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일생/연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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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愛篇(연애편)[편집]

그로부터 상태는 거의 날마다 찾아 왔다. 금봉은 처음에는 귀찮게 여겼으나 열흘, 보름 지나는 동안에 상태가 보고 싶은 생각이 나기 시작하였다.

저녁을 먹고 나서 올만한 때에 상태가 오지 아니하면 기다리기까지 하게 되 었다.

상태가 가자는 대로 산보도 두어 번 가보고 산보 갔던 길에 점심이나 저녁 도 대접받은 일이 있게 되자 금봉은 상태에게 대하여 일종의 애착심을 느끼게 되었다.

〈임 선생이 옥중에 계신데.〉 하고 금봉은 혼자 책망하기도 하지마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임학재, 그나 그 뿐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아니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임학재를 믿고 살아 간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까지도 나게 되었다.

금봉이가 보기에 상태는 마음에 안 드는 사내는 아니었다. 얼굴도 맑고, 그리 남아다운 얼굴은 아니지마는, 또 정신적으로 깊은 맛이 있는 얼굴은 아니지마는, 영민한 미남자 타이프였다. 게다가 여자를 대하는 법이 아주 상냥하여서 가렵단 말을 아니하여도 어디가 가려운지를 먼저 알고 긁어 줄 듯하였다.

『안녕히 가세요.』

하고 상태가 손을 내밀 때에는 금봉은 상태의 손을 잡았다. 손도 부드러운 손이었다. 손 선생의 손 모양으로 나무로 깍은 듯한 손은 아니었다.

거의 날마다 상태를 만나게 된 금봉은 누르기 어려운 몸의 유혹을 깨달았다. 상태의 심히 흰 이빨과 얄붐하고 빨간, 여자의 것 같은 입술이며, 얼굴과는 달라서 남성적으로 잘 발달이 된 육체며, 이러한 것이 몹시 금봉의 흥미를 끌었다.

금봉은 학재를 대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할 때에는 마치 종교적인 듯한 사모 하는 정이 간절해지지마는 육체의 충동은 받은 일이 없었다. 도리어 육체라는 것은 학재의 앞에서는 대단히 더러운 것같이 생각했다. 그래서 다만 학 재의 곁에 늘 있고 싶고 학재의 얼굴을 늘 보고 싶기는 하지마는 학재의 몸과 제 몸과를 가까이 한다는 충동은 없었다. 그런데 상태에게 대하여서는 그와 반대로 정신적 사모는 생기지 아니하나 육체적으로 끌리는 힘을 깨달 았다.

새벽에 금봉이가 잠이 깰 때에 학재는 엄숙한 선생과 같은 모양으로 금봉이 앞에 나타나지마는 상태는 아름다운 육체를 가지고 금봉의 전신이 으스러지도록 껴안는 모양으로 나타났다. 육체적으로 보아서는 학재는 몸이 가냘프고 살에 윤택이 적어서 도저히 상태의 육체미를 당할 수 없는 것같이 생각했다.

금봉은 학재를 유일무이한 사랑과 숭배의 대상으로 삼던 신념을 잃어 버렸다. 만일 학재의 정신적 미와 상태의 육체적 미와 병걸의 쾌활과 재산과 그리하고 손명규의 정복적인 욕심과를 뭉쳐 놓았으면, 그러한 남자를 사랑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필기 시험 합격했다는 통지가 왔어요. 기뻐해 주세요.』

하고 어떤 날 아침 일찌기 상태가 웃으며 찾아 왔을 때에,

『네에. 축하합니다.』

하고 금봉이는 진정으로 기뻤다. 상태가 장하다 하는 생각을 가졌다.

『무슨 상을 안 주셔요?』

하고 상태가 웃을 때에 금봉은,

『자요.』

하고 손을 내밀었다.

상태는 금봉의 손을 꼭 잡아서 끌어다가 금봉의 손등에 키스하였다.

금봉은 손을 빼었으나 하얀 손등에는 상태의 침이 묻은 것이 보였다.

금봉은 지금까지 애써서 지키던 금 하나를 잃어 버린 것 같아서 외면하면서 한숨을 길게 쉬었다.

상태는 아주 숙친한 어조로,

『자, 오늘 우리 가마꾸라(鎌倉[겸창]) 놀러 가요. 가마꾸라 못 가보셨지요? 좋습니다. 절도 있고 큰 부처도 있고, 부처님 코구멍에 편 우산이 들어 갑니다. 그리고 해수욕장이 있고, 또 노에시마라는 섬이 있지요. 그 섬에 가면 좋습니다. 부사산도 보입니다. 멀지 않어요. 두 시간이면 가는 걸요.

자 우리 가세요.』

하고 금봉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금봉은 새뜩하면서 상태가 끄는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벌써 금봉을 만만 하게 본 상태는 두 팔을 뒤로 버티고 금봉의 성난 얼굴을 보면서,

『미인이란 아무렇게 하여도 미인이야. 그렇게 샐쭉하신 모양이 더 이쁘신 데. 미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답디다. 새침한 미인 있고, 웃는 미인 있고, 또 모으로 보는 미인 있고, 그리고 또 무에라더라. 그런데 금봉씨는 어느 모으로 보아도 미인이어든. 옳지, 뒷맵시 미인 있고, 또 목소리 미인 있고, 그리고 또 무에라더라, 옳지, 살 미인 있고. 살이 빛이 곱고 결이 고와야 미인이란 말야. 그런데 말요, 누구누구 하는 계집애들 보면 그중에 한 가지 도 변변히 가진 애가 없거든 ─ 정말입니다. 미스 리를 면 대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안되었지마는, 나는 지금까지 미스 리 같은 완전한 미인은 처음 보았습니다. 정말이야요. 우리는 꼭 생각하는 대로 기탄 없이 말하는 사 람이어든. 속으로 딴 생각 하고 입으로 딴 소리 하는 그런 사람들 우리는 미워합니다. 금봉씨,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아시지요? 우리는 너무 솔직해서 병이란 말야.』

하고 쉬일 새 없이 지껄인다.

금봉은 기뻐해야 할지 성을 내어야 할지 어리둥절해서 상태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상태가 저를 만만하게만 생각하는 데 대하여서는 불쾌한 뜻을 표함이 마땅하리라 하여 새뜩한 태도를 고치지 아니하였다.

『자, 어서 갑시다.』

하고 상태가 시계를 내어 보면서,

『어, 벌써 아홉시가 넘었구먼. 어서 가서 우리에 노시마 가서 점심 먹읍시다. 소라를 통으로 구운 것이 맛납니다.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르지요. 자, 어서 가요. 너무 빼지 마시오. 우리 그러는 것 싫어. 자 어서.』

하고 재촉한다.

『전 안 가요.』

하고 금봉은 거절하였다.

상태가 너무도 재재하게 지껄이는 것이 하도 천박한 것 같아서 반감이 났다.

『안 가요? 왜?』

하고 상태는 놀라는 양을 보인다.

『 선생님만 가세요. 저는 집에 있을 테야요.』

하고 금봉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금봉은 동래 온천 사건을 생각하였다. 손 선생이 동래 온천으로 저를 끌고 간 것이나 상태가 가마꾸라로 저를 끌고 가려는 것이나 꼭 같은 동기인 줄을 금봉은 잘 안다. 오직 다른 것은 손명규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아니하는 사내인데 심상태는 마음에 드는 사내라는 것이다. 재재하고 천박한 잔소리를 하는 것이나 학재와 같은 정신적인 깊고 높음이 없는 것이 천한 듯하지마는 그래도 그 몸이, 상태의 몸이 금봉의 마음을 비끌어 쥐이는 듯하였다. 그러하기 때문에 금봉은 상태와 단둘이 여행을 하는 데 큰 위험을 깨달았다. 이번 상태에게 끌려 가기만 성한 몸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금봉은 분명히 알았다. 그러하기 때문에 금봉은 상태의 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또 그러하기 때문에 억제하 기 어려운 유혹도 깨달았다.

『압다, 퍽도 완고시오.』

하고 상태는 그 가느란 눈이 다 파묻혀 버리도록 웃으며, 『현대 여성이 그처럼 완고해서, 그처럼 용기가 없어서 무얼 하신단 말이오? 친구끼리 대낮에 좀 같이 구경을 가기로 그것이 무슨 큰일이란 말요? 원 나 알 수 없읍니다. 그리고 어떻게 남자들과 함께 일을 하신단 말씀이오? 아무리 남자와 같이 밤중에 단둘이 가더라도 제 마음만 단단하면 고만이지 ─ 또 그래야 정말 인격의 힘이지, 그렇게 소극적으로 남자와 같이 할 기회를 피하기만 해서 무엇한단 말씀이오. 여보시오, 나 원, 미스 리도 그렇게 못나신 줄은 몰랐어요. 어,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군. 내가 사람을 잘못 보는 법은 없는데. 자, 그러지 말고 어서 일어나셔요. 청한 내가 무안하지 않읍니까. 내 낯도 보아 주셔야지요. 자 어서.』

하면서 이번에는 나는 듯이 금봉의 뒤로 돌아가서 금봉의 두 겨드랑 밑으로 가슴을 껴안아서 번쩍 일으킨다.

금봉은 마침내 상태를 따라 가기로 정하였다.「에라 가보자」하는 것이었다. 상태가 저를 만만히 보는 것이 불쾌하지마는 상태가 자주 찾아 오고 몸을 건드리고 하는 동안에 금봉의 몸에 이성을 그리워하는 충동이 일어난 것이다. 상태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겨 보자 하는 유혹을 느낀 것이다.

『어디 가시우?』

하고 주인 마누라가 물을 때에 금봉은 좀 어색한 말로,

『어디 좀 댕겨 와요.』

하고 달아나는 모양으로 문을 나섰다.

상태는 의기 양양하여 지껄이면서 걸었다. 수도교에서 전차를 타고 동경역을 피하여 일부러 품천 정거장으로 갔다.

상태가 차표를 사러 간 동안에 금봉은 대합실 한편 구석에 차 시간표를 보는 체하고 벽을 향하고 서 있었다. 모두 얼굴을 모르는 사람뿐이지마는 다들 저를 보고,

『이년, 너 누구허구 어디를 가느냐?』

하고 책망하는 것만 같아서 이마와 등골에서 땀이 흘렀다.

〈아니다. 내, 죄를 짓는구나.〉 하고 금봉은 정거장에서 뛰어 나와서 우산으로 낯을 가리우고 행길 쪽으로 달아났다.

금봉은 전차를 탈 생각도 아니하고 북으로 북으로 길 있는 데로만 걸었다.

등뒤에는 상태가 칼을 빼어 들고 따라 오는 것만 같았다.

금봉은 천악사라는 절로 들어 가는 골목에서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 보았다 뒤에는 걷는 사람. , 자전거 탄 사람이 많이 따라 오지마는 상태의 모양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금봉은 손수건으로 이마와 코끝의 땀을 찍어 내고 천악사라는 절 속으로 들어 왔다. 고목 그늘에는 시원한 바람이 있고 매암의 소리가 들렸다. 수없는 무덤의 비석과 인도 글자로 쓴 목패들 사이로 금봉은 잃어 버린 무덤이나 찾듯이 헤매었다. 금봉은 적수의사(赤穗義士) 마흔 일곱 사람의 무덤 있는 곳을 지내어서 백금(白金)이라는 데로 통한 문으로 빠져서 학교로 향하였다.

여름을 지난 학교 마당에는 풀이 많이 자랐다. 마치 금봉의 마음속에 방학 동안에 몸의 여러 가지 괴로움의 풀이 자란 것과 같았다.

금봉은 조용한 학교 뜰을 거닐었다. 개학이 며칠 아니 남은 때라 늙은 하인 부자가 학교 마당의 풀을 뽑고 있었다.

피서 갔다가 일찍 돌아 온 랜디스 박사네 아이들이 조그마한 자전거를 타고 장난을 하다가 금봉을 보고 웃었다.

금봉은 기숙사를 돌아 보고 학교 후원 수풀 속으로 거닐며 괴로운 마음을 진정하려 하였다.

죄의 유혹을 뿌리치고 온 것이 기쁘기도 하지마는, 상태에게 말도 아니하고 도망한 것이 미안도 하고 비열하기도 하였다. 그것만 아니었다. 마치 청춘의 즐거움의 썩 좋은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 아깝기도 하였다.

금봉은 집으로 돌아 가기가 싫었다. 집에는 상태가 와서 기다리고 있을 것 만 같았다. 어떻게 상태를 만나나. 차마 다시 상태를 만날 수는 없었다.

금봉은 사감 선생의 집을 찾았다. 사감은 늙은 서양 부인이었다. 미세스 랜디스라는 부인으로 그 남편 닥터 랜디스는 학교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치고 그의 큰딸 미스 랜디스는 영문학과 수사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랜디스 부인은,

『오우 금봉! 여름 동안 잘 있었소? 조선 갔다가 언제 왔소?』

하고 반갑게 인사하는 금봉을 맞았다.

『저는 조선 안 갔읍니다.』

『오우 참, 금봉 조선 안 갔지.』

하고 랜디스 부인은 웃으며,

『여름 동안 동경 있었소?』

『네. 영어 공부 했읍니다.』

랜디스 부인은 고개를 흔들면서, 그것 좋지 않소 『 . 여름 방학, 잘 놀고 쉬라는 방학이오. 이 더운 여름에 산이나 바다에 여행하는 것 좋지마는 이 더운 동경 속에서 공부하는 것 옳 지 않소. 공부하는 것 옳으면 방학 없는 것이 옳소. 여행하는 것도 큰 공부요. 네이추어 ─ 자연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큰 책 공부하는 것, 그것 여름 방학에 할 일이오.』

하고 책망하는 듯이 금봉을 본다.

금봉은 방학 동안에 공부하였다고 책망받는 것이 실로 의외였다. 그러나 이치를 들어 보면 랜디스 부인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남자와 날마다 만나고 남자와 같이 구경을 가려다가 돌아 온 제 일을 생각할 때에는 더욱 부끄러웠다.

『저 오늘부터 기숙사에 있게 해주세요.』

하고 금봉은 상태의 유혹을 영영 끊어 버리려는 제 결심을 만족하게 생각하면서 물었다.

『기숙사 규칙 있으니 개학하기 전에는 기숙사 쓸 수 없소. 앞에 일 주일 있으면 개학이오. 일 주일 기다릴 수 없소?』

하고 랜디스 부인은 이상히 여기는 듯이 금봉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있던 집은 남의 하숙인데 더 있을 수가 없읍니다.』

『응, 왜? 그 주인 왔소?』

『아직 오지는 아니했지마는……』

『그러나 기숙사 규칙 어길 수 없소. 렛미씨(글쎄).』

하고 한참 생각하더니,

『그러면 우리 집에 와 있으시오. 마아가레트 선생 아직 일주일 가루이자와(피서 가는 땅 이름) 있겠으니 그동안 금봉이 마아가레트 선생 방에 와 있어도 좋소.』

마아가레트 선생이란 그의 큰딸 미스 랜디스를 가리키는 말이다. 제 딸더러 선생이라는 것이 좀 우스웠다.

