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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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실연자[편집]

1[편집]

그날밤 오 창윤은 참으로 착잡한 심정으로 영민과 함께 경성역에서 부산행 급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발차 시간까지는 아직 二十[이십]분이나 남아 있었다.

눈을 지긋이 감고 앉았는 오 창윤의 망막에는 가엾은 유경이와 알뜰한 춘심의 두 젊은 여자의 자태가 주마등인 양 흘러 갔다가는 흘러 오곤 하였다.

아까는 그런 줄도 몰랐으나

「동풍이냐, 서풍이냐?」

고, 물어준 춘심이야말로 실로 위대한 애욕철학자(愛慾哲學者)라고 생각하였다.

아까는 유경일 위해서 춘심을 갈겼다. 그러나 그때 벌써 춘심은 갈긴 그 볼을 어루만져 줄 오 창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지금에 있어서의 오 창윤은 춘심의 고 발가스레한 양볼을 한없이 쓰다듬어 주고 싶어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만일 그 자리에 백 영민이라는 학생이 없었던들 오 창윤은 한편 손으로 후려 갈긴 볼을 한편 손으로는 아플쎄라 어루만져 주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즈음에 준혁이가 배웅을 나왔다.

유경이가 만일 집으로 「 돌아 오거든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붙들어 두어야 하네.」

「선생님, 염려 마시고 다녀 오십시요.」

그리고 준혁은 영민을 향하여

「잠간 형에게 물어 볼 말이 있읍니다. 차를 잠깐 내려 주실 수 없을까요?」

영민은 오 창윤을 좌석에 혼자 남겨 두고 홈으로 내려가서 준혁이가 인도하는 대로 벤취에 걸터앉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런 말을 물어서 혹시 실례되는 점이 있다면 용서하여 주시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응당 대답하겠읍니다.」

「실은 아까부터 적지않게 마음에 걸려 왔읍니다만 형의 이야기에 나오는 그 허씨 딸이라는 분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것을 제게 말씀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그 말에 영민은 준혁의 심각한 얼굴을 후딱 쳐다보면서

「알려도 무방합니다만, 그러나 그 여인으로 말하면 경찰에서 찾고 있는 사람인 만큼 함부로 이름을……」

「아, 그런 점이라면 저를 신용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혹시 아실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저 장 일수씨의 수술을……」

「아, 참 그랬었지요! 알고 있읍니다. 잘알고 있읍니다. 장군을 대신하여 제가 다시 한번 치사를 올리겠읍니다.」

「도리어 부끄럽습니다.」

「그 여인은 허 운옥이라고 불렀읍니다.」

「아, 역시…… 역시 그래었읍니까!」

김 준혁 박사는 걸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주저앉으면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실로…… 실로 이상한 인연입니다!」

「이상한 인연이라고요?」

이번에는 영민이가 놀라면서

「그러면 그 여인을 아십니까?」

「잘 알고 있읍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말씀해 주십시요! 五[오]년 동안 전연 모르고 있던 꿈같은 소식입니다!」

영민은 준혁의 손을 잡고 무섭게 흔들면서 안타까이 물었다.

그 분은 「 약 一[일]년 동안 제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있었읍니다.」

「엣?」

「그리고 청량리 밖에서 장 일수씨를 치료해 준 것도 그 분이었읍니다.」

「오오!」

영민은 벌떡 일어서자 캄캄한 하늘을 우러러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아, 五[오]년 전 그대로의 운옥의 애련한 모습이 한 줄기 쓰라린 비애와 함께 영민의 가슴을 아프게 쳤다.

「아아, 그랬읍니까!」

영민은 저으기 떨리는 목소리로 신음을 하였다.

「그리고 저번 날 밤, 천일관에서 절박한 위험으로부터 장 일수씨를 구하고자 종이 돌을 들창으로 던진 것이 누군지 아십니까?」

하는, 준혁이의 말에

「아아, 역시 운옥이었읍니까?」

하면서 영민은 거듭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북쪽으로 떠나 간 장 일수의 편지에 그런 말이 씌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신 성호군에게서 들었지요.」

아아, 그럼 그날밤 운옥이가 천일관엘 왔었던가?…… 무엇 때문에 왔었을까?…… 장군의 위험을 구하려 왔었던가? 내가 그자리에 동석했었던 사실을 운옥은 알았을까?……

「아, 참 그랬었군요! 나도 그때 그 조악돌을 싼 종이 조각의 필적을 보았읍니다만 어디선가 한번 본 적이 있는 글씨 같았읍니다. 그렇읍니다. 그것은 지금 생각하니 틀림없는 운옥이의 글씨였읍니다.」

五[오]년 동안의 세월과 함께 흘러 가버린 가엾은 여인 허 운옥의 새로운 기억이 일순간 영민을 사로잡고 놓아 주지를 않았다.

「그래 운옥인 지금 어디 있읍니까? 아직도 간호원으로 댁에 있읍니까?」

그 말에 준혁은 일종 것잡을 수 없는 지극히 서글픈 목소리로

「아니요.」

하고, 머리를 흔들며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답니다.」

「왜요?」

그때 준혁은 영민의 손을 힘있게 잡으며

「백형, 용서 하십시요!」

하고, 머리를 숙였다.

