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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대한역사/제3편 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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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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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추대되어 왕위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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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太祖의姓은王이오名은建이오松岳郡、人이니金城太守、隆의子ㅣ라年이二十에泰封、弓裔、의將이되야諸賊을討平ᄒᆞᆷ으로威德이日盛ᄒᆞᆷ애泰封、將、洪儒、裴玄慶、申崇謙、卜智謙、의等이推戴ᄒᆞ야大位에卽ᄒᆞ다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성씨는 왕(王)이고 이름은 건(建)이며 송악군(松嶽郡) 사람이니 금성 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나이 20세에 태봉(泰封) 궁예(弓裔)의 장수가 되어 많은 적을 토벌하였으므로 위엄과 덕망이 날로 커져 갔다. 이에 태봉의 장수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추대하여 왕위에 올랐다.


제2절 통일하고 도읍을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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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號ᄅᆞᆯ高麗山高水麗ᄒᆞᆫ義ᄅᆞᆯ取ᄒᆞ다라ᄒᆞ고年號ᄅᆞᆯ天授ㅣ라ᄒᆞ며弓裔ᄅᆞᆯ逐ᄒᆞ고甄萱을平ᄒᆞ고新羅가來附ᄒᆞ니全國을統一ᄒᆞ야松岳郡에移都ᄒᆞ고郡을陞ᄒᆞ야開州라ᄒᆞ고宮闕、市廛、坊里、五部六衛、의制度ᄅᆞᆯ定ᄒᆞ다

나라 이름을 고려(高麗)【산이 높고 물길이 아름답다는 의미를 취하였다.】라 하고 연호(年號)를 천수(天授)라 하였다. 궁예(弓裔)를 쫓아내고 견훤(甄萱)을 평정하였으며, 신라(新羅)가 와서 항복하니 전국을 통일하였다. 송악군(松嶽郡)으로 도읍을 옮기고 군을 승격시켜 개주(開州)라 하고 궁궐, 시전(市廛), 방리(坊里), 5부(部), 6위(衛)의 제도를 정하였다.


統合三韓ᄒᆞᆫ高麗太祖의像
삼한을 통합한 고려 태조의 상

제3절 과거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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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宗、九年에後周、大理評事、雙冀가周使ᄅᆞᆯ從ᄒᆞ야來ᄒᆞ거ᄂᆞᆯ王이其才ᄅᆞᆯ愛ᄒᆞ야翰林學士ᄅᆞᆯ拜ᄒᆞ야文任을專委ᄒᆞ야詩、賦、頌、과時務策으로써士子ᄅᆞᆯ試取ᄒᆞ니文風이大振ᄒᆞ니라

광종(光宗) 9년(958)에 후주(後周)【지나(支那)】 대리평사(大理評事) 쌍기(雙冀)가 주나라 사신을 따라왔다. 왕이 그의 재주를 아껴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제수하고, 문서 관련 업무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시(詩), 부(賦), 송(頌)과 시무책(時務策)으로 시험을 보아 선비들을 선발하니 문풍(文風)이 크게 일어났다.


제4절 공복을 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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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年에百官의公服을定ᄒᆞᆯ새元尹以上은紫衫이오中壇卿以上은丹衫이오都航卿以上은緋衫이오主簿以上은綠衫이러라是年에開京으로皇都ᄅᆞᆯ삼고西京으로西都ᄅᆞᆯ삼다

광종(光宗) 11년(960)에 모든 관료의 공복을 정할 때에 원윤(元尹) 이상은 자주색이고, 중단경(中壇卿) 이상은 붉은색이며, 도항경(都航卿) 이상은 비색이고, 주부(主簿) 이상은 녹색이었다. 같은 해에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삼고 서경(西京)을 서도(西都)로 삼았다.


제5절 강감찬이 복병을 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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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宗、二年九月에契丹의大將、蕭遜寧이來侵ᄒᆞ거ᄂᆞᆯ姜邯贊으로上元帥ᄅᆞᆯ拜ᄒᆞ야軍士、二十萬八千人을率ᄒᆞ고興化今、義에至ᄒᆞ야山中에設伏ᄒᆞ고ᄯᅩ大繩으로써牛皮ᄅᆞᆯ貫ᄒᆞ야大川을塞ᄒᆞ다

현종(顯宗) 2년(1010) 9월에 거란[契丹]의 대장(大將) 소손녕(蕭遜寧)이 침략해 오니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에 임명하였다. 그가 군사 20만 8천 명을 이끌고 흥화(興化)【지금의 의주(義州)】에 이르러 산 속에 복병을 두고, 또한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얽어 매서 큰 냇물을 막았다.


제6절 소손녕을 크게 격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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旣而오敵이至ᄒᆞ거ᄂᆞᆯ塞을決ᄒᆞ고伏兵을發ᄒᆞ야遜寧을大破ᄒᆞ니遜寧이敢히迎戰치못ᄒᆞ고回軍ᄒᆞ야龜川에至ᄒᆞ거ᄂᆞᆯ邯贊等이ᄯᅩ邀戰ᄒᆞᆯ새風雨의勢ᄅᆞᆯ乘ᄒᆞ야奮擊、大破ᄒᆞ니殭尸、遍野ᄒᆞ고人口와馬、駝、와兵仗을俘獲ᄒᆞᆷ이不可勝計오遜寧의軍이生還ᄒᆞᆫ者ㅣ僅히數千人이러라

이어 적이 도달하자 막았던 냇물을 트고 매복하고 있던 병사들을 내보내 소손녕을 크게 격파하니 소손녕이 감히 대적하여 싸우지 못하고 군사를 돌이켜 구천(龜川)에 이르렀다. 강감찬(姜邯贊) 등이 또한 맞서 싸울 때에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틈을 타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죽은 시신이 들판에 널려 있고 사람과 말, 낙타와 병기를 획득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소손녕의 군대 가운데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수천 명뿐이었다.


제7절 머리 위에 꽃을 꽂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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邯贊이凱歌ᄅᆞᆯ唱ᄒᆞ고還ᄒᆞ니王이郊迎、賜宴ᄒᆞᆯ새金花、八枝로써邯贊의頭上에揷ᄒᆞ고右手로執觴ᄒᆞ고左手로邯贊의手ᄅᆞᆯ執ᄒᆞ고慰勞ᄒᆞ시다

강감찬(姜邯贊)이 승전가를 부르며 돌아오니 왕이 직접 교외로 나가 영접하고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에 가지가 8개 달린 금으로 만든 꽃을 강감찬의 머리 위에 꽂아 주고 왼손으로 술잔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강감찬의 손을 잡아 위로하였다.


