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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Aspere/연습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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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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麻衣太子

신라 경순왕의 아들. 신라의 국세가 날로 쇠약해져, 서쪽으로는 후백제의 견훤이 쳐들어오고 북쪽으로는 고려의 왕 건이 압력을 가해오자, 936년 경순왕은 군신회의를 열어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태자는 이를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와 나무 열매를 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평생 삼베옷을 입어 마의 태자로 불리게 되었다.

마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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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海松(1905∼1966)

아동문학가·저널리스트·수필가. 본명은 상규이며 해송은 호이다.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였으며, 1919년 「여광」의 동인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3년 「바위나리와 아기별」 「어머니의 선물」 등 동화를 발표함으로써 우리 나라 창작 동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어린이헌장과 서울특별시 시민헌장을 기초했다. 1924년 방정환·윤극영 등과 색동회를 결성하여 「어린이」 지를 간행하는 한편, 자유신문사·일본의 「문예춘추」사의 초대 편집장을 역임하는 등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1958년 제6회 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동화집으로 「홍길동」 「토끼와 원숭이」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씩씩한 사람들」 「요술집」 등이 있다.

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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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德

신라의 무용가. 552년, 우륵에게서 춤을 배웠는데, 그의 춤을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가야금의 계고, 노래의 법지와 함께 임금 앞에서 공연을 갖고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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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積(?∼1198)

고려 때 최충헌의 종. 1198년, 만적은 개성의 노예들을 모아놓고 반란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고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연설을 하였다. 그리하여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주인을 죽인 후 노비문서를 불살라 없애기로 계획하였으나, 배반자가 생겨 거사 전에 발각되었다. 주모자인 만적을 비롯한 백여 명이 붙잡혀 강물에 던져져 죽었다. 그가 일으킨 노예 해방운동은 실패했지만, 이후 노예의 지위가 향상되었고 세력이 커졌다.

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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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伊

고려 때 농민 반란의 지도자. 무신의 난 후 사회가 혼란할 때, 같은 공주 명학소의 천민 망소이와 함께 1176년에 굶주린 농민을 모아 난을 일으켜 공주를 함락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회유책을 써서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켰으나, 다시 예산을 공략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충순현을 명학소로 환원하고 총공격을 하였다. 당시 농번기라 도망가는 농민의 수가 증가하는 등 정세가 불리해지자 망이·망소이 등이 항복함으로써 1년 반 만에 난이 평정되었다.

맹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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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思誠(1360∼1438)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 자는 성지, 호는 고불, 본관은 온양이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조선 태종 때 대사헌이 되었다. 세종 때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였으며 「태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영의정 황 희와 여진 지방 개척을 위해 김종서를 시켜 4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청렴결백하여 국가에서 주는 녹미만으로 생활하고, 말년에는 음률을 좋아하여 스스로 악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자연을 읊은 시조 외에 많은 일화를 남겼다. 시조로 「강호사시가」가 있다.

명성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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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成皇后(1851∼1895)

조선 고종의 왕후. 성은 민씨, 본관은 여흥으로 여주에서 출생하였다. 9살에 부모를 잃고 여주에 있는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1866년 흥선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고종이 궁인 이씨만을 총애하고 이씨가 낳은 완화궁을 태자로 책봉하려 하자, 불만과 질투가 폭발하여 집권자인 대원군의 반대 세력을 합하고 민씨 친족들을 모아 확고한 세력 기반을 잡았다. 1873년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발탁하여 대원군의 실정을 탄핵하게 하고, 고종에게 친정을 선포하게 함으로써 민씨의 외척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때부터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폐하고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 윤태준의 집을 거쳐 충북 장호원으로 피신하였다. 대원군에 의해 죽은 것으로 선포되자, 윤태준을 고종에게 몰래 보내어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고 청에 지원을 요청케 하였다. 난이 진압되자 대원군을 청에 납치해 가도록 하고 다시 민씨 정권을 수립했으나 국고를 탕진하는 등 갖은 실정을 저질렀고, 또한 민씨 일족의 부패도 극도에 달하여 기강이 무너졌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다시 청을 끌어들여 개화당 정권을 3일 만에 무너뜨렸다. 그러나 일본 세력의 침투로 김홍집 등의 친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의 추방을 기도하다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 공사 미우라의 부하들에게 살해된 후 밖으로 운반되어 불태워졌다. 폐위되어 서민이 되었다가 복호되고 명성의 시호가 내려졌다.

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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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宗(1131∼1202) 고려 제19대 왕(재위 1170∼1197). 인종의 셋째 아들이며 의종의 동생이다. 1170년 의종을 몰아낸 정중부 등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의종을 다시 모시려는 김보당·조위총 등의 난이 일어났고, 전국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는 등 국내가 극도로 어수선했다. 1197년, 최충헌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는 특히 글씨와 산수화에 뛰어났다.

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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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宗(1534∼1567) 조선 제13대 왕(재위 1546∼1567). 중종의 둘째 아들이며 인종의 동생이다. 인종의 뒤를 이어 12세로 왕위에 오르자 어머니 문정 왕후가 섭정을 하였다. 문정 왕후의 동생인 윤원형 일파가 정권을 쥐고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백여 명의 선비를 죽였다. 「경국대전 주해」 등을 편찬하게 하고, 「경국대전」의 원전과 그 속전을 간행하였다. 권문세가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하는 등의 업적이 있다.

모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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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允淑(1909∼1990)

여류 시인. 호는 영운이며 함남 함흥에서 출생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34년, 시집 「빛나는 지역」으로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장시 「렌의 애가」는 아직도 여성들 사이에서 많이 읽히고 있다. 펜클럽 국제본부 부회장·한국 현대 시인협회장직을 역임하였다. 예술원 공로상·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시집으로 「옥비녀」 「풍랑」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내가 본 세상」 「포도원」 등이 있다.

목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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穆宗(980∼1009)

고려의 제7대 왕(재위 997∼1009). 학문을 장려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어머니인 천추 태후가 김치양과 간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후계자인 대량군(후의 현종)을 해치려 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목종이 대량군을 구하려고 강 조에게 그 호위를 명하였으나, 강 조는 오히려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군을 왕으로 삼고 김치양 일당을 살해하였다. 왕은 쫓겨나 충주로 가는 도중에 살해되었다.

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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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淸(?∼1135)

고려 인종 때의 승려. 서경 출신으로 일관인 백수한·정지상의 추천으로 왕의 고문이 되었다. 개경 출신의 세력을 꺾고 정권을 잡으려는 야심에서 풍수지리설을 들어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1129년, 서경에 대화궁을 짓게 했으며 왕의 호칭을 황제라 할 것과 금 정벌을 주장했으나, 김부식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마침내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김부식이 거느린 관군에게 포위당하자, 부하 장수 조 광에게 피살된 뒤 목이 잘리어 개경에 효시되었다.

무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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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寧王(462∼523)

백제 제25대 왕(재위 501∼523).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며, 즉위 후 가림성에 근거를 둔 역신 구가를 쳐서 백강에서 죽였다. 512년 양에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바쳤으며, 양으로부터 백제 제군사 영동 대장군에 책봉되었다. 523년 15세 이상의 한북주 군민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았다.

무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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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 무열왕

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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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王(?∼641) 백제 제30대 왕(재위 600∼641). 어렸을 때의 이름은 서동이다. 신라의 서쪽 국경을 공략하고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당에 사신을 보내었다. 관륵을 일본에 보내어 천문·지리 등에 관한 서적과 불교를 전하게 했고, 634년 왕흥사를 창건했다. 만년에는 사치와 유흥을 일삼아 백제 멸망의 원인을 만들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 공주를 사모하여 「서동요」를 지어 퍼뜨렸으며 마침내 왕비로 맞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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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王(?∼737) 발해의 제2대 왕(재위 719∼737). 대조영의 아들이며 연호를 안인으로 고치고 일본과 국교를 맺어 사신을 내왕하게 하였다. 한편, 무력을 양성하여 당의 산둥성을 공략하였다.

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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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學(1327∼1405)

고려 말, 조선초의 승려. 성은 박, 이름은 자초, 호는 무학이다. 18세에 소지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혜명 국사로부터 불법을 배운 뒤 묘향산의 금강굴에서 수도하였다. 공민왕 때 원의 연경에 유학하여 인도의 지공 선사와 당시 원에 가 있던 혜근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고 다시 회암사에 있다가, 그 다음해에 수도를 옮기려는 태조 이성계를 따라 계룡산 및 한양을 돌아다니며 땅의 모양을 보고 마침내 한양으로 정하는 데 찬성하였다. 1397년 태조가 그의 장수를 기원하는 탑을 회암사 북쪽에 세워주었다. 만년에는 금강산 금장암에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

묵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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墨胡子

고구려의 승려. 아도라고도 한다. 미추왕(혹은 눌지왕) 때에 고구려로부터 신라에 들어와 모례의 굴방에 숨어 있었다. 그 때 양나라 사신이 왕께 향을 바쳤으나, 모두들 그 용도를 몰라 사방에 수소문하자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용도와 이름을 알려주었다. 때마침 왕녀가 병을 앓고 있어서 왕은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워 재를 올리게 하여 병을 고쳤다. 왕은 매우 기뻐하여 흥륜사를 지어 주고 불법을 펼치게 하였다. 그 후 영흥사를 창건하여 살다가 미추왕이 죽자 백성들이 그를 해치려 하므로 모례의 집에 들어가 굴을 파고 문을 봉한 채 영영 나오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눌지왕 때 묵호자라는 이름으로, 「삼국유사」에는 미추왕 때 아도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극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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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克謙(1122∼1189)

고려의 문신. 자는 덕병, 본관은 남평이다.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내시 백선연의 잘못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었다. 그 후 의종은 문극겸의 상소가 정당한 것임을 알고 벼슬을 올려주었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아 명종을 왕위에 앉히고 문신들을 마구 처벌하였는데, 이때 많은 문신들을 구해 주었다. 그는 재상이 된 후, 상장군을 겸임하여 최세보와 함께 「의종실록」을 편찬하였다.

문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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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德守(1927~ ) 시인. 호 청태(靑苔). 경남 함안 출생. 1955년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현대문학」에 시 「침묵(沈默)」 「화석(化石)」 「바람 속에서」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1964년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1960년대에 발표한 연작시 「선(線)에 관한 소묘」 「종이 한 장」 「새벽마다」 등을 고비로 순수 심리주의적 경향을 계속 추구하여 현실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반영한 내면세계의 미학을 개척하였다는 평을 듣고 있다. 동인지 「시단(詩壇)」 「한국시(韓國詩)」 등을 주재했다. 시집으로 「황홀(恍惚)」 「선·공간(線·空間)」 등이 있고, 그 밖에 평론집 등이 있다.

문명 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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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明王后

신라 태종 무열왕의 왕후. 이름은 문희, 본관은 김해이다. 김유신의 누이이며 인물과 지혜가 뛰어났다. 언니인 보희의 꿈을 사서 김춘추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무왕·인문·노차·지경·개원 등을 낳았다.

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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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武王(?∼681)

신라 제30대 왕(재위 661∼681).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이며, 660년 당의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오자 김유신과 더불어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 고구려를 정벌할 때 무열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668년 다시 나·당 연합군을 동원하여 동생 인문을 시켜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로써 삼국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계속 간섭하는 당 세력을 김유신 등을 시켜 완전히 몰아냈다. 부인들에게 당식의 옷을 입게 하였고 당악을 배우게 하는 등, 당 문화 수입에 노력하였다. 죽은 후, 유언대로 화장하여 감은사 동쪽 바다 대왕암 가운데에의 물 속에 장사지냈다. 1967년 조사단에 의해 경북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유해가 안장되어 있음이 발견되었다.

문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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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聖王(?∼857)

신라 제46대 왕(재위 839∼857). 신무왕의 아들이며 재위 기간 중에 자주 반란이 일어났다. 가장 큰 반란은 장보고에 의한 것으로, 그는 산둥 반도에서 신라·일본·당의 3국을 상대로 무역에 종사하다가 고국에 돌아와 청해진 대사가 되었다. 장보고는 그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왕은 염장을 보내어 그를 죽이고 난을 평정하였다.

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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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王(?∼793)

발해의 제3대 왕(재위 737∼793).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연호를 대흥이라 하였다. 용천부로 천도하고 당 제도를 본받아 관직 제도를 제정하였다. 또한 사적을 수입하고 주자감을 세워 학문 교육을 장려하여 나라의 중흥에 힘썼다.

문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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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益漸(1329∼1398)

고려의 학자·문신. 자는 일신, 호는 삼우당, 본관은 남평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으로 원에 갔다. 최 유 일파가 충숙왕의 아우인 덕흥군을 받들고 고려에 쳐들어오자, 이에 가담했다가 귀국 후 파면되었다. 귀국할 때 목화씨를 얻어 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하여 성공함으로써 우리의 의복 생활에 큰 공헌을 하였다. 우왕 때 전의주부로 등용되었으며, 창왕 때 좌사의대부를 지냈다. 공양왕 때 이성계 일파에 의해 추진된 전제 개혁에 반대하여 조 준 등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세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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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益煥(1918~1994)

시인·목사. 호 늦봄. 만주 간도 출생. 1955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대학원 수료. 1972년 「월간문학」에 「추억의 커피잔」 「미켈란젤로의 고독」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히브리서 11장 1절」 「십계명」 등이 있다. 그는 「구약성서」의 히브리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정신과 감성을 융화시켜 얻어지는 새로운 가락과 언어를 발굴, 투명하고 섬세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시집으로 「새삼스런 하루」가 있다.

문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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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咨王(?∼519)

고구려 제21대 왕(재위 491∼519). 호는 문자명왕·명치호왕으로 장수왕의 손자이다.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므로 장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여러 번 사신을 위에 보냈으며 제·양 두 나라로부터 왕에 책봉되었다. 494년 부여국을 쳐 항복을 받고 신라와 백제를 자주 침공하여 국위를 떨쳤다.

문정 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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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定王后(1501∼1565)

조선 중종의 왕후. 성은 윤, 본관은 파평이다. 명종이 즉위하자 8년간 수렴청정을 하면서 윤원로를 해남에 유배하고 윤 임 등을 죽여서 을사사화를 일으켜 동생 윤원형 등 친척 일파가 정권을 잡게 하였다. 불교를 독실히 믿어 승려 보우를 신임하고 불교를 다시 일으켰다.

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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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宗(1019∼1083) 고려의 제11대 왕(재위 1046∼1083). 현종의 셋째 아들로 즉위하자 최 충에게 명하여 법률 개정에 착수하였다. 양반의 공음전 시법·삼원신수법 등을 제정하고, 전세의 율을 정하였으며 녹봉제를 제정하여 내치의 중요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 또한, 불교를 독실히 믿어 흥왕사를 비롯한 모든 사찰을 건립하고 왕자 후를 출가시켜서 대각 국사(의천)가 되게 하였다. 한편, 유학을 장려하여 최충의 9재를 비롯한 사학 12공도가 일어나게 하는 등 학문이 융성하게 하였다. 동여진이 자주 북방을 침입하였으나 회유책으로 이들을 무마시켰으며, 특히 송과 국교를 맺어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양주 삼천사의 대지 국사비 비문은 왕의 친필이다.

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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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宗(1414∼1452) 조선의 제5대 왕(재위 1450∼1452). 세종의 아들로, 1421년 세자로 책봉되어 20여 년간 세종을 도왔다. 즉위 후에 언로(言路)를 열어 민심을 파악하는 등 문무를 겸비하여 백성들의 신망이 컸다. 그러나 몸이 약해서 적극적으로 정치는 하지 못하고 재위 3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동국병감」을 찬술하고 「진법구편」을 친히 만들었다.

물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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勿稽子(196∼229)

신라의 장군. 내해왕 때 포상 8국(해안의 여러나라)이 가락국으로 쳐들어왔을 때 그들을 격파시켜 큰 공을 세우고, 이어 또 그들이 신라를 침범하여 갈화성을 공격했을 때도 큰 공을 세웠으나, 평민이어서 공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국가의 위기에 생명을 버려 싸워야 함에도 돌아왔음은 신하의 도리가 못 된다고 하며 머리를 푼 뒤 거문고를 들고 사체산에 들어가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미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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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川王(?∼331)

고구려 제15대 왕(재위 300∼331). 고추가 돌고의 아들로 봉상왕이 돌고를 죽이자 민가에 숨어 있었다. 봉상왕이 폐위된 후 왕이 되었으며, 303년 현도군을 쳐서 8천 명을 사로잡아 왔다. 또한 서안평과 대방군을 쳐서 합치고, 낙랑군을 멸망케 하였으며 요동의 모용씨와도 자주 싸웠다. 낙랑군·대방군을 합방하는 등 고구려의 영토 확장에 큰 공을 세웠다.

미추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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味鄒王(?∼284)

신라의 제13대 왕(재위 262∼283). 김알지의 후손이며 김씨 왕의 시조로 첨해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백제가 봉산성·괴산성을 침입하자 이를 물리쳤으며 백성들에게 농사를 적극 장려하였다.

민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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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謙鎬(1838∼1882)

조선의 정치가. 자는 윤익, 본관은 여흥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민씨 세도의 일원으로 권력을 잡고 여러 요직을 지냈다. 1880년 정치 제도 전반에 걸쳐 대개혁이 실시되자, 신식 무기에 의한 교련과 군제 개편을 단행한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고 선혜청 당상이 되었다. 별기군 창설로 차별대우를 받던 구식 군인이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강압적으로 진압하려다가 오히려 살해되었다.

민긍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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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肯鎬

조선 말기의 의병대장. 원주 진위대에 정교로 근무중, 고종이 물러나고 군대가 해산됨에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켜 관동 일대에서 다수의 왜병을 사살하였다. 이인영이 양주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가담하여 관동군 창의 대장이 되어 1백여 회의 전공을 세웠다. 치악산에서 왜병의 불의의 습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민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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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無疾(?∼1410)

조선의 무신. 민 제의 아들이며 민무구의 형이다. 제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좌명공신 1등으로 여성군에 피봉되고, 1403년 예문관 총제로서 왕명에 따라 「시전」을 자본으로 하여 구리로 활자 수십만 자를 주조하였다. 일찍이 정도전의 음모 사실을 방원에게 밀고한 바 있었다. 이 화 등의 탄핵을 받아 장단에 유배된 뒤 사약을 받아 죽었다. 다. 치악산에서 왜병의 불의의 습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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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 황후

민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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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哀王(?∼839)

신라의 제44대 왕(재위 838∼839). 성은 김, 휘는 명으로 원성왕의 증손이다. 상대등으로 있을 때 희강왕을 자살하도록 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불과 2년 만에 김우징(후의 신무왕)에게 살해되었다.

민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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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泳翊(1860∼1914)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우홍, 호는 운미, 본관은 여흥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오군란 때 민씨 척족의 거물로 지목되어 난군에게 집을 파괴당했다. 난이 수습된 후 사죄사절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 문화를 시찰했다. 갑신정변 때 자객의 습격을 받아 죽을 뻔하였으며, 일본에 망명중인 김옥균·서광범 등을 암살하기 위하여 자객을 밀파한 일도 있었다. 고종 폐위 음모에 관련되어 홍콩으로 망명, 상하이에서 죽었다. 행서를 잘 썼으며 묵란도에도 능하였다.

민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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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泳煥(1861∼1905)

조선 말기의 정치가·순국지사. 자는 문약, 호는 계정, 본관은 여흥이다. 민겸호의 아들로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이 되었으나, 아버지가 임오군란 때 피살되자 일시 퇴임하였다. 그 후 유럽 각국을 순방하면서 서양 문화에 감명을 받고 전반적인 개혁을 건의했으나 군제 개혁만 채택되었다.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하여 한때는 민씨 일파의 미움을 사 파면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기용되어 탁지부 대신·헌병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함께 백관을 인솔하고 이를 반대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민영환이 자결한 후 피묻은 옷과 칼을 마루방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듬해 열어보았더니 푸른 대나무가 솟아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충성심이 꺾으려 하여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로 변하여 살아난 것이라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민 충정공 유고」가 있다.

민영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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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泳徽(1852∼1936)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군팔, 호는 하정, 본관은 여흥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민씨 척족의 세력을 타고 요직을 거쳤다. 1884년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사대당 내각에 들어갔으며,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청의 위안스카이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 후 갑오경장으로 민씨 척족과 함께 실각, 임자도에 귀양가게 되었는데, 그는 탈출하여 중국으로 도망갔다. 이듬해 대사령으로 귀국, 중추원의장·표훈원 총재·헌병대 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정부에 의해 자작이 되었고 천일은행·휘문학교를 설립했다. 저서로 「향례삼선」이 있다.

민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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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宗植(1861∼?)

조선 말기의 의병장. 자는 윤조, 본관은 여흥이다. 고종 때 별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충남 정산에 은거하였는데, 높은 덕망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분개하여 이듬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에게 패하고 공주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 이후 풀려났다.

민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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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弼鎬(1898∼1963)

독립운동가. 호는 석린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911년 상하이로 건너가 박달학원·체신학교 등을 졸업하였다. 신규식이 조직한 '동제사'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대종교에 입교하여 민족운동을 일으켰다. 1919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거쳐 한국 독립당 선전부장이 되어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그 후 자유중국에 건너갔다가 1956년 귀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한중 외교 사화」가 있다.

문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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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

文周王(?∼477)

백제의 제22대 왕(재위 475∼477). 개로왕의 맏아들이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침입하여 개로왕이 전사하자 즉위하여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결단력은 없었으나 성품이 온유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신망이 높았다.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탐라와 친선을 도모하였으며 국정에 힘썼다. 해구를 병관좌평에 임명했으나 그에게 피살되었다. 「일본서기」에는 문주왕이 개로왕의 친동생이라고 되어 있다.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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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景利(1926∼)

여류 소설가. 충무에서 출생하여 진주여고를 졸업하였다. 1956년, 「현대문학」에 「흑흑백백」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듬해 「전도」 「불신시대」 「벽지」 등의 문제작을 발표하여 사회의식이 강한 작가로 주목을 끌었다. 1956년 현대문학 신인상, 1958년 김내성 문학상, 1972년 「토지」 1부로 월탄 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으로는 「표류도」 「기다리는 불안」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등이 있다.

박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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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敬元(1901∼1933)

최초의 여류 비행사. 대구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명여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가마다 비행학교를 졸업하였다. 1928년,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열린 고도 경기 대회에서 3등을 차지하여 2등 비행사가 되었다. 1933년 만주로 가는 비행을 하려고 준비하던 중, 우리나라를 들렀다 가려고 하다가 심한 안개로 비행기와 함께 추락하여 죽었다.

박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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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珪壽(1807∼1876)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환경, 호는 환재, 본관은 반남으로 박지원의 손자이다. 헌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철종 때 열하부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1862년, 진주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로 파견되어 사태 수습에 힘썼다.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가 대동강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자, 이를 공격하여 불태웠다. 1875년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 오자, 강화도조약을 맺게 하였다. 그는 당시 국제 정세에 밝아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문호를 개방할 것을 주장했다. 김옥균·박영효 등이 그에게서 개화사상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저서로 「환재집」 「환재수계」 등이 있다.

박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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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貴姬(1921~1993)

칠곡 출생. 가야금산조와 병창의 명인. 가야금병창으로 「중장망혜」, 「녹음방초」, 「사랑가」를 즐겨 불렀다. 본명은 오계화(吳桂花), 아호는 향사(香史)이다. 1957년 경상대 경제과를 수료했다. 손재광 문하에서 소리를 전문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화중선·박지홍·유성준에게 노래를 배웠으며, 강태홍·오태식에게 가야금병창을 배웠다. 19세 때 음반을 취입했고, 광복 후에는 김소희와 함께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해 공연 활동을 했다. 1955년 김소희·박초월·한영숙과 함께 한국예술학원을 설립해 초대 원장이 되었다. 1960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의 전신인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해 1973년에 이사장을 지냈다.

박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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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東奎(1939~ )

평론가. 경북 월성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박사과정 수료. 서울대학교 교수. 1962년 「현대문학」에 「카오스의 질서화작용」 「언어·성격·행동」으로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주로 분석비평적(分析批評的) 방법을 취하며 대표작으로 「현대소설기술」 및 「구조론」이 있다.

박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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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東說(1564∼1622)

조선의 정치가. 자는 열지, 호는 남곽, 본관은 반남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을 지내었다. 황주 목사로 있을 때, 부역에 공평하여 민폐가 없었으므로 백년 만에 처음 맞는 어진 정치가라는 칭송을 받았다. 후에 대사성으로서 광해군의 포악함을 상소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진하여 나주 목사가 되어 다스리기 어려운 곳에 학문의 풍토를 심어 놓았다. 이이첨의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옥에 갇혔으나 중풍으로 풀려난 뒤 죽을 때까지 은거하였다.

박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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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東鎭(1916~ )

판소리 명창. 충남 공주 출생. 「흥보가」를 5시간 동안 완창해 완창 판소리붐을 일으켰다. 김창진을 비롯한 여러 스승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196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취임했고, 판소리 다섯 마당을 모두 공연했다. 또한 「숙영낭자전」, 「옹고집타령」, 「변강쇠타령」을 완창했고, 창작 판소리 「이순신장군」을 발표했다. 서울신문사 문화상·국민문화은관훈장, 서울특별시 문화대상, 한국방송공사가 주최하는 국악대상을 수상했다.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으며 현재 국립국악원 지도위원으로 있다.

박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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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斗世(1654∼?)

조선의 문신. 자는 사앙, 본관은 울산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그의 수필집 「요로원 야화기」에서 혁신적인 비판 정신으로 당시의 사회 정책·제도를 문답 형식으로 날카롭게 풍자하였으며 「삼운통고보유」도 편찬하였다.

박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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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斗鎭(1916∼1998)

시인. 호는 혜산이며,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다. 1939년, 「문장」 지에 「향현」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박목월·조지훈과 함께 '청록파'로 불린다. 처음에는 자연을 주제로 한 시를 썼으나 차차 광복의 감격과 생명감 있는 시를 썼다. 연세대·이화여대·감리교 신학대학 등에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혜산 시문학 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자유문학상과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청록집」 「박두진 시선」 「시인의 고향」 등이 있다.

박목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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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木月(1917∼1978)

시인·아동문학가. 본명은 영종이며, 경북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대구 계성고보를 졸업하였으며, 「아동」·「여학생」 등 잡지사 주간을 지냈고, 서울대·홍익대·한양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1939년 「문장」 지 추천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처음에는 동요 동시를 써 우리나라 아동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청록집」에서는 압축적이고 세련된 시어 속에 자연을 통한 향토적 서정과 애수를 그렸다. 후에는 민요풍의 가락과 목가적이고 애수적인 감미로운 서정시를 써서 주목을 받았다. 아시아 자유문학상·5월 문예상·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여받았다. 저서로 「청록집」 「산도화」 「난·기타」 등이 있다.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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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文秀(1691∼1756)

조선의 정치가. 자는 성보, 호는 기은, 본관은 고령이다. 경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다. 1727년, 영남 암행어사로 등용되어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으며,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평정하고 영성군에 봉해졌다. 1730년 호서 어사가 되어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힘썼으며, 진주 부사로 청에 다녀왔다. 1741년 함경도 진휼사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 와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후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의 폐단을 논하다가 충주 목사로 좌천되었으며, 왕세손이 죽자 약방 제조로 책임을 추궁당하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특히 군정과 세정에 밝았고 암행어사 때에 많은 일화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박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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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犀

고려의 무신. 본관은 죽산이다. 1231년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몽고 장수 살리타이가 침입하자, 김경손·김중온 등과 함께 공격해 오는 몽고군과 한달 동안이나 격전을 벌인 끝에 이를 물리쳤다. 귀주를 버리고 개성을 먼저 함락, 고종의 항복을 받고 군세를 가다듬어 귀로에 다시 귀주를 공격하는 몽고군을 다시 대파하였다. 이때 그에게 왕명으로 최임수·민희 등이 와서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왕명을 어기지 못해 항복하였으며, 그 후 문하평장사에까지 이르렀다.

박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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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世采(1631∼1695)

조선의 정치가·유학자. 자는 화숙, 호는 현석, 본관은 반남이다. 18세 때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이 이·성 혼의 문묘 종사에 대하여 반대하는 자들을 공격하다가 효종의 꾸지람을 듣고서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김상헌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송시열과도 학문 교류를 하였다. 그는 소론으로 당쟁에 끼여들었으나 황 극 탕평설을 주장하면서 당쟁의 근절에 노력하였다. 그는 당대의 유종(儒宗)으로서 특히 예학에 밝았다. 많은 저술 외에 70여 권의 문집,논어·맹자의 찬요, 유현들의 사우 연원을 수록한 책 등 후진들에게 귀중한 문헌을 남겼다. 저서로 「범학전편」 「남계집」 「삼례의」 등이 있다.

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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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壽根(1914∼1965)

화가.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하였다. 1932년 제11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화단에 등장하였다. 해방 후 월남하여 1952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 미술협회전람회에서 입상하였다. 1958년 이후 미국 월드 하우스 화랑·조선일보사 초대전·마닐라 국제전 등에 출품하는 등 국내외 미술전에 여러 차례 참가하였다. 1959년에 제8회 국전 추천 작가가 되었고, 제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이 되었다. 그의 작풍은 회백색을 주로 하여 단조로우면서도 한국적 주제를 소박한 서민적 감각으로 충실하게 다루었다.

박수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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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守良(1491∼1554)

조선의 정치가. 자는 군수, 본관은 태인으로 장성에서 출생하였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장령을 지냈다. 1546년,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좌참찬 벼슬이 내려졌으나 노모의 봉양을 위해 이를 사양하였다. 그 후 벼슬이 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주세붕과 깊이 교류하여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청렴결백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박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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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淳(?∼1402)

조선의 무장. 본관은 음성이다. 1388년 요동 정벌 때 이성계 휘하에서 종군, 위화도 회군에 앞서 이성계의 명으로 회군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우왕에게 갔으며,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상장군이 되었다. 이성계가 여러 왕자를 죽이고 등극한 태종을 미워하여 함주(함흥)에 머물고 있자, 수차 사자를 파견하여 귀환을 요청했으나 모조리 사자를 죽이므로 태조와 친분이 두터운 그가 사자 되기를 자원하였다. 1402년 그는 함주에 내려가서 귀환하겠다는 태조의 확약을 받고 귀로길에 올랐다. 한편 그를 쫓아가 죽이자는 측근들의 간청에 못 이긴 태조는 그가 강을 건넜을 무렵, 신하들의 청을 허락하면서 강을 건너갔으면 쫓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박 순은 도중에 급병으로 지체하다가 간신히 배를 탔으나, 결국 뒤를 쫓아온 사람들에게 붙잡혀 살해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함흥차사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태종은 그에게 관직과 토지를 내렸으며, 그의 고향에 충신·열녀의 두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박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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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順天(1898~1983)

여류정치가. 본관 밀양. 본명 명련(命連). 부산 출생. 1917년 동래의 일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년 마산의 의신여학교 교사로 있을 때 3·1운동에 참가하여 지도적 활동을 하다가 수배되어 일본으로 피신, 그곳 요시오카(吉岡) 여자의학전문에 편입하였으나 1년 후 수배인물임이 탄로나 체포되었다. 출감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26년 니혼여대(日本女大) 사회사업과를 졸업한 후 28세에 결혼하였다. 경북 고령의 시댁에서 농사를 돕다가 39년 상경하여 이우(李禑)공의 소유 건물인 벽돌집을 매수하여 경성가정여숙(京城家政女塾)을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열중하다가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45년 중앙여중 부교장이 되었고, 47년부터 독립촉성애국부인회 회장을 겸하다가 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감찰위원에 임명되었으며, 50년까지 「부인신문」 사장, 대한부인회 회장,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등을 역임하고 50년부터는 2·4·5·6·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한국 여성정치인의 제1인자가 되었다. 69년 통일원 고문, 72년 근명학원(槿明學園) 이사장, 중앙여고 이사 등에 취임하였고, 76년에는 육영수여사추모사업회 이사장이 되었으며, 80년부터 83년까지 국정자문위원을 역임했다.

박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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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承宗(1562∼1623)

조선의 문신. 자는 효백, 호는 퇴우당, 본관은 밀양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교·병조정랑 등을 지냈으며, 1600년 동지사로 명에 다녀왔다. 그 후 부제학 형조판서 좌의정·영의정이 되었으며, 1619년 이이첨의 무리들이 경운궁의 인목 대비를 죽이려 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이들을 저지시켰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손녀가 광해군의 세자빈이 되어 그 일족이 오랫동안 권세를 누린 사실을 자책하여 아들과 함께 목매어 죽었다.

박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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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昇煥(1869∼1907)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 구한국군 참령으로 시위 연대 제1대대장으로 재직중에, 1907년 고종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왕위를 양위당하자 궁중에 돌입하여 복위 운동을 펴려다가 고종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 중지하였다. 이 해 8월 군대 해산을 위해 대대장 이상의 장교를 일본군 사령부에 집합시키자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고 서소문 병영에 머물러 있다가 군대 해산령이 내리자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박에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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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1910)

최초의 여류 의사·박사. 본성은 김이며 한자명은 애시덕(愛施德), 본관은 광산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이화학당에 다니다가 미국 선교회의 장학금으로 남편 박씨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남편이 죽자 귀국하여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에서 무료 진찰을 하면서 맹아학교와 간호학교를 세웠다. 고종은 그의 업적을 찬양하여 은메달을 수여하였다.

박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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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堧(1378∼1458) 조선의 음악가. 자는 탄부, 호는 난계, 본관은 밀양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지평·문학을 지냈다. 세종이 즉위한 후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의 정리와 악보 찬집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받았다. 1427년 편경 12매를 제작, 자작한 12율관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로 연주하게 하였다. 박 연은 아악을 궁정의 조회에도 향악 대신 쓰자고 왕에게 건의하여 1430년 아악의 악기와 악보를 편찬하였다. 또한 종묘 제향 음악의 잘못된 점을 들어 종묘 아악에 쓸 악기를 만듦으로써 종묘악을 개정하였는데, 그가 개정한 제향악은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1445년 성절사로 명에 다녀와서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으며, 1453년 계유정난 때는 아들이 처형되었으나, 그는 3대에 걸쳐 왕을 섬긴 원로로 죽음을 면하고 파면되어 고향에 내려갔다. 그는 피리의 명연주가였으며, 신라의 우륵, 고구려의 왕산악과 더불어 3대 악성으로 불린다. 저서로 「난계유고」 「가훈」 등이 있다.

박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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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淵(1595∼?) 조선의 전술교관. 인조 때 귀화한 네덜란드 사람으로 본명은 벨테브레이다. 1628년 일본으로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되어 물을 구하려고 상륙했다가 붙잡혀 서울로 와서 우리나라 여자와 결혼하였다. 훈련도감에 예속되어 호란 때에 대포를 만들고 전술을 가르쳤다. 1653년 네덜란드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하여 왔을 때, 통역을 맡고 우리나라의 풍속·지리 등을 설명해 주었다.

박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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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榮濬(1911~76)

소설가. 호는 관우. 평남 강서 출생. 연희전문 문과 졸업. 1934년 단편 「1년」이 「신동아」에, 「모범경작생」이 「조선일보」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한 후 「어머니」 「목화씨 뿌릴 때」 등 주로 농촌 소설을 발표하였다. 해방 뒤에는 「경향신문」 등에 근무하며 주로 소시민 생활의 윤리적인 면을 강조한 소설을 발표하였다. 작품으로는 장편에 「아름다운 길」 등이 있고, 단편집으로 「목화씨 뿌릴 때」(1947) 등이 있는데, 1953년 단편집 「그늘진 꽃밭」으로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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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泳孝(1861∼1939)

조선의 정치가. 자는 자순, 호는 현현거사이며 철종의 사위이다. 13세 때 철종의 딸 영혜 옹주와 결혼하여 금릉위가 되었다. 유대치를 중심으로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 개화당 요인들과 함께 정치적 혁신을 부르짖고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고자 하였다. 1882년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처음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1884년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청의 개입으로 3일 만에 개화당 내각이 무너지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때 귀국하여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이 되었다. 1907년에는 이완용 내각의 궁내 대신이 되었으며, 대신 암살 음모 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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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英熙(1901∼?)

시인·평론가. 호는 회월·송은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배재고보를 거쳐, 일본 도쿄 세이코쿠 영어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21년 황석우와 함께 시 동인지인 「장미촌」을 발간하면서 시를 발표했고, 1922년 「백조」의 동인으로 「미소의 허영시」 「꿈의 나라로」 등 상징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였으나, 1925년 「개벽」지에 단편 「사냥개」를 발표하면서부터 신경향파에 속하게 되었다. 이 해 김기진·최학송 등과 조선 카프(KAPF:프로 예술동맹)를 조직, 그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 후 대표적인 극좌 평론가로 목적 의식론을 제창, 다수의 평론을 발표하여 카프 계열의 대변자도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고, 이론보다 예술을 찾고자 1933년 카프를 탈퇴하고 순수 예술로 전향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작품으로는 시 「유령의 나라」 「어둠 너머로」, 소설 「전투」 「지옥 순례」 등이 있다.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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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婉緖(1931~ ) 소설가.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문과 졸업. 1970년에 「여성동아」에 장편 「나목」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했다. 이후 「어떤 나들이」(1971),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1972), 「부처님 근처」(1973), 「지렁이 울음소리」(1973),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1974), 「휘청거리는 오후」(1977), 「그 가을 사흘 동안」(1980),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3), 「엄마의 말뚝」 등 섬세하고 유머있는 문체와 사실성을 바탕으로 한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했다. 제25회 동인문학상, 제38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수많은 독자를 둔 대중 인기 작가이면서 문학성도 높은 작품을 써서 우리 시대의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평가받는다.

박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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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容萬(1881∼1928)

독립운동가·언론인. 호는 우성이며,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미국으로 가서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정치와 사관학교 과목을 공부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 군단을 창설하고 이듬해 「미국 혁명사」를 한글로 번역, 출판하였다.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 동맹회에 참석하였으며, 「태평양 시사」를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 1925년, 하와이에서 열린 태평양 연안 국제신문 기자대회에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이듬해 군사운동의 근거지 확충을 목적으로 베이징에 대본공사를 설립하는 한편, 1927년 초등 국어 교과서를 편찬하여 교포의 국어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1928년 베이징에서 암살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박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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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龍喆(1904~1938)

호는 용아(龍兒). 시인. 전남 광주 출생. 동경 아오야마 학원과 연희전문에서 수업. 순수시 동인지 「시문학」(1930)과 문예지 「문예월간」(1931)을 출자 간행, 정지용, 신석정, 김영랑, 이하윤 등과 함께 경향파에 대립하여 순수시 운동을 전개했고 극예술운동회 동인으로 활약했다. 그의 시는 릴케와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아 회의·모색·상징 등의 그 주조를 이루었으며, 작품에 시·번역시·평론을 모은 「박용철 전집」이 있다.

박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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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장군. 본관은 밀양으로 우왕 때 김해 부사가 되었으며,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한 후, 최 영을 몰아내고 경상도 도순문사가 되었다. 그는 전함 백 척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쳐서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그 후 판자혜 부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추대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양광도 절도사가 되어 왜구를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박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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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殷植(1859∼1926)

독립운동가. 자는 성칠, 호는 백암이며, 황주에서 출생하였다. 1898년 장지연·남궁억·신채호 등과 「황성신문」 창간에 참여하여 주필이 되었다. 3·1운동 후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애국노인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투신하는 한편, 고구려의 유적지를 답사하고 고대사와 고구려 위인전의 저술에 힘썼다. 그 후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신문」 「한족회보」 등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1925년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이듬해 대통령이 되었다가 이 해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직에서 퇴임하고 병사하였다. 그의 저서 「한국통사」와 「한국 독립운동지혈사」는 우리나라 최근세사와 의병 활동 등에 관한 귀중한 사료로 되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조선 고대사고」 「동명왕실기」 「발해 태조실기」 등이 있다.

박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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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彛敍(1561∼1621)

조선의 문신. 자는 서오, 호는 비천, 본관은 밀양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찰사 종사관이 되어 황해도 지방의 군사를 맡았으며, 이이첨을 탄핵하다가 파면되어 여강에 은거하였다. 그 후 영광 군수로 있을 때, 전라도 관찰사 이창준의 탐학 행위에 실망한 나머지 벼슬을 내놓았다. 다시 복직되어 진위사로 명에 다녀오던 중 풍랑을 만나 행방불명되었다.

박인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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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寅亮(?∼1096)

고려의 학자. 자는 대천, 호는 소화, 본관은 죽산이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청환직을 지냈다. 1075년 요가 압록강 동쪽을 국경선으로 삼으려 하자, 진정표를 지어 올림으로써 요 황제가 그 문장의 훌륭함에 감탄하여 그들의 주장을 철회하였다. 1080년에 유 홍·김 근 등과 송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도 시문으로 크게 격찬을 받아, 김 근의 글을 합친 「소화집」을 중국인이 발간하였다. 문장이 아름다워 중국에 보내는 많은 외교 문서를 담당했으며 「고금록」 10권을 편찬하였다. 신라시대의 설화를 모은 「수이전」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박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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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仁老(1561∼1642)

조선의 문인. 자는 덕옹, 호는 노계, 본관은 안동이다. 영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시에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세아의 밑에서 별시위가 되어 왜군을 무찔렀다. 1598년 왜군이 퇴각할 때 병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태평사」를 지었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선전관 등을 지냈으나, 후에 사직하고 고향에 가서 독서와 시작에 전념하였다. 그는 도학과 조국애·자연애를 사상적 바탕으로 천재적인 창작력을 발휘하여, 전쟁중에서도 시정과 우국애가 넘치는 작품을 썼다. 무인다운 기백과 신선미로서 화려한 시풍을 이룩한 그는, 송강 정 철을 계승하여 가사문학을 발전시키는 데 큰 공로가 있었으며, 시조 10여 수가 전한다. 저서로 「노계집」이 있다.

박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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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寅煥(1923∼1956)

시인.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양 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8·15광복 후 서울에서 서점을 경영하였고, 1947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있으면서 미국을 시찰하였다. 「후반기」의 동인이 되어 모더니즘 운동에 참가하였다. 비평성과 서정성의 조화를 꾀했으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는 「목마와 숙녀」라는 시로 더욱 유명하다. 시집으로 김수영 등과 함께 발간한 「새로운 도시와 시민의 합창」 「박인환 시선」 등이 있다.

박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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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在森(1933∼1997)

시인.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를 중퇴하였다. 현대문학 편집위원·대한일보 기자 등으로 있다가 195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처음에는 시조를 쓰다가 시로 전환하였다. 섬세한 언어 연마를 통한 민족 정서의 재현이 작품의 주조를 이루었다. 1956년 현대 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시집 「춘향이 마음」 「햇빛 속에서」 등이 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 사망하였다.

박정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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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定陽(1841∼1904)

조선 말의 정치가. 자는 치중, 호는 죽천, 본관은 반남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 등을 지냈으며,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선진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894년 김홍집 내각 때 학부대신이 되었으며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석하여 시정의 개혁을 약속했으나 수구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는 진보적인 개화사상의 소유자로서 이상재 등 개화파에 속하는 인사들을 많이 돌보아 주었다. 저서로 「죽천고」 「해상일기초」 등이 있다.」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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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1917∼1979)

정치가·제5∼9대 대통령. 경북 선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잠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만주로 건너가 만주 군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되었다. 1953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고 미국 포병학교 고등 군사반 과정을 수료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여 4·19혁명 후의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았다. 이어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 계엄 부사령관,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이듬해 군에서 퇴역하고 공화당에 입당하여 총재가 되었다. 그 해 제5대 대통령,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국가 안보회의 의장이 되었다.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기획 실천하여 조국 근대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고속도로를 만들어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들었으며,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통일 주체 국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또한 자조·근면·협동의 새마을 정신을 고취함으로써 국민 정신을 불러 일으켰다. 제8대 대통령을 거쳐 제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었다. 저서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등이 있다.

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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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齊家(1750∼1815)

조선의 실학자. 자는 차수, 호는 초정, 본관은 밀양이다. 19세 때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하였다. 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의 실학자와 교류하며 함께 지은 시집 「건연집」이 청에 소개되어 조선의 시문 4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에 가서 그곳 학자들에게서 새학문을 배워 귀국한 뒤,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실생활에 있어서의 기구와 시설의 개선점을 다루고 정치·사회 전반에 대한 모순점을 지적하여 개혁 방안을 서술하였다. 이듬해 왕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많은 책을 편찬해 냈으며, 동지사를 수행하여 청에 다녀왔다. 1794년 춘당대 무과에 장원으로 뽑혀 이듬해 영평 현감으로 나갔다. 1801년 사은사를 따라 청에 다녀왔을 때, 사돈인 윤가기 사건에 관련되어 함북 종성으로 귀양갔다가 4년 만에 풀려 나왔다. 저서로 「명농초고」 「정유시고」 등이 있다.

