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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조선어학회 한글 (1권 3호).pdf/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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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은 말들을(暹羅語, 西藏語) 單音語라 혹은 孤立語라고 이름을 짓는다。 그것이 一理는 잇는 것이니, 音節마다 말의 뜻이 잇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것은 語幹을 보거나, 또 文語인 漢文만 보고 하는 말이요, 會話의 말 곧 白話를 두고 한 말은 못된다。 어느 나라 말이라도 혹은 單音語만 혹은 複音語만 잇는 것이 아니요, 두 가지가 다 섞이어 잇는 것이다。 中國말에도 自話에는 複音語가 많은데, 아무 뜻도 없이 소리만 따다가 쓴 글자가 여간 많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複音語가 더 發達될 것을 말하며, 또 四聲廢止論까지 생기엇다。 또 中國말과 같은 語族에 붙은 暹羅말이나 西藏말은 印度文字에서 온 音表文字만 가지고 오래동안 써 와도 아무 不便이 없다. 이것만 보아도, 中國의 注音符號가 成功될 것을 꼭 믿는다。

中國은 과연 統一된 國語를 가졌는가 하면, 全體로 보아서는 그러케 못 되었다。 廣東, 福建, 浙江等 몇 省은 제 各各 아주 外國語나 다름이 없는 方言을 가지었고, 또 그 밖의 다른 各 地方에도 서로 못 알아 들을만한 方言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官話로 써 서로 通情은 할 수가 있다。 이 官話는 大體로 北平말을 中心한 官吏界나 一般 上等 社會에서 널리 쓰는 交際語이다。注音符號는 이 官話의 音을 標準하야 만든 것이다。


四. 注音符號의 發達

1. 音標의 創造。 여러 千年 동안에 反切이 唯一한 標音法이드니, 이제 와서는, 그것만으로 도저히 쓸 수가 없다。 그래서, 注音符號의 發端은 벌서 六七十年 前에 西洋 宣敎師가 예수敎를 傳道하려고 中語를 배우게 되메, 로마字로써 中國 各地의 方言을 적게 된 것이다。그 뒤에 香港에 王炳耀가 中國式 注音符號를 만들어서, 몇 해 동안 쓰다가, 普及이 못 되었고, 三十餘年 前에 福建에 蔡錫勇이 또한 中國式 符號를 만들어 보았다。 그 때에도 直隷省에 王照가 漢字의 偏旁으로 써 字母를 만들어 北平音을 적게 되매, 그것이 北方에 널리 普及 되었고, 그 뒤에 浙江省에 勞乃宣이 또 그것을 더 고쳐서 簡字를 만들매, 이것은 南方에 普及되었다。 그래서, 雨後竹筍格으로, 各地에 音韻 專門家들이 音標를 創製한 이가 五十餘人 이나 되어서, 제 各各 宣傳하였다。

2. 字母의 製定。 西曆 一九一二年에는 敎育部(文部省)에서도 外部의 潮流가 이러한 것을 보고, 特別히 讀音統一會 組織케 되었다。 一九一三年 봄에는 敎育部에서 또 音韻專門家를 招聘하야 會員을 삼은 밖에, 省마다 各各 代表 二人을 派送하게 되고, 蒙古와 西藏에 사는 華僑가 各各 代表 一人을 派送하게 되어, 會員이 모두 七十九人이나 되었다。 이 모임에서 音標 三十 九個를 議定하야, 注音字母라 이름하고(一九三○年에 國民政府 中央執行委員 常務會에서 注音符號라고 고침) 또 常用 漢字 七千 二百個의 讀音을 審定하고, 閉會한 뒤에, 該會 會長 吳敬恒, 會員 王璞, 陳懋治等이 會中에서 審定한 七 千二百字의 讀音을 注音符號로 一一이 달고, 또 그 밖에도 同音字 六千 五百餘字를 더 붙여서, 總히 一萬 三千 七百餘字를 모아, 國音字典을 編成하였다。

一九一八年에 敎育部에서 注音字母를 正式으로 公布하니, 이에 비로소 注音字母가 國定 音標가 되었다。

注音字母 各方面에서 試用한바 缺陷이 없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敎育部 國語統一籌備會(一九一九年 四月에 成立됨)에서 各方面의 意見을 모아서, 修正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