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제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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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제일과(第一課)[편집]

정거장에서 들어오자면 영정(榮町)으로 갈려 드는 세거리 바른편 귀퉁이에 있는 제중당(濟衆堂)이라는 양약국이다.

차려 놓은 품새야 대처면 아무 데고 흔히 있는 평범한 양약국이요, 규모도 그다지 크지는 못하다. 그러나 제중당이라는 간판은, 주인이요 약제사요 촌사람의 웬만한 병론(病論)이면 척척 의사질까지 해내는, 박제호(朴濟浩)의 그 말대가리같이 기다란 얼굴과, 삼십부터 대머리가 훌러덩 벗겨져서 가뜩이나 긴 얼굴을 겁나게 더 길어 보이게 하는 대머리와, 데데데데하기는 해도 입담이 좋은 구변과, 그 데데거리는 말끝마다 빠트리지 않는 군가락 '제기할 것!' 소리와, 팥을 가지고 앉아서라도 콩이라고 남을 삶아 넘기는 떡심과……

이러한 것들로 더불어 십 년 이짝 이 군산바닥에는 사람의 얼굴로 치면 마치 큼직한 점이 박혔다든가, 핼끔한 애꾸눈이라든가처럼 특수하게 인상이 박히고 선전이 되고 한, 만만찮은 가게다.

가게에는 지금 제호의 기다란 얼굴은 보이지 않고, 초봉이가 혼자 테이블을 타고 앉아서 낡은 부인잡지를 들여다보고 있다.

초봉이는 시방 집안일이 마음에 걸려 진득이 있을 수가 없다. 종시 돈이 변통되지 못하면 어찌하나 싶어 초조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잊고 앉아 절로 시간이 가게 하느라고 잡지의 소설 한 대문을 읽는 시늉은 하나 마음대로 정신이 쏠려지지는 않았다.

기둥에 걸린 둥근 괘종이 네시를 친다. 벌써 네신가 싶어 고개를 쳐들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데, 마침 헙수룩하게 생긴 촌사람 하나가 철 이른 대팻밥모자를 벗으면서 끼웃이 들어선다.

"어서 오십시오."

초봉이는 사뿐 일어서서 진열장 뒤로 다가 나온다. 가게 사람이 손님을 맞이하는 여느 인사지만 말소리가 하도 사근사근하면서도 뒤끝이 자지러질 듯 무령하게 사그러지는 그의 말소리가, 약 사러 들어선 촌사람의 주의를 끌어 더욱 어릿거리게 한다.

초봉이의 그처럼 끝이 힘없이 스러지는 연삽한 말소리와 그리고 귀가 너무 작은 것을, 그의 부친 정주사는 그것이 단명(短命)할 상이라고 늘 혀를 차곤 한다.

말소리가 그럴 뿐 아니라 얼굴 생김새도 복성스러운 구석이 없고 청초하기만 한 것이 어디라 없이 불안스럽다.

티끌 없이 해맑은 바탕에 오뚝 날이 선 코가 우선 눈에 뜨인다. 갸름한 하장이 아래로 좁아 내려가다가 급하다 할 만치 빨랐다.

눈은 둥근 눈이지만 눈초리가 째지다가 남은 것이 있어 길어 보이고, 거기에 무엇인지 비밀이 잠긴 것 같다.

윤곽과 바탕이 이러니 자연 선도 가늘어서 들국화답게 초초하다. 그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웬일인지 위태위태하여 부지중 안타까운 마음이 나게 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자면 청승스런 얼굴이나 그런 흠을 많이 가려 주는 것이 그의 입과 턱이다.

조그맣게 그려진 입이, 오긋하니 동근 주걱턱과 아울러 그저 볼 때도 볼 때지만 무심코 해죽이 웃을 적이면 아담스런 교태가 아낌없이 드러난다.

그는 의복이야 노상 헙수룩한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받쳐 입고 다니지만, 나이가 그럴 나이라 굵지 않은 몸집이 얼굴과 한가지로 알맞게 살이 오르고 피어나, 미상불 화장품 장사까지 겸하는 양약국에는 마침 좋은 간판감이다.

올 이월, 초봉이가 이 가게에 나와 있으면서부터 보통 약도 약이려니와 젊은 서방님네가 사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면서 항용 살 수 있는 화장품이며, 인단, 카올, 이런 것은 전보다 삼곱 사곱이나 더 팔렸다.

주인 제호는 그러한 제 이문이 있기 때문에 초봉이를 소중하게 다루기도 하려니와 또 고향이 같은 서천이요, 교분까지 있는 친구 정영배―---정주사의 자녀라는 체면으로라도 함부로 할 수는 없는 처지다.

그러나, 그런 관계나 저런 타산 말고라도 이쁘게 생긴 초봉이를 제호는 이뻐한다.

일곱 살 먹은 어린아이가 다리를 삐었다고, 마치 병원에 온 것처럼이나 병론을 하는 촌사람한테 이십 전짜리 옥도정기 한 병을 팔고 나니 가게는 다시 빈다. 늘 두고 보아도 장날이 아니면, 바로 세시 요맘 때면 언제든지 손님의 발이 뜬다.

초봉이는 도로 테이블 앞으로 가서 잡지장을 뒤지기도 내키지 않고 해서, 뒤 약장에 등을 기대고 우두커니 바깥을 내다본다.

그는 혹시 모친이 올까 하고 아침에 가게에 나오던 길로 기다렸고, 지금도 기다린다. 아침을 못 해먹었으니, 그새라도 혹시 양식이 생겨서 밥을 해먹었으면, 알뜰한 모친이라 점심을 내오는 체하고 벤또에다가 밥을 담아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껏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그대로 굶고 있기가 십상이다.

초봉이 제 한 입이야 시장한 깐으로 하면, 그래서 먹자고 들면, 가게에 전화도 있고 하니 매식집에서 무엇이든지 청해다가 먹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집안이 죄다 굶고 앉았는데, 저 혼자만 음식을 사먹을 생각은 염에도 나지를 않았다. 모친이 밥을 내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집에서 밥을 먹었기를 바라는 생각이다.

시름없이 섰는 동안에, 추렷한 부친의 몰골, 바느질로 허리가 굽은 모친, 배가 고파서 비실비실하는 동생들의 애처로운 꼴, 이런 것들이 자꾸만 눈앞에 얼찐거리면서 저절로 눈가가 따가워진다.

아까 옥도정기 한 병을 팔고 받은 십 전박이 두 푼이 손에 쥐어진 채 잘랑잘랑한다.

늘 집에서 밥을 굶을 때, 가게에 나와서 물건 판 돈이라도 돈을 손에 쥐어 보면 생각이 나듯이, 이 돈 이십 전이나마도 집에 보내 줄 수 있는 내 것이라면 오죽이나 좋을까 싶어, 곰곰이 손바닥이 내려다보여진다.