박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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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堤上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삽량주의 간으로 있을 때 지혜와 용맹으로 이름을 떨쳤다. 실성왕 때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일본에, 미사흔의 형 복호는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었는데, 417년 눌지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에 들어가 복호를 데려왔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왕에게 신임을 얻은 후, 미사흔과 함께 낚시를 하는 척하다가 미사흔만 배에 태워 신라로 탈출시키고 그는 혼자 남아 체포되었다. 일본 왕이 신하가 되어 주기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불로 지지는 형을 받고 죽었다. 그의 충성심에 감동한 눌지왕은 그의 딸을 미사흔과 결혼시켰다. 한편 그의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돌부처가 되었는데, 이 바위는 '망부석'이라고 불린다.

박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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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齊純(1858∼1916)

조선 말기의 매국노. 호는 평재이며 본관은 반남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참판 등을 지냈다. 1899년, 전권대신으로서 한·청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901년 필리핀 및 벨기에와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청 주재 전권공사로 갔다가, 1904년 귀국하였다. 이듬해 을사조약에 조인하여 5적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09년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어 한일합방 조약에 서명하고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칭호를 받았다.

박종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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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鍾鴻(1903∼1976)

철학자.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경성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거쳐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여러 예술 단체의 중심 인물로 크게 활약하였다. 그의 철학적 신념은 “모든 행동은 철학과 지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지성은 반드시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서로는 「인식 윤리학」 「철학적 모색」 「부정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박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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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鍾和(1901∼1981)

소설가. 호는 월탄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922년 「백조」 동인으로 문단에 등장하여 이후 시와 역사 소설을 많이 발표하였다. 1935년 「금삼의 피」를 매일신보에 연재하였으며, 「아랑의 정조」 「다정 불심」 등을 썼다. 서울신문사 사장, 성균관대학교 교수, 예술원 회장 등을 지냈으며, 1965년 '월탄 문학상'을 제정하였다. 그는 민족과 전통 의식을 신앙처럼 지녔으며, 사실에 입각한 역사소설에 큰 공적을 남겼다. 제1회 예술원 문학공로상과 문화 훈장을 받았다. 저서로 「목 매는 여인」 「여명」 「임진왜란」 등이 있다.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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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趾源(1737∼1805)

조선의 실학자·소설가. 자는 중미. 호는 연암, 본관은 반남이다. 실학자 홍대용에게서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다. 정조 때, 홍국영에 의해 벽파로 몰려 연암협으로 이사하여 독서에 전념하다가, 진하사 박명원을 따라 청에 가서 중국인의 이용 후생하는 실생활을 보고 실학에 뜻을 두었다. 당시 홍대용·박제가와 함께 북학파의 영수로 청의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실학사상을 소개하였다. 그는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양반들이 실속 없이 허울 좋은 이름만 내세우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10편의 한문 소설을 지어 독특한 해학으로써 이들을 풍자하였다. 그의 사상이 가장 많이 나타나 있는 「허생전」은 살기 좋은 나라를 건설하려는 꿈을 그린 소설이다. 후에 그는 「과농소초」라는 농업 연구책을 지어 정조에게 바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저서로 「연암집」 「양반전」 「호질」 「한민명전의」 등이 있다.

박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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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忠元(1507∼1581)

조선의 정치가. 자는 중초, 호는 낙촌, 본관은 밀양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영월 군수 등을 지냈다. 1545년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여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3년 성절사로 명에 다녀왔으며, 이 황의 뒤를 이어 대제학을 지내고 이듬해 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밀원군에 봉해졌다.

박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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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泰輔(1654∼1685)

조선의 문신. 자는 사원, 호는 정재산인, 본관은 나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을 지냈다. 예조좌랑으로 있을 때 남인의 모함을 받아 선천에 귀양갔다가 복직되었다. 성품이 결백하여 아부를 하지 않았으므로 시기하는 자가 많았으나,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조좌랑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 지방을 시찰할 때 폐단을 시정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689년 기사환국 때에 서인으로 인현 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귀양가는 도중 죽었다. 숙종은 후회를 하고 이조판서에 추증하였다.

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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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泰俊(1900~1986)

작곡가. 경북 대구에서 태어나 미국 터스컬럼 웨스트민스터 음대 및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연세대 종교 음악과를 창설하였으며, 많은 작곡을 하여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예술원 음악공로상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64년 연세대 음대 학장을 지냈으며, 작품으로 「오빠생각」 「집 생각」 「사우(思友)」 등 150여 곡이 있고, 동요곡집으로 「중중때때 중」, 가곡집으로 「박태준 가곡집」 등이 있다.

박팔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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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八陽(1905~?)

시인.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 서울 배재고보를 거쳐 경성법학 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법전 졸업 후에 여러 신문사에서 기자로 활약하고, 1973년 만주 신경으로 가서 「만주일보」 기자 생활을 하던 중 시집 「여수시초」를 발간한다. 그는 일찍이 카프의 창립멤버로 문단에 등단했는데 등단작품은 「신(神)의 주(酒)」로 알려진다. 광복 후 다시 좌익계 신문을 만들면서 1945년 9월 30일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참여,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했다. 1956년 「박팔양시선집」을 발행했고, 1962년에는 집체작 「인민은 노래한다」를 발표하는 등 북한 문단의 한 지도자로서 활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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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彭年(1417∼1456)

조선의 학자로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 본관은 순천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다. 황보 인·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과 단종을 보필하였다. 수양 대군이 황보 인·김종서·안평 대군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후, 그를 형조참판에 임명하였으나, 성삼문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 질의 밀고로 잡혀 처형되었다. 후에, 숙종은 그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절개를 표창하였다. 저서로 「취금헌 천자문」이 있다.

박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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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苞(?∼1400)

조선의 역장. 조선 태조의 넷째 아들 방간은 정종의 적사가 없으니 자기가 왕위를 계승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나, 다섯째 아들 방원(태종)의 세력이 커져 가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때 그는 지중추 원사로 있었는데, 일찍이 정도전의 난에 방원을 도와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논공이 박함을 불평하다가 죽수(충북 영동)로 귀양갔었다. 이에 불만을 품어 방간을 충동하여 거병하였으나, 방원의 군사에게 패하여 방간은 토산으로 귀양갔으며, 박 포는 선동한 죄가 무섭다 하여 참수되었다.

박혁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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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赫居世(기원전 69∼기원후 4)

신라의 시조(재위 기원전 57∼기원후 4). 왕호는 거서간이고 국호는 서라벌이며, 왕비는 알영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의 소벌공이 어느 날 숲속에서 말의 울음소리를 듣고 다가갔더니 그 자리에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는데, 그알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고 한다. 그 아이가 10여 세가 되자, 기골이 준수하고 크게 될 인물이므로 6부 사람들이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17세 때, 왕비를 맞아들이고 6부를 돌면서 백성들에게 농사와 누에 치기를 권장하였다. 기원전 28년 낙랑이 침범하였으나,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으며 곡식더미가 들에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의 나라라 하여 스스로 물러갔다 한다. 도읍을 금성이라 정하고 궁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웠다. 사람들은 박과 같이 큰 알에서 나왔다고 하여 박씨라는 성을 붙였고, 또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에서 '혁거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박화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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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和穆(1924∼)

시인·아동문학가. 황해도 황주에서 출생하였으며, 만주로 건너가 봉천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41년 「아이생활」에 동시 「피라미드」와 「겨울밤」이 추천되면서부터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기독교 방송국 편성국장·아동 문학회 부회장·크리스찬 문학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시집으로 「시인과 산양」 「주의 곁에서」 등이 있으며, 동화집으로 「꽃 잎파리가 된 나비」 「부엉이와 할아버지」 등이 있다.

박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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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花城(1904∼1988)

여류 소설가. 전남 목포에서 출생하였으며, 숙명여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여자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조선문단」에 「추석 전야」가 발표되면서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 후 「사랑」 「타오르는 별」 등 많은 장편을 썼다. 초기 작품은 경향 문학적 색채가 짙고, 후기 작품은 도시의 애정론을 다룬 장편이 많다. 1970년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고향 없는 사람들」 「눈보라의 운하」 등이 있다.

박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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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孝寬

조선 말기의 가객. 자는 경화, 호는 운애이다. 1876년 제자인 안민영과 함께 「가곡원류」를 편찬하였다. 이것은 옛것의 답습에 불과하였으나, 당시까지의 가요곡을 총정리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흥선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으며, 당시의 풍류객들이 모인 승평계의 중심 인물이었다. 시조 13수가 「가곡원류」에 전한다.

박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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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熙道(1889∼1951)

독립운동가.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으며, 감리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조선 크리스트 중앙 청년회 간사를 지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에 참가하여 운동을 지도하다가 체포되어 2년형을 받았다. 그 후 월간지 「신앙생활」의 주필로서 일본에 대한 항쟁을 하다가 「신앙생활」이 폐간되고 투옥되었다. 1929년, 경성보육학교를 세워 어린이 교육에 힘썼다. 후에 변절, 잡지 「동광」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친일행위를 하여 1948년 반민특위에 의하여 친일파로 체포되었다.

반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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盤屈(?∼660)

신라의 화랑. 성은 김씨이며, 660년 무열왕 때 백제를 멸망시킨 황산벌 싸움에서 아버지 흠순의 뜻을 받들어 충효로써 싸움에 임할 것을 맹세하고 홀로 적진에 쳐들어가 용감히 싸운 끝에 죽었다. 관창과 함께 신라군의 사기를 높여 황산벌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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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定煥(1899∼1931)

아동문학가·사회 사업가. 호는 소파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신청년」 「녹성」 「신여자」 등의 잡지 편집을 맡아보았고, 3·1 운동 때에는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돌리던 중 체포되었다가 풀려나왔다. 1921년 어린이에 대해 존대말 쓰기 운동을 벌였으며, 이듬해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발행하고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이어서 일본 유학생인 손진태·윤극영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고 5월 1일을 첫 어린이날로 제정하였다. 1924년 전국 소년 지도자 대회를 개최하여 어린이 단체의 단합을 꾀했으며, 동화 대회를 개최하였다. 1928년 세계 아동 미술 전람회를 개최하였으며, 새로운 월간 잡지 「혜성」을 발간했으나 지병이던 신장염과 피로가 겹쳐 죽었다. 1957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소파상'이 제정되었다. 저서로 「소파전집」이 있다.

배극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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裵克廉(1325∼1392)

조선의 개국 공신. 자는 양가, 호는 주금당·필암, 본관은 경산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 목사·합포진 첨사 등을 지냈다. 우왕 때 경상도 도순문사로 진주에 쳐들어온 왜구를 대파하고, 이후 이성계의 밑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였다. 1388년 조전 원수로 위화도에서 이성계 등과 회군을 결행하였으며 최 영 등의 구세력을 제거하였다. 1392년 우시중으로 조 준 등과 모의하여,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 공신 1등이 되었다.

배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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裴祥明(1906∼1986)

여류 교육자.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 고등기예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 대학교 교육학부에서 수학, 미시간 대학교 영어 속성과를 수료하였다. 1937년 상명여중고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고, 1945년 상명학원 창설 이사가 되었다. 1964년 서울시 교육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문화 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65년 상명여대 사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배중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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裵仲孫(?∼1271)

고려의 무장으로 삼별초의 반란 지휘자. 1270년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한 후, 몽고에 대항하는 세력을 없애기 위해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자, 야별초 지유 노영희와 공모하여 승화후 온을 왕으로 내세우고 강화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탈자가 속출하여 경계가 어렵게 되자,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궁궐을 세운 후 남해 연안과 각 도서·나주·전주까지 출병하여 관군을 격파하고 해상왕국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상장군 김방경과 몽고의 흔도가 거느린 여·몽 연합군의 총공세로 진도가 함락당하고, 그는 전사하였다. 이후 남은 군사들은 제주도로 건너가서 최후의 항쟁을 벌이다가, 1273년 마침내 평정되었다.

배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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裵玄慶(?∼936)

고려의 개국 공신. 경주 배씨의 시조이며, 남달리 담력이 있었고 일개 병졸로 시작하여 대광에 이르렀다. 신숭겸·복지겸 등과 같이 모의하여 궁예를 내쫓고 왕 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고려가 개국되자 1등 공신이 되었으며, 후에 태조가 사방을 정복할 때 큰 힘이 되었다.

배흥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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裵興立(1546∼1608)

조선의 장군. 본관은 성산으로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선을 만들어 큰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칠천도 싸움에서 단 한 척의 배로 적의 진격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이어 한산도대첩과 행주대첩 때에도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고향에 그를 기리는 정문이 세워졌다.

백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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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建宇(1946~ )

세계적인 피아노 연주자. 모리스 라벨의 작품 해석에 뛰어나다. 1968년 줄리어드 음악학교(피아노 전공)를 졸업했다. 1965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제3번」을 연주하여 데뷔했으며, 메트로폴리탄 콩쿠르에서 특별상을, 이탈리아 볼자노 국제콩쿠르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그 후 세계의 유명한 교향악단과 협연했으며, 유럽 순회 공연을 가졌다. 영화배우 윤정희와 결혼했으며, 80년 이후 프랑스 파리에 살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활발한 연주 활동을 벌이고 있다.

백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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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結先生

신라 때 거문고의 명수. 자비왕 때 경주 낭산 기슭에서 살았다. 몹시 가난하여 옷을 백 군데나 기워 입었기 때문에 백결 선생이라 불리었다. 거문고를 타면서 세상의 근심을 잊곤 하였다. 섣달 그믐날 아내가 이웃집 떡방아 소리를 부러워하자, 떡방아 대신에 아내에게 들려준 떡방아 소리인 「대악」으로 특히 유명하다.

백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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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寬洙(1889∼?)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근촌이며 본관은 수원이다. 고창에서 출생하였으며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여 1년간 복역하였다. 1927년 하와이에서 열린 만국 기독교 청년회 주최 제2차 태평양 회의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였다. 1937년 동아일보사 사장이 되었고 광복 후에는 법제 사법 위원장·헌법 제정의원을 지냈다.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백낙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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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樂莘 조선의 탐관. 철종 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진주에 부임한 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윤명 등이 무리를 모아 민란을 일으켜 관리를 죽이고 관청을 파괴하였다(진주민란). 백낙신은 파면되어 고금도로 유배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고종 초에 다시 등용되어 병인양요 때에 영종진과 행주를 방어하였다.

백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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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樂濬(1895∼1985)

교육자·역사학자. 호는 용재이며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미국 파크 대학교 역사과와 프린스턴 신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27년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연희대학 총장,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1950년에 문교부 장관, 서울시 교육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그 후에 연세대학교 명예 총장이 되었으나, 1985년 지병으로 죽었다. 저서로 「한국의 현실과 이상」 「시냇가에 심은 나무」 등이 있다.

백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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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樂晴(1938~ )

문예비평가·영문학자. 평북 정주 출생. 서울에서 경기고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건너가 브라운 대학에서 영문학·독문학을 전공, 1972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63년에 귀국하여 서울대 문리대에서 강의를 맡고 65년부터 신문·잡지 등에 문학평론을 발표하기 시작, 66년 1월에 한국 최초의 문예 계간지 「창작(創作)과 비평(批評)」을 창간하여 문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의 「시민문학론」, 그리고 리얼리즘을 토대로한 수편의 「민족문학론」 등은 70년대 한국 비평문학에서 두드러지는 공헌이다. 현재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창작과 비평」 편집인으로 있다. 저서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역서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社會史)」 등이 있다.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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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南準(1932~ )

전위예술가. 서울 출생. 비디오 신시사이저(전자제어기)를 개발하여 텔레비전 수상기를 작품에 이용하는 새로운 미술 세계를 열었다. 1950년 일본 도쿄대학에 들어가 음악과 음악사·미술사를 전공했다. 1956년에 도쿄대학을 졸업한 뒤 독일 뮌헨으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했다. 독일에서 전위예술가들이 참여하는 플럭서스(Fluxus:흐름)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면서 전통 음악에 대해 반발하는 행위음악으로 실험예술에 깊이 빠져들었다. 다다이즘 정신을 이어받고, 우연과 침묵을 강조하는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예술의 표현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오늘날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해프닝(happening)과 같이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의 일부를 관객 앞에서 직접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작품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하며 예술가와 관객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예술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이러한 행위예술은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전통 방법을 거부하면서 미술, 음악, 연극 등의 요소를 한데 뒤섞어서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뉴욕시장 자유상과 서독 윌리그로상을 수상했다.

백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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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龍城(1865∼1940)

독립운동가·불교인. 본관은 수원, 법명은 진종, 속명은 상규이며 법호는 용성이다. 16세 때 해인사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1년 반 동안 복역하였으며, 그 후 불교 종단의 정화와 대중화를 위해 저술에 힘쓰면서 대각사를 창건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백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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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성리학자. 호는 이재, 본관은 남포이다. 1298년, 충선왕을 따라 베이징에 가서 10년간 머무르며 주자학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이제현 등을 가르쳐 우리나라 성리학 보급에 큰 공을 세웠다. 충선왕 때 도감사가 되었으며, 후에 상당군에 봉해졌다.

백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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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一圭(1879∼?)

독립운동가. 호는 약산이며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하와이로 이민갔으며,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다가 '대동 보국회'의 창립 발기인이 되었다. 또한 친일적인 미국인 스티븐스를 살해한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후원회 회장이 되어 공정한 재판을 위해 힘썼다. 1919년,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장에 선출되어 독립운동 자금 30만 달러를 모아 임시정부로 보냈다. 1946년 국민회에서 발행하는 「국민보」의 주필이 되어, 한국인의 권익 보호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저서로 영문판 「한국 경제사」가 있다.

백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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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貞基(1896∼1936)

독립 운동가. 전북 정읍에서 출생하였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항일 운동을 벌였다. 그 후 동지들을 규합하여 일본의 군사 시설 파괴를 꾀하다가 탄로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는 계속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여 베이징으로 망명하였으며, 일제의 군사 시설을 파괴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1933년 이강훈·이원훈 등과 함께 상하이 훙코우에서 중국 주재 일본 대사 아리요시를 암살하려다가 발각되어 복역중 사망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백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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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鐵(1908∼1985)

평론가. 본명은 세철이며 평북 의주에서 출생하였다. 도쿄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개벽」지의 기자를 거쳐 매일신보 문화부장, 중앙대학교 문리과 대학장, 펜클럽 한국 본부 위원장 등을 지냈다. 많은 평론을 발표하여 경향문학 시대 이후, 한국 문학의 순화와 외국 문학 소개에 노력하였다. 특히, 우리 나라 현대 문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 1961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신문학 사조사」 「문학의 개조」 「두 개의 얼굴」 등이 있다.

백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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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鴻俊(1848∼1894)

크리스트교 순교자. 호는 북산이며 평북 의주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떠, 1874년 만주로 가서 스코틀랜드 자유 일치 교회의 선교사 매킨타이어와 로스 목사에게 서구 과학을 배웠다. 이응찬·이성하·김진기 등과 함께 최초로 세례를 받고 크리스트교 신자가 되었으며, 친구들과 함께 「신약성경」의 한글 번역 사업에 착수하여 「예수교 성교전서」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 후 서상륜·최명호 등과 함께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최초로 크리스트 교 전도사가 되어 교회를 건립하였다. 1892년 만주에서 나쁜 책을 간행했다는 죄로 붙잡혀 옥사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트교 순교자가 되었다.

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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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知

신라의 음악가. 진흥왕 때에 왕명을 받고 우륵으로부터 계고·만덕과 함께 노래를 배웠다. 가야금을 배운 계고와 춤을 배운 만덕과 함께 왕 앞에서 연주회를 갖기도 하였다. 그는 노래로 유명하다.

법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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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興王(?∼540)

신라의 제23대 왕(재위 514∼540). 지증왕의 아들로 지증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517년 병부를 설치하고, 520년 처음으로 율령을 반포하여 백관의 공복을 정하는 등 국가 체제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다. 527년 불교를 공인하여 삼국 통일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531년 상대등의 관직을 채택하였으며, 이듬해 가야국을 정복하여 비옥한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건원이라 하였다.

변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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卞季良(1369∼1430)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 자는 거경, 호는 춘정, 본관은 밀양이다. 이 색·정몽주 밑에서 가르침을 받고,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진덕박사 등을 지냈다. 조선 초에는 사헌부 시사·성균관 학정·예문관 응교·직제학 등을 지냈다. 20여년 간 대제학을 지내면서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도맡아 지어 명문장가로 유명했으며, 「태조실록」 편찬과 「고려사」 개수에 참여하였다. 시에도 뛰어나 문묘·기자묘의 비문을 지었으며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한다.

변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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卞相壁

조선의 화가. 자는 완보, 호는 화재, 본관은 밀양이다. 숙종 때 화원을 거쳐 현감에 이르렀다. 닭과 고양이를 잘 그려 '변 고양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초상화도 잘 그려 '국수'라는 칭호를 받았다. 작품으로 「추자도」 「묘작도」 등이 있다.

변영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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卞榮魯(1898∼1961)

시인. 호는 수주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등에서 교편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주립 산 호세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신문학 초창기에 등장한 신시의 선구자로서, 압축된 시구 속에 서정과 상징을 담은 기교를 보였다. 민족 의식을 시로 표현하고 수필에도 재능이 있었다. 광복 후 성균관대학교 교수·해군사관학교 교수 등을 지냈으며, 대한공론사 이사장으로 영자 일간지를 발간하였다. 1951년 제2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1955년 제1대 한국 펜클럽 회장에 선출되었다. 대표작으로 「논개」 「사벽송」 등이 있고, 수필집 「명정 40년」 등이 있다.

보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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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德

고구려의 승려. 평남 용강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양에 영탑사를 지었다. 보장왕이 당에서 도교를 받아들여 불교를 배척하는 것을 보고 백제로 가서 전주 고대산에 경복사를 짓고 열반종을 강의하였다. 그의 제자 11명이 각각 절을 세우고 열반종을 퍼뜨림으로써 신라 열반종의 시조가 되었다.

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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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의 법어를 모은 책.

틀:~

普愚(1301∼1382) 고려의 승려. 호는 태고, 속성은 홍이며, 홍주에서 출생하였다. 13세 때에 중이 되어 가지산에서 도를 닦았다. 충목왕 때, 원에 가서 청공의 법을 이어 우리 나라 임제종의 시조가 되었다.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다가 신 돈에 의해 속리산에 갇히기도 하였으나, 신 돈이 죽은 뒤 국사가 되었다. 그는 시에도 능하여 「태고암가」를 지었다. 북한산에 탑비가 있다.

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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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雨(1515∼1565) 조선의 승려. 호는 허응당이며 1530년 금강산 마하연암에 들어가 수도하다가, 1548년 문정 왕후의 신임을 얻어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그 후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키고 승과와 도첩제를 다시 실시하게 하는 등 불교의 부흥에 노력하였다. 후에 도대선사에 올랐으나 문정 왕후가 죽자, 유림들의 기세에 밀려 승직을 삭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제주목사에 의해 참형되었다. 저서로 「허응당집」 「불사문답」 등이 있다.

보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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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藏王(?∼682)

고구려의 제28대 왕(재위 642∼668). 영류왕의 동생이며, 642년 연개소문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당의 도사 숙달 등 8인을 데려와 도교를 폈다. 645년 당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으나, 연개소문에 의해 격퇴되었다.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평양이 함락되자, 대신들을 이끌고 항복하여 고구려 최후의 왕이 되었다. 667년 요동주 도독으로 조선왕에 봉해졌으며, 말갈족과 함께 고구려 부흥을 꾀하다가 피살되었다.

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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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信(?∼663)

백제의 장군. 660년 좌평으로 있을 때,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자 흑치상지 등과 임존성에서 대항하여 싸웠다. 의자왕이 당에 항복하자, 도침과 주류성을 근거지로 하여 일본에 가 있는 왕자 풍을 왕으로 세워 백제 부흥을 꾀하였다. 그러나 도침과 뜻이 맞지 않아 그를 죽여버린 데다가 장차 왕자 풍까지 없애려는 기미가 보이자 풍이 먼저 그를 죽였다.

복지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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卜智謙

고려의 개국 공신. 태봉의 마군 장군으로 있다가 궁예가 횡포해져서 민심을 잃자, 918년 배현경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 건을 추대하였다. 이때 환선길이 반대하자 이를 왕 건에게 알려 죽이게 하였으며, 임춘길의 역모를 평정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 성종 때 태사에 추증되었다.

봉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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烽上王(?∼300)

고구려 제14대 왕(재위 292∼300). 일명 '치갈왕'이라고도 하며 서천왕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시기심이 많아, 즉위하자 안국군 달고가 백성의 존경을 받고 있음을 시기하여 살해하였으며 동생 돌고도 약을 먹여 죽였다. 창조리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연의 모용 외의 침입을 막기도 하였으나, 사치와 방탕이 심한 데다가 흉년으로 기근까지 겹쳤는데 화려한 궁전을 짓고 창조리의 충고를 듣지 않다가 창조리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 후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자살하였다.

봉원부인 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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蓬原夫人鄭氏(1541∼1620)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본관은 동래이며 광해군의 장모이다. 어릴 때부터 시재가 뛰어나서 많은 작품을 썼다. 정 현의 「공사 견문록」에 그의 시 4수가 전해지고 있다.

부대부인 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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府大夫人閔氏(?∼1898)조선 고종의 어머니. 본관은 여흥이며, 흥선 대원군의 부인으로 1861년 고종을 낳았다. 일찍이 천주교를 믿어 신자가 되었다. 둘째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르자, 특별 감사 미사를 올렸다. 1896년 운현궁에서 뮈텔 주교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또한 고종의 유모인 박 마르다와 함께 베르뇌 주교를 통하여 프랑스에 도움을 청하고, 러시아의 세력을 막으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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沸流

고구려 동명왕의 둘째 아들. 북부여에서 남하한 이복형 유리가 태자가 되자, 동생 온조와 함께 부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온조와 도읍 문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온조는 위례성(경기도 광주)에,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각각 도읍을 정했다. 미추홀이 살기가 적당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흩어지자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살하였다.

비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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比流王

백제의 제11대 왕(재위 304∼344).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고 사반왕의 동생이다. 분서왕이 죽자, 그 아들들이 모두 어려 비류왕이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오랫동안 민간에서 살았으므로 민간의 사정을 잘 알아 선정을 베풀었다. 그 후, 좌평 우복이 북한산성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였다.

비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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毘有王(?∼455)

백제의 제20대 왕(재위 427∼454). 구이신왕의 맏아들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가난한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송·신라·일본과도 국교를 맺었다.

빙호당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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氷壺堂李氏

조선 선조 때의 여류 시인. 왕족 숙천령의 부인으로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났다.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영빙호」 등이 있다.

사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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斯多含

신라의 화랑. 내물왕의 7대손으로 급찬 구리지의 아들이다. 풍모가 뛰어나고 의지와 기개가 높았다. 그는 화랑이 되어 1,000명의 낭도를 거느렸다. 진흥왕 때 신라가 가야국을 칠 때, 15세의 나이로 공을 세워 그 공으로 전답과 가야 사람 300명을 노예로 받았다. 그러나 그는 밭은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가야 사람은 모두 석방시켜 주었다. 어렸을 때 친구인 무관랑이 병으로 죽자, 7일 동안 통곡하다가 따라 죽었다.

사도 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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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悼世子(1735∼1762)

조선 영조의 둘째 아들. 이름은 선이고, 호는 의재이며 부인은 혜경궁 홍씨이다. 출생한 지 1년 만에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0세 때에 결혼하여 별궁에 거처하였다. 그는 자라면서 학문을 게을리하였고 난행과 광태를 일삼아 왕의 노여움을 샀다. 1761년에 평안도 관찰사 정희량 등의 계교에 빠져 평양에 몰래 놀러갔다 온 것 때문에 왕의 노여움이 한층 더해진 데다가, 당파 싸움으로 모함까지 곁들여져 이듬해 폐위되었다. 이어 자결할 것을 명령받았으나 듣지 않자, 서인의 자격으로 뒤주 속에 갇혀 8일 만에 굶어죽었다. 죽은 후, 이를 후회한 왕에 의하여 곧 위호가 복귀되고 사도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 세자로 추존, 1799년 장조로 추존되었다.

사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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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

서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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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居正(1420∼1488)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강중, 호는 사가정, 본관은 달성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재감 직장을 지냈으며, 세조 때 공조·예조·이조참의가 되었으며 1460년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다. 그는 그곳 학자들로부터 '해동의 기재'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조선 최초로 양관 대제학이 되었다. 그는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하였으며, 여러 번 전형을 담당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다. 시화의 백미인 「동인시화」와 「동문선」 등을 남겨 신라 이래 조선 초에 이르는 시문을 선집하여 한문학을 대성하였다. 세조 때 「경국대전」과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국역하였다. 그는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지리·의약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저서로 「골계전」 「사가정집」 「필원잡기」 등이 있다.

서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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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敬德(1489∼1546)

조선의 학자. 자는 가구, 호는 화담이며, 본관은 당성이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며, 13세 때 「서경」을 읽고 복잡한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을 스스로 터득하였다. 18세 때 「대학」을 읽고 격물치지의 원리를 깨달았다. 산림에 묻혀 후진의 교육에 힘을 기울이던 중, 조광조에 의해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추천받았으나, 계속 학문 연구에만 전심하였다. 그는 병약한 몸을 치료하기 위해 속리산·지리산 등을 기행하면서 기행시 수편을 남겼다. 그리고 이기론의 본질을 연구하여 기와 이의 상관관계에서 천지만물이 형태화하며 음양으로 분화한다는 이기일원론을 체계화하였다. 또한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된다는 사생일여를 주장하였으며, 도학을 비롯하여 수학·역학 연구로 일생을 보냈다.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유명하며, 박연폭포·황진이와 함께 송도 3절로 불린다. 선조 8년에 우의정에 추증되고, 1585년 신도비가 세워졌다. 저서로 「화담집」이 있다.

서명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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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命膺(1716∼1787)

조선의 학자. 자는 군수, 호는 보만재, 본관은 달성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왔다. 그 후에 대사헌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수군절도사·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다. 역학에 통달했으며 실학 연구에 전력한 북학파의 시조로 일컬어지며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영조의 명으로 악보를 수집하여 간행했으며 글씨에도 능했다. 저서로 「보만재집」 「계몽도설」 등이 있다.

서산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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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정

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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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8∼1631)

조선의 문신. 자는 현기, 호는 약봉, 본관은 달성이다. 이 이·송익필의 문인으로서 선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피란시켰으며 그 후, 암행어사·경기도 관찰사·판중추 부사 등을 지냈다. 광해군 때 계축옥사에 연관되어 11년간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이 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에 왕을 피란시켰다. 그는 이인기·이 귀 등과 남지 기로회를 조직하여 역학을 토론했으며, 서화에도 능하였다. 저서로 「약봉집」이 있다.

서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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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1845)

조선의 실학자. 자는 준평, 호는 풍석, 본관은 달성이다. 서명응의 손자이며,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교·검열을 지냈다. 현종 때 대사헌·좌참찬·대제학 등을 지냈다. 그는 실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1834년 호남 순찰사로 나갔을 때 백성들의 궁핍함을 보고, 일본에 가는 통신사 편에 부탁하여 고구마 종자를 구입하였다. 그는 이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 재배를 장려하였다. 또한 「종저보」를 저술하여 그 재배법을 널리 알렸다. 또한 농업에 관한 상소문을 써서 영농법의 개혁을 역설하였으며, 박세당의 「산림경제」를 토대로 「임원경제지」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농업을 주로 한 방대한 백과 사서로, 농기구의 그림과 전국의 시장 날짜까지 적혀 있다. 저서로 「인제지」 「한양 세시기」 등이 있다.

서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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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潤福(1923~ )

마라톤 선수. 서울 출생. 1957년 고려대 상과를 졸업했다. 1946년 제1회 전국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고, 1947년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2시간 25분 39초의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하였다. 1960~1977년까지 서울 운동장장 겸 육상연맹 이사를 지냈다. 1976년부터 대한체육회 강화위원으로, 현재 대한육상경기연맹 고문으로 우리나라 체육 발전에 힘쓰고 있다.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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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載弼(1866∼1951)

의학자·독립운동가. 전남 보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도쿄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하였다. 1884년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족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으므로 미국에 귀화하였다. 워싱턴 대학에서 의학을 배우고 세균학을 연구하였다. 민씨 정권이 몰락하고 갑오경장이 있자,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이상재·이승만·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문을 세우는 등 자유 민권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외신이라는 수구파의 책동으로 강제 출국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후,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원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 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광복 후 과도 정부의 정무관으로 취임하기 위하여 조국으로 돌아왔으나 국내 정세에 어두워 이승만과의 불화로 일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로서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 「자서전」이 있다.

서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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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廷仁(1936~ )

소설가. 본명 정택. 전남 순천 출생. 서울대 영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영문학 수학. 1962년 「사상계」 신인상에 「후송(後送)」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후 「물결이 놀던 날」 「의상을 입으라」 「미로」 「강」 「원무(圓舞)」 「우리 동네」 「산」 등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들은 실체를 상징 또는 환상으로 포착하면서 자의식의 분열을 추적, 진실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지식인의 고민을 분석했다. 87년 전북대 영문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소설집 「강」 「토요일과 금요일 사이」 등이 있고, 창작집 「가위」 「서정인 문학선」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월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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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廷柱(1915∼2000)

시인. 호는 미당이며 전북 고창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중앙고보를 중퇴한 후, 1931년 대종사에 입산하였다. 그 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 1941년 첫 시집 「화사집」을 출간하였으며, 1946년 「귀촉도」를 출간하여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다. 「화사집」 시대에는 원인 모를 깊은 죄의식이 바탕을 이루어 스스로 종의 아들·천치·죄인으로 규정하고 그 운명적인 업고를 문둥이나 뱀을 통하여 울부짖었다. 1961년 「신라초」를 출간하여 불교사상을 한층 심화하면서 한국적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자유문학상과 5·16 문예상을 수상했으며, 예술원 회원·문협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시집으로 「동천」 등이 있으며, 「서정주 시선」 「시문학 개론」 등이 있다.

서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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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熙(942∼998)

고려의 외교가이며 문신 출신 장군. 자는 염윤이며 본관은 이천이다. 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10여년 간 외교가 중단되었던 송에 가서 국교를 열고, 송 태조로부터 검교 병부상서의 벼슬을 받고 귀국하였다. 993년 거란이 침입해 오자, 중군사로서 출병하였다. 이 때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에서는 소손녕의 요구대로 서경 이북의 땅을 내주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서 희는 국토의 할양에 극력 반대하여 소손녕의 군영으로 가서 담판을 시도했다. 서 희는,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이 터전이므로 국명도 고려임을 설득시켜 거란군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태보·내사령을 지냈고, 병으로 개국사에서 사망하였다. 덕종 때 태사에 가증되었다.

석주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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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宙明(1910∼1950)

박물학자.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개성 송도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나비 표본 등을 수집하여 미국 박물관의 곤충과 교환하는 등 연구를 계속하였다. 1940년, 우리나라 나비 종류를 분류하여 정리한 「접류 목록」을 저술하였다. 특히 「배추흰나비의 변이 곡선」은 생물 분류학과 측정학에 커다란 업적으로 남았다. 1950년 6·25전쟁중에 횡사하였다.

선덕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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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德女王(?∼647)

신라 제27대 여왕(재위 632∼647). 이름은 덕만, 호는 성조황고이며 선덕은 시호이다. 진평왕의 맏딸로 진평왕이 후사 없이 죽자 백성들이 그를 즉위시켰다 하는데, 이로써 삼국시대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634년 연호를 인평으로 고쳤으며, 이듬해 당으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638년 고구려가 칠중성에 침입하자 이를 격퇴하였으며, 642년 백제 의자왕에게 40여 성을 빼앗겼고 이듬해 당에 원병을 청했다. 647년 비담·염종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모반하였으나 곧 진압시킨 후 죽었다. 그러나 여왕은 그동안 선정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으며 구휼 사업에 힘썼고 당 문화를 수입하였다. 특히 불법을 들여오고 황룡사 구층탑·첨성대를 건립하는 등 업적을 남겼다.

선우 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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鮮于輝(1922∼1986)

작가.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경성사범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 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고, 1949년 이후 정훈장교로서 육군에 복무하였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지냈고, 1955년 「문학예술」지에 「불꽃」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현대인의 착잡한 사고와 행동 과정을 추구한 작품을 많이 썼다. 1956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단편집 「불꽃」 「5분간」 등이 있다.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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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祖(1552∼1608)

조선의 제14대 왕(재위 1567∼1608). 덕흥군 초의 아들로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즉위하였다. 이 황·이 이 등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유학을 장려하였으나, 계속되는 당쟁으로 동서로 당이 나뉘고 동인이 다시 남북으로 갈리는 등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국력이 쇠약해졌다. 이러한 때 정치 기강이 문란한 틈을 타서 북으로는 2회에 걸쳐 야인들의 침입이 있었으며, 남으로는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당파를 달리하는 두 사람이 서로 상반되는 보고를 함으로써 대책을 세우지 못하였다. 마침내 1592년 일본이 대군을 몰고 침입하자, 선조는 의주까지 피란하였고 7년간 왜군에게 국토가 유린되어 많은 문화재를 잃었다. 전후에도 당쟁이 그치지 않아 당쟁 속에서 재위 41년간을 보냈다.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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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宗(1049∼1094)

고려 제13대 왕(재위 1083∼1094). 문종의 둘째 아들이며 순종의 동생이다. 순종 때 중서령을 거쳐 국원공에 봉해졌으며, 순종이 죽자 대를 이어 즉위하였다. 1084년 처음으로 승과를 설치하고 법흥사에 교장도감을 두어 도서를 출판하는 등 불교 발전에 힘썼다. 그는 경사에 밝고 제술에 능하였다.

선화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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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花公主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미모가 뛰어나 백제의 서동(후에 무왕)이 사모하여, 두 사람이 남 몰래 밤에 만나곤 한다는 「서동요」를 지어 금성(지금의 경주)에 퍼뜨렸다. 공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되어 가던 중 서동에게 구출되어 결혼하고 백제에 가서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무왕이 아니고 모대(동성왕)라고도 한다.

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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楔循(?∼1435)

조선의 학자. 자는 보덕, 본관은 경주이다. 고려 때 귀화한 위구르 인의 손자이며, 태종 때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종 때 교리·좌사경·인동 현감 등을 지냈다. 그는 왕명으로 「효행록」을 증수하였다. 또한 1431년에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삼강행실도」를 편수하였으며 윤 회 등과 함께 「통감훈의」를 저술하였다. 박학하고 역사에 뛰어났으며,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설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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薛愼(?∼1251)

고려의 문신. 본관은 순창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대각에 재직하였다. 고종 때 어사로서 원에 다녀왔으며, 그 후 추밀원 부사에 올랐다. 그의 어머니 조씨는 세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한 공으로 국대 부인에 봉해졌다.

설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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薛聰

신라의 석학. 자는 총지, 호는 빙월당이며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의 아들이다. 강 수·최치원 등과 더불어 신라 3문장 중의 한 사람이며 벼슬은 한림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총명하여 경사에 밝았다. 경덕왕 때 박사로서 강 수와 함께 구경을 강론하여 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568년 북한산성 비봉에 세운 진흥왕 순수비문에 이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이두를 창작했다기보다는 집대성 내지 정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한편 「화왕계」를 지어 신문왕을 충고했다는 일화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성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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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慶麟(1911~ )

국악인. 서울 출생. 이왕직(李王職) 아악부원양성소 졸업. 이왕직 아악부 아악수·아악수장, 국립국악원장, 문교부 국악진흥위원, 교육과정 심의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예술원 회원으로 있다. 방송문화상,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다. 저서에 「조선음악독본」 「조선의 아악」 「조선의 민요」 등이 있다.

성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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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德王(?∼737)

신라 제33대 왕(재위 702∼737).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동생이다. 여러 차례 당에 사신을 보내어 당 문화 수입에 힘썼다. 718년 처음으로 누각을 만들었으며, 732년 발해를 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의 영토로 하였다.

성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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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三問(1418∼1456)

조선의 학자이며 충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 본관은 창녕이다. 홍주에서 출생하였는데, 태어나려고 할 때에 공중에서 "낳았느냐?"고 3번 묻는 소리가 났으므로 '삼문'이라 이름을 지었다. 세종 때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항상 임금의 측근에서 좋은 건의를 많이 하였다. 또한 집현전 학사로서 글씨를 잘 썼고 문장이 뛰어나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신숙주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국새를 안고 통곡하였다. 그는 유응부 등과 같이 명 사신이 왔다가 돌아가는 송별 연회석상에서 세조를 죽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연회 당일, 세조는 갑자기 자리가 좁으니 운검을 그만두라고 지시하였다. 이 운검은 임금이 정좌한 앞에 큰 칼을 들고 서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도총관으로 있던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 승과 유응부가 이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유응부는 그대로 하려고 하였으나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같이 모의했던 김 질이 세조에게 이같은 사실을 알림으로써 박팽년·이 개·하위지·유응부·유성원·성 승과 함께 체포되어 왕의 심문을 받았다. 이 때도 성삼문은 세조를 보고 "하늘에 태양이 하나밖에 없듯이, 나라에도 두 임금이 있을 수 없소" 하며 단종에 대한 충절을 굽히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는 거열(두 대의 마차에 두 다리를 각각 묶어 몸을 찢는 형벌)의 극형을 받고 죽었으며 아버지와 세 동생, 네 아들이 모두 살해되었다. 영조 때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성근보집」이 있다.

성석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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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石璘(1338∼1423)

고려의 문신. 자는 자수, 호는 독곡, 본관은 창녕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전리총랑·성균관 사성·지신사를 지냈다. 1375년 우왕이 즉위한 후, 왜구가 침입하자 조전원수가 되어 양백연의 부하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양광도 관찰사를 지낼 때, 큰 흉년이 들자 의창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전국에 의창을 두게 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벼슬길에 나아가 영의정까지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고 진초(眞草)를 잘 써 당대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글씨로 「조선 태조 건원릉 신도비」가 있다.

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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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王(?∼554) 백제 제26대 왕(재위 523∼554). 무녕왕의 아들이며 성명왕이라고도 한다. 양의 고조로부터 백제왕에 책봉되었으며 양에 예물을 바쳤다. 538년 고구려와 충돌이 심해지자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고 남부여라고 하였다. 554년 신라와 같이 한강 유역의 빼앗겼던 땅을 되찾았으나, 이를 다시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겼고 왕자 여창과 함께 친히 신라를 치다가 관산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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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王(?∼795) 발해 제5대 왕(재위 794∼795). 문왕의 손자이며 대굉림의 아들이다. 문왕에 이어 대원의가 즉위했으나, 포악하여 백성들에게 살해되자 왕위에 올랐다. 연호를 중흥으로 고치고 전의 도읍지였던 상경 용천부로 다시 도읍을 옮겼다.

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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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宗(960∼997) 고려 제6대 왕(재위 982∼997).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욱의 둘째 아들로, 981년 경종이 위독하자 즉위하였고 이듬해에는 5품 이상의 대신들에게 정치의 옳고 그름을 글로 써서 올리게 하였다. 이때 최승로는 역대 왕들의 선악을 평한 '시무 28조'를 올렸다. 성종은 최승로 등 유학자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정치를 단행함으로써 고려 초기의 여러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다. 982년 행정 개혁을 단행하여 백관의 칭호를 개정하고, 이듬해 중앙에 3성, 6조, 7시를 제정하고 지방에는 12목을 설치하였다. 995년 6관을 상서 6부로 하는 등의 관제를 개편하고 지방 행정 구역을 10도로 고쳤다. 또한, 불교의 폐단을 고려하여 불교적인 행사를 금하고 유교주의를 채택하여 학문과 농업을 장려하였다. 995년 송과의 사대관계를 바꾸어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거란과 외교 관계를 맺고 북쪽 경비에 특히 힘썼다.

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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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宗(1457∼1494) 조선 제9대 왕(재위 1469∼1494). 세조의 손자이며 덕종의 아들이다. 세조의 왕후인 정희 대비의 명으로 13세에 즉위했고, 그 후 7년 동안 정희 대비가 섭정하였다. 현명한 왕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으며, 홍문관·존경각·독서당 등을 설립하고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또한 「경국대전」을 반포하고 「대전속록」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를 비로 맞았다가 폐위시켜, 연산군 때 갑자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을 만들었다. 성종은 배불정책을 썼으며 여러 문물 제도를 정비하여 조선 초창기를 융성하게 하였다.

