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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철인 이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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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哲人) 이토정(李土亭)

이토정(李土亭)은 어떠한 사람인가, 음력으로 정초가 되면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일년 신수를 보느라고 소위 토정비결(土亭秘訣)이란 책을 많이 보게 된다. 그것이 꼭 들어 맞고 아니 맞는 것은 별문제로 하고 그책을 통해서 토정이란 이름만은 누구나 잘 알게 되었다. 그러면 대체 토정이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며는, 그는 우리 나라에서 팔리대성(八吏大性)의 하나로 유명한 한산이씨(韓山李氏)의 지함(之凾)이라는 분이니, 고려 말년에 학자 시인(詩人)으로 이름난 이목은(李牧隱)의 후손으로, 그 부친은 판관 이치(判官李穉)요 형님은 인종대왕께서 백의재상(白衣宰相)이라고 부르시던 유현 이지번(儒賢 李之蕃 號[호] 省菴[성암])이요, 또 그 조카 되는 분은 아계 이정승(鵝溪李政丞 〓 山海[산해])이다.

가벌도 그렇게 좋게 잘 타고 났거니와 천재가 비상하고 도학과 문장이 탁월하여 그의 천문지리(天文地理), 의약복서(醫藥卜筮), 병서(兵書),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을 무불통지하고 인격과 사상 식견이 또한 고상하여 평생에 기행 이적(異跡)이 많으니 세상 사람들이 이인(異人) 또는 기인(奇人)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중종(中宗) 十二[십이]년 정축(丁丑)에 낳았는데 일찌기 부친이 돌아가고 그의 형님 성암 지번(省菴之蕃)선생에게 교육을 받다가 장성한 뒤에는 당시 이학자(理學者)로 유명한 화담 서경덕선생(花潭徐敬德先生)의 문하에 가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워 드디어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인격과 학문이 그렇게 탁월하고 또 사회관(社會觀)과 인생관(人生觀)이 아주 초인간적(超人間的)이었기 때문에 썩어빠진 그때의 세상과 인물들을 모두 우습게 보아서 항상 비웃고 풍자(諷刺)하였으며 소위 세도부리는 재상이나 고루한 도학 군자들을 마치 길가에 기어 다니는 벌레와 같이 여겼었다. 그래서 벌레같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같이 살기는 더럽다고 생각하고 한강의 하류 동막(東幕) 근처에 가서 살았는데 한강가의 진흙을 이겨서 자기의 손으로 높이가 십여척이나 되는 토실(土室)을 한증(汗蒸)막처럼 만들어서 낮에는 평면으로 된 지붕에서 놀고 밤이면 그 방안으로 들어와서 잠을 자고 하니 그 집을 이름지어 토정(土亭)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의 별호도 토정이라 부르게 되고 그가 살던 동리도 지금까지 토정리(土亭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때에 김계휘(金繼輝)란 이는 이율곡(李栗谷)을 보고 묻되

『형중(馨仲 〓 土亭[토정]의字[자]) 이 제갈량(諸葛亮)에 비해 어떠하냐.』

고 하였더니 율곡은 대답하되

『토정은 직용할 인재는 아니나 물질에 비하면 기화이초(奇花異草)나 진금기수(珍禽奇獸)와 같아서 놓고 구경이나 할 것이지 포금(布帛) 숙속(菽粟─ 콩과조) 같이 긴요한 것은 못된다!』

고 하였더니, 토정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되

『내가 콩이나 조가 못된다면 도토리나 밤은 될것이니 어찌 전연 쓸 곳이 없으랴.』

고 말하였다.

그 한 가지의 자타(自他) 비평한 것만 보아도 당시에 일반이 그를 얼마나 문제의 인물로 삼고 또 토정 자신의 자부심이 얼마나 컸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그의 진가(眞價)를 알지 못하고 율곡까지도 그를 그저 기화이초나 진금기수에 비하고 말었으니 어찌 애석지 않으랴 그때에 그가 일부러 광객 행세를 하며 세상을 비웃는 것도 또한 까닭이 있는 것이었다.

