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하/제13장
도끼자루는 썩어도……(즉 당세 신선놀음의 일착(一齣))
[편집]동대문 밖 창식이 윤주사의 큰첩네 집 사랑, 여기도 역시 같은 그날 밤 같은 시각, 아홉시 가량 해섭니다.
큰대문, 안대문, 사랑 중문을 모조리 닫아걸고는 감때사납게 생긴 권투할 줄 안다는 행랑아범의 조카놈이 행랑방에 버티고 앉아 드나드는 사람을 일일이 단속합니다.
큼직하게 내기 마작판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벌어진 게 아니라 어젯밤부터 시작한 것을 시방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십 전 내기로 오백 원 짱이니 큰 노름판이요, 대문을 단속하는 것도 괴이찮습니다. 그러나 암만해도 괄세할 수 없는 개평꾼은 역시 괄세를 못 하는 법이라 한 육칠 인이나 그 중 서넛은 판 뒤에서 넘겨다보고 있고, 서넛은 밤새도록 온종일 지키느라 지쳤는지, 머리방인 서사의 방에 가서 곯아떨어졌습니다.
삼칸 마루에는 빙 둘린 선반 위에 낡은 한서(漢書)가 길길이 쌓였습니다. 한편 구석으로 고려자기를 넣어 둔 유리장에다가는 가야금을 기대 세운 게 더욱 운치가 있습니다.
추사(秋史)의 글씨를 검정 판자에다가 각해서 흰 페인트로 획을 낸 주련이 군데군데 걸리고, 기둥에는 전통(箭筒)과 활〔弓〕…….
다시 그 한편 구석으로 지저분한 청요리 접시와 정종병들이 섭쓸려 놓인 것은 이 집 차인꾼이 좀 게으른 풍경이겠습니다.
방은 양지 위에 백지를 덮어 발라 분을 먹인, 그야말로 분벽(粉壁), 벽에는 미산(美山)의 사군자와 ××의 주련이 알맞게 벌려 붙어 있고, 눈에 뜨이는 것은 연상(硯床) 머리로 걸려 있는 소치(小痴)의 모란 족자, 그리고 연상 위에는 한서가 서너 권.
소치의 모란을 걸어 놓고 볼 만하니, 이 방 주인의 교양이 그다지 상스럽지 않을 것 같으면서, 방금 노름에 골몰을 해 있으니 속한(俗漢)이라 하겠으나, 이 짓도 하고 저 짓도 하고, 맘 내키는 대로 무엇이든지 하는 게 이 사람 창식이 윤주사의 취미랍니다. 심심한 세상살이의 취미…….
마작판에는 주인 윤주사와, 그의 손위에 가서 부자요 마작 잘하기로 이름난 박뚱뚱이, 그리고 손아래에는 노름꾼 째보 이렇게 세 마작입니다.
모두들 얼굴에 개기름이 번질번질하고 눈곱 낀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었습니다.
윤주사는 남풍 말에 시방 장가인데, 춘자 쓰거훠를 떠놓고, 통스〔筒字〕청일색입니다.
팔통이 마작두요 일이삼 육칠팔해서 두 패가 맞고, 사오와 칠팔 두 멘스〔面字〕에 구만이 딴짝입니다. 하니 통수는 웬만한 것이면 무얼 뜨든지 방이요, 만일 육통을 뜨면 삼육구통 석자 방인데, 게다가 구통으로 올라가면 일기통관까지 해서 만지만관입니다.
윤주사는 불가불 만관을 해야 할 형편인 것이, 오천을 다 잃고 백짜리가 한 개비 달랑 남았는데, 요행 이 패로 올라가면 사천이 들어와서 거진 본을 추겠지만, 만약 딴 집에서 예순 일백 스물로만 올라가도 바가지를 쓸 판입니다.
하기야 윤주사는 그새 많이 져서 삼천 원 넘겨 펐고 하니, 한 바가지 더 쓴댔자 오백 원이요, 그게 아까운 게 아니라, 청일색으로 만관, 그놈이 놓치기가 싫어 이 패를 기어코 올리고 싶은 것입니다.