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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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徹(1912~1993)

현대 우리나라의 선불교 전통을 대표하는 수행승. 속명은 이영주. 경상남도 산청 출생.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정(최고 우두머리)을 지냈으나 세속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교리에 대한 그의 입장은 저서인 「선문정로」(1981)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선불교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지눌의 돈오점수에 반대하여 돈오돈수론을 주창했다. 그 후 현재까지 우리나라 불교 철학계의 돈·점 논쟁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성철에 따르면, 앎과 행동이 일치된 단계의 앎만이 진정한 앎이며, 지눌의 돈오점수는 이론적 앎일 뿐 참 앎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눌과 성철은 가르침의 대상이 달랐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지기가 어렵다. 지눌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여 인생의 가르침을 폈으며, 성철은 수행승을 대상으로 했다.

성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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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忠(?∼656)

백제의 충신. 656년 좌평으로 있을 때 의자왕이 방탕하여 국운이 위태로워지자, 정사를 돌보지 않음을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옥에 갇히었다. 그는 옥중에서 단식하면서 왕에게 글을 올려 만약 외적이 침입하면 백제의 험난한 지형을 이용하면 된다고 하였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침입하여 사비성이 위태롭게 되자 의자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 마침내 사비성이 함락되자, 왕은 항복하고 백제는 멸망하였다. 계백·흥수와 함께 백제의 3충신으로 일컬어진다.

성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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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俔(1439∼1504)

조선의 학자. 자는 경숙, 호는 용재, 본관은 창녕이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교 등을 거쳐 사록에 올랐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경연관이 되어 베이징에 갈 때 도중에서 지은 기행시를 엮어 「관광록」이라 하였다. 성종 때 지평을 거쳐 성균 직강이 되고 이듬해 한명회를 따라 베이징에 다녀왔다. 1488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명의 사신과 서로 시를 주고받음으로써 그들을 탄복케 하였다. 1493년 유자광 등과 「악학궤범」을 편찬하여 음악을 집대성하였으며, 유자광 등과 함께 왕명으로 고려 가사인 「쌍화점」 「이상곡」 「북전」 등을 다시 고쳐 썼다. 그의 저서 「용재총화」는 조선 초의 정치·사회·문화면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저서로 「허백당집」 「풍아록」 등이 있다.

성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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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渾(1535∼1598)

조선의 학자. 자는 호원, 호는 우계, 본관은 창녕이다. 17세 때 감시 초시에 합격했으나 병으로 복시를 못 치러 과거를 포기하였다. 백인걸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이 이와 '사단칠정 이기설'을 토론하고 새로운 학설을 주창하였다. 이 이가 선조에게 권하여 종묘 서령의 벼슬을 내렸으나, 병으로 등청하지 못하자 왕이 약을 보내 주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 세자를 모시었고, 환도 후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 화평을 맺을 것을 주장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고향인 파주로 내려갔다. 이 황의 학설을 이어받은 성리학의 대가로 이 이와 함께 「사칠속편」을 완성하였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죽은 후, 반대파들에 의해 관작을 빼앗겼으나, 인조 때 복귀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우계집」 「주문지결」 등이 있다.

성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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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希顔(1461∼1513)

조선의 공신. 자는 우옹, 호는 인재, 본관은 창녕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연산군 때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연산군의 횡포를 풍자하여 시를 써서 바쳤는데, 이로 인하여 당시 천시되던 무신으로 직위가 떨어졌다. 그 후, 연산군이 점점 포악해지자 박원종·유순정 등과 모의하여 1506년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였다. 그 후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너그럽고 과단성이 있었으며 조정에 들어간 30여 년간 많은 치적이 있다.

세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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細烏女

신라 아달라 왕 때의 여인. 일본에 가 왕이 된 남편 연오랑을 기다리고 있던 중, 우연하게 남편의 신이 놓여 있는 바위가 떠내려오자, 그것을 타고 일본에 건너가 남편을 만나 왕비가 되었다는 설화의 주인공이다.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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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祖(1417∼1468)

조선의 제7대 왕(재위 1455∼1468). 세종의 둘째 아들이며 문종의 동생이다. 무예에 능하고 병서에 밝았다. 세종 때 수양 대군에 봉해졌으며, 단종이 즉위하자 고명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다. 단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황보 인·김종서 등을 죽이고 동생인 안평 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킨 다음,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1455년 마침내 단종을 핍박하여 선위 교서를 내리게 하고 즉위하였다.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자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자 모두 사형에 처하고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1457년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로 유배하고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이듬해 상평창 제도를 실시하였으며, 궁궐에 뽕나무를 심어 궁녀들에게 누에를 치게 하였고 「잠서」를 한글본으로 발간케 하였다. 각 도에 둔전제를 실시하게 하고 「경국대전」을 간행하였으며 간경도감을 두어 불경을 우리 말로 번역하게 하였다. 불교를 숭상하여 서울에 원각사를 세우고 「원각경」을 편찬케 하였다. 또한 국경 지대에 성을 쌓게 하여 변방의 경비를 튼튼히 하였으며,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강 순으로 하여금 건주위의 야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세조는 재위 기간 동안 서적 간행과 병기의 제조·토지 제도 및 관제 개혁 등 수많은 업적을 쌓았으며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만년에는 왕위 찬탈로 인한 인간적 고뇌에 싸여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문둥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저서로 「석보상절」 「역대병요」 등이 있다.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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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宗(1397∼1450)

조선의 제4대 왕(재위 1418∼1450). 태종의 셋째 아들이며, 1413년 충녕 대군에 봉해졌다. 1418년, 형인 양녕 대군이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자, 세자로 책봉되어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4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젊고 학식이 풍부한 문신들로 하여금 학문을 연구하게 하는 한편, 각 도의 관찰사들에게 명하여 숨은 인재를 추천하도록 하였다. 또한 각종 책을 발간해 내는 데 필요한 활자와 인쇄술을 개량함으로써 경자자·갑인자·병진자 등의 구리 활자를 주조하였다. 이로써 친히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고려사」, 예법과 도덕에 관한 「삼강행실도」 「효행록」 「오례의」, 군사에 관한 「역대병요」, 농사에 관한 「농사직설」, 중국의 의학 지식을 모은 「의방유취」, 지리책인 「팔도지리지」 등이 편찬 발간되었다. 특히, 세종은 나라 말이 없어 백성들이 큰 불편을 겪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정인지·성삼문·신숙주 등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익히기 쉽고 쓰기 쉬운 우리 글을 연구토록 하였다. 이것이 1443년에 완성되어 3년 후인 1446년에 반포된 '훈민정음'이다. 이렇듯 한글이 새로 만들어지자, 세종은 한글로써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등을 편찬하게 했는데, 조선 초기의 언어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박 연으로 하여금 아악기를 고쳐 그 때까지의 모든 악기·악보 등을 정리하게 하였으며,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혼천의·해시계·물시계 등의 천문 기계를 발명하게 하였다. 그리고 측우기를 만들어 세계 최초로 비의 양을 측정하게 하였다. 한편, 국방과 외교에도 힘을 기울여, 1443년 최윤덕을 북쪽에 보내 야인을 정벌하게 하고 김종서를 시켜 두만강 방면에 6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또한 압록강 방면에 4군을 설치했고 무기 제조·병서 간행 등에도 힘썼다. 일본에 대해서는 무역선의 입항을 허락하는 등 회유책을 썼으며, 1419년 비인현에 왜구가 침입하자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를 정벌하게 했으나 그들을 위해 삼포(제포·부산포·염포)를 개항하였다. 세종은 재위 기간 동안 국내 정치와 문화 등에 이바지하여 우리나라 역대 임금 가운데서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겨 해동의 요순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또 조선 왕조의 기틀을 더욱공고히 한 임금으로 손꼽힌다. 그는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소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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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聖王(?∼800)

신라 제39대 왕(재위 799∼800). 원성왕의 태자인 인겸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태자로 죽었으므로 궁중에서 자라서 789년에 당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 후 대아찬이 되고 시중 등을 거쳐 이듬해 병부령이 되었다. 795년 태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 당의 덕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위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재위 2년 만에 죽어 이후로 신라 왕위 쟁탈전의 원인이 되었다.

소수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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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獸林王(?∼383)

고구려 제17대 왕(재위 371∼384).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일명 '소해 주류왕'이라고도 한다. 372년 진의 왕 부견이 사신편에 승려 순도와 불상·경문을 보내자,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였다. 이 해 태학을 세웠으며, 이듬해 율령을 반포하였다. 375년 초문사를 지어 순도를 이곳에 머물게 하고 또 이불란사를 세워서 진의 승려 아도를 주지로 삼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불교의 시초가 되었다. 그 해 백제를 쳐서 수곡성을 점령했으며, 거란의 침략이 있었으나 이를 물리쳤다. 왕세자가 없었으므로 동생 이련(후의 고국양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소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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炤知王(?∼500)

신라 제21대 왕(재위 479∼500). 자비왕의 맏아들로 일명 '조지·비처'라고 한다. 480년에 말갈이 북방을 침입하였고 이듬해에는 고구려가 쳐들어왔다. 484년 다시 고구려가 침입하자, 백제와 연합하여 이를 물리쳤으며, 백제와는 화평을 유지했고, 이벌찬 비지의 딸을 백제 왕에게 보내었다. 487년 처음으로 각 지방에 우편역을 설치하였으며, 490년 시장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소현 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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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顯世子(1612∼1645)

인조의 맏아들.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다. 정묘·병자호란을 당하여 그는 봉림 대군(효종)과 함께 청의 선양으로 볼모로 잡혀가서 만주어도 배우고 청의 군사를 따라 베이징에 들어갔다. 그곳에 와 있던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샬에게서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 문명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을 배웠다. 귀국할 때 천주교에 관한 서적과 지구의·천주상 등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귀국 후 2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으며, 그가 가지고 온 천주교 서적들도 불살라져 천주교 전래의 기회도 놓치게 되었다.

소혜 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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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惠王后(1437∼1504)

조선 덕종(세조의 큰 아들)의 비. 성은 한씨, 본관은 청주이다. 한 확의 딸로 1455년 수빈에 책봉되었다. 아들 성종이 세자로서 죽은 아버지 덕종을 왕으로 추존하자, 인수 왕비에 봉해졌고 다시 소혜로 봉해졌다. 불경에 조예가 깊어 범어·한어·국어 3자체로 쓴 불경과 부녀자를 위해 편찬한 「여훈」을 남겨 후세에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손자되는 연산군이 생모 윤씨가 모함으로 폐위 사사된 사실을 알게 되어 참혹한 보복을 할 때 병상에 있던 소혜 왕후가 이를 꾸짖자, 연산군은 머리로 대비를 받아 얼마 후 사망하였다.

손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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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基楨(1912∼

)

체육인. 평북 신의주 출생.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1936년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세계 올림픽에 참가하여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기록을 수립하고 우승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하에 있어 일장기를 달고 출전하였다. 동아일보사에서 손기정의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우고 태극기로 바꾸었는데,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폐간되었다. 대한체육회 부회장·육상경기연맹 회장·방콕 아시아 대회 대표 단장으로 참가하는 등 우리나라의 체육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받은 투구가 그동안 서독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1986년 손기정에게 다시 돌아왔다.

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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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秉熙(1861∼1922)

독립운동가·종교인. 호는 의암이며 청주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동학에 입당하였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관군과 싸웠다. 그 후 일본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여 이상헌이란 가명으로 경찰의 눈을 피했다.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의 3세 교주가 되었으며, 1904년 '진보회'를 조직하였다. 1906년 천도교라 개칭하고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보성전문학교와 보성중학교를 인수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는 한편, 보성사 인쇄소를 부설하고 「천도교 월보」를 발간하였다. 1919년 기독교·불교의 대표들과 3·1운동을 일으켜 민족대표 33인의 필두로 조선 독립을 선언하다가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이듬해 병보석으로 나와 요양중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삼전론」 「천도 태원경」 등이 있다.

손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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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素熙(1917~1987)

소설가. 함북 경성 출생. 일본 니혼대학 수학, 외국어대학 영문과 졸업(1961). 1946년 「백민」에 「맥(貊)에의 결별」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초기작품은 일본과 만주 등을 무대로 한 일제하의 민족의식과, 남녀의 애정과 그 고민상을 극적으로 다루었으며, 이후의 작품에서는 여성심리를 지적으로 추구하여 성격적인 패턴을 제시하고 세태를 반영하는 작품과, 남성의 존재를 시니컬하게 풍자하면서 그 내면상을 파고드는 인간의 행동과 성격·심리 등을 다각적으로 보여준다. 60년 중앙대 예대 교수와 83년 소설가협회 대표의장을 지냈다. 서울시문화상과 5월문예상 등을 수상했으며, 주요 작품으로 단편 「이라기」 「회심」 「현해탄」 「닳아진 나사」 「창포 필 무렵」 「그날의 햇빛은」 등이 있으며, 장편으로는 「태양의 계곡」 「에덴의 유역」 「원색의 계절」 등이 있다. 작품집으로는 「다리를 건널 때」 「갈가마귀 그 소리」 「창포 필 무렵」 「그날의 햇빛은」 등이 있다.

손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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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在馨(1902∼1981)

서예가. 호는 소전이며 전남 진도에서 출생하였다. 양정의숙을 거쳐 외국어학원 독어과를 졸업하였다. 중국의 금석학자 나진옥에게서 서화와 금석학을 공부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특히 한글에도 전서·예서·행서 등의 글씨체를 창안해 내어 한글 글씨를 예술적인 경지에까지 끌어올리는 데 힘썼다. 서울시 문화위원·예술원 회원 등을 지내고 서울시 문화상·예술원상을 받았다. 글씨로 한글에 「창경원」 「화랑대」 등이 있으며, 한문에 「이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영빈관」 등이 있다.

손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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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昌涉(1922~1973)

소설가. 평양 출생. 일본 니혼 대학에서 수업. 1925년 「문예」지에 「공휴일(公休日)」이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했는데, 그의 작품 세계는 착실한 사실적 필치로 비정상적 인물을 그림으로써 현대의 불안·절망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1950년대의 대표적인 작가로 1955년 현대문학 신인상을, 1958년 단편 「잉여 인간」으로 제4회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집에 「비오는 날」(1959), 「낙서족」(1959), 장편에 「부부(夫婦)」(1962) 등이 있다.

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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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居 신라 초 진흥왕 때의 화가. 어려서부터 그림에 열중했으나, 스승이 없어 천신께 가르침을 받았는데, 꿈 속에 단군이 나타나 신필을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에는 새들이 날아들었다고 하며, 이외에도 「관음보살상」 「유마거사상」 「단군 화상」이 있었다 하나 전하여지지 않는다.

송계연월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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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桂烟月翁

조선의 가인. 「고금가곡」의 편찬자로 본명은 알 수 없다. 「고금가곡」의 권말에 갑신춘 송계연월옹이란 편찬기와 아울러 이 책에 수록된 숙종 때 가인인 김유기의 작품이 실린 것으로 미루어 보아, 1704년(숙종 30) 이후의 인물로 추측된다. 「고금가곡」에 시조 14수가 수록되어 있다.

송규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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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奎濂(1630∼1709)

조선의 문신. 자는 도원, 호는 제월당, 본관은 은진이다. 송준길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효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현종 때 사간으로 송시열·송준길 등의 죄를 풀어 줄 것을 간하다가 벼슬에서 쫓겨났다. 1680년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사헌을 지냈다. 그는 학문에 뛰어났으며, 송시열·송준길과 함께 3송이라 불리었다. 저서로 「제월당집」이 있다.

송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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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基淑(1935~ )

작가. 전남 장성 출생. 전남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64년 「현대문학」에 「창작 과정을 통해 본 손창섭」이 추천받았다. 1965년 「이상서설」로 추천 완료. 1966년 단편 「대리 복무」에 이어 장편 「자랏골의 비가」 등을 발표했다. 1978년 긴급 조치 제9호 위반. 1980년 광주 사태로 다시 구속, 이듬해 석방되었다. 「녹두 장군」 「개는 왜 짖는가?」 「휴전선 소식」 등을 발표했고, 현재 전남대 교수로 있다. 현대문학상과 제9회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현실의 부정에 과감히 대처하는 80년대 행동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송만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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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萬甲(1866∼1939)

조선 말의 명창. 전남 구례에서 출생했으며, 7세에 소리 공부를 시작하여 후에 원각사의 간부가 되었다. 소리로만 부르던 「춘향가」 「심청가」를 창극화하여 공연하였다. 궁내부 별순검을 지냈으며, 이동백·정정렬 등과 함께 '조선 성악연구회'를 설립하여 제자 양성에 힘썼다.

송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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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炳洙(1932~ )

소설가. 경기도 개풍 출생. 1957년 단편 「쑈리 김」이 「문학 예술」지에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여 1964년 단편 「잔해(殘骸)」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주요 단편에 「22번형」 「환원기(還元期)」 「잔해」 등이 있다.

송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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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秉畯(1858∼1925)

조선 말의 정치가. 본관은 은진이며 함남 장진에서 출생하였다. 서울에 올라와 민영환의 식객으로 있다가 무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1884년, 갑신정변 후 밀령을 받고 김옥균을 암살하러 일본에 갔다가 도리어 그의 정신에 공명하여 동지가 되어 귀국하였다. 1886년 김옥균 일파로 몰려 구속되었으나, 민영환의 도움으로 풀려나왔다. 그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체포령이 내리자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며,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귀국하였다. 윤시병·이용구 등과 함께 '일진회'를 조직하여 일본의 앞잡이로 활동하였으며, 1907년 이완용 내각의 농상공부 대신·내부대신을 지내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경술국치 성사의 공으로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송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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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象賢(1551∼1592)

조선의 문신. 자는 덕구, 호는 천곡, 본관은 여산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정랑과 군자감의 정 등을 지냈다. 1584년에는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으며, 1591년 동래 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이 함락되고, 이어 동래에 쳐들어온 왜병과 싸웠을 때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관복을 갑옷 위에 입고 북쪽의 임금께 절을 올린 후 성문의 누각에 앉아 태연히 잡혀 죽었다. 적장이 그의 충절에 탄복하여 송상현을 살해한 자기 부하를 잡아 죽이고, 그를 동문 밖에 장사 지내 주었다 한다. 그 후 조정에서 그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 주었다.

송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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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純(1493∼1583)

조선의 문신. 자는 수초, 호는 면앙정, 본관은 신평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명종 때 주문사로 명에 다녀왔다. 이 황 등 신진 유학자와 대립했으며, 선조 때 대사헌·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으며 나이가 많아 기로소에 들어갔다. 전남 담양에 석림정사와 면앙정을 짓고 독서와 시조를 지으며 여생을 지냈다.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이며 저서로 「면앙집」 「기촌집」 등이 있다.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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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時烈(1607∼1689)

조선의 학자·정치가. 자는 영보, 호는 우암, 본관은 은진이다. 김장생의 제자로 인조 때 사마시에 장원 급제하여 경릉 참봉이 되었다. 이어서 봉림 대군(후의 효종)의 스승이 되었으며,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송시열은 왕을 보좌하면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왕에게,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 세금 제도인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했으며, 농업을 장려하도록 간하였다. 그는 서인의 지도자로서 남인과 맞섰으며, 한때 당파 싸움으로 인하여 거제도로 귀양가기도 하였다. 당시 서인파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졌다. 1689년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려 숙종의 미움을 사 제주도로 귀양가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 후 5년 만에 조정에서 관작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렸다. 그는 평생을 주자학 연구에 바쳤으며 '이기일원론'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성격이 과격하여 많은 정적을 가졌으나,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그는 당파 싸움으로 혼란했던 당시에도 학문에 뜻을 두어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후에 '송자'라는 성인의 칭호를 받음으로써 유명하게 되었다. 저서로 「주자대전차의」 「이정서분류」 「문집」 등이 있다.

송익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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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翼弼(1534∼1599)

조선의 학자. 자는 운장, 호는 구봉, 본관은 여산이다. 이 이·성 혼 등과 사귀어 성리학을 논하여 통하였고 예학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시와 글씨에도 탁월하였다. 김장생·정 엽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특히 김장생은 스승의 예학을 계승하여 조선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송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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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寅明(1689∼1746)

조선의 문신. 자는 성빈, 호는 장밀헌, 본관은 여산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영조 때 동부승지가 되어 탕평책의 선두로서 당쟁을 막고 질서를 바로잡는 데 공을 세웠다. 그 후 왕명으로 박사수와 함께 「감란록」을 편찬하였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송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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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浚吉(1606∼1672)

조선의 문신. 자는 명보, 호는 동춘당, 본관은 은진이다. 김장생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효종이 즉위하자 사헌부 집의로 기용되어 당시 정치를 어지럽히던 김자점을 몰아냈다. 1659년 병조판서가 되어 송시열과 함께 노론의 지도자가 되었다. 효종이 죽자,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로 송시열과 함께 윤 휴·윤선도의 공격을 받고 스스로 물러나 회덕에서 은거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영조 때 문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동춘당집」 「어록해」 등이 있고, 글씨로 「이시발 신도비」 등이 있다.

송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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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鎭禹(1889∼1945)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고하이며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김성수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한편, 중앙중학교 교장으로 육영사업에 힘썼다. 3·1운동 때 독립운동을 지도하다가 1년간 복역하였다. 1921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만주 크리스트교 청년회 주최 태평양 회의에 대표로 참석하여 다시 투옥되었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지도하였으며, 광복이 되자 한국 민주당을 조직하여 수석 총무로 있으면서 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하다가, 이 해 자택에서 한현우에게 암살당하였다.

송치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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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穉圭(1759∼1838)

조선의 학자. 자는 기옥, 호는 강재, 본관은 은진이다. 김정묵 문하에서 배울 때 너무 온순하여 스승이 호를 강재라 지어주었다. 순조 때 이조참판까지 내렸으나 모두 사퇴하고, 현종 때 정헌 대부에 올랐다. 천성이 온순하고 의리에 투철하여 그가 죽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문인 100여 명이 모두 상복을 입고 상여를 따랐다. 이 이·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하여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였으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송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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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翰弼

조선의 학자. 자는 계응, 호는 운곡, 본관은 여산이다. 송익필의 동생으로 당시의 대학자 이 이가 말하기를 "성리학을 가지고 논할 사람은 한필과 익필밖에 없다"고 하였다.

수로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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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路夫人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의 부인. 남편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벼랑에 핀 철쭉꽃을 갖고 싶어하자,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이를 꺾어 주면서 「헌화가」를 지어 바쳤다 한다. 그런데 수로 부인이 임해정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용이 나타나 수로 부인을 바다 속으로 끌고 갔다. 그 때 한 노인이 순정공에게 "근처의 백성을 모아 노래를 부르게 하고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이 나올 것이다"고 하여 그 말대로 하였더니 수로 부인이 나왔다고 한다. 수로 부인은 절세미인이어서 산과 바다를 지날 때, 여러 번 신들에게 붙들려 갔다고 한다.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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肅宗(1054∼1105) 고려 제15대 왕(재위 1095∼1105). 문종의 셋째 아들이며 순종의 동생이다. 문종 때 계림공에 봉해지고 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왕위를 빼앗고 즉위하였다. 1096년 주전관을 두고 주화인 은병을 만들어 사용케 하였으며, 1102년에 해동통보를 만들어 통용케 하였다. 또한 평양에 기자의 무덤을 만들고 사당을 세웠다. 1104년 여진족의 추장 우야소가 침입하자, 임 간을 보내어 방어하게 하였으나 패하였다. 다시 윤 관을 보내어 화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로써 정주 장성 밖에 있는 여진 부락은 여진족의 지배가 되었다. 그 후 윤 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비를 강화하려 하였으나 병을 얻어 죽었다.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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肅宗(1661∼1720) 조선 제19대 왕(재위 1674∼1720). 현종의 아들로 1667년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674년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중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비교적 태평 성대하였으나, 당쟁이 가장 심했던 시기로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의 당파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희빈 장씨를 왕비에 책봉하였으며, 왕비 민씨를 폐위시키는 사건이 일어나, 이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었다. 그러나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왕은 선조 말 이래 계속된 사업인 대동법을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하여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왜란·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 개혁을 추진하여 종결지었으며, 주전을 본격적으로 시행하여 중앙관청과 지방관아 등에 통용토록 하였다. 특히 쓸모없는 땅으로 버려 둔 압록강변에 무창·자성의 2진을 신설하여 영토 회복운동을 시작하고, 1712년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를 세워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또한 종래 4영이던 군제에 금위영을 만들어 5영이 되게 하였으며, 「선원록」 「대명집례」 등의 간행과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되었다. 특히, 쟁쟁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718년부터 병으로 왕세자(후의 경종)에게 대신 정사를 돌보게 하였으며, 1720년 위독해지자 사관의 입회 없이 이이명에게 연잉군(후의 영조)을 경종의 후계자로 삼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겨 신임사화의 화근을 만들었다.

순정효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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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貞孝皇后(1894∼1966)조선 순종의 왕후. 본관은 해평이며 해풍 부원군 윤택영의 딸이다. 1906년 13세의 나이로 동궁 계비로 책봉되었으며, 1907년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경술국치 때 친일파들이 조약에 도장을 찍을 것을 순종에게 강요하자, 왕의 도장인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작은아버지 윤덕영에게 빼앗겼다. 1926년 순종이 죽자 왕자가 없었으므로 왕의 이복동생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늙어서는 불교를 믿었으며, 낙선재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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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祖(1790∼1834)

조선의 제23대 왕(재위 1800∼1834). 정조의 둘째 아들이며 11세에 왕위에 올랐다. 1801년 최초로 천주교를 탄압하여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안동 김씨 김조순이 세도하던 시기로 시파·벽파의 당파가 서로 모략하여 조정이 문란하였으며, 지방은 탐관오리의 득세로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재위 기간 중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으며,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 나라가 불안하였다.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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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宗(1874∼1926)

조선의 마지막 왕(재위 1907∼1910). 고종의 둘째 아들로 1875년 세자에 책봉되었다. 1897년 황태자로 다시 책봉된 후에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묻는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이 물러나자 즉위하였다. 융희로 연호를 고치고 영친왕 은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그 해에 일본과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였으며, 이에 일본은 통감부를 두어 내정 감독권을 가졌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러자,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모두 일본에 의해 진압당하였다. 1908년 동양 척식 회사의 설립을 허락하고, 이듬해 사법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점차 일본에 그 실권을 넘기게 되었다. 1910년 마침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 왕조는 27대 518년 만에 망하고, 이후 36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일본은 순종을 창덕궁에 있게 하고 이왕(李王)이라 불렀다.

승화후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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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化侯溫(?∼1271)

고려 원종 때의 왕족. 원종이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때 삼별초를 지휘하던 배중손 등이 끝까지 반대하자, 조정에서 삼별초 명부를 압수하고 해체를 명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장군 배중손 등은 1270년 강화에서 반란(삼별초의 난)을 일으키고 승화후 온을 강압적으로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계속 이탈자가 늘어나자 진도로 옮겼는데, 이듬해 여·몽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아들 환과 함께 원의 홍다구에게 잡혀 죽었다.

신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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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劍(?∼936)

후백제의 제2대 왕(재위 935∼936). 견훤의 큰아들로 견훤이 10여 명의 아들 중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양검·용검 등의 도움을 받아 935년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죽인 다음 왕위에 올라 대왕이라고 했다. 그 해 왕 건이 탈출한 견훤과 함께 공격해 오자 패하였으나 용서되어 왕 건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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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庚林(1935~ )

시인. 충북 중원 출생. 동국대 영문과 졸업. 1956년 「문학예술」 잡지에 「갈대」를 비롯한 시들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한때 고향에 내려가 지내다가 다시 서올로 와 잡지사·출판사 등에 취직해 지내며 시작을 중단했고, 71년 가을호 「창작과 비평」에 「농무」 「전야」 「서울로 가는 길」 등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면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재출발 이후의 그의 시들은 '시골의 흙냄새에 묻어서 풍기는 생활의 땀냄새와 한(恨)과 의지 등'이 짙게 풍겨 이른바 민중시인이란 지칭을 얻게 했다. 한편 농민문학·민중문학 등을 주제로 평론들도 발표하였다. 현재 「창작과 비평」 편집 자문위원으로 있다. 저서로 시집 「농무(農舞)」 「새재」 「남한강」, 평론집 「민중과 문학」 등이 있다.

신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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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景濬(1712∼1781)

조선의 실학자. 자는 순민, 호는 여암, 본관은 고령이다. 해박한 지식과 높은 학덕으로 천(天)·관(官)·직(職)·방(方)·성(聲)·율(律)·의(醫)·복(卜) 등의 학문과 해외의 기서뿐 아니라 우리나라 언어·지리에도 도통하였다. 그는 치밀한 연구 업적을 「훈민정음 운해」 「도로고」 등의 저서를 통해 정리하였다. 40세가 넘은 후인 175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서산 군수·사간 등을 지냈다. 1770년 「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여지고」를 담당하여 그 공으로 승정원 동부승지에 뽑힌 후 「팔도지도」 「동국여지도」를 완성하였다. 그 후 강계 부사·순천 부사·제주 부사 등을 지내다가, 1779년 고향인 순창으로 내려갔다. 저서로 「소사문답」 「의표도」 등이 있다.

신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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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圭植(1880∼1922)

독립운동가. 자는 공집, 호는 예관이며 청주에서 출생하였다. 외국어학교에 들어가 중국어를 배우고 구한국군의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부위가 되었다. 그 후 대한 자강회·대한협회 등 독립단체에 들어가 활약하였고, 1909년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1년 중국에 건너가 쑨원의 신해혁명에도 가담하였으며, 중국 국민당 간부들과 사귀어 한·중 연합단체를 만들어 본격적 독립 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이 되고, 이듬해에는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의 자격으로 중국 광둥 정부에 특파되어 쑨원과 교섭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1922년 임시 정부 내에 내분이 생기고 중국 광둥 정부에도 정변이 생겨 쑨원이 피신하는 사태가 생기자, 민족의 앞날을 근심한 나머지 25일간 단식 끝에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한국혼」 「아일루」 등이 있다.

신덕 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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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德王后(?∼1396)

조선 태조의 계비. 본관은 곡산이고 상산 부원군 강유성의 딸로 태조가 즉위하자 현비에 책봉되었다. 방번·방석 두 왕자와 경순 공주를 낳았고, 현종 10년 순원현경의 휘호를 추상받았다.

신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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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旽(?∼1371)

고려 말의 승려. 속성은 신, 이름은 편조, 자는 요공, 호는 청한거사이다. 옥천사 사비의 아들로 승려가 되어 전국 각지를 방랑하다가 김원명의 추천으로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정치·종교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전민 변정도감을 두고 과감한 개혁 정치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고려 내부의 혼란한 사회적 폐단을 타개하여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신 돈은 부호들이 빼앗은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노비로서 자유민이 되려는 자들을 해방시켜 민심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 개혁은 상층 계급의 반감을 샀으며, 점차 오만해지고 음란 방탕한 행동을 하므로 신망을 잃었다. 1367년 영록대부 집현전 대학사에 올라 귀족 세력을 무너뜨리고자 천도를 건의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왕의 신임을 잃자, 반역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수원에 유폐된 후, 1371년 처형되었다.

신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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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乭錫(?∼1906)

조선 말기의 의병장. 경북 영덕에서 출생하였으며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위급해지자, 1906년 울진군 평해면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일본인을 죽이는 등 당시 영남지방에서 그 세력이 매우 컸다. 이 때 일본 경찰이 신돌석의 체포에 현상금을 걸었는데, 그의 고종 사촌인 김자성이 그를 집에 초대하여 독한 술을 먹여 도끼로 살해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신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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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東曄(1932∼1969)

시인. 충남 부여에서 출생하였으며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수료하였다. 1959년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1967년 펜클럽 작가 기금을 받은 것을 계기로, 그동안 구상해 오던 장편 서사시 「금강」을 집필했다. 이 서사시는 강렬한 민중의 의지와 민족을 주체로 한 역사관을 가지고 동학혁명을 시화한 우리나라 시문학 사상 획기적인 작품이다. 시론과 시극 운동에도 참여하여 시론으로는 「시인 정신론」 등이 있고,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시극 동인회에 의해 상연되었다. 작품으로는 「삼월」 「껍데기는 가라」 「4월은 갈아엎는 달」 등이 있다.

신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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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武王(?∼839)

신라의 제45대 왕(재위 839). 성명은 김우징이고 원성왕의 증손이며 상대등 균정의 아들이다. 836년 흥덕왕이 죽고 김제륭(후의 희강왕)이 김 명(민애왕)·이 홍 등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르려 하자, 아버지 균정을 추대하여 싸웠으나 패배하고 청해진 대사 장보고에게로 도망쳤다. 839년(민애왕 2) 장보고를 움직여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장보고를 감의군사에 명하였으며 이 해 반대파의 저주를 받고 죽었다.

신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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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文王(?∼692)

신라 제31대 왕(재위 681∼692). 문무왕의 큰아들로, 665년 태자에 책봉되었다. 682년 국학을 설립하여 학문을 장려했으며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군에 분산, 거주하게 하였다. 685년 완산주·거열주를 설치하여 9주를 정비했고 봉성사·망덕사를 창건했다. 이듬해, 당으로부터 예기·문장에 관한 서적 50여 권을 들여왔고, 689년 관리에게 주던 녹읍제를 폐지하고 조(租)로써 대치하였다. 이 밖에도 일본·당과 사신의 내왕을 빈번히 하였으며 설총·강 수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는 등 신라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신사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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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師任堂(1504∼1551)

조선의 여류 문인·서화가. 호는 사임당, 본관은 평산이다. 이 이의 어머니로 천성이 온아하고 지조가 높아 현모양처의 덕을 갖추었다. 어려서 경전을 익히고 문장·바느질·자수에 이르기까지 그 재능이 뛰어났다. 7세 때 안 견의 화법을 배워 산수도·포도화를 그렸으며 점차 여성적인 섬세함과 정묘함을 더하여 그를 따르는 자가 없었고 필법에도 능하였다.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후세에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가 그린 병풍과 족자가 전한다. 그림으로 「자리도」 「산수도」 「초충도」 「오이와 개구리」 등이 있다.

신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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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錫九(1875∼1950)

독립운동가. 호는 은재이며 청주에서 출생하였다. 크리스트교에 입교하여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2년간 복역하였다. 광복 후 진남포에서 반공 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는데, 이 때문에 6·25전쟁 때 공산주의자에 의해 총살당했다.

신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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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夕汀(1907∼1974)

시인. 본명은 석정(錫正)이며 전북 부안에서 출생하였다.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공부하였으며, 전북대·영생대 등에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 시작에 전념하였다. 전형적인 자연 시인이라 불리는 그의 작품은 심화된 자연숭배의 사상이 짙고 특히 산을 즐기고 산에 사사하며, 산을 철학한 속에서 자연을 노래한 소박하고 간결한 형식이 많았는데, 후기에 와서는 인생과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1969년 한국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슬픈 목가」 「빙하」 「산의 서곡」 등이 있다.

신석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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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石艸(1909~1976)

시인. 본명은 음식. 충남 서천 출생. 일본 호세이 대학 철학과 수학(1931). 1935년 신병으로 귀국, 한학(漢學)의 스승인 정인보(鄭寅普)의 소개로 시인 이육사(李陸史)와 사귀게 되었다. 그때 육사가 가져간 「비취단장(翡翠斷章)」 「바라춤 서사(序詞)」 「뱀」 「검무랑」 「파초(芭蕉)」 등 시 작품들이 육사를 통해 1935년부터 1940년까지 동인지 「자오선(子午線)」 「시학(詩學)」 「문장(文章)」 등에 발표됨으로써 시단에 알려졌다. 주요 작품으로는 장시 「바라춤」 「낙와(落瓦)의 부(賦)」 「불춤」 「어떤 가을 날에」 「만사(輓詞)」 등이 있다. 시집으로 「석초시집」 「바라춤」 「폭풍의 노래」 등이 있다. 1965년 시인 협회장을 역임했으며, 1969년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신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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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叔舟(1417∼1475)

조선의 학자·문신. 자는 범옹, 호는 보한재, 본관은 고령으로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1443년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서 그의 뛰어난 시 재능을 보여 이름을 떨쳤으며 쓰시마 섬에 들러 계해약조를 체결하였다. 그 후 사신들이 일본에 갈 때마다 신숙주의 안부를 묻곤 하였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가장 공이 컸으며 수양 대군(후의 세조)과 함께 사은사로 명에 같이 간 일이 있었는데, 1453년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도왔다.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사건이 탄로되어 처형되자, 단종과 금성군의 처형도 주장하여 1457년 마침내 모두 죽게 하였다. 1460년 강원도·함길도 도체찰사가 되어 야인들을 소탕하고 돌아왔으며 예종이 어려서 즉위하자, 원상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정사를 돌보았다. 그는 6대 왕을 모신 공이 크나,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후세의 비난을 받았다. 예종이 재위 1년으로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경국대전」 「세조실록」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여진과 일본의 지도를 만들었으며 왕명으로 「오례의」 「동국통감」 등도 편찬하였다. 저서로 「해동제국기」 「보한재집」 등이 있다.

신숭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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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崇謙(?∼927)

고려의 개국 공신. 본관은 평산이며 평산 신씨의 시조이다. 배현경·홍 유·복지겸 등과 모의하여 궁예를 몰아내고 왕 건을 추대하였다. 927년 신라를 도와 공산에서 견훤과 싸우다가, 태조가 위급하게 되자 김 낙 등과 함께 태조를 구하고 전사하였다. 1120년 예종은 두 장군을 추도하여 「도이장가」를 지었다.

신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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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緯(1769∼1847)

조선의 시인·서화가·학자. 자는 한수, 호는 자하, 본관은 평산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었고 14세 때 정조가 그를 불러 크게 칭찬하였다. 1799년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이조참판을 지냈다. 당시 시·서·화의 3절로 일컬어졌으며, 조선 이래 시작이 가장 많았었고 백년 이후의 시인들도 모두 그를 작시법의 스승으로 추대하였다. 그가 쓴 「동인론 시절구 35수」는 신라의 최치원으로부터 그 당시까지의 시인들의 작품을 평가해 놓은 대표적인 평론집이라 할 수 있다. 저서로 「경수당전고」 「분여록」 등이 있다.

신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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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潤福(1758∼?)

조선의 화가. 자는 입부, 호는 혜원, 본관은 고령이다. 당시 서민 사회의 풍속을 매우 세밀하게 잘 그려 김홍도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힌다. 화원으로서 벼슬은 첨정을 지냈을 뿐이다. 같은 풍속도를 그린 김홍도의 그림이 익살스럽고 신선한 반면, 신윤복의 풍속화는 기생이나 무당의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또한 시골 주막의 서민적인 풍속을 날카로운 화필로 잘 그려냈다. 이것은 양반 사회에 대한 예술가로서 저항을 표현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주유도」 「단오 수변 희희도」 「주막도」 등이 있다.

신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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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翊聖(1588∼1644)

조선의 문신. 선조의 딸인 정숙 옹주의 남편으로 자는 군석, 호는 낙전당, 본관은 평산이다. 12세에 정숙 옹주와 결혼하여 동양위에 봉해졌으며, 광해군 때 폐모론을 적극 반대하였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왕을 모시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주화파 대신들이 세자를 적에게 인질로 보내 화의를 맺자고 주장하자 칼로 위협까지 해가며 반대하였다. 후에 김상헌·최명길 등과 함께 선양으로 잡혀갔으나, 후에 소현 세자의 덕으로 무사하였다. 효성이 지극하고 글과 글씨에 능했다. 저서로 「낙전당집」이 있다.

신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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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翼熙(1894∼1956)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해공, 본관은 평산이며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1911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재학중 학생 운동을 벌이고 기관지 「학지광」을 발간하였다.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19년, 3·1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상하이로 망명했고 임시정부 외무부장·내무부장 등을 지냈다. 8·15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부위원장·자유신문사 사장·제헌국회 2대 의장 등을 지냈다. 1955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하여 국민의 열렬한 지지 속에 호남 지방 유세 중 열차 안에서 죽었다. 국민장으로 지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신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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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2∼1725)

조선의 문신. 자는 화신, 호는 한죽, 본관은 평산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판서에까지 올랐다. 1722년 김일경 등이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파의 중요 인물들을 죽이거나 유배시키는 데 항의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영조가 즉위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와 글씨에 능했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유집 몇 권이 전한다.

신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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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砬(1546∼1592)

조선의 장군. 자는 입지, 본관은 평산이다. 22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도총·진주 판관 등을 지냈다. 1583년 은성 부사로서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왔다. 그 후 함경북도 병사·평안 병사·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순변사에 임명되어 충주의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왜장 고니시가 지휘하는 적과 접전을 벌였다. 양쪽으로 협공당하여 패하자 부하 장수 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는 특히 선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싸움터로 갈 때 선조가 검을 하사하면서 격려해 주기도 하였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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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在孝(1812∼1884)

조선 말의 가인. 자는 백원, 호는 동리, 본관은 평산이다. 전북 고창에서 출생하였으며 40여 세까지는 집안 일에 종사하다가 이후 판소리 연구에 전력하였다. 고종 때 오위장을 지냈으며, 당시까지만 해도 판소리는 기생이나 광대들이 아무 계통 없이 불러왔는데, 그는 이를 통일하여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 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등 6가지로 체계를 세우고 독특한 창의로 판소리 사설 문학을 이루었다. 또한, 「춘향전」 「박타령」 「토끼타령」 「심청전」 등을 개작하여 창극화하였다. 그의 전 작품에는 서민적인 해학성과 사실성이 넘치고 있다. 문하에서 김세종·정춘풍·채 선·허 금 등 많은 명창을 길러냈다. 시문집이 전해진다.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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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采浩(1880∼1936)

조선 말의 사학자·언론인. 호는 단재, 본관은 평산이다. 13세 때 칠서를 읽은 천재이며 20여 세에 성균관 박사를 지냈다.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에 논설을 실어 독립정신을 북돋우기에 전념하였다. 경술국치 후 중국에 망명하여 상하이와 베이징 등지로 다니며 독립운동에 관계하였다. 또한 국사 연구와 저술에도 힘쓰다가, 무정부주의자 비밀결사 사건으로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10년 징역을 받고 여순 감옥에서 복역중 8년 만에 옥사하였다. 그는 순수한 민족주의적 역사관으로 당시 식민주의적인 모든 학설을 배격하였으며, 우리나라 언론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조선 상고사」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조선사 연구초」 등이 있다.

신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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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忠

신라의 승려·정치가. 효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자기 집 잣나무 아래서 서로 바둑을 두면서 장차 즉위하면 등용시키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효성왕이 잊고 찾지 않으므로 원망하는 노래 「원수가」를 지어 그 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곧 말라죽었다. 그 후 왕이 뉘우치고 신충을 불러 등용하자,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경덕왕 때(757년)에는 상대등이 되었다가, 763년 사임하고 승려가 되어 단속사를 창건하고 효성왕의 명복을 빌었다.

신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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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洪植(1872∼1937)

독립운동가. 충북 청원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공주 감리교회와 평양 남산현교회의 목사로서 신앙 생활과 민족 단결을 호소하였다. 3·1운동 때, 기독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2년간 복역하였다. 그 후에도 종교운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해 여러 번 감옥에 갇히었으나 끝까지 민족사상 고취에 노력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신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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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欽(1566∼1628)

조선의 학자·문신. 자는 경숙, 호는 상촌, 본관은 평산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감찰·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 양재도 찰방으로 삼도 순변사 신 입을 따라 조령 전투에 참가했으나, 신 입이 패하자 강화에 들어갔다가 체찰사 정 철의 종사관이 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사헌으로서 세자 책봉 주청사가 되어 명에 다녀왔다. 선조로부터 영창 대군을 보필하라고 부탁 받은 7대신 중의 한 사람으로, 1613년 계축옥사 때에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우의정을 지냈으며, 정묘호란 때 세자를 모시고 전주에 피란갔다가 돌아와서 영의정이 되었다. 장 유·이 식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진다. 저서로 「상촌집」 「산중독언」」 「야언구정록」 등이 있다.

실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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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聖王(?∼417)

신라 제18대 왕(재위 402∼417).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401년 돌아왔으며, 이듬해 내물왕이 죽자 어린 왕자를 대신하여 왕위에 올랐다. 즉위하기 전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401년에 귀국한 실성왕은 즉위하자 일본과 수호하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일본에,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405년 명활산성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쳐 쓰시마 섬을 침략할 것을 계획하였다가 반대하는 자가 많아 취소하였다. 417년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를 죽이려고 계획하다가 오히려 그에게 살해되었다.

심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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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師正(1707∼1769)

조선의 화가. 자는 이숙, 호는 현재, 본관은 청송이다.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중기 화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어려서는 정 선에게 배웠다. 그는 대륙풍의 웅건한 화풍을 이루어 중국에까지 그의 그림이 알려졌다. 특히 화초·벌레·털짐승·산수에 뛰어나 명작을 많이 남겼다. 그림으로 「강상야박도」 「귀렵도」 「하경산수도」 등이 있다.

심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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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守慶(1516∼1599)

조선의 문신. 자는 희안, 호는 청천당, 본관은 풍산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 등을 지냈다. 1590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지휘하였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저서로 「청천당 시집」 「청천 유한록」 등이 있다.

