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페이지:조선어학회 한글 (1권 3호).pdf/13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이 페이지는 아직 교정을 보지 않았습니다

推하는 일」은 學理에 매우 重要한 것이어늘, 거기에는 이 法을 全然 容許치 않는 것도 잇다。 그러니, 이 나라에서의 그 綴字 改正은 部分的에만 그치고 말았다 할 수 잇다。


5. 홀란트에서의 改正論

第19世紀 初까지는 홀랜드의 表記法은 퍽 亂雜한 것이었다。 그러튼 것이, 1804年에 이르러, 폰·지겐베크 敎授(Prof·Von Siegenbeek)의 論文에 基하야, 改革論者들이 차차 한 團結을 하게 되엇다。 그래서, 그 後에 氏의 法이 매우 施行 되었으나, 1873年에 드·브리스 (DeVries)와 테윈켈(Tewinkel) 二氏로부터 重要한 改革案이 提出되매, 政府에선 그것을 採用하기로 하였다。 그런즉, 이 나라의 表記法은 아직 完成에 이르렀다고는 할 수 없으나, 改正의 氣運으로 向해 나간 것만은 이다。


6. 도이츨란트에서의 改正論

게르만에서도 綴字 改正의 運動이 잇엇는데, 元來 獨逸語는 다른 歐洲 諸語에 比하야 그 綴字法이 훨씬 完全함에도 不拘 하고, 政府는 오히려 一層 이것을 簡潔히 하기 為하야, 1854年에 한노베르(Hannover)와 및 라임치시(Leipzig)에 會議를 열고, 여러가지 改正할 点을 調査하였다。 그 뒤에도 1860年에 위르템베르그(Wuertemberg)에서 會議를 열고, 1861年엔 오 스트리아(Austria)에서, 1866年엔 바바리아(Bavaria)에서 會議를 열었다。 그런데, 이 나라의 言語는 各州를 따라 다른 点이 잇으므로, 그 統一을 꾀하기 爲하야, 1872年 十月에 各州의 委員을 드레스덴(Dresden)에 召集해 놓고, 라우메르敎授(Prof. Von Raumer)로 하여금 改正案을 起草케 하야 가지고, 그 다음 敎授外 十一人으로 組織된 會議에다 이것을 提出하야 討議케 하였다。

그러나, 이 會議에서는 1876年에 이 案을 修正하야, 國民 一般에게 發表하고, 그 批評을 求하였으나, 國民은 겨우 該案의 2, 3個案에만 贊成의 뜻을 表하였을뿐이엇다。

그 뒤에, 純粹하게 表音的 改正을 하려는 한 學會가 일엇낫는데, 그 것은, 겨우 14個月 間에 70 以上의 支部가 일어나서, 매우 盛大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직껏 完全하는 그 目的을 達치 못하였을망정, 早晩間 完成에 達할 傾向은 보이는 것이 다。


7. 잉글랜드에서의 改正論

잉글랜드에 잇어서도, 從來 種種의 會學 學議가 일어나서, 改正에 盡力하였으나, 不幸히도 아직 그 目的을 達치 못하였다。 慨歎할 일이다。


8. 유나이티드스테이츠 어브 아메리카에서의 改正論

美國에서는, 從來 綴字 改正의 目的으로, 調査委員會(The Simplified Spelling Board)를 設置하였으나, 委員은 各方面의 人士 28名으로 組織되었다。

元來 이 會는 富豪 카네기(Canegie)의 寄贈한 資金으로써 成立한 것인데, 氏도 그 委員의 한 사람이다。 그 改正 草案은 1906年에 이르러 거진 完成되엇다。 當時 大統領 루스벨트(Roosevelt)는 大體 이것을 是認하고, 우선 官文書에 이것을 實施 키를 宣言하였다。 그 案은 40餘條로 되엇는데, 大凡 300의 言語를 撰擺하야 이것을 改正키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改 正案은 佛蘭西의 改正案과 마찬가지로, 그 改正을 何等의 理論的 基礎에서 出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