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태자/제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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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국선[편집]

하룻 밤은 선종의 잠을 이루지 아니하고 소허의 거동을 지키었다. 익은 스님이 잠이 들어 코를 골기 시작할 때에 소허는 가만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선종도 가만히 일어나서 소허의 뒤를 따랐다.

소허는 사방을 휘휘 둘러 보더니 사람이 없는 것을 본 후에 상봉(上峰)으로 가는 길로 올라 갔다. 별들이 깜빡깜빡하고 부엉이가 울고 이따금 혹은 왼편에서, 혹은 오른편에서 산 짐승들이 놀라서 뛰는 소리가 들리고 어떤 때에는 호랑이 눈인 듯한 불이 번쩍번쩍하는 양도 보인다.

이 모양으로 얼마를 올라 가서 한 모퉁이를 돌아 서니 쾅쾅쾅 내려 찧는 폭포수 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대왕폭포라고 일컫는 폭포다. 선종은 살살 소허의 뒤에 따라오다가 오똑 서서 가만히 솔포기 뒤에 몸을 감추었다.

소허는 폭포 앞에서 옷을 활활 벗고 폭포 물에 몸을 씻는다. 그리고 나서는 또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다시 담벼락같이 깍아 세운 벼랫길을 올라간다. 선종도 따라 올라 갔다.

나무 속 산꼭대기를 다 올라 가서 소허(少許)는 잠시 바위 위에 앉아 쉰다. 선종은 한 여남은 걸음 될이만큼 가까이 기어 가서 또 한 바윗돌 뒤에 숨었다.

소허는 이윽고 일어나서 주머니에서 부시와 부싯돌을 내어서 치기를 시작한다. 딱딱 소리가 날 때마다 빨간 불똥이 이리로 저리로 휘임하게 흩어지어 떨어진다. 얼마만에 부싯깃에 불이 빨갛게 댕기고 거기서는 연기가 몰씬몰씬 올라 간다. 소허는 바위 밑에 쌓았던 마른 칡 백향 가지와 마른 풀을 베어 부싯깃에 붙은 빨간 불을 대고 후후 불었다. 무엇에나 약고 규모 있는 소허의 행동을 선종은 무척 부러워하였다.

이윽고 불이 향나뭇 가지에 붙어서 첫 불길이 펄떡하고 구부러진 붉은 혀끝을 내어 둘렀다. 알맞추 부는 첫 가을 바람에 불이 일어 순식간에 불길이 활활 피어 오른다. 어둠 속에 붉은 불기둥이 하늘에 오르려고 애쓰는 듯 하였다. 신종은 일찍 지렁이라는 별명을 듣던 소허가 그처럼 엄숙하고 위품 있고 웅장한 양을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가 얼굴과 가슴에 불빛을 담뿍 받아 가지고 북녘을 향하여 합장 배례할 때에 소허는 마치 거룩한 중도 같고 도사도 같았다. 선종은 너무도 놀라와서 숨이 막힐 듯하였다. 평소에는 자기에게 눌려 이래라 하면 이리하고 저래라 하면 저리하여 못나디 못나던 지렁이가 저렇게 위풍이 늠름한 대장분 줄을 선종은 몰랐다 소허가 . 매양 공부에 힘을 쓰고 말이 적고 꾀가 많고 한 것은 보았다. 그저 한 못난이로 알아 왔던 것이다. 선종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달사 중들을 다 소허를 「지렁이 지렁이」하고 못난이로만 여겨 왔던 것이다. 과연 그 얼굴이 까무잡잡한 것이라든지, 나이를 먹어 갈수록 더욱 몸이 가늘고 키가 늘씬한 것이라든지, 말이 분명치 못한 것이라든지, 남이 아무리 못 견디게 굴어도 모르는 체 못 들은 체하는 것이라든지, 누가 보아도 못난이라고 아니할 수는 없었다. 선종이가 어디서 온 어떠한 사람인지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모양으로 지렁이의 일도 아는 이가 없었고 또 누가 그리 알아 보려고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지렁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하고 선종은 바위 뒤에 숨어서 더욱 유심하게 소허를 바라보았다.

소허가 북녘을 향하여 수없이 합창 배례할 때에 난데 없는 흰 도포 입고 오각건(鳥角巾)을 쓴 노인이 붉은 얼굴에 흰 수염을 날리고 나타난다. 그 노인이 나타나자 소허는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넓적 꿇어 엎드린다. 그 노인이,

『일어나거라.』

할 때에야 비로소 일어난다. 노인은 불붙은 왼편 바위 위에 걸터앉고 소허는 그 앞에 두어 걸음 떨어져서 꿇어 앉는다.