그는 지금 만일 계봉이든지 형주든지 동생이 배가 고파하는 얼굴로 시름없이 가게를 찾아온다면,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이 손에 쥔 이십 전을 선뜻 주어 보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나던 참이라 무심코 동생들이 혹시 가게 앞으로 지나가지나 않나 하고, 오고 가는 아이들을 유심히 본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아예 집으로 보내 주기라도 할 도리를 생각하겠지만, 그러나 소심한 초봉이로, 거기까지는 남의 것을 제 마음대로 손을 댈 기운이 나지 않았다.

길 건너편 샛골목에서 행화가 나오더니 해죽이 웃고 가게로 들어선다.

"혼자 계시능구마?…… 쥔나리는 어데 갔능기요?"

"어서 오세요. 벌써 아침 나절에 나가시더니, 여태……."

초봉이도, 손님이라기보다 동무처럼 마음을 놓고 웃는 낯으로 반겨 맞는다.

본시야 초봉이가 기생을 안다거나 사귄다거나 할 일이 있었을까마는 가게에서 일을 보자니까, 자연 그러한 여자들도 손님으로 접촉을 하게 되고, 그러는 동안에 그가 단골 손님이면 낯을 익히게 된다.

행화는, 처음 가게에 나오던 때부터 정해 놓고 며칠만큼씩 가루우유를 사가고 가끔 화장품도 사가고 전화도 빌려 쓰고 했는데, 그럴 때면 주인 제호가, 행화 행화 하면서 이야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하는 바람에 초봉이도 자연 그의 이름까지 알게 된 것이다.

초봉이는 몇몇 단골로 다니는 기생 가운데, 이 행화를 제일 좋아한다. 그것은 행화가 얼굴이 도렴직하니 코언저리로 기미가 살풋 앉은 것까지도 귀인성이 있고, 말소리가 영남 사투리로 구수한 것도 마음에 들지만, 다른 기생들처럼 생김새나 하는 짓이나가 빤질거리지 않고 숫두룸한 게 실없이 좋았다.

행화도 초봉이의 아담스러운 자태며, 말소리 그것이 바로 맘씨인 것같이 사근사근한 말소리에 마음이 끌려, 볼일을 보려 가게에 나오든지 또 가게 앞으로 지날 때라도 위정 들러서 잠시잠시 한담 같은 것을 하기를 즐겨 한다.

"우유는 누가 먹길래 늘 이렇게 사가세요?"

초봉이는 행화가 달라는 대로 가루우유를 한 통 요새 새로 온 놈으로 골라 주면서, 궁금하던 것이라 마침 생각이 난 길에 지날 말같이 물어 본다.

"예? 누구 멕이는가고?"

행화는 우유통을 받아 도로 초봉이한테 쳐들어 보이면서 장난꾼같이 웃는다.

"……우리 아들 멕이제!…… 우리 아들, 하하하하."

"아들? 아들이 있어요?" 초봉이는 기생이 아들이 있다는 것이 어쩐지 이상했으나, 되물어 놓고 생각하니, 기생이니까 되레 일찍이 아이를 둔 것이겠지야고 싶어,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와? 기생이 아들 있다니 이상해서? 하하하. 기생이길래 아들딸 낳기 더 좋지요? 서방이가 수두룩한걸, 하하하."

초봉이는 말이 그만큼 노골적으로 나가니까, 얼굴이 붉어는 지면서도 같이 따라서 웃는다.

"아갸! 어짜문 저 입하구 턱하구가 저리두 이쁘노! 다른 데도 이쁘지만…… 예? 올게(올에) 몇 살이지요?"

"스물한 살."

"아이고오! 나는 열아홉이나, 내 동갑으루 봤더니……."

"몇인데요? 스물?"

"예."

"네에! 그런데 아들을 났어?"

"하하하…… 내 깂였소. 우리 아들이 아니라, 내 동생이라요."

"동생?…… 어쩌믄!"

초봉이는 탄복을 한다. 기생이면 호화롭기나 하고 천한 것으로만 알던 초봉이는 기생에게서 그런 인정을 볼 수 있는 것이 놀라웠다. 그는 행화가 다시 한번 치어다보였다.

치어다보면서 곰곰이 생각하니, 인정이야 일반일 것이니 그렇다 하겠지만, 천한 기생이라면서 어린 몸으로 그만큼 집안을 꾸려 나간다는 것이 초봉이 자신에 비해서 사람이 장한 성싶었다.

마침 제약실에서 안으로 난 문이 열리더니, 제호의 아낙 윤희(允姬)가 나오는 것을 보고 행화는 눈을 째긋하면서 씽하니 나가 버린다.

"아직 안 오셨어?"

윤희는 가시같이 앙상한 얼굴을 기다란 모가지로 연신 기웃거리면서,

"……어디 가서 무얼 허구 여태 안 오는 거야! 사람 속상해 죽겠네!…… 자동차에 치여 죽었나? 또 기집년의 집에 가 자빠졌나?"

아무래도 한바탕 짓거리가 나고라야 말 징조다.

십 년 전 제호는 어느 제약회사에 취직을 하고 있었고, 윤희는 ××여자전문학교에 다닐 때에, 이미 처자가 있고 나이 열한 살이나 맏인 제호와 윤희는 연애가 어울려서, 제호는 본처를 이혼하고 윤희는 개업할 자금을 내놓고, 두 사람은 결혼을 했었다. 그러나 달콤하던 것은 그 돈을 밑천삼아 이 군산으로 내려와서 제중당을 시작하던 그 당시 이삼 년이었지, 시방은 윤희한테는 가시 같은 히스테리가 남았을 뿐이요, 제호는 아낙이 죽기나 했으면 제발 덕분 시원할 지경이다.

그러한 판에 초봉이가 여점원 겸 사무원으로 와서 있는 담부터는 윤희의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범사에 초봉의 일을 가지고 남편을 달달 볶아 댄다.

초봉이도 그러한 눈치를 잘 안다. 그래서 그는 털털하고도 시원스러운 제호한테는 턱 미더움이 생겨, 장차 몇 해고 약제사의 시험을 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는 날까지 붙어 있을 생각이었었고, 또 그리 할 결심이었지만, 요새 와서는 윤희로 해서 늘 불안이 생기고, 이러다가는 장래가 길지 못할 것 같아 낙심이 되기도 했다.

"그래 어디 갔는지두 몰른단 말이야?"

윤희는 제 속을 못 삭여 색색하고 섰다가 초봉이더러 볼썽사납게 소리를 지르던 것이다.

"모르겠어요. 어디 가시면 가신다구 말씀을 하셔야지요?"

초봉이는 괜한 일에 화풀이를 받기가 억울하나, 그렇다고 마주 성글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소곳하고 대답이다.

마침 그러자 전화가 때르르 하고 운다. 윤희는 괜히 질겁을 해서 놀랐다가,

"집엣전화거든 날 주어." 하면서 전화통을 떼어 드는 초봉이에게로 다가선다.

"네에, 제중당입니다."

초봉이는 들은 체도 않고 전화를 받는다.

"……"

"네?…… 네, ××은행에 계신……."

"……"

"고 태 수 씨요? 네에 네."

