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신라 미인 도화랑
- 眞智王을 魔殺한 新羅의 美人 桃花娘
도화랑(桃花娘)! 그의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어여쁘고 탐스럽고 귀여운 미인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호탕한 청년 남자들은 그의 이름만 듣고 부질 없이 애를 태우며 한번 만나보기를 원하지 마러라. 그는 현대의 미인이 아니요 벌써 몇천 년 전 신라시대(新羅時代)의 미인으로 백골이 이미 진토가 되어 향기러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과거의 미인이다. 그는 신라 제二十五世王 진지왕(眞智王) 때 사양부(沙梁部)의 여자이니 비록 한미한 집에서 태어 낳았으나 어려서부터 특별한 지조가 있고 얼굴이 어여뻐서 요조한 태도가 마치 봄바람에 피어나온 복숭아꽃과 같으므로 그의 부모가 이름짓기를 도화랑이라고 하였다. 원래에 꽃이 피면 반드시 나비가 오는 격으로 그는 이팔방년에 어떠한 청년과 사랑을 하게 되어 백년가약을 맺고 따뜻한 사랑의 보금자리 속에서 달큼한 청춘의 꿈을 꾸며 춘풍추월의 좋은 시절을 등한스럽게 지냈었다. 그러나 형산(荊 山)의 백옥은 암야에도 빛이 나고 유곡의 난초(蘭草)는 십 리까지 향취가 진동한다고 그의 아리따운 소문과 향기러운 이름은 어느덧 굴러서 구중궁궐에까지 들어갔다. 당시 신라의 임금인 진지왕은 황음(荒淫)하기 짝이 없는 임금으로 아방궁(阿房宮)과 같은 금전옥루(金殿玉樓)를 화려하게 지어놓고 천하의 미인이란 미인은 다 모아서 아침과 저녁으로 꽃 같은 三千의 궁녀를 한품속에 집어 안고 인간의 향락이란 마음대로 못할 것이 없것마는 무엇이 부족하였든지 이 도화랑의 어여쁜 소문을 한번 들으매 정신이 황홀하고 심회가 산란하여 마치 한무제(漢武帝)가 이부인(李夫人)을 사모하고 당명황(唐明皇)이 양귀비(楊貴妃)에 유혹하듯이 백반의 힘을 다하여 도화랑을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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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진지왕은 혁혁한 일국의 군왕이요 도화랑은 일개 미천한 민간의 약한 여자이라 보통의 여자 같으면 왕이 한번 총애를 하려 하면 감히 거역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지마는 정조가 백옥같이 깨끗하고 절개가 송죽보다 더 굳은 도화랑은 부귀에도 유혹ㅎ지 않고 위무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의 남편이 있는 것을 내세우고 열녀는 불경이부라고 반항하니 아무리 미인의 앞에는 군주의 체면도 염치도 모두 불고하고 함부로 야심을 부리려는 진지왕이라도 도화랑의 그러한 굳센 정조에는 조금도 었지 하지 못하고 다만 최후에 약속하기를 만일에 그의 남편 되는 사람이 죽게 되거던 다시 궁중으로 들어와서 백년의 가약을 맺자 하고 애처로운 이별을 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일장춘몽과 같은 이생 이별이 어찌 영원한 사이별이 될 줄이야 피차간에 어찌 뜻이나 하였으랴. 불행히 이 진지왕은 그 해에 병마에 걸리어서 심중의 사모하던 도화랑을 다시 한번 만나보지도 못하고 인생의 무정한 것을 한탄하며 만고의 정한을 품고 흰 구름과 같이 영원한 나라로 살아져 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도화랑의 남편도 무슨 기연이 있는 듯이 또한 왕의 뒤를 따라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후일의 백년가약을 하고 만반의 총애를 하던 임금도 이미 승하하여 다시 만나 볼 길이 없고 전에 백년을 맹서하여 일신을 의탁하던 남편까지 마자 이 세상을 떠나게 되니 무의무탁의 가련한 신세가 된 박명의 가인 도화랑은 밤낮으로 고적한 빈방을 지키고 무정한 세월을 비탄하며 그날그날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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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맺친 혼은 죽어서도 흩어지지 않고 전쟁의 가약은 후생에도 인연이 있다 할까—— 도화랑의 남편이 죽은 지 십여 일이 되든 어느 날 밤이었다. 도화랑은 적적한 빈방 안에서 처량하게 반짝이는 외로운 등불을 벗 삼고 잠잠히 앉았더니 뜻밖에 문밖에서 홀연히 거마(車馬) 소리가 요란하게 나며 진지왕이 평소와 같이 오색이 영롱한 용포에 찬란한 금관을 쓰고 완연히 방으로 들어와서 도화랑의 손을 반가히 잡으며 말하되 네가 전날에 나와 약속하기를 너의 남편이 죽으면 나에게 몸을 허락한다고 하였기에 이제 왔다고 하였다. 도화랑은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지 못하나 전날에 자기가 임금 앞에서 허락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이의를 하지 못하고 반가 모시어 들이었다. 왕은 도화랑과 환락의 꿈속에서 일주일 동안을 두고 재미스럽게 놀더니 하루아침에 인홀불견으로 간 곳이 없어지고 다만 오색구름이 지붕을 에워 쌓고 이향이 방안에 가득할 따름이었으며 도화랑은 그날부터 태기가 있어서 십삭만에 일개 남자를 낳았으니 그가 곧 신라에서 신장군(神將軍)으로 유명하던 비형(鼻荊)이다.