顯宗이郊迎姜邯贊ᄒᆞ고頭揷金花圖
현종이 강감찬을 교외에서 영접하고 머리 위에 금꽃을 꽂아 주는 그림

제8절 안색을 바르게 하고 벼슬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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邯贊은衿川、今、始人이라性이淸儉ᄒᆞ야産業을不營ᄒᆞ고好學、不倦ᄒᆞ며奇略이多ᄒᆞ고形體、矮陋ᄒᆞ며衣裳이垢弊ᄒᆞ고外貌가不揚ᄒᆞᄂᆞ正色、立朝ᄒᆞ야大事와大策을決ᄒᆞᆯ時에ᄂᆞᆫ屹然이邦家、柱石이라ᄯᅩ京都에城郭을築ᄒᆞ니라

강감찬(姜邯贊)은 금천(衿川)【지금의 시흥(始興)】 사람이다. 성품이 청렴하여 산업(産業)에 종사하지 않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기략(奇略)이 많았다. 형체는 작고 볼품이 없으며 옷은 더럽고 해져서 외모가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색을 바르게 하고 벼슬에 올라서 큰일과 큰 정책을 결정할 때에는 위엄스러움이 나라의 큰 기둥과 같았다. 또한 경도(京都)에 성곽을 쌓았다.


제9절 다섯 왕을 이어서 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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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宗、二十一年에中書令、崔冲이夙姿가奇偉ᄒᆞ고操性이堅貞ᄒᆞ야學을好ᄒᆞ고屬文을善ᄒᆞ더니五朝ᄅᆞᆯ歷事ᄒᆞ야時望이甚重ᄒᆞᄂᆞ顯宗以後에干戈가纔息ᄒᆞ야文敎ᄅᆞᆯ未遑ᄒᆞ니라

문종(文宗) 21년(1067)에 중서령(中書令) 최충(崔冲)이 어릴 적부터 자태가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성품이 곧고 바르며 배우기를 좋아하고 글 짓는 것을 잘 하였다. 다섯 왕을 이어서 섬기여 당시 기대하는 바가 매우 컸다. 현종(顯宗) 이후에 전쟁이 겨우 멈추었으나 문화와 교육을 할 겨를이 없었다.


제10절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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冲이後學을收召ᄒᆞ야敎誨ᄅᆞᆯ不倦ᄒᆞ니學徒가雲集ᄒᆞ야街卷에塡溢ᄒᆞᄂᆞᆫ지라드ᄃᆡ여九齋에分ᄒᆞ야敎授ᄒᆞ니時人이謂호ᄃᆡ侍中、崔公의弟子ᄂᆞᆫ分列과進退에儀節이有ᄒᆞ다ᄒᆞ더라東方에學校ᄅᆞᆯ興ᄒᆞᆷ이ᄃᆡᄀᆡ冲을由ᄒᆞ야始ᄒᆞ니世上에셔海東孔子라稱ᄒᆞ니라

최충(崔冲)이 후학(後學)을 불러들여서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니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길가에 가득 넘쳐났다. 드디어 9재(九齋)에 나누어서 가르치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시중(侍中) 최 공의 제자는 나누어 서는 것과 나아가고 물러남에 예의가 있다.”고 하였다. 동방(東方)에 학교를 세우는 것은 대개 최충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세상 사람이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칭하였다.


海東、孔子、崔冲의像
해동공자 최충의 상

제11절 주변 국가가 와서 복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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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에東、女眞의十五州、酋長이衆을率ᄒᆞ고來附ᄒᆞ야郡縣됨을請ᄒᆞ고西、女眞의諸、酋長이東藩으로써來附ᄒᆞ며其後에三山과大蘭과大齊와豆龍의數十、種落이連續、來投ᄒᆞ다

그때에 동여진(東女眞)의 15주(州) 추장이 무리를 데리고 와서 복종하여 군현(郡縣)이 되기를 청하였다. 서여진(西女眞)의 모든 추장이 동쪽 국경으로 와서 복종하였으며, 그 이후에 삼산(三山), 대란(大蘭), 대제(大齊), 두룡(豆龍)의 수십 부락이 연이어 와서 투항하였다.


제12절 동전을 주조하여 종묘에 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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肅宗、二年에王이尹瓘의言을用ᄒᆞ야錢貨ᄅᆞᆯ鑄造ᄒᆞ야宗廟에告ᄒᆞ고ᄯᅩ本國、地形을像ᄒᆞᆫ銀甁을用ᄒᆞ고名을闊口라ᄒᆞ다瓘이睿宗、時에東女眞을擊破ᄒᆞ고四城을築ᄒᆞ고ᄯᅩ五城을築ᄒᆞ고南界에六萬餘戶ᄅᆞᆯ徙ᄒᆞ야實ᄒᆞ고先春嶺에碑ᄅᆞᆯ立ᄒᆞ야界ᄅᆞᆯ定ᄒᆞ다

숙종(肅宗) 2년(1097)에 왕이 윤관(尹瓘)의 말을 받아들여 동전을 주조하여 종묘에 고하였다. 또한 본국의 땅 모양을 본뜬 은병(銀甁)을 사용하고 이름을 활구(闊口)라고 하였다. 윤관이 예종(睿宗) 때에 동여진(東女眞)을 공격하여 격파한 후 4성(城)을 쌓았다. 또한 5성을 쌓아서 남쪽 경계에 6만여 호를 이주시켜 가득 차게 하였다. 선춘령(先春嶺)에 비석을 세워서 경계를 정하였다.


제13절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점차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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睿宗、十三年에養賢庫ᄅᆞᆯ國學에立ᄒᆞ고王이儒術에銳意ᄒᆞ야學員을增寘ᄒᆞ고名儒ᄅᆞᆯ選ᄒᆞ야學官을삼아써敎道ᄒᆞ니文風이稍振ᄒᆞ고仁宗五年에諸州에다立學ᄒᆞ다

예종(睿宗) 13년(1118)에 양현고(養賢庫)를 국학(國學)에 세우고 왕이 유학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 학생 숫자를 늘리고 이름난 유학자를 선출하여 학관(學官)으로 삼아 가르치니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점차 일어났다. 인종(仁宗) 5년(1126) 모든 주(州)에 학교를 세웠다.


