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송상현 첩 한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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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東萊의 愛妾 韓金蟾

몇 해 전에 현해탄(玄海灘)에서 극작가 김우진(劇作家 金宇鎭)과 투수 정사한 성악가 윤심덕(聲樂家 尹心悳)이 아즉까지 죽지 않고 이태리 서울에 살어 있어서 자미스러운 부부의 생활을 한다는 수수꺽기 같은 말이 잇따끔 신문 잡지에 기재되여 세상 사람의 의혹을 각금 이르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사가 미분명한 사실은 지금뿐 아니라 옛날에도 많이 있었으니 평소보다도 전란이나 그 외 무슨 큰 재변(말하자면 지진, 수재, 풍랑 등)이 있을 때에 더욱 많은 것이였다. 그중에도 현저한 례를 하나 들어 말하자면 옛날 임진란(壬辰亂) 때에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절사한 송상현(宋象鉉)의 애첩 한금섬(韓金蟾)이였다. 금섬은 원래 함흥 명기(咸興 名妓)로 송공의 애첩이 되어 그를 딿어 동래까지 가서 있었는데 비록 천기의 출신이나 시문이 능하고 지개가 있어서 평소에도 보통의 남의 기첩과 같이 화려한 복색과 사치의 생활을 하지 않고 두어 간 초가에서 담박한 살림을 하며 공청(公廳)에는 발도 드려놓는 일이 없으니 그때 사람들이 모도 희세의 현첩이라고 층찬하였었다. 그러다가 선조 二十五年 임진(壬辰)에 외란(外亂)이 크게 침입하야 일장 평의지(日將 平義智)가 동래성을 함낙시키니 부사 송상현이 최후까지 불굴하고 열열히 싸우다가 대세의 그릇됨을 깨닫고 갑옷(甲衣) 우에 관복을 입고 북으로 서울을 향하야 재배한 뒤에

『고성월운, 열진고침, 군신의중, 부자은경=孤城月暈, 列陣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이란 비분 통철한 글을 써서 그의 부친에게 부치고 장차 죽엄에 임하야는 신기가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이 태연자약하게 그의 부하에게 말하되 내 허리 아래(腰下)에 팥(豆) 만한 사마구(痣)가 있으니 내가 죽거든 그것을 상고하야 시체를 수습하라 하고 적을 대하야 의리로 꾸짖다가 마츰내 적에게 피해야 절사하고 그의 종자 신여로(從者 申汝櫓), 애첩 금섬(愛妾 金瞻)과 비자 금춘(婢子 今春)이 또한 공의 뒤를 딿어 절사하니 일군도 또한 공의 절의에 감복하야 시체를 거두어 동문 밖에 장사 지내고 목표를 해 세우니 그날 밤부터 밤마다 불빛 같은 붉은 기운이 공중으로 떠올라서 두어 해가 되도록 흩어지지 않았다. 이 사실은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이라던지 그 외 여러 기록에 명확히 기재되여 누구나 다시 의심치 않게 되고 딿어서 금섬(金蟾)은 그때에 일음이 높던 진주의 론개(晉州 論介)와 평양의 계월향(平壤 柱月香)에 지지 않는 명기로 알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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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때에 일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강수은 항(姜睡隱 沆)의 일기(日記)를 보면 사실상 금섬은 죽지 않고 역시 일군에게 잡혀갔다가 그가 귀국할 때에 같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제 그 기록의 대개를 들어 말하면 금섬은 당시에 송부사가 죽은 줄도 모르고 일군에게 잡히여서 본국까지 호송되였는데 그 뒤 강화조약이 성립되고 조선의 부로(俘虜)를 돌려 보내게 되매 금섬이 또한 여러 사람과 같이 돌아오다가 중도에서 송부사가 임진 당시에 이미 절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비관 자살하랴고 물에 빠지다가 뱃사공이 붙잡아서 여의하게 죽지를 못하였다. 그때에 마침 강수은(姜睡隱)도 그 배를 같이 타고 왔었으니 송부사의 애첩 금섬이 같이 탄 줄을 몰났다가 초량진(草梁鎭)에 도착할 때에 비로소 금섬인 줄 알게 되고 또 금섬의 물에 빠저 죽으랴는 정경을 보고 친이 만류하며 그의 죽으랴는 의리와 까닭을 물은즉 금섬은 대답하되 부사ㅅ도(府使道)의 입절한 것은 제가 전연 알지 못하였고 일군에 잡혀간 후 풍신수길의 집에 있었으나 수길이 또한 은휘하고 가르처 주지 않었음으로 생전에 삿도를 한 번 다시 만나 뵐가 하고 구구한 생명을 보존하고 이때까지 살었더니 이제 삿도의 입절하신 사실을 알고 보니 삼강(三綱)의 의리가 자재한 터에 죽지 않고 무엇하겠느냐고 하였다. 강수은은 그의 말을 듣고 위로하며 달래 말하되 그대가 아모리 지금에 자결을 한다고 한들 누가 그대를 깨끗이 죽었다고 하랴 그리고 오늘 우리 일행 부녀자들 중에는 물론 몸을 깨끗이 보증한 분이 많지만은 그것을 누가 보증할 수 없는 것인즉 자기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 없는 바에는 천감이 소소하니 옥석이 스사로 분간될 터이니 행여나 경솔하게 죽을 필요가 없다 하는 금섬도 그의 말을 그럴 듯이 듣고 시(詩) 한 편을 지여서 자기 뜻을 표하였다. 그 뒤에 금섬은 송씨의 집에 돌아가서 자기 보절(保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강수은의 일기(姜睡隱 日記)와 거기에 기록된 그의 시로 인하야 그의 정상을 잘 알게 되엿었다.

大樹飄零日 殘花受狂風
狂風終自息 花落埋泥中
誰識泥中花 不爲蝴蝶嬲 (音뇨)
雖然歸根蔕 徒爲衆芳笑

意譯

큰 나무에 광풍 불 제, 짙은 꽃도 혼날린다
바람 비록 머젔으나, 꽃은 벌서 떠러젔다
진흙 속에 무친 그 꽃, 깨끗한 줄 누가 알가
본 뿌리로 돌아 와도, 여러 꽃의 놀님 받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