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방기현
一[일],
[편집]서울 온지 다섯 달, 상동(尙童)은 인제 겨우 서울 길 골목 골목을 대충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따라서 몸에 조금만 틈이 생기면 행길에 나가서 제기도 차고 택견도 하고 동네 양반의 댁 수청방에 들어가서 장기도 두고 제법 둘만큼 되었다.
충청도에서 처음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거치장스런 머리꽁뎅이를 수건 삼아 머리에 틀어 얹고 숭례문을 들어선 때는 나이도 열네 살에 어린 총각이었지마는 처음보는 서울에 얼이 빠지고 겁이 나서, 회동(會同) 정한림(鄭翰林)의 상노로 들어간 후로는 상전의 심부름이 아니고는 큰길에 나서지도 못하는 어리배기었다.
이름 좋은 한 울타리로 명색은 상노지마는 상전의 요강망태기를 들고 보교 뒤를 따라가는 구실도 못하였다. 그래서 안으로 사랑으로 드나들며 군불 때기나 하고 물이나 길어대는 불목한이나 다름없는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일 년이 지나 열다섯 살이 되고 보니 어제 올챙이가 오늘 개구리란 셈으로 어느결에 서울 물에 젖어서 탈골치 메투리도 제법 엎어 신을 줄도 알게 되고 가마 채를 붙들고 한 손으로 바람을 차고 가는 남의 집 계집애 종의 맵시 평도 하게 되었다.
그 중에도 한가지 여느 상노들과 특이한 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글을 제법 아는 점이었다.
상동이는 시골서 홀어머니의 덕으로 글방에를 다녔다. 가난하게 지나기는 했어도 뼈가 상언이 아니어서 글방에 다녀도 비실거릴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정신이 일남촉기라서 한번 배운 글은 다시 공부를 아니 해도 이튿날 강에는 막혀본 적이 없었다.
글씨를 쓰면 언제든지 관주 투성이었다.
천자, 동몽선습, 소학, 맹자, 그리고 통감 이렇게 다 떼고 논어를 읽기 시작할 때 집안의 형편은 상동으로 하여금 고향에 있지 못하게 하였다.
누구라 있지 말라는 것은 아니로되 어머니는 어린 상동이를 앞에 앉히고
『너를 슬하에 두고 키우자고 하였더니 집안의 형편이 말이 못 되서 어머니는 창피하지마는 남의 집 침모라도 들어갈 터이니 너는 서울 가서 어떻게 굴든지 출세를 해 보아라.』
하고 눈물 섞인 훈유를 하였다.
『어머니 왜 집안이 이렇게 되었소?』
하고 묻는 말에 어머니는 쾌한 대답을 아니 해주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의 말을 들건대 모자가 연명해 오던 땅을 외삼촌 되는 이가 속여 팔아 가지고는 어디로 갔는지 영영 도주해 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유일의 수입으로 지내오던 집안이 별안간 몰락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자식에게라도 차마 외삼촌의 악행을 말하기가 싫었던 것이었다.
상동은 그 소문을 들은 순간에,
『오냐 내 커서 돈을 벌거나 그렇지 않으면 훌륭한 출세를 해서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 드려야겠다.』
하는 결심을 먹고 그러지 아니해도 서울로 올라갈 맘을 먹었던 차에 어머니의 훈유이었다.
『어머니 염려 마세요. 전 서울 가서 무슨 짓을 하든지 남부럽지 않은 사람 이 돼서 어머니를 뫼시러 올 테니 어머니께선 몸을 조심하셔서 무병하게 지내고만 계십시오.』
하는 기특한 대답을 하였다.
어머니는 자식 상동의 팔을 힘껏 잡아다니며
『기특한 말을 듣겠다. 그래야만 지하에 계신 아버니께 뵈올 낯이 있느니라.』
하고 기쁜 눈물을 흘리었다.
그러므로 비록 남의 집 상노 노릇은 할 망정 여느 아이들과 결심이 달라서 무슨 일에든지 충실하고 믿음성이 있었다.