금봉은 곧 하숙으로 가서 주인 마누라더러 학교 선생의 집으로 간다는 말을 하였다.

『왜 일 주일이면 기숙사에 가신다 하더니 그동안을 못 참으시오?』

하고 주인 마누라가 의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금봉은 낯을 붉히면서,

『여기 있으면 위태한 것 같아요. 사감 선생네 집에 가서 있는 것이 걱정이 없을 것 같아요. 마나님을 떠나는 것은 섭섭하지마는.』

하고 제 마음이 결백한 것을 보이려 하였다.

네 알았읍니다 『.. 아가씨는 참 마음이 단단하신 양반이시어.』

하고 마누라는 웃으면서,

『인제니 말이지, 나도 아가씨 일을 좀 염려하였어요. 젊은이들에게 유혹이 많읍니다. 내 딸년도 고만 그 유혹에 넘어 가서 죽기까지 했지요. 그래 도 지금 생각해 보니깐 죽은 것이 갸륵한 것 같아요. 여자의 생명은 정조 아니야요? 참 용하시오. 장래 갸륵한 부인이 되시겠지.』

하고 칭찬하였다.

금봉은 주인 마누라의 말을 듣고 오늘 제가 상태의 유혹을 이긴 것이 기뻤다.

그러나 학재를 옥중에 두고 제가 학재의 방을 떠난 것이 슬펐다. 학재가 무사히 돌아 와서 이 방에 있는 것을 보고 떠나면 얼마나 기쁠까. 금봉은 학재의 책상에 낯을 대고 울고, 학재의 이불에 낯을 대고 울고, 또 제가 빨아 놓은 학재의 옷을 꺼내 보고 울었다. 그리고 그 방을 차마 떠나가기가 어려워 층층대에 서서 울었다. 주인 마누라는 금봉이가 우는 뜻을 다 알아 차리는 듯이 왜 우느냐 묻지도 아니하고 어머니와 같이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가끔 금봉을 바라보았다.

『안녕히 계셔요. 신세 많이 졌읍니다. 잊어 버리지 않습니다. 공일이면 오께요.』

하고 금봉은 짐을 내서 실리고 나서 주인 마누라에게 작별하는 인사를 하였다.

『또 오세요. 임 서방님도 곧 오시겠지요. 아무것도 잘 대접도 못 해드려서 마음에 걸립니다. 적적하거든 언제나 놀러 오셔요. 맛난 것 해드리께요.』

하고 주인 마누라는 수없이 절을 하였다.

금봉은 열 걸음에 한번, 스무 걸음에 한번 학재의 하숙집을 돌아 보았다.

뒷창으로 학재가 내다 보는 것만 같아서 금봉은 차마 발길이 돌아서지 아 니하였다.

금봉은 랜디스 박사 집 이층 마아가레트 방에 자리를 잡았다. 비록 질소한 선교의 생활이라 하더라도 조선 사람인 금봉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 으리으리하여서 감히 건드리기도 어려운 것 같았다. 마아가레트는 삼십이 넘을락 말락한 처녀 선생이었다.

저녁밥을 먹을 때에 랜디스 부인은 기도를 올리면서,

『사랑하는 딸이 금봉을 저의 집으로 보내셔서 저의 집을 빛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아기의 몸과 마음을 주께서 지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더우기나 젊은 처녀로서 모든 인생의 유혹과 번뇌를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조선 사람에게 나타내는 주의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였다 그 말만 아니라. 그 음성의 정성스러움이 금봉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켰다.

『나도 조선 두 번 다녀왔소.』

하고 랜디스 부인은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

『조선 대단히 아름다운 나라요. 그 산 모양 대단히 힘있고 아름답소. 다 만 나무 없소. 나무 많이 나면 더 아름다운 나라 되겠소.』

『금강산 갔었어요?』

하고 금봉은 조선의 자랑으로 금강산 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어서 물었다.

랜디스 부인은,

『금강산 ─ 대단히 아름답단 말 들었소. 그러나 못 보았소. 금강산 그림, 조선 있는 친구가 보내어 주어서 가지고 있소. 그러나 우리 선교사 좋은 경치 구경 다닐 시간 없소. 우리가 보기 원하는 것 경치 아니오, 사람이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오. 나 조선 갔을 적에 예배당에 부인들 많이 모이는 것 보고 기뻤으나 하나님 모르는 부인 더 많은 것 생각하였소. 마음에 소망 없고 화평 없고 주의 길 모르는 동포를 보면 우리 마음 슬프오. 금봉이 공부 잘해서 조선 형제 자매 영혼에 소망 주고 화평 주는 일 하기 바라오. 지금 조선 형제 자매제 개인 생활 돌아볼 시간 조곰도 없는 때인 줄 믿소.

임학재 씨 젊은 사람이지마는 이 정신 많이 가졌소. 금봉이, 그런 사람 많이 아시오? 조선에 그런 사람 많이 나오면 조선 좋은나라 될 수 있소. 금봉이 좋은 사람 되시오. 하나님 믿으면 큰힘 나오. 하나님 안 믿으면 도무지 힘날 수 없소.』

하고 일본말 절반 영어 절반으로, 그러나 힘있게 말하였다.

금봉은 식후에 제 방에 올라가서 창 밑에 교의를 놓고 뒷수풀 끝에 걸린 이른 가을의 초생달을 바라보았다.

금봉의 눈앞에는 달에 비취인 동해 바다의 물결이 보이고 그 저편으로 어두움에 잠긴, 그러나 윤곽이 분명한 조선의 강산이 떠나 왔다.

〈저 강산을 안기에는 너무도 좁은 내 가슴.〉 하고 금봉은 일종의 슬픔을 깨달았다.

〈남의 백성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는 저들도 있거든……〉하고 금봉은 랜디스 부인의 말과 함께 선교사들의 일생을 생각하였다.

『저 흉용한 검은 물결을 가는 팔로 헤어 건널까 이 어리고 약한 몸을 저 어두운 강산에 촛불삼아 태울까』

금봉은 제가 초생달이 비취인 동해 바다를 헤어 건너는 양을 보고 제 몸이 조선 강산의 가장 높은 봉에 올라서 큰 횃불을 들고 있다가 그 횃불이 다 타서 제 손이 타고 머리가 타고 온 몸이 불기둥이 되어서 강산의 어두움과 동해의 물결을 비취이고 섰는 양을 본다.

『이 횃불 다 타거든 제 머리를 태오리다 머리도 다 타거든 몸을 마자 태오리다 아 몸이 불기둥 되어 저강산을 비취리라.』

이렇게 금봉은 즉흥시를 지었다. 수풀 속으로서 서늘한 바람이 한줄기가 불어 와서 금봉의 흥분된 얼굴을 스쳤다.

금봉은 황홀에 가까운 심경을 경험하였다. 금봉은 이 첫가을의 초생달과 같고 저녁 바람과 같이 맑은 몸과 마음으로 일생을 지내는 것을 상상한다.

금봉이가 백발이 되어서 일생에 지나온 길을 돌아 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는 경건한 기도를 올리는 것을 생각한다.

〈아, 내가 왜 그랬던고?〉 하고 금봉은 상태에게 대하여 느꼈던 번뇌를 완전히 뉘우쳤다.

금봉은 랜디스 부인의 집에 떠나온 뒤로 대단히 마음이 편안하였다. 경건한 종교적 가정의 분위기가 금봉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위로하였다. 저녁이면 랜디스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취침 전에 축복하는 기도를 올리고, 그리고 아이들의 키스를 받고, 아이들을 침실에 넣고는 고요한 자장가의 곡조를 피아노로 울려 주었다. 금봉도 침실에서 이 곡조를 듣고 누웠는 것이 퍽 행복스러웠다. 만일 어머니가 살아서 영산 회상을 거문고로 쳐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고, 어린 때에 돌아 가서 눈물을 흘렸다.

새벽이 되면 랜디스 부인이 자는 아이들을 깨우는 곡조를 피아노로 울려 주고, 어떤 때에는 피아노에 맞추어 몸소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아침에 부르는 노래에는,

“Holy, holy, holy, Lord, God, Almighty"

하는 것을 즐겨 부르는 모양이었다. 금봉은 그 곡조가 퍽 힘있고 거룩하다고 생각하였다.

취침은 밤 아홉시, 깨는 것은 아침 여섯시, 랜디스 부인은 마치 제가 시계인 것처럼 시간을 꼭 지켰다. 대청이라고 할 만한 넓은 방에서 유성기도 틀고 이야기도 하다가도 아홉시가 땅땅 치면 랜디스 부인은 아이들(열 두 살 된 딸과 아홉 살 된 막내 아들)을 슬쩍 바라본다. 그러면 아이들은 벌써 알아차리고 보던 그림책, 장난하던 악기를 다 제자리에 갖다 놓고는 둥근 테이블가에 제자리를 찾아서 앉는다. 그러면 랜디스 부인이 축복하는 기도를 올리고, 기도가 끝나면 다 차례로 어머니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굿나잇 마마(엄마 안녕히 주무세요).』

를 하고는 침실에 들어가서 자리옷을 갈아 입고 손을 씻고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그리고 침대 위에 엎디어서,

『하나님 안녕히 주무세요.』

하는 기도를 간단히 하고, 그리고는 베개를 베고 누워서 눈을 깜박깜박하며 어머니가 울려 주는 자장 노래의 잔잔한 가락을 들으면서 잠이 드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에도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피아노 소리에 일어나서 제 손으로 이 닦고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 입고, 그리고는 간단히,

『하나님 안녕히 주무셨읍니까.』

하는 기도를 울리고, 그리고는 딸랑딸랑하는 일곱시 종소리에 식당으로 들어 와서,

『굿모닝마마(엄마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고 어머니에게 키스하면 어머니는 웃으며 고개를 끄떡거려서 인사를 받고, 아이들의 머리 모양, 옷모양, 손톱에 때가 없는가, 매무시가 어떤가, 구두가 잘 번쩍거리는가를 검사하고, 그런 뒤에는 아침 식탁의 기도가 있 고, 우유와 달걀과 신선한 과일을 먹고 ─ 랜디스 부인의 가정 생활은 참으로 아름다왔다. 랜디스 박사와 마아가레트 선생이 돌아 오면 이 가정이 얼마나 더 행복스러울까 하고 금봉은 제가 자라난 가정과 비교하여 부러움을 금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짜증과 갈등과 성냄과 욕설과 꾸중과 불규칙과 무질서와 아이들의 떼씀과 부모의 때림과가 가득 찬 금봉의 집 가정이 슬펐다. 울고 싶었다.

랜디스 부인 집에 온 지 사흘만의 어느 아침에 상태가 금봉을 찾아 왔다.

응접실에 들어 가기 전에 랜디스 부인이 금봉을 눈질하여 불러서, 상태의 명함을 가리키며,

『이 사람, 금봉이 잘 아는 사람이오?』

하고 물었다.

『네, 압니다.』

『좋은 사람이오?』

『네, 좋은 사람입니다.』

『무슨 일로, 이 사람 금봉이 찾아 왔소?』

하고 랜디스 부인이 물을 때에 금봉은 잠깐 주저하다가,

『글쎄요, 모르겠어요.』

하고 분명치 못한 대답을 하였다.

『젊은 여자가 아무 일 없이 젊은 남자와 만나는 것 좋은 일 하나도 없소.

거기 유혹 있소. 만일 금봉이 그 남자와 혼자 만나기 원하지 아니하면 내가 함께 하여도 좋소.』

하고 랜디스 부인은 감독자의 위엄을 보였다.

잠깐 만나서 할 말을 듣고는 곧 돌려 보낸다는 조건으로 금봉은 랜디스 부인에게서 상태와 면회하는 허가를 얻었다.

금봉이가 응접실에 들어 서자 상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반가운 듯이 금봉의 곁으로 와서 금봉의 어깨에 손을 대려 하는 것을 금봉은 몸을 피해 한 교의에 앉고 맞은편 교의를 가리키면서,

『여기 앉으셔요.』

하였다.

상태는 무안하게 앉았다. 그의 흰 얼굴은 벌겋게 되었으나 곧 웃는 낯을 지을 수가 있었다.

『일전에는 실례했읍니다.』

하고 금봉은 상태의 무안해 벌겋게 된 낯빛이 회복되기를 기다려서,

『몸이 괴로워서, 메식메식해서 뛰어 나왔어요.』

하고 거짓말을 꾸며대었다. 그 거짓말이 부끄러워서, 또는 그날 정거장에 서 한 일이 실상 면대하고 보니 미안하여서 금봉은 고개를 숙였다. 상태에게서 큰 원망과 큰 책망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의외에도 상태는,

『무어, 미안하시게 생각하실 것은 없읍니다마는, 난 퍽 염려하였읍니다.

어떻게 염려가 되는지 쩔쩔 매었읍니다. 그러다가 그날 밤에 ─ 아, 그 이튿날인가, 학재군 집주인 마누라헌테서 미스 리가 무사하시더라는 말을 듣고야 마음을 놓았읍니다. 어떻게 내가 마음을 졸였는지는 말씀을 마셔요.

살이 열 근은 내렸겠읍니다. 아무려나 건강하신 양을 보니 안심이 됩니다.』

하고 참으로 안심하는 모양으로 길게 숨을 내어 쉬이며 가슴을 편다.

『참으로 미안했읍니다. 용서하셔요.』

하고 금봉은 아까보다는 퍽 부드러운 호의적 어조로 사죄하는 뜻을 표하였다.

압다 용서가 『 , 무슨 용서야요. 그런 데면데면한 말을 마셔요.』

하고 상태는 금봉의 부드러워짐을 이용하며 더욱 정다운 표정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용서합니다. 금봉씨가 만일 ─ 만일 말씀이야요 ─ 정말 그래서는 안됩니다. 만일 ─ 설사 말이오 ─ 정말 그랬다가야 큰일 나게, 하하하하. 설사 말이야, 설사 금봉씨가 칼을 들어서 내 가슴을 푹 찔러 주신다고 하더라도 나는 금봉씨의 그 칼자루 잡은 손에 고맙다는 키스를 하 럅니다. 만일 금봉씨가 그 손마저 뿌리신다면 나는 금봉씨의 손이 닿았던 칼자루에 키스를 하고 그 칼자루를 안고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죽어서 만일 혼이 있다고 할 지경이면 그 혼은 금봉씨를 따라서 하늘이면 하늘, 지옥이면 지옥으로, 지옥의 또 지옥, 또 또, 지옥이 있다고 하면 거기까지라도 따라 갈 것입니다. 죽어서 혼이 따라다니는 것이야 누가 말리겠어요.

