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백세 부인 허정승 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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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歲夫人 (백세부인) 許政承 (허정승) 姉氏 (매씨)

북악산(北岳山)으로 불어드는 바람에 옛일을 생각듯이 말없이 앉아있는 해태 앞—光化門通— 넓은 길을 지나서 다시 서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종교 예배당으로 가는 큰길이 있고 이 종교 예배당 앞에서 사직동(社稷洞)으로 가는 중간에는 종침다리(곧 지금의 宗橋)라는 돌다리가 있다. 이 다리의 이름이 본래에는 무엇이라고 지었었는지 알 수 없지마는 종침이라는 이름을 불르게 되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四百 五十여년 前—李朝 成宗 時代—부터였다. 그때에 조정에는 문무재덕이 겸비한 외에 얼굴 잘 나고 수염 좋고 키가 커서(身長 十一尺 二寸) 풍채 좋기로 유명한 재상이 있었으니 그는 곧 허종(許悰) 허판서였다. 그도 그와 같이 잘났거니와 그의 누님 되는 이는 신고암 영석의 부인(申孤菴 永錫 婦人)으로 또 天下에 유명하게 잘난 부인이니 얼굴은 물론이고 재질이 비상하고 지감(知鑑)이 특별히 있어서 어려서부터 능통하지 못한 글이 없고 무슨 일에나 모르는 일이 없으므로 허판서가 나라의 일을 의논할 때면 반드시 그 누님과 먼저 의논하여 벼슬한지 四十五年 동안에 한일로 그르친 일이 없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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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마침 成宗大王이 王妃尹氏(燕山君 어머니)를 이미 폐출(廢黜)하고 다시 여러 신하의 말을 들어 장차 윤씨를 죽이기로 되어 최후의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게 되었는데 허판서는 그때 마침 지의금(知義禁)=只今(司法長官)=이란 벼슬로 있고 허판서의 아우 허침(許琛)은 또 형방승지(刑房承旨)로 있어서 형제가 다 공교히 윤씨의 옥사를 맡아 보게 되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윤씨를 어명으로 죽이게 되는 것이요 自己도 법관이니까 아무 고려도 없이 어명대로 또는 직권으로 그대로 윤씨를 죽이고 말 것이지마는 원래에 그들은 지감이 있고 또 아무리 왕명이라 할찌라도 일국의 왕비를 죽인다는 것은 일이 극히 소중한 까닭에 어전회의를 하던 그날 아침에 허판서는 먼저 그 누님을 찾아가서 그 사정을 말하였다. 원래에 무슨 일에나 생각이 많고 지감 많은 그 누님은 그 말을 듣고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한참 있더니 최후에 이런 말을 하였다.

『어떤 집 主人이 自己 아내를 죽이려고 할 때에 그 집 下人이 主人의 말을 쫓아서 같이 그 主人의 아내를 죽이는 것은 一時 主人의 忠僕이 될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女子의 所生子가 있어서 장래에 그 집 主人이 된다면 그 下人은 참으로 말할 수 없는 큰 禍를 當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尹氏의 아들인 연산군(燕山君)이 이미 세자(世子)가 되어 있은즉 지금에 비록 성종대왕의 명으로 尹氏를 죽인다 하여도 장래에 연산이 임금이 되면 그 어머니의 원수를 갚게 될인즉 그 일에 관련된 사람은 장래에 큰 화를 당할 것을 경계함이었다. 허판서는 그 누님의 말을 듣고 크게 놀라 깨닫고 그 날에 형제가 같이 대궐로 번을 들어가다가 도중에서 거짓 낙마하여 다리에 떨어져서 부상하였다. 칭탁하고 집에 누웠으니 성종대왕은 할 수 없이 이극균(李克均) 이세좌(李世佐) 숙질로 허종 형제의 벼슬을 대임하고 여히 윤씨를 죽였다.

그 뒤에 성종대왕이 붕어하고 그 아들 연산군이 즉위하게 되니 연산은 평소에 그 어머니가 원통히 죽은 것을 철천의 한으로 품고 있다가 왕이 되매 당시 윤씨 사건에 관련하였던 사람은 모조리 잡아 죽여서 그 인아족척까지라도 화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마는 유독 허씨의 집은 아무 화도 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불러서 벼슬을 시키니 그것은 전혀 허부인의 덕이었다. 뒷사람이 그 다리를 이름하여 종침 다리라 하였으니 곧 허침 형제의 이름을 취함이었다. 그리고 그 부인은 나이 백세가 넘도록 오래 살았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백세 부인이라고 불렀다. —(東溪漫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