주인집에서도 처음에는 시골 촌내기 상노라고 조롱도 하고 비웃기도 하고 막 부리기도 하다가 차차 상동의 심성을 알게 되고 그가 글자를 아는 데는 더욱이 달리 보아서 하나에도「상동이」둘에도「상동이」하고 상하가 사랑하였다.
그러한 상동이 무슨 마가 들었던지 또는 운명의 장난이었던지 상경 이래에 처음 큰 실수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금방 비가 쏟아질 듯이 날이 꾸물꾸물한 저녁머리였다.
장님 하나이 긴 지팡막대로 땅을 두드리며
『문 ── 헤어 ── 수 ── 이여.』
하고 청승맞게 목을 굴러 넘기며 대문 밖 행길을 지나간다.
이때 상동은 주인댁 일을 다 마치고 저녁이 되기까지의 잠간 동안을 바람을 쏘이기 위하여 거리에 나서 있었다.
『문 ── 수 ── 이여.』
『여보, 장님.』
『왜야.』
동네 조무래기들이 멀리서 이렇게 장님을 부른다.
『장님 불알이 몇 조각이오?』
『요놈?』
하고 소경은 보이지 않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씨 못 받을 자식 같으니.』
하고 욕설을 한다. 그 광경이 문득 상동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그래서 상동은,
『이 자식들아 그까짓 소리하면 외눈이나 깜짝이니.』
하고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집어 개천의 똥물을 묻쳐 가지고 사붓 사붓 걸어가서 소경의 입에다가 그 지푸라기를 쓱 문지르고는 화다닥하고 뛰어 달아났다.
『에 튀튀.』
하고 소경은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침을 뱉으며 구역을 하며,
『이 어느 오사를 할 놈이 요따위 씨 못 받을 짓을 하니, 이 벼락을 맞을 자식, 이 자식, 넌 요자식 오대를 두고 장님만 나라.』
하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며 두루막 끈에 매어단 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구역을 한다.
상동은 비로소 뉘우쳤다.
한때의 객기가 나서 장난을 한다는 것이 진실로 죄를 당할 장난을 하였다.
『아아 내 무슨 마가 들었던고!』
이러한 후회가 났지마는 기위 해논 장난을 다시 어떻게 씻어버릴 수는 없었다.
이때에 소경은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더니 점통을 흔든다. 상동은 불안과 호기에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소경의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점을 친 소경은,
『흥 요놈 내가 모를 줄 알고, 요놈 남의 집살이 하는 상가란 놈이로구나, 요놈, 찾아서 다릿뼈를 분질러 놔야지.』
하고 일어선다.
二[이],
[편집]상동은 가슴이 선뜩하였다. 붙잡히어 욕을 본다는 겁이 아니다. 그 장님이 어쩌면 나의 성을 집어내나 하는 놀람이었다.
점이란 신기하다는 것은 때때로 들어왔지마는 또 그리고 주역이 만고의 신비와 수리를 가진 것이란 선생님에게도 들어는 왔지마는 지금 눈앞에 그 신비한 힘을 보게 되매 상동은 일종의 존경과 불같이 치미는 향학욕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상동은 달음질하여 장님 앞으로 가서 소경의 손을 잡고 다시 주저앉았다.