노인은 이윽히 소허를 내려다보더니,

『네가 과연 뜻을 세웠느냐?』

하고 엄숙하게 묻는다.

불길이 한번 춤을 춘다.

소허는 공손히 고개를 들어 노인을 우러러 보며 그 조그마한 눈을 깜박깜박하며,

『네, 뜻을 세웠읍니다.』

하고 대답한다.

노인은 다시,

『네 세운 뜻이 무엇이냐?』

『창생을 도탄 중에서 건지는 것입니다.』

『네 몸의 안락과 부귀 영화를 누리려는 사욕이 없느냐?』

『없읍니다.』

『언제부터 없느냐?』

『다시 그러한 사욕을 아니 가지기로 어떠한 맹세를 하겠느냐?』

이 말에 소허는 좀 주저한다. 노인은 소허가 주저하는 양을 이윽히 보더니,

『창생을 건지려 할 때에 하늘이 너를 도와 네 칼이 불의를 베려니와, 사욕을 채우려 할 때에 하늘이 너를 버려 네 칼이 네 살을 베리라. 이제 나라이 어지러워지어 창생이 건지어 줄 이를 찾의되 하나도 나서는 이가 없구나. 하늘을 바라보매, 살기와 요기가 하늘에 찼으니 반드시 오래지 아니하여 천하가 물 끓듯하고 사람이 삶일 듯하려니와, 이때에 창생을 도탄에서 건질 이가 누구냐? 이제 네 얼굴울 보니 비록 지혜와 용맹이 있으나 의와어짐이 부족하구나. 의 없으면 네 지혜와 용맹이 불의를 크게 할 것이요, 어짐이 없으면 백성이 네게 오래 붙지 아니하리라. 내 이창생을 도탄에서 건질 사람을 찾아 삼국(三國)을 두루 돌엇거니와 만나지 못하고 이제 너를 만났으되 네 또한 의와 어짐이 넉넉지 못하니 슬프다. 이 나라를 어이하며 이 창생을 어이하랴. 아아 ———— 하늘이 무심함이냐? 이 백성이 죄 많고 복이 엷음이냐?』

하고 하늘을 우러러 길게 한숨을 쉰다.

소허가 한번 더 일어나 절하며,

『스승이시여, 소자를 버리지 마시고 소자에게 창생을 건질 도략과 재주를 주옵소서.』

하고 무수히 이마를 조아렸다.

『도략과 재주!』

하고 노인은 불쾌한 듯이 낯을 찡그리더니,

『네 구하는 것이 도략과 재주냐? 창생을 건질 길이 도략과 재주에 있는 줄 아느냐? 빨리 나는 재주는 새만한 이 없고, 빨리 뛰는 재주는 이리와 범만한 이 없고, 변화 난측하기는 구름만한 이 없고, 눈에 아니 보이고 자취 있기는 바람만한 이 없고, 천 길 물속으로 만리의 바다를 가기는 고기만한 이 없거늘, 사람이 무슨 재주를 배우려는고. 재주로 창생이 건지어지고 도략으로 나라이 편안할진댄, 무슨 근심이 잇으랴. 나라와 창생을 건지는 것은 도략도 재주도 아니요, 네 맘이니라———— 의와 어짐이니라. 나라이 어이하여 어지럽고 백성이 어이하여 도탄에 드는고 ————의 없고 재주 있는 이 많으므로 됨이니라.』

하고 일어나 도포 소매를 한번 후리치니 문뜩 붉은 구름이 산을 싸고, 또 한번 후리치니 일진 광풍이 불어 와 그 구름을 다 걸어 버린다. 그동안이 실로 순식간이언마는 전본 만화가 일어난 듯하다. 소허는 「스승님」을 부르고 땅에 엎더지고 선종은 눈이 휘둥그래지었다.

『네 지혜를 버리고 의를 배워라.』

하는 한 마디를 남기고 노인은 문뜩 어둠 속으로 스러지고 말았다.

선종은 곧 뛰어 나가 그 노인을 붙들려 하였으나 미처 그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살그머니 일어나 소허보다 먼저 집으로 내려 와 아무 일도 모르는 체하고 자리에 누웠다. 익은 스님은 그런 줄도 모르고 코를 골고 자다가 잠깐 코 골기를 그치고 돌아 눕는다. 이윽고 소허가 가만히 문을 열고 들어 와 선종의 곁에 눕는다.

선종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노인의 말에 깊은 뜻이 있는 것 같고, 그 말은 다 자기를 위하여 하여 준 말과 같이 생각하였다. 나라는 어지럽고 백성은 도탄 중에 들어 건지어 줄 이를 기다린다, 의로써 백성의 맘을 끌고 어짐으로써 백성의 맘을 잡아 맨다, 그것은 과연 옳은 말이다.

