帶方北帶方通典亦同此說漢書則真臨樂玄四郡今云三郡名又不同何耶 |
·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다.이다. 《통전(通典)》에는 또 이런 말이 있다. 《한서(漢書)》에는 진번(眞番)·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사군(四郡)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삼군으로 되어 있다고 하고 이름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
魏滿朝鮮 |
위만조선 |
前漢 朝鮮傳云自始燕時常畧得真畨 朝鮮師古曰戦國時燕因始畧得此地也 爲置吏築障 䄅滅燕屬遼東外徼 漢興爲逺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師古曰浿在樂浪郡 屬燕 燕王盧綰反入凶奴 燕人衛滿亡命聚黨千餘人東走出塞渡浿水 居䄅故空地上下障 稍伇屬真畨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都王儉 李曰地名臣讃曰王倹城在樂浪郡 浿水之東 以兵威侵降其旁小邑真畨 臨屯皆来服屬方數千里 |
《전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1]에 이르기를, 연(燕)나라[2] 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조선 안사고(顔師古)가 이르기를, 전국(戰國) 시대에 연나라가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 얻었다.을 침략하여 얻었고, 거기에 관리를 두고 보루를 쌓게 하였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위만조선(魏滿朝鮮)은) 요동(遼東)의 외곽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났지만 (위만조선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遼東)의 옛 요새를 고쳐, 패수(浿水)에 이르기까지를 경계로 삼아 안사고가 이르기를, 패수는 낙랑군에 있다.(이를)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凶奴)로 들어가자,[3]연나라 사람 위만(魏滿)이 망명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빈 땅의 아래위 보루에서 살면서 진번 ·조선의 만이(蠻夷)들과 옛 연나라 · 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점차 복속하게 하고, 왕이 되어 왕검(王儉)[4] 을 도읍으로 삼았다.[5] 이기(李寄)가 말하기를 (왕검은) 지명이라 하고, 신하(臣下) 찬(讚)[6]이 말하기를 왕검성(王倹城)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한다. 병사로써 위협하고 침략하며, 그 이웃의 소읍들을 항복하게 하니, 진번(真畨) ·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고 사방이 수천리였다. |
傳子至孫右渠 師古曰孫名右渠 真畨辰國欲上書見天子雍閼不通 |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右渠)안사고가 이르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라 하였다.에 이르러, 진번 · 진국(辰國)이 천자를 뵈옵기 위해 글을 올리고자 하였으나, (우거가) 가로막아, 통하지 못했다. |
- ↑ 서남이양월조선전(西南夷兩粵朝鮮傳)을 말한다.
- ↑ 서울대규장각본에는 '燕'이 누락되고, 빈 칸으로 되어 있다.
- ↑ 노관은 한 고조의 친구로 고조의 통일 전역에 종군하였고 친분에 의지하여 연왕이 되었으나 회의하고 모반하여 흉노에 투항했다.
- ↑ 《사기(史記)》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 第五十五〉에는 “險”으로 되어 있다.
- ↑ 사마천(기원전 1세기),《사기》〈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 “朝鮮王滿者,故燕人也。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조선왕 위만(衛滿)은 원래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나라 전성기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조선을 약탈하고 복속시켜, 관리(官吏)를 두고 보루와 요새를 쌓았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위만조선은 요동(遼東)의 외곽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났지만 위만조선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고쳐, 패수(浿水)에 이르기까지를 경계로 삼아 이를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魏滿)이 망명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의복을 입고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빈 땅의 아래위 보루에서 살면서 진번·조선의 오랑캐들과 옛 연나라·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점차 복속하게 하고, 왕이 되어 왕검(王險)을 도읍으로 삼았다.)
- ↑ 《사기삼가주(史記三家註)》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에는 “瓚”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