『선생님 게 앉으십쇼.』
『누구냐?』
『네, 제가 상동이란 총각놈이올시다. 지금 못된 객기가 나서 선생님께 장난한 놈이올시다. 죽을 때라 잘못 했읍니다. 맘대로 처분하십시오.』
『이 자식!』
하고 맹인은 상동의 멱살을 더듬어 잡았다가 무슨 생각인지 다시 손을 놓으며
『이 자식아, 나이 진득한 자식이 장난을 해두 이따위 장난이야.』
『네 그저 죽을 때라 잘못 했읍니다. 저는 오늘부터 속죄 겸 선생님의 제자가 되서 점 공부를 하고 싶으니 절 데리고 가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맹인은 상상부도에 제자 소원을 듣고는 잠간 멍하니 있더니,
『앞길이 만리 같은 놈이 하필 점 공부냐?』
『아니올시다. 주역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아니, 너 글을 아니?』
『네 글자 낱이나 좀 합니다.』
『음,』
하고 무엇을 잠시 고려하더니,
『그럼 네 소원대로 가자마는 양반의 댁에 있을 때 같이 호강은 못 한다.』
『남의 집에 사는 놈이 어디 간들 호강을 바라리까!』
이리하여 상동은 그 길로 맹인의 집으로 따라가서 집을 알아 놓고는 다시 상전의 집으로 돌아와서 시종전말을 이야기하고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상전의 집에서는 내놓기를 아까워 하였지마는 당자가 좋아 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는 정한림 집을 나와서 이튿날부터 맹인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해가며 밤이면 복술을 배웠다.
시골 어머니에게서는 정한림 집을 나와서 장님의 집 고용살이를 하며 복술을 배운다는 기별에,
『너를 멀리 서울로 떼어 보낸 것은 입신양명의 넌출을 잡도록 하자는 어미의 마음이어든, 이제 복술을 배우다니 이 무슨 실수이냐. 젊은 아이가 무엇을 못 배워서 하필 복술이라니 평생을 남의 사주팔자나 보아줄 심사라면 차라리 시골서 어미 밑에 농부됨만 같지 못하니 곧 내려 오너라.』
하는 꾸지람과 자애의 편지이었다. 그러나 상동은『공명이 상술을 배우고 천문을 배움이 그것으로 행사할 심의이었던가요』하는 간단한 답장을 올리고는 물론 낙향하려도 아니 하고 열심히 주역을 공부하였다.
고역의 삼 년이 지나가서 상동은 열여덟 살이 되었다.
『선생님.』
『왜야.』
『어언 제가 복술을 공부한 지가 삼 년이 됐읍니다 그려.』
『그렇지.』
『그만하면 대강은 행세할 만큼 되지 않았을가요?』
『그만하면 넉넉하지.』
『그럼 선생님 내일부터라도 나서서 벌이를 해볼가 합니다.』
『아니다.』
『예?』
『넌 복술 행세를 할 사람이 아니야.』
『그게 웬 말씀이오니까, 삼 년 동안 공부를 하기 딴은 행세해서 돈을 벌자는 것인데 그걸 말라시니 공부한 보람이 어디 있읍니까?』
『가만히 있어 넌 복술이 아니라도 훌륭한 출세를 하게 될 테니 그때 가서 날 잊지나 말아다오.』
하고 도무지 허락을 아니 하더니 어느 날 밤에 선생이,
『상동아,』
하고 부른다.
『예.』
『인제 때가 돌아왔다. 너 이 길로 수구문 밖에 나가서 성을 끼고 남산 쪽으로 올라가서 큰 나무 밑에 숨어 앉아 있으면 누가 송장을 메고 와서 나무가지에다가 덕을 매고 갈 터이니 그 덕에서 송장을 꺼내서 업고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가져 오너라.』
한다. 무슨 놈의 운수가 돌아왔는지는 모르되 아닌 밤에 수구문 밖도 무섭거니와 송장을 업고 오다니,
『아니 그래야만 저의 운수가 티옵니까?』
『그것이 너의 입신양명의 첫길이 되는 것이다.』
입신양명의 첫걸음이라니 한번 그리해 보는 수밖에 없다.
사람 하나 행길에 없는 아닌밤중에 수구문을 향하여 나가며 상동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세상에 이러한 허무한 짓이 있을가, 송장을 업어 오는 것이 출세가 되다니.』
그러나 워낙 선생을 믿기를 태산 같이 믿고 있는 상동은 불안과 호기와 의아의 마음을 가슴에 품은 채 수구문 밖으로 나가서 어느 큰 나무 밑에 가서 숨어 앉아 있었다.
