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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대한역사/제1편 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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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단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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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단군이 탄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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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方이初에君長이無ᄒᆞ야人民이草ᄅᆞᆯ衣ᄒᆞ고木實을食ᄒᆞ며夏에ᄂᆞᆫ巢ᄒᆞ고冬에ᄂᆞᆫ穴ᄒᆞ더니桓因이라ᄒᆞᄂᆞᆫ者ㅣ有ᄒᆞ야子、雄을生ᄒᆞ니雄이太白山今、寧邊、妙香山檀木下에室을築ᄒᆞ고王儉을誕生ᄒᆞ다

동방에는 처음 무리의 왕이 없어서 백성이 풀로 옷을 해 입고 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여름에는 나무 위에서 살고 겨울에는 동굴에서 지냈다. 환인(桓因)이라 하는 자가 있었는데 아들 환웅(桓雄)을 낳고, 환웅이 태백산(太白山)【지금의 영변(寧邊) 묘향산(妙香山)】 박달나무[檀木] 아래에 집을 짓고 왕검(王儉)을 낳았다.


제2절 단군이 나라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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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儉이聖德이有ᄒᆞ거ᄂᆞᆯ國人이尊ᄒᆞ야君을삼으니是가檀君이되시니라國號ᄅᆞᆯ朝鮮先受、日光、鮮故、謂之朝鮮이라ᄒᆞ니元年은唐、堯二十五年이오隆熙元年前、四千二百四十年이라비로소民을敎ᄒᆞ야髮을編ᄒᆞ고首ᄅᆞᆯ蓋ᄒᆞ며君臣과男女의飮食과居處의制ᄅᆞᆯ始備ᄒᆞ다

왕검(王儉)이 성스러운 덕[聖德]을 지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으니 그가 단군(檀君)이 되었다.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가장 먼저 아침 해를 받아 빛난다는 까닭에 조선이라 하였다.】이라고 하니 원년(元年)은 당(唐)【지나(支那)】 요(堯)임금 25년이고, 융희(隆熙) 원년(1907)으로부터 4240년 전이다. 비로소 백성을 교화하여 머리를 묶어 덮었으며 왕과 신하, 남녀의 음식과 거처의 제도를 처음 갖추었다.


東國을創立ᄒᆞ신檀君의像
동국을 세우신 단군의 상

제3절 단군이 도읍을 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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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子、扶婁ᄅᆞᆯ塗山에遣ᄒᆞ야夏、禹氏의萬國會에參ᄒᆞ고王子、三人을江華、傳燈山에遣ᄒᆞ야三郞城을築ᄒᆞ다初에平壤에都ᄒᆞ얏다가後에白岳今、文化、九으로徙ᄒᆞ니라彭吳ᄅᆞᆯ命ᄒᆞ야國內、山川을奠ᄒᆞ실새東은大海【今、太西洋ᄅᆞᆯ限ᄒᆞ고西ᄂᆞᆫ遼河今、屬支那、盛京省ᄅᆞᆯ連ᄒᆞ고南은鳥嶺今在、聞慶郡에至ᄒᆞ고北은黑龍江在、支那、黑龍江省、北에接ᄒᆞ다

태자(太子) 부루(扶婁)를 도산(塗山)에 보내 하(夏)【지나(支那)】 우씨(禹氏)의 만국회(萬國會)에 참석하도록 하고, 왕자 3명을 강화(江華) 전등산(傳燈山)으로 보내 삼랑성(三郞城)을 쌓았다. 처음 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가 이후에 백악(白岳)【지금의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으로 옮겼다. 팽오(彭吳)에게 명령하여 국내 산천에 제사를 올릴 때에 동쪽은 대해(大海)【지금의 태평양】를 한계로 하고, 서쪽은 요하(遼河)【지금의 지나(支那) 성경성(盛京省)】에 이르렀고, 남쪽은 조령(鳥嶺)【지금의 문경군(聞慶郡)】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흑룡강(黑龍江)【지금의 지나(支那) 흑룡강성(黑龍江省) 북측】에 닿았다.


제4절 기자에게 양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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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의後孫이君位ᄅᆞᆯ相傳ᄒᆞᆫ지千二百十二年에位ᄅᆞᆯ箕子에게讓ᄒᆞ고北扶餘로遷ᄒᆞ얏다가後에高句麗에倂ᄒᆞ니라扶餘、今支那、吉林、寧古塔、等地

단군(檀君)의 후손이 왕위를 서로 이어간 지 1212년에 왕위를 기자에게 양위하고 북부여(北扶餘)로 옮겼다가 이후 고구려(高句麗)에 병합되었다.【부여는 지금의 지나(支那) 길림(吉林) 영고탑(寧古塔) 등지이다.】


제2장 기자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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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기자는 은나라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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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의姓은子오名은胥餘ㅣ니子爵으로箕에封ᄒᆞᆫ故로箕子라稱ᄒᆞ니殷、王、成湯의後孫이오紂의諸父라紂의太師가되시니라

기자(箕子)의 성(姓)은 자(子)이고 이름은 서여(胥餘)인데 자작(子爵)으로 기(箕) 땅에 봉해졌기 때문에 기자라고 하였다. 은나라【지나(支那)】 왕 성탕(成湯)의 후손이고 주(紂)의 제부(諸父)이다. 주의 태사(太師)가 되었다.


