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독안 괴룡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독안 괴룡(獨眼 怪龍)

신라(新羅)의 찬란한 황금시대도 어느덧 다 지나가고 쓸쓸한 가을바람이 계림황엽(鷄林黃葉)에 불어들기 시작하여 제오십일대 왕 진성여왕시대(眞聖女王時代)에 이르러서부터는 간신(奸臣)이 조정에 가득하여 나라의 기강(紀綱)이 날로 문란하고 겸하여 흉년이 연달아 드니 백성이 모두 유리분산하고 사방에 도적의 무리가 벌떼같이 일어났다.

그러한 때를 타서 신라에는 두사람의 큰 괴걸(怪傑)이 일어나 천하를 남북으로 갈라 가지고 열하여 서로 쟁탈전을 하니, 한사람은 후백제왕 견훤(後百濟王甄萱)이요, 또 하나는 여기에 말하려고 하는 태봉국왕 궁예(泰封國王弓裔)이다. 그는 혹은 신라 제사십칠대왕 헌강왕의정(憲安王誼靖)의 서자, 혹은 사십팔대 경문왕 음염(景文王膺廉)의 아들이라고 한다. 오월 단오날에 그의 외갓 집에서 탄생하였는데 날때에 무지개 같은 흰 광선(素光[소광])이 지붕 위를 둘러 싸고 머리에 이상한 광채가 있으며, 날때부터 이(齒[치])가 있으니,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어 점쟁이(占者[점자])에 물은 즉 점쟁이가 말하기를 오월 단오에 낳은 아이는 원래 불길할 뿐 아니라 특히 이 아이는 나면서부터 이가 나고 또한 이상한 광채가 있어서 장래에 반드시 국가에 불리할 터인즉 양육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한다.

헌안왕(憲安王)은 그 말을 곧이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죽이게 하였다.

그러나 사신이 그를 포대기(褓[보])속에서 꺼내어 다락밑에다 던져 버렸더니 유모가 불쌍히 여기고 비밀히 받다가 잘못 되어 손으로 한쪽 눈을 찔러서 실명케 하고 그대로 도망하여 십여년 동안을 남모르게 양육하였다.

그는 자라며 장난을 몹시 좋아하니 그의 유모가 경계하여 말하되

『네가 처음 낳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으니 내가 인정상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비밀히 받아 길러 오늘 날까지 이르렀는데 네가 이와같이 조금도 조심을 하지않고 함부로 나가 장난을 하니 만일 남에게 혹시나 발각된다면 너와 내가 다 같이 화를 당하게 될 것이니 그 일을 장차 어찌 하겠느냐?』

하니 궁예가 울며 말하되

『만일 그러하다면 나는 종적을 감추어 없어져서 유모의 걱정을 덜어 드리겠읍니다.』

하고

그날로 도망하여 세존사(一名 興敎寺[일명 흥교사]) 라는 절을 찾아 가서 머리를 깎고 중(僧[승])이 되어 스스로 이름 짓기를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그러나 원래 비범한 그는 구구스러운 승가(僧家)의 계명에 구속을 받지 않고 항상 자유행동을 하였다.

하루는 재(齋)를 올리러 가는데 뜻밖에 까마귀(烏[오]) 한마리가 점대(竹籤[죽첨])를 물고 공중으로 날아가다가 그가 가지고 가는 바리(鉢[발]) 속에다 떨어뜨리므로 괴상하게 여겨 본즉 이상하게 그 점대에는 임금왕자(王字)가 뚜렷하게 씨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혼자서 기뻐하여 다른 사람에게 말도 하지 아니하고 항상 자부(自負)하여 그 뒤에 큰뜻을 품고 활약하며 좋은 기회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때 마침 신라는 국정(國政)이 문란하여 사방에 도적이 일어나 여러 주군(州郡)을 점령하였으니 궁예가 스스로 생각하되

『이러한 난세(亂世)에 아무 공(功)도 이루지 못하고 산중에 헛되이 늙는 것은 대장부의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장삼과 목탁(木鐸)을 모두 불 지르고 즉시 산에서 내려와 죽주군 죽산적 견훤(竹州郡竹山賊甄萱)을 찾아 갔었다.