한식경이나 지난 후에 과연 성축 밑으로서 산을 향하여 올라오면서 두런거리는 사람의 소리가 들린다.
이제껏 무서운 것을 참고 앉아 있던 상동은 사람의 두런거리는 소리에 더욱이 무서운 증이 솟았다. 무서운 증과 동시에 난감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인제 송장을 짊어지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새삼스러이 무서움을 느낀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출세의 첫길이라니 하는 생각에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고 눈을 노리어 어둠을 바라다 보았다.
이윽고 수삼인의 사람이 들것 하나를 메고 뒤에서 두어 사람이 따라서 산으로 치닫더니 들것을 내려놓고 송장을 꺼내어 큰 소나무 가지에다가 덕을 메고
『세상에 참 가엾은 일이지, 천하의 일색 아가씨가 이렇게 되실 줄이야 뉘 알았겠나?』
『막비 팔자가 아닌가.』
『이 사람 그런 소리 말게, 팔자가 오죽 좋게 태 나셨나, 재상댁 따님으로 났으면 더 할 호강이 어디 있을라구.』
『그러니까 막비 팔자란 말이지.』
재상의 집 하인들인 듯 그들은 상전 아가씨가 마마 하다 돌아가서 덕에 매달린 것을 가엾어 하는 것이었다.
상동은 귀를 기울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저 송장이 재상댁 따님이로구나.』
하는 상상을 하였다.
하인들은 바로 눈앞에 그 송장을 업어갈 사람이 숨어 있는 것도 모르고 조금도 지체 않고 곧 그곳을 떠나 버리었다. 누구나 오래 있고 싶은 곳이 아닌 것은 물론이었다.
하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상동은 벌떡 일어서서 그 덕 밑으로 가서 본능적으로 사방을 한번 휘둘러 보고는 그 덕을 끌러 내렸다.
사람 사오인이 일한 것을 상동이 혼자서 끌러 내리기에는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상동의 성력을 하늘이 감동함인지 시체도 그다지 무겁지 아니하였다.
상동은 무서운 것도 잊어버리고 그 송장을 들처 업고는 문안으로 들어서서 뒷골목 뒷골목으로 접어들어 주인의 집으로 돌아왔다.
『선생님 인제 갔다 왔읍니다.』
『어 인제 당도할 때가 됐는데 하구 기다리고 있었더니 인제 오는구나, 어서 건넌방으로 들어 뫼셔라 그리고 아랫목에 이부자리를 깔아 놨으니 게다가 아가씨를 뉘고 나와서 불을 조금만 지펴라, 너무 많이 지펴서는 못쓴다.』
상동은 주인 선생의 명령대로 건넌방으로 시체를 안고 들어가 본즉 바늘 쏙뺀 새 이부자리가 펴놓아 있다.
그 이부자리에다가 시체를 들어 뉘면서도 새삼스러이 주인 선생의 영험한 복술에 탄복을 하였다.
『불을 켜라.』
밖에서 선생의 목소리다.
『네!』
상동은 선생이 불을 다려 들여보내는 황까지를 받아서 등잔 심지에 부쳤다. 기름 등잔의 둔한 광선이 방안을 밝혀 준다. 동시에 방금 자리에 뉘여 논 시체의 얼굴이 세상에 드믄 미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자식 너 같이 팔자 좋은 자식도 드믈다. 불은 내가 때 줄 것이니 너는 옷을 벗고 그 시체를 품고서 너의 체온으로 녹혀 주어야 한다. 불은 때긴 하지만 그것은 냉기를 가시게 하자는 게고 불로 녹혀서는 살 사람도 죽어.』
한다.
상동은 선생의 말이지마는 차마 그리 할 수 없어서 주저주저하고 있었더니 그 기색을 알았던지 밖에서 주인 선생이
『무얼 이러구 있어? 하라는 대로 하라니까. 일껏 데려다가 영영 죽여버릴래? 어서 빨리 해.』
하고 재촉한다.
三[삼],
[편집]한 시간, 두 시간.
