 없습니다!』

이 광삼이라는 늙은 선원은 그러면서 여러번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혔다. 모영택씨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그대들은 실로 훌륭한 선원들이다! 그러나 모든것은 운명이니 하는수 없는 일이다. 자아 인제는 나에게는 돈두 없고 배두 없다. 오늘부터 나는 그대들의 선주(船主)가 될 자격이 없어진 몸이야. 그러니까 그대들은 내 옆을 떠날수 밖에 없이 되었어! 배 없는 선주가 있을수 없는것과 마찬가지로 배 없는 선원이 있을리 있겠나? 여러분 수고가 많었소!』

불상한 모영택씨의 처량한 최후의 선고였다. 선원들은 머리를 숙이고 그중에는 주먹으로 눈물을 씻는 자도 한두 사람 있었다. 그것은 실로 비참한 광경이었다.

『자아, 인애야, 너도 인젠 안방으로 들어 가거라. 나는 이분과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선원들의 뒤를 따라 인애는 응접실을 나가면서 상해교역은행의 사원의 얼굴을 애원하는듯한 가련한 눈동자로 한번 조용히 쳐다보았다. 허달준은 아니 봉룡은 그 눈물어린 귀여운 소녀의 얼굴을 가는 미소와 함께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미소는

「귀여운 소녀여! 과히 염려를 마시요!」

하고 속삭이는것 같았으나 인애가 그런 의미를 알아차릴 리는 만무하다.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저로서는 이상더 무엇이라고 말씀 드릴 말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모영택씨는 상대편을 침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잘알았습니다. 당신의 불행은 말하자면 당신의 힘으로는 어찌 할수 없는 불가항력의 불행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로서는 될수 있는 한 당신에게 힘을 빌려 드리고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 뭣이라고요?......』

『나는 당신의 채권자로서 누구보다도 유력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단기지불(短期支拂)의 수형의 소유자로서.......』

『그렇습니다. 제일 급한 것은 당신이 갖고 계시는 수형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지불기한의 연기를 희망하지 않으십니까?』

『아아!』

하고 모영택씨는 감탄을 하면서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연기를 하여 주신다면 저는...... 저는 다시 소생할 수가 있습니다! 저의 명예는 예전대루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동안의 연기가 필요하십니까?』

『두달만 연기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면 넉넉히 잡고 석달동안의 여유를 드리겠습니다. 오늘이 六월五일! 그러면 석달후, 즉 九월五일 오전 열한 시에 제가 다시 당신을 찾아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만일 그날 그시각에 지불을 못하게 되는 경우에는...... 아마 저는 살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영택씨가 입속으로 속삭인 이 최후의 한마디는 분망히 자리를 일어서는 봉룡이의 귀에는 들리지를 않았다.

『그러면 후일 다시 뵙겠습니다.』

『네,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봉룡이가 모영택씨와 인사를 하고 사무실 밖을 나섰을 때, 모영택씨의 딸 인애가 수심 띤 얼굴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가

『여보세요!』

하고 애원하는 목소리로 불렀다.

『아, 모선생의 따님이시지요?』

『네...... 그런데.......』

『아, 잠깐만 기다리시요. 제가 당신께 한마디 부탁할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데.......』

『후일 당신께 어떤 사람으로부터 한장의 편지가 올 것입니다.』

『편지가요?』

『그렇습니다. 편지가 오면 당신은 만사를 제지하고 그 편지에 씨인대로 실행을 하여 주실 것을 저에게 약속할 수가 있겠습니까?』

『네, 약속하겠습니다—』

『맹세하시겠습니까?』

『네, 맹세하겠습니다!』

『그러면 되었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요.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마음과 몸이 다 함께 어여쁜 아가씨대로 계시기를 바랍니다!』

그 한마디를 남겨놓고 봉룡은 인애와 헤여저 행길로 나오다가 늙은 선원 광삼이를 도중에서 만났다.

『아, 잠깐 나를 따라 오시요. 나는 당신께 한마디 할 말이 있습니다.』

하고 봉룡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모상회의 충실한 늙은 선원 광삼이를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나에게도 다시 운명의 행복이 돌아올는 이 아닌가?』

하고 모영택씨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편 상해교역은행이 이처럼 모상회를 위하여 막대한 호의를 보여주는것이 아모리 생각하여도 이상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한 이유를 모영택씨는 좀처럼 쉽사리 풀수가없었다.

진남포 상업계에서는 모상회는 도저히 다시 일어날수 없을만큼 결정적 파산상태에 빠진줄을 뻔히 알고있었기 때문에 그중 중요한 채무의 하나가 석달동안 연기된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월말지불이 예전대로 까딱없이 되여나가는것을 보고는 모두들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한편 모영택씨는 자금조달을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면으로 분망히 뛰여 댕겼다. 그러나 옛날의 신용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었다. 九十일 수형을 은행에서는 거절을 하게되였다.

그후 상해교역은행의 사원 허달준은 한번도 모상회를 찾은 적이 없었다.

태양환의 선원들은 모두 제각기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모영택씨가 사방팔면으로 활동을 계속한 탓으로 八월말의 지불도 간신히 넘겨버렸으나 九월五일의 상해교역은행에 지불할 二十만원의 자금은 아직 턱도 대지를 못하였다.

생각 끝에 모영택씨는 서울 장현도를 찾아가서 신용보증(信用保證)을 간청하였으나 보기좋게 거절을 당하고 돌아왔다. 장현도 같은 인간에게까지 머리를 숙인 모영택씨로서는 인제는 자기 힘으로 할수 있는 일은 다한 셈이었다. 인제는 정말 천운을 기다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三十년 동안 남포바닥의 신상(紳商)으로서의 명예를 죽엄으로서 보존할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인제는 정말 우리 집안도 최후의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다!」

그렇게 생각한 모영택씨의 부인은 딸 인애와 상의한 결과 평양 의학전문에 다니는 아들에게 곧 집으로 돌아 오도록 편지를 띠웠다.

이리하여 불안과 절망과 비탄에 잠긴 채 마침내 약속의 날 九월五일의 전날 밤을 마지 하였다.

그날밤 모영택씨는 자기 방에 쇠를 잠그고 밤 늦게까지 책상에 마조앉아 열심히 그 무엇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니, 그것은 그가 세상을 하직할 때에 남겨놓을 한장의 긴 유서(遺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