심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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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連源(1491∼1558)

조선의 문신. 자는 맹용, 호는 보암, 본관은 청송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대교·봉교 등을 거쳐 명종 때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의 문장은 아름다우면서도 날카로웠으며, 중국과의 국경선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제주 목사로 있을 때 산과 강의 높낮이·굴곡 등을 자세하게 지도로 잘 그려 두었다가, 1555년 해적들이 쳐들어오자 이를 이용하여 잘 막아내었다.

심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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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溫(?∼1418)

조선 세종의 장인. 자는 중옥, 본관은 청송으로 세종의 비 소헌 왕후의 아버지이다. 11세 때 고려의 감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했고, 조선에 들어와 영의정에 이르렀다. 태종 때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태종 비난 사건에 연루되어 압록강에서 체포되고, 수원으로 압송되어 자결하였다. 그 사건은 처음 심 온의 동생인 심 정이 도총제로서 병조판서 박 습과 같이 상왕(태종)을 비난한 것이 심 온의 선동이라고 인정된 것이며, 박 습은 먼저 처형되었다. 좌의정 박 은이 심 온을 비난한 바 있어 심 온의 유언대로 대대로 후손에 이르기까지 박씨와 결혼하지 않았다. 뒤에 세종의 명으로 복관되었다.

심의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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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義謙(1535∼1587)

조선의 문신. 자는 방숙, 호는 손암, 본관은 청송이다. 인순 왕후(명종의 비)의 동생이며 이 황의 제자로, 명종 때 급제하여 병조좌랑·부수찬·교리·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그는 척신 출신이지만 구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사림들간에 명망이 높았다. 1572년 김종직 계통의 신진 세력으로서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그가 일찍이 권신이던 윤원형의 집에서 묵은 사실을 들어 권력가에 아부했다 하여 반대하였다. 1574년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이 되었고, 이듬해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후임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대립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구세력은 그를 중심으로 서인이라 했으며, 신진 세력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동인이라 하였다. 그 후 당쟁이 커질 것을 염려한 이 이의 조정으로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가 사직하였다. 1584년 이 이가 죽은 후 동인이 득세하고, 서인이 몰락하자 파직당하였다. 그의 날카롭고 비타협적인 성격은 당쟁의 실마리를 만들어 조선 왕조의 치명적인 적폐의 요인이 되게 하였다.

심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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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之源(1593∼1662)

조선의 문신. 자는 원지, 호는 만사, 본관은 청송이다.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오르지 않고 은거하였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검열을 지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왕을 모셨다. 1657년 동지사 겸 사은사로 청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심충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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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忠謙(1545∼1594)

조선의 문신. 자는 공직, 호는 사양당, 본관은 청송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까지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변사 제조로서 선조를 평양으로 모시었다. 이듬해 호조·병조참판으로 군량미를 조달하는 데 크게 활약하였다. 죽은 후에 청림군에 추봉되었으며, 서도에도 뛰어났다.

심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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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薰(1904∼1937)

소설가·영화인. 본명은 대섭, 호는 훈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제일고보에 재학중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 상하이로 건너가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1923년부터 동아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의 기자로 있으면서 시와 소설을 쓰고, 1925년에는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영화계에 데뷔, 1926년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하였다. 그 후 「동방의 애인」 「영원의 미소」 등 장편소설을 발표했으며, 1934년 「상록수」가 동아일보에 당선되어 작가적 지위를 얻었다. 그는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현상 소설에 당선하자 그 상금으로 당진에 상록 학원을 설립하였다. 그의 작품은 주로 대중적이고 계몽적인 것으로, 특히 「상록수」는 그 당시 브나로드라는 민족주의 운동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었다. 저서로 「황공의 최후」 「그 날이 오면」 「한국 현대문학사」 등이 있다.


아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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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非知

백제의 석공. 신라 선덕 여왕 때 자장 법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황룡사에 탑을 세울 뜻을 여왕께 아뢰니 여왕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백제에 가서 석공을 데려오도록 하였다. 이에 아비지가 초청되어 일을 시작하였는데, 처음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 그는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고 일손을 멈추었다. 그러자 갑자기 뇌성이 울리고 늙은 중과 장사 한 사람이 나타나서 절의 기둥을 세우고 어디론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에 그는 백제의 운이 다했음을 깨닫고 탑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황룡사의 9층탑인데, 몽고의 침입 때 불타버렸다.

아좌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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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佐太子

백제의 화가. 위덕왕의 아들로 597년 일본에 건너가서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그림이 호류사에 보관되었으나, 1949년에 불타버렸다. 그의 화법은 일본 회화계의 원천이 되었다.

아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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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直岐

백제의 학자. 근초고왕의 사신으로 말 2필을 끌고 일본에 가서 오진 천황에게 바치고, 말 기르는 일을 맡아보다가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또한 백제의 박사 왕 인을 추천하여 일본에 한학을 전하게 하였다.

안 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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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堅

조선 초의 화가. 자는 가도, 호는 현동자, 본관은 지곡이다. 도화원의 화원으로 있으면서 안평 대군의 사랑을 받았다. 천성이 총명하여 옛 그림들의 높은 경지를 모두 깨닫고 그 장점들을 모아 절충한 화풍을 일으켰다. 주로 산수를 즐겨 그렸으며, 안평 대군이 꿈에서 보았다는 '세종의 들놀이' 모습을 그린 「몽유도원도」는 유명한 작품이다. 그 밖에 「청산백운도」 「적벽도」 「동경산수도」 등이 있다.

안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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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敬信(1895∼?)

여류 독립운동가.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에서 군중을 선동,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20여 일 동안 구류를 살았다. 이 해 11월 오신도·안정석과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활약하다가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 해 미국 의원단이 우리 나라에 오자, 평남 안주에서 경찰 1명을 쏘아 죽인 후 평남 도청에 폭탄을 던졌다. 1921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0년으로 감형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안국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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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國善(1854∼1928)

근대 신소설 작가. 1907년(융희 1)에 「연설 방법」을 썼고, 신소설로는 특이한 우화 소설 「금수회의록」을 썼다. 한국 최초로 근대적 단편집 「공진회」를 발간하였다.

안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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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玟英

조선 철종 때의 가인. 자는 성무, 호는 주옹으로 서얼 출신이다. 1876년(고종 13) 스승 박효관과 함께 조선 역대 시가집 「가곡원류」를 편찬·간행하였는데, 여기에는 그의 시조 「영매가」 외에 26수가 실려 있다. 저서로는 「마옹만필」 「금옥총서」 등이 있다.

안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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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秉煜(1920∼

)

철학자. 평남 용강에서 출생하였으며 1943년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58년 「사상계」의 주간을 거쳐 연세대와 서울대 강사를 지냈으며, 1969년 숭전대 교수가 되었다. 1961∼62년에는 미국의 코넬 대학과 배서 대학에 교환 교수로 초빙되어 한국의 문화사를 소개하였으며, 귀국 후 숭실대 교수로 있으면서 많은 철학서를 집필·발표하였다. 저서로 「현대사상」 「철학 노트」 「사색인의 향연」 등이 있다.

안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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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壽吉(1911∼1977)

작가. 호는 남석으로 흥남에서 태어나 경신학교를 거쳐 와세다 대학 영어과를 수학하였다. 젠다오 일보사 기자로 근무하면서 동인지 「북향」을 발간하였다. 월남 후 경향신문사 조사부장·해군 정훈감실 근무,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문단」에 단편 소설 당선을 계기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사실적이며 성실한 관찰과 온건한 필치가 어울려서 하나의 착실한 작품세계를 이루었다. 1954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창작집 「제3인간형」 「풍차」, 장편 「화환」 「북간도」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안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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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勝

고구려 부흥 운동 때 추대된 왕. 나·당 연합군에 의해 망한 고구려는 670년 고구려의 장군인 검모잠이 부흥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왕족이었던 안 승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 때 당에서 고간을 보내어 이들을 진압하자, 안 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신라의 문무왕은 자기의 누이동생을 안 승의 아내로 삼게 하고 소판이라는 벼슬과 김씨 성까지 주었다.

안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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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龍福

조선 숙종 때의 민간 외교가·어부. 동래부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말을 잘하였다. 당시 쓰시마 섬의 성주가 울릉도를 일본의 영토인 죽도라고 하며 고기잡이와 벌목을 마음대로 하자, 안용복은 1693년 울릉도로 건너가 일본인들을 모두 몰아냈다. 1696년 단독으로 일본의 에도에 가서 울릉도·우도의 감세관이라 자칭하고, 일본 정부에 대하여 고기잡이와 벌목의 불법성을 항의하여 울릉도가 우리 영토임을 승인한 문서를 받아냈다. 돌아오던 길에 쓰시마 섬에서 잡혀서 문서는 빼앗기고 조정에 압송되어 나라의 허락 없이 국제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 후 쓰시마에서 자기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울릉도를 우리 땅으로 확인한다는 통지를 보내 왔다. 그러나 안용복의 죄는 풀리지 않았다.

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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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祐(?∼1362)

고려의 장군. 탐진 안씨의 시조로 1352년 군부판서를 거쳐 안주 군민 만호라는 자리에 있었다. 1359년 홍건적이 쳐들어와서 의주·정주·인주 등지가 함락되자 이방실 등과 함께 적을 크게 무찌르는 공을 세웠으며 적의 장수를 생포한 공로로 공신의 호를 받았다. 1361년, 다시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박주·개천 등지에서 크게 이겼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던 김 용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안익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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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益泰(1905∼1965)

작곡가·지휘자.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양 숭실학교를 거쳐 일본 국립 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하였다. 19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학교를 거쳐 신시내티 음악학교에서 첼로와 작곡을 전공하였다. 1936년 유럽에 건너가 이듬해 빈에서 슈트라우스에게 지도를 받았으며 영국 민요에 따라 부르던 애국가를 새로 작곡하였다. 1939년 부다페스트 국립 음악학교에서 배우고 지휘자로서 각국을 순례하여 교향악단을 지휘하였다. 에스파냐의 타라베라와 결혼하여 에스파냐 국적을 얻어 마드리드 마욜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그 후 영국의 로열 필하모닉, 이탈리아의 로마 교향악단을 비롯하여 유명한 200여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지휘자로서 베토벤·브람스·드보르작·리하르트·슈트라우스 등의 작품을 즐겨 지휘하였다. 1965년 런던 뉴 필하모닉 교향악단의 초청 지휘자로 최후 작품인 「애(哀)! 강상의 의기 논개」를 연주하고 그 해 스페인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1957년 문화 포상을 받고 1965년 문화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 「한국 환상곡」 「애국 선열 추도곡」 등이 있다.

안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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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在鴻(1891∼1965)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민세이며 본관은 죽산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를 졸업했으며,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1927년 신석우·백관수 등과 같이 '신간회'를 조직하여 일본에 항거하는 한편, 조선일보 주필과 사장 등을 지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당했고, 8·15광복 후 국민당을 조직하여 총재가 되었으며 이어 한독당 중앙위원·민주의원·민정장관을 지낸 뒤 중앙농민학교를 운영하였다. 1950년 평택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때 납북되었다.

안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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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鼎福(1712∼1791)

조선의 학자. 자는 백순, 호는 순암,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일찍이 과거에 응할 생각을 버리고 이 익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영조 때 의영고 봉사·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그 후 은퇴하여 고향 덕곡에서 20년 동안 저술에 힘썼다. 1772년 왕세손(후의 정조)의 스승으로서 남다른 대우를 받았으며, 1776년 목천 현감으로 있으면서 좋은 정치를 베풀었고, 후에 동지중추 부사에 올라 광성군에 봉해졌다. 그는 실제 생활에 직접 도움이 되는 실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역사학에 전심하여 「동사강목」을 저술하였다. 또한 천주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여 당시 학자들이 천주교에 빠지는 것을 경고하였다. 저서로 「하학지남」 「회현록」 「가례집해」 등이 있다.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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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1879∼1910)

조선의 항일 의사. 어릴 때의 이름은 응칠이며, 교명은 도마, 본관은 순흥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고 14세 때 신천에 와 있던 프랑스 신부 밑에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기질이 활달하여 사냥을 다니며 총쏘기를 좋아하였고 사격에 숙달하여 작은 새들도 정확히 쏘아 맞혔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 1907년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1909년, 이범윤·최재형 등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여 좌익장군이 되어 회령까지 진격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 해 10월,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에 도착하자,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26일, 하얼빈 역에서 일본 사람으로 가장하고 경계망을 뚫은 후, 10보 이내의 거리까지 접근하여 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였다. 또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궁내 대신 비서관 모리, 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에게 중상을 입혔다. 안중근은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른 후 태연히 포박을 당하였다. 이듬해 여순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끝까지 굽히지 않고 항변하다가 사형당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안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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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中植(1861∼1919)

근대 서화가. 호는 심전이며 본관은 순흥이다. 도화서 화원을 지냈으며 산수·새·꽃 등을 잘 그렸다. 또한 글씨에도 뛰어나 초서를 비롯하여 행서·해서·등 여러 가지 글씨를 잘 썼다. 조석진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가서 서화협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으며, 후진들을 양성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림으로 「노안도」 「성재 임간도」 등이 있다.

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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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止(1377∼1464)

조선의 문신. 자는 자행, 호는 고은, 본관은 탐진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세종 때 수찬·예문관 제학 등을 지냈으며 정인지와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1446년 호조참판으로 정조사가 되어 명에 다녀왔으며, 그 후 집현전 부제학을 거쳐 봉조하에 이르렀다. 시에 능했으며 해서를 잘 써 세종의 명으로 태종을 위해 「금자 법화경」을 썼다.

안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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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昌男(1893∼1930)

최초의 비행사. 서울에서 태어나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1918년 일본 오사카 자동차학교를 마치고 아카바네 비행기 제작소에서 비행기 제조법을, 오구리 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배웠다. 1921년 비행사 시험에 합격, 같은 해 도쿄와 오사카간 우편 비행 경기에 참가하여 당당히 우승하였다. 그는 고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치 못하는 것을 비통히 여기고 있던 중 이상재의 힘으로 상하이로 탈출, 여운형의 주선으로 산서성에 들어가 처음에는 태원 비행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중국 항일 전선에 참여하여 분투하던 끝에 비행기 사고로 추락, 사망하였다.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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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昌浩(1878∼1938)

독립운동가. 호는 도산이며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서 관서 지부를 조직하기 위해 쾌재정에서 뛰어난 첫연설을 하여 청중의 갈채를 받았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1898년 이상재·윤치호·이승만 등과 같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독립협회 운동을 계속하였다. 1900년 미국으로 건너가 신문명을 배우는 한편, 공립협회를 세워 교포의 생활을 지도하였다. 1906년, 귀국하여 양기탁·신채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독립을 찾으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평양에 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으며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사용하고 평양과 대구에 태극서관을 설립하여 출판 사업을 벌였다. 1908년 박중화·최남선·김좌진·이동녕 등과 '청년 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 계몽을 적극 추진하였다. 1911년 총독 데라우치 암살 음모 사건을 뒤집어씌우려 하자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191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흥사단'을 조직하여 활약하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내무총장·노동총판을 지내며 계속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32년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보내어져 대전 감옥에서 3년간 복역한 후 평남 대보산에 들어가 휴양하였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으며, 이듬해 서울대학 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안도산 전집」이 있다.

안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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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軸(1282∼1348)

고려의 학자. 자는 당지, 호는 근재, 본관은 순흥이다. 충숙왕 때 원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내려졌으나 가지 않았고, 우리나라의 성균학정을 거쳐 우사의 대부에 이르렀다. 충혜왕 때 안렴사로 있을 당시 「관동와주」를 지었다. 그 후 충목왕 때 감춘추관사까지 승진하여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였으며,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죽계별곡」을 남겨 그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 「근재집」 「한림별곡」 등이 있다.

안평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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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平大君(1418∼1453)

조선의 서예가. 세종의 셋째 아들로 자는 청지, 호는 비해당이다. 1428년, 안평 대군에 봉해지고 여러 왕자들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다. 1438년 함경도에 6진이 설치되자 북변의 경계 임무를 맡아 야인들을 토벌하였다. 수양 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그의 측근인 김종서·황보 인을 죽였을 때 안평 대군도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당대의 명필로서 중국의 사신들이 올 때마다 그의 필적을 얻어갔다. 1452년 경자자를 고쳐 만든 임신자의 자모(子母)를 썼으며, 그림과 가야금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로 「비해당집」 「팔가시선」 등이 있으며, 글씨로 「영릉 신도비」 「청천 부원군 심 온 묘표」 등이 있다.

안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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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珦(1243∼1306)

고려의 학자. 자는 사온, 호는 회헌, 본관은 순흥이다. 조선 시대 문종의 이름이 '향'이었기 때문에 안 유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1260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을 지냈으며, 충렬왕 때 상주 판관이 되어 무당을 엄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는 등 현명한 정치를 하였다. 그 후 충렬왕을 따라 원의 연경에 가서 「주자전서」를 직접 베껴 쓰고, 또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 가지고 돌아와서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주자를 숭배하여 그의 초상을 벽에 걸어두고 주자의 호인 회암의 '회'를 따서 스스로 호를 회헌이라 하였다. 그가 죽은 후 충숙왕은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원의 화가에 명하여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이 초상화는 현재 소수 서원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제현의 초상화와 더불어 가장 오래 된 그림으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 중종 때 풍기 군수 주세붕이 순흥 백운동에 안향의 사묘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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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王

발해의 제14대 마지막 왕(재위 901∼926). 926년 부여성에서 거란의 야율아보기에게 포위되어 섬멸당하였다. 이로써 발해는 14왕 228년 만에 멸망하고 왕자 대광현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고려에 귀순하였다.

애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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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莊王(788∼809)

신라의 제4대 왕(재위 800∼809). 소성왕의 맏아들로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802년 해인사를 짓고 이듬해에는 일본과 친교를 맺었다. 809년 숙부인 김언승(후의 헌덕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양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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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起鐸(1871∼1938)

독립운동가. 호는 운강이며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영국인 베델과 함께 영문으로 된 「코리아 타임스」를 발간하고 이듬해 국한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주필로서 항일사상을 일깨웠다. 또한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으며 경술국치 후 김 구·이승훈·이동녕 등과 만주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105인 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였다. 그 후 「동아일보」 고문이 되어 문화사업에도 종사하였으며, 1921년 미국 국회의원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독립진정서를 제출하여 투옥되었다. 그 후 만주로 탈출하여 의성단·정의부 등을 조직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힘썼으며, 1930년에 임시정부 주석·국무령에 추대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양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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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吉

신라 진성 여왕 때의 반란자. 진성 여왕의 실정으로 국정이 문란하여지자, 889년 북원(지금의 원주)에서 난을 일으켜 국원(지금의 충주) 등 30여 성을 점령하여 세력을 넓혔다. 891년 궁예를 부하로 맞아 판도를 넓혀 세력을 떨쳤으나, 그 후 궁예에게 몰려 도망하였다.

양녕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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讓寧大君(1394∼1462)

조선 태종의 맏아들로 세종의 맏형. 1404년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태종이 충녕 대군(후의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함을 알고 아우인 효녕 대군에게 동의를 얻어 일부러 미친 듯 행동하였다. 1418년 마침내 폐위되어 충녕 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후 전국 돌아다니며 풍류를 즐기며 일생을 마쳤다.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양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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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德壽

조선의 음악가. 전북 남원에서 은신하고 있던 중 1610년(광해군 2)에 악보 「양금신보」를 만들었다. 이 악보에는 가장 낮은 음조인 평조와 가장 구슬픈 음조인 우조, 또한 씩씩하면서도 가장 슬픈 음조인 우조·계면조 등의 9곡이 실려 있다. 이 악보는 우리 나라 고가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양만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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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萬春

고구려의 장군. 644년 당 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안시성주로 있으면서 60여 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끝에 적을 물리쳤다. 당 태종도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 한다. 양만춘(梁萬春)이라고도 쓰는데, 정사(正史)에는 그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양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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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士彦(1517∼1584)

조선의 문신. 자는 응빙, 호는 봉래, 본관은 청주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회양군수·철원 군수 등을 지냈으며 자연을 사랑하여 산수가 좋은 시골을 스스로 지원하였다. 금강산 만폭동의 바위에는 지금도 그의 글 8자를 새긴 것이 남아 있다. 그 후 안변 군수로 있으면서 큰 못을 파고 마초(馬草)를 저장하였는데, 이듬해 북쪽에서 변란이 일어나자 다른 고을에서는 마초와 물이 없어 관리들이 책임을 추궁당하였으나 안변 지방만은 아무 걱정이 없었다. 양사언은 천재인데다가 노력까지 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임진왜란까지 예언하였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유명한 시조가 전한다. 글씨는 해서와 초서에 능하였다. 안평 대군·김 구·한 호와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린다. 저서로 「봉래 시집」 「금강산 유람기」 등이 있다.

양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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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原王(?∼559)

고구려 제24대 왕(재위 545∼559). 안원왕의 맏아들로 533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547년 백암성을 개축하였으며 신성을 수리하였다. 이듬해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후원으로 실패하였다. 550년 도살성을 백제에게 빼앗겼는데, 이후 고구려는 점차 세력이 약해졌으며 이듬해에는 돌궐의 침략을 받았고 신라에게 10여 성을 빼앗겼다.

양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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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甸伯(1869∼1923)

독립운동가. 호는 격헌이며 평북 의주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크리스트교 신자가 되었으며 선천 신성중학교·보성여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그 후 각지에 양로원·고아원을 세워 사회사업에 힘쓰다가 105인 사건으로 6년 형을 받았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다시 체포되었다. 그 후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에 취임하고 일생을 신앙운동과 애국운동에 바쳤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양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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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正模(1953~ )

레슬링 선수. 부산 출생.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경기 자유형 62kg급에서 우승해 우리나라가 광복 후 참가한 올림픽경기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다. 양정모는 1974년에 이어 1978년 아시아경기대회 레슬링경기에서도 우승해 2회 연속 금메달을 차지했으며, 1975년 세계선수권대회 자유형 62kg급 3위, 1978년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 등 경력이 화려하다. 부산 출생. 현재 조폐공사 레슬링부 감독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양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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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柱東(1903∼1977)

시인·국문학자·영문학자. 호는 무애이며 황해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동국대 교수 등을 지냈다. 와세다 대학 재학중에 이장희·유 엽·백기만 등과 시동인지 「금성」을 발간하였으며, 1923년에 「영원하 비밀」을 발표하였다. 「문예공론」을 발간하여 일련의 시 작품과 논문을 발표하였다. 한때 프로 문학과 민족 문학의 절충주의적 문학론을 펴기도 하였다. 신라 향가 연구에도 전념,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58년 연세대에서 교수생활을 했으며, 1962년 동국대 대학원장을 지냈다. 학술원 종신 회원이고, 학술원상·대한민국 문화 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고가연구」 「여요전주」 「조선의 맥박」 「무애시문선」 등이 있으며, 한국어 대사전 편찬에 참여하였다.

양한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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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漢默(1863∼1919)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자는 길중, 호는 지강이며 전남 해남에서 출생하였다. 1898년, 일본에 건너가서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들어갔으며, 1905년 이 준·윤효정 등과 '헌정 동지회'를 조직하여 일진회와 맞섰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체포되었으며, 그 후 서대문 감옥에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정자공부」 「동경연의」 등이 있다.

어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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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夢龍(1566∼?)

조선의 화가. 자는 견보, 호는 설곡, 본관은 함종이다. 매화를 그리는 데 특히 뛰어났으며 그 중에서도 「흑매도」는 유명하였다. 황집중의 포도, 이 정의 죽과 더불어 '3절'로 불리었다. 그림으로 「일지매」 「월매도」 등이 있다.

어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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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允中(1848∼1896)

조선의 문신. 자는 성집, 호는 일재, 본관은 함종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참판 등을 지냈다. 1871년,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박정양·홍영식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근대 문물을 시찰했으며 청으로 건너가 톈진에서 이홍장을 만났다. 이듬해 다시 톈진에 가서 김윤식과 함께 한미 통상조약의 조문을 검토하는 등, 여러 차례 청과의 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동학혁명 때 선무사로 파견되었으며, 1894년 탁지부 대신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 때 고향인 보은으로 도망가던 중, 친러파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저서로 「종정연표」가 있다.

어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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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允姬(1878∼1961)

여류 독립운동가·사회사업가. 본관은 함종이며 어윤중의 딸이다. 동학혁명 때 남편을 잃었으며, 1912년 미리흠여학교를 졸업하고 외딴 섬에서 전도사로 일하였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가 행진에 앞장섰다가 체포되어 2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밀사들에게 여비와 은신처를 제공하여 주었고, 개성 경찰서 폭파 계획에 가담하여 구속되었다. 석방 후 개성에 유린보육원을 설립했으며, 6·25 때 월남하였다. 1953년 사회사업가로 표창받고, 1959년 인권 옹호 공로 표창, 1961년 3·1운동 선도자 표창 등을 받았다.

어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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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在淵(?∼1871)

조선 말기의 무신. 자는 성우, 본관은 함종이다. 1866년 회령 부사 등을 지냈고,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선봉장이 되어 광성진을 수비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정부에서는 어재연을 순무중군에 임명하여 광성진을 수비케 하였다. 이에 그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우세한 무기를 가진 미국군에게 패하여 동생 재순과 더불어 용감하게 전사하였다.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엄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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嚴興道

조선의 충신. 강원도 영월에서 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세조에 의해 영월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사람들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단종의 시신을 돌보지 않았다. 엄흥도는 관을 비롯한 장례 기구 일체를 혼자서 마련하여 정중하게 장사를 치른 후, 벼슬을 내놓고 아들을 데리고 숨어 살았다. 현종 때 송시열의 건의로 그의 자손이 등용되었고, 영조 때 그의 충성심을 기념하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여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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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石基(1922~ )

연극평론가·영문학자. 경북 김천 출생. 일본 도쿄(東京)대학 영문과 수료. 광복 후 서울대학 영문과 졸업. 미국 미주리대학에서 수학(1956)하였다. 70년 「연극평론」을 발행, 평론 부재의 연극풍토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젊은 연극인을 발굴, 육성에 힘을 기울였고, 부진한 영화 재건에도 힘썼다. 저서로 「20세기 문학론」 「희곡론」 「현대영문학사」를 비롯, 역서·논문 등이 다수 있으며 국민훈장모란장, 동랑연극상을 수상했다.

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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麗玉

고구려의 여류 음악가. 뱃사공 곽리자고의 아내이다. 어느 미친 사람이 강물에 빠져 죽게 되자, 그의 아내도 공후를 뜯으며 「공무도하가」를 부르고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를 본 곽리자고가 여옥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자, 여옥은 공후를 뜯으며 「공후인」을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공후인」은 당시 백성들이 읊던 민요로 작자가 여옥이 아니라고도 한다.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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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運亨(1885∼1947)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몽양이며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하였다. 우무학당을 졸업하고, 1909년 광동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교육시켰다. 1914년 중국에 건너가 난징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중퇴하였다. 1918년 파리에서 만국 평화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김규식을 파견하였으며, 이듬해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이 해 겨울, 일본이 조선의 자치 문제에 대해 의견을 타진해 오자, 장덕수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독립의 필요성을 적극 역설하고 돌아왔다. 1920년 고려공산당에 가입,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피압박 민족 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와 중국의 쑨원과 협력하여 중국 혁명을 적극 추진하였다. 1929년, 영국의 식민정책을 비판했다가 영국 경찰에 잡혀 일본 경찰에 인계되어 3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1933년 중앙일보 사장을 지내다가 곧 사직하고, 1944년 비밀 단체인 '조선 건국연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광복이 되자 '건국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고, '조선 인민공화국'을 세워 스스로 부주석이 되었으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하였다. 12월 근로 인민당을 조직하여 당수로서 좌파 온건 세력을 규합하는 등 정치활동을 하다가, 1947년 한지근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여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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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爾徵(1588∼1656)

조선의 문신. 호는 동강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대제학을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성리학에 매우 밝았으며 시에 능하여 많은 묘비명을 찬하였다. 천문·역산·서화에도 능하였다.

연개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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淵蓋蘇文(?∼666)

고구려의 장군·정치가. 일명 개금, 천개소문이라고도 한다. 이는 당 고조의 이름이 '연'이었는데 이를 피하고자 고친 이름이다. 성품이 안하무인이어서 신하들이 그를 죽이고자 영류왕과 모의한 것을 알고, 642년 영류왕 이하 백여 명을 죽이고 보장왕을 추대한 후,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독재를 하였다. 그는 백제와 함께 신라와 당의 교통로인 당항성을 빼앗았으며, 이듬해 당의 숙달 등을 초청하여 도교를 퍼뜨렸다. 자주 신라를 침공하였는데, 신라의 요청으로 당은 양국 국교를 조정하려고 사신을 보내 왔으나 오히려 사신을 가두어 버렸다. 당 태종은 이에 격분하여 이세적 등을 거느리고 친히 쳐들어와서 안시성을 포위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 후에도 4차례나 당의 침입을 잘 막아내었으나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간의 세력 다툼을 틈타,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마침내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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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山君(1476∼1506)

조선의 제10대 왕(재위 1494∼1506). 성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폐비 윤씨이다. 1483년, 세자에 책봉되어 서거정에게 학문을 배웠다. 즉위 후, 녹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고 건주 야인들을 토벌하는 등 국방에 힘을 쏟았다. 한편, 사창·상평창·진제창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국조보감」 「동국명가집」 등을 간행하고, 「속국조보감」 「여지승람」 등을 완성하는 등, 즉위 초에는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성종의 후궁 정씨와 엄씨의 모함으로 폐위되어 사약을 받고 죽은 사실을 안 뒤부터는 향락과 횡포를 일삼았다. 정씨 소생인 안양군·봉양군을 살해하는 등,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켜서 많은 선비와 충신들을 죽였으며, 왕을 비방하는 투서가 국문(언문)으로 되었다 하여 국문으로 된 서적을 불태우고 언문교육을 중지시켰다. 또한 사간원과 경연을 폐지하였으며 원각사를 기생 양성소로 만드는 등 횡포가 극에 달하였다. 1506년 성희안·박원종 등이 진성 대군(후의 중종)을 추대하고 연산군을 내쫓았다(중종반정). 연산군은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

연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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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烏郎 신라 설화상의 인물. 원래 「수이전」에 전하는 이야기로 157년(아달라 왕 4), 아내 세오녀와 함께 동해 바닷가에 살다가 어느날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갔다. 그곳 사람들로부터 하늘에서 온 사람이라고 하여 왕으로 추대되었다. 한편, 남편을 기다리던 세오녀도 남편의 신발이 있는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신라의 해와 달은 빛을 잃었는데, 일관의 말에 따라 일본에 사자를 보내어 연오랑을 찾았으나 연오랑은 하늘의 뜻이라 돌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대신 세오녀가 짠 천을 가지고 가서 하늘에 제사지내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대로 행하니 해와 달이 전과 같이 빛을 찾았다. 그 비단을 어고에 두어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 제사 지내던 곳을 영일현이라고 하였다.

염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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廉武雄(1942~ )

문예비평가. 강원도 속초 출생. 서울대 문리대 독문과·동 대학원 졸업.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최인훈론」이 당선되어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서울대 강사·덕성여대 국문과 전임강사를 지냈다. 67년부터 계간 「창작과 비평」 편집에 참여, 72년부터 주간이 되고 78년에 발행인이 되어 잡지 경영 책임과 편집자문위원을 맡아오고 있다. 현재 명남대 교수와 민예총 이사장으로 있다. 리얼리즘문학·농민문학·민족문학 등의 주제에 따른 뛰어난 평론들이 많으며, 70년대의 일선 문예비평가로서 서두에 서고 있다. 저서로 평론집 「한국문학의 반성」, 번역서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백낙청과 공역), 카프카의 「성(城)」 등이 있다.

염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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廉想涉(1897∼1963)

소설가. 본명은 상섭(尙燮), 호는 횡보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보성학교를 거쳐 일본 게이오 대학 문학부를 중퇴하였다. 1920년 김 억·남궁 벽·오상순·황석우 등과 「폐허」 동인에 참가하였으며, 이듬해 「개벽」지에 단편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 후 만주로 건너갔으며, 1936년 「만선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내다가 광복이 되자 귀국하였다. 1946년 경향신문 편집국장,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을 지냈고 예술원 종신 회원이 되었다. 1953년 서울시 문화상을, 1962년 3·1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을 수상하였다. 우리나라 근대 문학운동의 중심 인물로 자연주의를 표방한 소설을 썼으나, 그의 문학사적 공로는 사실주의 문학의 확립에 이바지한 데 있다. 작품으로 단편 「암야」 「신혼기」 「두 파산」 등과 장편 「이심」 「삼대」 「채석장의 소년」 등이 있다.

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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閻長

신라의 장군. 839년 우징(신무왕)이 청해진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휘하 장수가 되어 우징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신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장보고의 딸을 비로 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반대하는 신하가 있어 약속대로 하지 않자,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킬 기세를 보였다. 이에 염장은 왕의 허락을 받고 청해진에 가서 거짓 항복하였다. 장보고는 평소에 그를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뻐하여, 연회를 베풀고 술에 잔뜩 취하였다. 이에 염장이 칼로 장보고를 죽이고 돌아오니 왕은 매우 기뻐하여 그에게 아간 벼슬을 내렸다.

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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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觀(1485∼1571)

조선의 승려. 호는 부용이며 13세 때에 출가하여 신총에게서 불도를 배웠다. 1519년 금강산에 들어가 9년간 참선하였으며, 그 후 다시 지리산에 들어가 태고 법사의 법통을 이어받고 이를 휴정(서산 대사)에게 전함으로써 우리나라 불교의 정통을 이루게 하였다.

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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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圭(?∼1592)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 호는 기허, 성은 박, 본관은 밀양이다. 휴정의 으뜸가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이며 공주 청련암에서 수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명의 승병을 이끌고 의병장 조 헌과 함께 청주를 빼앗고 이어 금산에 이르러 왜군과 싸우다가 조 헌 등 700 의사와 함께 전사하였다. 법도 대인 등에 의하여 금산 남쪽 진락산에 영각이 세워졌고, 의선이란 편액이 하사되었다.

영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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榮留王(?∼642)

고구려 제27대 왕(재위 618∼642). 영양왕의 이복 동생이며 즉위한 해인 618년, 수 양제가 죽고 당이 건국되자 이듬해 당에 사신을 보내어 친선을 꾀하였다. 622년, 당 고조의 청으로 살수대첩 때의 고구려 포로와 고구려에 있는 중국 포로들을 교환하였다. 625년 당에 사람을 보내어 불교와 도교의 원리를 연구하게 하였다. 631년 동북 부여성으로부터 동남해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으며, 638년 신라 북변의 칠중성을 공격하다가 패퇴하였다. 640년 세자 환권을 당에 보내어 조공케 하고 자제들을 파견하여 당 국학에서 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642년 연개소문이 독재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살해되었다.

영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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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

고구려의 제26대 왕(재위 590∼618). 일명 평양왕이라고도 하며, 평원왕의 아들이다. 즉위 후 중국을 통일한 수의 침공에 대비하여 조공을 바치며 화친을 꾀하다가, 598년 요서를 먼저 공격하였다. 이에 수 문제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600년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유기」 100권을 추려 「신집」 5권을 만들게 하였다. 612년 수 양제가 수륙 양면으로 침입해 왔으나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에서 전멸시켰다(살수대첩). 그 후에도 계속 수의 침입을 물리쳐서 수 멸망의 한 원인을 만들었다.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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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祖(1694∼1776)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1776). 숙종의 넷째 아들이며, 경종의 이복 동생이다. 1699년 연잉군에 봉해지고 1721년 경종에게 후사가 없자 노론인 김창집 등이 왕세제 책봉을 상소하여 소론인 유봉휘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책봉되었다. 1722년 박상검·문유도 등의 음모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으나 1724년 경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김일경 등 신임사화를 일으킨 소론을 몰아내고 노론 정권을 수립했으나, 파벌의 폐습을 깊이 느껴 양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당쟁을 없애는 탕평책을 마련하였다. 또한 가혹한 형벌을 없애거나 고쳐 인권존중을 기하였으며, 신문고를 부활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직접 고하게 하였다. 금주령을 내려 낭비의 습관을 고치게 하였으며 농업을 장려하였을 뿐 아니라, 균역법을 제정하여 세금 제도를 합리화하였다. 한편, 북방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조총 훈련을 실시하고, 1729년 화차를 제작하게 하였으며, 진을 설치하여 토성을 쌓는 등 국방에 힘을 쏟았다. 학문을 좋아한 영조는 인쇄술을 개량하여 「속대전」 「동국문헌비고」 등 많은 서적을 발간하게 하였으며 「악학궤범」의 서문과 「어제 경세문답」 등을 친히 지었다. 오가작통법을 부활하여 조세수입을 늘리고, 1756년 기로과를 신설하여 60세 이상된 노인에게도 과거를 볼 기회를 주었으며, 유능한 학자를 발굴하여 실학의 계통을 수립하게 하였다. 1762년 아들 사도(장헌)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비극도 있었으나 역대 왕 중 재위 기간이 가장 길고(52년), 각 방면에 부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영창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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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昌大君(1606∼1614)

조선 선조의 아들. 선조에게는 13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후궁 소생이었다. 그러나 그만이 정궁인 인목 왕후의 소생이었다. 선조는 이미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을 싫어하여 유영경 등과 영창 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몰래 의논하였다. 이것을 안 이이첨·정인홍 등이 이를 반대하던 중, 갑자기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이이첨 등의 농간으로 형인 임해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서궁에 가두었으며, 인목 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반역죄로 몰아 처형하였다. 이 때 영창 대군도 서인이 되어 강화에 끌려가 투옥된 후, 강화 부사 정 항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8세였다.

영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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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親王(1897∼1969)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이름은 은이며 순종의 이복 동생이다.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12월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 교육을 받았고 마사코(方子)와 결혼하였다. 1926년 순종이 죽자 이 왕가를 계승하여 이왕(李王)이라 하였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했으며 육군 중장을 지냈다. 아들 구는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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睿宗(1079∼1122) 고려 제16대 왕(재위 1105∼1122). 숙종의 아들이며, 1100년 태자에 책봉되었다. 즉위 후 1107년, 윤 관에게 명하여 여진을 토벌케 하였고 이듬해 윤 관에게 9성을 쌓게 하였으나, 여진족들이 애원하므로 1109년에 돌려주었다. 1116년 요·금의 침입을 받았으나, 1119년 친교를 맺어 사신이 오갔다. 예종은 학문을 좋아해서 학교를 세우고 육경을 강론케 하여 유학이 크게 융성하였다. 1120년 '팔관회'를 열고 개국공신인 김 낙·신숭겸의 죽음을 슬퍼하여 「도이장가」를 지었다.

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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睿宗(1441∼1469) 조선의 제8대 왕(재위 1468∼1469). 세조의 둘째아들이며, 1457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468년 세조가 위독하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으나 재위 13개월 만에 죽었다. 재위중 세조 때 시작한 「경국대전」이 완성되었으며, 직전수조법을 제정하여 둔전의 일반인 경작을 허락하고 관제를 개혁하였다.

오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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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慶錫(1831∼1879)

조선의 역관·서화가. 자는 원거, 호는 역매, 본관은 해주로 오세창의 아버지이다. 중인 출신으로 역관이 되어 청에 왕래하며 신학문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친구인 유대치에게 읽게 했으며, 김옥균·박영효 등에게 개화 사상을 일깨워 주었다. 그 후 통정대부·가선대부 등을 거쳐, 1876년 한학 당상역관으로 좌의정 박규수와 함께 문호 개방을 주장하여 강화도 조약의 체결을 지지함으로써 조약을 원만히 맺게 하였다. 역관으로 청의 연경에 왕래할 때 원·명의 서화 100여 점을 사 가지고 돌아왔으며, 금석학에 대한 관심도 커서 역대 중국의 금석문을 수집했다. 또한 전서를 잘 썼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삼한 금석록」이 있다.

오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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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圭原(1941~ ) 경남 밀양 출생. 1968년 동아대 법과를 졸업했으며,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문명한 사건」(1971), 「순례」(1973),「사랑의 기교」(1975),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1981), 「사랑의 감옥」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연암문학상을 받았으며, 82년 이후 서울예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오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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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達濟(1609∼1637)

조선의 문신. 자는 계휘, 호는 추담, 본관은 해주이다. 병자호란 때 3학사의 한 사람으로,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지냈다. 1636년 부교리로 있을 때, 청이 군신 관계를 맺자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놓자 이에 적극 반대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피란가서도 항복을 극구 반대하였다. 이듬해 인조가 청에 항복하자, 화의를 반대한 죄로 윤 집·홍익한과 함께 청에 잡혀가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광주 현절사에 제향하였다.

오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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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相淳(1893∼1963)

시인. 호는 공초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도지샤 대학 종교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20년 「폐허」의 동인으로 우리나라 신시 초창기부터 활동하였다. 「아시아의 밤」 「허무혼의 독언」 등 어둡고 절망적인 시를 주로 썼다. 1925년 보성고보의 교사를 거쳐, 1930년 불교중앙학림(동국대학의 전신)에서 교편을 잡았던 인연으로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하여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특히 담배를 즐긴 그의 생활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이 되었고, 1959년 예술원상,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대통령 포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오상순 시선」이 있으며 「한잔술」 「첫날밤」 등의 작품이 있다.

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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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世昌(1864∼1953)

독립운동가·언론인. 호는 위창, 본관은 해주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896년 일본 문부성의 초청을 받아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초청을 받아 1년간 일본에서 교편을 잡았다. 1902년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한 다음, 귀국하여 「만세보」 「대한민보」 사장을 지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3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광복 후 서울신문사 명예 사장·대한 독립 애국단체 총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다. 전서와 예서에 뛰어났고 서화의 감식에 조예가 깊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오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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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億齡(1552∼1618)

조선의 문신. 자는 대년, 호는 만취, 본관은 동복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호조·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그가 사간원 전한으로 있을 때 일본 사신을 맞아 접대했었는데, 일본 사신의 말 가운데에서 우리나라 침입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왕에게 아뢰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후에 그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로소 왕의 인정을 받았다. 1591년, 명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임진왜란으로 피란가는 왕을 개성에서 만나 의주로 모시었다. 1601년 부제학으로 청백리로 뽑혀 왕이 상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글씨에도 뛰어나, 초서·예서·전서를 고루 잘 썼다.

오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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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延寵(1055∼1116)

고려의 문신. 본관은 해주이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학문에 힘써 문장에 능하였다. 1100년 사신으로 송에 가서 이듬해 「태평어람」을 구해 가지고 돌아왔다. 1107년, 부원수로 윤 관과 함께 여진을 소탕한 뒤, 성을 쌓고 돌아와 상서좌복야·참지정사가 되었다. 그 후에도 웅주성에 침입한 여진을 격퇴하여 공을 세웠으나, 1109년 길주성을 포위한 여진을 치다가 실패하여 화의를 맺고 돌아오자, 최홍사 등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후에 다시 등용되어 상주국·병부판사 등을 지냈다.

오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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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永壽(1914∼1980)

소설가. 울주에서 출생하였다. 1939년 일본 도쿄 고쿠민 예술학원을 졸업하였으며, 그 후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였다. 1949년 「남이와 엿장수」를 「신천지」에 발표하였고, 「머루」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문인협회상·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 단편집 「머루」 「갯마을」 「메아리」 「오영수 전집」 5권이 있다.

오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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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泳鎭(1916∼1974)

영화평론가·시나리오 작가.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938년 경성제국대학 조선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유네스코 세계 예술가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고, 1953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3개월간 미국 문화계를 시찰하였다. 예술원 회원·아시아 영화제 심사위원 등을 지냈으며,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비롯해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하나의 증언」이 있으며 시나리오 「시집가는 날」 「배뱅이굿」 「풍운」 등이 있다.

오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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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一島(1902∼1946)

시인. 본명은 희병이며 경북 영양에서 출생하였다. 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릿쿄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중학교 교사로 있다가 1931년 문단에 등장하여 「시문학」 「문예 월간」 등에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1934년 「시원」을 창간하여 문단에 예술지상주의의 꽃을 피게 하였다. 「눈이여, 어서 내려 다오」 「노변의 애가」 등 주로 슬픈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오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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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貞姬(1947~ )

소설가. 서울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저녁의 게임」 「동경」 「직녀」 「미명」 등이 있다. 이상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섬세한 내면의 정경을 묘사하면서,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과 내면의 고뇌를 자의식적인 측면에서 예리하게 묘사하며, 여성의 심리적 갈등을 묘사하는 데 능숙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오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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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之湖(1905∼1982)

서양화가.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 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0년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교직을 지냈다. 1949년부터 조선대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1968년부터 다년간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1973년 예술원 회원에 선임되어 그 후 원로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국민훈장 모란장·예술원상을 수상하고, 국전 운영위원에 추대되었다. 1974년 유럽 각지의 문화계를 시찰하고, 1980년 아프리카 미술계를 시찰하였다. 저서로는 「오지호 작품집」 「현대 회화의 근본 문제」 「미학 원론」 등이 있다.