제14절 4형제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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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宗時에金富佾이弟富軾과富儀로더부러文學을尙ᄒᆞ더니富軾은僧、妙淸의叛ᄒᆞᆷ을勦平ᄒᆞ고趙匡、等이西京을據ᄒᆞ야叛ᄒᆞ거ᄂᆞᆯ討平ᄒᆞ고新羅와百濟와高句麗、三國、史ᄅᆞᆯ撰進ᄒᆞ다宋使가高麗、圖經을著ᄒᆞ야其、家世ᄅᆞᆯ載ᄒᆞ고形을圖ᄒᆞ야歸ᄒᆞ니名振、天下ᄒᆞ고富儀ᄂᆞᆫ詩文이豪邁ᄒᆞ야人口에膾灸ᄒᆞ고富轍도文名이有ᄒᆞ야登科ᄒᆞ니라

인종(仁宗) 때에 김부일(金富佾)이 동생 김부식(金富軾), 김부의(金富儀)와 함께 문학을 숭상하였다. 김부식은 승려 묘청(妙淸)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조광(趙匡) 등이 서경(西京)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하였으며, 신라(新羅)와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 삼국(三國)의 역사를 편찬하여 올렸다. 송(宋)나라 사신이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지으면서 그의 집안 내력을 싣고 그의 형상을 그려서 돌아가니 이름이 천하에 떨쳤다. 김부의는 시(詩)와 글이 호탕하고 뛰어나서 사람들 입에 칭찬하는 소리가 오르내렸고, 김부철(金富轍)도 글로 이름을 날려 과거에 급제하였다.


제15절 효자가 호랑이를 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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毅宗九年에起居舍人、崔婁伯을召ᄒᆞ야時政、得失을論ᄒᆞ다婁伯은水原吏、尙翥의子라年이十五에父가虎의囕ᄒᆞᆫ바ㅣ되거ᄂᆞᆯ婁伯이斧ᄅᆞᆯ荷ᄒᆞ고追斫ᄒᆞ야父、骸ᄅᆞᆯ取ᄒᆞ야安葬ᄒᆞ고虎肉을埋寘ᄒᆞ얏다가服闋에盡食ᄒᆞ다

의종(毅宗) 9년(1155)에 기거사인(起居舍人) 최누백(崔婁伯)을 불러서 요즘 국정(國政)의 득실을 논의하였다. 최누백은 수원(水原)의 벼슬아치 최상저(崔尙翥)의 아들이다. 나이 15세에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되자 최누백이 도끼를 들고 쫓아가 베고서 아버지의 유골을 거두어 장례를 지냈다. 호랑이 고기는 묻어 두었다가 삼년상을 마치고[服闋] 모두 먹어치웠다.


孝子崔婁伯의荷斧斫虎圖
효자 최누백이 도끼를 들고 호랑이를 베는 그림

제16절 문신을 많이 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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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四年에武臣、李義方과李高와鄭仲父와李義旼、等이作亂ᄒᆞ야文臣을大殺ᄒᆞ야積屍如山ᄒᆞ다明宗、元年에上將軍、鄭筠이李義方을斬ᄒᆞ고六年에將軍、慶大升이鄭仲父ᄅᆞᆯ斬ᄒᆞ고二十四年에崔忠獻이李義旼을斬ᄒᆞ야三族을夷ᄒᆞ고宮中에攔入ᄒᆞ야李仁成等三十六人을殺ᄒᆞ고王을廢ᄒᆞ고王의弟旼을立ᄒᆞ니라

의종(毅宗) 24년(1170)에 무신(武臣)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 정중부(鄭仲父), 이의민(李義旼) 등이 반란을 일으켜 문신을 많이 죽이니 시체가 산과 같이 쌓였다. 명종(明宗) 원년(1171)에 상장군(上將軍) 정균(鄭筠)이 이의방의 목을 베었다. 명종 6년(1176) 장군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를 베어 죽였다. 명종 24년(1194)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베어 죽여서 삼족(三族)을 모두 죽이고[夷三族] 궁중(宮中)에 난입하여 이인성(李仁成) 등 36명을 죽이고, 왕을 폐위한 뒤 왕의 동생 왕민(王旼)을 왕으로 세웠다.


제17절 4대에 걸쳐 권력을 장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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毅宗、二十年、後로부터崔忠獻과其子瑀와瑀의子沆과沆의子竩가繼承作亂ᄒᆞ야神宗의位ᄅᆞᆯ太子悳에게傳케ᄒᆞ고熙宗을江華에遷ᄒᆞ고康宗의位ᄅᆞᆯ太子、暾에게傳케ᄒᆞ고王을喬桐에遷ᄒᆞ야四世ᄅᆞᆯ專擅ᄒᆞ다가高宗、四十五年에忠獻의奴、別將、金仁俊이沆에게厚ᄒᆞ더니沆의子竩가疎待ᄒᆞᆷ으로密謀ᄒᆞ야竩와其黨을盡殺ᄒᆞ다

의종(毅宗) 20년(1166) 이후부터 최충헌(崔忠獻)과 그의 아들 최우(崔瑀), 최우의 아들 최항(崔沆), 최항의 아들 최의(崔竩)가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켜 신종(神宗)의 왕위를 태자 덕(悳)에게 전하게 하고 희종(熙宗)을 강화(江華)로 옮겼다. 그리고 강종(康宗)의 왕위를 태자 철(瞮)에게 전하게 하고 왕을 교동(喬桐)으로 옮겨서 4대에 걸쳐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고종(高宗) 45년(1258)에 최충헌의 노비 별장(別將) 김인준(金仁俊)이 최항에게 후한 대접을 받다가 최항의 아들 최의가 소홀히 대접하므로 몰래 모의하여 최의와 그 일당을 모두 죽였다.


