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뇌의 무도/보를레르의 시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그대여, 그대는 예술의 천국에 아직까지 모르는 처참한 벗을 주었습니다. 그대는 새로운 전율을 창조하였습니다.’……
―유고

모든 것은 흘러감에 따라
잊을 수 없는 지나간 날을 위하여
나의 벗 염상섭(廉想涉) 군(君)에게
이 시를 모아 드리노라.

죽음의 즐거움[편집]

음습(陰濕)한 땅위, 달팽이의 모인 곳에,
나는 나의 깊은 무덤을 파노라,
이는 내 노골(老骨)을 쉬이며, 망각(忘却)의 안에
자람이노라―물 아래의 교어(鮫魚)와 같이.

나는 유언(遺言)을 미워하며, 무덤을 싫어하노라,
죽어서 사람의 짠 눈물을 얻음보다는
차라리 살아서 흡혈(吸血)의 아취(鴉嘴)를 불러,
더러운 내 사체(死體)의 마디마디를 먹이려노라.

아아 저충(蛆虫)! 눈도 없고 귀도 없는 암흑(暗黑)의 벗아,
자유(自由)와 열락(悅樂)의 사자(死者), 또는 방탕(放蕩)의 철학자,
그리하고 부패(腐敗)의 내손(來孫)은 다같이 네게로 가리라.

아무 통한(痛恨)도 없는 내 사체(死體)를 파먹어 들 때,
저충(蛆虫)아, 알리어라, 혼(魂)도 없고, 죽음의 안에 죽음 되는
다 낡은 육체(肉體)에도 오히려 고통(苦痛)이 있느냐, 없느냐.

파종(破鐘)[편집]

겨울밤, 난로(煖爐)의 곁에 앉아, 확확 타는
불을 바라보며, 한가히 지나간 옛날을 추회(追懷)하면서,
안개 가득한 밤에 울어나는 종(鍾)소리를 들을 때,
얼마나 설우며, 얼마나 즐거우랴.

아아 행복(幸福)이어라, 종(鍾)이여, 기묘한 인후(咽喉)로
늙은 몸일지나, 오히려 충실(忠實)하게 썩 튼튼하게
엄숙(嚴肅)한 울림소리를 진실(眞實)하게 내임은
진영(陣營)의 보초(步硝)에 섰는 노병(老兵)과 다름이 없어라.

아아 내 영(靈)이 깨어져 권태(倦怠)의 속에 잠길 때,
그 곡조(曲調)를 높이 한야(寒夜)의 하늘에 가득케 하려면
여러 번 힘없는 민절(悶絶)의 마디소리가 되고 말아라.

이는 혈해(血海)에 두던 산(山)을 짓는 죽음 ‘사체(死體)’ 속에 잠기어,
괴롭게도 애쓰며 고민(苦悶)하여도 움직일 길조차 없는
목숨이 끊기여 가는 상병(傷兵)의 희미한 말기(末期)의 고신(苦呻)과 같아라.

달의 비애(悲哀)[편집]

오늘밤, 달은 괴롭게도 꿈을 꾸어라,
보드라운 침대(寢臺) 위에 누어, 잠들기 전(前)에
괴롭고 가벼운 손가락으로
자기(自己)의 가슴을 애무(愛撫)하는 미인(美人)인 듯하여라.

보드라운 설추(雪推)와 같은 비단 침구(寢具)의 위에,
넘어지면서, 미녀(美女)는 민절(悶絶)의 탄식(歎息)을 토(吐)하며,
우거지게 핀 꽃인 듯, 푸른 하늘로 올라가는
하얀 환영(幻影)에 미녀(美女)의 눈은 어리고 있어라.

이따금 달은 하염없는 울우(鬱憂)에
하계(下界)로 음비(陰秘)한 눈물방울을 떨어질 때,
잠의 대적(大敵), 경건(敬虔)한 시인(詩人)은

손바닥에 홍채(虹彩)와 같이 빛나는
희멀금한 눈물을 받아서는
태양(太陽)의 눈을 피(避)하여 가슴속에 깊이 감추어라.

구적(仇敵)[편집]

내 청춘(靑春)은 다만 여기저기에 일광(日光)이 스며든
폭풍우의 암흑에 지나지 않았어라.
우는 소리의 처량(凄涼)한 우뢰, 내리는 극렬(戟烈)한 비에
내 동산에는 떨어진 붉은 과실(果實)조차 드물어라.

그러하다, 생각의 가을은 지금(只今) 왔어라,
나는 새롭게 호미와 가래를 가지고
홍수(洪水)가 잠긴 땅을 뛰었노라, 홍수(洪水)는 땅에,
무덤 같은 깊은 구멍만 만들었어라.

나는 생각하노라, 이제는 다시 새로운 꽃이
씻기어 하천(河川)된 이러한 땅 위에,
우거질 생성(生盛)을, 어떻게 잊기 바라랴.