그러나 견훤은 원래 사람됨됨이 오만자과하는 자인 까닭에 궁예를 대하는 태도가 또한 오만 무례한 일이 많으니 궁예가 울울 불평하여 마음을 안정치 못하고 다만 그의 부하 원회(元會), 신선(申宣)으로 벗을 삼아 심회를 서로 의논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 다음에 임자(壬子)에 다시 북원적 양길(北原 〓 今原州[금원주]) (賊[적] 梁吉[양길])을 찾아가니 길(吉)이 특히 후대하여 큰 일을 맡기고 또 군사를 논아주어 동(東)으로 각지를 공략(攻略)케 하였다. 궁예는 크게 기뻐하여 치악산 석남사(雉岳山石南寺)로 나아가 근거를 정하고, 주천(酒泉 〓 지금의 原州[원주]) 내성(奈城 〓 지금의 寧越地[영월지]) 울오(鬱烏 〓 지금의 平昌地[평창지]) 어진(御珍 〓 지금의 蔚珍地[울진지])등 여러 고을을 습격하니, 여러 고을이 모두 바람을 따라 귀항하였다.

그 이듬해 ― 바로 진성왕 팔년갑인(眞聖王八年甲寅)에는 또 명주(溟州 〓 只今江陵[지금강릉])를 점령하니 부하병이 이천오백여명(二千五百餘人)에 달하였다.

궁예는 전군을 십사(十四)대로 편성하여 김태(金太), 검모(黔毛), 흔장(昕長), 귀평(貴平), 장일(張一)등으로 사상(舍上 〓 卽部長[즉부장])을 삼고, 사졸로 더불어 감고(甘苦)와 노역을 같이하여 지극히 사소한 물품을 분배하는 데까지도 극히 공평 무사하게 하니 인심이 모두 그에게 감복하여 그를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궁예는 다시 제족(猪足) 〓 지금의 麟蹄[인제]) 생천(牲川 〓 지금 華川[화천]) 수야(水若 〓 지금의 春川[춘천]) 금성(金城) 철원(鐵圓 〓 지금의 鐵原[철원])등지를 쳐서 차지하니 사방의 적들이 모두 귀화하였다.

일이 이와 같이 잘 되어가니 궁예는 스스로 생각하되

『나의 세력이 이만하면 능히 국가를 건설하고 군왕도 될 만하겠구나.』

하고 내외관직을 설치하고 새로 투항한 송악군 사람 왕건(松嶽郡人王建 〓 卽[즉] 高麗太祖[고려태조])과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 〓 裵玄慶[배현경]), 능산 신숭겸(能山申崇謙) 복사귀(卜沙貴) 등 여러 인물을 맞아들여서 부하 장군을 삼았다.

그리고 진성왕 십년 병진(眞聖王十年丙辰)에는 승령(僧嶺 〓 지금의 朔寧地[삭영지]) 임강(臨江 〓 지금의 長湍地[장단지]) 두 고을을 차지하고, 그 다음해 정사(丁巳)에는 또 인물현(仁物縣)을 차지했는데 궁예는 또 말하되

『송악군(松嶽郡)은 한북의 명군으로 산수가 아름다운즉 가히 국도(國都)가 될만하다.』

하고 이어서

그곳으로 국도를 정하고 공암(孔巖 〓 陽川[양천]) 검포(黔浦 〓 金浦[김포]), 혈구(穴口 〓 江華[강화])등 성을 쳐서 첨령하였다.

이때 양길(梁吉)은 아직까지 북원(北原)에 있어서 국원(國原 〓 忠州[충주])등 삼십여군(三十餘郡)을 겨우 차지하고 있으나, 궁예의 지광민다(地廣民多)한 것을 보고 시기하기고 분노하여 부하 삼천명의 날쌘군사를 뽑아 궁예로 습격하다 도리어 궁예에게 먼저 습격당하여 크게 패하니 궁예가 그의 삼십여성까지도 모조리 차지하게 되었다.

궁예는 다시 그 승세(勝勢)를 이용하여 효공왕 이년 무오 이월(孝恭王 二年戊午 二月)에는 송악군에 성(城)을 쌓고, 왕건으로 정기대감(精騎大監)을 삼아 양주(楊州) 견주(見州 〓 지금의 楊州地(양주지)를 쳐서 차지하고 동왕(同王) 사년 경신(四年庚申)에는 또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 지금의 수원南陽地[남양지]) 청주(淸州城[청주성]은 靑山[청산]〓지금의 淸州地[청주지]) 괴양(槐壤 〓 지금의 槐山[괴산]) 등을 토평(討平)하고 그 공으로 왕건에게 아손(阿飡) 벼슬을 주었다.

