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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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蘭雪軒

조선에서 여류 문장가를 말한다면 누구나 먼저 허란설헌(許蘭雪軒)을 말하지 안을 수 없다. 그의 이름은 경번(景樊)이요 란설현은 그 호이니 감사(監司) 벼슬한 초당 허엽(草堂 許曄)의 딸이요 허봉(許篈), 허성(許筬), 허균(許筠)의 누의로 그 당시에 오부자 문장이니 사남매 문장이니 하고 이름이 났더니만치 가정이 상당한 래력 있는 문장가의 가정이였다.

그는 이조 명종(李朝 明宗) 十七년에 나서 선조(宣祖) 二十二년에 겨우 二十七세의 꽃따운 청춘으로 불행이 조요(早夭) 하였으나 그의 시문은 로성한 사람보다 더 숙성하야 명평가작이 능히 당대의 문장거공을 압두하고 이름이 조선 전국뿐 아니라 멀리 중국에까지 떨치였다.

란설헌은 일곱살 적부터 시를 잘 지여서 그때 사람들이 여신동(女神童)이라고 칭하였거니와 열조 시집(列朝 詩集)에는 「그의 재주가 여러 형들보담도 뛰여났다」(才出諸兄之右)라고까지 말하였다.

그는 이같이 문학에 천재를 가졌고 또 문학을 즐기며 그중에도 특히 신선(神仙)의 도를 탐하여서 집안에서도 늘 화관(花冠)을 벗지 않고 향불 피운 탁자를 향하고 앉아 시사(詩詞) 읊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시집간 뒤에도 그가 가정에 뜻을 매어두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관계로 그 남편 되는 정자 김성립(正字 金誠立)과의 금실이 좋지 못하여 항상 불만한 가운데서 지났다.

김성립이 일즉 접(接)에 나아가 독서하고 있을 때다 (이 「접」이란 것은 전날 공부하는 곳을 이름이다) 그때 김성립은 「접」에 있어서도 한 기첩(妓妾)을 사랑하고 지나는 것이므로 란설헌은 편지로써 그 남편을 풍자하였다.

『옛날의 「접」은 「재주」가 있더니 요사이 「접」은 재주가 없다』(古之接有才, 今之接無才) 이 말을 다시 말하면 옛날의 「접」자는 재주 재(才) 변이 있어서 참말 공부하는 접「接」이라 하겠더니 요사이 「접」자는 재주재 변이 없어지고 다만 첩(妾)더리고 노는 데라 하겠다는 뜻이다.

이 말 하나만 가지고 보와도 란설헌의 기지(機智)며 재화(才華)가 어떠한지를 짐작할 만하다. 이와 같이 김성립의 사랑을 받지 못한 란설헌은 그 때문에 원한 있는 시도 많이 짓게 되었으니 기시(寄詩)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 시는 그 남편 김성립이 강사(江舍)에서 독서하고 있을 때 써 보낸 것이니

奇詩

鷲掠斜簷兩兩飛, 落花撩亂撲蘿衣. 洞房極目傷春意, 草綠江南人未歸.

『제비는 첨아 차며 쌍쌍이 날고
락화는 흔날여서 옷을 치누나
강남엔 풀 푸러도 님 안 오시니
볼사록 골방에서 속만 상한다

이지봉 수광 선생(李芝峰 睟光 先生)의 저술한 지봉류설(芝峰類說)에 보면 이 시는 너머 유탕한데 가찹다고 하야 그 시집에 빼였다고 하였다. 과연 그 까닭인지 란설헌의 본집(本集)에는 이 시를 볼 수가 없다. 그뿐 아니라 세상에 흔이 전해오는 소위 채련곡(採蓮曲=련 캐는 노래)이란 시도 또한 그 본집에 없는 것을 보면 그것도 역시 이지봉의 말과 같이 유탕한데 갓찹다고 하야 빼여논 듯하다. 그의 일반 시문은 본집이 따루 있기로 여기에 약하고 다못 그 본집에 빠진 채련곡 한 편을 더 소개하기로 한다.

採蓮曲

秋淨湖長碧玉流, 落花深處繫蘭舟. 逢郞隔水投蓮子, 遙被人知半日羞.