당시 신라의 임금 진평왕(眞平王)은 전왕의 족하였는데 그 소문을 듣고 신기히 여기고 또한 반갑게 생각하여 도화랑과 비형 모자를 궁중으로 다려다가 부양하였다. 비형은 점점 자라서 나이 十五세가 되어 지혜가 남보다 출중하고 힘이 또한 절륜하므로 진평왕이 특별히 사랑하였다. 그러나 비형은 밤이 되면 남모르게 밖으로 나갔다가 새벽 종소리가 나면 슬며시 돌아오는 이상한 일이 있으므로 왕은 그것을 의심하고 용사(勇士)를 시켜서 비형의 뒤를 따라 엿본즉 비형은 과연 월성(月城) 서편에 있는 큰 천변에 가서 여러 귀신(鬼神)의 무리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진평왕은 그 보고를 듣고 비형을 불러서 사실을 물은즉 비형은 숨기지 않고 그대로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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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은 그 말을 듣고 더욱 신기하게 여겨 비형을 명령하여 귀신을 다리고 당시 신라의 명찰인 신원사(名刹 神元寺)의 북대천에 다리를 놓게 하니 비형은 여러 귀신을 다리고 하룻밤 새에 그 큰 다리를 놓았다. 그리하여 그 다리의 이름을 귀교(鬼橋)라 하였다.
그 뒤에 진평왕은 다시 비형에게 붇되 귀신 중에 능히 조정에 나와서 사람과 같이 일할 만한 귀신이 있느냐 한즉 비형은 대답하되 길달(吉達)이란 귀신이 있는데 그자는 무엇이든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잘한다 하고 그 이튿날 그자를 그 이튿날 그자를 다리고 와서 임금께 뵈었다. 임금은 비형의 말을 믿고 길달에게 벼슬을 주고 일을 시켰더니 길달은 과연 충직하고 부지런하여 아무 일이나 다 잘하므로 더욱 기특히 여겨 어명으로 그때 각간(角干) 벼슬로 있는 임종(林宗)의 양아들을 삼게 하고 다시 흥륜사(興輪寺)의 누문을 짓게 하였으니 유명한 길달문(吉達門)이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길달은 여우(狐)로 변신하여 도망하므로 비형이 크게 노하여 여러 귀신을 시켜 길달을 잡아 죽이니 여러 귀신들이 모두 비형을 무서워하여 그 뒤부터는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멀리 도망질을 하고 그때 사람들은 또 시가(詩歌)를 지어 비형을 찬미하였는데 그 시구(詩句)는 그 뒷날까지도 소위 벽귀(酵鬼)를 한다 하고 경주 부근의 사람들이 문밖에다 붙이는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은 비록 허탄한 듯하나 진지왕이 사후에까지 그렇게 도화랑에게 유혹하였던 것을 보면 도화랑이 당시 신라의 유명한 미인이었던 것은 사실이요 비록 수천 년이 된 오늘까지라도 귀교와 길달문의 전설이 남아 있어서 여러 사람들의 입으로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미인의 힘이란 또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꽃이 피고 잎이 떨어져 수천 년의 덧없는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그들의 향기로운 로맨스를 전해주는 귀교와 길달문은 이제 다 허무러지고 빈터만 남았으나 봄은 해마다 의구히 돌아와서 도화랑의 옛 마을인 사양부(沙梁部)에도 복숭아꽃이 만발하여 봄바람을 반겨라고 소리 없는 웃음을 웃을 때에 지나가는 행인이 만고가인 도화랑을 생각한다면 그 누구나 인면부지하처거하고 도화의구소춘풍(人面不知何處去, 桃花依舊笑春風)이란 옛사람의 감개무량한 시를 다시금 읊조리지 않을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