하하하하. 그리고 말이오, 그리고 만일 ─ 이것도 만일입니다. 정말 그런 일이 있다면야 큰일 나게요. 그런 일이 있을 리도 없구요. 그러니까 설마, 가사 그렇단 말씀이야요. 가사 금봉씨가 나를 살려 놓고 뿌리치신다면 나는 그때에는 내 손으로 내 목을 따거나 가슴을 찔러서 죽어 버려서 혼이 되어서 금봉씨를 따를 테야요. 정말입니다. 우리는 한번 하려고 결심한 일은 하늘이 두 조각이 나더라도 하고야 마는 사람이거든. 정말 우리 그런 사람입니다.』

『아이 참 말씀도 잘도 하셔.』

하고 금봉도 픽 웃지 아니할 수 없었다.

『말을 잘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야요?』

하고 상태가 분개하는 듯이 금봉을 노려 본다.

『웅변이시란 말씀야요. 소설책이나 읽으시는 것을 듣는 것 같단 말씀야요.』

하고 금봉은 더 웃는다.

『미스 리는 내가 하는 말을 보통 청년들이 하는 말과 같이 입에 발린 말로 들으십니까? 그렇게 알으시면 오해십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하고 금봉은 제가 무례한 말을 한 것을 깨달아서 미안한 듯이 부정하였다.

『만일 나를 입에 발린 말이나 하는 사람으로 아셨다가는 크게 후회하시리 다.』

하고 상태는 양복 속주머니를 부시럭거리고 찾더니 손수건에 싼 면도 하나를 꺼내어 번쩍하고 금봉의 앞에 내어민다.

금봉은 칼을 보고 깜짝 놀라 몸을 흠칫하고 뒤로 잦혔다. 그 면도는 손잡이를 등으로 감은, 야시 같은 데서 파는 물건이었다. 금봉의 가슴은 뛰었다.

『놀라지 마셔요.』

하고 상태는 그 칼을 들어서 이리저리 돌리며,

『이 칼은 내 동맥을 ─ 내 목숨을 끊기에 쓸 것이지 미스 리의 터럭끝 하나 건드릴 리가 없읍니다. 정말이야요.』

하고 칼을 돌려 잡아서 날을 손에 쥐이고 자루를 금봉에게로 향하며,

『지금 미스 리는 이 자루를 쥐셨읍니다. 그리고 날을 내게 향하셨읍니다.

이 날로 내 목숨을 끊고 안 끊는 것은 미스 리의 자유지요. 나는 몸을 피하 지도 아니하고 또 반항하지도 아니할 테야요. 미스 리가 주시는 칼을 고맙게 받지요. 그리고 내 혼은 이 금봉을 부르면서 ─ 하늘로도 아니 가고 지옥으로도 아니 가고 꼭 미스 리의 몸에 붙어 다니거나 그것이 못되면 뒤를 따라다니지요. 정말입니다. 우리는 꼭 한번 마음에 먹은 것은 하늘이 두 쪼각이 나더라도 꼭 하고야 마는 사람이야요. 나를 나쁜 사람으로 믿어서는 안됩니다.』

하고 굳은 결심을 표시하는 듯이 입을 꼭 다물고 몸을 꼿꼿이 하였다. 그때에 상태의 얼굴의 근육은 전체로 긴장하였다. 그리고 그 눈은 더욱 날카로와지고 빛이 났다.

금봉은 상태의 위엄에 좀 눌리움을 깨달았다. 그러나 금봉은 이때가 상태를 이길 때라 하여 머리속에, 제 몸에 불을 켜 들 것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어서,

『저는 사랑이라는 것을 도무지 아니하기로 결심했어요. 저는 조선을 사랑 해서, 조선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어요. 저는 어떤 남자든지 사랑하지도 아니하고 혼인하지도 아니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러니깐 선생님은 저를 찾아 주시지 마세요.』

하고 단단하게 말을 끊었다. 그러나 할 말을 다 한 것 같지 아니하였다. 제 구변이 도저히 상태를 따르지 못할 것을 생각하였다.

상태는 눈을 감고 가만히 말을 듣고 앉았더니 눈을 번쩍 뜨며,

『그게 사 처녀들이 한번씩은 다 생각하시는 일이지요. 또 그것이 좋은 생각입니다. 그만한 생각을 하실 만하신 줄 아니까 나도 생명을 바쳐서 미스 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통 여자 같으면야 ─ 나를 사랑해 준다는 여자도 많습니다. 최 을남, 강영자 ─ 내가 이름까지 말씀하는 것은 잘못입니 다 지금 말씀은 취소합니다 .. 최 을남, 강영자 두 사람은 이름만은 잊어 버려 주시오. 명예에 관계되니까. 꼭 잊어 버려 주신다고 말씀하셔요.』

하고 중대 사건이나 되는 듯 표정을 한다.

『어떻게 억지로 잊습니까?』

『하아, 이거 큰일 났군. 어쨌으나 나는 취소했으니깐 책임은 아니 집니다. 그런데 말씀이오……』

하고 상태는 제가 하던 말끝을 잃어 버려서 잠깐 머뭇거리다가,

『그러니까 말씀야요, 미스 리가 그만이나 하시니까 내가 생명을 내어 놓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는 일생에 미스 리 한 분 밖에는 다시 사랑하지 아니하럅니다. 정말이야요. 우리는 한번 한 말은 꼭 고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아, 어쩌면, 참.』

하고 마치 금봉에게 예배나 하는 듯이 허리를 굽힌다.

금봉은 상태가 하는 양이 좀 우습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그의 진정을 의심 할 수는 없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한걸음을 물러서서는 안된다는 것을 랜디스 부인의 말 ─ 「지금 조선 형제 자매, 제 개인의 일 돌아 볼 새 없소」 하던 말 한 마디를 생각하고 기운을 얻어서,

『 선생님, 제 생각에는 지금 우리 청년이 사랑이니 무엇이니 하고 저 한 몸을 생각하고 있을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여자들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선생님 같으신 어른은 더욱 그렇게 생각하셔야 되지 아니하겠읍니까. 저 같은 사람이 그러한 마음을 내이더라도 선생님께서 도리어 못하도록 막아 주셔야 할 것이 아니야요? 들으니깐, 간디라는 이도 민족 사업을 하랴거든 독신을 지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그러니깐 조선만을 사랑해서 조선을 애인으로, 남편으로 알리고 작정하였읍니다.』

할 때에 저 자신도 몸에 소름이 끼침을 깨달았다.

금봉의 말을 듣고 상태는 속으로, 〈이 계집애가 단단히 학재녀석의 감화를 받았고나.〉 하고 심히 불쾌하였다. 아니꼬움이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지마는, 상태는 아무러한 인정이나 의리에 도움직이지 아니하는 용기가 있는 동시에 아무러한 모욕이나 분함도 참아 내는 뱃심이 있었다. 상태는 화를 내인다든지, 성 을 내이는 것이 매양 이롭지 아니함을 잘 안다. 만일 누구에게 욕을 당한다 하면 그자리에서는 가느다란 눈만 깜짝거리고, 될 수만 있으면 저를 욕보이 는, 혹은 때리는 저편을 향하여,

『이건 왜 이러시오? 좀 진정하시오. 하하하하.』

하여 농쳐 버리는 재주가 있다. 그 대신 비록 조그마한 원혐이라도 마음속에 꼭꼭 치부해 두었다가 저편이 잊어버릴 만한 때에 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아니하고 단단히 앙갚음을 하여 저편을 골리고야 마는 재주와 인내력이 있다. 일찍 아무도 상태가 성내는 양을 본 이가 없고, 더구나 누구하고 대들어 싸우는 양을 본 이가 없다. 몇 마디 언쟁을 하다가도 저편에 흥분한 빛이 있으면 웃고 화제를 돌리거나, 그것만으로도 안되어서 저편이 바악 바악 대들 지경이면, 그는 시계를 꺼내 보고,

『용서하셔요. 나는 이 시간에 어디 약속이 있읍니다.』

하고, 웃으며 저편과 정답게 인사하고 나가 버리고 만다. 그는 문밖에 나가 서 몇 걸음을 걸은 뒤에 한번 입술을 물고 주먹을 불끈 쥐고, 〈이놈 두고 보아라.〉 하고 한번 보복할 맹세를 하는 것이다.

만일 얼마 뒤에 저편이 그를 만나서,

『일전에는 내 말이 좀 과격해서 실례가 되었소이다.』

하고 용서함을 청하면, 그는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표정을 하다가 이윽고 비로소 생각이 나는 듯이,

『네에, 난 무슨 말씀이라구. 벌써 다 잊어 버렸읍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이튿날까지도 기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고 더욱 정답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태는 결코,

『내가 잘못했읍니다.』

하고 제 잘못을 승인하는 일은 없다. 그는 다만 가만 있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오해시지요.』

하여서 언제든지 책임은 저편에게 지운다. 그는 마치 절대로 잘못할 수 없는 사람과 같은 태도를 가진다. 이것이 저편을 퍽 괴롭게 하지마는 그것을 보는 것은 고소한 일이었다.

이러한 상태이기 때문에 금봉의 훈계하는 듯한 말에 감복할 리는 물론 없지마는, 성낸 양을 보일 리도 물론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경우에 이 감복한 모양을 보이는 것이 금봉의 마음을 끄는 데 효과 있을 것을 알기 때문에 상태는,

『아흐!』

하고 가장 감격 깊은 한숨을 쉬이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가 겨우 들면서,

『감격합니다. 감격이란 밖에 더 할 말씀이 없읍니다.』

하고 또 한번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며, 미스 리 지금까지 『 , 나는 다만 미스 리를 사랑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부터 나는 미스 리를 숭배하고 사모하겠읍니다. 나는 미스 리를 따라 가는 자, 섬기는 자가 되겠읍니다. 그것까지는 물리치실 수가 없으시겠지요? 내가 미스 리에게 수종 드는 것까지야 거절하실 수가 없으시겠지요. 아흐, 나는 오늘 미스 리의 말씀과 태도로 하여서 잠에서 깬 것 같읍니다. 정말입니다. 거짓말 하겠어요? 나는 오늘부터 미스 리를 가슴에 안았던 것을 고쳐서 가슴에 ─ 저어 속속 깊이 영혼의 가슴속에 모시겠읍니다. 미스 리가 그것까지야 금하시겠어요? 미스 리는 심 상태의 생명이니까 생명까지야 끊으라고 하시겠어요? 아흐, 오늘같이 감격 깊은 날은 내 일생에 처음입니다. 정말입니다. 내 말을 고대로 믿어 주셔요. 이 세상에 미스 리를 내가 사랑하고 ─ 아니, 숭배하고 사모하는 십분지 일만큼이라도 사랑하고 숭배 하고 사모해 드리는 이가 있다고 하면, 나는 이 자리에 죽어 버리겠읍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이 내려다 보십니다. 미스 리, 아아, 미스 리.』

하고 두 손을 금봉의 앞에 내어민다.

『금봉! 금봉!』

하고 랜디스 부인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금봉이가 남자 방문객과 오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랜디스 부인의 어머니다운 걱정에 서다.

『네에.』

하고 금봉은 큰소리로 대답하고 나서 상태더러,

『인제는 가세요. 랜디스 선생이 부르시니 저는 가보아야겠어요.』

하고 금봉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기는 가겠읍니다.』

하고 상태도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걸음 금봉의 곁으로 걸어 오면서,

『그래 금봉씨는 나를 그냥 돌려 보내실 테야요?』

하고 한 팔을 금봉의 등뒤로 돌려서 안으려는 기미를 보였다.

『아스세요. 어서 가세요.』

하고 금봉은 상태의 팔을 벗어나서 문으로 비켜서며,

『저는 굳은 결심이 있으니 다시는 저를 찾지도 마시고 편지도 마세요. 저 같은 것을 생각도 마세요. 그럼 제가 먼저 나갑니다.』

하고 얼른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상태는 금봉이가 나가기 전에 금봉을 꼭 끼어 안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적어도 금봉을 한번 안아 보고 금봉의 입에서 키스 한번만이라도 빼앗지 못한 것이 아까 왔다.

『에익!』

하고 상태는 모욕을 당한 것을 느끼면서 랜디스의 집에서 나왔다. 뒤에서 금봉이와 랜디스 부인이 자기를 손가락질하면서 비웃는 듯함을 느끼면서 학교 문을 나섰다.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상태는 단장을 내어 두르면서 한길을 향하고 얼마를 걸어 가다가 시계를 내어 보았다. 오후 세시 반.

〈최 을남이헌테나 가볼까. 어저께 동경을 왔다니. 강영자헌테나 가볼까.

강 영자는 너무 빡빡하고. 최 을남이는 너무 헤퍼서 재미가 있어야지. 새침 뜨기 골로 빠진다고, 강영자가 도리어 유망할는지 몰라. 그렇지마는 그런 계집애는 한번 달라붙으면 떨어지지를 아니해서 걱정이거든. 아무려나 어디 이대로야 허전해서 쓰겠나. 어느 계집애든지 하나 붙들어야지. 원. 금봉이란 그런 쌀쌀한 계집애가 어디 있어. 꼭 그것을 내 것을 만들어야겠는데.

그런 줄 알았더면 숙희나 그냥 따라다녔더면 되었을 것을. 응.〉 상태는 혼자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허, 고 계집애 말법 보아. 대장부가 이 비상한 때에 무얼 연애를 하려 드느냐고. 온 천하를 위한 큰 생각을 못하느냐고. 원 고 말법 보겠지. 딴은 그렇지. 그렇지마는 금봉이 그것만은 안 잊히는걸. 맹랑한걸.〉 하고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가, 〈서서히 두고 보지. 저도 계집이어든 제가 내 손에 아니 휘어 들고 배겨?

안될 말이지. 억지로라도, 속여서라도 한번 버려 주고야 말걸.〉 하고 새로 유쾌한 기분을 얻어 가지고 전찻길을 향하여서 걸어 나갔다.

그후에도 심 상태로부터 금봉에게 자주 편지가 왔다. 열렬한 문구, 전번 만나서 말하던 것과 거의 같은 문구를 늘어 놓은 편지가 왔으나 일체 답장도 아니하고, 또 조선 사람들끼리 모이는 예배당에도 가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깨끗한 기도의 생활을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금봉의 마음은 금봉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처음으로 싹이 튼 금봉의 청춘의 괴로움은 무슨 큰일을 저지르고서나 말 것같이 서둘렀다. 교실에 앉아 선생의 강연을 들을 때에도 학재나 상태의 모양이 번뜩거리고, 자려고 자리에 누운 때에는 더구나 이성이 그리운 생각이 나서 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누구에게 힘껏 안겨 보고 싶은 마음이다.