선생의 초립동(草笠童)의 시절의 일이다. 그의 처가도 역시 삼개 근처였는데 그의 장인은 왕족으로 모산 이성랑(毛山李星琅)이라는 분이었다.

초례하던 그 다음날 때는 엄동설한 몹시 추운때였었는데 처가에서 아래위 말쑥하게 새옷을 한벌 입혔더니 입은 채로 슬그머니 어디로 나가서는 해가 지도록 돌아오지 않으므로 처가에서는 웬일인가 하고 궁금히 여겼더니 밤늦게야 벌벌 떨면서 들어 오는데 보니까 아침에 입었던 도포(道袍)가 없어졌다. 집안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은즉

『볼일이 있어서 홍제원(弘濟院)까지 갔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본즉 다리목에서 거지 아이 셋이 떨고 있으므로 그냥 나만 혼자 솜 옷을 입고 있을 수가 없어서 내 도포를 벗어 세 쪽으로 찢어 세 아이에게 갈라 입히고 왔소.』

하니 그 집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하루는 그 형님을 보고 말하되

『우리 처가를 살펴 본즉 길(吉)한 기운이 없고 오래지 않아 무슨 화(禍)가 있을 것 같은데 만일 내가 그 집에 오래 있다가는 나까지도 화를 입을 염려가 있읍니다.』

하고 처자를 데리고 그 집을 떠나 나왔다. 과연 그 다음 해에 그 집에서 어떤 일로 화를 입어서 온 집안이 멸망하게 되니 그 형님도 그의 선견지명이 특이한 것을 탄복하였다.

그때에 그의 이른바 『길(吉)기가 없다』고 말한 것은 과연 무엇을 보고 한 말인지 알 수 없으나 이인(異人) 통천(通天)을 하니 마치 매사를 그렇게 잘 알았다.

그는 도학과 문장으로도 세상에서 모를 사람이 없으리만치 명망이 높았지만 그의 독특한 기행이적(奇行異蹟)으로 세상에서 또한 모를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언제든지 몸에는 굵은 베옷, 발에는 헌 짚신이나 나막신으로 지냈는데 간혹 어느때는 아주 떨어진 헌 누더기를 입고 다 부서진 패랭이를 쓰고 해어진 큰 전대를 어깨에 메고 어슬렁 어슬렁 다니는 꼴은 누가 보든지 거지로 밖에 볼수 없었지만 그 모양을 해가지고도 비위좋게 고대광실의 귀족집으로 거침없이 들어가서 비단옷 입은 정승판서들 하고 뒤섞여 노는 것이 또한 유명한 기행(奇行)이었으며 이야기 거리였다.

처음에는 토실생활(土室生活)을 해왔지만 그것조차 귀찮다고 생각했던지 헌 신짝 벗어 팽개치듯이 집어 내버리고 나중에는 가슴에 큰뜻을 품고 팔도강산(八道江山)을 두루 살펴 보려고 길을 떠날 적에 그 옷 그 신에다가 쇠로 갓을 만들어 그것을 쓰고 다니었다.

기괴한 행동이 한가지 더 늘었다. 그 얼굴을 보고서야 누가 웃지 않았으랴

─ 그렇게 꾸며 가지고 과객질을 다니다가 이따금 어디서 돈냥이나 쌀됫박이나 생기면 등짐장사가 단지에다 밥을 해먹듯이 길가에서 그 갓을 벗어 젖혀걸고 거기다 밥을 지어 먹었다. 그렇게 한번 시험해 보고서는 아주 의기양양해서

『얘 이것봐라 ─ 일거양득(一擧兩得)이란 이것을 보고 말하는 것이구

나.』

하면서 혼자서 얼싸 좋구나 하면서 춤추고 뛰어 놀았다.

이러한 행동으로 몇해 동안에 산 높고 물 맑은 한반도(韓半島)의 금수강산을 두루 밟아 보고 그의 이상(理想)과 그의 포부(抱負)는 굉장히 더 높아지고 거룩하게 커졌다.