제2절 기자가 동쪽으로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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紂의無道ᄒᆞᆷ을見ᄒᆞ시고披髮、佯狂ᄒᆞ야奴가되신ᄃᆡ紂가囚ᄒᆞ얏더니周、武王、姬發이紂ᄅᆞᆯ滅ᄒᆞᆷ애囚ᄅᆞᆯ釋ᄒᆞ고道ᄅᆞᆯ訪ᄒᆞ거ᄂᆞᆯ箕子ㅣ洪範、九疇ᄅᆞᆯ陳ᄒᆞ시고男女、五千人을率ᄒᆞ고周ᄅᆞᆯ避ᄒᆞ야朝鮮에入ᄒᆞ시니라

주왕(紂王)의 무도함을 보고 머리를 풀어 미치광이처럼 하여 노비가 되었더니 주왕이 옥에 가두었다. 주(周)나라【지나(支那)】 무왕(武王) 희발(姬發)이 주왕을 몰아냈다. 이때 옥에 갇힌 자를 풀어 주고 도를 물었는데 기자(箕子)가 홍범구주(洪範九疇)1)를 진술하고 남녀 5천 명을 이끌고서 주나라를 피해 조선(朝鮮)으로 들어왔다.


제3절 기자가 교화를 베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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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ㅣ詩書와禮樂과田蠶과織作으로써民을敎ᄒᆞ신ᄃᆡ國人이聖德을慕ᄒᆞ야王을삼으니平壤에仍都ᄒᆞ사八條의敎ᄅᆞᆯ設ᄒᆞ시니仁賢의化가著ᄒᆞ니라

기자(箕子)가 시서(詩書)와 예악(禮樂), 밭농사와 누에치기[田蠶], 실을 뽑아 천을 만드는 일[織作]을 백성에게 가르쳤다. 이때 백성이 그의 성스러운 덕을 높이 받들어 왕으로 삼았다. 평양(平壤)에 도읍하고 8조의 교(敎)1)를 세우니, 인자하고 어진 교화가 드러났다.


敎化ᄅᆞᆯ倡興ᄒᆞ신箕子의像
교화를 창흥(倡興)하신 기자의 상

제4절 기준이 남쪽으로 피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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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의四十一世孫、準에게至ᄒᆞ야燕、人、衛滿이衆을率ᄒᆞ고椎髻와蠻夷의服으로來降ᄒᆞ거ᄂᆞᆯ博士ᄅᆞᆯ拜ᄒᆞ야西藩을守케ᄒᆞ얏더니滿이兵을引ᄒᆞ야平壤을襲ᄒᆞ거ᄂᆞᆯ準이兵을避ᄒᆞ야南으로金馬郡今、益山郡에至ᄒᆞ야馬韓이라稱ᄒᆞ니라

기자(箕子)의 41세손 기준에 이르러서 연(燕)나라【지나(支那)】 사람 위만(衛滿)이 무리를 이끌고 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고 와서 항복하였다. 박사(博士) 벼슬을 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더니, 위만이 병사를 이끌고 평양(平壤)을 습격하였다. 기준이 병사를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금마군(金馬郡)【지금의 익산군(益山郡)】에 이르러서 마한(馬韓)이라 칭하였다.


椎髻蠻服ᄒᆞᆫ燕衆의圖
상투를 틀고 오랑캐 복장을 한 연나라 무리의 모습

제5절 위만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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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滿이平壤에都ᄒᆞ고國號ᄅᆞᆯ朝鮮이라稱ᄒᆞ고兵權과財力으로數千里ᄅᆞᆯ開拓ᄒᆞ얏더니其孫、右渠에게至ᄒᆞ야漢、의使臣을殺ᄒᆞ니漢、武帝、劉徹、이樓船將軍、楊僕、과左將軍、荀彘와公孫遂ᄅᆞᆯ遣ᄒᆞ야攻破ᄒᆞ고四郡을置ᄒᆞ다

四郡에一은樂浪이니平壤府와밋春川이오一은臨屯이니京畿、西郊와밋黃海、東道오一은玄莵이니咸興府오一은眞蕃이니遼東이라

위만(衛滿)이 평양(平壤)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칭하고 병권(兵權)과 재력(財力)으로 수천 리를 개척하였다. 그의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러 한(漢)나라【지나(支那)】의 사신을 죽이니, 한나라 무제(武帝) 유철(劉徹)이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筍彘)와 공손수(公孫遂)를 파견하여 쳐부수고 4군(四郡)을 설치하였다.