금봉은 이것이 무서운 육체의 유혹이란 것을 인식한다. 많은 젊은 여자들이 유혹 때문에, 이 본능 때문에 몸을 망치는 것도 어렴풋이 새각한다. 이 것을 이기어야 한다 하고 금봉은 자리에서 일어나 꿇어 엎디어, 주여 하나님이시여 『 , , 이 어린 자식을 불쌍히 여기시와 죄를 이길 힘을 주시옵소서. 주여, 주여.』

하고 기도를 울린다.

어떤 일요일날 랜디스 부인은 금봉을 집으로 불러서 저녁을 먹었다. 숙희도 검사국에서 불기소가 되어서 학교로 돌아 온 지 며칠 지나서다. 조선 사람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진 랜디스 부인은 번민기에 있는 두 조선 여성 인 숙희와 금봉의 마음의 움직임을 어머니다운 세밀한 주의로 살피고 있었다. 더우기 요새의 금봉의 얼굴과 눈치에 드러난 고민을 비상한 근심을 가지고 살피고 있었다. 오늘 저녁밥을 먹이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밥 먹는 동안에는 숙희의 잡혀 다니던 이야기로 판을 막았다. 숙희는 그 좋은 구변 ─ 활발한 여자에게 흔히 있는 수다스러움으로 약간 조작과 과장을 섞어서 듣기에 재미있게 말하였다. 더구나 그 오빠 학재가 체포되던 순간에 보이던 태연한 태도와 경찰과, 검사정에서 취한 영웅적 태도와 당당한 답변, 이런 것들을 마치 늘 곁에서 보고 있기나 하였던 것처럼 확실성 있는 단안으로 말하였다. 금봉은 숙희의 말에 취하다가도 군데군데 숙희가 직접 보았을 수 없는 것을 직접 본 것처럼 말할 때에는 불쾌하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임학재에게 관한 것만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경찰서 유치장에서나 감옥에서 학재 씨가 나를 생각하던가?』

금봉은 숙희에게 이런 말을 묻고 싶었다. 만일 묻는다면 숙희는 반드시 오빠의 속에 들어 갔다 나온 듯이 대답하였을 것이다.

식후에 랜디스 부인은,

『금봉이 요새 얼굴빛 좋지 않소.』

하고 금봉을 바라보면서,

『사람이 마음에 근심 걱정 있으면 얼굴빛 좋지 않소. 근심 걱정하는 것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오. 예수 잘 믿는 사람, 하나님 믿고 예수 공로 잘 믿는 사람도무지 근심 걱정할 수 없는 것이오. 모든 것 하나님께서 알아 하시니 우리 무슨 근심 걱정 있소? 우리 걱정하고 근심함으로 우리 몸 병나고 우리 영혼 죄 짓는 일 밖에 아무 소득 없소.』

하고 일어나 가죽 껍데기 한 성경을 꺼내어서 「마태 복음」육장 이십 오절을 손을 짚고 금봉더러 읽으라 한다.

금봉은 영어로 읽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낱낱이 발음과 액센트에 주 의를 하면서 읽는다.

『그러므로, 내 너희다려 이르노니, 너희는 목숨을 위하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또 몸에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어라. 분명히, 목숨이 먹고 마시는 것보다 중하고 몸이 입는 것보다 중하니라. 공중에 나는 새들을 보라, 심으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고 고암에 쌓아 두는 것도 없건마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먹여 살리지 아니하드냐. 아무도 걱정한다고 제 키를 한 터럭 두께만치도 높게 하지 못하거든 어찌하야 입을 것을 걱정하느냐. 들에 피는 백합꽃을 보아라. 그들은 일도 아니하고 질삼도 아니하되, 내 너희께 이르노니, 솔로몬의 영화로도 백합 한 송이만한 옷을 입어 본 적이 없나니라.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질 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구나 오 사람들아, 너희는 어이 그리 하나님을 믿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고 걱정하고 부르짖지 말어라. 하나님을 아니 믿는 무리들은 오직 사는 것만으로 목적을 삼나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쓸 것을 잘 아시나니라. 너희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옳은 것을 구하라.』

여기까지 읽었을 때에 랜디스 부인은 손을 들며,

『숙희, 금봉이, 인제 알았소? 아무 걱정도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옳은 것만을 구하라 ─ 하나님을 믿는 사람 마땅히 이렇게 살 것이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어리석은 사람들 어떻게 사나, 먹나, 무엇을 입나 이런 걱정하지마는, 이런 걱정 다 부질없는 걱정이오. 사람이 아무리 살랴고 걱정하더라도 하나님 목숨 아니 주시면 살 수 없소. 하나님 나라와 옳은 것을 구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먹을 것 입을 것 다 주실 것이오. 금봉 요새 마음에 걱정 많은 모양이오. 그 걱정 다 쓸데 없는 걱정이오. 죄 짓는 걱정이오. 걱정 생기거든 기도할 것이오. 주의 기도문 외울 것이오.』

랜디스 부인은 많은 설명을 아니하였다. 서양식으로 다만 깨달을 기회를 주어서 당자가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봉이나 숙희에게는 그 성경귀절이 똑바로 마음속에 들어 오지를 아니하였다.

순희의 마음은 조병걸에게 대한 사랑과 세속적인 여러 가지 욕망에 꽉 차서 진리를 받아 들이는 근본 조건이 되는 「부인 마음」이 되지 못하였다.

하나님 나라와 옳음을 구하기 전에 병걸의 사랑을 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 같았다.

금봉의 마음은 비교적 비였으나 이 가르침을 받아 들이기에는 너무도 어렸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과,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피는 백합을 보라는 말은 퍽으나 아름다와서 눈물이 흐르도록 감격되었다.

『언니.』

하고 금봉은 랜디스 부인의 집에서 방에 돌아 오는 길로 숙희더러, 나도 랜디스 부인처럼 『하나님을 잘 믿었으면 좋겠어. 모든 근심 걱정을 다 하나님께 맡겨 오직 기도와 기쁨으로 살아 가면 작히나 좋아.』

하였다.

『흥.』

하고 숙희는 코웃음을 하면서,

『우리도 랜디스 부인만한 나이 되면 그렇게 하지. 랜디스 부인도 젊어서는 사랑도 했기에 남편도 있고 자식도 낳았지, 하하하하.』

하고 자포 자기하는 듯이 침대에 나가 자빠진다.

『언니, 어째 그렇게 되셨소?』

하고 금봉은 숙희를 향하여 놀라는 빛을 보인다.

『왜? 내가 어떻게 되었니?』

하고 숙희는 싱글싱글 웃는다. 고 어린 것이 어떻게 내 속을 들여다 보나 하고 흥미를 느낀 것이다.

『언니가 방학 전에야 왜 그랬수? 기도도 하고 좀 얌전했지.』

『망할 것! 왜 지금은 내가 얌전하지를 않으냐?』

『어디 얌전허우?』

하고 금봉은 숙희가 네 활개 쭉 뻗고 침대 위에 자빠진 꼴을 본다.

『에그, 요것이 여우야.』

하고 숙희는 금봉의 손을 끌어당기어 억지로 그 목을 끼어안고 수없이 입을 맞춘다. 마치 끓어오르는 열정을 못 이기는 것 같다. 숙희의 입김은 뜨거웠다.

얼마 이러다가 숙희는 금봉을 놓아 주고 울기를 시작한다.

이번 방학에 조선에 돌아 가서 숙희는 마침내 병걸에게 몸을 허하였다. 허 하였다는 것보다는 숙희가 병걸을 정복하였다. 학재가 붙들려 간 뒤에 숙희는 병걸의 여관을 찾아 가서 피신한다는 핑계로 병걸과 함께 석왕사에 가서 닷새 동안이나 한방 생활을 하였다.

그때에 숙희는 오직 열정 덩어리였으나, 병걸은 다만 숙희가 원하는 대로만 응하여 주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숙희는 병걸의 마음속에도 제 속에 타는 불과 같은 불을 붙여 놓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썼으나 그것은 모두 효과가 없었다. 병걸은 언제나 태연하고 언제나 냉정하였다.

『좀 힘껏 안아 주어요.』

하고 숙희가 보채면,

『그러지.』

하고 병걸은 힘껏 안았다. 병걸이가 으스러져라 하고 저를 안아 줄 때에도 숙희는 병걸의 팔에 아주 열이 없음을 분명히 느꼈다.

『이 냉혈 동물!』

하고 숙희는 병걸의 따귀를 붙였다.

『어허, 삼십 칠도 이상 체온이 올라 가면 병이게.』

병걸은 이런 소리를 하고 웃었다. 숙희가 보기에 병걸의 정은 절대로 삼십 칠도 이상은 아니 올라 갈 것 같았다. 그것이 숙희의 불만이요 슬픔이었다.

그래서 숙희는 술 먹기를 권해 보았다.

술이 취하면 좀 어룰해질 뿐이지, 그 태연 냉정함은 마찬가지였다.

『이 화상에게는 열정은 없나 보아.』

하고 숙희는 병걸을 꼬집었다.

『열정이란 병이라니. 숙희야말로 해열제를 단단히 자셔야겠소.』

하고 병걸은 웃었다.

숙희는 이런 생각을 하고 울었다.

금봉은 숙희의 이 이상 야릇한 행동이 가엾었다.

그날 밤부터 숙희와 금봉은 한 침대에서 잤다.

조병걸이가 다시 동경에 오게 되매 숙희는 틈만 나면, 핑계만 생기면 병 걸을 찾아 갔다. 병걸에게서는 답장 하나 오지 아니하건마는 숙희는 거의 날마다 병걸에게 편지를 썼다. 번번이는 아니나 이따금 숙희는 병걸에게 보내는 편지를 금봉에게 보였다. 글재주가 있고 시인될 소질을 가진 금봉의 눈에는 숙희의 편지는 퍽 유치하였다. 그러나 그 노골적이요, 열정적인 데는 금봉도 감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어떤 때에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금봉은 낯을 붉히며,

『아이 언니두! 무얼 그런 소릴 다쓰오?』

하였다.

『그 작자가 피부가 쇠투겁으로 되고 신경줄이 동아줄이란 말이다. 웬만해 가지고야 감각이 생기나.』

하고 숙희는 웃지도 아니한다.

금봉은 숙희가 연애병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연애란 고약한 병이라고 생각하였다. 숙희는 공부에도 마음이 없고 밤낮 생각하는 것이 병걸만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금봉도 숙희 모양으로 이성을 사랑해 보았으면 하는 생각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연애란 병인 것을 깨달을 때에 연애라는 것이 무서워졌다. 심 상태도 연애병에 걸린 환자여니 하면, 그 추군추군하고 염치 없는 것이 저으기 용서가 되었다.

금봉은 랜디스 부인의 말을 들은 후로 「마태 복음」육장 이십 오 절에서 끝 절까지를 날마다 한번씩 읽고 랜디스 부인 말대로 무슨 괴로운 생각이 나거나 이성이 그리운 생각이 날 때에는 주의 기도문을 외었다. 그러면 그 시끄러운 생각들이 다 스러지는 것이 기뻤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어리고 연약한 딸을 불쌍히 여기시와 연애의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옵소서. 연애는 병인 줄 깊이 믿사옵나이다.』

금봉은 이러한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기도 중에도 학재의 모양이 나타날 때에는 멈칫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렇지마는, 학재를 생각하는 것은 죄 되는 것 같지 아니하였다. 오직 걱정인 것은 밤에 자리에 누워 자려 할 때와 아침에 잠이 깰 때에 심 상태의 품에 안기는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학 재의 모양이 보일 때에는 마음이 엄숙하여지지마는 상태의 모양을 생각할 때에는 그만 마음이 풀어져 버려서 걷잡을 수가 없었다. 금봉은 상태의 무슨 무서운 예방에 걸린 것만 같았다. 그러할 때에는 금봉은 주의 기도문을 외었다.

그러나 어떤 날, 금봉이가 감기로 열이 좀 있던 날 밤에 상태를 따라 어느 시골 여관에 들어서 한자리에 자는 꿈을 꾸고 나서는 금봉은 울고 싶었다.

『하나님, 이 불쌍한 딸을 왜 버리십니까. 왜 꿈에도 저를 보호하야 주시 지 아니하시나이까?』

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다. 금봉은 지난 여름 방학에 상태의 유혹을 받아서 가마꾸라라는 곳에 가는 차를 타려고 시나가와라는 정거장까지 갔다가 상태가 차표 사러 간 동안에 슬며시 도망해 나온 일을 생각한다. 그때에 어렴풋이 마음에 먹었던 것이 꿈이 되어 나온 것이 무서웠다. 어렴풋이, 아주 어렴풋이 상태와 한자리에 자는 쾌락을 아주 눈 한번 깜박할 동안, 그보다도 더 짧은 동안 생각하였던 것이 곧 아뿔사 하고 칠판에 쓴 글씨를 지워 버리듯이, 빡빡 지워 버렸던 것이, 그것이 혼의 어느 구석에 붙어 있다가 꿈이 되어 나왔구나 하고 금봉은 무서워서 떨었다. 한번, 두 번 상태에게 손을 잡혔던 촉각, 허리를 안겼던 촉각, 이런 것은 더구나 깊이 깊이 영혼에 박혀서 끝끝내 말썽을 부릴 것이 두려웠다.

『하나님, 하나님!』

하고 금봉은 힘써 불렀으나 그 흉한 꿈이 꾸이기 전보다 하나님이 까맣게 멀어진 것만 같았다.

어느 눈 많이 오는 날. 동경 치고는 꽤 많이 함박눈이 퍼붓는 날 밤. 마침 토요일인 것을 이용하여금봉은 숙희와 같이 병걸과 상태를 따라서 어떤 극장에 로미오와 줄리엣 〈 〉이라는 셰익스피어의 극 구경을 갔다. 극이 셰익스피어의 명작이요, 또 출연하는 이가 어떤 대학 교수 교사들이라는 말에 사감도 쾌히 허락한 것이었다. 이날은 숙희나 금봉이나 크리스마스에 입으려고 지어 두었던 조선옷을 입었다.

극장 앞에는 사람들이 표 살 차례가 돌아 오기를 기다리노라고 길다랗게 줄을 지어 섰다. 일등, 이등, 삼등표를 파는 창구멍마다 길다란 사람의 줄 이 뻗혔다. 우산과 외투와 모자에는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그중에는 얼굴의 골격과 표정으로 보아 조선 학생인 듯한 이들도 보이고, 예배당이나 희석에서 낯익은 사람들도 보였다.

『숙희!』

하고, 부르기는 숙희를 부르면서 어깨는 금봉의 어깨를 치는 것은 최 을남이었다. 검은 외투에 모자까지 쓰고 마치 직업 부인같이 차리고, 그 곁에는 강영자의 무표정한 새침한 얼굴이 있었다.

