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칠단의 비밀/8
8. 뜻밖에 뜻밖에
거리에서 헤매인 눈물의 하룻밤이 어느덧 밝아서 새벽이 되었습니다. 설움과 불안에 떨면서 거리에서 밤을 새인 상호는 그때야 탑골공원 뒤 조선여관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여관이라고 들어는 갔으나, 별루 쉬지도 못하고 세수를 속히 마치고 조반상을 받으니 혀도 깔깔하거니와 마음이 조용치 못하여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 술도 못 뜨고 밥상을 도로 내보내고 방문을 꼭꼭 닫고 상호는 거울 앞에 앉더니 얼굴을 변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눈 가장자리에는 푸른 칠을 하고, 코 밑에 조그만 수염을 붙이고(이러한 일은 곡마단에서 날마다 하는 짓이어서, 아주 졸업생이었습니다) 모자를 눌러 쓰고, 다시 여관문을 나설 때는, 여관 하인이 보고도 아까 처음 들어오던 손님인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상호는 여관에서 나오는 길로 곧 상점을 찾아가서 뿔테 안경을 아무 것이나 손에 집히는 대로 사서 쓰고 또 지팡이 하나를 사서 짚었습니다. 이제는 아무가 보아도 얼른 보고는 상호인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는 대담스럽게도 구리개 네거리 명치정의 포막집 터 근처로 갔습니다. 포막 집은 물론 다 헐어서 짐짝으로 묶어 놓았으니, 저놈들이 오늘 아침에 서울
을 떠나고 안 떠나는 것은 여기서 짐짝을 가져가고 안 가져가는 것을 보면 알리라 생각한 까닭이요, 또 한 가지는 혹시 저들이 떠날 때에 순자를 데리고 이곳을 들러 가기도 쉽거니, 하는 까닭이었습니다.
아직 8시도 전이건마는 포막집 헐은 터에는 곡마단 밑의 측, 여러 사람이 꾸물꾸물 묶다가 남은 짐을 묶고 있는 모양이 오늘 곧 떠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그리 바쁘지 않은 것도 같았습니다.
상호는 그것들이 모두 아는 사람들이라, 저것은 누구, 저것은 누구, 속으로 부르면서,
‘저 사람들도 나를 보고 알지 못할 것이다.’
하고 그 근처로 어슬어슬 돌아다니면서 순자가 그곳에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서성거린 지 한 시간쯤이나 지났을까? 너무 지리하여 입맛만 쩝쩝 다시면서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때, 그때 언뜻 상호는 발을 멈추고 허리를 굽히고 눈을 노려 포막집 터 저편 골목 구석을 쏘아보았습니다.
‘오오! 그 노인이다. 그 노인이다!’
입 속으로 부르짖으면서 상호는 급히 골목을 돌아 그리로 갔습니다. 옷은 깨끗지 못하여도 인자하고 다정해 보이는 조선 노인! 오오, 분명히 꿈에라도 만나고저 하던 외삼촌 그 노인이었습니다.
반가운 김에 와락 달려들어 노인의 팔을 붙잡고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였으나 조선말을 하지 못하는 갑갑한 설움! 아무 말 없이 얼굴만 쳐다볼 때에 눈물만 두 눈에 핑 고였습니다.
노인은 상호와 순자를 다시 한 번 잠깐이라도 만나려고 여기까지 오기는 왔으나, 그놈의 주인 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이 구석에 숨어 서서 기다리는 판에 누구인지 팔을 붙잡으므로 깜짝 놀라 가슴이 성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상호인 줄은 모르고 누구인지를 몰라 겁만 내었으나,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겁나던 것만은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래 노인은 함께 데리고 온 열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학생 한 사람을 불러서 사이에 세웠습니다. 그 학생은 노인이 통역시키려고 데리고 온 노인의 동네집의 학생이었습니다.
“당신이 누구요?”
“제가 상호올시다. 수염은 일부러 붙인 것입니다. 저놈들을 속이려고요.”
“오오, 그럼 여기 섰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서 이야기하자! 순자는 어디 있니?”
“아녀요. 멀리 가면 안 됩니다. 순자가 혹시 이 근처에 올런지 모르니까요. 여기서 이렇게 숨어 서서 이야기를 하지요.”
하고, 상호는 어저께 들켜서 매 맞은 이야기와 여관방에 갇히게 된 것과 주인 단장이 열흘이나 더 할 돈벌이를 중지하고 오늘 중국으로 가려고 저렇게 짐을 싼 이야기와 어젯밤에 둘이 도망하려다가 들켜서, 저 혼자만 간신히 도망해 나온 이야기를 모조리 하였습니다.
노인은 눈물이 글썽글썽하여,
“아, 그럼 순자를 구할 일이 급하구나! 인제 순자만 구해 내 오면 그만 아니냐? 여기서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여관으로라도 가서 속히 구해 내올 도리를 생각하자.”
“글쎄요, 아무리 생각해도 별 꾀가 없습니다. 하도 엄중히 지키고 있으니까요.”
암만 이야기해도 좋은 의견은 나오지 않고 가슴만 무엇에 쫓기는 것 같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럴 것 없이 다른 사람이 손님처럼 꾸미고 우선 그 여관에 들어가서 방을 하나 잡고 있으면서 순자의 동정을 살펴보게 하면 어떻겠느냐? 그러다가 여차하면 얼른 업고 도망해 나오게.”
이런 말씀을 할 때, 상호는 별안간에 노인의 팔을 꽉 붙잡고,
“쉬!”
하고, 말을 막았습니다.
그리고는 큰일이나 난 듯이,
“저기, 저기!”
하고, 가는 소리로 속살거리면서 포막 터 건너 한길을 가리켰습니다. 노인과 학생도 그곳을 바라보고 눈이 둥그레졌습니다.
《어린이》 4권 6호 (1926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