제18절 흰옷을 금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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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烈王、元年에太史局이言ᄒᆞ되東方은木에屬ᄒᆞ니色을尙、靑ᄒᆞᆷ이맛당ᄒᆞ거ᄂᆞᆯ國俗이尙、白ᄒᆞ니此ᄂᆞᆫ木이金에制ᄒᆞᄂᆞᆫ象이라請禁、白衣ᄒᆞᆫᄃᆡ王이從ᄒᆞ다四年에服章을改定ᄒᆞ야宰樞、以上은玉帶오六品、以下ᄂᆞᆫ犀帶오七品、以下ᄂᆞᆫ黑帶로ᄒᆞ다同年에百官으로ᄒᆞ야금頭髮을剃ᄒᆞ고元、의衣冠을着ᄒᆞ다

충렬왕(忠烈王) 원년(1275)에 태사국(太史局)이 말하기를, “동방은 목(木)에 속해 있으니 색은 청색(靑色)을 숭상하는 것이 마땅한데 나라 풍속이 흰색을 숭상하니 이는 목이 금(金)에 제압당하는 형상이라.”고 하며 흰옷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자 왕이 이를 따랐다. 충렬왕 4년(1278)에 복장을 고쳐서 재추(宰樞) 이상은 옥띠[玉帶]로, 6품 이하는 뿔띠[犀帶]로, 7품 이하는 흑띠[黑帶]로 하였다. 같은 해 모든 관료에게 머리를 자르도록 하고 원(元)나라【지나(支那)】의 의관을 입었다.


제19절 은과 베로 학교를 돕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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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烈王、三十年에贊成事、安裕가學校의圮毁ᄒᆞᆷ과養賢庫의殫竭ᄒᆞᆷ으로兩府에議ᄒᆞ야六品、以上은銀一斤을各出ᄒᆞ고七品以下ᄂᆞᆫ布ᄅᆞᆯ出ᄒᆞ야養賢庫에歸ᄒᆞ야存本取息ᄒᆞ자ᄒᆞ니王이聞ᄒᆞ고內庫의錢穀을出助ᄒᆞ다

충렬왕(忠烈王) 30년(1304)에 찬성사(贊成事) 안유(安裕)가 학교가 무너지고 양현고(養賢庫)가 텅 비었으므로, 문하부(門下府)와 밀직사(密直司)[兩府]에 논의하였다. 6품 이상은 은 한 근(斤)을 각출하고, 7품 이하는 베를 각출한 후 양현고에 보내어 본전(本錢)은 그대로 두고 이자를 얻도록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왕실 창고의 돈과 곡식을 내어 도왔다.


제20절 대성전을 지어 성인을 모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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裕가國學을葺治ᄒᆞ고餘貨ᄅᆞᆯ江南、에送ᄒᆞ야先聖과七十子의像을畫ᄒᆞ고祭器와祭樂과六經과諸子、史ᄅᆞᆯ購求ᄒᆞ야一經에兩敎授ᄅᆞᆯ置ᄒᆞ야諸生으로聽習케ᄒᆞ고大成殿이成ᄒᆞ니王이先聖ᄭᅴ謁ᄒᆞ다

안유(安裕)가 국학(國學)을 수리하고 남은 돈을 강남(江南)【지나(支那)】에 보내서 공자[先聖]와 70분[子]의 얼굴을 그리게 하고, 제기(祭器)와 제악(祭樂), 육경(六經)과 제자류(諸子類), 역사서를 구입하게 하였다. 하나의 경전에 2명의 교수(敎授)를 두고 여러 학생에게 들어 익히도록 하였다. 대성전이 완성되어 왕이 공자께 참배하였다.


제21절 왕의 언행을 지적하여 탓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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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惠王、四年에政堂文學、李兆年이力學、立朝ᄒᆞ야堅確、敢言ᄒᆞᆷ으로써見憚ᄒᆞ야每入見에王이履聲을聞ᄒᆞ면必曰兆年이來라ᄒᆞ고左右ᄅᆞᆯ屛ᄒᆞ야整容ᄒᆞ고俟ᄒᆞ더니至是ᄒᆞ야王이淫縱이滋甚ᄒᆞᆷ애臺諫이敢諫ᄒᆞᄂᆞᆫ者ㅣ無ᄒᆞ되홀로兆年이指斥、不諱ᄒᆞ니王이不悛ᄒᆞ거ᄂᆞᆯ匹馬로遂歸ᄒᆞ다

충혜왕(忠惠王) 4년(1343)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이 배움에 힘써 벼슬을 얻었다. 그는 성품이 굳세고 확실해서 과감히 말하는 것 때문에 꺼림을 받았다. 왕을 뵙기 위해 들어올 때마다 왕이 그의 발소리를 듣고는 반드시 “이조년이 오는구나.”라고 말하고서 좌우를 물리쳐 용모를 단정히 하고 기다렸다. 이때에 이르러서 왕이 음란하고 방종함이 더욱 심해졌으나 대간(臺諫) 가운데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조년이 홀로 왕의 언행을 지적하여 탓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홀로 말을 타고 돌아갔다.


제22절 자손이 본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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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壤人、黃遂가三、弟와、二娣妹로더부러甘旨ᄅᆞᆯ具ᄒᆞ야七十餘歲된父母에게先奉ᄒᆞᆷ을日三ᄒᆞ고退ᄒᆞ야共食ᄒᆞᆫ지二十餘年에子孫이服習ᄒᆞ야少怠ᄒᆞᆷ이無ᄒᆞ거ᄂᆞᆯ贊成事、姜融이具狀ᄒᆞ야上聞ᄒᆞ다

평양(平壤) 사람 황수(黃遂)가 남동생 셋과 여형제 둘과 함께 달고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서 70여 세 된 부모에게 먼저 봉양하기를 하루에 3번 하고, 그 후에야 물러나와 함께 밥을 먹은 지 20여 년이 되었다. 자손들이 이를 본받아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찬성사(贊成事) 강융(姜融)이 이러한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제23절 나쁜 정치를 혁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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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齊賢이建議ᄒᆞ야先朝、弊政을革罷ᄒᆞᆯ새內乘鷹坊과寶興、德寧、二庫에屬ᄒᆞᆫ田土、奴婢ᄅᆞᆯ査核ᄒᆞ야本主에게還ᄒᆞ다韓宗愈、等四十八人을四番에分ᄒᆞ야書筵에更日、侍讀ᄒᆞᆯ새王이李、杜、詩ᄅᆞᆯ觀코자ᄒᆞ거ᄂᆞᆯ抽黃、對白이治道에無益ᄒᆞ다ᄒᆞ고進치아니ᄒᆞ다

이제현(李齊賢)이 건의하여, 선대 왕의 나쁜 정치를 혁파하고자 하여 내승응방(內乘鷹坊)과 보흥고(寶興庫), 덕녕고(德寧庫)에 속한 전토(田土)와 노비를 조사하여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한종유(韓宗愈) 등 48명이 네 차례로 나누어 하루씩 번갈아 서연(書筵)에 나아가 왕 곁에서 강론할 때에, 왕이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를 보고 싶어 했으나 ‘아름다운 문구만 늘어놓는 것[抽黃對白]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대답하고 올리지 않았다.


