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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칠단의 비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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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봉천의 깊은 밤

중국의 봉천! 중국 사람들의 그 시끄럽고 요란하던 복잡한 거리도 밤이 들어서 지금은 깊은 산 속같이 컴컴하고 공동묘지같이 고요하였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깊숙하고 충충스런 중국 사람들의 길가 상점집이 지금은 무서운 마귀의 집같이 컴컴한 땅 위에 무슨 엉큼한 물건을 품고 엎드린 것 같이 흉악해 보였습니다. 그 지옥같이 컴컴한 길로 꾸물꾸물 움직여 걷고 있는 이상한 검은 그림자 두 개! 수군수군 이리 흘깃 저리 흘깃 연하여 사면을 휘휘 들러보면서 느릿느릿 나아가는 검은 그림자 두 개……. 그것은 상호와 한기호였습니다.

벌써 봉천에 온 지도 사흘째나 되건마는 원래 처음 와 보는 곳이라, 만나는 사람마다 중국 사람뿐인데 그 큰 목소리로 쌈 싸우듯 왁자지껄 하게 던지는 소리가 한마디 알아듣기는커녕 귀가 시끄러워 정신이 어리둥절할 지경이므로 마음대로 활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는 길로 그 비밀 편지에 적혀 있던 ‘전중여관’ 이란 곳에 찾아가서, 시치미 뚝 떼고, 방 하나를 치우고 있으면서 아무리 눈치를 보았으나, 곡마단 단장이 이곳에 오는 법도 없고 이 집주인이 출입할 때마다 뒤를 따라 보아도 수상한 것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대체 이놈들이 봉천으로 아니 오고, 아마 중도에서 어디로 딴 데로 가버리지나 않을까?’

생각할 때에 상호는 눈이 캄캄하였습니다. 공연히 허방을 짚고 이렇게 먼 곳에까지 왔으니 곡마단 일행이 이곳에 와 있지 않고 딴 데로 갔으면, 이 넓은 중국 땅에서 어디로 간 줄 알고 순자를 찾으러 간단 말인가……. 만사는 다 어그러졌고 불쌍한 순자와는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상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하였습니다. 옆에 있는 기호 역시,

‘일이 다 틀어졌구나!’

하고 속으로는 낙심하였으나, 상호가 자꾸 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딱하여,

“낙심하지 맙시다. 여기까지 와서 낙심하면 될 수가 있겠소? 여기서 며칠 기다려 보면, 그래도 무슨 눈치가 있겠지요.”

하고 위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날 저녁 때 일이었습니다. 상호와 기호가 여관 이층에서 저녁밥을 먹고 마루 난간에 나와서 섰노라니까, 아래층 주인의 방에 어저께도 왔었던 절름발이 늙은 신사가 또 찾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머리와 수염이 허옇게 센 점잖은 노신사인데, 한편 다리가 고무다리인지 굵다란 단장을 짚고 절름절름하면서 지팡이로 지탱하여, 걸음을 걷는 모양이었습니다.

상호는 늙은이거나 누구거나 이 집주인과 상종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주의하여 살펴보아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변소에 가는 체하고 일부러 내려가서 주인 방 옆을 지나면서 이야기하는 말소리를 주의해 들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창 밖에 가깝게 가자 이때까지 젊은 사람같이 기운 찬 소리로 이야기하던 것이 뚝 그치고, 밖에 발자취 소리가 멀리 지나가 버리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습니다.

‘옳지, 무언지 비밀한 의논인가 보구나.’

생각하고, 상호는 하는 수 없이 그냥 지나 변소에 다녀서 다시 그 방 옆을 가깝게 스쳐 지났습니다. 말소리는 여전히 아까와 같이 또 뚝 그쳤습니다.

‘옳지, 분명히 비밀한 이야기다!’

하고, 상호는 이층으로 올라와서 기호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하면, 그 늙은 절름발이 신사가 누구인 줄을 알아낼 수가 있을까?’

하고, 궁리궁리하였습니다. 심부름하는 계집 하인을 불러 물어 보니까,

“가끔 놀러 오시는 바둑 잘 두는 노인이여요.”