『누구허구 왔어?』

하고 을남은 좌우를 돌아 보며,

『조병걸씨허구 왔겠지?』

하고 숙희를 빈정거린 뒤에 금봉의 손을 잡으며,

『금봉아, 손 선생이 동경을 온다고 편지를 했더라.』

하고 금봉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손 선생이?』

하고 금봉은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응, 그럼 안 와?』

하고 을남은 숙희와 금봉을 번갈아 보며 어성을 낮추어서,

『손 선생이 학교에서 미역국을 먹었대. 우리 오빠가 그러는데, 손 선생이 저 평택 논 말이야, 학교 논을 팔아서 철원에다가 옮겨 사는 데 십만 원인가 십 이만원인가를 먹은 것이 탄로가 되어서 학교 이사를 떼웠다고. 손 선생 이 족히 그런 짓을 할 작자가 아니야? 그런데 모두들 손 선생을 콩밥을 먹인다는 것을 교장 선생이 그러지 말라고 해서 콩밥은 안 먹게 되고……』

하고는 또 한번 금봉을 본다.

금봉은 땅 속에라도 들어 가고 싶었다. 금봉은 지난봄 동경 올 때에 서울 서 떠나는 차중에서 손 선생이 자기더러 하던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때에도 평택에 볼 일이 있노라고 평택까지만 동행하노라고 하고 부산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손 선생이 이런 부정한 일을 한 것이 다 저 때문인 줄을 잘 안다. 가난한 사람이 금봉의 학비를 대이려고, 또 재산으로 금봉의 마음을 끌려고 이런 짓을 함인 줄을 금봉은 잘 안다. 금봉은 지금까지 먹은 밥, 지금 몸에 감고 있는 옷이 다 손 선생이 보내어 준 이러한 부정한 돈으로 된 것임을 생각할 때에 죽고 싶었다.

『그런데 동경은 무엇하러 올까.』

하고 숙희가 혼잣말 모양으로 한다.

『이 뚱딴지 보아.』

하고 을남은 숙희의 옆구리를 푹 찌르며,

『손 선생이 몸은 서울에 있어도 마음은 동경에 있는 줄을 몰라? 이 아가씨 곁에.』

하고 금봉의 턱을 만진다.

『아이, 언니두.』

하고 금봉은 성이 나서 팩 돌아선다.

『오 참.』

하고 숙희는 또 뚱딴지 대답을 한다.

을남의 오빠가 표를 사가지고 온다. 그는 형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서,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른 보기에 싱거운 듯하면서도 맑은 눈이 그의 심상하지 아니한 「매력」을 보이는 사람이다. 고등 상업에 학적을 두었건마는, 정치에 많이 뜻을 두어서 정당 연설회에 다니기를 좋아하고 뱃심이 좋아서 동경에 있는 정치가들도 많이 찾아 보아서 상당히 낯이 넓은 사람이 다.

『응, 구경들 왔나?』

하고 형식은 숙희와 금봉을 보고 반말로 인사를 하고,

『표를 샀나? 내 사줄까?』

하고 동생들을 대하는 태도다. 형식은 누이 을남의 동무에게 대하여서는 다 동생 대접으로 반말 하고 싶은 때에는 반말도 하고 해라 하고 싶은 때에는 해라도 한다. 그는 별로 구애가 없는 사람이었다. 형식의 이 성격이 남녀를 물론하고 친구들의 호의를 끌었다.

손 명규가 금봉의 하비를 을남에게 부탁하지 아니하는 까닭은 여자들 사이에 비상한 환영을 받는 형식을 꺼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식은 결코 저를 신뢰하고 따르는 여자를 건드리지 아니하는 점이 있었다.

이윽고 병걸과 상태가 표를 사가지고 왔다.

『요오!』

『야아!』

하고 병걸, 상태, 형식은 악수를 하였다.

극장은 만원이었다. 서울서 광무대나 단성사 밖에 보지 못하던 금봉에게는 이 극장은 도무지 이 세상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크고 화려하였다.

그 둥글고 크기 하늘 같은 천정이라든지, 그 천정에 그린 선녀의 그림이라 든지, 밤하늘에 별과 같이 찬란한 전등빛이라든지, 바닥에 깐 빨갛고 포근포근한 천이라든지, 또 세 층으로 된 관객석에 가뜩 가뜩 찼으되, 조용한 남녀 관객이라든지, 모두 다 금봉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금봉은 이러한 놀라운 생각을 가지고 붉은 공단에 금으로 수를 놓은 막이 열리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임성구(林聖九) 일행의 신파 연극 밖에 본 일이 없는 금봉에게는 장차 나올 대학 교수와 일본에 가장 이름이 높은 여배우가 연출한다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연애극은 마치 무슨 큰 신비한 것이나 같이 생각히였다.

어느 대학에서 영문학을 배운다는 문영이라는 학생이 주로 을남과 형식을 향하여 열심으로 〈로미오와 줄리엣〉극을 설명하고 있다. 이 학생은 요새 에 새로 얻은 을남의 신하였다. 자유 연애주의자인을남은 누구나 마음에만 들면 얼마 동안 사랑하고 데리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정조를 헤프게 허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눈치까지만, 혹은 악수까지, 혹은 키스까지, 혹은 안겨 주는 것까지를 허하여서 저편의 애를 태우는 것이 을남의 장난이었다. 그때에는 연애는 신성이라든지, 연애는 자유라든지 하는 생각이 문학을 통하여 청년 남녀 중에 많이 퍼진 때였으므로 연애를 하는 것은 마치 인생 의 의무처럼 알고, 종교적 수련처럼 생각하는 생각이 많았었다. 을남은 이 주의자의 하나였다. 을남의 남자 친구 중에는 무론 연애 지상주의가 많았지 마는, 오늘 데리고 온 문명이라는 이 문학 청년도 《학지광》(學之光) 잡지에 연애론을 한창 잘 쓰는 청년 중의 하나였다.

문은 학교에게 선생에게 들은 강의대로 셰익스피어 극의 연애 이야기를 하였다. 오필리아의 연애, 로미오와 줄리엣의 연애 등등. 문의 말을 들으면 마치 셰익스피어는 오직 연애를 위하여서만 일생에 문학을 쓴 것 같고, 이 인생이 전체로 연애만을 위하여서 된 것 같았다.

『오빠, 알아 들으셨수?』

하고 을남은 가끔 형식의 옆구리를 찔렀다.

형식은 귀찮은 듯이,

『그게 다 무슨 소리야? 지금 구라파서부 전선에서는 하루에도 몇 만 명 사람이 각각 조국을 위해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 연애가 무슨 주리를 할 연애야?』

하고 빈정대면서 문이 열심으로 하는 설명을 아니 들으려는 듯이 고개를 휘휘 돌리고 두 주먹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이 관객석에 앉은 사람들 구경을 하고 있다 잘생긴 . 여자도 보고, 못나고 잘 차린 여자도 보고, 특색 있는 남자들의 얼굴과 머리 모양도 구경하고 있다.

형식은 연애 반대자다.

『연애란 못난 연놈이 하는 유희다. 비싼 밥 먹고 하는 값 없는 장난이다.』

하는 것이 그의 연애론이다. 이 때문에 을남은 성화를 한다. 오빠에게 연애 교육을 하려고 을남은 애써서 어여쁜 동무들을 소개하지마는, 그 동무를 보고 난 뒤에 형식에게 감상을 물으면 형식은 피하고 입을 뾰죽하게 내어 밀면서,

『응, 그 계집애는 사흘 굶은 고양이 새끼 같고나, 아이 보기 싫어.』

한다든지,

『응, 그것은 꼭 동물원 원숭이 볼기짝처럼 생겼더라.』

한다든지 험구를 하고 빈정거린다.

그래도 을남이가 오빠 형식을 대하여 열심으로 연애론을 하면 형식은 흔히 강영자를 보고,

『영자, 영자는 을남이 물들지 말어. 저것은 미쳤다니깐 미쳤어.』

하고 시치미를 떼었다. 그래도 을남이가 형식에게,

『오빠는 사람이 아니야. 그렇다고 노상 여자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성인도 못되면서 이상 야릇해.』

하고 대들면 형식은,

『너도 그 놈팽이들 줄줄 달고 댕기지 말고 어느 놈이나 나 한 놈 주둥이 까지 아니한 놈을 붙들거든 일생 같이 살 도리를 해야지, 그 침을 게 흘리고 계집애 궁둥이나 따라다니는 놈들하고 오래 추축하다가 소문이 나빠져서 아무도 얻어 가지도 않게 된다. 남들은 너를 헌 계집이라고 아니하니?』

하고 사정 없이 몰아 센다.

이렇게 형식은 연애를 미워하면서도 누이 을남의 연애에 대하여서는 도무지 간섭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형식의 인생과 정치 이론인 자유주의에서 온 것이었다. 형식은 정치나 인생의 모든 것에 있어서 자유주의자였다. 남을 간섭하기도 원치 아니하고 남의 간섭을 받기도 원치 아니하였다. 게다가 그의 천품이 한편으로 보면 극히 다산적이요 명민하여 조그마한 이해 관계나 조그마한 감정의 움직임까지도 놓치지 않고 다 알아 차리면서도 한편으 로는 느리고 오불관언하는 태도를 가져서 도무지 희로애락을 나타내지 아 니하였다 그래서 남의 . 속은 다 들여다 보면서도 제 속은 남에게 보이지 아 니하였다. 이 점이 그가 남에게 존경과 두려움을 받는 점이었다.

을남도 오빠 형식과 공통한 성질이 많았다. 그 뱃심 좋은 것이라든지, 사랑 하는 체, 열정적인 체하면서도 속에다가는 딴 배포를 하는 것이라든지, 다 그러하였다. 다만 형식에게 있어서는 정치상, 일반 도덕상의 자유주의가 을 남에게 있어서는 국한된 연애의 자유주의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영문학생 문영(文榮)으로 말하면 일신이 도시 열정이요, 마음에는 지붕도 없고 문도 없는 듯한 사람이었다. 그는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 가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잘 웃고 잘 울고 잘 성내고 잘 사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모든 감정을 다 줄 때에 남을 미워하는 감정 하나 만은 주기를 잊어 버린 것처럼, 그는 도무지 남을 미워할 줄을 모른다. 남이 그를 욕을 보이면 그는 분노하지마는 돌아서서는 곧 풀어 버린다. 이것을 그의 친구들은 뒷심이 없다고 하거니와, 실로 문영은 무엇이든지 한 가지 감정을 오래 끌고 가지는 못한다. 그때 그때 즉흥적으로 살아 가는 것 같았다.

문영은 이렇게 감정적 인물이기 때문에 앞뒤를 잰다는지, 이해를 타산한다 든지 하는 생각은 별로 가지지를 아니하였다. 을남이가 문영을 좋아하는 것 은 이 점에 있었다.

『나는 열정적이요 순정적인 남자를 숭배해요.』

하고는 을남이가 문영의 손을 잡을 때에는 문영은 전신이 열정이 되고, 순정이 되고, 감격이 되어 버려서 낯은 붉어지고 가슴은 두근거리면서,

『을남씨, 오늘이 내 영혼의 생일입니다. 사랑으로 다시 사는 기념일입니 다.』

하고 을남에게 절을 하였다.

을남은 그것이 좋아서 어머니가 어린애 귀애하듯 문영의 머리를 쓸면서,

『내 문영!』

하고 빙그레 웃었다.

을남이가 요새에는 문영을 장난감으로 가지고 노는 줄을 형식은 잘 안다.

그렇지마는 형식은 그것도 물론 간섭하지를 아니한다. 오늘을남이가 형식 더러 극장에를 오자고 조른 것도 문영을 위함인 줄을 알지마는, 자기와 강영자는 허수아비로 따라 오는 줄을 알지마는 못 견디는 체하고 을 남을 따라 온 것이었다. 대관절 누이 을남의 장난감이 되는 문영이라는 것이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작자인가 좀 연구해 보자 하는 호기심도 없지는 아니하였으나, 을남의 장난감이 되는 것을 보면 애초부터 몇 푼어치 안되는 작자인 줄은 잘 안다.

형식은 상태의 깐깐하고 표리 부동한 것을 미워하지마는 겉으로 좋은 친구로 대접하였고 병걸에, 대하여서는 형식은 상당히 경의를 표하고 있다. 임학재를 장래에 극히 유망한 사람으로 존경하여서 을남과 혼인을 시킬 생각도 가지고 있었고, 또 을남과학재와 서로 교제할 기회도 만들어 주었지마는, 을남이가 비뚜루 달아나는 것을 보고는 그만 그 희망을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도리어 얌전한 강영자와 임학재를 맺어 줄까 하는 생각까지 가졌으나 워낙 불간섭주의, 자유주의자인 형식은 그것도 자기네의 자유에 맡겨 버렸다.

병걸에게 대한 형식의 존경은 무론 학재에게 대한 것과는 성질이 다르다.

형식은 병걸의 부득 요령이지마는 광풍제월같이 도무지 사물에 구애함도 없는 성질이 좋았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더라도 별로 흉금을 열어 말하는 일도 없지마는, 특별히 흉금을 열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언제나 빙그레 웃는 낯인 병걸의 흉금에는 자물쇠도 빗장도 있는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렇다고 속이 발딱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깊은 삼림과 같이 은은하고 깊숙함이 있는 것 같았다. 형식은 병걸의 이러한 성격이 좋았다. 형식 자신에도 이러한 유유한 기분이 없지 아니하지마는, 그래도 좀 갈피도 있고 야심도 있고 약간 심술도 있음을 저 스스로서도 잘 안다. 병걸의 광풍제월을 따라 가자면 천리 만리라고 형식은 병걸을 대할 때마다 늘 생각한다.

『상태놈 따위야 쥐새끼지마는 병걸이녀석은 사자의 기상이 있거든.』

하고 형식은 가끔 찬탄한다.

지금 이 극장에 와 앉아서도 문영이가 열심으로 자기의 박학과 예술에 대한 식견을 쏟아 놓은 자리에 상태는 자기도 거기 대해서는 몽매하지 않다는 것을 보이려고, 혹은 찬성으로 혹은 반대로 혹은 아첨으로 그 말에 참녜하 는데 대하여 병걸은 듣는 듯 안 듣는 듯 그저 벙글벙글 하고만 앉았는 것이 빈정대고 앉았는 저보다 품격이 높은 듯하여 형식은 병걸을 찬탄하는 생각을 가졌다.

막이 열렸다. 관중의 우뢰 같은 박수가 일어났다.

금봉은 일변 문영의 영문학론을 듣고 일변 아까 을남에게서 들은 손 선생 이 학교에서 쫓겨 나서 동경으로 온다는 말을 근심하고 있다가 막이 드르르 걷히고 관객석의 전등이 꺼질 때에 눈과 마음을 무대로 돌렸다.