패는 모두 익었나 본데, 손 위에서 박뚱뚱이가 씨근씨근 쓰모를 하더니,
"헤헤, 뱀짝이루구나! 창식이 자네 요거 먹으면 방이지?"
하면서 쓰모한 육통을 보여 주고 놀립니다.
내려오기만 하면 단박 사오륙으로 치를 하고서 육구통 방인데, 귀신이 다 된 박뚱뚱이는 그 육통을 가져다가 꽂고 오팔만으로 방이 선 패를 헐어 칠만을 던집니다.
"안 주면 쓰모하지!"
윤주사가 쓰모를 해다가 훑으니까 팔만입니다. 이게 어떨까 하고 만지작만지작하는데, 뒤에서 넘겨다보고 있던 개평꾼이 꾹꾹 찌릅니다. 그것은 육칠팔통을 헐어 사오륙으로 맞추고 칠통 두 장으로 작두를 세우고 팔통 넉 장을 앙깡으로 몰고, 팔구만에 칠만변 짱 방을 달고서 팔통 앙깡을 개깡하라는 뜻인 줄 윤주사도 모르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가령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청일색도 아니요 핑호도 아니요, 겨우 멘젱 한 판, 쓰거훠 한 판, 장가 한 판, 도합 세 판이니, 물론 백짜리 한 개비밖에 안 남은 터에 급한 화망은 면하겠지만, 윤주사의 성미로 볼 때엔 그것은 치사한 짓이요 마작의 도도 취미도 아니던 것입니다.
윤주사가 팔만을 아낌없이 내치니까, 손위의 박뚱뚱이가 펄쩍 뜁니다. 육칠만을 헐지 않았으면 그 팔만으로 올라갔을 테니까요.
"내가 먹지!"
손아래서 노름꾼 째보가 육칠팔로 팔만을 치하는 걸, 등뒤에서 감독을 하는 그의 전주(錢主)가, 아무렴 먹고 어서 올라가야지 하고 맞장구를 칩니다. 째보는 윤주사가 만관을 겯는 줄 알기 때문에 부리나케 예순 일백 스물로 가고 있던 것입니다.
박뚱뚱이가 넉 장째 나오는 녹팔을 쓰모해 던지면서,
"옜네, 창식이……."
"그걸 아까워선 어떻게 내나?"
윤주사는 그러면서 쓰모를 해다가 쓰윽 훑는데, 이번이야말로! 하고 벼른 보람이던지 과연 동그라미 세 개가 비스듬히 나간 삼통입니다.
삼사오통이 맞고, 인제는 육구통 방입니다.
윤주사는 느긋해서 구만을 마악 내치려고 하는데, 마침 머리방에 있던 서사 민서방이 당황한 얼굴로 전보 한 장을 접어 들고 건너옵니다. 마작판에서는들 몰랐지만 조금 아까 대문지기가 들여온 것을 민서방이 받아 펴보고서, 일변 놀라, 한문자를 섞어 번역을 해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전보 왔습니다!"
"……"
윤주사는 시방 아무 정신도 없어 알아듣지 못하고, 구만을 따패합니다.
노름꾼 째보가 날쌔게,
"펑!"
서사 민서방이 연거푸,
"전보 왔어요!"
그러나 창식은 그저 겨우,
"응? 전보……? 구만 펑허구 무슨 자야? 어디 어디……?"
"동경서 전보 왔어요!"
"동경서? 으응!"
윤주사는 손만 내밀어서 전보를 받아 아무렇게나 조끼 호주머니에 넣고 박뚱뚱이의 따패가 더디다는 듯이 쓰모를 하려고 합니다.
"전보 보세요!"
"응, 보지. 번역했나?"
"네에."
윤주사는 쓰모를 해다가 만지면서 전보는 또 잊어버립니다. 사만인데 어려운 짝입니다. 손위의 박뚱뚱이는 패를 헐었지만 손아래 째보는 분명 일사만인 듯합니다.
"전보 긴한 전본데요!"
민서방이 초조히 재촉을 하는 것이나, 창식은 여전히,
"응……? 응…… 이게 못 내는 짝이야……! 전보 무어라구 왔지?"
"펴보세요, 저어."