"××은행 고태수 아시지요?"

저편에서는 상냥하게 되물어 준다.

"네에 압니다."

초봉이는 ××은행에서 고태수라는 사람이 늘 약이며 화장품 같은 것을 전화로 주문해 가기 때문에 그, 사람이나 얼굴은 몰라도 ××은행에 다니는 고태수라는 성명은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저편의 태수는 전화로 주문해 가기도 하지만, 대개는 제가 가게에 와서 사간 적이 많았기 때문에, 그것만 여겨 '실물'인 고태수를 아느냐고 물은 것이요, 안다니까 역시 그 실물인 고태수를 안다는 말로 알아듣게 되었던 것이다.

"저어 향수 좋은 것 있어요?"

저편에서는 '있어요?'라고까지 말이 더 친숙해진다.

"네에, 향수요? 여러 가지 있습니다. 어떤 것을 찾으시는지……."

"그저 좋은 것이면 아무거라두 좋습니다. 오리지나루 같은 거……."

"네에! 오리지날이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썩 좋지는 못한데요…… 보통 많이들 쓰시기는 하지만……."

"네에! 아아, 그런가요? 그러면……."

저편에서는 이렇게 당황해하다가 다시,

"그럼 오리지나루가 아니라, 무어 좋은 걸루 한 가지 골라 주시지요."

"그러시면 헤리오도로푸를 쓰시지요? 그것두 썩 고급품은 아니지만 그래두……."

"네네…… 그럼 그, 그 헤 헤리…… 그 향수 한 병만 지금 곧 좀 보내 주시까요?"

"네에 보내 디리겠습니다. ××은행 고태수 씨라구 그러셨지요?"

이것을 다시 묻는 것은 저편에서 적지 않게 실망할 소리나, 그래서 네, 하는 저편의 대답이 대번 떫떫해졌지만 초봉이야 그런 기색을 알 턱이 없는 것이고…….

"그런데, 참……."

초봉이가 깜박 생각이 나서 전화통으로 파고든다.

"……지금 배달하는 아이가 마침 나가구 없어서 시방 곧은 못 보내 드리겠는데요? 좀 더디어두 괜찮을까요?"

"아, 그리세요? 그러면, 저어……."

잠시 침음하다가 이어,

"……그러면 내가 오래 기대릴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해주시지요? 내 하숙집으루 좀 보내 주세요? 아이를 시켜서 보내면, 내가 없더래두 받아 두구서, 대금두 치러 줄 겝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댁이 어디신가요?"

"바루 저 개복동서 둔뱀이루 넘어가자면, 고개까지 채 못 가서 있는, 한참봉네 싸전집입니다. 찾기 쉽습니다."

"네에 네, 거기시면 잘 압니다. 그러면 글러루 보내 드리겠습니다."

초봉이는 전화를 끊고 돌아서면서, 그 사람이 그 사람이구먼 하는 짐작이 들어 고개를 끄덕거린다. 집에서 누구한테서든가, 탑삭부리 한참봉네 집에, 어느 은행에 다니는 사람이 하숙을 하고 있다는 말을 귓결에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초봉이는 아직도 그대로 지켜 섰는 윤희한테 또 시달림을 받기가 싫어서 분주한 체, 헤리오트로핀 한 병 있는 것을 진열장에서 꺼내다가, 싸개지로 싸고 다시 전표를 쓰고 막 그러고 나니까 또 전화가 온다.

윤희는 이번에도 제호의 전화거든 저를 달라고 따라온다.

초봉이는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수화기를 떼어 들면서,

"네에, 제중당입니다."

"……"

초봉이는 저쪽에서 오는 소리를 듣자, 눈과 입가로 미소가 떠오르면서 금시로 귀밑이 빨개진다.

"초봉이어요."

초봉이는 매달리듯 전화통으로 다가들면서 무심결에 뒤를 돌려다본다. 그것을 눈여겨보고 있던 윤희가 새파랗게 눈에서 쌍심지가 뻗쳐 나오면서,

"비껴나 이것!"

소리 무섭게 초봉이를 떠다박지르더니 수화기를 채어다가 귀에 대고는,

"아니, 이건 어떻게 하는 셈이요? 응?"

여부없이 다짜고짜로 전화통에다가 터지라고 악을 쓰는 것이다.

"네에?"

저편에서는 얼띤 목소리가 분명찮게 들려 온다.

"네에라께 다 무엇이 말라죽은 거야? 왜 남은 기다리다가 애가 말라죽게 하구서, 전방에 있는 계집애만 데리구 전화질만 하구 있는 게야? 이놈의 전방에다가 불을 싸놓는 꼴을 보구래야 말 테야? 응? 이, 천하에 행사가 개차반 같은 위인 같으니라구……."

더 잇대어 해 퍼부을 것이지만 숨이 차서 잠깐 말이 끊긴다. 그 사이를 타서 저편의 말소리가 들려 온다.

"네? 왜 그리시나요?…… 누구신데 무슨 일루 그리시나요?"

비록 전화의 수화기로 들려는 올망정, 코에 걸리는 듯한 베이스 음성으로, 뜸직뜸직 저력 있게 울리는 이 말소리는 데데거리고 급한 제호의 말소리와는 얼토당토 않다.

"무엇이 어째?"

윤희는 번연히 남편 제호가 아닌 것을 역력히 알아차렸으면서 상관 않고 대고 멋스린다.

윤희는 먼저는 저편이 제혼 줄 알고, 그래서 제호한테 초봉이가 전화를 받으면서 그런 아양을 떨고 하니까, 그만 강짜에 눈까지 뒤집혀 그 거조를 한 것인데, 저편이 제호가 아니고 생판 딴사람이고 보매, 이번에는 그것이 되레 부아가 났던 것이다.

"……당신이 그럼 박제호가 아니란 말요?"

윤희는 여전히 서슬 있게 딱딱거리기는 해도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맨다.

돌려다보니, 나서서 일을 모피해 주어야 할 초봉이는 모른 체하고 외면을 하고 있다. 그것이 속이 절여 터지게 밉다.

"여보세요……."

저편에서는 밉광머리스럽게, 성도 내지 않고 좋은 말로 차근차근,

"……나는 박제호 씨가 아닙니다. 남승재(南勝在)라는 사람입니다. 여기는 금호병원(錦湖病院)인데요, 여기 조수로 있는 사람입니다. 약을 주문하느라고……."

이 무색한 꼴을 어떻게 건사할 길이 없다. 하니, 덮어놓고 기승을 피우는 게 차라리 속이라도 시원할 일이다.

"원 참, 별 빌어먹을 꼴두……."

윤희는 수화기를 내동댕이를 치고 물러서서, 초봉에게로 잡아먹을 듯이 눈을 흘긴다.

"……아니거던 아니라구 진작 말해 주어야지!"

초봉이는 더 참을 수가 없어서 마주 퀄퀄하게 해대려고 고개를 번쩍 들었으나, 말은 목 안에서 잠겨 버리고 청하지도 않는 눈물만 솟아 글썽거린다.