무대면은 줄리엣의 아버지의 고대식 건물의 일부, 문에 접한 부분이었다.

로미오가 친구들과 함께 넓적다리까지 내어 놓인 옷을 입고 망토를 어깨에 걸고 가느다란 칼을 차고 두리번거리는 광경이다. 창으로 불빛이 비취이는 밤 경치다.

『인제는 이야기를 그만하고 구경이나 해.』

하고 형식이가 아직도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문영과 심 상태를 책망했다.

로미오가 가장 무도회장으로 들어 가고, 또 로미오와 줄리엣이 창에 서로 사랑을 약속하고 둥둥의 장면이 지나, 결투하는 장면이 지나, 줄리엣이 집에서 뛰어 나와, 신부의 집으로 가, 죽어, 무덤으로 가, 로미오가 무덤으로 찾아 와, 줄리엣이 살아 나, 반갑게 만나, 이러한 장면이 차례로 전개되었다.

금봉에게는 이 열렬한 연애의 장면들은 다만 연극으로만 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다만 취하였을 뿐이었으나 차차 금봉은 객의 지위를 떠나서 극중의 인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금봉 자신이 줄리엣이 되고 로미오는 임학재가 되었다. 자기도약을 먹고 죽으면 임학재가 와서 도로 살려 내어 줄 것만 같았다. 설사 그 약이 다시 살아 날 수가 없는 약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채 죽기 전에 한번 학재에게 안겨서 사랑하노란 말만 들어도 기쁠 것 같았다. 그것도 못하더라도 자기가 다 죽어서 싸늘하게 몸이 식은 뒤에라도 학재가,

『내 사랑하던 금봉이.』

라고 만져 주고 울어 주고 관을 붙들고 묘지까지 나가서울어 준다면 그 얼마나 행복될까.

금봉은 연극이 끝나기까지에 같이 온 사람들이 무엇을 하였는지, 세상에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른다. 막과 막 사이에 사람들이 담배 먹으러도 나가고 마실 것을 사 먹으러도 나가건마는, 금봉은 한 자리에 꼭 앉았고만 싶었다. 혹시 끌려 가더라도 마음에는 오직 로미오와 줄리엣뿐이었다.

〈내가 약하다.〉 하고 금봉은 줄리엣의 열정과 담대함을 보면서 스스로 책망한다.

〈내가 왜 학재씨에게 담대하게 내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였던고. 왜 내가 몸에 타는 불로 학재 씨의 혼을 불사르지 못하였던고.〉〈그러나 학재씨도 나를 사랑할까. 로미오처럼 나를 사랑할까?〉〈물론이다. 학재 씨는 나를 사랑하신다. 오직 사랑을 누르시는 것이다, 죽이시는 것이다.〉〈그러니깐 내가 내 가슴의 불로 불만 붙여 놓으면 학재씨도 나와 함께 탔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를 못하였으니. 내가 왜 그렇게 하였던가?〉〈이제는 학재 씨는 옥에 계시니 어찌하나? 언제나 나오시나? 옥에서만 나오시면, 내가 만나기만 하면, 만나는 맡에 나는 학재 씨의 가슴에 매어 달리련다. 그럼 안매어 달려?〉〈옥으로 편지라도 할까. 가서 면회라도 할까.〉〈옳다! 나는 줄리엣이 되련다. 줄리엣과 같이 모든 것을 다 돌아 보지 말고 사랑으로 타련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연극으로 보아도 이렇게 아름답거든 하물며 내가 줄리엣이 되어 학재 씨를 로미오를 만들면…… 아아, 얼마나 더 아름다운 일일까.〉 금봉은 연극을 보아 가면서 혼자 이러한 생각을 한다. 마치 금봉의 몸과 마음이 온통 사랑으로 타오르는 것 같았다. 금봉의 두 뺨에는 흥분이 들고 코끝과 이마전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극장 안은 증기 기운과 사람 기운으로 후끈후끈하여 숨이 막힐 듯하였거니와, 금봉은 남달리 등과 두 뺨이 후끈거림을 깨달았다. 금봉의 어머니의 피와 함께 받은 열정이 깨어난 것이다. 줄리엣을 보고 깨어난 것이다.

『그렇게 재미있으셔요!』

하고, 상태가 어느 기회에 금봉의 곁에 와 앉았든지, 금봉도 모르는 새에 금봉의 손을 더듬어 쥐었다가 막이 닫힐 때에 금봉의 귀에 입을 대이고 묻는다.

금봉은 상태의 손에 쥐어진 손을 살그머니 빼어 내며 괘씸한 눈으로 한번 상태를 노려 보았다. 이 거룩한 줄리엣의 몸에 상태 같은 자의 손이 닿는 것은 큰 모욕인 것 같았다.

『가자구. 그거 어디 볼 것 있나?』

하고 형식은 끝막을 남겨 놓고 가자는 것을 을남이가,

『오빠, 남자의 기상이 그래서 쓰겠수? 무엇이나 시작하거든 끝장을 보아야 하는 게지.』

하여서 붙들어서 커피를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숙희도 병걸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을 기회를 얻은 것을 고맙게 생각하였다.

식당에서는 화제는 물론 지금 본 연극에 관하여서였다. 영문학 공부를 하는 문영이가 열심으로 배우의 잘잘못을 비평하였다. 그의 비평을 들으면 모든 배우들의 한 사설이나 몸짓이 하나도 바로 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문영 자신은 지금 영문학을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영문학으로도 대가요, 셰익스피어는 혼자만 잘 알고, 더우기 연극에 있어서는 세계에 가장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일본의 무대 예술은 아직 멀었거든.』

하고 문영은 마치 세계의 극예술을 모조리 다 연구한 듯이 결론적으로 오늘 밤의 연극을 비평하고 아직 한 막 남은 데 대하여서도 예언하듯이 미리 비평을 하여 버렸다.

문영이가 제 앞에 놓인 커피도 마시기를 잊고 이렇게 혼자 떠드는 동안에 형식은 나는 그런 소리 「 안 듣는다」하는 듯이 탐조등 모양으로 눈을 이리 저리 돌려서 사람 구경을 하며 담배만 피우고, 을남은 문영의 말에는 무조건 찬성인 듯이 입을 반쯤 벌리고는 가끔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병걸은 문영의 말을 듣는지 아니 듣는지 모르지마는 눈만은 문영의 흥분된 긴 앞머리 갈기로 반이나 가리워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벙글벙글 웃고 앉았고, 숙희는 또 문영과 병걸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는 마치 불의에 돌아 오는 병걸의 시선을 아깝게도 놓치지 않았다 하는 듯이, 또는 병걸의 시선이 잠깐이라도 돌아 오기를 기다리는 듯이 이따금 물끄러미 병걸을 바라보고 있고, 강영자는 소구둠하고 숟가락으로 남은 커피를 저어 가면서 문영의 건방지고 싱거운 것을 혼자 비판하고 있다. 오직 금봉이가 문영의 말 가운데 제가 좋게 생각하던 대목의 연극을 악평하는 것이 있을 때에는 살짝 낮을 붉히고는 고개를 숙인다.

『대관절……』

하고 형식은 문영의 말의 중동을 끊으며,

『소설이니 극이니 시니 예술이니 하는 것을 자네네들은 무슨 끔찍이 크고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일세. 그까짓 연극을 잘하고 못하 는 것이 사회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 말야? 그저 구경군들이 보고 심심 소일 이나 했으면 그만이지그려, 그것을 무얼 천하 대사나 되는 것처럼 떠드느냐 말일세. 그도 영웅 열사의 사적이라든지, 또는 일반 민중을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흥분시키는 무엇이라든지 하면 몰라도 그까짓 로미온가 라미온 가 한 부랑자녀석과 줄리엣인가 달리엣인가 하는 방정맞고 음탕한 계집년이 배척지근한 사랑으로 죽네 사네 하는 것을 땀을 흘리며 지은 놈도 지은 놈, 탈벙거지를 쓰고 무대에서 지랄 발광을 하는 놈도 하는 놈, 무엇을 먹겠다 고 비싼 돈을 내고 눈비 맞아 가며 구경 오는 놈도 후리아들놈이란 말일세.』

하고 막 내려 부순다.

『이 사람, 자네는……』

하고 문영은 형식의 말에 너무도 분개해서 손가락과 입술을 바르르 떤다.

문영은 떨리는 소리로,

『이 사람, 자네, 그래 자네는 예술을 부인하고 시성 셰익스피어도 부인한 단 말인가? 자네 말은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모욕일세 예술이 없고 인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술의 신성을 모르는 사람은 동물일세, 동물야.』

하고 싸움이라도 할 듯이, 대든다. 정말 문영은 마치 낯바닥을 발길로 짓밟힌 것과 같은 불쾌와 분노를 깨달았고, 평소에부터 형식이가 천하대사니 정의니 인도니 하고 높은 체, 큰 체, 달인인 체하는 데 대하여 가졌던 반감이 더욱 날카로와졌다.

『자네도……』

하고 형식은 문영의 흥분하는 양을 보고 「또 걸렸고나」 하면서,

『자네도 이 다음에 글을 쓰거든 좀 웅장한 것을 쓰지, 달착지근한 음담패설만은 제발 쓰지 말란 말야. 귀한 밥 먹고 왜 그런 값 없는 글을 쓸 게 무엇이냐 말일세. 이왕 셰익스피어를 배우랴거든 「줄리어스 시이저」나 「킹 리어」나 「맥멧」같은 것을 배우게그려.』하고, 인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서 사람 구경을 한다.

『자네가 무얼 아나?』

하고 문영은 더욱 분개하여,

『자네 따위야 주판이나 놓아. 모르거든 국으로 가만히 있고.』

을남은 형세가 대단히 불온한 것에 쾌미를 느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갈등이 생기는 것을 보면 을남은 언제나 기뻤다. 길에서라도 싸움하는 것을 보면 갈 길을 잊고 끝까지 구경하다가 싸움이 끝이 나면 섭섭하였다. 을남은 집에 불붙는 것을 보기를 좋아하였다. 소방대가 달려 오고 펌프에서 물 발이 기운차게 올라 가는 것은 보기 좋으나 불이 꺼지면 섭섭하였다. 병인을 위문 가면 그 병인이 금방 죽는 양을 보고 싶은 마음도 났다. 을남에게는 이러한 병적이라 할 호기심이 강하였다. 지금도 문영이가 형식의 커다란 발에 모가지를 꼭 밟혀서 바둥바둥하는 것이 못 견디게 쾌하고 재미있었다. 그래서 형식이가 좀 더 문영을 몰아 세웠으면 하고 형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형식은 지금까지 하던 논쟁은 다 잊어 버린 듯이 사람들의 얼굴을 구경하노라고 두리번거리더니 문득,

『글쎄……』

하고 일행 편으로 돌아 앉으며,

『글쎄 그 작자가 무엇하러 동경을 와? 손 명규가 말야. 금봉이헌테도 무슨 기별이 있나?』

하고 금봉을 바라본다.

금봉은 깜짝 놀라는 듯이 공상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말이 없다. 손명규 라는 말은 금봉의 아름답던 모든 공상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리고 말았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낯이 후끈거림을 깨달았다.

『오빠두. 』

하고 을남은 미처 예기하였던 쟁론의 흥미가 깨어진 것이 화가 나서,

『오빠두, 하던 말은 아니하고 웬 뚱딴지 소리를 하우?』

하고 톡 쏘았다. 그리고 문영에게 눈짓을 하여 어서 전쟁을 계속할 것을 충 동하였으나, 문영은 다시 일어날 기운을 잃어 버린 것 같았다.

여지없이 형식의 기운에 눌려 버리고 만 것이었다.

『에익!』

하는 한 소리를 남기고는 문영은 먼저 일어나서 어디로 가버린다.

형식이가 문영의 기운 없이 가는 뒷 모양을 보고 냉소하듯이,

『흠흠흠, 덜 익었어.』

하는 것을 보고 일동은 웃었다. 지금까지 참고참고 있던 웃음이 터져서 을 남과 숙희는 참노라고 발발 떨며 킥킥대고 웃었다.

기숙사에 돌아 온 금봉은 줄리엣 생각과 손 선생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엎디어 기도를 하려 하나 도무지 기도가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새벽에야 눈을 붙였으나 불쾌한 꿈을 꾸었다. 그것은 심 상태에게 욕을 보는 꿈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전과 같은 평화롭게 기도하는 마음을 얻기가 어려웠다.

산란한 마음이 수습되지 아니함이 마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무슨 독약이 나 먹은 것 같았다.

어젯밤 내린 눈에 아침 햇빛이 비치어서 천지가 심히 맑았다. 파란 하늘, 흰 눈, 금빛 같은 볕, 이것은 동경에서는 얻어 보기 어려운 경치였다. 사철 흐릿한 하늘 밑에 살던 이 고 장 학생들은 이 보기 드문 경치를 즐겨서 모두 밖에 나섰다. 찬미를 부르는 이도 있고 웃고 떠드는 이도 있었다. 장난 좋아하는 학생들은 눈사람을 만드는 이도 있었다.

이러한 좋은 일요일이언마는 금봉의 마음은 흐리고 무거웠다.

『금봉아, 오늘 놀러 갈까?』

하고 숙희가 병걸을 찾아 갈 생각으로 열심으로 화장을 하면서 불렀다.

『언니나 가시구려, 난 싫어.』

하고 금봉은 창밖을 바라보던 눈을 돌리지도 아니하고 힘 없이 대답하였다.

전 같으면 공일이 되어 숙희가 병걸을 찾아가는 것을 보면 미친년같이 천하게 보였는데 오늘은 그것이 도리어 부러운 것 같았다.

『왜?』

하고 숙희는 석경을 들어 보고 두 손으로 분 바른 뺨을 처덕처덕이리 치고 저리 치고 하면서, 너 어째 오늘 아침에는 『좀 이상하구나. 무슨 걱정이 생겼니? 우리 오빠가 그리워서 그러니?』

하고 웃는다.

『언니두. 』

하고 금봉은 자리에 돌아 와 앉으면서,

『참 얼마나 추우실까. 동경이 이렇게 추우니.』

하고 한숨을 쉬인다.

『그래두 우리 오빠는 행복된 사람이야.』

『왜?』

『금봉이같이 얌전하고 이쁘고 착한 처녀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아이 언니두.』

하고 금봉은 눈을 흘긴다.

숙희의 말에 금봉의 흐리고 무거웠던 마음이 좀 가뜬하여진다.

『오빠는 로미오구 너는 줄리엣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숙희는 시치미를 떼고 말한다.

『아이 언니두. 난 싫어.』

『아니, 줄리엣처럼 약 먹고 무덤에는 가지 말구 ─ 사랑하는 것만 말야.