아아 설어라, 아아 설어라, ‘때’는 생명(生命)을 먹으며,
암참(暗慘)한 ‘구적(仇敵)’은 혼자 맘속에 들어와서
나의 잃은 피를 마시며 기뻐 뛰어라.

유령(幽靈)[편집]

갈색(褐色)의 눈을 가진 천사(天使)와 같이,
나는 너의 침대(寢臺)로 돌아오리라,
어둑한 밤의 그늘 아래에 싸이어,
소리도 없이, 나는 네게로 가까이 가리라.

나는 네게 주리라, 거뭇한 애인(愛人)이여,
찌그러진 구멍의 주위(周圍)에
달 같은 찬 키스와,
뱀 같은 애무(愛撫)를.

희멀금한 아침이 되려는 때,
아무것도 없는 비인 자리만 남으리라,
그러나, 그 자리는 저녁까지 차리라.

사람들은 아름다운 맘으로
너의 생명(生命)과 젊음 위에 내려오나,
나는 오직 공포(恐怖)로 네게 임(臨)하리라.

가을의 노래[편집]

1

오래지 아니하여 우리들은 한랭(寒冷)의 암흑(暗黑)으로 들게 되어라,
꿈속인 듯하여라, 쨍쨍한 여름의 빛이여, 아아 가거라.
뜰 안의 부석(敷石) 위에 떨어지는 나뭇잎의 애달픈 소리를
나는 벌써 듣고 놀래었노라.

분노(憤怒)와 증오(憎惡), 전율(戰慄)과 공포(恐怖)의 끊임없는 쓰린 고역(苦役)의 겨울은
지금(只今) 나의 몸 위로 돌아와서,
북극(北極)의 지옥(地獄)에 태양(太陽)과 같이
내 맘은 얼어서 깨어진 붉은 철편(鐵片)과 같아라.

떨어지는 낙엽(落葉)의 소리는 단두대(斷頭臺)를 세우는
그 소리보다도 더 음참(陰慘)함을 나는 떨면서 들었노라.
내 맘은 곤(困)한 줄도 모르고 따르는
전사(戰士)의 무거운 철퇴(鐵槌)에 넘어지는 탑(塔)과 같아라.

이러한 단조(單調)한 소리에 흔들리며, 어디선지,
분주하게 너울에 못을 박는 소리가 들려라,
누구의 너울? 지나간 작일(昨日)인 여름의 너울이어라,
지금(只今)은 가을이어라, 이상(異常)한 이 소리는 죽은 이를 보내는
종(鍾)소리와 같이도 애닯게 울어 빗겨라.


2

아름답고도 살뜰한 님이여, 긴 그대의
눈을 파란 빛을 나는 사랑하여 왔노라,
그러나 어찌하랴, 그대의 썩 고운 모양, 그대의 애정(愛情),
그대의 밀실(密室), 또는 그대의 난방(暖房)도 오늘의 내게는
바다에 빛나는 햇볕만도 못하게 보이는 것을.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라, 오오, 고운 맘이여,
망은(忘恩)의 아들, 또는 악(惡)한 것에게 오마니 같이 하여라,
애인(愛人)이며, 누이에게, 광휘(光輝) 가득한 가을과 같이,
그리하고 넘는 석양(夕陽)과 같이 한동안은 고운 맘을 가져라.

사람의 생명을 짧아라, 싫을 줄도 모르고 무덤은 기다려라,
아아 너의 무릎에 내 이마를 기대고
덮고 희던 여름의 옛날을 울어 보내며,
붉고도 다사로운 만추(晩秋)의 빛을 즐기게 하여라.

비통(悲痛)의 연금술(煉金術)[편집]

‘자연(自然)’이여! 하나는 열정(熱情)으로 그대를 빛내이며,
다른 하나는 상복(喪服)을 그대에게 입혀라,
하나에게는 ‘무덤’!을 말하며,
다른 하나에겐 ‘생명과 광휘(光輝)’!를 말하여라.

나를 돕기도 하며, 나를 항상(恒常) 놀라게도 하는
미지(未知)의 나의 헤르메쓰[1]여,
그대는, 나를 가장 불쌍한 연금술사(鍊金術使),
마이다왕(王)[2]과 같이 만들어 주어라.

그대를 위하여는 나는 황금(黃金)을 철(鐵)로,
극락(極樂)을 지옥(地獄)으로, 변(變)하게 하고
운무(雲霧)의 수의(壽衣) 안에,

사랑스러운 사체(死體)를 찾아내어,
천상의 바닷가에
나는 큰 무덤을 세우노라.

주(註)[편집]

  1. 헤르메스(Hermese) 제신(諸神)의 사자(使者)
  2. 마이다(Midas)왕은 무엇이든지 손으로 만지기만하면 황금(黃金)으로 변(變)케 하는 힘이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