맹인은 밖에 앉아서 십 분이 멀다고 동세를 묻는다.
『무슨 기맥이 있느냐?』
『네, 몸이 차차 온기가 돌아 오는 것 같읍니다.』
『음 그럼 됐다. 어렵더라도 더 좀 있거라.』
어려웁기커녕 상동은 천하의 행복을 독차지한 것을 느끼었다. 비록 시체라 하더라도 지금의 상태로 보면 영영 시체가 되어 버릴 것 같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재상의 딸을 공공연하게 한 자리에 품고 누웠으니 이런 경우가 아니면 상상인들 해볼 일이냐.
『좀 어떠냐?』
『이젠 확실히 온기가 돌았읍니다.』
『그렇거든 가슴을 슬슬 문질러라.』
상동은 맹인이 하라는 대로 했다. 과연 온기가 돌기 시작한 시체의 얼굴에 일맥의 생기가 도는 듯 아련하게 홍운이 떠 오르기 시작했다.
실낱같은 생명의 줄이 한 겹 두 겹 굵어 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상동이 허겁스럽게 소리를 친다.
『선생님.』
『왜야,』
『인제 숨을 쉽니다.』
시체는 픽픽하고 목에서 무엇이 터지는 듯한 소리를 하더니 길게 한숨을 쉬고는 몸을 약간 움직인다.
『이제 됐다. 몸을 주물러라.』
하며 밖에서 무엇을 한동안 덜그럭대더니 미음을 손수 가지고 방으로 들어 왔다.
『자 이 미음을 네가 한 목음 입에다 물어 가지고 입으로 전해라.』
상동은 부끄러움도 없어졌다. 미인을 살렸다느니보다 하여간 사람 하나를 살려낸다는 생각이 앞서서 신기한 감동으로 그 미음을 받아서 입에 물어 전하여 먹이었다.
『꿀떡.』
하고 그 미음이 목을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인제는 그대로 이불을 덮어 놓아라. 그리고 너두 인제 밖으로 나가자.』
하여 상동을 끌고 나왔다.
그러나 이삼십 분 동안에 한 번씩은 상동을 들여보내서 처녀의 시종을 들게 하고 약을 지어다가 간호를 극진히 하였다.
이틀 후 ──
인숙(仁淑) ─ 재상의 딸 ─ 은 완전히 정신을 돌리고 극진한 간호에 몸도 하루 하루, 부쩍 부쩍 회복이 되어 인제는 완인이 되었다.
『대관절 여기가 어디요?』
하고 인숙은 정신이 처음 나는 날, 곁에 앉은 상동을 보고 물었다. 총각, 낯 모르는 총각이 부끄럽다는 것도 잊은 인숙이었다.
상동은 주인 선생을 불러 들이었다.
『선생님 아가씨가 인제 말을 하십니다.』
이렇게 신기스럽게 외쳤다.
맹인은 방으로 들어와서 전후시말을 이야기해 들렸다.
『이 상동이가 아니더면 아가씨는 덕에 매달린 채로 영영 돌아가시었을 것이고 또 아가씨를 업어 온 후에 이 상동이의 극진한 간호가 아니더면 이렇게 쉽게 회복될 수 없지요.』
하고는
『아가씨 댁은 어디시오니까.』
하고 물었다.
인숙은 당시 세도객의 한 사람으로서 이름이 높은 김판서 딸이었다.
닷새가 지난 후 맹인은 사람을 김판서 집으로 보냈다.
『댁 아가씨가 살아계시니 뫼셔 가십시오.』
하는 전갈이다.
김판서 집에서는 상하가 뒤 끓었다. 죽은 아가씨가 살아 있다니 웬소리인가, 당초에는 미친놈이 아닌가 하고 내몰기까지 한 것을 안 유모가 그 소리를 듣고 발바닥으로 뛰어 나와서 전갈하는 사람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서는 그제야 상하가 놀라고 신기해 하고 야단법석이 일어났다.