오빠가 옥에서 나오시기만 하면 내 어떻게 해서라도 서로 만나게 해주께.』

하며 숙희는 옷을 갈아 입기 시작한다.

『아이 언니두.』

『아이 언니두가 다 뭐야. 속으로는 애가 타면서. 내가 모르는 줄 아남.

다 알아, 요것아. 금봉이 속이 지금 줄리엣 이상이거든.』

『아이 언니두. 난 몰라. 그래도 제법이요 언니두.』

하고 금봉은 웃었다.

『왜? 제법이라니?』

『난 언니는 어젯밤에 연극은 조곰도 보지 않았다구. 그래도 조곰은 보았나 봐.』

하고 숙희가 병걸만 바라보고 앉았던 양을 생각하고 우스웠다.

『망할 것!』

하고 숙희는 금봉의 다리를 꼬집었다.

바로 이때였다. 속달 우편으로 엽서 한 장이 금봉에게 배달되었다. 그것은 손명규가 오늘 아침 차에 동경에 내려서 히비야 공원 앞 어느 여관에 들었 으니 곧 좀 오라는 것이었다. 오늘이 일요일인 것을 이용하려고 속달 우편으로 편지를 한 것이었다.

이 엽서를 보자 금봉의 눈앞에는 지난봄 동경 오던 길에 해운대 온천에서 당하던 광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금봉이가 혼자 목욕을 하고 있을 때에 손 선생이 갑자기 목욕탕 문을 열던 것, 손 선생이 밖에 산보 나간 동안 금봉이가 잠깐 잠이 들었을 때에 손 선생이 자기에게 폭행하려고 하던 것, 자기가 발악을 하고 손 선생의 낯에 침을 뱉고 혼자 부산으로 달아나던 것, 손 선생이 헐떡거리고 따라 오던 것 등등, 어느 것 하나도 유쾌한 기억은 없었다.

그러나 금봉은 손 선생을 찾아 보지 아니할 수는 없었다. 동경 온 후에 지금까지 먹는 밥이 손 선생의 밥이요, 입은 옷도 손 선생의 돈으로 산 것이요, 임학제에게 준 생일 선물도 손 선생이 보내어 준 돈으로 산 것이었다.

금봉은 무슨 불길한 예감을 가지면서 손 명규의 여관을 찾았다. 손명규는 속여서 먹은 학교 돈으로 금봉에게 대한 시위 운동으로 동경에서도 유명한 큰 호텔에 방을 잡았다.

금봉의 명함을 받고 나온 손명규는 서양식으로 금봉에게 손을 내어밀었다. 금봉도 거절할 수 없어서 손을 주었다. 손 선생은 극히 냉담한 듯이 잠깐 악수의 예를 하고는,

『이리 와.』

하고 자기가 앞서서 걸었다. 금봉은 복도를 꼬불꼬불 돌아서 음침한 층층대를 올라서 이층 한편 구석에 있는 손명규의 방에 들어갔다.

『앉아.』

하고 손명규는 포근포근해 보이는 안락 의자를 가리키고 자기가 먼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금봉은 요술장이 굴에 흘려 들어온 처녀 모양으로 마음을 졸이면서 손 선생이 앉으라는 자리에 앉았다. 방안은 후끈후끈하였다.

『외투를 벗지.』

하고 손 선생은 금봉의 회색 바탕에 자주 줄 있는 외투를 본다. 이것도 물론 손 선생이 보내 준 돈으로 해 입은 것이었다.

『괜찮아요.』

하고 금봉은 마치 외투 단추가 빼어진 데나 없는가 하는 듯이 외투 가슴을 한번 만진다.

『어서 벗어! 방이 더워.』

하고 손명규는 억지로도금봉의 외투를 벗길 듯이 일어난다.

『벗지요. 제가 벗어요.』

하고 금봉은 외투를 벗는다. 손은 금봉의 외투를 받아서 의걸이 속에 건다.

『그동안 앓지나 않았어?』

하고 손 선생은 자리에 돌아 와 앉으면서 금봉을 바라본다. 그 큰 입을 헤 벌려서 누렇고 커단 이빨을 있는 대로 다 보인다.

『앓지 않았어요.』

하고 금봉은 테이블을 건너서 오는 손 명규의 시선과 입김을 피하는 듯이 고개를 침대 쪽으로 돌린다. 침대에는 눈과 같이 흰 서양 덧이불이 덮이고 옥양목 잇으로 싼 불룩한 베개만이 보였다.

『학비가 부족했지? 왜 더 보내라고 아니했어?』

『부족하지 않았어요. 너무 학비를 많이 써서 퍽으나 미안해요.』

『원, 별 말을 다 하지. 그게 어디 할 말인가.』

금봉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속으로 내가 왜 손 선생의 학비를 받았나 하고 후회할 뿐이었다.

『글쎄 그게 다 무슨 소리야?』

하고 손 선생은 싱그레 웃으면서,

『내가 금봉이 밖에 바라는 게 무엇이라구. 내게 있는 돈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아니할 터인데. 그까짓 돈? 내 목숨까지라도 금봉이헌테 다 주어도 아깝지 아니할 터인데, 왜 그런 소리를 해, 헤, 헤, 허.』

금봉은 손명규의 이 말과 이웃음에 몸서리를 쳤다. 마치 두꺼비의 입 같은 손명규의 입에서 흉악한 냄새나는 독한, 눌한 기운이 나와서 저를 마취를 시키는 것 같았다. 갑자기 몸이 추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금봉은 손명규의 마음속에 양심의 소리를 깨울 양으로,

『사모님 병환은 어떠세요! 좀 나으셔요?』

하고 물었다.

이 말은 금봉이가 예기한 대로 손 명규의 가슴을 찌른 모양이었다. 그는 그 몽롱한 눈을 크게 치뜨고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마치 무엇에 머리를 부 딪쳐서 정신을 잃은 사람 모양으로 그는 숨도 쉬지 아니하는 듯하였다. 금봉은 속으로 통쾌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손명규의 눈과 입에는 다시 생기가 돌면서,

『사모님이 어디 있나? 인제는 없어.』

하고 히히하고 웃는다.

『사모님이 없으시다니?』

하고 금봉은 눈이 둥글했다.

『없어, 벌써 간 지가 언제라구.』

하고 손명규는 아주 심상하다.

『어디를 가셔요, 사모님이? 앓으시는 어른이?』

하고 금봉은 번번이 사모님이라는 말에 힘을 준다.

『벌써 저 집으로 갔어. 벌써 천당으로 갔는지도 모르지. 지난 가을에 갔어.』

하고 손 명규는 수수께끼 같은 소리를 한다. 금봉은 그것이 징그러웠다. 이 작자가 사모님을 독약을 먹여서 죽이지나 아니하였나? 그렇지 아니하면 무 슨 감언 이설로 속여서 이혼이나 아니하였나? 이렇게 금봉은 생각하였다.

금봉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있는 것을 보고 손 선생은 양복 저고리 속주머니를 부시럭부시럭하더니 봉투 하나를 꺼내어서 금봉의 앞에 내밀며,

『이걸 보라구.』

한다. 금봉은 그것이 무슨 흉한 것인가 싶어서 받지 아니한다.

손명규는 그 봉투를 한참이나 금봉이 앞에 내어 들고 있다가 금봉이가 받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도로 팔을 움츠려서 제 손으로 그 봉투 속에 있는 종이를 꺼내어서 금봉의 앞에 펴놓는다. 금봉은 그것을 보는 것이 끔찍끔찍 하였지마는 아니 볼 수 없었다. 그것은 민적 등본(그때에는 호적이 아니요민적이었다), 그 민적 등본에 의하면, 손명규의 민적에는 오직 그 어머니와 손명규가 있을 뿐이요, 손명규의 아내는 없었다. 금봉은 놀랐다. 금봉은 제 민적 등본에 돌아 간 어머니가 붉은 줄로 에워졌던 것을 기억한다.

손 선생의 부인이 죽거나 이혼을 당하였다 하더라도 민적에 붉은 줄이 있을 터인데 웬일인가 하였다. 이 작자의 일이니까 무슨 협잡을 한 것인가, 위조 인가,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금봉은 좀 악의를 가지고,

『그럼 사모님은 어떻게 되셨어요?』

하고 물었다.

『본래 민적에 안 들었어.』

하고 민적 등본의 손 명규 다음 줄을 그 굵다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요거는 이 금봉이라고 쓸 자리란 말이야. 그래서 내가 동경을 왔어.』

하고 혼자 다 작정한 것같이 중얼거린다.

손은 어안이 벙벙한 금봉을 귀여운 듯, 탐나는 듯한 눈으로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더니, 문득 엄숙한 낯빛을 지으며,

『금봉이, 내가 이번에는 큰 결심을 하고 왔단 말야. 금봉의 허락을 받든지, 그렇지 못하면 내가 동경서 죽어 버리고 말든지. 내가 짐 속에 죽는데 쓰는 제구는 다 가지고 왔거든. 마약이 없겠나 ─ 아편도 있고, 쥐 잡는 약도 있고, 양잿물도 있고, 또 칼도 있고, 조선 사람이니깐 육혈포만 없지 칼 도 가지고 왔단 말야. 금봉이가 허락 아니하면 죽을 작정으로.』

금봉은 이 말을 들을 때에 손 선생의 머리와 얼굴 가으로 시퍼런 칼과 약봉지와 목매는 바오락지가 오락가락 하는 것이 보이고, 바로 곁에 놓인 침대 위에 목에서 선지피를 흘리고 눈을 흡뜨고 자빠진 손 선생의 모양이 보였다. 그리고 몸에 소름이 끼침을 깨달았다.

손명규는 안경 위로 눈을 치떠서 깜짝거리지도 아니하고 마치 금봉의 혼이라도 달아날까 보아 지키련 듯이 금봉을 노려 보고 있더니 말을 이어,

『내가 학교에서 쫓겨난 것도 금봉이 때문이어든. 금봉이 일생을 편안하게 해주랴고 ─ 지금 세상에는 돈이 제일이니께루. 돈을 만들랴고 학교에서는 쫓겨나고 세상과는 담을 쌓았단 말야. 금봉이 하나만 있고 보면, 그리고 돈만 있고 보면 그까짓 놈의 세상 다 망해 버리기로 어때? 안 그래?』

금봉은 제 몸이 더욱더욱 굵은 철사로 얽힘을 깨닫는다. 팔다리 근육이 모두 마비되어 몸을 꼼짝할 수도 없는 것 같았다.

손명규는 말을 이어,

『인제는 한 이십만 원 장만을 해놓고 집도 인사동에 한 사십간짜리 예전 민충정공 살던 집을 흥정해 놓았단 말야. 집이 좋지. 고주 대문에 육간 대청에 안방이 사간이요, 머릿방, 새간방이 달리고, 건넌방이 이간에 머릿방 달리고 ─ 그동안 셋집으로 내놓아서 좀 퇴락했지마는 목수 들여서 말짱 고 쳤지. 모두 닦고 유리 분합들이고 화초담도 새로 하고 오는 봄에는 꽃나무 심그고. 이 집에서 말야, 그 대궐 같은 집 육간 대청에 금봉이가 남치마를 끄는 양을 보면 얼마나 좋겠어. 그리고 금봉이 마음에 드는 대로 무엇이나 다 사 놓을걸 뭐. 자동차까지도 살 테야. 마차도 좋고. 양복장도 사고, 이 번 온 길에 유성기도 좋은 것을 하나 사랴고. 피아노하고.』

하면서 조끼 단추를 끄르더니 속주머니에서 커다란 가죽지갑을 내어서 백 원짜리, 십원짜리 새 지전을 한치 두께나 될 듯한 것을 꺼내어 금봉의 앞에 던지며,

『이걸로 우리 긴자에 나가서 사고 싶은 물건 사요.』

하고는 다시 그 돈을 돈지갑에 넣어서,

『자, 금봉이가 가지고 있으라구.』

하고 받으라고 한다.

금봉은 더욱 요술장이 굴에 들어 온 듯함을 느끼지마는 민충정공이 계시던 집이라든지, 손 선생 말마따나 그 넓은 대청에 제가 남치마를 질질 끄는 것 이라든지, 이십만 원 재산이라든지, 또 백원짜리, 십원짜리가 덕시글덕시글 하는 커다란 지갑이라든지, 모두 제 것이 된 것 같아서 일종 만족의 감정을 깨달았다.

『자, 어서 받으라고.』

하고 손 선생이 들고 흔드는 지갑을 손으로 밀면서,

『어서 집어 넣으세요.』

하고 금봉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금봉의 이 말 한 마디에 손명규는 더욱 용기를 얻어서 벌떡 일어나더니 의걸이문을 열고 거기 걸린 금봉의 외투 속주머니에 그 지갑을 넣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도로 제자리에 와 앉아서 담배 한 대를 피운다.

금봉은 멀거니 손명규를 바라보았다. 그 거무스레한 낯빛, 큰 입, 뒤둥그러진 두껍고 퍼런 입술 속에 보이는 누렇고 커다란 이빨, 언 고기 눈을 연상시키는, 입과 얼굴에 비겨서는 가늘고 작은 희미한 눈, 좁은 이마, 멋대 없는 눈썹, 커다란 쏟뚜껑 같은 손, 언제든지 금방 달음박질을 해온 듯한 씨근거리는 숨소리와 숨쉴 때마다 벌룩거리는 넓적하고 큰 코 ─ 이 둘하게 생긴 몸뚱이 속에 가득 찬 것이 돈과 계집에 대한 시커먼 욕심과 그것을 얻기 위한 우멍한 꾀라고 금봉은 직각적으로 느낀다. 이 우멍을 가지고 손 선생은 그후 한 교장을 십 년이나 두고 속여 왔고 여러 계집애들을 속여 온 것이라고 느낀다. 지금 금봉이 자신도 그 발톱에 걸릴 위험이 있는 것을 느 낀다. 손명규라는 사람을 대할 때에 금봉은 징그럽고 무시무시함을 느끼지 마는 그래도 금봉에게는,

『웬 소리오? 그런 소리 두 번도 마오. 나는 당신 같은 동물을 남편이라고 바라보고 살 사람은 아니오 ─ 』

하고 대번에 똑 잡아뗄 용기는 없었다.

그것은 이십만 원이라는 돈에 탐이 나는, 아버지의 피의 유전 때문인가. 또는 지금까지 학비를 받아 쓰는 의리 때문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 때문에 생명이라도 바친다고 하는 손 선생의 심정을 어여삐 여김인가. 어느 것인지 분명하지 아니하지마는 금봉은 단박에 손 선생의 청구를 거절할 용기도 없고, 또 마음의 어느 한구석에는 거절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금봉은 손명규의 여관에서 저녁을 얻어 먹고 내일 하학 후에 또 찾아 온다는 약속을 남기고 학교로 돌아왔다.