오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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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鉉明(1924∼

)

음악가. 평북 철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하였다. 1950년 시민회관에서 오페라 「카르멘」을 공연하고, 1953년 제2회 독창회를 가졌다. 서울대 음대 강사를 역임하고, 동남아 순회 문화 시찰단 독창자, 국제 음악제 등에 출연하였다. 한양대 음대 교수·국립 오페라 단장·한양대 음대 학장을 지냈고, 국립 오페라단 종신 단원 등으로 활약중이다. 문화 예술상·서울시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발성법」 「오페라 실패담」 등이 있다.

오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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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華燮(1916~1979)

영문학자. 인천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문학부와 동 대학원을 졸업, 1946년부터 고려대학교, 부산대학교 부교수를 거쳐 53년에 연세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문과 대학장, 교육대학원장을 역임했다. 그 밖에 영어영문학회장, 한국 셰익스피어 협회 이사 등을 지내면서 영미 문학 중에서도 특히 연극에 관한 평론, 희극 등을 많이 번역하여 우리 연극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번역 문학상을 받았으며, 창작 희곡으로 「우리 읍내」 「밤으로의 긴 여로」 「지평선 너머」 저서에 「현대 미국극」, 번역서에 「베니스의 상인」 등이 있다.

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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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寶高

신라의 음악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50년 동안 금법(琴法)을 닦고 거문고의 새로운 가락 30곡을 지었다. 그 후 금법을 속명득에게 전했다. 금오산 금송정은 그가 거문고를 타던 곳이라 한다.

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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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達(?∼590)

고구려의 장군. 못생기고 몹시 가난하여 초라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구걸하며 다녀 모두들 바보 온달이라 하였다. 당시 평원왕의 딸 평강 공주가 울기를 잘하므로 그때마다 왕은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였다. 후에 평강 공주는 스스로 온달을 찾아가 결혼하였다. 온달은 공주에게 글을 배우고 무술을 닦아 해마다 열리는 사냥 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올렸다. 당시 주나라의 무제가 쳐들어오자 앞장서서 나아가 승리를 거두고 장수가 되었다. 590년 영양왕 때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이북의 땅을 되찾으려고 싸움터에 나갔다가, 아차산성에서 적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온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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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祚王(?∼28)

백제의 시조(재위 기원전 18∼기원전 28). 고구려 동명왕(주몽)의 셋째 아들이다. 동명왕이 북부여에서 낳은 유리 왕자를 태자로 삼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형 비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로 가고 온조는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광주)에 도읍을 정하여 국호를 '십제'라 하였다. 비류가 죽은 후 그 백성들이 위례성에 모여들자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말갈의 침입이 잦자 기원전 5년에 도읍을 남한산으로 옮겼다. 기원전 9년 마한을 멸망시켜 마한 땅을 합쳤으며 여러 곳에 성을 쌓는 등 국토를 개발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제13대 근초고왕 이전의 사실은 신빙성이 적은 것으로 보고 있다.

왕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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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可道(?∼1034)

고려의 문신. 본성은 이씨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서경의 장서기가 되었다. 1010년, 거란족이 침입하여 나라의 재정이 어려워져 군사들에게 주었던 토지를 다시 빼앗자, 이에 김 훈·최 질 등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왕가도는 스스로 서경 유수판관이 되어 연회를 베풀어 최 질 일파를 죽이고 정권을 쥐고 있던 무신들을 내쫓았다. 이로 인해 호부상서가 되었고 공신의 호를 받았다. 1027년 참지정사가 되어 1029년 이응보 등과 함께 개경의 나성을 쌓았다. 이에 현종은 벼슬과 영작을 주고 임금의 성인 '왕'씨를 그의 성으로 삼게 하였으며, 그 후 덕종 때 그의 딸이 왕비가 되자 내사 문하평장사까지 되었다가 병으로 사임하였다.

왕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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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建(877∼943)

고려의 태조(재위 918∼943). 개성에서 금성 태수 왕 융의 아들로 태어났다. 895년 후삼국 때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부하로 들어갔으며, 900년 광주·충주·청주 등을 공략하여 아찬 벼슬을 받았다. 그 후 계속하여 경상도·전라도 지방에서 견훤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복한 지방의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도 힘써 신망을 얻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해지는 궁예가 인심을 잃자, 배현경·홍 유·신숭겸 등에 의하여 궁예를 내쫓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이듬해 도읍을 철원에서 개경으로 옮기고 정치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의 기반을 닦았다. 왕 건은 지방의 호족을 조정하고 무마하는 한편, 기인제도를 만들어서 호족들과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또한 서경을 중요하게 여겨 왕식렴을 보내어 서경을 개척하고 대도호부로 승격시켰으며,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여진을 공격하였다. 건국 초부터 불교를 국교로 삼아 법왕사·왕륜사 등을 비롯하여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항복해 온 신라의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신라를 병합하고, 이듬해 먼저 투항해 온 견훤과 함께 후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킴으로써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그 해 「정계」 「계백요서」 등을 저술하고, 934년 후세의 왕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본보기로 삼게 하기 위하여 「훈요십조」의 교훈을 남겼다.

왕산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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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山嶽

고구려 때 거문고의 대가. 552년(양원왕 8), 진에서 들어온 칠현금을 개조하여 100여 곡을 지어서 연주하자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 개조한 칠현금이 현학금으로 오늘날의 거문고이다.

왕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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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隆(?∼897)

고려 태조의 아버지. 도량이 넓고 뜻이 높은 큰 인물이었다. 개성 송악산 남쪽 기슭에 살았는데, 하루는 중 도선이 문밖 나무 그늘에서 쉬다가 “이 땅에서 성인이 나오리라”하였다. 그리고 글 한 통을 쓰더니 그에게 주면서 “내년에 반드시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아이가 크거든 이것을 주라”하였다. 이듬해인 877년 과연 왕 건을 낳았다. 후에 왕 건이 왕이 되자 아버지를 추존하여 세조 위무 대왕이라 하였다.

왕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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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仁

백제의 학자. 근구수왕 때 일본에서 학자와 책을 보내 달라는 청을 하였다. 이 때 왕의 손자 진손왕과 함께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다. 왕 인은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일본 문화 발전에 공헌하였다. 일본의 역사책 「고사기」에는 그의 이름을 와니키시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와니(王仁)라고 나와 있다.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전연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요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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姚克一

신라의 명필. 벼슬은 시중 겸 시서학사에 이르렀으며 구양순의 글씨체를 익혀 김 생 다음가는 명필로 불리었다. 「지봉유설」 「필원잡기」에는 고려 때의 사람으로 되어 있다.

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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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城(1846∼1940)

조선 말기의 승려. 전북 남원에서 출생하였으며 16세에 출가하여 해인사로 들어가 선종과 교종을 함께 공부하였다.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또한 불교를 발전시키려면 농사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함양에 화원과 과수원을 만들었으며, 북간도에도 농장을 만들었다. 저서로 「수심론」 「어록」 등이 있다.

우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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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渠王(?∼기원전 108)

고조선(위만 조선)의 마지막 왕. 위만의 손자이며 한의 유민을 무제한 받아들이고 남쪽의 진이 한과 교통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때 교섭하기 위하여 온 한의 사신 섭하가 귀국 도중 위만의 장수를 죽이자 그를 습격하여 살해하였다. 기원전 109년, 한이 수륙 양면으로 침입하자 화친을 주장하는 대신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싸웠으나, 이듬해 주화파인 이계상 참에게 살해되고, 참이 한에 항복함으로써 위만 조선은 3대 80여 년 만에 멸망하였다.

우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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于勒 가야 출신의 신라 악사. 본래 대가야국 성열현 사람으로 가실왕의 총애를 받았다. 가실왕의 뜻을 받들어 12현금(가야금)을 만들고 12곡을 지었다. 551년 진흥왕 때 신라에 투항하여 제자 이문과 함께 궁중에 들어가 곡을 지어 연주하였다. 이에 감동한 진흥왕은 그를 국원(지금의 충주)에 살게 하고, 이듬해 계고·법지·만덕을 가르치게 했다. 그는 각각 그들의 소질에 따라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그 후 진흥왕에 의하여 가야금 곡이 궁중 음악이 되었고, 하림조·눈죽조의 2조가 생겨 모두 185곡의 가야금 곡이 남게 되었다. 충주의 대문산 기슭의 금휴포와 탄금대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한다.

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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禑王(1364∼1398)

고려의 제32대 왕(재위 1375∼1388). 공민왕이 신 돈의 집에 숨어들어가 신 돈의 시녀 반야에게서 낳은 아들로, 신 돈이 죽은 후 1371년 궁중에 들어가 명덕 태후의 궁에 있었다. 1374년 공민왕이 최만생 등에 의해 살해되자, 이인임 등의 주장으로 왕위에 올랐다. 1380년 명덕 태후가 죽자 방종해지기 시작하여 나라 일을 소홀히 하였다. 그를 옹립한 이인임 일당이 횡포를 부리는 등 나라 안이 소란해졌으며, 1388년 명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해 오자, 최 영과 함께 랴오둥 정벌을 꾀하였다. 그러나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 의해 폐위되었으며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강릉으로 옮겨져 서균형에게 살해되었다. 「고려사」에는 신 돈의 시녀인 반야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신 돈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후세 조선의 사가들이 조선 건국의 명분을 세우고자 내세운 사실의 날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우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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禹長椿(1898∼1959)

농학자. 일본 도쿄에서 출생하였으며 1919년에 도쿄 제국대학 농학과를 졸업하였다. 육종학을 연구하여 세계적인 농학자가 되었으며, 1930년 더블 페추니아 꽃의 육종 합성에 성공,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였고, 종의 합성설로 1936년 모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에 귀국하여 한국 농업 연구소장·농업 지도요원 양성소 부소장·학술원 추천회원이 되었다. 그동안 육종학 연구에 전념하여 채소 종자의 육종 합성에 성공하고 씨 없는 수박과 벼의 일식 이수작을 연구하였다. 1957년 부산시 제1회 문화상 과학 부문상을 받았으며, 1959년 대한민국 문화 포장을 받았다. 죽은 뒤 사회장으로 장사지냈다. 저서로 「십자화과 식물체 속의 게놈 분석과 유채의 합성」 등이 있다.

우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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禹倬(1263∼1342)

고려의 학자. 자는 천장, 호는 역동, 본관은 단양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 사록으로 있을 때 민심을 현혹하는 요신의 사당을 철폐하였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감찰 규정으로 충선왕의 잘못을 간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후에 충숙왕이 그의 충성됨을 알고 다시 불렀으나 사양하고 글을 벗삼으며 지냈다. 당시 원에서 성리학에 관한 서적이 들어왔는데, 이를 해독할 사람이 없자 한 달 동안 연구하여 처음으로 이를 밝혀내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는 경사와 역학은 물론 복서에도 밝았다. “춘산에 눈 녹인 바람……”, “한 손에 막대 잡고……” 등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 시조 2수가 전한다.

웅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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熊女

신화에 나오는 단군의 어머니.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기슭에 내려와 신시를 열고 세상을 다스릴 때,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은 쑥 한 자루와 마늘 20개를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러주었다. 호랑이는 며칠을 견디지 못하였으나 곰은 백일을 견뎌 마침내 여자로 변하여 웅녀가 되었다. 이 웅녀는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원광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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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光法師(542∼640)

신라의 승려. 566년 출가하여 중이 되었으며, 578년 진의 장엄사에 가서 「열반경」 「구사론」 등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연구하고 불경을 강의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589년 수에 건너가 혜원에게서 불법을 배우고, 600년 귀국하여 신라에 불법을 전하였다. 그 후 기실사에 있을 때 화랑 귀산과 취항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므로 '세속오계'를 지어주었다. 608년 진평왕의 명으로 수에 군사를 요청하는 '걸사표'를 지었으며, 613년 황룡사에서 「인왕경」을 강의하였다.

원 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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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均(?∼1597)

임진왜란 때의 무장. 자는 평중이며 본관은 원주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조산만호로 있을 때 변방의 야인을 토벌한 공으로 부령 부사가 되었으며, 1592년 경상 우수사가 되었다. 이 해 4월에 왜적의 침입에 겁이 나서 도망하려다가 부하 장수 이운룡 등의 권고로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구원을 얻어 적을 무찌르고 왕의 표창을 받았다. 1594년 이순신이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고 그가 휘하에 있게 되자 이를 부끄럽게 여겨 명령에 불복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충청 병사로 전임시켰다. 그 후 원 균의 시기와 남인·북인의 모함으로 이순신이 옥에 갇히고, 원 균이 통제사가 되었으나 군무에 태만하다가, 1597년 왜적의 재침 때 패전하여 도망하던 중 잡혀 죽었다. 죽은 뒤 좌찬성에 추증되고 원릉군에 추봉되었다.

원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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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斗杓(1593∼1664)

조선의 상신(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총칭). 자는 자건, 호는 탄수, 본관은 원주이다. 광해군의 정치가 점점 문란해지자, 여러 대신들과 힘을 합하여 인조반정에 성공하였다. 그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뽑히고 평원군으로 책봉되었다. 또 이 괄의 난에 공을 세워 전주 부윤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으로 모시고 가 어영대장을 지냈다. 그 후 효종 때 우의정, 현종 때 좌의정에 올라 내의원·군기시의 도제조를 겸하였다.

원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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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聖王(?∼798)

신라 제38대 왕(재위 785∼798). 내물왕의 12세손이며, 780년 김지정의 반란을 김양상(선덕왕)과 함께 평정한 공으로 상대등의 벼슬에 올랐다.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으로 추대된 주원이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알천 땅을 건너오지 못하였다. 이를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한 신하들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다. 787년 당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청했으며, 이듬해 독서출신과를 두어 인재를 선발하였다. 790년 벽골제를 증축하여 농사를 장려하였다.

원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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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述

신라의 화랑. 김유신의 둘째 아들로 672년 당이 말갈족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자, 비장으로 출전하였다. 신라 장군 효천·의문 등이 전사하고 신라가 패주하자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적진으로 뛰어들려고 하였으나 좌관·담릉 등이 한사코 말리므로 후퇴하였다. 이에 김유신은 원술을 처형시킬 것을 왕께 아뢰었으나 왕은 허락치 않았다. 원술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시골에 숨어 살다가,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를 만나려 하였으나 어머니도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그는 그 길로 태백산에 들어갔는데, 675년 당의 군사가 매소성으로 쳐들어오자 지난날의 치욕을 씻기 위해 싸움터로 나가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여전히 어머니가 만나주지 않자 세상을 비관하고 숨어 살았다.

원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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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宗(1219∼1274)

고려의 제24대 왕(재위 1259∼1274). 고종의 맏아들로, 1235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1259년 고종을 대신하여 몽고에 들어가 입조(몽고 황제를 뵙는 일)하고 돌아와 이듬해 왕위에 올랐다. 1269년 임 연에 의해 잠시 폐위되었으나, 원의 도움으로 다시 왕위에 올랐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한 후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자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는데, 1273년 여·몽 연합군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원의 요구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전함 300 척을 만들게 했으며, 남편 없는 여자 140명을 요구해 오자 뽑아 보내어 백성의 원망을 샀다. 그의 재위 시대는 고려의 세력이 몽고로 넘어가려는 과정으로서 국사가 다난하였다.

원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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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天錫

고려 말의 선비. 자는 자정, 호는 운곡, 본관은 원주이다. 고려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 봉양에 힘쓰는 한편, 이 색 등과 사귀면서 어지러운 정치를 개탄하였다. 일찍이 이방원(후의 조선의 태종)에게 학문을 가르쳤기 때문에 여러 번 태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멸망한 고려를 회상하는 시조 「회고가」 1수가 전하며 야사 6권을 저술하였으나 그의 증손이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모두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원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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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測(613∼696)

신라의 승려. 627년 당에 건너가 불법을 배웠다. 특히 어학에 뛰어나 한문의 음과 범어의 뜻에 능통하였다. 당 태종 때 원법사에서 「비담론」과 「구사론」 등을 읽었다. 또한 당 태종에게 승려의 새로운 증명서인 도첩을 받았으며, 인도의 중 지바하라가 가져온 경전을 번역하였다. 당의 불수기사에서 죽었다. 저서로 「해심밀경소」 「인왕경소」 「유식론소」 등이 있다.

원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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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昊

조선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 자는 자허, 호는 무항, 본관은 원주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고,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다. 단종이 수양 대군에 의해 영월로 쫓겨가자 세상과 접촉을 끊고 살았다. 1457년 단종이 죽자 원주에 내려가 있는 것을 세조가 호조참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숙종 때 그 절개를 찬양하여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다.

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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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曉(617∼686)

신라의 승려. 호는 화정, 성은 설씨이며 상주에서 출생하였다. 28세 때 승려가 되어 황룡사에 들어갈 때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를 세우게 했다. 34세 때 의상과 함께 불법을 닦으러 당에 가던 길에 요동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맛있게 물을 마셨는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보니 해골 속의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깨닫기를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이 없도다. 부처님 말씀에 3계가 오직 마음뿐이라 한 것을 어찌 잊었더냐\" 하고 그냥 되돌아왔다. 그 후 분황사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를 제창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 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이 태어나자, 이때부터 승복을 벗고 소성 거사라 자칭하며 세속의 온갖 고통에 얽매이지 않고 삶을 즐기며 지냈다. 당으로부터 「금강삼매경」이 들어오자, 왕과 고승 앞에서 이것을 풀이하여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절에 파묻혀 참선과 저술로 만년을 보냈다. 불교사상의 통일과 실천에 노력한 정토교의 선구자로 대승불교의 교리를 실천하였다. 저서로 「법화경종요」 「열반경종요」 「무량수경종요」 등이 있다.

월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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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明師

신라의 승려. 760년(경덕왕 19)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나 열흘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자, 왕의 청으로 향가 「도솔가」를 지어 불러 변을 해결하였다고 한다. 또한 죽은 누이를 위해 「제망매가」를 지어 불러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그는 피리를 잘 불어 고요한 달밤이면 문앞 큰 길에 나와서 불렀는데, 그 소리에 달마저 가기를 멈추어 그 길을 '월명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월산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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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山大君(1454∼1488)

조선의 왕족. 자는 자미이고 호는 풍월정이며 덕종의 맏아들로 성종의 친형이다. 어릴 때에는 할아버지인 세조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며 문장에도 뛰어나 중국에까지 그의 시가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북촌에다 별장을 지어놓고 그 곳에서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자연 속에 묻혀 일생을 보냈다. 저서로 「풍월정집」이 있다.

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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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滿

위만 조선의 시조(재위 기원전 194∼?). 연왕 노관의 부하로 있다가 노관이 한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후 흉노 쪽으로 도망하자, 부하 쳔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에 들어와 고조선의 준왕에게 신임을 얻어 북방 수비를 담당하였다. 그 후 유민들의 세력이 강해지자 준왕을 내쫓고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고 위만 조선을 세웠다. 그의 혈통이 본래는 한민족이라는 설도 있다.

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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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弘(?∼888)

신라의 정치가. 진성 여왕 때에 각간(지금의 국무총리)이 되어 정치를 어지럽혔다. 진성 여왕은 위홍과 대구 화상에게 향가를 수집하여 이를 편찬케 하였다. 이것이 「삼대목」인데 전하지는 않는다. 그는 진성 여왕과의 나쁜 행실로 조정을 문란하게 하였다.

유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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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璥(1211∼1289)

고려의 공신. 자는 천년, 본관은 문화이다. 당시 최 의가 정권을 장악하여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자, 김인준과 함께 최 의를 죽이고 정권을 다시 왕에게 돌려주었다. 그 공으로 좌우위 상장군에 올랐으며 공신의 호를 받았다.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에서 붙잡혔으나 탈출해 돌아왔는데, 왕은 기뻐하여 평장사 판병부사의 벼슬을 내렸다. 그는 신종·희종·강종·고종 등 4대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안 향 등 많은 학자들이 그에게서 글을 배웠다.

유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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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棨(1607∼1664)

조선의 문신. 자는 무중, 호는 시남, 본관은 기계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청과 화의를 주장하여 유배되었다. 1649년 인조가 죽자 다시 등용되어 부교리가 되었고, 장례 절차를 예론에 따라 시행토록 명종에게 건의하여 그대로 실시하였다. 그는 특히 예론에 대해서 매우 뛰어난 학자였다. 1715년 숙종 때 그가 지은 「가례원류」로 인해 노론·소론 사이에 치열한 당쟁이 벌어졌다. 저서로 「시남집」 등이 있다.

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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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寬順(1904∼1920)

3·1운동 때의 순국 쳐녀. 충남 천안에서 출생하였으며 크리스트교 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총명하고 의지가 굳어 어린 나이에도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며 '한국의 잔 다르크'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으로 내려가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천안·청주·연기·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의 유지들을 방문하고 시위 운동을 의논하였다. 음력 3월 1일 아오내 장터에서 일제히 궐기하였으며 유관순은 열렬한 연설로 시위 행렬을 지휘하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를 막기 위한 일본 경찰의 칼에 쓰러져 체포되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총살당하였다. 유관순은 모진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때때로 만세를 불러 동지들을 격려하다가 이듬해 10월, 갖은 형벌 끝에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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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吉濬(1856∼1914)

조선 말의 정치가·개화운동가. 자는 성무, 호는 구당, 본관은 기계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1880년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 의숙에 들어갔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보스턴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유럽 각국을 시찰한 후, 1884년 귀국하였으나 개화파로 몰려 감옥에 갇혔는데, 이 때 「서유견문」을 편찬하였다. 「서유견문」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체를 사용하였다. 1892년 전기 응용에 관한 교섭문서를 옥중에서 번역하고, 우리나라의 무한한 자원을 외국인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상소하여 중지시킨 공으로 석방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 때 외무참의가 되고, 이듬해 내부대신이 되었으나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7년 순종 황제의 특명으로 귀국하여 홍사단을 통해 국민 계몽운동에 힘썼다. 1909년 우리나라 최초의 문법서인 「대한문전」을 간행하였고, 경술국치 후 일제가 남작을 주었으나 사퇴하였다. 저서로 「보로사국 후례두익대왕 칠년전사」 등이 있다.

유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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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達永(1911~ )

농학자, 사회 운동가, 수필가. 호는 성천(星泉). 경기도 이천 출생. 1936년 수원 고등농림학교(현재의 서울대학교 농과 대학)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72년에 건국대학에서 명예 농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농학 관계의 연구 활동을 하는 한편, 밝은 사회를 위한 사회 운동에도 앞장섰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 유기농업협회 회장 등으로 일하면서 「유토피아의 원시림」 「인간 발견」 「흙과 사랑」 「소심록」 「유달영 인생론집」 등 많은 수필집을 펴냈다.

유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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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德章(1694∼1774)

조선의 화가. 자는 자고, 호는 수운, 본관은 진주이다. 동지중추 부사를 지냈으며 묵화로 대나무를 잘 그렸다. 팔순이 넘어서도 필력이 쇠하지 않았다 하며, 탄은의 화풍을 따랐다. 작품으로 「묵죽도」 「설죽도」가 있다.

유득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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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得恭(1749∼?)

조선의 실학자. 자는 혜풍, 호는 냉재, 본관은 문화이다. 일찍이 진사에 합격하여 정조 때에 규장각 검서가 되었다. 이덕무·박제가·서이수와 함께 '4검서'라 불리며, 북학파인 박지원의 제자로 박제가·이덕무와 더불어 실사구시의 방법으로 근대 문물을 수입하여 산업 진흥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덕무·박제가·이서구와 함께 '한학 4가'라고도 불린다. 저서로 「냉재집」이 있다.

유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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瑠璃王(?∼18)

고구려의 제2대 왕(재위 기원전 19∼기원후 18). 시조 동명왕의 맏아들로 부여에서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로 와서 태자에 책봉되고 동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17년 「황조가」를 지었고, 기원전 9년 선비족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 3년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으며, 13년 부여의 침입을 받았으나 크게 무찔렀다. 이듬해 왕자 무휼(후의 대무신왕)을 태자로 책봉하였으며 한의 고구려 현을 빼앗았다.

유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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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方善(1388∼1443)

조선의 학자. 자는 자계, 호는 태재, 본관은 서산이다. 권 근·변계량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태종 때 사미시에 급제하였으나, 1409년 서산으로 유배되었다. 이 때 서당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자, 아이들이 몰려들어 그에게서 글을 배웠다. 세종은 그의 학식이 높고 인품이 훌륭함을 알고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학문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주부라는 벼슬을 내렸으나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그의 제자로 서거정·이보흠 등 이름있는 학자가 많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저서로 「태재집」이 있다.

유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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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成龍(1542∼1607)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이견, 호는 서애, 시호는 문충, 본관은 풍산이다. 일찍이 이 황에게서 배우고,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로서 춘추관 기사관을 겸했다. 선조 때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와 직제학·승지·부제학을 거쳐 상주 목사를 지내면서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였다. 그 후 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낸 후, 1590년 우의정에 승진되어 광국공신으로 풍원 부원군에 봉해졌다. 좌의정에 재직 중 일본이 그들의 군사를 명으로 들여보내겠다는 국서를 보내왔는데, 이 사실을 명에 알려 훗날 명의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 율·이순신 등의 명장을 등용했으며, 영의정에 올라 왕을 모시고 피란가던 중 평양에 이르렀을 때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그는 평양에서 소동을 일으킨 난민들을 진정시키고 왕의 행렬이 의주로 향할 것을 주장하여 후에 명의 구원의 길을 열게 하였다. 관서 도체찰사가 되어 안주에 있으면서 군량을 준비하다가 이여송에게 평양 지도를 주어 전투상의 편의를 제공하고 간첩 수십 명을 잡아 죽였다. 그 후 삼남 도체찰사가 되어 이여송의 후퇴를 강력히 막아 전진케 했으며, 훈련도감제를 두어 군사를 훈련케 하고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98년 북인의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2년 후 복관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문장과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영남 유생들의 숭배를 받았으며 예악교화·치병이재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저서로 「서애집」 「징비록」 「관화록」 등이 있다.

유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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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誠源(?∼1456)

조선의 문신·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태초, 호는 낭간, 본관은 문화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로 있으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3년 김종서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수양 대군의 탄압에 못이겨 정난공신의 공로를 기록하는 교서를 썼다. 그 후 성삼문·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1456년 탄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자결하였다. 영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가곡원류」에 시조 1수가 전한다.

유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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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淑(1827∼1873)

조선 말기의 화가. 자는 선영, 호는 혜산, 본관은 한양이다. 도화서의 화원을 지냈으며 산수화를 비롯해 꽃·새 등을 정묘하고 아름답게 잘 그렸다. 완당 김정희는 유 숙의 「하산욕우도」를 평하여 “화경에는 주객의 구별이 뚜렷해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주와 객이 분명치 않아 제1급의 그림이 못 된다”고 하였다. 작품으로 「계산추새도」 「신선도」 「오수삼매」 등이 있다.

유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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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順汀(1459∼1512)

조선의 문신. 자는 지옹, 본관은 진주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연산군 때 성희안 등과 모의하여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1등 정국 공신이 되었으며, 한때 임사홍의 미움을 받기도 했으나 해를 입지는 않았다. 중종 때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며 활을 아주 잘 쏘았다. 문무를 경한 공신으로 명망이 높았다. 사후 중종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유숭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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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崇祖(1452∼1512)

조선의 학자. 자는 종효, 호는 진일재, 본관은 전주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최초의 학자로서 성균관에 18년간 있는 동안 성리학에 큰 공을 세웠다. 조광조 등과 같은 훌륭한 학자를 길러냈고 경서를 우리 말로 옮긴 최초의 책인 「칠서언해」를 내놓았다. '칠서언해'란 중국의 경서인 「주역」 「서경」 「시경」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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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伸(?∼1105)

고려의 문신·서도가. 1087년 선종 때 요에 사은사로 다녀왔으며, 1093년 다시 사신으로 송에 가서 「책부원귀」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벼슬이 좌복야 정당문학에 이르렀고 글씨에 뛰어났다. 「이상국집」에 의하면 그의 글씨는 신의 경지에 이르렀고 신라의 김 생, 고려의 탄 연·최 우에 다음가는 명필이라 하였다. 순천 조계산에 있는 송광사의 「불일보조국탑비」는 그가 쓴 것이다.

유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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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莘煥(1801∼1859)

조선 말기의 학자. 자는 경형, 호는 봉서, 본관은 기계이다. 헌종 때 전의현감이 되어 선비들에게 소학을 가르치는 한편, 탐관오리를 처벌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그러나 모함을 받아 홍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후부터는 후진 양성을 위해서만 힘썼다. 그는 조선 말기 성리학의 대가로서 유명하다. 저서로 「패동수언」 「동유연원」 등이 있다.

유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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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如大(1878∼1937)

독립운동가·목사. 호는 낙포이며 평북 의주에서 출생하였다. 1900년 의주에 양실학교를 세웠으며 선교활동을 하다가 목사가 되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의주의 시위 운동을 지도하였다. 저서로는 「면무식」 「위인기담」 등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유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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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雲龍(1539∼1601)

조선의 문신. 자는 응견, 호는 겸암, 본관은 풍산이다. 선조 때 전함사별좌를 지냈으며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렸으므로 존경을 받았다. 그 후 1592년 사복시첨정으로 벼슬이 올랐으며, 이듬해 풍기 군수로 있을 때 도둑떼를 소탕하여 공을 세웠다.

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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釉由(?∼246)

고구려의 충신. 246년 위의 관구검이 쳐들어와서 환도성이 함락되고 동천왕이 위급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 때 유유는 혼자 용감히 적진으로 나아가 위의 장수를 만나 항복하는 척하다가 틈을 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고 자기도 같이 죽음로써 왕을 위급한 상황에서 구했다. 장수를 잃은 위군은 혼란을 일으켜 대패하고 낙랑으로부터 쫓겨가 버렸다. 국토가 회복되자 구사자라는 벼슬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또한 대사자의 벼슬을 받았다.

유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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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應孚(?∼1456)

조선의 무신·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신지, 호는 벽량, 본관은 기계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평안도 절제사를 거쳐,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동지중추 원사·평안도 절제사 등을 지냈다. 활을 잘 쏘고 학식이 깊어 세종·문종의 사랑을 받았다. 같은 해 성삼문·박팽년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고 명의 사신을 초대하는 연회장에서 세조를 살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김 질의 배신으로 탄로되고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불복하다가 죽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청렴결백하였다. 숙종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유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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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麟錫(1842∼1915)

조선의 학자·의병장. 자는 여성, 호는 의암, 본관은 고흥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문하(門下)의 유생들을 이끌고 이를 반대하였다. 1894년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조직되자 의병을 일으켜 충주·제천 등지에서 싸워 김규식·권 소 등 부패한 관리들을 죽였다. 그러나 관군에게 패하여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 의군 도총재가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 봉천 성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소의신편」 「화동속강목」 등이 있다.

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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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一韓(1895~1971)

실업가·사회사업가. 평남 평양 출생. 9세 때에 미국에 건너가 고학으로 공부하여 1919년에 미시간 대학을 졸업, 1922년에 동 대학원을 수학하였다. 그 뒤 미국에서 식품 회사를 경영하여 크게 성공하고, 귀국하여 192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제약 회사인 '유한양행'을 세웠다. 한편 한국 고등기술학교를 세웠으며, 여러 가지 공익사업과 육영 사업에도 힘썼다. 또한 뉴욕 한미상공회의소 회장·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지냈으며, 국민훈장 모란장 및 무궁화장을 받았다. 저서에 「한국과 태평양 전쟁」 등이 있다.

유자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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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子光(?∼1512)

조선의 간신. 자는 우준, 본관은 영광이다. 용맹이 뛰어나 세조 때 무과에 올랐으며 예종 초에 남 이·강 순 등을 역모자로 몰아 죽였다. 그 후부터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은 반드시 모함해서 몰아냈다. 성종 때 도총관에 임명되자 서자 출신이라 하여 논란이 많았다. 그 후 사신으로 명에 여러 번 다녀왔으며, 일찍이 경남 함양 군수로 있을 때 자작시를 써 현판에 새겨 걸게 하였는데, 그 후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부임하자 떼어버렸다. 이에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1498년 연산군 때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스승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을 트집잡아 김종직의 저서와 현판을 모두 거두어 불사르게 하고 그를 대역죄로 몰아 그의 제자들까지 희생시킨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후 대신들의 탄핵으로 한때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성희안과의 인연으로 1506년 중종반정에 참가하여 1등 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대신들의 탄핵으로 훈작을 빼앗기고 유배되었다가 장님이 된 후 죽었다.

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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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政(1544∼1610)

조선의 고승·의병장. 속성은 임, 자는 이환, 호는 사명당, 본관은 풍천이다.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3세 때 경북 직지사에 들어가 신문 화상에게 선을 받아 승려가 되었다. 명종 때 선과 시험에 합격한 뒤, 묘향산에서 휴정(서산 대사)의 불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팔공산·태백산 등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도를 닦던 중, 옥천산 상동암에서 소나기에 의해 떨어진 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제자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홀로 참선하였다. 1589년 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관련되어 투옥되었으나 무죄로 풀려나와 금강산에서 3년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200여 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휴정의 밑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 그의 뒤를 이어 승군 도총섭이 되어 명의 군사와 협력하여 평양을 탈환하였다. 또한 도원수 권 율과 같이 의령에 내려가 왜군을 격파하여 당상이 되었다. 1594년 명의 장군 유 정(劉綎)과 의논한 후, 왜장 가토를 울산 진중으로 세 번 방문하여 왜군의 정세를 알아보고 돌아왔다. 이어 영남 지방에 내려가 팔공·금오·용기 등지에 산성을 쌓고 군량미와 무기를 갖추어 방비 태세를 굳건히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의 장군 마귀를 따라 울산의 도산에 쳐들어갔으며, 이듬해 순천의 예교에서 공을 세워 동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1604년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로 잡혀 갔던 3,500명을 데리고 돌아와 임금이 내리는 말인 어마를 하사받았다. 이때는 휴정이 입적한 해로 스승의 영탑에 예를 올리고 치악산에 들어갔으며 선조가 죽은 후에는 해인사로 들어가 불도를 닦았다. 저서로 「사명집」 「분충서난록」이 있다.

유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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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周鉉(1921∼1982)

소설가. 호는 묵사이며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문과를 중퇴하였으며, 1948년 문예지 「백민」에 「번요의 거리」가 발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 후 「백민」 편집 동인을 거쳐 신태양사 편집국장 등을 지내며 창작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의 작품은 주지와 사실의 조화를 잘 그려냈다. 1958년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작품으로 「태양의 유산」 「바람 옥문을 열라」 「조선 총독부」 등이 있다.

유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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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辰仝(1497∼1561)

조선의 문신·서화가. 자는 숙춘, 호는 죽당, 본관은 진주이다. 경남 진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경기·평안 등의 관찰사와 도총관을 지냈다.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으며,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렸다. 현재 남대문의 현판인 '숭례문' 3자를 썼다는 설이 있다.

유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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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鎭午(1906∼1987)

소설가·법학자·정치가. 호는 현민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문학부 법과를 졸업한 후 모교의 교수로 있으면서 문예지 「조선지광」에 「김강사와 T교수」를 발표하였다. 광복 후에는 주로 법학자로 활동하였으며, 1948년 헌법 기초위원으로 대한민국 헌법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이듬해 고려대학교 법정대 학장을 거쳐, 1952년 고려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있다가 귀국하여, 1961년 5·16 군사정변 뒤 재건 국민운동 본부장이 되었다. 1967년 신민당 총재로 취임하면서 정치계에 들어서 정치인으로도 크게 활약하였다. 학술원 종신회원을 지냈으며, 저서로 「헌법해의」 「헌법강의」 「구름 위의 명상」 「유진오 단편집」 등이 있다.

유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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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敞(?∼1421)

조선의 개국 공신. 자는 맹의, 호는 선암, 본관은 강릉이다. 이 색의 제자이며,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박사·문하 주서 등을 지냈다. 특히 이성계와 친하여 그에게 학문을 가르쳐 주었다. 1392년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워 2등 공신으로 대사성·중추원 부사 등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1408년 태조 이성계가 죽자 3년 동안 묘를 지켰다. 저서로 「선암집」이 있다.

유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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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拓基(1691∼1767)

조선의 상신. 자는 전보, 호는 지수재, 본관은 기계이다. 1721년 사신으로 청에 다녀온 후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경남 동래로 유배되었다. 1725년 노론이 권력을 잡자 풀려나와 대사간을 거쳐 호조판서·우의정이 되었다. 이때 신임사화로 죽은 김창집과 이이명의 복관을 건의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1758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곧 그만두었다. 그는 당대의 명필이었으며 저서로 「지수재집」이 있다.

유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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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致眞(1905∼1974)

극작가. 경남 충무에서 출생하였으며 청마 유치환의 형이다. 일본 릿쿄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극작과 연출에 전념하였다. 1941년 극단 '현대극장'을 세우고 1946년 '극예술 협회'를 조직했으며 이듬해 한국 무대 예술원 초대원장을 지냈다. 1949년 중앙 국립 극장을 세웠으며 우리나라 무대 예술의 원로로 활동해 왔다.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으며 동국대 교수를 거쳐 한국연극연구소(드라마센터) 소장이 되었다. 희곡집으로 「소」 「원술랑」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이 있다.

유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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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致環(1908∼1969)

시인. 호는 청마이며 경남 충무에서 출생하였다.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공부하였으며 일제 시대 만주에서 방랑하다가 돌아왔다. 1931년 「문예월간」지에 「정적」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의 대표작 「깃발」 등 초기의 작품에서는 허무적인 경향이 짙었으나 차차 인간의 생명·의지를 노래한 작품을 써서 세칭 생명파라고 불리운다. 그는 생의 추구와 개척의 태도가 허무를 초극하는 강렬한 의지를 실현하려 하였다. 이런 정신적 자세는 인생을 본질적이고 근원적으로 탐구하는 형이상학적 내용의 시로 나타났다. 따라서 개념에 충실한 나머지 시어의 조탁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아 때로는 생경한 언어가 사용되는 수가 있으나 이것은 도리어 독자의 눈을 인생의 내부로 끌어들여 깊은 감동을 주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서울시 문화상·자유문학상·예술원 공로상 등을 수상했으며 경주고등학교·경남여고·부산 남성여고 교장 등을 지내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시집으로 「청마시초」 「생명의 서」 「울릉도」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예루살렘의 닭」 「나는 고독하지 않다」 등이 있다.

유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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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賢穆(1925~ ) 영화감독. 황해도 사리원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47년에 이규환 감독의 조감독으로 출발해 1956년에 「교차로」로 감독에 데뷔했다. 대표작인 「오발탄」(1961)은 이범선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로, 뛰어난 영화기법을 곁들여 비참한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여 우리나라 영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또한 「잉여인간」(1964)도 「오발탄」과 같은 성격의 영화이며, 박경리 원작의 「김약국의 딸들」(1963), 황순원 원작의 「카인의 후예」(1968)도 소설을 영화로 만든 주요 작품이다. 1980년대에는 이문열 원작의 「사람의 아들」(1980)로 다시 주목을 받았다. 신상옥, 김기영, 강대진, 이만희 등과 함께 1960년대 우리나라 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현재 동국대 명예교수와 예술원 회원으로 있다.

유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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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馨遠(1622∼1673)

조선의 실학파 학자. 자는 덕부, 호는 반계, 본관은 문화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5세 때부터 이원진·김세렴을 스승으로 모시고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정동직과 더불어 '이기사칠' '인심도심' 등의 설을 논술하는 등 옛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많이 발견하였으며, 주자의 「가례」에 의하여 모든 의례를 행하였다. 진사에 급제한 후 1653년 효종 때 전라도 지방으로 옮겨와 살면서 저작에 힘쓰고 이상적인 세상을 건설하려는 이념에 몰두하였다. 그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은 우선 토지 개혁을 실시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농민에게 최저 기본량의 경작 농지를 확보하게 하여 농민이 잘 살게 되면 자연히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하였다. 그 외에도 세금·과거제도·교육·관료·군사 등 전반적인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학문 사상은 이 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이 익·정약용에 이르러 발전되었다. 그가 10년 동안 저작한 「반계수록」 26권에는 그의 사상과 이상 국가 건설의 구상이 실려 있으며, 1770년 영조의 특명으로 간행되었다. 죽은 뒤 호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기행일록」 「속강목의보」 「동사강목조례」 「주자찬요」 등이 있다.

유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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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好仁(1445∼1494)

조선의 문신·시인. 자는 극기, 호는 임계, 본관은 고령이다.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1486년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가했으며, 1490년 「유호인 시고」를 편찬하여 성종에게 옷감을 상으로 받았다. 그 후 합천 군수를 지내다가 병으로 죽었다. 그는 문장·시·글씨에도 뛰어나 당대의 '3절'로 불리었다.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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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花

고구려 동명왕의 어머니. 여동생들과 함께 압록강가에서 놀다가 북부여 왕 해모수의 꾐에 빠져서 그를 가까이 하자, 아버지 하백에 의해 태백산 우발수로 쫓겨나서 동부여의 왕 금와의 아내가 되었다. 그 후 해모수와의 관계를 알게 된 금와가 방에 가뒀는데, 이때 알을 하나 낳았다. 왕이 그 알을 개와 돼지에게 주어도 먹지 않고 길에 버려도 소와 말이 피하고 들에 버려도 새와 짐승이 덮어주었다. 다시 유화에게 돌려주어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이 아이가 고구려의 시조 주몽(동명왕)이라고 한다.

유효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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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孝通

조선의 의학자·문신. 자는 행원, 본관은 기계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종 때 중시에도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을 지냈다. 1431년 노중례와 함께 약용 식물을 정리한 의학 서적인 「향약채집월령」 「향약집성방」을 편찬하였다.

유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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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僖(1773∼1837)

조선의 문신·한글학자. 자는 계신, 호는 서파·남악이다. 1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우며 자랐다. 실학파의 언어학자인 정동유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하여, 천문·지리·농사·새·곤충·식목 등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한글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분석·검토하여 훈민정음의 자모를 분류·해설하였다. 1824년 순조 때 훈민정음의 원리와 중국음과의 관계를 이야기한 「언문지」를 저술하였다. 그 외에도 「문통」 「물명유고」 등이 있다.

유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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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希春(1513∼1577)

조선의 문신. 자는 인중, 호는 미암, 본관은 선산이다. 김안국의 제자이며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수찬·정언 등을 지냈다. 명종 때 윤원형에 의해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1567년 풀려나와 부제학·대사간 등을 지냈다. 선조 때 이조참판으로 있다가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가 지은 「미암일기」는 1568년에서 1577년까지의 정치 모습과 자기의 경력을 쓴 책으로 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죽은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속위변」 「역대요록」 등이 있다.

육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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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英修(1921∼1974)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해방 후 옥천여중에서 교편을 잡았다. 양지회의 명예회장으로 고아와 노인 등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 사회 육영 사업에 공헌한 바가 크며, 남산 어린이회관을 비롯하여, 부산 어린이회관을 설립하여 어린이 복지 사업에도 힘썼다. 1974년 8월 15일 제29주년 광복절 경축 식장(국립 극장)에 참석하였다가 조총련 소속 문세광에게 저격당하여 유명을 달리하였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렀고 국립 묘지에 안장되었다.

육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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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完順(1933~ )

현대무용가. 전북 전주 출생. 이화여대 체육과(무용 전공), 동 대학원(현대무용 전공)을 졸업. 1963년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 대학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했으며, 마사 그레이엄 무용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사사했다. 1962년 제1회 육완순 귀국무용발표회(국립극장)에서 「흑인영가(黑人靈歌)」 「공포」 「마음의 파도」 등을 소개했는데 미국의 현대무용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했다는 점에서 무용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 후 1972년까지 미국과 서울에서 7회의 무용발표회를 개최했고, 또한 무용관계 논문을 집필하여 교육무용의 이론화에 공적을 남겼다. 이화여대 부속고등학교 교사, 경희대학교 무용과 과장, 이화여대 무용과 과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육완순 무용원장으로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부활」 「황무지」 「단군신화」 등이 있다.

윤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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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崑崗(1911~1949)

시인. 충남 서산 출생. 일본 센슈 대학 졸업(1933). 1934년 「시학(詩學)」 동인의 한 사람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카프(KAPF)파의 한 사람으로 시를 썼으나 곧 암흑과 불안, 절망을 노래하는 퇴폐적 시풍을 띠게 되었고 풍자적인 시를 썼다. 그러나 해방후에는 전통적 정서에 대한 애착과 탐구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동인지 「시학」을 주간, 그 밖의 시집으로 「빙하」 「동물시집」 「살어리」 등이 있고, 시론집으로 「시와 진실」이 있다.