그러나 전갈하는 자의 말만을 믿을 수 없어서 유모가 가마를 타고 창동 막바지 맹인의 집에까지 와서 만나본즉 주인댁 아가씨가 분명하다.
『어이구 아가씨 웬일이슈?』
하고 유모는 신기하고 반갑고 해서 인숙의 팔을 붙들고 기쁜 눈물을 흘리며
『자 이 길로 곧 댁으로 가십시다.』
하는 것을 인숙은,
『유모 그게 무슨 말요, 사람으로서 은혜를 모르면 금수만도 못하지 않소.
내가 살아났으니 부모 계신 집으로 가는 것이 마땅하지마는 날 살려준 것은 이 집의 은덕이니 그 은덕을 갚고야 이 집을 떠나지 어찌 그대로 가버릴 일이겠소.』
하고 가기를 승낙치 않는다. 유모 역시 아가씨의 심지 깊은 말에는 우길 수가 없어서 그길로 바로 상전의 집으로 돌아가서 주인인 판서에게 이 말을 보고하니 상하가 신기하게 여기고 또 딸의 말을 기특히 여기어 백목 수필, 돈 백냥을 청직이에게 대동시키어 맹인의 집을 찾았다.
맹인은 그 돈을 고사하는 것을 청직이는 억지로 처 맡기다시피 하고 아가씨를 뫼시어 갔다.
상동은 주인 선생이 돈 백냥을 받고 아가씨를 내놓는 것을 보고 아가씨는 의당 자기 집으로 가기는 갈 사람이로되 일이 하도 허무한 것 같아서
『선생님 일은 인제 아주 끝났읍니다 그려.』
『그렇지 일단락은 지어진 셈이지.』
『그런데 선생님께서 절더러 이번 일이 출세 하는 첫 길이라고 하시더니 이것이 무슨 출세오니까?』
『가만 있거라, 그렇게 조급히 굴지 않아도 너를 찾는 날이 있는 게니라.』
주인 맹인의 말은 수수께끼 같은 소리라서 믿을 수는 없지마는 그렇다고 그렇게도 믿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적막을 느끼었다.
과연 맹인의 말은 헛말이 아니었다. 김 판서는 자기 딸이 다시 살아온 것을 보고 무한히 기뻐도 하였거니와 전일부터 혼사말이 있던 곳하고 불야불야 결혼식을 거행해 버릴 생각이 났다.
그래서 갑자기 그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것을 본 인숙이는 어머니 앞에 나아가서
『어머니 미가 처녀로 이런 말을 여쭈오면 큰 변으로 여기시겠지마는 저는 출가할 생각이 없읍니다.』
낯을 붉히며 이렇게 말하였다. 양반의 집 규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천만뜻밖이오, 해괴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어이없어 아무 말도 못하고 딸의 얼굴만을 기가 막혀 바라볼 뿐이었다.
『이런 말을 여쭈면 놀라실 줄을 알았읍니다마는 전일에 인숙이는 이미 덕에 매어 달렸을 때에 죽어버린 셈이 되고, 지금 있는 인숙이는 딴 인숙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출가하기를 싫어하는 게냐?』
『충신은 불사이군이오, 열녀는 불경이부라고 소녀는 이미 낭군이 있지 아니 하오니까.』
『아니 그게 웬 말이냐?』
어머니는 펄쩍 놀라며 바투 다가 앉는다.
『저를 덕에서 끌러 업고 간 총각이 하루를 자기의 체온으로 내 몸을 녹이어 이렇게 재생하게 해 주었으니 그 은혜도 만중하려니와 몸을 섞은 처음의 남자가 낭군이 아니고 다시 어디에 낭군이 있사오릿가?』
인숙이는 일생의 중대사라 부끄럼을 무릅쓰고 이렇게 명확히 말하였다.
어머니는 놀라고도 그의 말이 당연함에 한마디 부인할 길이 없었다.
이 말은 불이시각하고 김판서의 귀에 전하여졌다. 판서 역시 별도리가 없었다.