할 뿐이었습니다. 바둑 두는 늙은이면 이야기를 그렇게 비밀히 할 리 없을 터인데 하고, 상호는 도리어 더 이상히 생각하였습니다. 안타깝게 머리를 썩이고 섰던 상호는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아까 그 계집 하인을 불러서 돈 50전을 먼저 주고,

“이따가 그 늙은이가 주인의 방에서 나오거든 그때 얼른 차를 뜨겁게 끓여서 찻잔에 담아, 그 늙은이를 갖다가 대접해 주게.”

하였습니다.

하인은 별로 의심하지도 않고 돈 50전만 감사하면서 그리 하마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후 두 시간이나 지나서 밤이 몹시 깊은 때에 절름발이 늙은 신사는 주인의 방에서 지팡이를 짚고 거추장스럽게 절름거리면서 나왔습니다.

계집 하인이 분주히 펄펄 끓는 차를 담아 들고 쫓아가서 구두를 신으려고 허리를 억지로 구부린 그에게 대접하였습니다.

그때 분주히 상호가 뛰어 내려가서 급한 일이나 있는 듯 후닥닥 뛰어 나가 신발을 신는 체하다가 계집 하인에게로 쓰러지는 것처럼 하면서 차를 들고서 있는 팔을 쳤습니다.

“에그머니!”

하면서, 계집 하인이 들었던 찻잔을 떨어뜨리자, 그 뜨거운 차가 절름발이 늙은 신사의 양발 신은 발에 쏟아졌습니다.

“아, 앗, 뜨거!”

하고, 일본말로 소리치면서, 늙은 신사는 벌떡 일어서면서, 한 발로 딛고 한 발을 들어 흔들면서, 쩔쩔 매었습니다. 그런데 차에 덴 발은 성하던 발이고, 버티고 섰던 발은 절름발이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하고, 상호는 굽실굽실 사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곧 도로 이층으로 올라와서,

“여보, 기호 씨. 들어맞았소. 그 놈이 분명히 곡마단 단장 녀석이오.”

천만 뜻밖에 그 늙은이가 곡마단 단장이라는 말에, 한기호는 어떻게 반가운지, 전기에 찔린 사람 같이 뛰어 달려들었습니다.

“내가 일부러 그 놈의 발에 더운 차를 엎지른 것은 그놈이 정말 다리 병신인가 가짜 병신인가, 그것을 알려고 그랬소. 그래 엎질러 놓고 그 놈의 발과 얼굴을 주목해 보았더니, 절름거리던 발을 힘 있게 버티고 섰던 것을 보니까, 거짓말 가짜 절름발이입니다. 그리고 ‘아, 뜨거!’ 하는 소리가 늙은이 소리가 아니고 아주 기운찬 젊은 소리입디다. 그때 얼굴을 보니까 모두 곡마단 단장인 데 남의 눈을 속이고 넌지시 이 집주인과 만나느라고 그렇게 능청스럽게 절름발이 행세를 하는 모양이오. 자, 어서 일어나시오. 그 놈의 뒤를 쫓아갑시다.”

두 사람은 몸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번개 같이 뛰어 여관 문을 나서서 여전히 컴컴한 길로 절름절름 걸어가는 흉악한 곡마단 단장 놈의 뒤를 따라섰습니다. 그래 지금 이 컴컴한 마귀의 세상 같은 어두운 거리로 수군수군하면서 움직여 걷는 두 그림자의 저 앞에는 또 하나 검은 그림자가 절름절름 걷고 있었습니다.

“저 놈이 우리가 이렇게 조선에서 여기까지 쫓아와서 지금 저의 뒤를 밟아 가는 줄 알까 모를까?”

“글쎄, 알기만 하면 화닥닥 돌아서서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지…….”

“이 바닥에 저놈의 부하가 어디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지 모르니까 위험하오.”

두 사람은 수군수군 가슴을 조이면서 따라갑니다. 한참이나 가다가 기호가 별안간,

“에쿠.”

하고, 상호의 팔을 꽉 붙잡고, 뒤로 주춤하였습니다. 상호도 깜짝 놀라 주춤하고 서서 보니까, 큰일 났습니다. 앞에 가던 단장 놈이 별안간 우뚝 서더니, 휙 돌아서서 두 사람에게로 걸어옵니다.

두 사람은 머리끝까지 오싹하였습니다.

《어린이》 5권 2호 (1927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