윤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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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瓘(?∼1111)

고려의 장군. 자는 동현, 본관은 파평이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104년 숙종 때 동북면 행영 병마 도통에 임명되어 여진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였다. 1107년 여진 정벌 원수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있는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 점령한 지역은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한 함경도의 동남부 일대로서 그 지역의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통태·진양·숭녕·공험진 등이다. 그러나 여진이 계속 북변을 침범하여 재정벌에 나섰으나 별소득 없이 패퇴하고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이 때문에 윤 관은 벼슬과 공신의 호를 삭탈당했다. 1110년에 복관되었으나 그 후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죽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서 싸움터에서도 항상 오경(五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한다.

윤국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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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國馨(1543∼1611)

조선의 문신. 자는 수부, 호는 달천, 본관은 파평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왜군과 싸웠으나 병으로 실패하여 벼슬을 잃었다. 1594년 다시 등용되어 병조참판·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병으로 물러났다. 그 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공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마음이 어질고 넓었으며 언제나 충성과 믿음으로 왕을 모시었다.

윤극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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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克榮(1903∼1986)

작곡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음악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하였다. '색동회' 동인으로 활동하며 많은 동요와 가곡을 발표하였다. 그는 사실상 우리나라 동요와 동시의 선구자라 할 수 있으며, 망국의 원통함을 안으로 삭여 「반달」 「설날」 「고드름」 「할미꽃」 등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는 300여 곡의 동요를 작곡하였다.

윤 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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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汲(1679∼1770)

조선의 문신. 자는 경유, 호는 근암, 본관은 해평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대사간·호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신으로 청에 다녀와서 이조판서에 올랐다. 글씨를 잘 써서 '윤상서체'라 불리었으며, 당시의 비문에 그의 글씨가 많았다. 저서로 「근암집」이 있다.

윤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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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德熙(1685∼?)

조선의 화가. 자는 경백, 호는 낙서, 본관은 해남이다. 화가인 윤두서의 아들이며 도사라는 벼슬을 지냈다. 그는 특히 말과 신선을 잘 그렸다. 아버지와 함께 쌍절이라 불리어지나, 필법이 유약하다는 평도 있다. 작품으로 「하경산수도」 「기마부인도」 등이 있다.

윤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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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東奎(1695∼1773)

조선의 학자. 자는 유장, 호는 소남, 본관은 파평이다. 그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대신 안정복·이가환 등과 함께 천문을 비롯해서 역법·지리·강역·의방 등 실용적인 학문을 공부하여 실학파로 그 이름을 떨쳤다. 또한 패수(지금의 대동강)를 비롯하여 4강에 대한 연구를 한 끝에 「사수변」이라는 책을 지었다.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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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東柱(1917∼1945)

시인. 어릴 때의 이름은 해환이며 북간도 용정에서 출생하였다. 평양 숭실중학을 거쳐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릿쿄 대학과 도지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일제 말 암흑기 저항문학의 대표적 시인으로서 민족의 슬픔을 노래로 나타내었다. 1943년 친구인 송몽규와 함께 귀국하다가 독립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붙잡혀서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었다. 광복 후 친구들이 그의 유고를 모아 첫 시집을 발간했으며, 1955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였다. 불과 30편 미만의 시를 남겼지만, 서정과 동경의 시로 이름 높은 「별 헤는 밤」과 젊은이의 기개를 잘 나타낸 「새길」 등을 비롯하여 전편을 통해 민족의 애수와 이상·정열을 상징적 필치로 다루고 있어 문학사적 견지에서도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연세대학교에 그의 시비가 있다. 그의 대표적인 시로 「자화상」 「별 헤는 밤」 「무서운 시간」 등이 있다.

윤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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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斗緖(1688∼1715)

조선의 화가. 자는 효언, 호는 공재·종애, 본관은 해남이다. 윤선도의 증손이며 숙종 때 진사에 급제하였다.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는데, 특히 인물·동식물 등의 그림에 뛰어났다. 현재·겸재와 함께 조선의 '3재'라 불린다. 작품으로 「노승도」 「산수도」 「자화상」 등이 있다.

윤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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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斗壽(1533∼1601)

조선의 문신. 자는 자앙, 호는 오음, 본관은 해평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을 지냈다. 1579년 연안 부사로 나아가 백성들을 잘 다스렸으며, 임진왜란 때 왕을 모시고 가다가 개성에 이르러 어영대장이 되었고 평양에 가서 좌의정이 되었다. 왜군이 평양 가까이까지 오자 왕과 여러 신하들이 함흥으로 옮기자 했으나 그는 의주가 함흥보다 방어하기에 낫다고 하여 끝내 그의 뜻을 관철시켰다. 후에 함흥이 적의 손에 들어가자 윤두수의 선견지명에 모두들 탄복하였다. 그 후 영의정이 되었으나 사임하였고, 1604년 왕을 안전하게 모시고 피란한 공으로 상을 받았다. 저서로 「성인록」 「연안지」 「평양지」 등이 있다.

윤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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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文擧(1606∼1672)

조선의 학자. 자는 여망, 호는 석호, 본관은 파평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부수찬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 호란 때 아버지 윤 황을 따라 왕을 남한산성으로 모셨다. 그 후 아버지가 죽자 벼슬을 내놓고 오직 주자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는 글씨에 뛰어났으며 죽은 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석호집」이 있다.

윤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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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白南(1888∼1954)

소설가. 본명은 교중이며 연극·영화의 선구자이다. 충남 공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도쿄 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13년 「매일신보」 편집장을 거쳐 「동아일보」에 입사하면서부터 소설을 쓰는 한편, 신극 운동·영화 사업에 참가하였다. 그는 '연극 동호회' '극예술 연구회' 등을 조직하였으며,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학장과 이듬해 초대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작품으로 「대도전」 「봉화」 「흑두건」 「야화」 등이 있다.

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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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潽善(1897∼1990)

정치가·제4대 대통령. 호는 해위이고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였다. 1930년 영국 에든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1922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약하였으며, 광복 후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 민중일보사 사장을 거쳐 1948년 서울 특별시장이 되었다. 그 후 상공부 장관·대한 적십자사 총재·3∼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제2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가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대통령직을 물러났다. 1965년 민중당을 조직, 고문으로 있다가 이듬해 신한당 총재가 되었다. 1967년 신민당 고문을 거쳐, 1970년 국민당을 만들고 총재가 되었다. 저서로 「구국의 가시밭길」이 있다.

윤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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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鳳九(1681∼1767)

조선의 학자. 자는 서응, 호는 병계, 본관은 파평이다. 숙종 때 진사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영조 때 주자를 송시열 사당에 함께 모시자고 했다가 벼슬에서 쫓겨났다. 그 후 다시 등용되어 판서에까지 올랐으며 한원진과 함께 호론(湖論)을 내세웠다. 한원진·이이근·현상벽·한홍조·성만진·이간·채지홍 등과 함께 권상하의 문하에서 배워 이들을 '강문 8학사'라고 불렀다. 저서로 「병계집」 「화양존주록」 등이 있다.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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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奉吉(1908∼1932)

항일의사. 충남 예산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 한학을 배웠다. 1926년 상하이에 건너가 모직 공장·세탁소 등에서 일하다가, 1931년 김 구의 '한인 애국단'에 들어갔다.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식 겸 일본 전승 축하회가 홍구 공원에서 열렸다. 이 날 윤봉길 의사는 폭탄을 몸에 품고서, 삼엄한 경비를 뚫고 식장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당시 중국에 있던 최고위급 일본인들이 한 자리에 모인 식장에서의 이 거사로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는 폭발 현장에서 즉사하였고, 최고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은 파편을 맞고 5월 26일에 죽었다. 그 밖에 여러 명의 일본인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거사 직후 윤봉길 의사는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른 후 체포되어 오사카로 이송되었고, 그 해 12월 19일, 24세를 일기로 사형당하였다. 유족으로 부인 배씨와 두 아들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윤봉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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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鳳朝(1680∼1761)

조선의 문신. 자는 명숙, 호는 포암, 본관은 파평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서·정언 등을 거쳐 1713년 암행어사가 되었다. 그 후 대사간이 되었으나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소론이 정권을 잡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영조가 즉위하자 다시 등용되었으며 「경종실록」의 편찬을 도왔다. 1727년 삭주로 귀양갔다가 풀려나와 대제학까지 이르렀다. 저서로 「포암집」이 있다.

윤석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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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石重(1911∼

)

아동문학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1942년에 일본 조치 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잡지 「어린이」에 동요 「오뚜기」가 당선된 뒤 많은 동요를 발표하였다. 1933년, 방정환의 뒤를 이어 「어린이」 주간으로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그 후 「소년중앙」 「소년」 「소학생」의 주간을 지냈으며 조선일보 편집 고문을 지냈다. 1956년 새싹회 회장에 선출되고, 1961년 3·1 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과 1966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70년 어린이 회관 고문이 되어 아동들을 위한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저서로 「윤석중 동요집」 「초생달」 「굴렁쇠」 「어린이를 위한 윤석중 시집」 등이 있다.

윤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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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宣擧(1610∼1669)

조선의 학자. 자는 길보, 호는 미촌·노서, 본관은 파평이다. 김 집의 제자이며 인조 때 생원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로 피란하여 성문을 지키다가 점령당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는 자살하였고 그는 평민의 옷을 입고 성을 탈출하여 살았다. 그 후 비겁하게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여 금산으로 내려가 평생을 학문 연구에 바쳐 성리학의 대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노서유고」 「노서일기」 등이 있다.

윤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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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善道(1587∼1671)

조선의 문신·시인. 자는 약이, 호는 고산, 본관은 해남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을 좋아하여 경사 백가에 무지 불통이었고, 의약·음양 지리에도 정통하였으며 시조에 특히 뛰어났다. 광해군 때 진사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권신 이이첨·박승종·유희분 등이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자, 이를 비난하는 글을 써서 왕께 올렸다가 이듬해 함북 경원으로 8년간 유배되었다. 그 후 인조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인 전남 해남에서 지냈다. 1628년 봉림 대군(후의 효종)과 인평 대군의 사부가 되어 인조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그 후 시강원문학이라는 벼슬을 지냈으나, 모함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내려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강화도로 피란하게 되자, 왕을 보호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강화도로 향하던 중, 청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향하였다. 보길도를 지나다가 그 섬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나머지, 그곳에 머물러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낙서재라는 정자를 세워 시를 벗삼아 지냈다. 그 후 남한산성에 있는 왕을 문안하지 않았다는 죄로 영덕에 유배되었다. 효종이 즉위하여 승지·예조참의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서인들에게 몰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자의 대비 복상 문제로 논쟁하다가 서인들에게 몰려 함경남도 삼수로 유배되었다. 7년 후인 1667년 현종 때 비로소 용서되었다. 죽은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는 치열한 당쟁 때문에 일생을 거의 유배지에서 보냈다. 저서로 「고산유고」가 있으며, 그 중 「산중신곡」 「속산중신곡」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은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윤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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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暹(1561∼1592)

조선의 문신. 자는 여진, 호는 과재, 본관은 남원이다. 선조 때 사신으로 명에 가서, 그곳에서 태조의 조상이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고 돌아왔다. 그 공으로 용성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임진왜란 때 상주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될 때 죽었다.

윤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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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順之(1591∼1666)

조선의 문신. 자는 낙천, 호는 행명, 본관은 해평이다.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아버지 윤 훤이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적을 막아내지 못한 죄로 사약을 받고 죽자, 그는 아우들을 데리고 숨어서 살았다. 그 후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가 있었으며, 1643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1657년 「선조 수정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 공조판서에까지 올랐다.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로 「행명집」이 있다.

윤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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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心悳(1897∼1926)

가수. 본관은 파평, 평양에서 태어나 경성여고보 사범과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하였다. 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 도쿄 음악학교에 유학을 가서 성악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 경성사범 부속학교 음악 교사로 근무하며 음악회에 출연, 성악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은퇴 후 토월회 배우로 활약하다가 탈퇴하고 유행가 가수로 전향하여 방송에 출연하고, 레코드를 취입하였다. 특히 「사의 찬미」는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다. 1926년 일본 니토 레코드 회사에 레코드 취입차 오사카로 갔다가 관부 연락선을 타고 귀국하던 중, 애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하여 정사하였다.

윤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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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陽來(1673∼1751)

조선의 문신. 자는 계형, 호는 회와, 본관은 파평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글씨 쓰는 것이 매우 빨라 '비주서'란 별명을 얻었다. 그 후 주청부사로 청에 다녀왔는데, 정권을 잡고 있던 소론으로부터 '청에 갔을 때 경종의 질병을 함부로 발설했다'는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쫓겨났다. 노론이 정권을 잡자 풀려났는데, 공조참판을 거쳐 대사간으로 있을 때 탕평책을 건의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특히 글씨와 시에도 뛰어났는데, 글씨로 「영상 윤인경 비」가 전해진다.

윤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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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9)

고려의 문신. 호는 금강 거사이며 본관은 파평이다. 윤 관의 아들이며 인종 때 국자사업에 전임되어 경연에 나아가 왕에게 학문을 강의하여 왕의 칭찬과 상을 받았다. 예종 때 아버지인 윤 관이 의천의 비문을 지었는데, 김부식이 이것을 함부로 고쳐서 아버지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개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1133년 김부식이 「주역」을 강의할 때 조리있게 따져 김부식을 공박하였다. 1135년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 김부식의 부하가 되어 공을 세웠으나 묘청의 일파인 정지상과도 친했다는 이유로 양주 방어사로 좌천되었다. 그는 문장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특히 「주역」에 밝았다. 저서로 「역해」가 있다.

윤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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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

조선의 화가. 자는 군열, 호는 청고, 본관은 해남이다. 진사 벼슬을 지냈으며 할아버지 윤두서와 아버지 윤덕희의 뒤를 이어 그림을 잘 그렸다. 작품으로 「춘하도」 「연강우색도」 등이 있다.

윤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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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元衡(?∼1565)

조선의 문신. 자는 언평, 본관은 파평이다. 중종의 왕후인 문정 왕후의 동생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문정 왕후가 경원 대군(후의 명종)을 낳자 당시의 권세가인 김안로를 제거하였다. 또한 인종의 외삼촌 윤 임이 경원 대군을 해하고자 한다고 모함하여 서로 다투었는데, 이때 윤 임 일파를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은 크게 세력을 얻어,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 임 일파와 많은 선비들을 죽였다. 이어 형인 윤원로와 권력을 다투다가 이듬해 형을 유배시키고 완전히 권력을 잡았다.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을 도왔으며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영의정에까지 올라 세도를 부리다가, 1565년 문정 왕후가 죽자 벼슬을 잃고 강음에 유배되어 죽었다. 첩 난정과 함께 자살하였다고도 한다.

윤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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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毅立(1568∼1643)

조선의 문신. 자는 지중, 호는 월담, 본관은 파평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형조참판·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림과 글씨에 띄어났는데,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렸다. 저서로 「야언통재」가 있으며 그림으로 「하령산수도」 등이 있다.

윤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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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伊桑(1917∼1995)

작곡가. 경남 충무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음악가로서의 소질을 보였으나 가난하여 정상적인 공부를 하지 못하였다. 통영의 협성학원 2학년을 중퇴하고 포목상의 점원으로 들어갔으나, 음악에 대한 집념을 버릴 수 없어 틈틈이 작곡을 익혀 18세 때 동요곡집 「목동의 노래」를 출간하였다. 홍난파에게 격찬을 받고 일본 동양 음악학교에서 고학으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하고 귀국하였다.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5개월간 옥살이를 하여 폐병을 얻게 되었다. 통영여고·부산사범의 음악 교사로 재직하면서 음악인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덕성여대 음악대 강사로 있으면서 「현악 4중주」곡과 「피아노 3중주」곡을 작곡하였다. 1955년 성루시 문화상(음악 부문)을 수상했는데, 그것을 동기로 프랑스로 유학갔다가 다시 서독으로 갔다. 1959년 독일 다름슈타트 국제 현대 음악제에 「7악기를 위한 연주곡」으로 입선, 작곡가로서의 그의 위치가 굳어져 갈 때 동백림 사건에 관련되어 소환당하였다. 옥중에서 오페라 「나비의 꿈」을 계속 작곡하던 그는 특사로 석방되어 다시 서독에서 오페라 「심청」을 작곡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92년 세계 최고의 작곡가 30인에 선정되었고 베를린 음대 교수를 역임,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독 킬 시 문화상·서독 뮌헨 글라트 바흐 시 문화상·독일 연방 공화국 대공로 훈장 95 예술인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저서로 「상처 입은 용」이 있다. 작품으로는 오페라 「유동의 꿈」을 비롯 100여 곡의 연주곡이 있고 30여 종의 CD 및 레코드를 남겼다.

윤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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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日善(1896∼1987)

의학자.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였으며 1923년 일본 교토 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1929년 동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브란스 의과대학 교수·서울대학교 의과대 학장·대한 의학협회장·학술원 초대 회장 등을 지냈다. 1956년 서울대학교 총장에 취임했으며, 그 후 유네스코 한국 과학기술 정보 센터 위원장·원자력 원장·과학기술 후원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학술원상·문화 훈장·서울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윤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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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任(1487∼1545)

조선의 무신. 자는 임지, 본관은 파평이다. 중종의 비인 장경 왕후의 오빠로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윤 임은 인종의 외삼촌이었고 윤원형은 명종의 외삼촌이었는데, 둘이 세력이 비등하여 서로 싸웠다. 당시 사람들이 윤 임을 대윤, 윤원형을 소윤이라 불렀다. 일찍이 인종이 왕세자로 있을 때 중종의 계비인 문정 왕후가 명종을 낳자 중종은 이를 매우 사랑하였다. 윤 임은 김안로와 함께 인종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 왕후와 틈이 생겼다. 그 후 윤원형 일파는 윤 임이 명종을 해치려 한다고 모함했으며, 윤 임은 또 윤원형이 인종을 해치려 한다고 하여 대윤과 소윤간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했으므로 문정 왕후가 대신 정사를 돌보았다. 이에 크게 세력을 얻은 윤원형은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 임을 처형하고 그의 아들 3명도 살해하였다. 그 후 선조 때에 복관되었다.

윤지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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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持忠(1759∼1791)

조선 말기의 천주교 순교자. 교명은 바오로이며 정약용의 외사촌이다. 정조 때 진사가 되었고 정약용의 가르침을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789년 베이징에 가서 견진성사를 받고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 위패를 만들지 않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 사실이 관청에 알려져 불효·불충·악덕이라는 죄명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이 사건을 신해사옥이라고 한다.

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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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集(1606∼1637)

조선의 문신. 자는 성백, 호는 임계, 본관은 남원이다. 병자호란 때 3학사의 한 사람으로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교리로 있으면서 청과의 굴욕적인 화의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인조가 청에 항복하자 청의 선양에 잡혀가 심한 고문을 받고, 오달제·홍익한과 함께 사형당하였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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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致昊(1864∼1946)

조선 말기의 정치가. 호는 좌옹이며 본관은 파평이다. 1881년 최연소자(17세)로 신사유람단에 끼어 일본을 다녀와서 개화 사상에 눈을 떴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다가, 1883년 한·미 조약을 체결하러 오는 미국 공사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 1896년 민영환을 따라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서재필·이승만·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회장이 되었으며 「독립신문」 사장을 겸하였다. 그 해,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시정 개혁안 6개조」를 고종에게 상소했으나, 황국협회의 모함을 받자 피신하였으며 독립협회는 해산당하였다. 1906년 장지연·윤효정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교육 사업과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데 노력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6년형을 선고 받았다. 일제 말기에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냈는데, 광복 후 친일파로 규탄받자 자택에서 자살하였다.

윤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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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卓然(1538∼1594)

조선의 문신. 자는 상중, 호는 중호, 본관은 칠원이다. 이 황의 제자로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다. 그 후 동래 부사·상주 목사를 지냈으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 때 영남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왕이 그의 재능을 믿고 영남 감사로 기용하였다.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모시고 북으로 피란갔는데, 이 때 함경 지방에는 이미 적이 다가왔으므로 의병을 모아 적을 격퇴시킬 계획을 세우던 중 객사하였다.

윤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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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弼商(1427∼1504)

조선의 상신. 자는 양좌, 본관은 파평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등을 지내면서 세조를 가까이 모셔 왕의 총애를 받았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이 평정되자, 반란의 기밀을 미리 알아낸 공으로 파평군에 봉해졌다. 1479년 성종 때 명이 건주위를 칠 때, 좌의정으로 도원수가 되어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명을 도와 싸웠다. 그 후 영의정에 올랐으며, 연산군 때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를 폐할 때 관련되었다 하여 사약을 받고 죽었다.

윤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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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煌(1572∼1639)

조선의 문신. 자는 덕요, 호는 팔송, 본관은 파평이다. 성 혼의 제자이며,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637년 김상헌·정 온 등이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했다는 죄로 청에 붙잡혀 갈 때, 윤 황은 대신 잡혀 가겠다고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윤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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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淮(1380∼1436)

조선의 학자. 자는 청경, 호는 청향당, 본관은 무송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겸 춘추관 기사관을 지냈다. 세종 때 집현전에 있으면서 불교를 배척하고 맹사성 등과 함께 「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다. 1434년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하였으며, 남수문과 더불어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윤 회와 남수문은 같이 술을 잘 마셔 과음할 때가 많았다. 이들의 재질을 아낀 세종이 술을 석 잔 이상 못 마시게 한 후로는 연회 때마다 둘이서 큰 그릇으로 석 잔씩 마셨다고 한다. 사람들은 문성·주성의 정기가 합하여 윤 회 같은 현인을 낳았다고 하였다. 그 후 병조판서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윤효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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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孝重(1917∼1967)

조각가. 경기도 장단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도쿄 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였다. 1952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국제 예술가 회의에 우리 나라 대표로 참가했다. 그 후 미술 전람회 심사위원·홍익대 미술학부장·대한 미술협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작품으로 「충무공 동상」 「야생」 등이 있다.

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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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1680)

조선의 문신. 자는 희중, 호는 백호, 본관은 남원이다. 남인의 주요 인물로 서인과 대립하였으며 「중용」 「대학」 「효경」 등에 독자적인 해석을 붙인 학자이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자의 대비 복상 문제가 일어나 서인들이 기년설을 주장한 데 대해, 윤 휴 등 남인은 3년설을 주장하여 서인의 송시열과 논쟁을 벌였다. 1674년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성균사업·우찬성을 지냈다. 그러나 1680년 남인이 물러나게 되자, 윤 휴는 갑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오가작통법과 지폐법 등을 실시하게 했으며 세금제도를 개혁했으나 실패하여 중지되었다. 또한 상평제·호포법을 실시하도록 하였으며 체부를 신설하여 여진족 정벌에 대비하도록 했으나 결과가 나빠서 폐지되었다. 그는 학문에 있어서도 당시의 주자학 해석 방법을 배격하고 나름대로 독특한 해석을 함으로써 당시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후 숙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독서기」 「백호집」 「중용설」 등이 있다.

윤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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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興吉(1942~ )

소설가. 전북 정읍 출생. 전주사범학교 수학하고, 1973년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한국일보」 신춘 문예에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황혼의 집」 「장마」 「묵시의 바다」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 「완장」 「꿈꾸는 자의 나상」 등이 있으며, 한국문학작가상·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인간의 근원적인 갈등과 민족적 의식의 저변에 위치한, 삶의 풍속도를 예리하게 파헤치는 솜씨를 지닌 작가다.

을지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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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支文德

고구려의 장군. 612년 영양왕 때 수 양제가 우문술·우중문을 좌·우익위 대장군으로 삼고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압록수에 이르렀다. 이 때에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항복하고 적의 헛점을 염탐하고 돌아오던 중, 수의 군사들이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추격하여 왔다. 을지문덕은 여러 차례 싸움에서 거짓으로 패하여 평양성 가까이에까지 유인하였다. 이때 을지문덕은 적장 우중문에게 \"그대의 신묘한 재주는 천문에 구하고 묘산은 지리에 통하였으며 전승의 공은 이미 높았으니 만족함을 알았으면 그치기를 원한다\"라는 희롱의 시를 보냈다. 다시 우문술에게도 거짓 항복을 청하여, \"철군하면 왕을 모시고 황제를 찾아뵙겠다\" 하니 꾐에 빠진 것을 깨달은 적군은 황급히 후퇴하였다. 을지문덕은 적군이 살수를 건널 때, 맹공격을 가하여 살아돌아간 자가 불과 2천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 싸움을 '살수대첩'이라고 한다.

을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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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巴素(?∼203)

고구려의 재상. 압록곡 사람으로 유리왕 때의 을 소의 손자이다. 191년 고국천왕이 각부에 유능한 사람을 천거하라고 하자, 4부에서 모두 안 유를 천거하였는데 안 유는 다시 왕에게 을파소를 천거하였다. 왕은 을파소에게 중외대부의 벼슬과 우태의 작위를 주었으나, 을파소는 나라를 다스리기에 부족한 벼슬이라 하여 사양하였다. 그러자 왕이 재상에 임명하였는데, 많은 반대가 있었다. 그는 지성으로써 나라를 다스렸는데, 상벌을 신중히 하여 천하가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농부에서 일약 재상이 되어 13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가 죽자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슬퍼하였다.

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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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湘(625∼702)

신라의 고승·화엄종의 시조. 친척 형인 원효와 가깝게 지내다가 644년 선덕 여왕 때 황복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650년 원효와 함께 불법을 연구하기 위하여 요동 지방까지 갔다가 고구려의 순찰대에 붙잡혀 실패했다. 그러나 661년 바닷길로 당에 가서 당의 고승인 지엄을 스승으로 7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먼저 들어온 제자들보다도 학문이 앞섰다. 지엄은 화엄 교리에 대하여 72가지 그림을 그려 설명했으나, 의상은 그보다 더 간단한 그림으로 전체의 뜻을 나타냄으로써 지엄을 감탄하게 하였다. 671년 당이 백제와 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문무왕에게 나라의 방비를 튼튼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676년 의상은 자기가 배운 교리를 펴기 위하여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692년 효소왕 때 당의 고승 현수가 자신의 저서 「화엄경 탐현기」와 그 책을 비판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친필 서신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의상은 이 책을 제자들에게 주어 화엄의 깊은 뜻을 배우게 하였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오진·지통·표훈·상원·능인 등 10여 명의 훌륭한 승려가 나왔다. 고려 숙종은 해동 화엄 시조 원교 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 「화엄일승법계도」 「십문간법관」 「백화도장발원문」 등이 있다.

의유당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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意幽堂金氏

조선 순조 때의 여류 문인. 본관은 연안이며 판관 이희찬의 아내이다. 1829년 남편이 함흥 판관으로 부임하게 되자 남편을 따라서 그 부근의 이름난 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지은 기행·전기·번역 등을 모아 「의유당 관북 유람일기」를 지었다. 이 작품의 내용은 낙민루·북산루 등에 대한 것으로서 한글로 썼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동명일기」는 국문학 사상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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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慈王(?∼660)

백제의 제31대 마지막 왕(재위 641∼660). 무왕의 맏아들로 632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용맹스러우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빼앗고, 이어 윤 충으로 하여금 대야성을 치게 하는 등 신라를 자주 쳐들어갔다. 그러나 649년 신라의 7성을 쳐들어갔으나 김유신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만년에는 사치스럽고 방탕하여 성 충 등 충신들의 간언도 듣지 않았다.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계백 장군으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했으나, 황산벌 싸움에서 패하여 사비성이 함락되었다. 백제의 멸망을 지켜본 3천 궁녀들은 낙화암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었으며, 왕은 태자 등 1만 2,000여 명과 함께 당에 끌려가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로써 백제는 31대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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毅宗(1127∼1173)

고려의 제18대 왕(재위 1146∼1170). 인종의 맏아들로, 1134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성격이 거칠고 방탕하였으나 시문을 좋아하여 문신들과 함께 호화스러운 연회를 일삼고 무신들을 멸시하였다.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동생인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1173년 김보당이 의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려고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경주에 유배되었다가 이의민에게 살해되었다.

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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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天(1055∼1101)

고려의 승려. 이름은 후, 의천은 자이며 문종의 넷째 아들이다. 11세가 되던 1065년 승려가 되어 영통사에서 당시의 왕사인 난원의 가르침을 받았다. 13세 때 승려를 다스리는 직책인 승통에 임명되었다. 1084년 송의 정원 법사의 초청을 받고, 왕에게 갈 것을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이듬해 몰래 제자인 수개만을 데리고 송으로 떠났다. 왕은 크게 놀라 관리와 제자 낙진·혜선·도린 등을 수행하게 하였다. 그는 송나라 철종제의 환대를 받으면서 계성사에 머물며 유성 법사에게 화엄종·천태종의 진리를 배웠다. 그 후에는 상국사·흥국사 등을 찾아가 여러 승려들을 만나 불법을 닦았다. 1086년 항주로 가서 정원 법사에게서 「화엄소초」의 의문점에 대해 지도받았으며, 자변 대사로부터는 천태종의 강론을 들었다. 그는 이 곳에서 '해동 석가'라고 불리었으며 그가 거처하던 혜인선사라는 절은 고려 사람인 그를 기념해서 '고려사'라고 바꾸기까지 하였다. 1086년 형인 선종의 간곡한 청으로 귀국하여 문종 때 개경에 새로 세운 흥왕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는 이 곳에 교장도감을 두어 송에서 가져온 많은 경전과 요·일본에서 사들인 서적 등 4,700여 권을 다시 고쳐 간행하였다. 또한 옛 책을 모아서 「속장경」을 완성하였다. 1094년 홍원사 주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화폐를 만들도록 건의하여 경제 발달에도 이바지하였다. 1097년 국청사가 새로 세워지자, 주지가 되어 처음으로 천태종을 강의하였다. 그는 고려 불교가 신라의 5교 9산을 이어받아 교종과 선종으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고 있던 당시에, 교종과 선종을 통합·통일하여 천태종을 새로 만들어서 고려 불교의 융합을 실현함으로써 큰 업적을 남겼다. 영통사에 김부식이 지은 비석이 남아 있으며, 선봉사에는 '해동 천태 시조 대각 국사'라고 씌어진 비석이 전해진다. 저서로 「원종문류」 「해동유본 견행록」 「천태사교의주」 등이 있다.

의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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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親王(1877∼1955)

고종의 셋째 아들로 순종의 이복 동생. 이름은 강, 서출로서 1891년 의화군에 봉해졌다. 1894년 특명 대사의 자격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900년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1920년 항일 단체인 대동단의 전 협·김가진 등과 의논하여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이 매국 간신들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합방하고 내 부왕과 모후를 살해한 것이며, 결코 부왕께서 합방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나는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차라리 독립된 한국의 한 서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 되기를 원하지 않는 바이니 임시정부가 설립된 곳으로 가서 광복을 위해 보조하려 한다. 이 결심은 오직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함과 조국의 독립 및 세계의 평화를 위함에서이다” 이 해 의친왕은 밤중을 이용하여 궁궐을 빠져나와 정남용과 상의한 끝에 상복 차림을 하고 만주 안동 현까지 갔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송환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일본으로 건너갈 것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하고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끝까지 지켰다.

의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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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砧

조선 성종 때의 승려. 당의 유명한 시인 두보의 시에 능하여, 성종 때 조 위와 함께 두보의 시를 한글로 번역하여 「두시언해」를 편찬하였다.

이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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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家煥(1742∼1801)

조선 말기의 학자·천주교 순교자. 자는 정조, 호는 금대, 본관은 여흥이다.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남인파에 속하는 학자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새로운 학문연구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숙부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오자, 이에 흥미를 느끼고 연구하였으나 입교를 하지는 않았다. 신해박해 때, 광주 부윤으로 있으면서 천주교에 박해를 가하는 편에 섰다. 그 후 형조판서 등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1795년 청의 주문모 신부가 몰래 입국한 사건으로 반대당의 모함을 받고 좌천되었다. 그는 다시 천주교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마침내 신자가 되었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이승훈과 함께 붙잡혀 순교하였다. 문장에도 능했으며 필법이 뛰어났다. 저서로 「기전고」가 있다.

이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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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甲

독립 운동가. 호는 추정이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06년 정운복과 함께 오성학교를 세워 후진 교육에 힘썼으며,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시베리아로 건너가 이 강과 함께 「정교보」를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이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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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甲成(1889∼1981)

독립운동가. 1915년 세브란스 의전 약학과를 마쳤으며, 3·1 운동 때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24년 세브란스 의약 지배인을 거쳐, 1926년 중앙 기독교 청년회 이사, 1931년에는 경성공업 지배인이 되었다. 광복 이듬해 독립 촉성회 회장을 지낸 뒤, 국민회 최고위원·국산 부흥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을 받았으며, 이듬해 건국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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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康年(1861∼1908)

조선 말기의 의병장. 자는 낙인, 호는 운강, 본관은 전주이다. 경상도 문경에서 출생하였으며, 고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있다가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였으며, 1894년 동학운동 때 문경의 동학군을 지휘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고, 1907년 일본에 의해 고종이 퇴위할 것을 강요받자,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민긍호와 합세하여 충주를 공격하였다. 이 해 12월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할 때 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이에 가담하였다. 그는 가평·인제·강릉·양양 등지에서 승리했고 서울로 향하여 가던 중, 가평의 광악산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적의 복병에게 사로잡혀 일본 정부의 재판을 받고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운강문집」이 있다.

이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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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塏(1417∼1456)

조선 사육신 중의 한 사람. 자는 청보, 호는 백옥헌, 본관은 한산이다. 이 색의 증손이며,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을 지냈다. 시문이 청절하여 이름이 높았다. 1456년(세조 2) 성삼문·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진 고문 끝에 죽었다. 본래 세조와도 친분이 있어 사건의 진상을 진술하기를 강요받았으나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혹심한 형벌을 받는 동안 안색조차 변하지 않아 보는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하였다.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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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健命(1663∼1722)

조선의 문신. 자는 중강, 호는 한포재, 본관은 전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698년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온 후 부제학·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1721년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세제(영조)의 책봉을 주장했으며 책봉 주청자로 청에 다녀왔다. 그때 신임사화가 일어나 노론이 쫓겨나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성미가 온순한 반면 강직하여 왕을 섬기되 아부하지 않았다. 글씨가 뛰어났는데 특히 송설체로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 「한포재집」이 있다.

이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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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建昌(1852∼1898)

조선의 문장가. 자는 봉조이며 호는 영재이다. 어려서부터 사서 오경에 정통하였으며 15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1874년 서장관으로 청에 가서 그 곳의 문장가인 황 각 등과 교제하며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충청우도의 암행어사·해주 감찰사 등을 지냈다. 그가 지은 「당의통략」에는 당쟁이 일어난 원인과 그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쟁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에서 자결한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철저하게 서양인들을 미워하였다. 그로 인하여 크게 영달하지 못하였다. 저서로 「명미당집」이 있다.

이경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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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慶胤(1545∼?)

조선의 화가. 자는 수길, 호는 낙파, 본관은 전주이다. 산수화를 비롯하여 인물·소·말 등의 그림에 뛰어났으며, 색감과 정취가 뚜렷하였다. 작품으로 「수족도」 「고사탁족도」 「관폭도」 「산수도」 등이 있다.

이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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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繼祐(1573∼1645)

조선의 화가. 호는 휴휴당이며 그림을 잘 그렸는데, 특히 포도에 능하였다. 대표작으로 「월야 포도도」가 있다.

이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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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高(?∼1171)

고려의 무신. 의종이 문신만 우대하고 무신은 천대하는 데 분개하여, 1170년 의종이 보현원에 행차했을 때 이의방·정중부 등과 함께 많은 문신을 죽였다. 이어 의종을 몰아내고 명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듬해 무신들 사이에 분열이 생기자, 정중부 등을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이의방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어머니도 피살되었으나, 아버지는 본래 이 고와 의절하고 있었으므로 죽음은 면하고 유배되었다.

이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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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穀(1298∼1351)

고려 말기의 학자. 자는 중부, 호는 가정, 본관은 한산이다. 1344년 충목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연복사 종에 새기는 글을 지었으며 검열관·정당문학 등을 지냈다. 이제현 등과 함께 「편년강목」을 증수했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에 대한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저서로 「가정집」 등이 있다.

이 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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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适(1587∼1624)

조선의 무신. 자는 백규, 본관은 고성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선조 때 형조좌랑·태안 군수를 지냈다. 1623년 함북 병마절도사가 되어 부임하기 직전에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성공케 하였다. 그 공으로 2등 공신이 되었으며, 후금(청)과 변방에서 분쟁이 잦아지자 영변으로 가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등 국경의 경비에 힘썼다. 1624년 이 괄의 아들 이 전이 당시의 일부 지식층과 교유하며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한 사실이 과장되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모함을 받았다. 이에 조정에서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아들을 잡으러 오자, 무능하고 의심 많은 공신들에 대한 평소의 적개심이 폭발하여 공신들의 제거를 이유로 난을 일으켰다. 막강한 군대와 탁월한 작전으로 관군을 차례로 격파하자, 인조는 공주로 피란했다. 이어 흥안군 제를 왕으로 추대했으나, 다음날 장 만이 거느린 관군과의 길마재 싸움에서 정부군에게 대패하였다. 이 괄은 이천으로 도망했다가 부하 장수 기익헌·이수백에게 목이 잘리어 죽고, 난은 평정되었다. 그의 반란은 후에 정묘호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광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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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匡呂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자는 성재, 호는 월암, 본관은 전주이다. 통신사 조 엄이 쓰시마 섬에서 가지고 온 고구마를 당시 동래 부사로 있던 강필리에게 자극을 주어, 고구마 재배에 성공하게 하였다. 저서로 「이참봉집」이 있다.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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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光洙(1892∼?)

소설가. 호는 장백산인·춘원이며,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민족주의 운동에 감화를 받아 일본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고, 1919년 2월 백관수·최팔용·송계백 등과 '재일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였다. 2·8 독립운동 사건을 모의할 때 연락차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 그곳에서 「독립신문」의 주필 겸 임정 사료 편찬위원회 주임으로 있다가, 1921년 귀국하였다. 이보다 앞서 1917년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하여 최남선과 함께 신문학 개척기의 선구자가 되었다. 상하이로부터 귀국한 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내면서 신문에 장편소설 「흙」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수많은 작품은 민족주의와 인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 갱생의 이상을 담고 있어 당시 청년층에 큰 감명을 주었다. 1937년 흥사단 사건으로 투옥되어 이듬해 병으로 보석되었으며, 이 무렵에 「사랑」 「세조대왕」 등을 집필하였다. 1938년부터 친일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국민 총동원 계획에 참여하여 김용제·최재서·김기진 등과 문인 보국회를 조직하고 소위 황도문화 선양에 노력하였으며, 1945년 2월에는 소위 내선 동포의 정신적 단결을 촉구하여 국민의무 완수를 목적으로 한다는 야마토 동맹의 조직에 가담하여 이사가 되었다. 광복 후 반민족 행위자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그 무렵 「나의 고백」이라는 자서전을 내었다. 그 후 봉선사 등에서 집필 활동을 계속하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작품으로 「개척자」 「방황」 「혁명가의 아내」 「이순신」 「원효 대사」 「무명」 「소년의 비애」 「어린 벗에게」 등이 있다.

이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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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光弼

고려 명종 때의 화가. 본관은 전주이며 화가 이 영의 아들이다. 그는 문신들이 지은 「소상팔경」을 읽고 느낀 대로 그림을 그렸다. 또한 산수화에 능한 명종과 함께 때때로 그림을 그렸다. 작품으로 「소상팔경도」가 있다.

이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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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敎翼(1807∼?)

조선 말기의 화가. 자는 사문, 호는 송석, 본관은 연안이다. 산수도와 꽃·나비 등의 그림을 잘 그려 이름을 떨쳤다. 일찍이 기묘한 나비를 뜰에서 보고 이를 잡아 색채를 연구하려고 의관도 벗은 채 성북동까지 따라갔다는 일화도 있다. 작품으로 「노승소요도」 「호접도」 등이 있다.

이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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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貴(1557∼1633)

조선의 문신. 자는 옥여, 호는 묵재, 본관은 연안이다. 이 이·성 혼의 제자이며, 임진왜란 때에 삼도 소모관·삼도 선유관으로 소·말·식량·군졸 등을 징발하여 도체찰사 유성룡에게 수송했다. 1603년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안산 군수·배천 군수 등을 지냈다. 그 후 평산 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개탄하여 김 유 등과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으며, 연평 부원군에 봉해졌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란하였으며, 이때 청과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저서로 「묵재일기」 「이충정공 장소」 등이 있다.

이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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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圭景(1788∼?)

조선의 실학자. 자는 백규, 호는 오주, 본관은 전주이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할아버지 이덕무가 이룩해 놓은 실학을 이어받아 조선 후기의 실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대학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많은 서적을 읽고 천문·지리·역사·문학·종교·서화·풍속 등 모든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다. 저서로 「오주연문장전산고」 60권이 있다.

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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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奎報(1168∼1241)

고려의 문장가. 자는 춘경, 호는 백운거사, 본관은 황려(여흥)이다. 어려서부터 시와 문장에 뛰어났다. 명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천마산으로 들어가 호를 백운거사라 하고 글을 쓰며 지냈다. 그는 거기서 「천마산시」 등을 썼는데, 특히 영웅 서사시 「동명왕편」은 민족의 영웅 동명왕의 생애와 발자취를 노래한 서사시로서 우리 문학사에 남긴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는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를 쓰기로 유명하였으며, 시·술·거문고를 좋아하여 '3혹호(三酷好) 선생'이라 불리었다. 한때는 권신의 압객(狎客)이란 말도 들었으나, 성격이 강직하여 조정에서는 인중룡(人中龍)이란 평이 있었다. 저서로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국선생전」 등이 있다.

이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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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圭煥(1904~?)

경북 대구 출생. 일본 신코(新興)키네마에 들어가 연출 수업을 받았다. 1932년 「임자없는 나룻배」, 1935년 「바다여 말하라」 「그 후의 이도령」 「무지개」, 1937년 「나그네」, 1939년 「새 출발」, 1940년 「창공(蒼空)」, 1946년 「똘똘이의 모험」, 1947년 「민족의 절규」 「갈매기」, 1948년 「그들의 행복」 「민족의 새벽」 「돌아온 어머니」, 1955년 「춘향전」, 1956년 「심청전」, 58년 「애련(愛戀)의 꽃송이」 「천하태평(天下泰平)」, 1962년 「정(情)」 등을 발표. 제5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 예술원 회원. 이규환 감독의 대표작인 「임자없는 나룻배」는 한국적 정서 속에 승화된 리얼리즘의 극치였고, 「춘향전」은 35밀리 영화의 최초작으로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이극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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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克墩(1435∼1503)

조선의 문신. 자는 사고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차례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다. 그 후 이조판서·병조판서·5도의 관찰사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는 훈구파의 학자로 신진 사류인 사림파와 반목이 심하였다. 1498년 실록청 당상관으로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에 기사를 정리하다가, 사림파의 지도자인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에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난한 것이라고 연산군을 부추겨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소위 영남학파의 문인들이 모두 제거되었고, 당시 이극돈을 가리켜 무오사화의 원흉이라 했다. 죽은 뒤 익평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후에 벼슬과 함께 빼앗겼다.

이긍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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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肯翊(1736∼1806)

조선의 학자. 자는 장경, 호는 연려실, 본관은 전주이다. 어려서 아버지 이광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학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그는 실학을 제창하고 고증학파로서도 크게 이름을 떨쳤다. 소론이었던 그는 노론의 집권으로 여러 번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온 집안이 크게 화를 입었다. 많은 책을 저술했으나 겹치는 유배 생활로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연려실기술」만이 전한다.

이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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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沂(1848∼1909)

조선 말기의 애국자. 자는 백증, 호는 해학, 본관은 고성이다. 전북 만경에서 출생하였으며 유형원·정약용 등의 실학을 이어 받았다. 1905년 러·일 전쟁이 끝나고 미국 포츠머스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강화 조약을 맺을 때, 우리나라의 입장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에 가려 했으나 일본 공사의 방해로 떠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뜻을 굽히지 않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일본 천왕과 정치인들에게 한국 침략을 규탄하는 내용의 글을 써서 항의하였다. 이 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귀국하여 한성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장지연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민중 계몽을 통한 항일운동에 전력하였다. 1907년 나인영 등과 함께 '자신회'를 조직하여 을사 5적신을 암살하려 했으나, 권중현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실패하였다. 진도로 귀양가서 7년 동안 지낸 후, 풀려나와 「호남학보」를 발행하면서 민중 계몽 운동에 힘썼다. 저서로 「해학유서」가 있다.