제24절 요사스런 승려를 물리칠 것을 상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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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愍王十、五年에妖僧、遍照가髮을長ᄒᆞ야頭陀가되야名을辛旽이라ᄒᆞ다旽이王의寵을怙ᄒᆞ고肆虐ᄒᆞ야世家、大族을誅殺ᄒᆞ되敢言ᄒᆞᄂᆞᆫ者ㅣ無ᄒᆞᆫ지라右正言李存吾가旽의罪ᄅᆞᆯ極言ᄒᆞᆯ새獨히鄭樞가從ᄒᆞ야上疏ᄒᆞ니

공민왕(恭愍王) 15년(1366)에 요사스런 승려 편조(遍照)가 머리를 길게 한 수도승[頭陀]이 되어 이름을 신돈(辛旽)이라고 하였다. 신돈이 왕의 총애를 믿고서는 제멋대로 험악하게 굴며 세가 대족(世家大族)을 살해해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우정언(右正言) 이존오(李存吾)가 신돈의 죄를 극언할 때에 정추(鄭樞)만이 홀로 따라서 상소하였다.


李存吾와鄭樞가大叱妖僧ᄒᆞ고極諫ᄒᆞᄂᆞᆫ圖
이존오와 정추가 요사스런 승려를 꾸짖고 지극히 간언하는 그림

제25절 당황해서 평상에서 내려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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疏에曰旽을必敬、必用ᄒᆞ여야災害가無ᄒᆞ고國家ㅣ平康ᄒᆞᆯ진댄其頭ᄅᆞᆯ髠ᄒᆞ며服을緇ᄒᆞ고官을削ᄒᆞ며權을抑ᄒᆞ야寺院에置ᄒᆞᆫ然後에야民志가定ᄒᆞ고國難이紓ᄒᆞ리이다疏、上에王이大怒ᄒᆞ야面責ᄒᆞᆯ새旽이王으로더부러牀을對ᄒᆞ얏거ᄂᆞᆯ存吾가大叱ᄒᆞ니旽이惶駭ᄒᆞ야牀에下ᄒᆞᆷ을不覺ᄒᆞ니라

상소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신돈(辛旽)을 공경하고 등용해야 재해가 없어지고 국가가 평안해진다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게 하며 관직을 삭탈하고 권한을 억제하여 사원에 두신 연후에야 비로소 백성의 뜻이 안정되고 국난이 해결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소를 올리니 왕이 크게 화를 내어 면전에서 꾸짖었다. 그때 신돈이 왕과 함께 평상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이존오(李存吾)가 크게 질책하니 신돈이 당황하여 자기도 모르게 평상에서 내려왔다.


제26절 성리학이 처음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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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七年에大司成、李穡이博士鄭夢周로더부러金九容과朴尙忠과朴宜中과李崇仁의等을擇ᄒᆞ야敎官과敎授ᄅᆞᆯ兼ᄒᆞ니性理의學이始興ᄒᆞ니라

공민왕(恭愍王) 17년(1368)에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이 박사(博士)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김구용(金九容),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등을 선발하여 교관(敎官)과 교수(敎授)를 겸하게 하니, 성리학이 처음 일어났다.


제27절 도읍에서 효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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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年七月에辛旽이伏誅ᄒᆞ다時에旽이威福을恣行ᄒᆞ니王도ᄯᅩᄒᆞᆫ自安치못ᄒᆞ더라王의性이猜忌ᄒᆞ야비록腹心、大臣이라도밋權勢가重ᄒᆞ면반다시誅ᄒᆞ니旽이見誅ᄒᆞᆯ가恐ᄒᆞ야不軌ᄅᆞᆯ謀ᄒᆞᆯ새其客、侍郞、李勒이王ᄭᅴ告ᄒᆞᆫᄃᆡ王이旽을水原에流ᄒᆞ얏다가誅ᄒᆞ야京師에梟首ᄒᆞ고其、二歲兒ᄅᆞᆯ幷殺ᄒᆞ다

공민왕(恭愍王) 20년(1371) 7월에 신돈(辛旽)이 형벌을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 그때에 신돈이 위압과 복덕(福德)을 함부로 베풀어 왕 또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다. 왕의 성품이 의심이 많고 미워하여 비록 가까운 대신이라도 권세가 커지면 반드시 죽이니 신돈이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반란을 모의하였다. 그의 문객 시랑(侍郞) 이인(李韌)이 왕에게 알리자, 왕이 신돈을 수원(水原)에 유배 보냈다가 형벌을 내리어 수도[京師]에서 효수하고 그의 두 살 된 아이도 함께 죽였다.


제28절 모니노를 불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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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是에辛旽이流ᄒᆞᆯ새王이侍臣다려謂曰予가일즉辛旽家에셔一婢ᄅᆞᆯ幸ᄒᆞ야子ᄅᆞᆯ生ᄒᆞ야名은牟利奴라善히保護ᄒᆞ라ᄒᆞ더니이윽고太后、殿에召入ᄒᆞ야禑라改名ᄒᆞ고江陵府院大君을삼다

이전에 신돈(辛旽)이 유배될 때에 왕이 곁의 신하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서 한 계집종을 가까이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모니노이니 잘 보호하라.”고 하였다. 이윽고 태후전(太后殿)으로 불러들여서 우(禑)라 개명하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으로 삼았다.


제29절 아들을 원하다 피살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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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이洪倫、等으로宮禁을汚穢ᄒᆞ야有子ᄒᆞᆷ을冀ᄒᆞ더니宦者、崔萬生이益妃의有身ᄒᆞᆷ이倫의合ᄒᆞᆫ바ㅣ라ᄒᆞᆫᄃᆡ王이倫을殺ᄒᆞ야滅口코자ᄒᆞ니萬生이自己도不免ᄒᆞᆯ가ᄒᆞ야倫으로더부러王을弑ᄒᆞ거ᄂᆞᆯ王妃가萬生、等을誅ᄒᆞ고禑ᄅᆞᆯ立ᄒᆞ다

왕이 홍륜(洪倫) 등으로 궁궐을 더럽혀서 아들이 생기기를 원하였는데, 환관 최만생(崔萬生)이, “익비(益妃)의 임신은 홍륜과의 불륜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홍륜을 죽여서 입을 막고자 하니 최만생이 자기도 죽음을 면치 못할까 하여 홍륜과 함께 왕을 시해하였다. 왕비가 홍만생 등을 죽이고 우(禑)를 왕위에 세웠다.