"……전방에 두어 둘 제는 치레뽄으루 두어 두었나?…… 무어야 대체? 모른 체허구 서서 남을 망신을 주구…… 전화나 가지구서 희학질이나 하믄 제일인가?"

이 말을 하다가, 윤희는 초봉이가 아까 전화통 앞에서 아양을 부리는 양을 다시 생각하고 그러자니까 문득, 실로 문득, 초봉이가 정말로 제호한테도, 전화를 받을 때나 단둘이서 있을 때면은 그렇게 하려니, 그래서 제호를 후리려고 하고, 제호는 그것이 좋아서 침을 게질질 흘리면서 헤헤, 헤헤 하려니…… 이러한 짐작이 선뜻 머리에 떠오르던 것이다.

등골이 오싹하도록 무섭게 초봉이를 노리고 섰던 윤희는 몸을 푸르르 떨면서 뽀드득 이를 갈아 붙인다. 만약 이때에 초봉이가 조그만큼만 더 윤희의 부아를 돋구어 주었다면, 윤희는 단박 달려들어 초봉이의 얄밉디얄밉게시리 이쁜 입과 턱을 싹싹 할퀴고, 물어뜯고 해주었을 것이다.

마침 배달 나갔던 아이가 자전거를 내리면서 들어서다가 전방 안의 살기등등한 공기를 보고 지레 겁을 내어 비실비실 한옆으로 피해 간다.

"선생님 어디 간지 몰라?"

윤희는 아이한테다 대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저는 몰라요, 어디 가신지……."

아이는 행여 노염을 살세라고 조심하여 몸을 사린다.

"두구 보자! 모두들……."

윤희는 혼자말같이 이렇게 씹어 뱉고는 통통거리고 제약실로 해서 안채로 들어가 버린다.

한편 구석에 가서 가만히 박혀 있던 아이가 그제야 윤희의 등뒤에다가 혀를 낼름 하고는 초봉이한테 연신 눈을 찌긋째긋한다.

초봉이는 본 체도 않는다. 그는 윤희한테 마주 해대지 못하고서 병신스럽게 당하기만 하던 일이 새 채비로 분했다.

하기야 지지 않고 같이 들어서 다투는 날이면, 자연 주객이 갈리게 될지도 모르고, 그러는 날이면 다시 직업을 얻기도 만만치 않거니와, 얻어진대도, 지금같이 장래 보기로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오늘이라도 이 집을 그만두면 매삭 이십 원이나마 벌이가 끊기니 집안이 그만큼 더 어려울 것이요, 하니 웬만하면 짐짓이라도 져주는 게 뒷일이 각다분하지 않을 형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타산이야 흥분되기 전 일이요, 일을 잡치고 난 뒤에 가서,

'참았더라면 좋았을걸…….'

할 후횟거리지, 당장은 꼿꼿한 배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늘부터라도 그만두면 그만이지…….'

무럭무럭 치닫는 부아가 이렇게쯤 다부진 마음을 먹을 수까지도 있다. 그래서 어엿하게 고개를 쳐들고 활활 해부딪쳐 주려고까지 별렀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하지를 못했다.

초봉이는 비단 오늘 일뿐 아니라 크고 작은 일이고 간에, 누구한테든지 저 하고 싶은 대로 고집을 세운다든가, 속에 있는 말을 조백이게 해대지를 못한다. 속이야 다 우렁잇속같이 있으면서 말을 하자고 들면, 가령 그것이 억울하다든가 분한 경우라든가, 기운이 겉으로 시원시원하게 내뿜기지를 못하고 속으로만 수그러들어 목이 잠기고 눈물이 앞을 서곤 한다.

흥분이 심하면 심할수록에 그것이 더하다.

오늘 일만 해도, 그는 윤희한테 무슨 정가 막힐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버젓하게 다 해댈 말이 있는 것을 부질없이 말은 막히고서 나오지 않고, 남 보기에는 무슨 죄나 진 것같이 울기부터 한 것이다.

전화통에는 윤희가 내동댕이를 친 채로 수화기가 디룽디룽 매달려 있다.

그렇거나 말거나 다른 전화 같으면 심술로라도 내버려두겠지만, 혹시 승재가 그대로 기다리고 있을까 민망해서 얼핏 수화기를 올려 들었다.

"여보세요."

잠긴 목을 가다듬어 겨우 소리를 내니까,

"거 웬 난리가……."

승재의 대답이 바로 들린다.

"아녜요, 여기 아주머니가 아저씨한테서 온 전환 줄 알구……."

"흐응! 거 대단하군."

초봉이는 금시 노염이 사라지고, 그 대신 입과 눈이 아까처럼 혼자 웃는다.

"……저어, 로지농 칼슘 있지요."

"네에 있어요. 보내 드릴까요?"

"한 곽만…… 곧 좀……."

"네에 시방 곧 보내 드리께요."

"그럼 한 곽만……."

초봉이는 전화가 끊기는 소리를 듣고도 그대로 한참이나 섰다가 겨우 돌아선다.

그는 무어라고 아무 이야기라도 좋으니 좀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럴 바이면 이편에서 전화를 걸 수도 있고, 또 전화가 끊기기 전에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그저 이야기가 하고 싶었지,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고, 모르니까 하재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제고 전화를 끊고 나선 저 혼자만 섭섭해하는 것이다.

초봉이는 실상 승재와 한 지붕 밑에서 살고 있다. 승재가 초봉이네 집 아랫방을 얻어서 거처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둘이는 아침 저녁으로 얼굴을 대하는 터에, 밖에 나와서 전화로 이야기를 해야만 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집에서 부모네가 그것을 간섭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니…….

그러나 둘이는 집에서는 사세부득한 것말고는 서로 말이 없이 지낸다. 내외나 조심을 하자는 것도 아닌데, 둘이는 그러고 지낸다. 그것을 지금 초봉이더러,

"너 승재한테 맘이 있는 게로구나?"

이렇게 묻는다면 초봉이는 아니라고 기를 쓰고, 얼굴이 붉어질 것이다.

뒤바꾸어, 승재더러 그 말을 물어도 역시 그럴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초봉이는 로지농 칼슘 한 곽을 꺼내다가 전표를 써서, 먼저 준비해 논 태수의 것까지 아이를 주어 배달을 하라고, 태수의 것은 이러저러한 데 있는 그의 하숙집으로 갖다 주라고 이르니까 아이놈이 연신 빈들빈들 초봉이의 얼굴을 치어다보면서,

"고상이오? ××은행 고상이오?"

해쌓는 것이 아무래도 사람을 구슬리는 양이다.

"너 왜 그러니? 그이가 무얼 어쨌니?"

초봉이는 머루 먹은 속이라도, 무심결에 따라 웃으면서 물어 보는 것이다.

"아녜요, 히히……."

"저 애가 왜 저럴까?"

"아녜요, 고상이 어쩔 양으루 오늘은 자기가 안 오구서 이렇게 배달을 시키니깐 말이지요…… 헤헤 헤헤."