금봉은 친형과 같이 생각하고 무슨 일이나 의논하여 오던 숙희에게도 이 문제에 관하여서만은 의논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 밤에 잠도 이루지 못하고 여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말이 되나. 내가 그까짓 손명규 같은 사람한테 시집을 가? 안될 말이지!』

하고 임시적으로 결심을 하고는 옥중에 있는 학재를 위하여 기도를 올리고, 랜디스 부인의 말대로 「마태복음」육장 이십 오절 이하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오직 그 나라와 옳은 것을 구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그리고는 자려 하였다.

그러나 금봉의 생각에는 손 선생이 외투 속주머니에 넣어 둔 돈지갑을 생 각하였다. 손 선생의 여관에서 나올 때에 그것을 잊어 버린 것은 아니지마는 잊어 버린 체하고 그냥 가지고 온 것이다. 그 돈지갑을 생각할 때에 금봉은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금봉은 가만히 일어나서 숙희를 깨우지 아니하도록 발끝으로만 사뿐사뿐 걸어 가서 외투를 벗겨 입고 기도실로 갔다. 기도실은 안으로 걸 수 있는 가장 조용한 방이었다. 그 돈이 얼마나 되나 세어 보려는 것이었다.

금봉은 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었다.

『백, 이백, 삼백……』

하고 백원짜리를 세이니 삼천원, 그리고 십원짜리를 세이니 오백원 ─ 도합 삼천 오백원이었다.

금봉은 일생에 처음 보는 큰 돈 삼천 오백원을 두 손에 갈라 들고 눈이 둥글하여 한참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금봉은 눈을 들었다. 기도실 정면에 걸린 가슴에 붉은 십자가를 그린 예수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화상이 금봉의 흥분된 눈에 띄었다. 이 기도실은 누구나 기도하기를 원하는 때에 들어 와서 쓰도록 된 방이다. 조그마한 방인데, 가운데는 무릎을 꿇고 가슴을 걸치고 예수의 화상을 우러러 볼 수 있도록판장으로 카운터처럼 만들어 세웠다. 한창 인생의 번민이 많을 이십 세 안팎 되는 여학생들 중에는 이 기도실에 들어 와서 눈물을 흘려서 참회도하고 빌기도 하였다. 금봉도 혹은 임학재를 위하여, 혹은 심 상태 때문 에 이 방에서 여러 번 기도도 하고 울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제 금봉은 삼천여 원의 지전을 들고 이 방에 있다.

예수의 화상이 눈에 띌 때에 금봉은 한참이나 망연하다가 문득 손에 들었 던 지전 뭉치를 내어 던지고 기도하는 자리에 꿇어 앉았다.

『하나님! 이 어린 딸을 불쌍히 여기옵소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믿을 곳 없는 어린 영을 손수 이끌어 주옵소서.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옵서 이 어린 영에게 굳센 힘을 주시옵소서. 모든 시험과 유혹을 이기고 천사와 같이 깨끗하게 일생을 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하나님! 지금 심 상태는 육으로 저를 유혹하옵고 손 선생은 돈으로 저를 유혹하옵나이다. 이 유혹에도 넘어 갈 듯 넘어 갈 듯, 저 유혹에도 넘어 갈 듯 넘어 갈 듯, 어리고 약한 이 딸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는 지금 제 앞에 시커먼 구렁텅이를 보나이다. 크게 입을 벌린 지옥을 보나이다. 제 육신과 영혼을 다 잡아 삼키고야 말랴는 두 마귀를 보나이다. 그러 하오나 하나님, 이 어리고 약한 딸의 발은 마치 비스듬한 얼음판에 선 것 모양으로 그 시커멓고 무시무시한 지옥의 아가리를 향하고 조츰조츰 미끄러져 내려가나이다. 하나님, 어리고 약한 딸을 불쌍히 여기시와 자비의 손을 내밀어서 붙들어 올려 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하고 금봉은 목이 메이고 눈물이 흘렀다. 금봉의 눈에는 심상태와 손명규가 금봉을 끌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할 때에 금봉의 옷은 갈기갈기 찢기고 몸은 피투성이가 된 양이 보이고, 또 어떤 진창에 금봉의 해골이 산산이 흩어져 있는 양도 보인다. 금봉의 몸에 소름이 끼치고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저는 모든 유혹을 이길 테야요. 심 상태의 유혹을 이긴 모양으로 손 선생의 유혹도 이길 테야요. 그리고 저는 깨끗이 깨끗이, 천사와 같이 깨끗이 세상을 살아 갈 테야요. 아무리 고생이 되기로니 그것 이 무엇이야요? 제가 깨끗이 깨끗이 살다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천국의 영광 속에 저를 받아 주신다고 하셨지요? 저는 그 언약을 믿겠읍니다. 그 언약만 믿겠읍니다. 하나님은 저를 속이시거나 유혹하심이 없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십니다. 하나님! 저는 기뻐요. 힘을 얻었어요. 아무 걱정 없읍니 다.』

이 모양으로 말하듯이 기도를 올렸다. 금봉의 눈에 눈물이 걷히고 몸에 소름 끼치던 것도 스러졌다.

금봉의 앞에는 문득 죽은 어머니 모양이 떠오른다. 그 불쌍한 어머니, 어려서는 가난으로 고생, 자라서는 이 사내 저 사내의 놀림감으로 고생, 남편 이라고 만나서는 아들딸 낳아서 길러 주고 재산과 청춘은 몽탕 빼앗기고, 그리고도 갖추갖추 구박 소박을 받다가 우물에 빠져 죽은 어머니, 그다지도 참되고 옳고 깨끗한 사람이 되어 보려고 어린 금봉이가 보기에도 눈물겹도록 애를 썼지마는, 그 남편에게조차 알림받지 못하고 하늘에 사무친 한을 품고 죽은 어머니, 우물가에 놓인 신 한 켤레, 그리고는 어머니를 잃고 밤낮 「엄마, 엄마」하고 울다가 울다가 말라 죽은 어린 동생 옥봉이, 또 낫살 먹을수록 어머니 불쌍한 것이 느껴지고 아버지 무도한 것이 한되어서 미치다시피 된 오빠인현이, 어머니가 그렇게 사랑하던 거문고를 고심참담하여 찾아 내어서 사다 놓고 곡조도 없이 줄을 울리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던 오빠인현이 ─ 이런 모든 것이 생각이 나매 잠시 걷혔던 금봉의 눈물은 다시 솟아 흐르기 시작한다.

금봉은 기도대에 매어 달려서,

『어머니, 어머니 유언대로 깨끗하게 살아 가께요.』

하고 몸부림하고 울었다.

금봉은 땅땅하고 시계가 새로 두시를 치는 소리에 놀래어서 기도대에서 일어나서 흩어진 지전을 주섬주섬 주워 모아서 지갑에 넣어 전 모양으로 외투 속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잠그고, 그리고는 가만히 방에 들어 와서 자리에 누웠다.

이튿날 하학 후에 금봉은 약속대로 손 명규의 여관을 찾았다. 손명규는 수염을 말끔하게 깎고 그 도야지 털같이 억세인 머리를 기름을 발라서 갈라 붙이고 몸에서는 향수 냄새까지도 나는 듯하였다.

『히히, 얼마나 기다렸는지.』

하고 손 선생은 금봉의 손을 덥석 잡아서 흔들고는 제 손으로 금봉의 외투 단추를 끌렀다. 금봉은 외투 속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서 테이블 위에 놓으며,

『 선생님, 어저께 제가 잊고 이 돈지갑을 가지고 갔어요.』

하며 외투를 벗어서 제가 앉을 안락 의자 등에 걸쳤다.

손 명규는 좀 머쓱하여서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가 유심히 볼 때에 하는 버릇대로 눈을 치떠서 안경 위로 금봉의 유난히 새침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금봉의 얼굴과 눈에서 찬바람에 얼음 가루가 팔팔 날리는 듯하였다. 손명규는 속으로, 〈이거 무슨 변통이 생겼군. 보통 수단으로는 안되겠군. 단단히 족쳐대야 겠는걸.〉 하고 생각하면서 제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았다.

손명규가 가만히 눈을 감고 앉은 것은 무슨 계교를 내이려는 징조다. 그는 마치 앞에 금봉이가 있는 것도 잊고 앉아서 잠이 든 것과 같이 조용하였다.

금봉은 졸고 앉았는 듯한 손 선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단단하게 먹고 온 마음이 풀어지기 전에 똑 집아 끊어서 말을 해야 ……〉하고 입을 열었다 ─

『 선생님?』

『응.』

하고 손명규는 자다가 깨는 사람 모양으로 눈을 번쩍 뜨고 입을 우물거린다.

『 선생님 은혜는 제가 죽어도 잊지 못해요.』

하고 금봉은 억지로 허두를 내었다.

『천만에, 은혜가 무슨 은혜야.』

하고 다시 눈을 감아 버린다.

『그동안 저를 학비를 대어 주시고, 또 어저께는 저 같은 것을 사랑하신다고까지 해주시니 무어라고 여쭐 말씀이 없어요. 그나 그뿐입니까. 저 때문에 학교 일을 내어 놓게까지 되시고, 또 세상에는 죄를 지으시고 ─ 무에라고 참 여쭐 말씀이 없읍니다. 제가 무엇이길래 선생님께 그처럼 폐를 끼쳐서까지 동경 유학을 하겠어요? 저는 어젯밤 밤새도록 생각해 본 끝에 이렇게 작정했읍니다. 저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작정대로 하기로 결심하였어요.』

금봉이가 말하는 동안 줄곧 조는 모양으로만 있던 손명규는 금봉의 결심이라는 힘있는 말에 비로소 고개를 들면서,

『응? 무슨 결심?』

하고 눈을 크게 뜬다.

『저는 동경을 떠날 테야요, 학교를 고만 두고.』

『어디로 가게?』

『서울로 가지요, 집으로.』

『그럼 그러라구. 인사동 집도 들게는 되었으니께. 그럼 같이 가지.』

하고 손명규는 으례껀으로 대답한다.

『아냐요 ─』

하고 금봉은 소리를 빽 지르고,

『제가 선생님 댁으로 왜 가요? 아버지 집으로 가지. 저는 선생님헌테 학 비 얻어 쓰기도 미안하고 또……』

하고는 말이 막힌다. 그 막힌 말은,

『또 선생님허구 혼인할 수도 없구요.』

하는 것이었으나 이 말은 잘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그랬더니 의외에도 손 명규는,

『마음대로 해. 싫다는 학비를 억지로 받으라고 할 수도 없고 또 나허구 혼인하기 싫다면 그것도 억지로 할 수는 없지. 금봉이 마음대로 해.』

하고 아주 태연하다.

금봉은 「마음대로 해」하고 아주 태연한 손명규의 태도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손 선생의 진의를 알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 제가 생각하고 있던 것이 모두 깨어진 것 같아서 멀거니 손 명규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명규의 마음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 같았다.

『헐 수 없지.』

하고 손명규는 더욱 냉정한 어조로,

『나는 금봉을 참 생명과 같이, 내 생명보다도 더 사랑하지마는 ─ 정말이야. 우리는 말을 앞세울 줄은 모르니까. 나는 금봉을 나보다도 더 믿고 더 사랑하길래루 내 재산 전부를 금봉이 이름으로 옮길라구 벌써 서류를 다 작 성해 놓았단 말야. 자 보아.』

하고 손 선생은 바지 주머니에서 쩔렁거리는 열쇠 꾸러미를 내어서 손가방을 열더니 어떤 변호사 사무소라고 활자로 박은 커다란 봉투를 꺼내어 가지고 와서 테이블 위에 그 서류를 쏟아 놓는다. 과연 그 서류들은 안성과 예산에 있는 토지를 손명규의 명의로부터 이 금봉의 명의로 옮기는 수속이었다.

『또 이것 보아.』

하고 손명규는 어떤 은행의 저금 통장 하나를 꺼내었다. 그것은 인사동 몇 번지 이 금봉명의로 된 금 이만원의 당좌 예금이었다.

『내가 이렇게 금봉이 도장을 새겨서 인감을 내어서 이렇게 했단 말야.

자, 이 도장 받아.』

하고 손 선생은 조끼 속주머니에서 조선식 주머니를 꺼내어서 그 속에 있는 도장집에서 수정 도장 하나를 꺼내어 금봉에게 보인다. 그것은 이 금봉이라고 전자로 새긴 도장이었다.

『난 이렇게 금봉을 사랑한단 말야. 이를테면 나는 금봉 하나를 보고 사는 것이어든. 금봉을 일생을 편안히 살게 할까 하고 재산을 만드노라고 말이야, 바루 못할 짓까지 했거든. 하마터면 가막소에 들어가서 콩밥 먹을 짓까지 했거든. 나 하나는 콩밥을 먹드라도 말야, 이만큼 재산이 있으면 금봉이 일생 살기에는 넉넉할까 하구.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자식이 있어, 무엇이 있어? 내가 재산은 해서 무얼 하느냐 말야. 금봉 하나를 마음대로,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하자니께 이런 짓까지라도 해서 재산을 만들구, 또 그것두 부족 할까 해서 인천에 기미 직매점두 하나 경영하랴고 다 미련해 놓았단 말야.

이렇게. 그렇지만 헐 수 있나, 금봉이가……』

하고 손명규는 말을 그치고 실망한 듯이 눈을 치떠서 안경 위로 금봉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금봉은 말문이 막혔다. 말문은커녕 숨도 쉬기 어려움을 깨달았다. 그처럼 금봉은 손 선생의 사람에 감격한 것이었다. 세상이 넓고 사람이 많다 하기로니 이대도록 나를 사랑하여 주는 이가 다시 있을 수가 있을까 하였다.

얼마 있다가 겨우 금봉은,

『 선생님!』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다음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손 명규는 여전히 눈을 끔벅끔벅하고 금봉을 바라본다.

『 선생님!』

하고 두 번째 부르면서 금봉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손 명규의 가슴에 제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말을 못하고 울었다.

손 명규는 금봉을 껴안으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손을 들어 금봉의 머리를 쓸면서,

『울지 말어, 울지 말어.』

하고 어린 딸을 달래듯 은근하게 말하였다.

금봉은 두 손으로 손명규의 옷깃을 잡았다가 다시 어깨를 잡고 다음에는 목에 매어 달렸다. 그러나 손 선생은 도무지 감정을 이기는 빛이 없고 다만,

『금봉이 울지 말어.』

할 뿐이었다.

『 선생님!』

하고 금봉은 손명규의 목을 꼭 껴안은 채로,

『 선생님! 저는 선생님 말씀대로 따라 가요. 일생 버리지 말아 주세요!』

하고 손명규의 조끼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금봉이 고마워.』

하고 손명규는 잠깐 금봉을 안아 보고는,

『자 그만, 울지 말어.』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