『부인, 딸의 말이 지당한 말이오. 이미 그렇게 된 바에야 막비 저의 팔자이니 그리하는 수밖에 더 있겠소.』
하고는 곧 청직이를 창동 맹인의 집으로 보내서 상동이를 불러다가 보았다.
김판서는 다소 관상에 대한 조예가 있는지라 상동의 지금의 처지가 맹인의 집 상노에 지나지 못하나 일후 일국 재상의 지위에 오를 만한 상이 있음을 보고는 심중에 암암히 기뻐하였다.
그러나 판서의 문벌로서 맹인의 집 상노 아이와 결혼 하였다면 체면상 참을 수 없는 일이라 그날부터 상동을 자기 집 사랑 ── 작은 사랑에 데려다 두고 독선생을 앉혀서 공부를 시키었다.
창동 맹인은 상동이 불려 가는 날 상동의 어깨를 치며,
『봐라, 내가 뭐라더냐 조급히 굴지 말고 기별 있기를 기다리라고 그랬지야.』
하며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조선 명신 중의 한 사람으로 청사에 이름을 남긴 상진(尙震) 상정승은 이 맹인의 제자이었고 인숙이를 업어다가 재생시킨 상동의 후신이었다.
상동은 매일 같이 공무를 치르러 마을에 들어갔다.
그러면 젊은 아내 인숙은 너르나 너른 집에 혼자서 남편이 사퇴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괜찮았다. 남편이 번을 들게 되면 넓은 안채 안방에서 혼자서 밤을 새우는 것이 으례이었다.
상동은 초사를 하게 된 후에 장인 김판서가 집을 사준다는 것도「남자 어찌 처가의 재물을 받겠소」하고 고사 불수하고는 회동 큰길 가까이 흉가ㅅ집이라고 해서 텅 비어 있는 큰 기와집 한 채를 빌려서 들었다. 남이,
『그 집에는 매일 밤 도깨비가 나온다는 흉가에 어찌 들어가 계슈.』
하면,
『사불범정인데 무슨 일이 있겠소.』
하고 웃어 버린다.
그 집에는 전부터 문을 열면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굳게 처박아 놓은 아랫채 방이 한 간 있었다.
『저것이 병쾌이지.』
상동은 일상 아내를 보고 이렇게 농담하더니 하루는 남편이 번을 든 밤에 인숙 혼자 바느질을 하고 있노라니 문이 펄썩 열리며 패랭이를 쓴 키가 구 척 같은 위인 하나이 썩 들어서서 아무 말 없이 인숙이 곁으로 와서 인숙의 무릎을 벼개 삼아 베고 드러눕는다.
보통 부인네 같으면 기절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담력이 강철같이 단단한 인숙은 드러눕거나 말거나 외눈하나 깜짝이지 아니하고 여전히 바느질을 하고 있다가 벌겋게 불에 달은 인두로 별안간 그의 이마를 눌러 지졌다.
『악!』
하고 그자는 벌떡 일어나서는 밖으로 뛰어나간다. 인숙은 문틈으로 그자가 가는 곳을 내다 보았다. 캄캄한 밤이건만 그자가 완연히 아랫채에 처박어 논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이튿날 이 기괴한 현상을 들은 상동은 사람을 들이어 그 아랫방을 뜯고 들어가 보았다.
먼지가 케케 앉은 방안 중앙에 큰 궤 하나가 놓여 있고 그 궤 뚜껑 위에는
『이 궷속에 들은 보배는 이 방을 여는 사람에게 선물드린다.』
하는 글자가 쓰여 있다. 상동은 그 궤를 열었더니 그 속에는 찬연한 황금이 가득히 들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상방(廂房)의 기현상은 황금이 상사를 부린 것이라고 하고 상공이 살고 있던 동네를 상동(尙洞)이라고 불렀다.
상공이 정승 지위에 오른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이 이야기를 듣는 자에게 오래 인상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은 사람 일생의 운수라는 것은 진실로 알 수 없다는 그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