"누군데 저 애가 왜 저래?"

"아―주, 조상두(초봉이) 시치미를 뚜욱 따요!"

"저 애 좀 봐요! 내가 무얼 시치미를 딴다구 그래애!"

"그럼 안 따요? 사흘에 한 번씩은 꼭 가게에 와설랑 무엇이구 사가는 고상을 조상이 몰라요? 다아 알면서……."

"그래도 나는 모르는 걸 어떡허니? 허구많은 손님을 누가 일일이 다아 낯을 익혀 둔다더냐."

"그래두 고상은 특별히 다르다나요! 누구 때문에 육장 와서 쓸데두 없는 것을 사가는데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모르긴 왜 몰라요! 다아 조상 얼굴 볼려구 그리는데, 히히…… 척 연앨……."

"저 애가!"

초봉이는 잘급해 소리를 지르는데, 얼굴은 절로서 화틋 단다.

하고, 일변 그렇게 듣고 생각해 보니 아닌게아니라 낯을 암직한 여러 손님 가운데 한 사람, 아리송하니 얼굴이 머리에 떠오른다.

후리후리한 몸에 차악 맞는 양복을 입고, 갸름한 얼굴이 해맑고, 코가 준수하고, 웃입술을 간드러지게 벌려 방긋 웃고, 그래서 무척 안길 성 있이 생기기는 생겼어도, 눈이 오굿한 매눈에 눈자가 몹시 표독스러워 보이는, 그 사람이 그러면 ××은행에 다니는, 그리고 탑삭부리 한참봉네 집에 기식을 하고 있다는, 또 그리고 배달하는 아이 말대로 초봉이 저를 보려고 자주 물건을 사러 가게에 온다는 그 사람인 게로구나 하는 짐작이 들었다.

그러자 초봉이는 웬일인지 아까 첫번과는 달리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그 사람 고태수의 얼굴이 다시금 떠오르더니 그것을 요모로 조모로 뜯어보는데, 또 그러자 문득 승재와 비교가 되어지면서 비교된 결과는 생김새로든지 처지로든지 승재가 훨씬 못한 것이 단박 드러나고, 하니까는 그 다음에는 승재를 위해서 고태수한테 시기가 난다.

그래, 분개해서 고태수를 들이 미워해야 하겠는데,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가 미워지질 않고 자꾸만 더 돋보인다.

그럴 수가 있을까 보냐고 도로 또 비교를 해본다.

승재는 장차에야 버젓한 의사가 될 사람이지만, 지금은 겨우 남의 병원의 조수요, 고태수는 당장 한 사람 몫을 하고 있는 은행원이다.

생김새도 승재가 못생긴 것은 아니나, 고태수가 멀끔한 것이 매력이 있다.

승재는 고태수의 조화된 데 비해서, 아무렇게나 생긴 사람이다.

키가 훨씬 더 크고, 몸도 크고, 어깨통이 떠억 벌어졌다.

얼굴은 두툼하니 넓죽하고, 이마도 퍽 넓다. 그래서 실직하고 무게는 있어 보여도 매초롬한 고운 태는 찾으려도 없다.

얼굴은 눈퉁이며, 눈이며, 코, 입 이런 것들이 제자리는 제자리라도, 너무 울퉁불퉁하게 솟을 놈 솟고 박힐 놈 박히고 해서 조각적이기는 해도, 고태수라는 사람처럼 그린 듯 곱지는 못하다. 다만 그의 눈만은 고태수의 눈과는 문제도 안 되게 좋다. 어느 산중에 있는 깊은 호수같이 맑고도 고요하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어도, 이 세상 좋은 것이라고는 다 그 눈에 가 들었는 성싶은 그런 눈이다. 그리고 이 눈으로 해서 승재의 그 아무렇게나 생긴 얼굴이 흉을 가리고 남는다.

못하거니 하고, 그럴 수가 있을까 보냐고 다시금 둘을 빗대 보던 초봉이는 승재의 눈에 이르러 흠뻑 만족을 한다.

만족을 하고 그 기분이 그대로 승재의 모습으로 옮아 가서, 그의 올라앉아 말 탄 양반 훨훨 소 탄 양반 끄덕끄덕을 하고 싶은 어깨통, 이편이 몸뚱이를 가져다가 콱 가슴에 부딪뜨리면 바위같이 움찍도 안 할 듯싶은 건장한 몸뚱이, 후련하게 뚜렷한 얼굴과 넓은 이마, 그리고 다시 그렇듯 맑고 고요한 눈,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도 생각해 보고 전체로도 생각해 보고 하노라니까, 비로소 고태수라는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잠깐 잊혀지고, 승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차악 안심이 되고 기쁘고 한다.

처지를 대놓고 보아도 실상은, 도리어 둘을 같이 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승재는 작년 시월에 서울 가서 치르고 온 의사 시험에 반은 넘겨 패스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금년 시월 시험이나, 늦어도 명년 오월 시험까지 한 번 아니면 두 번만 더 치르면, 전과목이 다 패스가 되어 옹근 의사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럴 날이면 한낱 은행원쯤 부럽지 않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초봉이는 한숨을 호 내쉬면서 가슴에다가 무심코 손을 얹는다. 안심의 표적인 것이다.

이렇듯 만족도 하고 안심도 하는데, 그러나 그러는 하면서도 일변 따로, 한번 머릿속에 박혀진 고태수의 영상은 그대로 처져 있고 종시 사라지질 않는다.

그것은 마치 그의 곱다란 얼굴과 좋은 몸맵시를, 궁하고 보잘것없는 승재의 옆으로 들이대면서 자아 어떻수? 하고 비교해 보라고 느물거리는 것만 같다.

짜증이 나서 고태수한테 눈을 흘겨 준다. 그러나 빈들빈들 웃기만 하지, 물러가려고 하지 않는다.

제호가 마침 그제야 털털거리고 가게로 들어선다.

"어허, 이거 우리 초봉이가 혼자서 수고하는군. 제기할 것……."

그는 기다란 얼굴로 싱글벙글 웃으면서 수선을 피운다.

"……초봉이 혼자서 수고를 했어. 이놈은 어디 갔나?…… 옳지, 배달 나간 거루구만? 그렇지?…… 어 후―후― 더웁다. 인전 제법 더웁단 말야, 제기할 것."

한편 떠들면서 좋아하는 양이 단단히 좋은 일이 있는 눈치다.

초봉이도 그에 섭쓸려 웃으면서, 손가방을 받아 준다.

"응? 그래, 저리 좀 내던져 주어…… 건데 초봉이가 자꾸만 저렇게 이뻐져서 저거 야단났군! 야단났어, 허허허허, 제기할 것. 멀, 이쁘면 좋지, 허허허허. 건데 말야, 응?…… 지금 아주 대대적으루 존 일이 생겼단 말야. 대대적으루 응?…… 그리구 우리 초봉이한테두 대대적으루 존 일이구, 허허허. 제기할 것, 인전 됐다."