제30절 얼굴에 화살을 쏘아 적을 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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僞主、禑六年에倭寇가雲峯縣을焚ᄒᆞ고北上ᄒᆞᆫ다聲言ᄒᆞ니中外大震ᄒᆞᄂᆞᆫ지라禑가我 太祖高皇帝로써三南、都巡察使ᄅᆞᆯ拜ᄒᆞ야往勦ᄒᆞᆯᄉᆡ險徑에入ᄒᆞ사五十餘人의面을射殺ᄒᆞ시고三戰、皆捷ᄒᆞ시니賊이據險、自固ᄒᆞᄂᆞᆫ지라

가짜 왕 우(禑) 6년(1380)에 왜구가 운봉현(雲峰縣)을 불태우고 북상한다는 소식이 있으니 안팎이 크게 놀랐다. 우[왕]가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를 삼남도 순찰사(三南都巡察使)에 임명하여 가서 소탕하게 하였다. 그때 험한 길에 들어서 적 50여 명의 얼굴에 화살을 쏘아 죽이고 3번 싸워서 모두 크게 승리하니 적이 험준한 산에 웅거하여 스스로 방비하였다.


제31절 장수와 병사들이 감동하여 분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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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ᄭᅴ셔諸軍을麾ᄒᆞ야仰攻ᄒᆞ실ᄉᆡ流矢에左脚을中ᄒᆞ시되矢ᄅᆞᆯ抽ᄒᆞ시며意氣、益壯ᄒᆞ시니將士가感勵、死戰ᄒᆞ더라賊中에阿只拔都라ᄒᆞᄂᆞᆫ者ㅣ年纔、十五六이라驍勇이無比ᄒᆞ야所向、披靡ᄒᆞ니其、堅甲과銅面에射ᄒᆞᆯ隙이無ᄒᆞ더라

태조(太祖)께서 모든 군사를 이끌고 높은 곳을 향해 공격할 때에 화살이 날아와서 왼쪽 다리를 명중하였는데, 화살을 뽑으며 기상을 더욱 굳세게 하시니 장수와 병사들이 감동하고 분발하여 죽기를 각오하며 싸웠다. 적군 중에 아지발도(阿只拔都)라고 하는 자가 나이 겨우 15~16세인데 날쌔고 용맹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 그가 향하는 곳마다 병사들이 그 위력에 눌려 쓰러지니, 견고한 갑옷과 동으로 된 투구를 하고 있어 활을 맞힐 틈이 없었다.


제32절 투구에 화살을 쏘아 적을 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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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ᄭᅴ셔見ᄒᆞ시고偏將、李豆蘭과約束을定ᄒᆞ시고馬ᄅᆞᆯ躍ᄒᆞ야阿只拔都의兜ᄅᆞᆯ射ᄒᆞ시니頂子가落ᄒᆞᄂᆞᆫ지라豆蘭이곳射殺ᄒᆞ니賊이氣挫ᄒᆞ거ᄂᆞᆯ因ᄒᆞ야奮擊、大破ᄒᆞ시니殭屍、遍野ᄒᆞ고川流、盡赤ᄒᆞ며餘賊은奔去ᄒᆞ다

태조(太祖)께서 보시고 편장(偏將) 이두란(李豆蘭)과 약속을 정하고 말 위에 뛰어올라 아지발도(阿只拔都)의 투구에 화살을 쏘니 투구의 꼭지가 떨어졌다. 이에 이두란이 바로 화살을 쏘아 죽이니 적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이로 인해 힘을 다해 공격하여 크게 무찌르니 시체가 들판에 널려 있고 흐르는 냇물이 모두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으며 나머지 적들이 급히 도망하였다.


堅甲銅面ᄒᆞᆫ阿只拔都ᄅᆞᆯ射殺ᄒᆞᄂᆞᆫ圖
견고한 갑옷과 동으로 된 투구를 쓴 아지발도를 화살로 쏘아 죽이는 그림

제33절 삼한이 거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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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ᄭᅴ셔凱還ᄒᆞ시니崔瑩이百官을率ᄒᆞ고天壽寺、前에셔迎接ᄒᆞᆯᄉᆡ 太祖로더부러再拜ᄒᆞ고執手、流涕曰、三韓의再造ᄒᆞᆷ이在此一擧라ᄒᆞ더라自此로倭人이 太祖ᄅᆞᆯ畏ᄒᆞ야敢히近치못ᄒᆞ고ᄆᆡ양我人을擄ᄒᆞ면반다시問曰李萬戶가今에何在오ᄒᆞ니라

태조(太祖)께서 개선(凱旋)해서 돌아오니 최영(崔瑩)이 여러 관료를 이끌고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영접할 때에 태조와 함께 두 번 절을 하고 손을 맞잡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삼한이 거듭나는 것이 이번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왜인이 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고 매번 우리나라 사람을 포로로 잡으면 반드시 묻기를 “이 만호(李萬戶)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였다.


제34절 사모와 단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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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年에偰長壽가明、으로부터還ᄒᆞᆯᄉᆡ紗帽와團領으로써來ᄒᆞ거ᄂᆞᆯ鄭夢周와河崙等이請ᄒᆞ야胡服을革ᄒᆞ고明服을襲ᄒᆞ니一品以下가다紗帽와團領을着ᄒᆞ고品帶만有差호ᄃᆡ惟、禑와밋宦者와近幸이不服ᄒᆞ니라

우(禑)[왕] 13년(1387)에 설장수(偰長壽)가 명(明)나라【지나(支那)】로부터 돌아올 때 사모와 단령을 가져왔는데, 정몽주(鄭夢周)와 하륜(河崙) 등이 요청하여 오랑캐 복장을 없애고 명나라 복장을 본받기를 청하였다. 1품 이하가 모두 사모와 단령을 착용하고 품대만 차등이 있도록 하니, 오직 우[왕]과 몇몇 벼슬아치와 측근만이 따르지 않았다.