『맑은 가을 긴 호수 벽옥 같은데
떠러진 꽃 깊은데 배를 매였네
님을 맞나 물 건너 련밥 던지다
남이 보와 한참은 부끄러웠네

우에로 잠간 말한 것과 같이 그는 항상 신선의 도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그의 시문 중에도 신선 사상의 지배를 받은 작품이 많으니 시집 중에 유선사(遊仙詞) 같은 것이라던지 그의 걸작 명문으로 당시 중국에까지 이름을 날리던 八歲 때에 지였다는 광한전 백옥루 상양문(廣寒殿 白玉樓 上樑文) 같은 것이 그 례이다. 그리고 그는 이상하게도 「꿈에 광상산에서 놀다」란 시를 짓고 그 시참(詩讖)과 같이 二十七세에 죽은 것을 보면 그는 철두철미한 신선 학자요 또 전생이나 후생에 신선과 무슨 큰 인연이 있는 것 같다. 끝으로 그 시와 시서(詩序)를 또 소개하고 붓을 멈춘다.

夢遊廣桑山 詩序 意譯

을유년 봄에 내 당고하고 외가에 가 있을 때 어느 날 밤 꿈에 바다 우에 있는 어떤 산으로 올라가니 산은 모도 옥과 구슬로 되어 뭇 뫼가 첩첩한데 백옥의 빛이 맑고 반짝으려 눈이 부시어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이상한 구름이 그 우에 뭉겨 오채가 령롱하고 맑은 샘 두어 줄기가 돌벽 사이로서 쓸혀 나와 옥소리를 낸다. 거기에 어떤 두 여자가 있으니 나이 다 스물쯤이오 얼굴도 절대가인인데 하나는 자주빛 안개 같은 저구리를 입었고 하나는 푸른 무지개 같은 옷을 입고 손에는 황금빛 호로병을 들었는데 사쁜사쁜 걸어오더니 나를 맞아 가치 시내 굽이를 쪼차 올라가니 이상한 꽃과 풀이 얽컸는데 이름도 알 수 없고 난새와 공작들은 좌우에서 춤을 추며 온갖 향기는 숲속에서 무르녹는다.

그리하여 산꼭다기에 오르니 동남으로 큰 바다가 하늘에 닿아 멀리 푸르고 아츰 해가 솟아 오르매 물결이 드높아 해 바퀴를 목욕시킨다. 산봉오리에 큰 못이 있고 못 속에는 연꽃이 있어 빛은 푸르고 잎사귀는 큰데 서리를 맞아 반쯤 졌다. 두 여자— 나를 향해 「이곳은 광상산인데 십주 (신선 사는 열 군데 명승) 가운데 제일이구료. 그대는 신선 연분이 있어 이런 곳에 왔으니 시를 지어 기록하시오」

한다. 나는 사양타 못하여 곧 노래 한 장을 부르니 두 여자는 손벽 치고 웃으면서 말하되

「참 고운 신의 말이로구려」

그러자 얼마 안 되어 한 송이 붉은 구름이 하늘 가운데로부터 떨어저 산봉오리에 둘리는데 쇠북 한 소리에 문득 깨니 벼개ㅅ가에 오히려 신선 향기가 있는 듯하다. 알지 못케라 태백천녀의 노름이 어찌 이만할 수 있으랴. 그리고 그 시는 또 이러하다.

『푸른 바다 구슬 바다 서로 다었고
푸른 란새 맞대고 있다
설흔 아홉 떨기의 붉은 부용이
애처롭게 찬거리에 떠러졌구나
原詩

碧海侵瑤海, 青鸞倚彩鸞, 芙蓉三九朶, 紅墮白霜寒.

(蘭雪이 己丑春에 捐世를 하니 時年이 二十七인 故로 三九朶란 말이 詩讖이 되였다 한다)

詩序 原文

乙酉春余丁憂, 于外舅家, 夜夢登海上山, 山皆瑤琳珉玉, 衆峰俱疊, 白壁, 靑熒明滅, 眩不可定視, 霱雲籠其上, 五彩妍鮮, 瓊泉數派, 瀉於石間, 激激作環佩聲, 有二女年俱可二十許, 顔皆絶代, 一被紫霞襦, 一服翠霓衣, 手俱持金色葫蘆, 步屣輕躡, 揖余從澗谷而上, 奇花異卉, 羅生不可名, 鸞鶴孔翠, 翺舞左右, 衆香芬馥於林端, 遂躋絶頂, 東南大海, 接東一碧, 紅日初昇, 波濤浴暈, 峰頭有大湛 泓, 蓮花色碧葉大, 被霜半褪二女曰此廣桑山也, 在十洲中第一, 君有仙緣故敢到此境, 盍爲記之, 余不獲己卽唫, 二女拍掌軒渠曰 星星仙語也, 俄有一朶紅雲 從天中下墬罩於峰頂 擂鼓一響, 醒然而悟, 枕席猶有烟霞氣, 未知太白天姥之遊, 能逮此否, 聊記之云.

—(許蘭雪軒 本集, 芝峯類說, 詩話 參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