이기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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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起鵬(1896∼1960)

정치가. 호는 만송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보성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호텔에서 일하면서, 데이버 대학 문과를 졸업하였고 뉴욕에서 허 정 등과 「삼일신문」을 발간하였다. 1934년 귀국하여 광복이 되자, 미군정 재판장의 통역관을 거쳐 이승만의 비서로 있다가 1949년 서울 특별시장·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1951년 이범석과 자유당을 창당하였으나, 2년 후 이범석 세력을 몰아내고 실권을 잡았다. 1954년 민의원 의장이 되었으며, 1960년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19혁명이 일어나 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 경무대로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장남 강석의 권총으로 가족이 모두 집단 자살하였다.

이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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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基卨(1556∼1622)

조선의 문신. 자는 공조, 호는 연봉, 본관은 연안이다. 선조 때 부모에 대한 효성이 널리 알려져 참봉에 발탁되었다. 1592년 한성부 판관이 되었고,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조정랑으로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난이 끝나자 병을 핑계로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서 지내다가 영의정 이산해의 추천으로 상원 군수를 거쳐 연안 부사를 지냈다. 그 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부호군·예빈시정 등을 지냈다. 1613년 영창 대군이 서인으로 쫓겨나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내려가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특히 천문·지리·율학·병술 등 여러 방면에 정통하였다. 죽은 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연봉집」이 있다.

이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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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箕永(1896~1984?)

충남 아산 출생. 호는 민촌. 동경 세이소쿠(正則)학교 중퇴.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했다. 카프 맹원. 1924년 「개벽」 현상문예에 「오빠의 비밀 편지」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그 후 「서화」 「인간수업」 「고향」 「신개지」 「땅」 「두만강」 「봄」 등을 발표했으며, 희곡 작품으로 「그들의 남매」 「월희」 등이 있다. 해방 후 월북하여 조선예총위원장 등 각종 기관의 책임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집단성과 프로 문학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을 쓴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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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能和(1868∼1945)

대한제국, 일제 초기의 학자. 자는 자현, 호는 간정, 본관은 전주이다.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1889년 정동 영어학당을 거쳐, 1894년 한어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1900년 한성 외국어학교의 학감을 지냈으며, 영어·프랑스어·중국어·일본어에 뛰어났다. 1921년 총독부 조선사 편수위원회의 편수관으로 있으면서 많은 저서를 남겨 국학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저서로 「조선 불교통사」 「조선 기독교 및 외교사」 「한국 도교사」 「조선 무속고」 「조선여속고」 등이 있다.

이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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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端夏(1625∼1689)

조선의 문신. 자는 계주, 호는 외재, 본관은 덕수이다.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북평사·부교리 등을 지냈다. 1669년 군대 조직인 훈련별대 창설을 왕에게 청하여 이를 실시하게 하였고 소나무 잎으로 기민을 구제할 것을 청하여, 서울 밖에 있는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후 응교·사간·동부승지 등을 지냈으며 숙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서인으로서 활약이 컸다. 1684년 예조판서가 되어 「사창절목」을 지어 숙종에게 바쳤으며, 「현종실록」을 고쳐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는 글을 잘 지어 이름을 떨쳤으며 글씨 또한 잘 썼다. 저서로 「외재집」이 있다.

이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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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達

조선 중기의 한문 시인. 자는 익지, 호는 손곡, 본관은 원주이다. 이 첨의 후손이며 한리 학관을 지냈으나 물러났다. 최경창·백광훈과 같이 당시(唐詩)에 이름이 있어 3당(三唐)이란 칭호가 있으며, 문선·태백·성당 십이가 등을 전부 욀 정도로 남이 따를 수 없는 한시의 대가였다.

이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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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德懋(1741∼1793)

조선의 문장가·실학자. 자는 무관, 호는 형암, 본관은 전주이다. 글씨·그림·시 등에 재주가 뛰어났으나, 서자인 까닭으로 큰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1778년 사신을 따라 베이징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사귀며 지식을 넓혔다. 돌아와서는 북학을 제창하여 박제가·유득공·이서구 등과 함께 사가(四家)로 불리면서 활약하였다. 저서로 「청장관전서」 「청비록」 「뇌뢰낙락서」 등이 있다.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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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德一(1561∼1622)

조선의 무신. 자는 경이, 호는 칠실, 본관은 함평이다. 어려서부터 문명을 떨쳤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피란민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여 통제사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갔다. 이순신이 전사한 후 절충장군이 되었으나, 광해군 때 국정이 문란해짐을 보고 한탄하는 시조 28수를 지어 애타는 심정을 노래하였다. 저서로 「칠실유고」가 있다.

이덕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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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德馨(1561∼1613)

조선의 명신. 자는 명보, 호는 한음, 본관은 광주이다. 영의정 이극균의 5대 손으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문학에 통달하여 20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같은 해에 급제한 이항복과 함께 당시 대제학으로 있던 이 이에게 뽑혀 승문원에서 공부하였다. 직제학·승지·이조참의·홍문관 교리 등을 거쳐, 1592년 예조참판 겸 대제학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에 가서 안찰 학걸을 설복시켜 장군 조승훈이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듬해 의주에 이르게 했다. 자신은 대사헌으로서 대군을 맞아들여 평양을 탈취하고 이어 서울을 수복하였다. 그 공으로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의 어사 양 호를 설복시켜 서울을 위기에서 구하기도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로 좌의정이 되었으며, 우의정 이항복의 주장대로 명의 유 정과 함께, 이순신과 연합하여 왜장 고니시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1602년 영의정에 올랐으며, 1606년 한때 한직으로 밀려났다가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 영창 대군의 처형과 인목 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벼슬을 빼앗기고 시골로 내려가 병사하였다. 광해군은 몹시 슬퍼하여 복관(復官)을 명하였다. 어릴 때 절친한 사이였던 이항복과의 많은 일화가 전한다. 저서로 「한음문고」가 있다.

이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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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道宰(1848∼1909)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성일, 본관은 연안이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전봉준을 붙잡았으며, 이듬해 전주부 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학부대신·군부대신이 되었으나 단발령을 반대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1898년 지석영의 부탁으로 한성의학교 설립을 인가하는 한편,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기관을 세우게 하였다.

이동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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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東寧(1869∼1940)

독립운동가. 호는 석오이며 충남 목천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상동청년회에서 청년운동을 하였고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상설 등과 북간도로 건너가 서순의숙을 설립하였다. 1907년 귀국하여 상동청년회를 중심으로 안창호·김 구 등과 함께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10년 다시 남만주로 건너가 이시영·이강영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내무총장이 되었다. 1924년 국무총리, 1927년 국무위원 주석을 겸하였다. 이듬해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여 이사장이 되었으며, 1935년 한국 국민당 간부로 활약하다가 중국 쓰촨 성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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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東伯(1867∼1950)

명창. 본명은 종기로 충남 비인에서 태어났으며 김정근·김세종에게서 창을 배웠다. 1900년 고종 황제 앞에서 판소리를 불러 통정대부가 되었다. 김창환·송만갑 등과 원각서 공연하다가, 1934년 광무대·조선 성악 연구회 등에서 중진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춘향가」 「적벽가」에 뛰어났으며, 특히 「새타령」에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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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東輝(?∼1928)

독립운동가. 호는 성재이며 함경도 단천에서 출생하였다. 일찍부터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서북학우회 등을 통하여 개화 운동에 활약하여 명성이 높았다.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에 관련되어 1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시베리아로 가서 문창범 등과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19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군무총장을 거쳐 이듬해 국무총리까지 지냈다. 그 후 공산당에 들어갔다가 시베리아에서 병사하였다.

이만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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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晩孫

조선 고종 때의 유학자. 이 황의 후손으로, 영남 유생들을 이끌고 위정척사론을 내세우면서 민씨 세도의 개화 정책을 정면으로 비난하였다. 김홍집이 일본에서 「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와 왕에게 바치자, 1882년 강진규 등과 함께 「만인소」를 올려 당시의 정책을 비난하다가 유배되었다. 임오군란 후, 대원군이 정권을 잡자 석방되었다.

이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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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晩熙(1931∼1975)

영화감독. 서울에서 태어나 영화 「주마등」으로 감독에 데뷔하였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으로 제3회 대종상과 제1회 청룡상을 받았으며 흥행에도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제3회 한국 영화 예술상에서 감독상을 받은 「만추」는 우리나라 영화의 예술성을 한층 높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흑맥」 「물레방아」 「군번 없는 용사」 「기적」 「0시」 등이 있다.

이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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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孟專

조선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 자는 백순, 호는 경은, 본관은 벽진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거창 현감 등을 지냈다. 단종 때 수양 대군이 왕위를 탐내어 권력을 휘두르자 눈이 잘 보이지 않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는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선산으로 내려가 김종직 등과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명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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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明龍(1872∼1956)

독립 운동가. 호는 춘헌, 본관은 전주이며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크리스트교 신자가 된 후, 신앙운동과 민족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2년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1919년 3·1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여 2년간 복역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광복 후 북한에서 조만식과 조선 민주당을 창립하여 최고고문이 되었으나 공산당의 탄압으로 월남하였다. 그 후 여러 사회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병사하여 사회장으로 장례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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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明郁

조선 숙종 때의 화가. 본관은 전주이며, 숙종 때 도화서의 화원으로 있었다. 그림을 정묘하게 잘 그려, 중국 명의 화가 맹영광 이후 가장 훌륭한 화가로 알려졌다. 작품으로 「수묵인물도」 「어촌문답도」 등이 있다.

이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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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明漢(1595∼1645)

조선의 문신. 자는 천장, 호는 백주, 본관은 연안이다.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전적·공조좌랑 등을 지냈다. 인조가 즉위하자 명문의 자제라 하여 경연 시독관이 되었고, 이 괄의 난 때는 왕을 모시고 공주로 피란하였다. 1645년 명과 몰래 서신 교환을 했다 하여 청에 잡혀 갔다가 돌아온 후,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인품이 온유하고 성리학에 밝았으며 시와 글씨에 재능이 있었다.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했다가 선양까지 잡혀갔던 울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한다. 저서로 「백주집」이 있다.

이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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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穆(1471∼1498)

조선의 문신. 자는 중옹, 호는 한재, 본관은 전주이다. 연산군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일찍이 김종직에게 글을 배웠다. 태학에 있을 때, 성종이 병이 있어 대비가 무녀를 시켜 벽송정에서 기도를 베풀자, 이 목이 태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무녀에게 곤장을 쳐서 쫓아냈다. 후에 성종이 이 사실을 알고 노하여 당시의 유생들을 기록하게 하였다. 유생들은 모두 도망하였으나, 이 목 홀로 도망하지 않아서 성종의 칭찬과 술을 받았다. 그는 늘 바른말 잘 하기로 유명하였는데, 이로 인해 공주에 유배된 적도 있다. 무오사화 때, 윤필상의 모함을 받아 김일손·권오복 등과 함께 사형을 받았는데, 형장에 나갈 때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스스로 절명(絶命)의 노래를 지어 죽으니 그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는 일찍이 공주에 귀양갔던 인연으로 공주의 인사들이 충현 서원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이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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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夢鶴(?∼1596)

조선 선조 때의 반란자. 서자 출신으로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전라도 지방을 돌아다녔다. 임진왜란 때 한 현의 부하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반란 계획을 꾸민 다음, 의병을 모은다는 명목으로 장정들을 모집하였다. 1596년 충청도 홍산에서 난을 일으켜 한때는 홍산·청양·대흥 등을 차례로 함락시켜 홍주(지금의 홍성)까지 돌입했으나, 반란군 중에서 관군에 붙은 자가 많아져서 전세가 불리해졌다. 그러자 그의 부하 김경창·임억명 등이 이몽학의 목을 베어 항복하였다.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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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無影(1908∼1960)

소설가. 본명은 용구이며 충북 음성에서 출생하였다. 18세 때 일본으로 가 작가 가토에게서 4년간 문학 수업을 받았다. 귀국하여 「의지 없는 영혼」 「폐허」 등을 발표하였고, 1932년 동아일보에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을 연재하면서부터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의 초기작품은 무정부주의적인 반역의 정열이 주조를 이루었다. 이듬해 이효석·정지용 등과 '구인회'의 동인이 되었다. 그 후 시골로 내려가 직접 농사에 종사하며 농촌 냄새가 풍기는 소박한 필치로 농부들의 세계를 유머러스하고도 사실적으로 묘사한 「농민」 「흙의 노예」 등을 발표하였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농촌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일제 시대 때 농민문학 개척의 공으로 조선예술상을 받았고, 1956년 「농부전초」로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6·25전쟁 때는 종군 작가로 활약하였고, 자유문인협회 부위원장·문총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1960년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 「세기의 딸」 「명일의 포도」 「취향」 「산가」 등이 있다.

이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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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文求(1942~2003)

충남 보령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63년 「다갈라 불망비(不忘碑)」가 「현대문학」에 추천, 등단. 주요 작품으로 「장한몽」 「우리 동네」 「몽금포 타령」 「관촌 수필」 「만추」 「산 너머 남촌」 「감동 만필」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도시화와 산업화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의 소설의 특징은 고향 잃은 사람들이 갈 곳 없다는 것을 밝히면서, 우리 사회 현실 속에서 개인이 느끼게 되는 갈등과 불안의 실마리를 제시해 준다. 현재 소설가협회 편집위원과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를 지내고 있다.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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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文烈(1948~ ) 소설가. 서울에서 출생. 고향인 경북 영양을 비롯하여 안동·서울·밀양 등지를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검정고시를 거쳐 1968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다가 1970년에 중퇴했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한하곡(寒下曲)」이 당선되고, 중편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작품집으로 「사람의 아들」(1979), 「그 해 겨울」(1980), 「그대 다시 고향에 가지 못하리」(1981), 「금시조」(1982), 「황제를 위하여」(1982), 「영웅시대」(1985),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 등이 있다. 1994~97년까지 세종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작품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이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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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文眞

고구려 영양왕 때의 태학박사. 600년 왕명을 받고 국사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국초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할 당시 편찬한 「유기」 100권을 간추려서, 「신집」 6권으로 만들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이미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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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彌勒(1899∼1950)

재독 교포 작가. 본명은 이의경으로 황해도에서 태어나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반일 전단을 뿌리는 등 학생운동 주동자로 활약하다가 상하이로 망명, 1921년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 의학과로 유학하였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동물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뮌헨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1931년 「다메」지에 「하늘의 천사」를 처음으로 발표, 그 후 민족적인 경향이 짙은 문학 작품을 독일어로 독일 신문·잡지에 수시로 발표하였다. 그의 문학은 주로 한국을 배경으로 동양 문화의 전통적인 풍습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1946년에는 대표작인 「압록강은 흐른다」가 독일에서 발간되어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이 소설은 영문 및 국문으로 번역되었으며, 그 일부는 독일의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서 독일 학생들에게도 애독되었다. 1947년부터 뮌헨 대학교 동양학부 강사로 있다가 1950년 위암으로 죽었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속편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가 경북 왜관 분도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독일에서 독일어로 작품 활동을 한 유일한 한국 작가이다.

이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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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芳碩(1382∼1398)

조선 태조의 여덟째 왕자. 1392년 정도전 등의 추대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이복 형인 다섯째 왕자 이방원(후의 태종) 등이 이에 불만을 품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유배되던 도중 살해되었다.

이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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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昉運(1761~?)

조선 말기의 화가. 자는 명고, 호는 기야, 본관은 함평이다. 산수·인물을 잘 그렸고, 특히 거문고를 잘 탔다. 그림은 중국 남화풍의 온화하고 섬세한 산수화를 많이 그렸다. 작품으로 「방우도」 「파초고사도」 등이 있다.

이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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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範奭(1900∼1972)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철기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1919년 윈난 육군강무학교 기병과를 나왔다. 이 해 만주 청산리 전투 사령관이 되어 이듬해 청산리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1922∼25년에 소련 합동 민족군 연해주 지구 지휘관으로 소련 혁명에 참가하였다. 1941년 지청천과 광복군을 만들어 참모장이 되고, 1945년 광복군 중장이 되었다. 광복을 맞이하여 일본군의 무장 평화 접수차 귀국하였다. 그 후 조선 민족 청년단을 만들었고 초대 국무총리·국방부 장관·중화민국 대사·내무부 장관·참의원 등을 지냈다. 회고록 「우등불」이 있다.

이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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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範宣(1920∼1981)

작가. 평남 안주에서 태어나, 교직 생활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현대문학」 지를 통하여 데뷔한 그는 사회성의 저변에 대한 예리한 관찰로 휴머니즘을 추구한 작품을 썼다. 1958년 현대문학상 신인상·1959년 동인문학상(후보작)·5·16 문예상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창작집으로 「학마을 사람들」 「오발탄」 「피해자」 등이 있다.

이범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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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範允(1863∼1922)

독립운동가. 조선 말기 북간도의 관리사로 있다가 일본의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어져감을 보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북간도 개척 동포들로 하여금 자주정신과 자치활동의 능력을 기르도록 적극 지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남만주 연길현에서 의군부를 조직하여 5개 대대의 병력과 교포 관할구역의 행정 체계를 확립하였다. 그 후 김좌진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 동맹을 맺고 일본군과 싸워 위세를 떨쳤다. 1920년 청산리 싸움에서 패한 일본이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하자, 시베리아로 이동하였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을 받았다.

이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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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範晋(1853∼?)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성삼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민비(명성 황후)의 사랑을 받았다. 1895년 명성황후가 친러 정책을 쓸 때 대신 서리가 되었으나, 그 해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 친일파가 정권을 잡음으로써 파면되었다. 그 해 10월에 다시 정권을 잡으려다 실패하고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1896년 귀국하여 러시아와 힘을 모아 친일파를 몰아내고 새로운 내각을 세워 법무 대신이 되었다. 러·일 전쟁 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러시아 방면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 이위종은 이범진의 아들이다.

이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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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秉岐(1891∼1968)

시조 작가·국문학자. 호는 가람이며 전북 익산에서 출생하였다. 한성사범학교를 나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많은 시조를 발표하였다. 1926년 시조 부흥을 위해서 동아일보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후부터 현대적 감각을 띤 새로운 시조를 짓기 시작하였다. 1939년 「가람 시조집」을 발간하였으며, 또한 문헌 학자로서 숨어 있던 많은 고전을 학계에 소개하였다. 광복 후에는 우리 나라 고전 문학을 현대어로 고치는 일에 힘썼으며, 서울대학교 교수·전북대학교 문리대 학장·중앙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대표작으로 「초」 「별」 「냉이꽃」 등이 있으며, 저서 「가람 시조집」 「국문학 개설」 「국문학 전서」 등이 있다.

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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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丙燾(1896∼1989)

사학자. 호는 백수이며,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와세다 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19년 중앙학교 교사를 거쳐 1933년 중앙불교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를 지냈다. 그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문교부 장관을 거쳐 학술원 회장이 되었다. 1967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진단학회 이사장·동구학원 이사장을 지내며 국사학의 권위자로 국사 편찬위원이 되었다. 저서로 「한국사 대관」 「한국사 중세편」 「나의 인생관」 「고려시대 연구」 등이 있다.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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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秉喆(1910~1987)

기업인. 호 호암(湖巖). 경남 의령 출생. 중동중학을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하였다가 1934년 중퇴하였고, 82년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51년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세워 무역업을 하면서 53~54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사업 영역을 크게 확대해갔으며, 61년부터 87년까지 한국경제인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 회장을 역임했다. 64년 동양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과 65년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 경영에 참여하였다. 69년 삼성전자를 설립하여 삼성그룹 육성의 도약대를 만들었다. 74년 삼성석유화학·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공업에 진출하였고, 이후 용인자연농원·삼성정밀 등을 설립하였다. 77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되었으며, 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하였다.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하여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았다. 저서에 「우리가 잘사는 길」 「호암자전(湖巖自傳)」 등이 있다.

이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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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鳳蕓

조선 말기의 국어학자. 1897년 「국문 정리」를 출판하여 무조건 한문만을 숭배하고 한글을 천시해 오던 당시의 풍조와 전통을 깨뜨리고, 한글을 다시 찾아 널리 사용하도록 노력하였다.

이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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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奉昌(1900∼1932)

독립운동가.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192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방랑생활을 하였다. 1931년 상하이로 가서 김 구의 애국단에 가입하였으며, 일본 천황을 암살하기 위해 수류탄 2개를 갖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2년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천황 히로히토를 노려 사쿠라다 문앞에서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였다. 일본 법원은 방청인도 없이 제멋대로 판결문을 작성하여 사형을 언도하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형을 집행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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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斯夫

신라의 장군. 성은 김씨이며 내물왕의 4대손이다. 505년 지증왕 때 실직주 군주가 되었으며, 512년 나주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정복하였다. 550년 진흥왕 때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공략할 때, 양군이 피로한 틈을 타서 공격하여 도살성·금현성을 빼앗아 이를 증축하고 내침을 막았다. 또 신라의 국사 수찬은 그의 제의에 의한 것이었다. 「삼국유사」에는 그의 이름이 박이종으로 되어 있다.

이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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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山海(1538∼1609)

조선의 문신. 자는 여수, 호는 아계, 본관은 한산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응교 등을 지냈다. 1567년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조좌랑을 지냈으며, 1578년 대사간으로 서인의 윤두수·윤근수·윤 견 등 3윤을 몰아냈다. 그 후 대사헌·형조판서·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이 때 동인이 남북으로 갈리자 북인의 지도자로 정권을 잡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개성에 이르러, 왜적이 쳐들어오는데도 당파 싸움을 했다는 죄로 강원도로 유배되었다가, 1595년 풀려나왔다. 그 후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서 정사를 맡아 처리하였다. 그는 서화와 문장에 뛰어나 당시 문장 8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저서로 「아계유고」가 있으며, 글씨로 「조정암 광조 묘비」 등이 있다.

이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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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三晩

조선 말기의 서도가. 자는 윤원, 호는 창암, 본관은 전주이다.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글씨 공부만 하여 집안이 어려워졌다. 벼루를 3개나 구멍을 내었으며 병중에도 천 자나 되는 글을 썼다. 글씨를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한 점·한 획을 가르치는 데 한 달이 걸렸다고 한다. 그의 글씨는 하동에 있는 「칠불암의 편액」 「전주판의 칠서」 등이 있다.

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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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箱(1910∼1937)

시인·소설가. 본명은 김해경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졸업했으며, 3년간 총독부 건축기사로 일하였다. 그는 「자화상」이란 그림을 그려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되기도 하였다. 1934년 중앙일보에 「오감도」를 발표하여 난해시라는 비난을 받았다. 1936년 「조광」지에 문제작 「날개」를 발표했는데, 당시는 세계적으로 자의식 문학이 유행하여 일약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종생기」 「동해」 「실락원」 등 그의 소설은 모두가 심리주의적 경향이 농후하여 생활의 표현이라기보다 극도로 피로한 지식인의 신경과, 그 신경이 가져오는 자의식의 분열을 악착스럽게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폐결핵을 앓고 있었으며 무질서하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헤매다가 갱생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도쿄에서 28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1956년 유고집 「이 상 전집」이 나왔으며 최근에 그의 전 작품을 모은 「이 상 전집」 3권이 발간되었다.

이상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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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相龍

독립운동가. 호는 석주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한일합방 후에 만주로 건너가 조국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그곳에서 부민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으며, 1919년 3·1운동 때는 '한족회'를 조직하여 교육사업에 주력하였다. 그는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독판이 되었고,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어 활약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이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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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象範(1897∼1972)

화가. 호는 청전이고,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1918년 서화 미술회에서 미술 공부를 했고, 1925년∼34년 선전에 연 10회 특선을 수상하였다. 동아일보 미술부 책임 기자로 근무했고, 1938년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피검되었으며, 1938∼43년 선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7년 종합 미술전 심사위원을 거쳐, 1949년 첫 미술전에 추천 출품을 하고, 홍익대 교수·이화여대 강사를 역임하였다. 국전 심사위원·예술원 회원·미술 협회 고문 등을 지냈고, 1963년 문화 훈장 본상 및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작품으로는 「창덕궁 대조전 벽화」 「원각사 벽화」 등이 있다.

이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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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相卨(1871∼1917)

독립운동가. 자는 순오, 호는 부재, 본관은 경주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1894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의정부참찬이 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통분을 금치 못하고 가두에서 대중에게 연설한 후 두문불출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을사조약이 결코 황제의 뜻이 아님을 호소하려다가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미국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1910년 한일합방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세계 여러 나라에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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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商在(1850∼1927)

애국자·종교가·정치가·사회운동가. 자는 계호, 호는 월남, 본관은 한산이다. 박정양과 10년간 같이 생활하며 항상 나라 일을 걱정하였다. 1881년 박정양 등이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갔을 때, 그의 개인 비서로 따라갔는데, 거기서 홍영식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우정국장이 된 홍영식이 그를 우정국 주사로 임명하였으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3년간 고향에서 지냈다. 그러던 중 초대 미국 공사에 임명된 박정양을 따라 서기관으로 미국에 갔으나, 청의 압력으로 이듬해 귀국하였다. 1895년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만들어 부회장이 되었다.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의 사회를 맡아 정부에 보내는 결의 사항을 의결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을 지도하다가 두 차례나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 후 황성 기독교 청년회(YMCA)에서 강연을 하고 성경을 가르치면서 날카로운 풍자로 일본인들을 공박하였다. 기독교 청년회 회장·조선일보 사장을 거쳐 신간회 회장을 지냈다. 그는 만년에도 늘 청년들을 벗삼아 그들을 지도하고 이끌어주기에 힘썼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상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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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上佐

조선의 화가. 자는 공우, 호는 학포, 본관은 전주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특히 산수와 인물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중종의 특명으로 도화서에 벼슬 자리를 받았으며 중종이 죽자 그 초상화를 그렸다. 1546년 명종 때 공신들의 초상을 그려 원종(原從) 공신이 되었다. 그의 작품 「송하보월도」가 덕수궁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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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相和(1900∼1941)

시인. 호는 상화(尙火)이며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중동중학을 거쳐 도쿄 외국어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여러 해 교편을 잡았다. 1922년 홍사용·박종화·나도향 등과 함께 문예지 「백조」를 발간하여 그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발표하였다. 이어서 「말세의 희탄」 「가을의 풍경」 등 퇴폐적인 풍조를 나타내는 시를 쓰다가, 1926년 「개벽」지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여 신경향파에 속하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문단 생활 10년 동안 「서러운 해조」 「이별」 「역천」 등 19편의 시와 역시(譯詩) 몇 편을 남겼다. 1935년부터 2년간 중국을 방랑했고, 1941년 대구에서 사망하였다. 1948년 동향 출신 시인 김소운의 발기로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그 날이 그립다」 「폭풍을 기다리는 마음」 「반딧불」 「청년」 등이 있다.

이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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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穡(1328∼1396)

고려 말의 성리학자. 정몽주·길 재와 함께 고려 '3은'의 한 사람이다. 호는 목은, 본관은 한산이다.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나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하였다. 21세 때 원에 가서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1351년 귀국하여 공민왕에게 학문의 경향과 당면한 여러 정책의 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1353년 서장관으로 다시 원에 가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지제고가 되었다. 귀국하여 내서사인·밀직제학 동지 춘추관사가 되어 정몽주 등과 명륜당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이때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처음 일어났다. 1377년 우왕의 사부가 되었으며 공양왕 때 판문하 부사가 되었으나 오사충의 상소로 장단·함안 등으로 유배된 적도 있다. 정몽주가 피살되자 다시 금천·여흥 등지로 유배되었다. 조선 건국 후 태조가 그의 재능을 아끼어 한산백으로 봉하여 예를 다하여 출사(出仕)를 종용했으나,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에 파묻을 뿐이라 하였다. 다음해 피서차 여강으로 가던 중 갑자기 사망했으므로 그 사인에 대해서는 후세에 의혹을 남기고 있다. 학문이 깊고 시문에 뛰어났으며, 제자 권 근·김종직·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저서로 「목은 시고」 「목은 문고」 등이 있다.

이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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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書九(1754∼1825)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낙서, 호는 척재, 본관은 전주이다. 덕흥 대원군의 후손으로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지평·경상우도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1795년 정조 때 천주교도를 옹호한다는 죄로 영해부에 유배되었다가 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 교정당상이 되어 왕명으로 「장릉지」를 편찬했으며, 1800년 순조 때 호조판서로 지실록사가 되어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형조판서·대사헌·대호군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판중추 부사로 재직중 죽었다. 명문장가로서 특히 시명이 높아 박제가·이덕무·유득공과 함께 한시의 4대가로 알려졌으며 5언 고시에 능했다. 저서로 「서산집」 「장재집」 「여지고」 등이 있다.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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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成桂(1335∼1408)

조선 왕조의 창건자(재위 1392∼1398). 자는 군진, 호는 송헌, 본관은 전주이다. 함남 영흥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지혜롭고 용맹스러웠다. 1356년 유인우가 원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을 때,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유인우를 도와 원의 군사를 물리쳐 큰 공을 세웠다. 1361년 홍건적이 고려에 쳐들어왔을 때 그는 뛰어난 무술과 지휘력을 발휘하여 싸움이 있을 때마다 이기는 등 공이 컸다. 이듬해에는 동북면 병마사가 되어 원의 장군 나하추를 무찔러 승리했으며, 그 후에도 두만강 부근으로 침공해 온 여진족을 무찔러 승리하였다. 또한 황산·해주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다. 1388년 우왕 때 명은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 관할하에 두고 다스리겠다고 주장했다. 이에 최 영은 단 한 치의 땅도 내줄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요동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이성계는 4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으나 왕과 최 영이 끝내 정벌을 주장하여, 이성계도 하는 수 없이 통도사로서 군사를 이끌고 요동을 향해 진군하였다. 북으로 진격한 좌우 양군은 잠시 위화도서 머물렀으나, 압록강의 물이 계속 불어 진군할 수가 없었다. 이성계는 여러 장군들과 의논한 끝에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고 최 영을 유배보내 죽게 한 다음, 창왕을 왕위에 앉혔다. 이어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왕위에 오르게 한 후 자신은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1391년 조 준과 함께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귀족 계급의 경제력을 빼앗아 반대 세력을 없애 나갔고, 아들 이방원이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임으로써 고려의 모든 권력이 완전히 그의 손에 들어갔다. 마침내 1392년 배극렴 등의 추대로 공양왕을 원주로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의 태조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으며, 무학 대사와 함께 여러 곳을 둘러본 다음, 개성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는 명에 사신을 보내어 왕조가 바뀐 것에 대한 해명을 하는 등 사대주의 정책을 썼다. 또한 유교를 숭상하였고 농업을 중히 여기는 농본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왕위를 계승하려는 여덟 왕자들의 피비린내나는 두 차례의 싸움으로 방석·방번이 죽자, 왕위를 방과(정조)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내려갔다. 후에 아들들이 상경해 줄 것을 권했으나 돌아오지 않다가, 무학 대사의 권유로 덕수궁에 거처하면서 오직 염불만 외며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이세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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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世春

조선 영조 때의 가인. 삼국시대 이후 전해 내려온 가곡류의 창사를 시조 형식으로 고쳐 부른 최초의 인물이었다. ‘시조’라는 명칭도 이 때부터 생긴 것으로 추정하는데, 신광수가 지은 「관서악부」를 보면 “일반적으로 시조는 장단을 배제한 노래로서 장안(평양)의 이세춘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하였다.

이수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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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1628)

조선의 명신. 자는 윤경, 호는 지봉, 본관은 전주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남 방어사 조경지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용인에서 패하였다. 그 후 주청사로 연경에 왕래하였으며, 당시 명에 와 있던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의 저서 「천주실의」 2권과 「교우론」 1권 및 중국 책 「속이담」 6권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 학문을 도입하였다. 그는 「지봉유설」을 지어 서양과 천주교 지식을 소개하였다. 1613년 광해군이 인목 대비를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키자, 관직을 떠나 두문불출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어 도승지·대사간을 지내고 이 해 이 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공주로 모셨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도로 모셨으며 이조판서를 지냈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채신잡록」 「병촉잡기」 「찬록군서」 등이 있다.

이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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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壽長(1661∼1733)

조선의 서예가. 자는 인수, 호는 정곡, 본관은 천안이다. 숙종이 지은 시를 붓글씨로 써서 왕의 칭찬을 받았으며, 1709년 청의 사신 연갱요로부터 동방에서 으뜸가는 글씨라는 칭찬받았다. 이어 1711년 통신사 조태억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일본의 서예가들이 그의 글씨를 보고는 극찬을 하였다. 특히 그는 해서와 초서에 뛰어났으며 「묵지간금」을 발간하였는데, 이는 서예를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귀중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이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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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樹廷(1842∼1886)

조선 말기의 크리스트교 신자. 개화당의 일원으로 벼슬이 도승지에 이르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비를 도와 무사히 충주까지 피란하게 한 공으로 일본 시찰의 특명을 받았다. 도쿄로 건너가 야스카와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83년 일본에 와 있던 미국인 루이스 목사와 함께 마태·마가·누가·요한의 4복음을 번역하여 「신약전서 마가복음 언해」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백홍준 등이 간행한 「누가복음」과 함께 한글판으로 된 최초의 성경책이 되었다. 1885년 윤치호 등 유학생들에게 크리스트교를 전도하여, 7명이 모여서 처음으로 예배를 본 것이 동기가 되어 후에 유학생 교회가 생기게 되었다. 1886년 귀국하였으나 수구파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저서로 「진리문답」 「조선 천주교회사」가 있다.

이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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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叔蕃(1373∼1440)

조선의 문신. 본관은 안성이며, 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관찰사로서 정도전 등을 죽이고 태종으로부터 정사공신의 호를 받았다. 1400년 박 포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안성군에 봉해졌으나, 공을 믿고 거만하고 사치하게 굴어 1417년 벼슬을 잃고 경남 함양으로 유배되었다. 세종 때 「용비어천가」를 만들기 위해 풀려나왔다가 책이 완성되자, 다시 함양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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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舜臣(1545∼1598)

임진왜란 때의 명장.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 본관은 덕수이며, 서울 건천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용맹하였으며 자라면서 무예에 뜻을 두어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마하였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북방의 경비를 맡다가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1년 유성룡의 추천으로 진도 군수를 지내다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되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특히 세계 최초의 철갑선을 고안하였는데 이것이 거북선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 균의 요청을 받고 출전하여 옥포·사천·한산도·안골포·부산포 등 가는 곳마다에서 승리하였다. 이듬해 3도 수군통제사가 되어 3도의 수군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명의 원병과 합세하여 적군의 후방을 교란시켰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일본 수군의 앞길을 막는 등, 적의 작전에 차질을 주었다. 전쟁이 일단 중지되자 군사훈련과 군비 확충에 힘쓰다가, 1597년 원 균의 모함과 일본의 이간책으로 심한 고문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판중추 부사로 있던 정 탁의 변호로 풀려나와 권 율 휘하에서 백의 종군하게 되었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된 원 균은 안일과 방탕한 생활로 군비를 축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대패하여 전사하니 수군은 전멸 상태에 빠졌다. 사태의 긴박함을 느낀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하여 적을 막게 하였다. 이때 그는 모친상을 당하였으나 이를 돌볼 겨를도 없이 싸움터에 도착하였다. 남은 배는 겨우 12척뿐이고 군사들의 사기는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조정에서는 수군을 폐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그는 자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얕잡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 이에 그는 적은 배로 명량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다시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하는 왜군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섬멸하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을 맞고 54세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그는 지극한 충성,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 등을 볼 때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임진왜란 중 나라의 운명을 홀로 지탱한 민족적 영웅이며 은인이었다. 그의 죽음을 안 선조는 특사를 보내어 조문하고, 시호를 내리고 선무일등공신의 호를 주어 덕풍군에 봉했으며, 우의정 및 좌의정을 추증하였다. 고향에는 충신문을 세우고, 정조 때에 영의정을 추증하고 임금이 친히 지은 비문을 하사하였다. 저서로 「이충무공 전서」가 있으며 이 속에 있는 「난중일기」는 유명하다. 사당은 충무의 충렬사, 아산의 현충사 등이 있다.

이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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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純之(?∼1465)

조선의 수학자·천문학자. 자는 성보이며 본관은 양성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왕명으로 산법(算法)을 공부한 후, 장영실 등과 함께 물시계를 만들었다. 세조 때에는 벼슬이 판중추 원사에 이르렀으며 성미가 꼼꼼하여 산학·천문·음양·풍수에 뛰어났다. 김 담 등과 함께 「칠정산내외편」을 저술하였다.

이숭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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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崇寧(1908∼

)

국어학자. 호는 심악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제국대학을 마치고 경성대학 법문학부 조교수가 되었다. 그 후, 교수자격 심사위원·학술원 회원·진단학회 상임이사 등을 지냈으며, 1956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 국어학회 이사장·1971년 서울대 대학원·1976년 국어학회장·1985년 무궁화 선양회 총재를 역임하였다. 1961년 3·1 문학상을 받았으며 우리나라 음운론 연구의 제일인자로 많은 공을 세웠다. 저서로 「국어 음운론 연구」 「국어학 논교」 「중세 국어문법」 「음교 음론 연구」 등이 있다.

이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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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崇仁(1349∼1392)

고려의 학자. 자는 자안, 호는 도은, 본관은 성주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숙옹부승이 되었다. 고려 문사(文士)를 뽑아 명에 보낼 때 1등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어려 가지 못했다. 정도전 등과 함께 원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유배된 적이 있으며, 그 후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찬하였다. 1386년 우왕 때와 1389년 창왕 때 두 차례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다. 1392년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가 살해될 때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정도전의 부하 황거정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당시의 복잡한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는데, 그의 문장에 명의 태조도 탄복했다고 하며, 길 재 대신 '3은'으로 꼽히기도 한다. 저서로 「도은집」이 있다.

이숭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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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崇孝

조선 선조 때의 화가. 자는 백달, 본관은 전주이다. 그의 아버지 이배련, 조부 소불(小佛), 아들 이 정 등 4대에 걸쳐 그림에 뛰어난 집안이었다. 그의 작품 「저본묵화」 「귀어도」가 덕수궁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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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1875∼1965)

독립운동가·1∼3대 대통령. 호는 우남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894년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이듬해 모교의 영어 교사가 되었다. 1897년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발간하자, 이 신문에 논설을 집필하면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사상 고취와 민중 계몽에 힘썼다.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적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설치를 주장하면서, 정부측 폭력단인 황국협회와 싸우다가 체포되어 7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1904년 출옥하여 민영환의 주선으로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에 건너가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5년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1908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귀국하여 이상재 등과 함께 '기독교 청년회(YMCA)'를 중심으로 후진들을 지도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30여 년간 미국과 하와이·상하이 등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7년 하와이에서 「한국 태평양」 지를 발간했고, 세계 약소민족 대표자 회의에 한국 대표로 박용만을 파견하였다. 3·1운동 때 국내 인사들과 연락하여 거사에 동조했으며, 그 해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곧 물러났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 구미 위원부를 설치했으며,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독립 중앙 협의회를 조직하고 반공·반탁을 주장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장이 되고 이 해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 후 강력한 반공·배일주의자로 국내의 공산주의 운동을 분쇄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강경 외교를 고수하였다. 6·25전쟁 때에는 UN의 도움을 얻어 공산군을 격퇴하였다. 1960년 대통령에 4선되면서 장기 집권을 꾀하다가 4·19혁명으로 하야하였다. 이 해 하와이로 망명했으며 그곳에서 1965년에 병사하였다. 저서로 「독립정신」, 영문판 「일본 폭로기」 등이 있다.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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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薰(1756∼1801) 조선 말기의 천주교 순교자. 교명은 베드로이며 본관은 평창으로 정조 때 진사 시험에 급제하였다. 당시 남인 학자들 사이에는 베이징으로부터 들어온 천주교가 처음에는 단순한 학문으로만 연구되다가, 차츰 그 뛰어난 진리를 깨달음에 이르러 하나의 실천 철학으로 받아들여져 종교적 신앙으로 귀의해 가는 뚜렷한 움직임이 있었다. 1783년 황인점의 서장관으로 베이징에 가는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가게 되었다. 떠나기 전에 천주학을 연구하던 이 벽이 찾아와, 교리와 그 실천 방법을 자세히 살피고 올 것과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구해 올 것을 부탁하였다. 그는 베이징에 도착하여 베이징 교구를 찾아가 교리를 배운 후, 그라몽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조선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반석)라는 교명을 받았다. 1784년 성서와 성상·묵주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서울 명례동(명동) 김범우의 집에 처음으로 조선 교회를 세웠다. 이 벽·이가환 및 정약용·정약종·정약전 3형제와 함께 주일 미사와 설법을 행하면서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교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1789년 관직에 나가 평택 현감을 지내기도 했으나, 1791년 천주교의 전국적 전파를 막으려는 조정의 탄압으로 신해박해가 일어나 관직을 빼앗겼다. 1795년 주문모 신부 입국 사건으로 예산에 유배되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서대문 형장에서 사형되었다. 1868년 그의 뒤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순교하고, 1871년 증손까지 순교하여 4대에 걸친 순교자 집안이 되었다.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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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昇薰(1864∼1930) 독립운동가·교육자. 호는 남강이며 본관은 여주이다. 평북 정주의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유기상 점원으로 일하다가 10년 후에는 큰 돈을 모아 손꼽히는 실업가가 되었다. 러·일 전쟁으로 재산을 잃었으며, 평양에서 안창호 강연에 감동되어 오산학교를 세우고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힘썼다. 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이 해 다시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4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활약하다가 붙잡혀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2년 가출옥한 뒤 '자면회'를 창립했고, 1924년 동아일보 사장을 맡아 물산장려 운동을 벌였으며 오산학교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0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졸업생들의 발기로 오산학교에 동상이 세워졌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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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昇薰(1942~ ) 강원도 춘천 출생. 1966년 한양대 졸업, 82년 연세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2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물 A」 「환상의 다리」 「당신들의 초상」 「사물들」 「당신의 밤」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 「이상 시 연구」 「반인간」 「시론」 등이 있다. 초기 시들은 언어 그 자체를 대상화하는 작업에 집중하여, 개념화를 거부하는 시세계를 주로 보여주었다.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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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休(1224∼1300)

고려 말기의 학자. 자는 휴휴, 호는 동안거사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두타산 구동에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밭을 갈며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 후 이심돈의 권유로 서장관에 취임하고 원에 가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충렬왕 때에 밀직부사·감찰대부 등을 지내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구동에서 만년을 지냈다. 그는 일생을 정치와 문학으로 일관했으며, 종교적 교양도 풍부하였다. 저서로 「제왕운기」 「동안거사집」 「내전록」 등이 있다.

이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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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時白(1592∼1660)

조선의 문신. 자는 돈시, 호는 조암, 본관은 연안이다. 이 귀의 아들이며 인조반정 때의 공으로 연양 부원군에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남한산성을 지켰으며, 소현 세자가 죽자 인조는 효종을 세자로 세우려 했는데 그는 세손(世孫)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1652년 효종 때 연경에 다녀와서 영의정까지 지냈다. 어려서 성 혼·김장생·이항복 등에게 배웠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힘이 세었다. 또한 지혜가 있었으며 항상 겸손하고 청백하였다. 김 육의 건의로 호남 지방에도 대동법을 실시하게 하였다.

이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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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施愛(?∼1467)

조선 세조 때의 반란자. 본관은 길주이며 함길도 첨절제사 이인화의 아들이다. 대대로 함경도 지방에 살던 지방 호족 출신으로 조선 초기 북방민 회유 정책에 의해 중용되어 문종 때에 호군이 되었다. 세조 때에는 경흥진 병마절제사를 거쳐 판회령 부사 등을 지냈다. 세조가 왕권을 확립한 후, 차츰 북방민의 중용을 억제하고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자, 자신의 지위 확보에 불안을 느껴 반란을 꾀하기 시작했다. 1467년 당시 함경도 군사권을 쥐고 있던 절도사 강효문을 살해한 뒤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 대해서는 강효문이 반란을 꾀하므로 처형했다고 보고하여 자신의 반란을 합리화시키고, 절도사를 자칭하여 민심을 얻어 세력을 확보하였다. 그는 단천·북청·홍원을 공략하고 함흥을 점거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조석문·허 종·남 이·강 순·어유소 등을 대장으로 하여 3만의 관군을 출동시켜 항복을 종용했으나, 반란이 아니라는 것과 함경도민의 중용을 거듭 주장하였다. 마침내 관군의 공격을 받고 대패했으며, 여진 부락으로 도망하다가 조정에서 밀파된 허유례의 계교로 부하인 이 주·이운로에게 체포되어 참형당하고, 이어 각도에 효수되었다. 그 후로 함경도 등 북쪽 사람들을 경계하여 벼슬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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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始榮(1868∼1953)

정치가·독립 운동가. 자는 성옹, 호는 성재, 본관은 경주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평안 관찰사·법무 민사국장 등을 지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청년 장교 육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베이징에서 이동녕·조완구 등과 함께 본국과의 연락을 계속했으며,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법무총장·재무총장·의정원장 등을 지냈다.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초대 부통령에 취임하였다. 1951년 퇴임하여 1953년에 피난지 부산에서 노병으로 사망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이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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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植(1584∼1647)

조선의 문신. 자는 여고, 호는 택당, 본관은 덕수이다.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이조좌랑이 되었다. 그 후 부제학·대제학·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642년 김상헌 등과 함께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였다 하여 선양에 잡혀 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의주에서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그는 또한 장 유와 더불어 당대 일류의 문장가였으며, 「선조실록」 수정 작업을 전담하였다. 죽은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택당집」 「초학자훈증집」이 있다.