제35절 군사를 출정할 수 없는 4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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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年、夏四月에禑가我 太祖와崔瑩을召ᄒᆞ야曰今에遼陽을欲攻ᄒᆞ노라 太祖曰出師가四不可가有ᄒᆞ니以小、攻大가一、不可오夏月、發兵이二、不可오擧國、遠征ᄒᆞ면倭人이我、虛ᄅᆞᆯ乘ᄒᆞ리니三、不可오今에暑雨ᄅᆞᆯ當ᄒᆞ야弓弩가膠解ᄒᆞ고大軍이疾疫ᄒᆞ리니四、不可ㅣ니이다禑ㅣ、不聽ᄒᆞ다

우(禑)[왕] 14년(1388) 여름 4월에 우[왕]이 우리 태조(太祖)와 최영(崔瑩)을 불러서 말하기를, “요양(遼陽)【명(明)나라】을 공격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대답하기를, “군사를 출정할 수 없는 4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할 수 없는 것’이 첫째이고, ‘여름에 병사를 일으킬 수 없는 것’이 두 번째이고, ‘온 나라가 먼 곳으로 전쟁을 떠나게 되면 왜인이 우리가 비어 있는 틈을 이용할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이고, ‘지금 덥고 비를 맞아서 활과 쇠뇌의 아교가 녹아 풀리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 불가(不可)한 이유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우[왕]이 듣지 않았다.


제36절 이로움과 해로움을 극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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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ᄭᅴ셔退ᄒᆞ샤涕泣曰、生民의禍가自此로始ᄒᆞᄀᆡᆺ다ᄒᆞ시고威化島鴨綠江、西에進屯ᄒᆞ시고禑에게上言ᄒᆞ시고ᄯᅩ崔瑩에게貽書ᄒᆞ야攻、遼의不便ᄒᆞᆷ과利害ᄅᆞᆯ極言ᄒᆞ시되皆不聽ᄒᆞᄂᆞᆫ지라

태조(太祖)께서 물러나 눈물을 흘리면서, “백성의 화가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라고 하시고 위화도(威化島)【압록강(鴨綠江) 서쪽】에 주둔해 있으면서 우(禑)[왕]에게 글을 올렸다. 또한 최영(崔瑩)에게 글을 남겨서 요동(遼東) 공격이 옳지 않은 것과 이로움과 해로움을 극언하였으나 모두 듣지 않았다.


제37절 직접 화복을 진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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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ᄭᅴ셔드ᄃᆡ여諸將을諭ᄒᆞ사曰今에만일遼東을攻ᄒᆞ면生民의禍가立至ᄒᆞᄀᆡᆺ거ᄂᆞᆯ王이不省ᄒᆞ고瑩도ᄯᅩ老耋ᄒᆞ야存亡을不恤ᄒᆞ니今에公等과갓치上을入見ᄒᆞ고禍福을親陳ᄒᆞ고君側의惡을除ᄒᆞ야生靈을奠安케ᄒᆞᆷ이何如오ᄒᆞ신ᄃᆡ諸將이皆從ᄒᆞ거ᄂᆞᆯ

태조(太祖)께서 드디어 여러 장수를 설득하면서, “지금 만일 요동(遼東)을 공격하면 백성에게 재앙이 미칠 것이다. 왕은 살피지 않고 최영(崔瑩) 또한 늙고 혼미하여 존망(存亡)을 근심하지 않는다. 지금 자네들과 같이 왕을 만나 뵙고 화복을 직접 진언하고 왕 곁의 간악한 신하들을 제거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하니, 여러 장수가 모두 따랐다.


제38절 군사를 돌려 강을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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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回軍ᄒᆞ야鴨綠江을渡ᄒᆞᆯ새 太祖ᄭᅴ셔先渡ᄒᆞ사白馬에白羽箭과彤弓을執ᄒᆞ시고岸上에立ᄒᆞ사軍士의畢渡ᄅᆞᆯ待ᄒᆞ실새軍中이望見ᄒᆞ고相謂曰、古往今來에如此ᄒᆞᆫ人이安有ᄒᆞ리오ᄒᆞ더라

이에 군사를 돌려서 압록강(鴨綠江)을 건널 때에 태조(太祖)께서 먼저 강을 건너 백마를 타고 흰 깃을 단 화살과 붉은 칠을 한 활을 집어들고 바위 위에 서서 군사가 모두 건너기를 기다렸다. 이때에 군사들 사이에서 태조를 우러러 보며, “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분이 어찌 있었겠는가?”라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제39절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최영을 유배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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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에至ᄒᆞ사瑩의手ᄅᆞᆯ執ᄒᆞ시고曰如此事變은我의本心이아니라然이나攻遼ᄒᆞᄂᆞᆫ事ᄂᆞᆫ國家、興亡이係ᄒᆞᆫ고로不得已ᄒᆞᆷ이니好去好去ᄒᆞ라ᄒᆞ시며相對、泣下ᄒᆞ시고드ᄃᆡ여瑩을高峯縣今、高에流ᄒᆞ니時에明이擧兵코자ᄒᆞ다가還軍ᄒᆞᆷ을聞ᄒᆞ고乃止ᄒᆞ니라

수도에 이르러서 최영(崔瑩)의 손을 붙잡고 말하기를, “이와 같은 변란은 나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일은 국가의 흥망과 연결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으니, 잘 가시오, 잘 가시오.”라고 하셨다. 마주 보며 눈물을 흘리시고는 마침내 최영을 고봉현(高峯縣)【지금의 고양(高陽)】으로 유배 보냈다. 그때에 명(明)나라가 군사를 일으키려다가 군사를 되돌렸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그만두었다.


제40절 우[왕]을 쫓아내고 창[왕]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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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ᄭᅴ셔王氏의後ᄅᆞᆯ擇立코자ᄒᆞ시니曹敏修가不聽ᄒᆞ고禑ᄅᆞᆯ江華에放ᄒᆞ고禑의子昌을立ᄒᆞ다時에趙仁沃이交章ᄒᆞ야瑩의罪ᄅᆞᆯ請正ᄒᆞᆫᄃᆡ昌이從ᄒᆞ야瑩을斬ᄒᆞ다

태조(太祖)께서 왕씨(王氏)의 후손을 택하여 왕위에 세우고자 하시니 조민수(曺敏修)가 듣지 않고, 우[왕]을 강화(江華)로 추방하고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위에 세웠다. 그때에 조인옥(趙仁沃)이 글을 올려 최영(崔瑩)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요청하니, 창[왕]이 이를 따라서 최영의 목을 베었다.