【4군 중 하나는 낙랑(樂浪)으로 평양부와 춘천(春川)이고, 하나는 임둔(臨屯)으로 경기 서쪽 외곽과 황해 동도(東道)이다. 하나는 현도(玄莵)로 함흥부(咸興府)이고, 하나는 진번(眞蕃)으로 요동(遼東)이다.】


제3장 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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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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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王、箕準이金馬郡에處ᄒᆞ야韓王이라稱ᄒᆞ니其民이種植을務ᄒᆞ며蠶桑을喜ᄒᆞ고金銀을輕視ᄒᆞ고珠玉으로써髮을飾ᄒᆞ며男子ᄂᆞᆫ帛袍ᄅᆞᆯ衣ᄒᆞ고性이勇悍ᄒᆞ야弓楯과矛櫓ᄅᆞᆯ善用ᄒᆞ더라

마한의 왕 기준(箕準)이 금마군(金馬郡)에 정착하여 한왕(韓王)이라 칭하니, 그 백성이 씨앗을 뿌리고 키우는 데 힘쓰고 누에치기를 좋아하였으며, 금은(金銀)을 경시하고 구슬과 옥으로 머리를 장식하였다. 남자는 비단과 솜옷을 입고 그 성품이 용맹하여 활과 방패, 창과 큰 방패를 잘 사용하였다.


제2절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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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準의後孫이馬韓에總王으로世世、自守ᄒᆞ다가百濟、王、高溫祚에게滅ᄒᆞᆫ바ㅣ되니箕子元年으로부터此에至ᄒᆞ야歷年이共一千一百三十一年이러라

기준(箕準)의 후손이 마한(馬韓)의 우두머리 왕으로[總王] 여러 대를 이어서 스스로 지켜 오다가 백제 왕 고온조(高溫祚)에게 멸망하였다. 기자(箕子) 원년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왕업을 이어 온 해가 모두 1131년이었다.


제3절 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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辰韓은馬韓、東方에在ᄒᆞ니北은穢貊을接ᄒᆞ고南은弁韓을隣ᄒᆞ니其、始ᄂᆞᆫ秦人이라秦의苛政을避ᄒᆞ야馬韓에入ᄒᆞ거ᄂᆞᆯ馬韓이東界ᄅᆞᆯ割ᄒᆞ야處케ᄒᆞ얏더니後에新羅에倂ᄒᆞ니라

진한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어 북쪽은 예맥(濊貊)을 마주하고 남쪽은 변한(弁韓)을 이웃하니 그 시조는 진(秦)나라 사람이다. 진나라의 가혹한 정치를 피해서 마한에 들어왔다. 마한이 동쪽 경계를 나누어 정착하게 하였는데 이후 신라(新羅)에 병합되었다.


제4절 변한 또는 변진이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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弁韓은辰韓南方에在ᄒᆞ니辰韓과雜居ᄒᆞ야馬韓으로더부러三韓이라幷稱ᄒᆞ더니後에駕洛國의始祖、金首露의幷ᄒᆞᆫ바ㅣ되니라

변한은 마한(馬韓) 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진한(辰韓)과 섞여 살아서 마한과 더불어 삼한이라 칭하였다. 후에 가락국(駕洛國)의 시조 김수로(金首露)에게 병합되었다.


제5절 삼한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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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이라稱ᄒᆞᆷ은漢江、南에一、大陸이有ᄒᆞᆫ故로方言에一이라大라ᄒᆞᄂᆞᆫ義ᄅᆞᆯ譯ᄒᆞᆷ이라三韓이鼎足과如히峙ᄒᆞ야馬韓이統治ᄒᆞ니馬韓이五十四國이오辰韓과弁韓은各히十二國의屬國이有ᄒᆞ니大者ᄂᆞᆫ萬餘家오小者ᄂᆞᆫ千餘家ㅣ라折風巾과長袖衫져고과大口袴와烏革履검은ᄂᆞᆫ其遺俗이尙傳ᄒᆞ니라

한(韓)이라고 칭한 것은 한강(漢江) 남쪽에 하나의 큰 땅이 있었던 까닭에 방언 중 ‘하나[一]’란 ‘크다[大]’라는 뜻을 옮긴 것이다. 삼한이 솥의 다리와 같이 마주하여 마한(馬韓)이 통치하니 마한이 54국이고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은 각각 12국의 속국(屬國)이 있으니 큰 나라는 1만여 가(家)이고 작은 나라는 1천여 가이다. 절풍건(折風巾)【갓】과 장수삼(長袖衫)【저고리】과 대구고(大口袴)【바지】와 오혁리(烏革履)【검은 신】는 예부터 전하는 풍습으로 여전히 전해 내려오고 있다.


古朝鮮과三韓의圖
고조선과 삼한의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