제호는 언제고 그렇지만, 오늘은 유독히 더 정신을 못 차리게 혼자 찧고 까불고 하면서 북새를 놓는다.

초봉이는 대체, 좋은 일이라면서 저렇게 떠들어 대니 무얼 가지고 저러나 싶어 속으로 적잖이 궁금했다.

제호는 초봉이가 앉은 테이블 앞에 걸상에 가서 털씬 걸터앉아 모자를 벗어 가지고 번질번질한 대머리 얼러 얼굴에 부채질을 한다.

그러다가 두리번두리번하더니, 초봉이가 가방을 들고 섰는 것을 보고…….

"응응! 거기 있군…… 나는 또 어디다가 내버리고 왔다구. 제기할 것, 거 잘 좀 갖다가 제약실 안에 둬두라구."

아까는 내던지라더니 이제는 또 잘 갖다 두란다.

"……그 속에 좋은 게 들었단 말야, 그 속에…… 오늘 아주 대성공이야 대성공. 건데 초봉이두 좋은 일이 있어. 시방, 시방 이야기허까? 가만 있자. 나 담배 한개 피우구, 응? 아뿔싸? 담배가 없군…… 이놈은 어디 갔누? 옳아, 배달 나갔지, 제기할 것. 빙수 한 그릇 먹었으면 조오앖다. 시방 빙수 팔까? 아직 없을 테지?"

"글쎄요?"

"없을 거야, 없어. 제기할 것, 이게 다아 여편네 잘못 만난 놈의 고생이야. 아, 이런 때 척 밀수나 한 그릇 타다가 주군 하면 오죽 좋아? 밤낮 그 히스테리만 부리지 말구, 응? 그렇잖아? 허허 제기할 것."

"아주머니가 참 퍽 기대리셨어요!"

"아뿔싸!"

제호는 무릎을 칠 듯이 깨우치고는 잠시 멍하다가 뒤통수를 긁는다.

"……이거 야단났군!…… 오늘 두시에 동부인합시구 제 동무네 친정집 한갑잔치에 가기루 했었는데. 그만 깜박 잊었지!…… 안 잊었어두 보던 일이야 제쳐 놓구 오지는 못했겠지만…… 그래 나와서 무어래지?"

"머, 별루……."

초봉이는 소경사를 다 이야기할까 하다가 그만둔다.

"재랄하잖어?"

"두 번이나 나오셔서, 아저씨 안 오셨느냐구……."

"아냐! 분명 재랄을 했을 거야, 분명. 그래 재랄을 하다가 혼자 간 모양이? 그러니 이거 야단 아냐? 그놈의 성화를 어떻게 받나! 제기할 것, 돈 백 원만 얹어 주겠시니 누구 그놈의 여편네 좀 물어 가는 사람 없나? 허허 제기할 것."

"아이머니나! 숭헌 소리두 퍽두 허시네!"

"아냐 정말야. 초봉일랑 인제 시집가거든 애여 남편 그렇게 달달 볶지 말라구. 거, 아주 못써. 그놈의 여편네가 좀 그리지를 안했으면 내가 벌써 이십 년 전에 십만 원 하나는 모았을 거야, 응? 그렇잖아?"

"아저씨두! 두 분이 결혼하신 지가 십 년 남짓하시다문서 그러세요?…… 내, 온……."

"아하하하, 참 그렇던가? 내가 정신이 없군. 그건 그런데, 초봉이두 알지만, 에, 거 여편네 히스테리 아주 골머리가 흔들려! 그 어떻게 이혼을 해버리던지 해야지 못 견디겠어. 아무것두 안 되겠어!"

"괜히 그러세요!"

"아니, 자유 결혼이니까, 이혼두 자유야. 거 새끼두 못 낳구 히스테리만 부리는 여편네 무엇에 쓰노!"

"그렇지만 아주머니가 보시기엔 아저씨한테 더 잘못이 많답니다."

"잘못? 응, 더러 있지. 오입한다구, 그리구 제 히스테리에 맞추지 않는다구. 그러니깐 갈려야지? 잘잘못이야 뉘게 있던 간 둘이서 같이 살 수가 없으니깐 갈려야 할 게 아냐? 그렇잖어?"

"전 모르겠어요."

초봉이는 제호의 이야기에 끌려 허튼 수작에 대거리는 하고 있어도, 시방 딴 걱정에 도무지 건성이다.

그는 제호한테 청할 말이 있어서, 윤희 못지않게 제호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제호가 돌아오고 해서 얼굴을 대하고 난즉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섬뻑 말이 나오지를 않던 것이다.

그는 실상 아까 아침 나절에 이야기를 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벼르기만 하고, 말이 차마 나오지를 않아서 주춤주춤하고 있는 동안에 제호는 부루루 나가 버렸고, 그래서 후회를 하고 종일토록 까맣게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하다가 인제 그가 돌아왔으니 말을 내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종시 말은 나와지지 않고, 그러면 그만두자 한즉, 당장 집안 식구들이 굶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며, 오늘이 이러한 걸, 내일을 또, 그 다음날도 돈이 생길 때까지는 굶어야 할 테니, 도저히 안 될 말이다.

"아저씨, 저어……."

초봉이가 겨우 쥐어짜듯이 기운을 내서 이렇게 말부리를 따놓고, 눈치를 보느라고 고개를 쳐드니까, 제호는 없는 담뱃갑을 찾느라고 이 포켓 저 포켓 부산하게 뒤지다가 마주 얼굴을 든다.

"응? 무어?…… 이놈의 담배가 그렇게 하나두 없나! 제기할 것. 그래, 무어 할 이야기 있어? 응, 무어야?"

"네에……."

"그래, 무슨 이야긴데?"

"말씀하기가 미안해서……."

미안한 것뿐이 아니지만, 사실 미안하기도 퍽 미안하다.

지난달 그믐을 가까스로 넘기고서 초하룻날 하루만 겨우 지나고 난 이달 초이튿날, 가게에 나오기가 무섭게 오늘처럼 염치를 무릅쓰고 돈 십 원을 이달 월급 턱으로 선대받아 간 것이 열흘도 채 못 된다. 그랬는데, 그런 때문에 인제 찾을 것이라야 겨우 십 원밖에 남지 않았고, 월급날이라고 정한 스무닷샛날이 되기도 전에 또 선대를 해달라고 하게 되니, 가령 저편에서야 괜찮다고 하지만 초봉이로 앉아서는 말을 내기가 여간만 민망한 노릇이 아니다.

초봉이가 말을 운만 떼어 놓고 그 다음 말을 못 하고 어려워만 하는 것을,

"허허! 사람두 원!…… 알었어, 알었어!"

제호는 벌써 알아차리고,

"……돈이 쓸 데가 있단 말이지?…… 그걸 말 좀 하기를 그렇게 어려워한담? 사람두 어디서, 원……."

"그래두 미안하잖어요?"