"응, 보지…… 이걸 내면은 아랫집이 오르는데…… 왜? 종학이가 앓는다구?"
"아녜요!"
"그럼……? 가마안 있자, 요놈의 짝을 어떡헌다……? 나, 전보 좀 보구서……! 이게 뱀짝이야! 뱀짝……."
전보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모해 온 사만을 따패하면 손아랫집이 올라가고, 올라가면 이 좋은 만관이 허사요, 그러니까 사만을 낼 수가 없고, 그래 전보라도 보는 동안에 좀더 생각을 하자는 것입니다.
윤주사는 종시 정신은 마작판의 바닥에다가 두고, 손만 꿈지럭꿈지럭 조끼 호주머니에서 전보를 꺼냅니다.
"……이거 사만이 분명 일을 낼 테란 말이야, 으응!"
"이 사람아, 마작판에 몬지 앉겠네!"
"가만있자…… 내, 이 전보 좀 보구우……."
윤주사는 왼손에 든 전보를 손가락으로 만지작만지작, 접은 것을 펴가지고는 또 한참이나 딴전을 하다가, 겨우 눈을 돌립니다. 번역해 논 열석 자를 읽기에 그다지 시간과 수고가 들 건 없었습니다.
"빌어먹을놈……."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전보를 아무렇게나 도로 우그려 넣고는,
"……에라, 모른다!"
하고 여태 어려워하던 사만을 집어 따악 소리가 나게 내쳐 버립니다.
"옳아! 바루 고자야!"
아니나다를까, 손아래 째보가 일사만 방이던 것입니다. 끝수래야 일흔 일백 서른!
"빌어먹을놈!"
윤주사는 아들 종학이더러, 전보 조건으로 또 한번 욕을 합니다. 그러나 먼저 치는 옳게 그 전보 내용에다가 욕을 한 것이지만, 이번 치는 만관을 놓친 화풀이로다가 절로 나와진 욕입니다.
"큰댁에 기별을 해야지요?"
드디어 바가지를 쓰고, 그래서 필경 오백 원 하나가 또 날아갔고, 다시 새 판을 시작하느라 마작을 쌓고 있는 윤주사더러, 민서방이 걱정삼아 묻는 소립니다.
"큰댁에? 글쎄……."
윤주사는 주사위를 쳐놓고 들여다보느라고 건성입니다.
"제가 가까요?"
"자네가……? 몇이야? 넷이면 내가 장이군…… 자네가 가본다?"
"네에."
"칠 잣구…… 그래두 괜찮지…… 아홉이라, 칠구 열여섯……."
윤주사는 패를 뚜욱뚝 떼어다가 골라 세웁니다.
"그럼, 다녀오까요?"
"글쎄…… 이건 첨부터 패가 엉망이루구나……! 인제는 일곱 바가지나 쓴 본전 생각이 간절한걸…… 가긴 내가 가보아야겠네마는…… 자네가 가더래두 내가 뒤미처 불려가구 말 테니깐…… 녹발 나가거라…… 그놈이 어쩐지 눈치가 다르더라니……! 빌어먹을놈!"
"차 부르까요?"
"응!"
"마작 시작해 놓구 어딜 가?"
박뚱뚱이가 핀잔을 줍니다.
"참, 그렇군…… 그럼 어떡헌다? 남풍 나갑니다!"
"네에, 여기 동풍 나가니, 펑하십시오!"
"없습니다!"
윤주사는 또다시 마작에 정신이 푹 파묻히고 맙니다.
민서방은 질증이 나서 제 방으로 가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윤직원 영감한테나, 그 며느리 고씨한테나, 서울아씨며 태식이한테나, 창식이 윤주사며 옥화한테나, 누구한테나 제각기 크고 작은 생활을 준 이 정축년(丁丑年) 구월 열××날인 오늘 하루는 마침내 깊은 밤으로 더불어 물러갑니다.
오래지 않아 새로운 날이 밝고, 밝은 그 새날은 그네들에게 다시 어떠한 생활을 주려는지, 더욱이 윤주사가 조끼 호주머니 속에 우그려 넣고 만 동경서 온 전보가 매우 궁금합니다. 하나 밝는 날이면 그것도 자연 속을 알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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