궁예는 세력이 날로 그와 같이 커지니 천하에 왕이 되고 싶은 패심이 더욱 발아(發牙)하게 되어 효공왕 오년신유(孝恭王五年辛酉)에는 당당하게 왕이라 칭호하고 국내에 선언을 하되

『전날에 신라(新羅)가 당나라(唐)에 구원병을 청하여 무리하게 고구려를 쳐서 멸한 까닭에 그 국도 평양(國都平壤)이 덧없이 황폐한 폐허가 되고 말았은즉 나가 반드시 고구려를 위하여 그 원수를 갚겠다.』

하니 고구려의 유민이 모두 기뻐하며 향응하였다.

(이 선언은 물론 고구려의 옛날 땅인 북부 우리 나라의 인심을 수습하고 일방으로는 신라왕이 자기를 학대한 것에 대하여 원한을 품은 데서 나온 것이다. 그가 흥주(興州 〓 順興[순흥]) 부석사(浮石寺)에 갔다가 신라왕의 벽상(壁像)을 보고 칼로 친 것을 보아도 평소 그 원한이 어떠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효공왕팔년(孝恭王八年)에 나라를 새로 창건하되 이름을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年號)를 무태(武泰)라 하며, 관제(官制)를 새로 정하고, 칠월에는 청주(靑州)의 인호(人戶) 일천(一千)을 철원(鐵原)에 이주(移住)시키고

그 성(城)으로 왕경(王京)을 삼으며 또, 상주(尙州)등 삼십여주(三十餘州)를 쳐서 빼앗으니 공주 장군 홍기(公州將軍弘寄)가 또한 와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 즉 기축(己丑)년에는 새 서울에 들어가서 궁궐과 여러 관청을 크게 건축하니 그 화려하고 굉장함이 능히 신라의 왕경(王京)을 능가하고, 무태(武泰)란 연호를 고쳐서 성책원년(聖冊元年)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패서(浿西)에 십삼진(十三鎭)을 설치하니, 평양 주장 검용(平壤主將黔用)이 그의 위풍에 눌려 스스로 항복하고 증성(甑城)의 적의적 황의적(赤衣賊黃衣賊) 명귀(明貴)등이 또한 와서 항복하였다.

궁예는 이렇게 되자 신라를 병합코저 하여 자기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신라를 부르되 멸도(滅都)라 하고, 또 신라에서 오는 사람이면 모조리 다 죽이고 왕건을 명하여 금성(錦城)을 치더니 나주(羅州)라고 개칭(改稱)하였다.

승책칠년 신미(聖冊七年辛未)에는 다시 연호(年號)를 고치어 수덕만세(水德萬歲)라 하고 국호는 태봉(泰封)이라 고치었다.

궁예는 이와 같이 무공(武功)으로 국가를 건설하고 왕이 되었으니, 원체 불교(佛敎)의 신도(信徒)인 까닭에 불교에 대한 신앙심(信仰心)과 연구는 항상 게으르지 않아서 자호를 불러 말하되 미륵불(彌勒佛)이라 하고 머리에는 금책(金幘)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를 입으며, 맏아들은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 하고, 외출할 때에는 채색실로 장식한 백마를 타고 동남동녀(童男童女)로 하여금 일산과 향불을 받들고 앞을 인도하게 하며, 승니(僧尼) 이백인(二百人)으로 염불하며 뒤를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또 그는 불경 이십여권을 저술케 하였으니 그 말이 모두 신기 괴이하여 월래 경전에 없는 것이 많고 또 어떤 때에는 정좌강설(正坐講說)을 하되 그 강설을 반대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철퇴를 쳐서 때려 죽이니 누가 감히 이설(異說)을 하는 자가 없었다.

사년 갑술(甲戌)에는 수덕만세의 연호를 고쳐서 다시 정개원년(政開元年)이라 하고 왕건으로 백선장군(百船將軍)을 삼아 나주(羅州) 해상에서 후백제(後百濟)의 함대를 멸하니 국위가 일시에 천하를 진동하였다.

그러나 교사자만 결과로 실덕(失德)과 비행이 많아서 부인 강씨(康氏)가 직간하였더니, 그는 크게 노하여 그 부인을 간음죄로 몰아 불에 달은 쇠공이로 그의 음호를 쳐서 죽이고 그의 아들 형제까지 다 죽였다.

