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페이지:조선어학회 한글 (1권 3호).pdf/8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이 페이지는 아직 교정을 보지 않았습니다

語文 研究에 精進하게 되었다。

그 後 明治 十四年에는 伊藤圭介氏가 假名說을 主張하고, 翌 十五年에는 矢田部吉氏가 羅馬字探用說을 力訟하드니, 十六年에 이르러는, 西德次郞, 高崎正風, 那珂通世, 大槻文彥, 丸山作樂, 福羽美靜, 物集高見 等 十七人의 名士가 모여서, 「かなのとも」라는 團體를 組織하야, 機關雜誌를 發行하였다。 또 그 해에 四種의 假名會가 合體하야, 「かなのくわい」를 組織하였으나, 그 中에는 多少 意見을 달리하는 會員이 잇어서, 그 會를 雪, 月 花 三部에 나눈 일이 잇엇다。

明治 十七年에는 外山正一氏가 漢字排斥을 力說하고, 三宅雄二郞氏는 漢字保存을 主張하야, 彼此間에 激烈한 論戰이 盛行하였다。 이 때에 外山正一氏는 矢田部氏等과 協力하야, 「羅馬字會」를 發起하야. 多數한 會員을 얻고, 翌 十八年에는 羅馬字 日本語 表記하는 方法을 制定하엿으며, 機關誌 「Romaji zasshi」(羅馬雜誌)를 發行하야 熱心으로 宣傳하였다。 그 후로 榎本武揚, 手島精一, 未松謙澄, 增島六一郞 諸氏가 繼續하야, 이 羅馬字 國字論에 贊成하였다。


三. 言文 一致說

明治 十九年에 失野文雄氏는 「日本文體 文字新論」이란 論文을 發表하야, 假名 及 羅馬字論을 排斥하고, 從來와 같이 漢字 假名 兩 並用하는 것이 가장 賢明한 方法이라는 것을 仔細히 論述하엿으나, 그리 世人의 注目을 끌지 못하엿다。 仝年에 物集高見氏는 「言文一致」라는 글을 發表하야, 文章은 모두 國語體로 쓰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說을 高昌하엿으며, 또 橫列書法(가로쓰기)을 採用하기를 主張한 것은 當時에 잇어서, 매우 㟻新한 考案이라 하야, 크게 一世의 注意를 끌게 되엇섯다。 西洋文明을 輸入하기에 汲汲하든 그들은 英, 獨, 佛等 歐洲 諸國의 말을 배울새, 그 나라의 말들이 입으로 말하든 것이나 文章으로 적어 내는 것이 全然 同一한 것을 보고, 그 便利한 點에 對하야 三歎을 禁치 못하엿으니, 言文一致의 運動이 일어날 것은 自然한 趨勢엿다。 明治 二十年에 Chamberlain氏와 같은 이도 羅馬字를 探用하려면, 爲先 文體를 改良하야 言文一致體로 變更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말을 한 일이 잇었다。 十九年부터 文部省에서도 敎科書中에 國語文을 採用하기 시작하였으며, 二十年 頃에 이르러서는 山田美妙齊氏가 또한 言一致의 必要를 主張하야, 自己의 作品을 言文一致體로 쓰기 시작하매, 이에 響應하야, 尾崎紅葉, 長谷川四迷, 川上眉山等의 여러 小說家도 다 國語體로 小說을 써 내었다。 이리하야, 國語文은 實로 長足進步의 形勢를 보였다。

그 後 一時는 日本語 語文 運動이 떨치지 못하야, 沈滯한 狀態에 잇엇으나, 明治 二十七八年 日靑戰爭이 끝난 뒤에 그 問題는 다시 擡頭하기 시작하였다。 卽 二十九年에 落合直交氏는 처음으로 中等學校用 日本文 敎科書에 國語文을 넣었으며, 明治 三十三年에는 根本正氏等 五人이 「國字國語國文の改良に關する建議案」을 衆議院에 提出하고, 또 그와 同一한 建議案을 加蘇弘之氏가 貴族院에 提出하엿드니, 兩院에서 모두 그 案을 修正하야 可決하엿다。


四. 新文字 創制說

여기에 한가지 붙여 말하고저 하는 것은 日本 國會에 이 語文改良案이 提出된 時機를 前後하야, 新文字가 많이 創制된 事實이다。 元來 文字라는 것은 社會 全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