그는 그렇게 빈궁하게 지냈지만 돈 만드는 재간은 여간 비상한 것이 아니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다가 섬(島[도])에 들어가서 처녀지(處女地)를 개척하여 곡식도 심고 섬 백성에게 장사하는 방법도 가르치며 가진 방법으로 돈을 많이 모았다. 그때만 해도 사람없는 섬(無人島[무인도])이 많이 있었을 때이라 충청남도의 바다 가운데에 가장 기름져 보이는 섬을 발견하여 거기다가 콩과 조 같은 것을 심어 두었더니 거름을 안 주고 때때로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잘 되어서 가을 추수 때는 콩을 몇백석 조를 몇천석씩 거두워서 큰배 수십척에 실어 내다가 돈으로 바꾸니 이것이 적지 않은 거액이었으나 그는 절대로 그 돈을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가는 법이 없고 모두 빈민에게 나누워 주어 버렸다.

그리고나서 다시 제주도(濟州島)로 건너가는데 그 불완전한 조그만한 조각배를 저어가는데도 뱃전 네 귀에다가 큰 바가지를 몇 개씩 매달아서 어떠한 풍랑일지라도 티끌만치도 위험이 없이 무사 평온하게 제주도로 건너 갔었다. 건너가는 이튿날부터 그는 실지로 장사를 하며 많은 이익도 보고 그곳 사람들에게 장사하는 이치도 가르치고 하였다. 그렇게 수년동안 지나는데 수만금(數萬金)의 큰 돈을 잡아 가지고 돌아와서는 세상에 어렵게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전부 헤쳐 나누어 주고 말았다.

그렇게 제주도를 세차례씩 다녀왔어도 정작 자기집에서는 끼니를 못끓이고 있는 터이라 그 꼴을 보니 오래 집에 붙어 있을 수가 없는고로 다시 맨몸뚱이 빈 주먹으로 서해(西海) 가운데 어느 섬으로 들어가서 또한 콩과 박과 참외의 농사를 지었더니 그해 가을에 가서 역시 큰 수확이 있어서 돈을 벌었으므로 이번에는 배를 경선삼개로 돌려 연강(沿江) 일대의 빈민들에게다 분배해 주고서는 자기 집에는 역시 아무것도 가저 오지 않고 자기는 여전히 또 떨어진 옷 부서진 갓으로 문안 밖으로 오락가락 하며 거지의 행색을 계속하였다.

그의 성격은 점점 갈수록 이상스럽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명문거족(名門巨族)이었으며 장래 유망한 학자이건만 지위(地位) 높은 사람과 상종하길 싫어하고 특별히 빈한한 사람으로 자처하여 노동자와 놀기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또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자기가 몸소 겪어보고야 마는 성격이 있는 까닭에 노동자와 시정배들이 항상 때리고 맞고 싸우는 것을 보고서 남에게 매를 맞으면 어떠한 맛이 있을까 제가 한번 맞아보리라 이렇게 생각한 그는 일부러 남의 집 안방에 툭 뛰어들어가서 젊은 부인의 곁에 바짝 앉아보았더니 과연 온집안이 발칵 뒤집히어 바깥주인이 달려들어

『너 이놈! 죽고 싶으냐 이 경을 칠놈, 한번 맞아 보아라.』

하며 그의 머리끄덩이를 끌고 밖으로 나가 때리려다가 나이가 많은 까닭으로 때리지 않고 욕설만 실컷해서 쫓아 보냈더니 쫓겨나온 그는 실망한 것처럼

『그것 참 매 맡는 것도 팔자인가? 그것도 안 되네 그려!』

하며 하늘을 치어다 보며 웃었다 한다.