그것은 내가 꼭 해야만 할 일이다, 하고 속으로 으쓱하였다.

이튿날 선종은 아무 것도 하는 체 아니하고 소허의 하는 모양만 주목하였다. 소허는 그날 종일 매우 괴로운 모양이다.

밤에 익은 스님이 잠이 들고 소허가 가만히 일어 나가는 것을 보고 선종도 따라 일어나 나갔다. 선종은 소허의 눈에 안 띄울이만큼 뒤를 따라서 어젯밤에 가던 길로 가다가 폭포로 너머어가는 등성이에서,

『소허야!』

하고 불렀다.

소허는 깜짝 놀라 우뚝 선다. 선종은 얼른 뛰어 가 소허의 손을 잡았다.

예전 같으면,

『이녀석 어딜 가?』

하고 뺨이나 한 개 붙일 것인데 그리 아니하고,

『소허야, 너 어디 가니?』

하고 정답게 물었다.

소허도 선종의 행동이 전 다름을 보고 적이 안심도 되었으나 자기의 비밀을 말할 수 없으므로 잠깐 머뭇머뭇하다가,

『언니, 내가 여기 오는 줄 어떻게 알았소?』

하고 되물었다.

선종은 소허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네 밤마다 어디로 가는 것을 내가 다 안다. 알기는 알지마는 네 입으로 하는 말을 듣고 싶다. 너와 나와 사형사제(師兄師弟)로 십여 년이나 같이 자랐으니 사생이라도 같이 해야 할 터인데 서로 속여 쓰겠느냐——— 어디를 밤마다 가서 무엇을 하느냐? 바로 말을 해라!』

하고 어둠 속으로 선종의 애꾸눈이 빤짝거리는 것이 보인다.

소허는 처음에는 선종을 속이려 하였으나 선조이가 말하는 눈치가 자기를 몇 번 따라 와서 모든 일을 다 아는 듯하므로 속일 수가 없었다.

이 좋은 스승을 자기 혼자 가지고 혼자만 배우고 싶었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싫을 뿐더러 장차 , 천하를 얻으려 하여도 거추장거리는 다른 인물이 잇기를 원치 아니하는 까닭이다. 더구나 선종과 같이 뛰어나는 힘과 재주가 있는 사람을 이러한 스승에게 끌고 가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할 수 없이 소허는 선종에게 대강 말을 하였다. 그러나 아무쪼록 그 스승이라는 이가 그리 신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중언 부언하여 아무쪼록 선종의 맘을 끌지 아니하려고 애를 썼다. 선종은 물론 소허의 약은 속을 다 아니 별로 이 눈치도 아니하고 둘이 같이 목욕한 뒤에 둘이 같이 산을 올라갔다. 이로부터 선종과 소허는 백의 국선에게 대하여서도 사형 사제가 되었다.

백의 국선은 항상 소허더러는 사욕을 버리기를 말하고 선종더러는 계집과 허욕을 삼가기를 말하였다. 그리고 더욱 힘있게,

『너희 둘은 다루지 말고 합심하여 창생을 건지라. 높은 자리를 바라지 말고 창생을 건지기를 바란다 ———— 너희들은 다투지 말고 하나이 되라.

다투어 갈리면 둘이 다 다른하나에게 망하리라.』

하고 선종과 소허가 합심하여 하나가 되기를 훈계하였다.

이로부터 삼년 동안 선종과 소허는 날마다 백의 도인에게 병법과 기타 여러 가지를 배웠다. 그동안에 선종이나 소허나 백의 도인의 정성된 훈계에 감동 되어 서로 속이고 서로 시기하기를 그치고 사랑하는 형제 모양으로 의좋게 지내었다. 봄철 날 따뜻한 때나 가을 바람 살랑살랑할 때 또는 마을에 재 울리려 가서 밤 새우는 동안에 선종과 소허는 단둘만 있을 기회만 있으면 어찌하면 나라를 바로 잡을까, 어찌하면 창생을 건지어 태평 세계를 만들까 ———— 이러한 의논을 하고 또 무슨 일이 있든지 서로 돕고 어려운 일이나 죽을 일에는 둘이 같이 하기를 굳게 굳게 맹세하였다.

헌강대왕이 승하하시고 만공주(蔓公主)께서 즉위하였다는 소문이 돌자 천하는 다시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였다. 어느 이손이가 모반을 하다가 발각이 났다는둥 만공주가 날마다 얼굴 잘난 젊은 사람을 밤이면 둘씩 궐내로 불러 들인다는둥 이번에야말로 용덕왕자가 나서리라는둥 여러 가지 뜬 소리가 돌고, 또 이러한 산중인 세달사에도 수상한 사람들이 둘씩 셋씩 왔다갔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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