제41절 논의하여 공양왕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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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ᄭᅴ셔沈德符와鄭道傳等으로더부러議ᄒᆞ야禑와昌이王氏가아니니宗社ᄅᆞᆯ奉ᄒᆞᆷ이不可ᄒᆞ다ᄒᆞ고禑ᄅᆞᆯ江陵에遷ᄒᆞ고昌을江華에放ᄒᆞ고定昌君瑤、ᄅᆞᆯ立ᄒᆞ니是가恭讓王이니라

태조(太祖)께서 심덕부(沈德符),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논의하여 우(禑)[왕]과 창(昌)[왕]이 왕씨(王氏)가 아니니 종사(宗社)를 받드는 것이 옳지 않다 하며, 우[왕]을 강릉(江陵)으로 옮기고 창[왕]을 강화(江華)로 추방하고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왕위에 세우니 그가 바로 공양왕이다.


제42절 대간이 한쪽 편드는 것을 논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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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讓王、元年에臺諫에李穡과曹敏修와李崇仁、等이禑昌을右袒ᄒᆞᆫ罪ᄅᆞᆯ論ᄒᆞ야敏修ᄂᆞᆫ廢ᄒᆞ야庶人을삼고穡과崇仁을流ᄒᆞ며使ᄅᆞᆯ遣ᄒᆞ야禑昌、父子ᄅᆞᆯ誅ᄒᆞ다

공양왕(恭讓王) 원년(1389)에 대간이 이색(李穡), 조민수(曺敏修), 이숭인(李崇仁) 등이 우(禑)[왕]과 창(昌)[왕]을 편든 죄를 논의하였다. 조민수는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이색과 이숭인은 유배를 보냈으며, 사신을 보내 우[왕]과 창[왕] 부자를 처형하였다.


제43절 어머니가 늙으니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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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下注書、吉再ᄂᆞᆫ海平人이라少時에理學을治ᄒᆞ야鄭夢周ᄅᆞᆯ師ᄒᆞ고廢王、禑、時에登第ᄒᆞ야注書가되얏더니至是ᄒᆞ야國家ㅣ將亡ᄒᆞᆷ을知ᄒᆞ고母의老ᄒᆞᆷ으로辭ᄒᆞ고善山으로歸ᄒᆞ다

문하주서(門下注書) 길재(吉再)는 해평(海平) 사람이다. 어릴 적에 성리학(性理學)을 배워서 정몽주(鄭夢周)를 스승으로 삼고, 폐위된 우(禑)[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주서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서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어머니가 늙었다는 것을 이유로 사직하고 선산(善山)으로 돌아갔다.


제44절 충효의 큰 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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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年、夏四月에趙英珪가侍中、鄭夢周ᄅᆞᆯ殺ᄒᆞ다夢周의爲人이豪邁、絶倫ᄒᆞ고忠孝、大節이有ᄒᆞ며自少로好學ᄒᆞ야性命의奧ᄅᆞᆯ深得ᄒᆞ고大事ᄅᆞᆯ處ᄒᆞ며大疑ᄅᆞᆯ決ᄒᆞᆷᄋᆡ聲色을不動ᄒᆞ야王佐의才라稱ᄒᆞ더라

공양왕(恭讓王) 4년(1492) 여름 4월에 조영규(趙英珪)가 시중(侍中) 정몽주(鄭夢周)를 죽였다. 정몽주의 사람 됨됨이가 호탕하고 매우 뛰어났으며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성명(性命)의 심오한 뜻을 탐구하여 깨달았으며, 큰 일을 처리하고 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말소리와 얼굴색이 전혀 동요하지 않아서 왕을 보필할 인재라는 말을 들었다.


忠孝大節圃隱鄭夢周의像
충효의 큰 절개가 있는 포은(圃隱) 정몽주의 상

제45절 선죽교의 핏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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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로五部의學堂을셰우고外로鄕校에儒術을興起ᄒᆞ며恒常나라의衰ᄒᆞᆷ을見ᄒᆞ고淚ᄅᆞᆯ흘니더니至是ᄒᆞ야英珪에게被殺ᄒᆞ니그被害ᄒᆞᆫ善竹橋돌우에血痕이至今ᄭᅡ지잇나니라 我朝에셔諡ᄅᆞᆯ文忠이라ᄒᆞ고文廟에從祀ᄒᆞ니라

정몽주(鄭夢周)가 안으로는 5부의 학당(學堂)을 세우고 밖으로는 향교(鄕校)를 설립하여 유학을 일으켰으며, 항상 나라가 쇠락해 지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이때에 와서 조영규(趙英珪)에게 살해당했는데, 그가 죽음을 당한 선죽교 돌 위에 지금까지도 핏자국이 남아 있다. 우리 조정에서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하고 문묘(文廟)에 제사를 지냈다.


제46절 천명이 속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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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 太祖의威德이日盛ᄒᆞ야衆心이推戴ᄒᆞ야揚言曰天命、人心의所屬이有ᄒᆞ거ᄂᆞᆯ何、不勸進ᄒᆞᄂᆞ뇨ᄒᆞ고十二月、辛卯에右侍中、裴克廉、等이王大妃ᄭᅴ白ᄒᆞ고妃의敎로써王을廢ᄒᆞ야恭讓君을封ᄒᆞ야原州에放ᄒᆞ얏더니後、三年에薨ᄒᆞ거ᄂᆞᆯ 太祖ᄭᅴ셔卽位ᄒᆞ신後에王을追封ᄒᆞ시다高麗、太祖、開國ᄒᆞᆷ으로부터王에게至ᄒᆞ기ᄭᅡ지凡三十四王이오歷年이四百七十五年이러라

우리 태조(太祖)의 위엄과 덕이 날로 성하여 민심이 추대하여 소리 높여 말하기를, “천명과 인심(人心)의 속한 바가 있는데 어찌 나아가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12일 신묘(辛卯)에 우시중(右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께 아뢰고, 왕대비의 교서(敎書)로 왕을 폐위시켜 공양군(恭讓君)에 봉하고는 원주(原州)로 추방하였는데 3년 후에 죽었다[薨]. 태조께서 즉위하신 후에 왕을 추봉(追封)하였다. 고려(高麗) 태조가 개국한 이후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34왕이며 왕업을 이어 온 지 475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