2[편집]

용서 「 하다니, 무슨 뜻입니까?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시요!」

「말씀 드리겠읍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겠읍니다.」

하면서 머리를 번쩍 들고 영민의 얼굴을 정면으로 대하며

「형이 지금 유경씨의 행적을 찾아 헤매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지금 운옥씨의 행방을 찾아 헤매이는 사람입니다!」

「…………」

영민은 대답을 못하고 덤덤히 상대자의 얼굴을 바라 볼 뿐이다.

「유경씨를 잃어 버리고 절망 속에서 헤매던 나는 참다운 아름다움과 거룩한 사랑의 길을 운옥씨에게서 발견하고 광명을 찾아 나왔읍니다. 소생하였읍니다! 오 유경을 잃어 버림으로써 나는 한 사람의 거룩한 여인, 우리 조선 三[삼]천만 민족이 다같이 우러러 볼 수 있는 위대한 여인 허 운옥을 발견하 였읍니다.」

「…………」

「그러나 나의 인격이 부족함인지, 나의 정열이 모자람인지 운옥씨는 그 어떤 사정으로 말미암아 나의 정열을 받아 들이지 못한다는 간단한 편지 한 장을 남겨 놓고 어떤날 새벽, 돌연 병원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답니다.」

영민은 다시 눈을 지긋이 감고 컴컴한 천공을 우러렀다. 준혁도 거기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소란한 군중 속으로 서글픈 시선을 던졌다.

「김형!」

영민은 그 어떤 격정에 사로잡히며 준혁의 손을 힘입게 더듬어 잡았다.

「백형!」

준혁도 그 우수에 깊이 잠긴 눈동자로 상대자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영민의 손을 굳세게 잡았다.

「백형, 실로 기구한 운명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구한 운명에 사로 잡히지 말고 참다운 인간의 길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노력을 아끼지 맙시다! 부지런 합시다! 그것이 오직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길인가 합니다.」

「동감입니다! 형은 형의 길을 부지런히 개척해 주시요. 나는 또 나대로 나의 길을 부지런히 걸어 나가겠읍니다.」

발차의 종이 소란한 구내를 울리기 시작하였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요.」

「몸 조심 부디 하십시요.」

헤어질 때 두 진실한 젊은이의 손과 손이 추호의 허세도 없이 힘차게 쥐어졌다.

이윽고 김 준혁 박사의 외로운 자태를 구내에 쓸쓸히 남겨둔 채 기차는 떠났다.

사흘 후 ── 동경에 도착한 오 창윤은 영민과 함께 한 주일 동안이나 유경을 찾아 헤매었으나 유경의 행적을 여전히 묘연하였다.

유경은 그후 학교 기숙사에도 들린 적이 없고 「오오다니」 산과에도 들린 적이 없다. 유경이의 몇몇 동무를 찾아 「간다」로 「나까노」로 싸돌아 다녀 보았으나 모두가 다 헛 수고였다.

「인제는 허는 수가 없소. 유경이가 제 발로 …… 올 때를 기다릴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소.」

그러면서 오 창윤은 동경을 떠나는 바로 전날, 영민의 하숙에서 영민과 함께 하룻밤을 같이 자고 떠날 요량으로 여관에서 옮아 왔다.

담배 가게 二[이]층 四[사]조 반이다.

「요가 없어서요.」

영민이가 오 창윤을 위하여 주인 마누라에게 요를 한 자리 빌리려 내려가려 하였을 때 오 창윤은 그것을 막으면서

「편히 잘려고 온 것이 아니요. 군이 내 딸 유경이를 위해서 하고 있는 생활을 나도 하룻밤만이라도 해 보고 싶어서 온 것이오. 내 염려는 아예 말고 군이나 어서 그 피곤한 몸을 편히 쉬도록 하시오.」

그래서 두 사람은 찬 「다다미」 위에 그대로 누워서 영민의이 부자리를 하나씩 하나씩 갈라서 덮기만 하였다.

「노구에 감기 드시지 않을까요?」

영민은 정말 걱정스러웠다.

「감기 쯤이 뭣이겠소? 군이 내 딸을 위해서 겪고 있는 고생에 비하면 음…… 부모 이외에 부모 이상의 애정과 노력을 가지고 자기 딸을 위해 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할 때, 부모되는 사람은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것이요.」

이튿날 아침, 일찍암치 조반을 먹고 영민이가 「소화」 제빵소에 출근할 셈으로 나섰을 때

「잠깐만 ──」

하고, 오 창윤은 불렀다.

「이것은 내가 노자로 갖고 왔던 돈인데 이처럼 남았소. 약소하나마 이것으로 당분간의 생활비로 충당해 준다면 나로서 대단히 기쁘겠소.

하면서 가방에서 조그만 지폐 뭉치를 하나 꺼내 주었다.

「선생님, 그것은……」

「암말 말구 넣어 두시요. 그것이 내 뜻이요.」

「고맙습니다.」

하고, 영민은 정중히 머리를 숙이고 나서

「그러나 그것은 선생님의 뜻은 될지 모르오나 제 뜻은 아니 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