"미안은 무슨 미안? 미안하기루 들면, 내가 되려 미안하지. 친구 자녀 데려다가 두구서는 월급두 변변히 못 주어서 늘 옹색하게 하니깐, 안 그래? 그렇지? 허허 제기할 것?…… 그래 얼마나 쓸까?…… 날더러 일일이 달라구 해선 뭘 하누? 거기 있을 테니 좀 끄내다 쓰구 장부에 올려나 놓지. 그래, 거기 손금고에서 끄내 써요, 응? 아뿔싸! 열쇠를 내가 가지구 나갔었지…… 정신없어 야단났어! 제기할 것."

제호는 포켓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가지고 테이블 위에 놓인 손금고를 방울 소리를 울리면서 찰크당 열어 젖힌다.

초봉이는 두고 보면 볼수록 소탈하고 시원스런 제호가 사람이 좋았고, 비록 본디야 남이지만, 그만한 아저씨를 둔 것이 또한 좋았다. 만일 제호가 정말로 외가로든지 친척으로서의 아저씨가 된다면, 더욱 마음 든든하고 즐거울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초봉이가 보기에는 좋은 사람인 것을, 대체 그 부부간이라는 게 무엇이길래 윤희는 육장 두고 제호를 못살게시리 달달 볶아 대는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얼마나? 오 원? 십 원?"

제호는 일 원, 오 원, 십 원 이렇게 세 가지 지전을 따로따로 집어 들고 세면서 묻는다.

"글쎄요……."

초봉이는 기왕이니 십 원을 탔으면 좋겠으나, 그역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저런, 사람두! 돈 쓸 사람이 얼마 쓸지를 몰라? 허허 제기할 것. 자아 십 원. 기왕이면 모개지게 한꺼번에!"

초봉이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지려고 하는 것을 속으로 삼키고, 파르스름하니 안길 성 있게 색채가 나는 십 원짜리를 받아 쥔다.

돈을 받아 쥔 손바닥의 촉감도 여느때 물건을 팔았을 때에는 다 같은 십 원짜리라도 그런 줄을 모르겠더니, 이렇게 어렵사리 제 몫으로 받아 쥐는 십 원짜리의 촉감은, 어디라 없이 그놈이 빳빳하면서도 자별히 보드라운 것 같았다.

돈을 탔으니 인제는 집으로 갈 일이 시각이 바쁘다. 그러나, 아직 겨우 네시 반…… 돌아갈 시간 여섯시까지에는 한 시간 반이나 남았다.

어떻게 하나? 탈을 하고, 오늘은 일찍 돌아가나? 좀더 있다가 배달하는 아이가 돌아오거든 집으로 보내 주나? 이런 때에 동생들이라도 누가 나왔으면 싶었다.

제호는 제약실로 들어가 앉아서 손가방을 열어 놓고 무엇인지 서류를 뒤적거린다. 그것을 보니, 아까 제호가 들어서던 길로 떠들어 대면서, 좋은 일이 있다고, 초봉이한테도 좋은 일이 있다고 수선을 피우던 일이 생각났다.

그날그날의 생활이 막막하고, 앞뒷동이 막힌 때에는 빈말로나마 좋은 일이 생긴다는 말을 들으면 반가운 법이다. 초봉이도 그래서 한 가지 시름을 놓고 나니 그 다음에는, 대체 그 좋은 일이라는 게 무엇인고? 이편에서 물어라도 보고 싶게 차차 궁금증이 나기 시작한다.

제호는 서류를 한번 주욱 훑어보더니 다시 차곡차곡 챙겨서 제약실 안에 있는 금고를 열고 소중하게 건사를 한 뒤에 도로 마루로 나온다.

"자아, 인전 참, 초봉이한테 이야기를 좀 해야지……."

제호는 테이블 앞 의자에 가 걸터앉더니,

"……나 이 전방 이것 팔았지, 헤헤. 팔아두 아주 잘 판걸, 제기할 것."

"네에!"

초봉이는 하두 어이가 없어 놀라지는 대로 놀랐지, 미처 어찌하지를 못한다.

그러나 제호는 연신 싱글벙글 웃기만 한다.

"왜 그렇게 놀래누? 허허허허…… 걱정 말아요, 걱정 없어요."

초봉이는 다시 생각하니, 주인이 갈린다고 점원까지 갈리랄 법은 없으니 너는 걱정 없느니란 말인 듯싶었고, 사실 또 그게 근리한 말인 것 같아서 지레 놀란 것이 무색했다.

"누가 샀는데요?"

"뭐, 어떤 '가모'가 하나 덤벼들어설랑, 허허허허, 제기할 것……."

"……"

"헌데…… 초봉이 말이야?…… 나허구 같이 서울루 가지이? 서울……."

"서울루, 요?"

초봉이는 알아듣고도 모를 소리여서 뚜렛뚜렛하는 것이다.

"응, 서울루."

"어떻게?"

"어떻게라니 차 타구 가지? 걸어 가잴까 봐서? 허허허허, 제기할 것."

"그래두 전 무슨 말씀인지."

"모를 건 뭣 있나? 서울루 가서 시방 여기서처럼 일 보아 주면 되지."

"네에!"

초봉이는 그제야 겨우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인제 알겠지?…… 그래, 서울루 가요. 서울루 가면 내 정식으루 월급두 나우 주지. 그때는 시방처럼 이런 여점원이 아니라 사무원이야 사무원. 그리구 나는 응? 척 지배인 영감입시구, 허허허허. 박제호가 인전 선영 명당바람이 나나 부다, 제기할 것."

"무얼 시작하시는데?"

"제약회사야 제약회사. 이거 봐요, 내가 몇 해 전버텀두 그걸 하나 해볼 양으루 별렀단 말이야. 그거 참 하기만 하면 도무지 어수룩하기가 뭐 짝이 없거든. 글쎄 삼십 전이나 오십 전 딜여서 약을 맨들어 가지군 뭐, 어쩌구 어쩌구 하다구 풍을 쳐서 커다랗게 신문에다 광고를 내면 말이야, 헐라치면 십 원씩 내구 사다 먹어요! 십 원씩을. 제깐놈들이 뭐 약이 어쩐지 아나 머. 그래 열 곱 스무 곱 남아요. 십 년 안에 삼십만 원 이상 벌어 놀 테니 보라구, 삼십만 원."

"어쩌문!"

"그럴듯하지? 거 봐요. 그래서 이번에 그걸 하기루 돈 낼 사람이 나섰단 말야. 그자가 사만 원 내놓구, 내가 이만 원 내놓구, 주식회사 무슨 제약회사라구 쓱, 응?…… 자본금은 삼십만 원이구, 사장에 아무개요, 지배인에 박제호요, 허허허허, 제기할 것. 그러느라구 이것두 판 거야. 팔아두 숫지게 팔았지. 이천 원 딜여서 설비해 놓구, 십 년 동안 전 만 원이나 모으구, 그리구 나서 오천 원을 받았으니, 허허허허, 제기할 것…… 세상이 아직두 어수룩하단 말이야, 어수룩해. 이걸 오천 원에 사는 '가모'가 있지를 않나, 삼사십 전짜리 약을 맨들어서 광고를 크게 내면, 저희가 광고요금꺼정 약값에다가 껴서 내구 좋다구 사다 먹질 않나. 그러니 장사해 먹는 이놈이 손복할 지경이지. 생각하면 벼락을 맞일 일이야. 허허허허, 제기할 것."

