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봉황가 작자 문경 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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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凰歌 (봉황가)를 지은 聞慶 (문경) 崔氏女 (최씨녀)

  문경 새재(鳥嶺) 무푸레 낭건
    말채 쇠채로 다 나아간다.
                ×
  앞집 총각아 말 모지 마라
    뒷집 큰아기 한심난다.
                ×
  문경 새재 박달 낭건
    북바디 집으로 다 나아간다.
                ×
  황경 나무 북바디 집은
    큰아기 손목을 다 녹인다.

독자 여러분은 이런 노래(아리랑조)를 더러 들어보셨는지요. 조선에서 제일 험준한 고개로 유명하고 또 이 노래에 있는 것과 같이 무푸레 나무와 박달 나무의 많기로도 유명하고 그리고 또 봄철에 구슬프게 잘 우는 두견새(杜鵑)가 조선에서 제일 많기로도 유명한 새재(鳥嶺) 고개가 있는 문경군(聞慶郡)은 경상북도의 서촉(西蜀)이라 할 만치 궁벽한 땅입니다. 서촉이 중국에서 그렇게 궁벽한 땅이지마는 산천이 수려하여 자래로 탁문군(卓文君)과 설도(薛濤), 왕소군(王昭君) 같은 절대의 미인들이 많이 산출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문경에도 일찌기 유명한 여류문인(女流文人)이 탄생하였으니 그는 이조 세종 대왕 때(世宗朝)에 참판(參判) 벼슬까지 한 최치운(崔致雲)의 딸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한정정한 덕이 있고 천재가 비상하여 불과 십여 살 때에 시서경사(詩書經史)를 능통하고 글을 지으면 능히 사람을 놀랠 만한 문구(文句)를 지으니 일향 사람들이 모두 신동녀(神童女)라고 칭찬을 하였읍니다. 그는 나이 방년에 달하매 문경군 가은리(聞慶郡 加恩)에 사는 안귀손(安貴孫)이란 사람에게 출가를 하니 친정에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범절이 무던하던 그는 시부모 섬기기를 극히 효성스럽게 하고 살림살이도 또한 법도가 있게 하니 일반이 그를 모범의 부인이라고 칭송하며 누구나 경건하게 대우를 하였읍니다. 그러나 가인박명이라 할찌 그의 남편이 사직(司直) 벼슬을 다니다가 불행히 일찍 죽으니 그는 참으로 봄철의 꽃이 서리를 만난 것 모양으로 불운에 빠지게 되었읍니다. 그는 자기의 남편을 위하여 애도문(哀悼文)을 친히 지어 읽었으니 그 글은 명문도 명문이어니와 사의가 극히 슬퍼서 보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까지도 눈물을 흘리게 되고 지금까지 세상에서 회자하며 전해 내려옵니다. 이제 그 글을 소개하면 이러합니다.

  봉황새 날아들 제 소리 맞춰 잘 울더니
  봉이 가고 아니 오니 황만 혼자 우는구나
  머리를 극적이며 하느님께 물어보니
  하늘 역시 무정하여 잠잠하고 말이 없네
  하늘과 바다는 길고도 넓건마는
  이내 한은 왜 그리 끝도 없나.

—原文—
  鳳凰千飛, 和鳴樂只.
  鳳飛不下, 凰獨哭只.
  搔首問天, 天默默只.
  天長海潤, 恨無極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