또 한번은 시골에 가보니까 원님(守令[수령])이 백성을 잡아다가 볼기를 때리므로

『에라 나도 세상에 나왔다가 볼기를 한번 맞아보리라!』

하고 원님행차 앞에 와락 한번 달려들어 길을 가로 막으니 원님이 대노하여 사령을 시켜 잡아 가지고 동헌 마당에 엎어 놓고 문초를 하다가 그의 용모와 그의 말씨가 어찌나 이상하던지 도리어 원님이 뒤가 켕기어 그냥 우물쭈물 돌려 보냈다.

그러므로 그는 평생 소원인 매맞기 볼기맞기까지도 소원을 이루어 보지 못하였다.

또 그는 사람이 겪어 내기 어려운 추위와 더위,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한 번씩 체험해 보려고 동지섣달 설한풍에 벌거벗고 지내도 보았으며, 여름은 얼마나 더운 것인지 솜옷을 퉁퉁히 입고 견디어 보았다.

어떤 때는 십여일 동안이나 밥 먹지 않고 일부러 굶어도 보았으며, 물을 며칠씩 마시지 않고 견디어도 보았다.

그래서 남이 모두 참고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무엇이든지 한번씩 체험해 보았다.

그는 이따금 이율곡(李栗谷) 집에 놀러갔었는데 한번은 또 놀러 가 보니 온 방에 손님이 가득이 차서 있었다. 귀족이나 학자이며 온 천하의 명사들은 죄다 모여앉었는데 그때 율곡선생은 대간(臺諫) 벼슬로 있으면서 위에서 말을 들어 주지 않는다는 불평으로 병들었다고 칭탁하고 그 벼슬을 사임하려고 하던 때였다.

이것이 모두 이야기거리가 되어 가지고 국가대사를 의논도 하고 혹은 비판도 하던 끝에 결국 거짓병이라고 해서 대간을 내놓아야겠다는 결론이 되는 것을 옆에서 듣고만 있던 토정선생이 별안간 코웃음을 치면서

『흥! 옛적 성인(聖人)이란 형식 덩어리라, 잔뜩 후폐(後弊)만 남겨놓고 말었군!』

온 방안은 무슨 말뜻인지 몰라서 멍하니들 있는 가운데 주인 율곡이

『또 무슨 기담이 계시요? 선생이…….』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공자(孔子)는 병이라 일컬어 유비(儒非)를 보지 않었고, 맹자(孟子)는 제선왕(齊宣王)이 부를 때 역시 병이 들었다고 가지 않았는데, 후세에 소위 선비라는 것들은 걸핏하면 병이 있다고 거짓말을 해서 일부러 그를 본받는 것이야말로 정말 우습지 않은가, 병이 들었다고 핑계하는 것은 남의 집 게으른 종놈의 행습이어늘 어찌 선비로서야 차마 이따위 짓을 한단 말인가?

공자, 맹자같은 이도 다 ─ 했는데 우리가 그러기로서니 무슨 관계가 있으랴 하겠지만 공맹자는 또한 무슨 심술로 후인들에게 이따위 더러운 형식을 이렇게 폐해만 끼치었던고?』

하니 일시에 웃음보가 탁 터지면서 모두 가슴이 찔려서 다시 다른 말을 못하였다.

그가 말년(末年)에는 친구들의 권고에 못 이기어 관리(官吏)가 되었는데 제일 처음 포천현감(抱川縣監)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짚신 베옷 해어진 갓으로 부임하였다.

그날 저녁 도임상(到任床)이라 하여 그 마을에서 나는 갖은 진미(珍味)를 갖춘 굉장한 음식상을 올렸더니 그는 말도 없이 수저도 들지 않고서 도로 내 물리쳤다.

아전들이 아마 음식이 시원찮아 그런가보다 하고 황송하여 불야불야 다시 그보다 훨씬 더 잘 차려서 두 번째 올렸더니 그래도 여전히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만 도로 물리치는고로 아전들은 더욱 더 죄송하여 할 수 없이 뜰 아래 엎드려

『저희 고을은 서울과 달라서 그 이상은 도저히 더 차릴 수 없사오니 그저 죽여줍소서.』

하고 빌었다.