초봉이는 흐무진 것 같기는 해도, 어수선해서 무엇이 무엇인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구. 그래 그러니 초봉이두 날 따라서 서울루 같이 가요. 글쎄 조로케 이쁘구 좋게 생긴 아가씨가 이따우 군산바닥에 묻혔어야 바랄 게 있나?…… 서울루 가야만 다아 좋은 신랑감두 생기구 허지, 흐흐흐…… 그리구 아버지가 혹시 반대하신다면 내 쫓아가서 우겨 재키지 않으리? 만약 어머니 아버지가 서울 보내기 안심이 안 된다면, 머 내가 우리집에다 맡아 두잖으리? 그러니, 이따가 집에 가거들랑 어머니 아버지한테 위선 말씀을 해요. 그리구 가게 되면 이달 보름 안으루 가야 할 테니깐, 그리 알구, 응?"

"네에."

초봉이는 승낙하는 요량으로 대답을 한다. 사실로 그는 어느 모로 따지고 보든지 제호를 따라 서울로 가게 되는 것이 기쁜 일이었었다.

제호는, 그렇다. 방금 한 말대로, 여러 해 두고 벼르던 기회를 만나 그야말로 평생 팔자를 고칠 커다란 연극을 한바탕 꾸미게 되니 엉덩이가 절로 들썩거리게 만족한 판이다. 그러니 얼굴 묘하게 생긴 계집애 하나쯤 그리 대사가 아니다.

만일 초봉이로 해서 일에 걸리적거림이 있다든가, 또 그게 이미 손아귀에 들어온 애물이라고 하더라도, 일을 하는 데 필요만 하다면 도로 배앝아 놓기를 주저하지 않을 경우요 그럼직한 인물이다. 그러나 초봉이와 일과는 아무런 상극도 되지를 않는다. 그럴 뿐 아니라, 초봉이는 제호한테 진실로 웃음을 빚어 주는 한 송이의 꽃인 것이다.

제호는 아내에게 늘 볶여 지내기만 하지, 가정에 대한 낙이라고는 없다. 그러한 그에게, 이쁜 초봉이를 손 닿는 데 두어 두고 시시로 바라보는 것은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던 것이다.

물론, 안면 있는 친구의 자녀라는 것이며, 나이 갑절이나 층이 져서 자식뻘밖에 안 된다는 것이며, 아내의 감시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초봉이가 미혼 처녀라는 것 때문에 그의 욕망은 행동으로 발전을 하지는 못한다. 사실상, 일반으로 중년에 들어선 기혼 남자는 그가 패를 차고 다니는 호색한이 아니면 미혼 처녀에게 대해서 강렬한 호기심을 갖기는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나, 그 미혼 처녀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겁이 나고 조심이 되어 좀처럼 그들의 욕망을 행동화하지 못하도록 견제를 하는 수가 많다.

초봉이에게 대한 제호의 경우가 역시 그러한데,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초봉이를 놓치고 싶질 않던 것이다.

여섯시가 되기를 기다려 초봉이는 가게를 나섰다. 오후의 한가한 해가 서편으로 기울고, 하늘은 한빛으로 푸르다. 너무 맑고 푸른 것이 되레 그대로 두기가 아깝고, 흰구름 조각 한두 장쯤 깔아 놓았으면 좋을 것 같다.

아침에도 그랬고, 어제 그저께부터도 그랬지만 정거장 둘레의 포플러 숲과 그 건너편의 낮은 산이 처음 보는 것같이 연푸른 초록으로 훤하게 피어오른다.

어디 포근포근한 잔디밭이라도 있으면 퍼근히 좀 주저앉아 놀고 싶어지는 것을, 그러한 느긋한 마음과는 딴판으로 종종걸음을 쳐서 제일보통학교 앞을 지나 집이 있는 둔뱀이로 가고 있다.

학교 마당에서는 아이들이 몇만 놀고 있다. 초봉이는 혹시 형주가 그 속에 섞여 있나 하고, 철사 울타리 안으로 눈여겨 들여다보기는 했으나, 물론 있을 턱이 없었다.

머리 위로 솟은 아카시아나무에서 달콤한 향내가 가득 번져 내린다. 초봉이는 끌리듯 고개를 쳐들고 높다랗게 조랑조랑 매달린 아카시아 꽃송이를 올려다보면서 절로 미소를 드러낸다.

조금 아까만 해도 초봉이는 이러한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꽃향기에 마음놓고 웃을 수가 있는 것이다.

제호를 따라 서울로 가기로 아주 마음에 작정을 했다. 모친은 선뜻 그러라고 할 것이고, 좀 반대를 한다면 부친이겠는데, 잘 이야기를 하고 또 모친과 제호가 우축좌축을 하면 역시 승낙을 할 것이다.

제호가 아까, 월급도 한 사십 원 준다고 했으니까, 우연만하면 삼십 원은 집으로 내려보낼 수가 있고, 또 종차 형편을 보아 집안이 통 서울로 이사를 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서울! 서울! 늘 가고 싶던 서울이다.

서울은 사년급 때 수학여행으로 한번 구경을 가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지날 결에 한번 구경한 것으로는 초봉이가 동경하던 서울의 환상을 씻지 못했다. 그는 서울이면, 그때에 본 것보다는 더 아름답고, 더 즐거움이 있으려니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하던 참이라, 이렇게 뜻밖에 서울로 가게 된 것이 기쁘고, 그리고 인제 무엇인가―---그게 어떠한 무엇인지는 몰라도―---무엇인지 좋으려니 싶던 것이다.

하기야 그렇게 기쁘던 끝에 문득 윤희를 생각하고, 이건 일이 모두 와해되나 하면 낙심이 되기도 했었다.

윤희가 방해를 놀면 별수없이 못 가고 말 것이었었다. 해서, 그게 걱정스럽고, 그래 하다못해, 무얼 그것도 제호가 좋도록 다 이러고저러고 해서 역시 따라가게 되겠지 하고 짐짓 저를 안심시켰다.

또 한 가지, 승재와 매일 전화도 못 하고 서로 멀리 떨어지게 되는 것, 이것이 여간만 섭섭한 게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럭저럭 좋도록 제 마음을 무마해 놓았다. 승재는 시험을 보느라고 가끔 서울은 다닐 터이니까, 간혹 만날 수가 있을 것이고, 그러는 동안에는 시방의 전화 대신 편지나 서로 하면서 지내고, 그러노라면 승재도 종차 서울로 올라오겠거니 해서 역시 안심을 했던 것이다.

한참이나 생각에만 잠겨 무심코 걸어가던 초봉이는, 머리 위로 향기를 뿜는 아카시아나무를 또 한번 올려다보고는 방싯 웃는다.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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