그 후부터 그의 정신은 더욱 흥분되어 아무에게나 의심을 품고 또 조금만 나쁘면 격노하여 부하 관료(官僚)와 일반 평민까지 무고하게 살해를 하니 그 부근의 백성들이 모두 공포에 쌓여 안정한 생활을 하지 못하였다.

정개오년 무인(政開五年戊寅)이었다.

당(唐)나라 상인(商人) 왕창근(王昌瑾)이 칠월에 우거하여 장사를 하더니 하루는 본즉 상모가 잘생기고 의관이 기괴한 어떤 백발노인이 왼손에는 사기 사발을 가지고, 오른손에는 옛날 거울(鏡[경])을 가지고 와서 거울을 사라고 하므로 창근이 쌀을 주고 바꾸었더니 그 노인은 그 쌀을 거리에 있는 걸인(乞兒)들에게 나누어 주고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창근은 그 거울을 벽상에 걸어 두었더니 일광이 경면(鏡面)에 비치어 거기에는 가늘게 쓴 글자가 완연히 나타났는데 어찌 보면 옛시(古詩[고시])와도 비슷하였다.

『상제강자어진마, 선조계후박압, 기사년중이용견, 일즉장신청목중, 일즉현형흑금동』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己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창근은 처음에 그 글자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가 나중에 발견하고 이상히 여겨 궁예왕에게 고하였더니 왕은 관리와 함께 그 거울 임자를 찾게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찾지 못하고 다만 발삽사불당(勃颯寺佛堂)에 진성의 흙상(鎭星塑像[진성소상])이 있는데 그 사람과 모양이 비슷할 뿐이므로 왕은 이상히 여겨 한참 개탄하다가 문인(文人)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을 명하여 그 뜻을 해석케 하였다. 서로 의논하여 말하되 상제강자어진마(上帝降子於辰馬)는 진한 마한(辰韓馬韓)에 제왕이 난다는 말이요, 이용견에 일즉 장신청목하고 현형흑금(二龍見一則藏身靑木一則顯形黑金)이란 것은 청목은 소나무니 송악군(松嶽郡) 사람중에 용으로써 이름을 지은 사람의 아들되는 왕건(王建)을 말함이요, 흑금은 철(鐵)이니, 지금의 국도(國都) 철원을 말함인데 지금 그 왕이 처음에 이곳에서 흥하였다가 나중에는 이곳에서 망할 것임을 뜻함이요.

선조계후박압(先操鷄後搏鴨)은 왕건이 먼저 계림(鷄林) 즉 신라(新羅)를 얻고 뒤에 압록강까지 얻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의 주상이 이와 같이 사나우니 우리가 만일에 사실대로 그 말을 한다면 당장에 우리만 화를 당할 뿐이 아니라 왕의 시중을 드는 사람까지도 해를 입을 것이라 하고 이에 말을 달리 꾸며서 대답하였더니 왕은 그대로 보고 조금도 뉘우치고 깨달음 없이 횡포한 행동만 더욱 심하여 일반 국민이 크게 공포에 떨어 어쩔 줄을 몰랐다.

그해 유월(六月)이었다.

장군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등은 혁명의 음모를 하고 왕건의 집에 달려가 말하되

『지금에 주상이 흉악무도하여 처자를 학살하고 신하를 함부로 죽여 백성이 도탄 속에 들은 지라 자고로부터 어두운 임금을 폐하고 착한 임금을 내놓는 것이 천하의 의리요 대의(大義)인즉 공은 탕무(湯武)의 옛일을 행하시요.』

하니 왕건은 처음에 사양하다가 여러 부하들이 여러번 권하고 특히 그 부인 유씨는 갑주(甲冑)까지 입히고 출동하기를 강권하니 왕건은 마침내 허락하고 즉시 자기집에서 즉위식(卽位式)을 행 한후에 혁명의 깃발을 들어 여러

장수들을 앞장 삼아 고함을 치며 궁문(宮門) 앞으로 돌진하니 일반 국민들이 또한 이에 응하여 만세를 부르며 아우성을 쳤다.

그때에 궁예왕은 궁중에서 시녀들과 같이 질탕치게 놀다가 졸지에 변을 당하매 어쩔줄 모르고 창황망조하다가 마침내 미복으로 도망하여 산속에 피난하더니 목이 타고 물이 먹고 싶어 참지못하여 농촌의 보리밭에 내려와서 보리 이삭을 따먹다가 평강 백성들에게 해(害)를 입으니 그 강대하던 태봉국도 겨우 십팔년을 일기로 그만 멸망하고 말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