그는 온화(溫和)한 말로

『이 고을엔 잡곡밥(雜糓)이 없느냐? 나는 그런 좋은 음식을 먹어본 일이 없어서 무서워 그랬다! 보아라, 우리나라 형편을 ── 우리가 이렇게 넉넉지 못하게 된 까닭은 이런 음식같은 것, 의복같은 것에 너무 사치하기 때문이 아니야. 나는 오직 잡곡밥과 나물국이면 그만이다. 이후로는 그런 좋은 음식은 결코 먹지 않겠다.』

하고 말했다.

도임한지 며칠만에 그 고을 양반, 아전 할것 없이 군내(郡內) 여러 인사를 뫃아 놓고 한턱 낸다는 것이 무슨 큰 상이라도 해오는가 보았더니 밥상 위에 시래기국 한 그릇만 놓여 있는지라 그날 모인 손님들은 기막혀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모두 눈들을 멍하니 뜨고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주인 사또는 먼저 숟가락을 들어 후루득 후루득 가장 맛있게 먹으니 손님이 되어서 가만이 앉아있기도 무엇하니까 할 수 없이 떠 먹어 본즉 그만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포천원님으로 이삼년 있는 동안에 매사를 이렇게 하여 백성을 잘 다스리다가 거기서 아산(牙山) 현감(縣監)으로 전근이 되어 길을 떠나는데 온 고을 백성들이 길을 막아 유임(留任)을 간청 하였으나 아니되니까 울며불며까지 하며 그의 옷자락을 잡고 안놓았다.

아산(牙山) 고을에 있을 때 일이다.

그 고을에 늙은 아전 하나가 어찌나 흉물스럽고 백성의 피기름을 짜아 내는지 항상 감독을 해내려오나 종시 듣지 않는고로 한번은

『너 같은 놈은 몸은 늙었으나 마음은 항상 어린애 대접을 할 수밖에 없다.』

하고는 아전의 갓을 벗기어 흰 머리를 총각머리로 따아 내리고 벼루를 들리어 통인처럼 종일 곁에 세워두었다. 그 아전은 그러한 부끄러운 벌을 받고서 속에다 항상 앙심을 먹고 있었다. 토정은 언제나 지네(蜈蚣[오공])의 생즙을 내어서 그것을 하루 한그릇씩 마시고 지네의 독(毒)을 제독하려고 지네즙 그릇을 뚝 떼면서 바로 날밤(生栗[생율])을 먹는 기괴한 약을 먹는데 하루는 그약을 마신뒤 날밤을 딱 깨물고 보니 밤이 아니요 버들나무로 감쪽 같이 깍아 놓은 거짓 날밤이었다.

그것은 물론 그 보복을 하느라고 생률을 없이 하고 그 대신으로 버드나무를 밤처럼 깎아 놓은 것이었다.

토정선생은 미처 제독할 겨를 없어서 지네독(蜈蚣毒[오공독])으로 그자리에서 무참히도 돌아갔으니 그때는 바로 선조(宣祖) 십일년(十一年) 무인년(戊寅年) 지금으로부터 삼백 육십년전이요 그의 나이 六十二[육십이]세였다.

만사를 미리 모르는 것이 없는 토정선생으로도 자기가 돌아갈 것을 모른 것은 참으로 유감된 일이다.

그는 육십이세를 한평생으로 하고 물거품처럼 이세상을 다녀가는 동안에 기이한 행적과 일견 모순된 행적을 수없이 남겼다. 그럼으로써 그는 당시의 어리석은 세상사람들과 컴컴한 위정자(爲政者)들을 비웃고 냉평하고 또한 그들을 크게 훈계한 것이니, 이는 인생의 철리(哲理)를 몸소 실행한 것이다. 그렇건만 그때에 있어서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나 그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고 그저 그를 한 술객(術客)이나 기괴한 사람으로 알게 된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제 그가 돌아가던 무인년을 당하여 그를 추억하는 생각이 더욱 새삼스러워진다.

그는 비록 돌아간지 오랬으나 그의 이름은 민간에서 유행하는 토정비결과 아울러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