이안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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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安訥(1571∼1637)

조선의 문신. 자는 자민, 호는 동악, 본관은 덕수이다. 선조 때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예조정랑·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1601년 명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외국의 사신을 맞는 종사관이 되었다. 당시 광해군의 옳지 못한 정치에 분개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예조참판·형조참판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모시었다. 죽은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그는 당시(唐詩)에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하였다. 저서로 「동악집」이 있다.

이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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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7∼1364) 고려 말기의 서화가·문신. 자는 고운, 호는 행촌, 본관은 고성이다.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찬성사·우정승 등을 지냈다. 1359년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왕을 피란시킨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그는 글씨에도 뛰어나 '동국의 조자앙'이라 했다. 「대갑편」을 옮겨 써서 왕에게 바쳤으며, 그림으로는 특히 묵죽을 잘 그렸다. 글씨로 춘천 청평산의 「문수원 장경비」가 있다.

이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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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巖(1499∼?) 조선 중기의 화가. 자는 정중이며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 대군의 증손이다. 꽃·새·벌레·동물 등을 잘 그렸으며, 1545년 중종의 초상을 그릴 때 참여하였다. 작품으로 「묘구도」 「화조구자」 등이 있다.

이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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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愛羅(1898∼1921)

항일 운동가·여류 교육자. 본관은 전주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한 후, 이화학당 교사를 지내고 이규갑과 결혼한 후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있었다. 3·1운동 때 만세 시위에 참가하여 구류되었다. 그 후 수원·공주 등지의 교회를 돌아다니며 '항일 부인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일본 헌병에게 발각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석방된 후 1921년 천안 양대여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일본 경찰이 붙잡으러 올 것을 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몸을 피했다. 그 동안 여러 차례의 고문으로 병이 들어 그곳에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이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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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敭河(1904∼1963)

영문학자·수필가.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였으며, 1930년 일본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34년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논문과 수필을 발표하였다.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있다가 1950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 대학원에서 2년간 영문학을 연구하였다. 1953년 미국 학술원의 초청으로 예일 대학 언어학부에서 마틴 교수와 함께 「한영사전」을 편찬했다. 서울대학교 교수와 문리과 대학장을 지냈으며, 1954년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저서로 「이양하 수필집」 등이 있다.

이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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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御寧(1934∼

)

문학 평론가·소설가·언론인.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였으며, 195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을 거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이듬해 「시비평 방법서설」이 「문학예술」 지에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는 서구적인 문학이론과 비평방법론으로 의욕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평론가로서 크게 활약하기도 하였다. 연작 에세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스타인버그에 의하여 영문으로 출간되었다. 경기고교 교사·단국대 전임강사·서울대 문리대 강사·이화여대 문리대 교수를 지냈고, 「서울신문」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등의 논설위원으로 컬럼과 사설을 썼다. 또한 월간 「문학사상」 주간으로도 활동하였다. 1987년 이화여대 기호학 연구소장·1990년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지성의 오솔길」 「이어령 전작집」 12권과 「한국과 한국인」 6권 등 다수가 있다.

이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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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彦迪(1491∼1553)

조선의 문신. 자는 복고, 호는 회재, 본관은 여주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천광랑·장령·밀양 부사 등을 거쳐 사간에 이르렀다. 1530년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심언광 등의 모략으로 벼슬에서 쫓겨났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쫓겨난 뒤 직제학·전주 부윤이 되어 어진 정치를 베풀었다. 그 후 이조·예조·형조판서를 지냈으며, 1545년 인종이 죽자, 원상(院相)으로서 국사를 맡아 처리하였다. 1547년 명종 때 양재역의 벽서사건에 관련되어 강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으며, 선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경주 옥산 서원에 배향되었다. 그는 조선 전기의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의 한 사람으로 특히 주리(主理)에 대한 학설은 이 황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후에 이 황은 그를 김굉필·정여창·조광조와 함께 '동방 4현'이라 불렀다. 저서로 「회재집」 「대학장구 보유」 「구인록」 등이 있다.

이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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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5∼1718)

조선의 문신. 자는 치보, 호는 수곡, 본관은 덕수이다. 송시열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이 되었다.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함께 벼슬에서 쫓겨났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들이 벼슬에서 쫓겨나자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인현 왕후가 복위될 때에 중궁 복위 고명문 제술관으로 일하였다. 그 후 판중추 부사가 되어 옳은 정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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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寧 고려의 화가. 본관은 전주이며 이준이에게 그림을 배웠다. 특히 인종과 의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이 영이 주재하기도 하였다. 인종 때 이자덕을 따라 송에 가서 송 휘종의 명으로 「예성강도」를 그려 바치고 찬탄과 후한 상을 받았다.

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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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榮(?∼1563) 조선의 무신. 자는 현보, 호는 괘편, 본관은 영천이다.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거쳤으며,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단천 군수를 지냈다. 이듬해 정평 부사에 부임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명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1552년 회령부사로 있으면서 훌륭한 정치를 베풀고 청백리에 뽑혔다. 이듬해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군비 확충과 군사훈련에 공을 세워 동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그 후 제주 목사·경상도 병마절도사·부호군 등을 지냈다.

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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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翎(1615∼1637) 조선의 문신. 자는 화중, 호는 우송재, 본관은 우봉이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참봉으로 있으면서 아버지와 함께 강화도로 가서 의병이 되어 왜적과 싸웠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자 자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가족과 함께 피란하던 도중, 다시 왜적을 만나자 아버지와 함께 적에 대항하여 싸웠다. 여기서 아버지가 전사하자 어머니는 적의 포로가 될까 두려워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때 이 영은 화상을 입은 어머니를 구해 내어 업고 도망치다가 적의 화살에 얼굴을 맞고 죽었다. 죽은 뒤 정문이 세워졌으며 지평에 추증되었다.

이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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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永道(1916∼1976)

여류 시조 작가·수필가.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교직 생활을 하였고, 1950년 대구의 「죽순」 동인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한국 전래의 고전적 정서를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적 정한을 시조로 읊었다. 시조집 「청저집」, 수필집 「춘근집」 등이 있다.

이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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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英胤(1561∼1611)

조선의 화가. 자는 가길, 본관은 전주이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여 이름을 떨쳤는데, 특히 산수·우마·영모를 잘 그렸다. 작품으로 「영모도」 「산수도」 「화조도 병풍」 등이 있다.

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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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芮(1419∼1480)

조선의 문신. 자는 가성, 호는 눌재, 본관은 양성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가 되었으며, 「의방유취」 365권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어 1474년 개성 유수가 되어 백성을 위해 어진 정치를 베풀어서 왕이 내리는 비단을 상으로 받았다. 그 후 형조판서·공조판서를 지냈다. 그 당시 부녀자의 재혼문제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을 때, 이 예는 한 남편을 섬기는 것이 원칙이지만 부양자가 없거나 부모나 존장이 사정을 딱하게 여겨 다시 결혼시킬 경우에는 이를 허락해 주어야 하되 세 번 개가한 자의 자손은 중요한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조선 시대의 재혼에 대한 기본 방침이 되었다.

이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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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浣(1602∼1674) 조선의 문신. 자는 징지, 호는 매죽헌, 본관은 경주이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김자점 휘하의 별장으로 정방산성에서 공을 세웠다. 인조에 이어 즉위한 효종은 선양에 인질로 잡혀갔던 굴욕에 분개하여 북벌을 계획하였으며, 이 완을 훈련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어 송시열·송준길 등 명인을 등용하고 신무기의 제조·성터의 개수를 서두르는 등 군비 확장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북벌 시기를 기다렸으나, 얼마 후 효종이 죽자 뜻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 후 현종 때 병조 판서로 기용되었으나 굳이 사양하여 수어사로 임명되었고 후에 우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강직한 성격에 독서를 즐겼고 병법에 밝아서 적을 다루는 데 기략이 뛰어났었다.

이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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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示完(1604∼1649) 조선의 문신. 자는 자완, 본관은 연안이다. 인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가 되었으며, 흉년으로 기근이 심하자 '구휼 10조'를 상소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이어 병조좌랑을 거쳐 옥구 현감으로 있을 때 각종 잡세를 폐지하도록 건의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1645년 대기근으로 진휼청을 두게 되자, 각도에 운미선을 보내어 비축미를 풀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1648년 지평으로 있을 때, 김자점이 뇌물을 받아 기강을 문란시킴을 상소하고는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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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完用(1858∼1926)

조선 말기의 매국노. 자는 경덕, 호는 일당, 본관은 우봉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교 수찬을 지냈다. 1887년 미국 주재 대리공사로 미국에 갔다가, 1890년 귀국하여 학부대신 등을 거쳐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 때 친러파로서 외부·탁부·농공상부 대신 서리 등의 직책을 맡았으며, 1901년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을 지지하고 서명함으로써 을사 5적신의 괴수가 되었다. 1907년 의정부를 내각으로 바꾸고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을 받아 내각 총리대신에 궁내부 대신 서리를 겸임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에게 그 책임을 물어 왕위를 내놓을 것을 강요하였으며, 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로 인해 전국 각처에서 항일 의거가 일어나고 성난 군중들은 그의 집으로 몰려들어 불을 질렀다. 1909년 명동성당에서 이재명의 칼에 찔려 복부와 어깨에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1910년 정부 전권위원의 자격으로 한일합방 조약을 체결하여 매국의 원흉이 되었다. 그 공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 칭호를 받고 조선 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이 되었으며, 3·1운동 때에도 동포를 공갈 협박하는 경고문을 3회나 발표, 후작 작위를 받는 등 죽을 때까지 매국 매족하며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본에 충성을 다하다 죽었다.

이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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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容九(1868∼1912)

조선 말기의 친일파. 자는 대유, 호는 해산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도와 농사로 겨우 살아가다가, 1890년 동학에 들어가 손병희와 최시형의 제자가 되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최시형 등이 붙잡혀 처형될 때 옥에 갇혔으나, 그 후 남은 세력을 모아 '진보회'를 조직하였다. 1904년 친일파인 송병준의 권유로 진보회를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합병했다. 이듬해 손병희가 동학의 전통을 이어 천도교를 시작하자, 이용구는 따로 시천교를 창설하여 교주가 되었다. 윤시병의 뒤를 이어 일진회 회장이 되었고 한일합방을 부르짖는 동시에, 고종 황제를 비롯하여 이완용과 조선 통감에게 한일합방 건의서를 전달하는 등 매국행위를 자행하였다. 죽은 뒤에 일본 천황으로부터 1등 서보장을 받았다.

이용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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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容翊(1854∼1907)

조선 말기의 대신. 함남 북청에서 출생하였으며 민영익의 천거로 감역으로 발탁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장호원에 피신한 명성황후와 고종과의 연락을 재빨리 하여 주었기 때문에 고종의 신임을 얻어 단천 부사가 되었다. 1902년 탁지부 대신으로 이 준·민영환·이상재와 개혁당을 조직했으며, 친러파의 지도자로서 일본의 침투를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용암포의 조차권을 러시아에 넘겨주도록 적극 주장하였으며, 내장원경이 되어 화폐를 남발하고 광산 채굴권·인삼·전매 등의 사업을 잘못 감독하여 독립협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905년 보성학원(고려대학교)을 세워 소학·중학·전문학교 과정을 두어 교육사업에 힘썼다. 이 해 체결된 을사조약을 반대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연금당하였다.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병사하였다. 일설에는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김현토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한다.

이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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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瑀(1542∼1609)

조선의 서화가. 자는 계헌, 호는 옥산, 본관은 덕수이다. 율곡 이 이의 동생이며 명종 때 진사에 급제하여 군자감정까지 지냈다. 그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이어받아 시·글씨·그림·거문고에 능하여 '4절'이라 불리었다. 글씨로 양주에 「윤은성사정비」가 있다.

이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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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元壽(1911∼1986)

아동문학가. 경남 마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마산 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중 방정환이 발행하던 어린이 잡지 「어린이」에 「고향의 봄」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기쁨사」 동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하여 장편 동화와 아동 소설을 주로 썼다. 광복 후에는 「소년세계」 「어린이세계」 주간을 거쳐 경희대학교 초급대학 강사, 아동문학가 협회 회장이 되었다. 대표작품으로 「숲속 나라」 「구름과 소녀」 「민들레의 노래」 「파란 구슬」 「을지문덕」 등이 있다.

이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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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元翼(1547∼1634)

조선의 문신. 자는 공려, 호는 오리, 본관은 전주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있었으나, 원래 인품이 곧아 사람 사귀기를 싫어하여 공적인 일이 아니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를 아는 이가 없었으나, 유성룡만은 그의 슬기로움을 알고 존경하였다. 1573년 권덕여를 따라 명에 다녀온 후 황해 도사가 되어 크게 인망을 얻었다. 이 이가 황해 감사로 있을 때, 그의 밑에서 일을 잘 처리하여 정언·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왕자 사부 하 낙이 승정원이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고 상소함으로써 그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그 후 대사헌이 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조판서로 평안도 도순찰사를 겸임하여 왕이 피란하는 길에 앞장섰으며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적과 싸웠다. 이듬해 평양 탈환 작전에 공을 세워 영의정이 되었으나, 일본과 화의를 주장한 죄로 물러난 유성룡을 변호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600년 다시 이항복의 뒤를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1608년 대동법을 건의하여 전국적으로 실행하도록 하였으며 불합리한 세금제도를 고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하였다. 1615년 폐모론을 반대하다 홍천에 유배되었으며, 1619년 풀려나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영의정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이 괄의 난 때에 공주로 피란하는 왕을 모셨다. 그는 청백리에 뽑혔으며 남인에 속해 있었으나, 성품이 원만하여 반대파로부터도 호감을 받았다. '오리 정승'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저서로 「오리집」 등이 있다.

이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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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源喆(1896∼1962)

천문학자. 1919년 연희전문학교 수학물리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미국에 건너가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전공하여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7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중앙 기독교 청년회 이사를 지냈다. 광복 후에는 국립 중앙 관상대장·한국 천문학 회장·학술원 회원 등을 지냈다. 우리나라 천문학계의 육성에 힘썼으며 새로운 별을 발견하여 '원철 스타'라고 이름지었다.

이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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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緯國(1597∼?)

조선의 문신. 자는 태언, 호는 운포, 본관은 전주이다. 광해군 때 원주 목사로 있다가 정국이 혼란해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용인 현령·곡산 군수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1634년 병자호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그 방비책을 상소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658년 효종 때 14만 석의 정부 양곡을 차용하고도 갚지 않는 서울 사대부들을 탄핵했다가 파직당했다. 후에 다시 등용되어 상원 군수·이천 부사 등을 지냈다. 여러 지방 관직을 거치며 좋은 정치를 베풀어 청렴강직한 관리로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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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瑋鍾

조선 말기의 외교관. 러시아 주재 한국 공사 이범진의 아들이다. 1907년 고종의 밀령을 받고 이준·이상설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동행하였다. 그러나 일본 대표의 방해로 회의 참석을 거부당하였으나, 기자협회의 도움으로 한국의 억울한 입장과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때 일본은 이들 3의사에 대한 궐석 재판을 열고 사형을 선고하여 체포령을 내렸다. 이위종은 이미 순국한 이 준을 헤이그에 묻고, 이상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항일투쟁을 하였다. 그 후 다시 페테르스부르크에 가서 계속 항일 투쟁을 하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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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陸史(1905∼1944)

시인. 본명은 활, 호는 육사이며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들어가 중국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중국 베이징 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였으며,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에 관련되어 3년간 감옥 생활을 하였다. 그때의 죄수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하였다. 잡지업자·신문기자·사회운동가 등 여러 가지 경력을 거쳐 소설을 쓰기도 했고, 30살이 훨씬 지나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37년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펴내고, 「청포도」 「교목」 등 목가풍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는 상징주의적 수법으로 서정성이 풍부하고 소박한 시를 발표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광야」 「절정」에서는 피압박 민족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한 강렬한 저항의식을 담은 서정시를 지었다. 1942년 중국으로 망명했으나, 독립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붙잡혀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광복 후 친구들에 의해 그의 유작 20편을 실은 「육사 시집」이 발간되었다.

이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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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允宰(1888∼1943)

국어학자. 호는 한뫼이며, 경남 김해에서 출생하였다.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평북 영변의 숭덕학교에 재직중 3·1운동에 참여하여 3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1924년 중국 베이징 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오산·경신·연희전문·감리교 신학교 등에서 교편 생활을 하였다. 1927년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사전을 엮고, 1934년 국어학자·사학자들과 함께 '진단학회'를 설립하였으며 기독교신문의 주필이 되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최현배·이희승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함흥 형무소에서 악형과 추위에 시달리다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표준 조선어 사전」 「도강록」 등이 있다.

이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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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殷官(1917∼

)

국악인. 강원도 이천에서 태어나 철원보통학교를 마치고 국악계에 투신하였다. 1941년부터 광복 때까지 무대 생활을 하였고, 1946년 국악원 민요국 극단을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1968년 국악협회 감사를 지냈고, 이은관 민속 예술학원을 설립하여 후진 육성에 전력하였다. 1984년 중요 무형문화재 29호(서도 소리)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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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殷相(1903∼1982)

시조작가·사학자·명예 문학박사. 호는 노산이며 경남 마산에서 출생하였다.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 대학 사학부에서 공부하였다. 경희대에서 문학박사, 연세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전·서울대·영남대 교수를 거쳐 민족문화 협회장·시조작가 협회장·한국 산악회장 등을 지냈다. 광복 전에는 국민문학파의 일원으로 활약하였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조선문단」지 초기부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의 시조는 조국과 국토 산하에 대한 예찬, 전통적 동양 정서, 불교적 무상관 등이 얽혀 바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은 거의 신앙적 집념으로 나타난다. 평이한 언어가 자연스럽게 유출하는 즉흥성은 넓은 독자층을 형성하여 시조 부흥을 이룩한 공로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언론·학술·사학 방면의 저술을 많이 남겼다. 또 국토를 편답하면서 쓴 기행문도 많고, 충무공 연구가로도 이름이 높다. 저서로는 「노산 시조집」 「민족의 맥박」 「조국 강산」 「이 충무공 일대기」 등이 있으며 기행문 「피어린 육백 리」가 있다.

이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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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義旼(?∼1197)

고려의 무신. 본관은 경주이며, 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키가 크고 힘이 세어 경군(京軍)에 편입되었다. 수박(권투)을 잘 하여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이 되었다. 1170년 정중부의 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고 장군이 되었다. 1173년 김보당의 의종 복위 반란을 진압하여 대장군이 되고, 그 후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여 상장군이 되었다.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인 뒤에는 그를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고향인 경주에 있다가 경대승이 죽은 뒤에 다시 조정에 나가 판병부사가 되었다. 김사미 등과 힘을 합하여 반역을 도모하려 하였으며 인사권을 장악하여 벼슬을 팔고 백성의 재산을 빼앗아 큰 저택을 짓는 등 질서를 어지럽히다가 최충헌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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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義方(?∼1174)

고려의 무신. 본관은 전주이며 1170년 정중부·이 고 등과 난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오르게 한 공으로 벽상공신이 되었다. 1173년 김보당의 난을 평정하였고, 이듬해 딸이 태자 빈이 되자 부귀와 권세를 누리며 정치를 어지럽혔다. 이 해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러 서경에 갔다가 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정중부의 아들 정 균이 보낸 자객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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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珥(1536∼1584)

조선의 학자·문신. 아명은 견룡, 자는 숙헌, 호는 율곡, 본관은 덕수이다. 강릉의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그 집이 바로 오죽헌이다. 그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교훈을 받으며 학문을 닦아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였다. 1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하연에서 불교의 이치를 연구하였다. 그러던 중 깨달은 바가 있어 산에서 내려와 유학 연구에 힘썼다. 그 후 강릉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서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이 황을 찾아가 학문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는데, 당시 대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이 황은 이 이의 총명함과 사람됨에 대해 크게 칭찬을 해주었다. 그는 그 후 다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그 때 그가 답안으로 쓴 「천도책」은 그의 철학에 대한 근본사상이 들어 있는 글이었다. 이 「천도책」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9번이나 장원급제하였으므로 '9도 장원공'이라 불리었다. 이 때부터 벼슬길에 올라 정치에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대사간의 직책을 9번이나 맡아 임금이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도왔다. 그는 당시의 정치 문제 등 여러 가지를 다루어, 왕으로서 취할 태도를 밝힌 「동호문답」 「만언봉사」 「성학집요」 등을 지었다. 그는 특히 10년 안에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니 10만 군대를 키우자고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과연 9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34세 때 병이 나자, 벼슬을 내놓고 황해도 해주 석담에 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한편, 학문과 수양에 힘썼다. 이 때 그 곳의 경치를 읊은 시조 「고산 9곡가」를 지었으며, 청주 목사로 임명되었을 때 백성들이 자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향약'이라는 자치조직에 대한 규칙을 마련하였다. 그 뒤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이 운동을 크게 일으켰다.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당파 싸움이 심해지자, 그는 나라 일을 걱정하며 화해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48세에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이듬해 죽었다. 이 이는 죽기 이틀 전까지도 나라 일을 걱정하며, 북방을 지키기 위해 떠나는 서 익에게 6가지 중요한 일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집에는 값나가는 물건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장례를 치를 돈마저 없어 친구들이 모아 겨우 치렀다고 한다. 그는 제자들에 의하여 '동방의 성인'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1682년(숙종 8)에는 문묘에 모셨고 황해도 배천에 문회 서원이 건립되어 그를 제향하였다. 저서로 「격몽요결」 「율곡전서」 「대동법」 등이 있다.

이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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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1722)

조선의 문신. 자는 양숙, 호는 소재, 본관은 전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감사를 지내다가 1689년 영해로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1694년 대사헌을 거쳐 좌의정·우의정에까지 올랐다. 1720년 숙종의 승하를 알리기 위해 청에 갔는데, 그곳에서 독일·포르투갈의 신부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천주교를 비롯한 천문학·역산 등에 관한 책을 가지고 이듬해 귀국하여 이를 널리 소개하였다. 그는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영조의 대리청정을 실현시켰으나, 소론의 무고로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압송 도중 처형되었다. 저서로 「소재집」이 있다.

이이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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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爾瞻(1560∼1623)

조선의 문신. 자는 득여, 호는 관송, 본관은 광주이다. 이극돈의 후손으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1608년 선조의 후계자 문제로 대북파와 소북파가 서로 다툴 때에 대북파의 지도자로서 광해군을 받들었다. 정인홍과 모의하여 영창 대군을 추대하려는 유영경 등 소북파를 공격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유배되었으나 선조가 승하하여 광해군이 즉위하자 풀려났다. 그는 소북파 일파를 몰아내고 영창 대군을 강화에 가두었으며, 선조의 장인 김제남을 죽이는 등 연거푸 옥사를 일으켰다. 1617년 폐모론을 내세워 인목 대비를 서궁에 가두는 등 나쁜 정치를 일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 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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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瀷(1681∼1763)

조선의 실학자. 자는 자신, 호는 성호, 본관은 여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형이 당쟁으로 희생된 후,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의 대가가 되었으며, 특히 천문·지리·의약·율산·경사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조는 그의 명성을 듣고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저술에 힘쓰는 한편, 서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그는 당쟁의 폐단이 제한된 관직에 많은 관리들이 배출되어, 서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데서 비롯된다고 분석하였다.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양반 계급의 생업 종사와 과거제도의 잡다를 피하고 관리 승진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토지 경작을 기본적인 경제 정책으로 삼고 한전법(限田法)의 시행을 제창하였다. 그 후 이 익의 사상은 제자 안정복·이가환·이중환·윤동규·신후담·권철신 등에 의하여 연구 계승되고 정약용이 집대성하였다.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성호사설」 「성호문집」 「해동악부」 등이 있다.

이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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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老(1152∼1220)

고려의 학자. 자는 미수, 호는 쌍명재, 본관은 인주이다. 1170년 의종 때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절에 들어가 지냈다. 그 후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사관에 있으면서 당대의 학자들인 오세재·임 춘·이 담 등과 함께 결의 친구가 되어 시와 술을 즐기었다. 신종 때 예부원외랑을 지내었고, 고종 초에는 비서감 우간의 대부를 지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으나, 성미가 급하였으므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저서로 「은대집」 「쌍명재집」 「파한집」 등이 있다.

이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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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寅文(1745∼1821)

조선의 화가. 자는 문욱, 호는 유춘, 본관은 해주이다. 도화서의 화원이었으며, 첨사 벼슬을 지냈다. 그의 그림은 근대 조선화의 구성상의 산만함을 없애고 정연하고 아담한 구도로서 실력을 높이 평가받았다. 작품으로 「누각아집도」 「강상무진도」 「산수도」 「강촌우색도」 「추림도」 등이 있다.

이인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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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復(1308∼1374)

고려의 문신. 자는 극례, 호는 초은, 본관은 성주이다. 이조년의 손자이며 백이정에게 학문을 배워 문장에 능하였고, 특히 주자학에 밝았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록·춘추공봉 등을 지냈다. 충혜왕 때 기거사인으로 원나라의 제과에 급제하여 대령로 금주판관의 벼슬을 받았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우대언을 거쳐 삼사 좌사에 올라 원나라의 정동행성 도사가 되었다. 1352년 공민왕 때 감찰대부가 되었고 성산군에 봉해졌다. 1364년 찬성사에 나가 단성좌리 공신이 되었으며, 이 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민왕이 복위된 것을 알리고 돌아왔다. 공민왕에게 신 돈을 멀리할 것을 간하다가 파면되었으며, 후에 다시 판삼 사사·검교 시중을 지내다가 등창으로 죽었다. 충렬·충선·충숙왕의 실록과 「고금록」 「금경록」을 편수하였다. 저서로 「초은집」이 있다.

이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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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麟祥(1710∼1760)

조선의 화가. 자는 원령, 호는 능호관, 본관은 전주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북부 참봉에 임명되었으며, 벼슬이 음죽 현감에 이르렀다. 시서화를 다 잘하여 '3절'이라 불리었으며 인장도 잘 새겼다. 저서로 「능호집」, 작품으로 「수석도」 「노송도」 「옥류동도」, 글씨로 「대사성 김식표」 등이 있다.

이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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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麟榮(1867∼1907) 조선 말기의 의병장.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이름을 떨쳤다. 문경으로 이사하여 유인석·이강년 등과 협력하여 1885년 의병을 일으키고, 여러 차례 일본군과 싸우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7년 양주에서 각지의 의병을 연합하여 총대장으로서 수만의 병력을 24진으로 편성하여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동대문 밖에서 패하여 퇴각하였다. 이 때 아버지의 별세 소식이 전해져 고향에 돌아갔다가 황간에서 붙잡혀 서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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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榮(1911∼?) 사학자. 호는 학산이며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1937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진단학회'에 들어가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진단학회가 운영난에 빠지자 사재를 털어 「진단학보」 제9집을 발간하였다.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교수가 되었다가, 이듬해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일본에 우리의 문화재가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골동품과 활자본을 수집했으며, 서지학·활자 연구·한국 만주 관계사의 권위자였다. 저서로 「한국 만주 관계의 연구」 「국사요론」이 있다.

이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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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任(?∼1388)

고려 우왕 때의 간신. 호는 황무이며 본관은 성주이다. 이조년의 손자로 문벌로 벼슬에 나아갔다. 1359년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1등 공신이 되었다. 1369년 서북면 도통사가 되어 원나라의 동녕부를 토벌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죽자, 우왕을 받들어 정권을 잡았다. 그는 일족을 벼슬에 앉혔으며 매관 매작과 충신을 모함하여 몰아내는 등 횡포가 심하였다. 결국 1388년 최 영 등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인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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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麟佐(?∼1728)

조선 영조 때의 반란자. 본관은 광주이며 이준경의 후손이다. 1721년 신임사화 때 한동안 득세하였으나, 영조가 즉위하여 소론파를 몰아내자, 정희량과 함께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고 1728년 반란을 일으켰다. 청주를 함락하고 안성에까지 이르렀으나, 관군에게 크게 패하여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인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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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人稙(1862∼1916)

신소설 작가. 호는 국초이며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하였다. 갑오경장 후 조중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미야코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을 탐독하고 신소설에 대한 소양과 지식을 얻었다. 1906년 「만세보」의 주필이 되었으며, 이 신문에 신소설 「혈의 누」를 발표하였다. 1907년경 「만세보」가 운영난에 빠지자, 이완용의 힘을 빌려 「대한신문」을 창간하였다. 한때는 원각사를 중심으로 신극운동을 전개하고 「설중매」와 같은 신소설을 신극으로 각색하기도 했다. 그는 경술국치 때, 이완용을 돕는 등 친일적인 행위를 많이 했으나, 작가적 재능은 뛰어나 근대 소설의 성격을 잘 파악하였고, 구상력과 성격의 묘사에 능했으며, 사실적 산문 문장을 처음으로 쓴 점에서 근대 소설의 토대를 닦은 그의 문학사적 공적은 크게 평가되고 있다. 대표작으로 「치악산」 「귀의 성」 「은세계」 등이 있다.

이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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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鎬(1932∼1966)

군인. 경북 청도에서 출생하였으며 해군사관학교를 제11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65년 해병대 대위로서 월남으로 건너가 청룡부대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하였다. 이듬해 투이호아 지방에서 있었던 '해풍작전' 때 동굴 수색 작전중 수류탄 1개가 날아들자, 이를 몸으로 덮쳐 부하들을 구하고는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군인으로서 최고 훈장인 태극 무공 훈장이 수여되고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이자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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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資謙(?∼1126)

고려의 척신. 본관은 인주이며 이자연의 손자이다. 둘째 딸이 예종의 왕비가 되자 소성군 개국백이 되었다. 예종이 죽자, 외손자인 태자를 인종으로 즉위하게 하고 셋째, 넷째 딸을 인종에게 바쳤다. 그는 십팔자(十八子:李)가 왕이 되리라는 참위설을 믿고 왕위를 탐내었다. 그러던 중, 1126년 왕의 뜻을 받은 최 탁·오 탁 등이 그를 몰아내려 하자,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궁궐이 타버려 왕은 연경궁으로 옮겼는데, 이 난을 '이자겸의 난'이라고 한다. 그는 더욱 권세를 부려 왕을 독살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일파인 척준경이 왕의 부탁으로 일으킨 거사로 붙잡혀 영광으로 유배되어 죽었고 이자겸 소생의 왕비도 폐위시켰다.

이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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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子淵(?∼1086)

고려 문종의 외척. 본관은 인주이며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상서·참지정사 등을 지내다가, 1050년 문종 때 내사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딸 셋이 각각 인예 왕후·인경 현비·인절 현비 등으로 모두 문종의 아내가 되자, 세력을 잡고 높은 벼슬을 지냈다.

이장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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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長孫

조선 선조 때의 발명가. 화포공(火砲工)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비격 진천뢰라는 박격포와 비슷한 무기를 만들었다. 경주 탈환전에서 경주 판관인 박의장이 이를 사용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고, 해군 함포에도 사용하여 많은 적선을 쳐부수었다.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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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長鎬(1945~ ) 영화감독이자 제작자. 서울 출생. 홍익대학교 건축미술학과를 중퇴하고 신상옥 감독이 만든 신필름에서 일하다가 1974년 「별들의 고향」으로 데뷔했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영화의 주제로 삼고 비판하는 사회성을 강조하면서 영화의 흥행에서도 뒤지지 않는 상업주의 감독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작품으로는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어둠의 자식들」(1981), 「바보 선언」(1983),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어우동」(1985) 등이 있다. 그는 1980년대 우리나라 영화가 안고 있는 현실과 영화의 간격을 좁히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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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章熙(1902∼1928)

시인. 호는 고월이며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교토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5년 「조선문단」지를 통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시의 풍조가 퇴폐적이고 감상적인 것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는 맑고 날카로운 작품을 많이 발표하여 시의 천재라고 불리었다. 1928년 정신적인 쇠약과 고독·회의 끝에 음독 자살하였다. 1951년 백기만에 의해 유고집인 「상화와 고월」이 출판되었으며, 대표작으로 「봄은 고양이로다」 「청천의 유방」 등이 있다.

이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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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縡(1678∼1746)

조선의 학자. 자는 희경, 호는 도암, 본관은 중봉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단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부제학 등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으로 등용되어 도승지·대사헌·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721년 신임사화 때 작은 아버지 이만성이 피살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설악산에 숨어 살면서 성리학 연구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그림 또한 잘 그렸다. 만년에는 용인에서 지냈는데, 그를 찾아와 학문을 배우는 선비가 많았다. 저서로 「도암집」 「어류초절」 「근사심원」 등이 있다.

이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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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在寬(1783∼1837)

조선 후기의 화가. 자는 원강, 호는 소당, 본관은 용인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그림을 그려 팔아 어머니와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는 구름·나무·새 등을 잘 그렸고 초상화에도 뛰어났다. 벼슬은 등산진 첨절제사에 이르렀으며, 작품으로 「송하인물도」 「약산초상」 「선인도」 등이 있다.

이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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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在明(1890∼1910)

독립운동가.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였으며 18세 때 선교사를 따라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가 있다가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리라는 소문을 듣고 국내로 들어왔다. 1909년 명동 천주교 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를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그 후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이듬해 사형당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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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勣(1162∼1225) 고려의 무신. 본관은 지평이며 대장군 이준선의 아들이다. 1216년 고종 때 우군 병마판관이 되어 서북면으로 쳐들어온 거란군을 물리쳤다. 이듬해 다시 거란군이 쳐들어오자, 병마부사로서 광탄에서 적을 크게 물리쳐 상서 좌복야에 올랐다. 그 후 추밀원 부사·어사대부 등을 지냈다. 평소에는 온순하지만 전장에 나가면 남이 따르지 못할 정도의 용기로 적과 맞섰다고 한다.

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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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霆(1541∼?) 조선 중기의 화가. 자는 중섭, 호는 탄은이며 세종의 5세손이다. 석양정에 임명되었다가 석양군으로 피봉되었다. 그는 묵화를 잘 그렸는데, 대나무에 특히 뛰어났으며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다. 임진왜란 때 한쪽 팔이 부러졌는데, 팔이 나은 후부터 화필이 더욱 능숙해졌다. 작품으로 「우죽도」 「풍죽도」 등이 있다.

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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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禎(1578∼1607) 조선 중기의 서화가. 자는 공간, 호는 나옹, 본관은 전주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났으며 아버지 이숭효의 재주를 이어받아, 10세 때 이미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13세 때 장안사의 벽화를 그려 천재 화가라고 불리었으나, 지나치게 술을 즐겨 3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작품으로는 「목죽도」 「한강조주도」 등이 있으며, 글씨로 「법주사 벽암 대사비」가 있다.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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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廷龜(1564∼1635)

조선의 문신. 자는 성징, 호는 월사, 본관은 연안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피란하였다가, 그 곳에서 명나라 송응창의 요청으로 경서(經書)를 강의하여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 후에도 자주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며 말벗이 되었다. 그가 명에 갔을 때, 그곳 문인들의 요청으로 100여 장의 기행문을 모아 「조선 기행록」이란 책을 만들었다. 1624년 이 괄의 난 때 인조를 공주로 모시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로 모시었고, 화의하자는 의견에 반대하였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저서로 「월사집」 「서연강의」 「대학강의」 등이 있다.

이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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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廷立(1556∼1595)

조선의 문신. 자는 자정, 호는 계은, 본관은 광주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 등을 지냈다. 이 이의 추천으로 이덕형·이항복과 함께 경연에서 「통감강목」을 강의하여 '3학사'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그 후 병조참판·한성부 좌윤·대사성 등을 지냈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계은집」이 있다.

이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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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濟馬(1837∼1900)

조선의 한의학자. 자는 무평, 호는 동무, 본관은 전주이다. 함남 함흥에서 출생하였으며, 1892년 진해 현감이 되었다. 경사 백가·의학에 정통하였으며, 「주역」을 깊이 연구하여 그때까지의 의학이 비과학적임을 알아낸 후, 나름대로 새로운 학설을 내세웠다. 그리하여, 태극설인 태양·소양·태음·소음 4상을 사람의 몸에 적용하여 사람의 체질을 4가지로 나누었으며, 그에 따라 치료 방법을 달리하는 '사상 의학설'을 내놓았다. 저서로 「동의 수세보원」 「격치고」 등이 있다.

이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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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齊賢(1287∼1367)

고려의 성리학자. 자는 중사, 호는 익재, 본관은 경주이다. 충렬왕 때 성균시에 장원급제하고 예문 춘추관에 들어갔다. 1314년 충숙왕 때 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을 공부하였다. 그 해 원에 가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을 세우고 그를 부르자, 베이징에 가서 원의 학자들과 함께 고전을 연구하였다. 충선왕이 모함을 받아 원의 조정에 의해 유배되자 잘못됨을 밝혀 풀려나오게 하였으며, 그 후에도 충숙왕이 모함을 받아 두 차례나 원에 잡혀갔을 때에도 원의 조정에 글을 올렸다. 만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왕명을 받고 실록을 편찬하였다. 그가 쓴 「익재난고」란 책에 17수의 고려가요를 한시로 번역하여 실은 것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저서로 「익재집」 「역옹패설」 「효행록」 등이 있다.

이조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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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兆年(1269∼1343)

고려의 문신. 자는 원로, 호는 매운당, 본관은 성주이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306년 비서랑으로 왕을 모시고 원에 갔을 때 왕유소·송방영 등의 모함으로 충렬왕과 왕자(충선왕)의 사이가 나빠졌다. 이때 그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나 화를 입고 유배되었다.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나 13년간 고향에 있다가, 1340년 충혜왕 때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그는 시에 뛰어났으며 시조 한 수가 전해지고 있다. 공민왕 때 성산후에 추증되었고, 충혜왕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이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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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存吾(1341∼1371)

고려의 문신. 자는 순경, 호는 석탄, 본관은 경주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한으로 있을 때, 정몽주·정도전 등과 학문에 관해서 토론하였다. 1366년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다. 후에 신 돈을 쫓아내라는 간언을 하다가 공민왕의 미움을 받아 공주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중 울분으로 병을 얻어 죽었다. 죽은 후, 뒤늦게 왕은 그의 충성심을 알고 성균관 대사성에 추증하였다. 저서로 「석탄집」이 있다.

이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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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從茂(1360∼1425)

조선의 무신. 본관은 장수이며 어려서부터 말타기·활쏘기에 능하였다. 1381년 우왕 때 14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로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친 공으로 정용호군이 되었다. 1397년 옹진에서 만호의 벼슬에 재직중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이에 끝까지 싸워 적을 물리친 공으로 첨절제사가 되었다. 1419년 삼군 도체찰사가 되어 군함 227척을 거느리고 쓰시마 섬을 정복하였다. 1423년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다.

이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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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宗城(1692∼1759)

조선의 문신. 자는 자고, 호는 오천, 본관은 경주이다. 이항복의 5세손이며 좌의정 이태좌의 아들이다. 숙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27년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에 경상도 암행어사가 되어 백성들을 잘 보살폈다. 그 후 이조판서·형조판서·대사헌·좌의정·영의정 등을 지냈다. 그는 성리학에도 밝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재직중 사도 세자(장헌 세자)를 한마음으로 잘 보살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적당들이 간계를 부리지 못했다고 한다. 저서로 「오천집」이 있다.

이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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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鍾一(1858∼1925)

독립 운동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옥파, 본관은 성주이며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4서 3경을 공부하였으며, 1898년 「제국신문」 사장이 되어 10여 년간 민족의 자주 정신을 일깨우기에 노력하였다. 그 후 국문연구회 회장이 되었으며, 천도교에 들어가 천도교 월보 과장·보성 인쇄소 사장 등을 지냈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 이 사건으로 3년 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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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鍾勳(1856∼1935)

독립 운동가. 3·1운동 때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정암이며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한문을 공부하고 25세 때 천도교에 들어갔다. 1894년 동학혁명 때 많은 활약을 하여 천도교 장로가 되었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붙잡혀, 2년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에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1922년 천도교를 중심으로 고려 혁명 위원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큰 공을 세웠다. 만주로 건너가 활약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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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埈(1560∼1635) 조선의 문신·의병장. 자는 숙평, 호는 창석, 본관은 홍양이다. 유성룡에게 학문을 배우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가 되었다.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적과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경상도 도사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중국 역대 왕들의 업적과 신하들의 올바른 충성을 엮은 「중흥귀감」을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수만 섬의 군량을 모은 공으로 부제학이 되었다. 저서로 「창석문집」이 있다.

이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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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儁(1859∼1907) 조선 말기의 순국열사. 호는 일성, 본관은 전주이며 함남 북청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곧고 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어지러운 나라를 걱정하였다.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한성재판소 검사가 되었다. 1896년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했으며, 초대 평의장이 되어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등 일본에 항거하는 독립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이어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맞서 '공진회'를 조직하여 친일파를 규탄하다가 유배되기도 하였다. 1907년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이상설·이위종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 행위를 호소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로 갔다. 그는 만국평화회의 개최일인 6월 5일 의장을 찾아가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했으나, 일본측 대표 고무라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퇴장당하게 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그동안 헤이그에 묻혀 있던 유해는 1963년 서울 수유리 묘지로 이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이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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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埈慶(1499∼1572)

조선의 문신. 자는 원길, 호는 동고, 본관은 광주이다. 1504년 연산군 때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형 윤경과 함께 괴산으로 유배되었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왔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이 되었으나, 기묘사화 때 갇힌 죄없는 사람들을 석방할 것을 주장하다가 김안로의 미움을 받고 쫓겨났다. 1555년 호남에 왜구들이 쳐들어오자,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이를 격퇴시킨 공으로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 후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선조에게 정몽주의 후손을 벼슬에 등용시킬 것을 건의하였으며, 홍수와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세금을 덜게 할 것을 부탁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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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仲燮(1916∼1956)

화가. 호는 대향이며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 분카 학원에 재학중, 1937년 일본 자유 미협전에 출품하여 태양상을 받았다. 1939년 '자유 미술 협회'의 회우가 되었고, 1945년 귀국하여 일본 여자 이남덕과 결혼하고 원산 사범학교 교사를 지냈다. 6·25전쟁 때 월남하여 부산·제주·통영 등지를 전전하며 담배갑 은종이에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 후 생활고로 시달리던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가자, 부두 노동을 하면서 지내다가 환도와 함께 상경하였다. 1955년 미도파 화랑에서 단 한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이듬해 간장염으로 적십자 병원에서 죽었다. 그의 작풍은 야수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향토적이고 개성적인 것으로서 우리 나라에 서구 근대화의 화풍을 도입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작품으로 뉴욕 현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소」와 홍익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흰소」 등이 있다.

이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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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重煥(1690∼?)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자는 휘조, 호는 청담, 본관은 여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지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목호령의 일당과 함께 이듬해 절도로 유배되었다가, 1727년 풀려나왔다. 그 후 30년 간을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리·사회·경제 등을 연구하였다. 성호 이 익의 학풍을 계승하여 인문 지리학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저서로 「택리지」 등이 있다.

이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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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之蘭(1331∼1402)

조선의 개국공신. 본성은 퉁이며 이름은 쿠란투란티무르이다. 여진족의 천호(千戶)인 아라부카의 아들로, 공민왕 때 부하들을 이끌고 귀화하였다. 북청에 있다가 이성계의 휘하로 들어가 이씨 성을 받았다. 1392년 공양왕 때 지문하부사 판도평의사사사(使司事)가 되었다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개국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경상도 절제사가 되어 왜적을 막는 데 힘썼으며, 1398년 명을 도와 건주위 정벌에 공을 세워 청해군에 피봉되었다. 그 후 이성계가 은퇴하자 이성계를 시종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지난날 싸움터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을 속죄하기 위해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태조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다.

이지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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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芝蕃(?∼1575)

조선 명종 때의 학자. 자는 형백, 호는 성암, 본관은 한산이다. 이지함의 형이며 부모에게 남달리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학문이 뛰어났으며 천문과 지리에도 밝았다. 명종 때 장례원사평이 되었으나,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윤원형이 횡포를 부리자, 벼슬에서 물러나 단양의 귀담에다 집을 짓고 정신을 수양하면서 지냈다. 그는 소를 타고 강가의 경치를 즐기는가 하면, 귀담 언덕의 양 끝에다 칡덩굴로 줄을 매어놓고 날아가는 학 모양을 매달아 그 위에 올라타고 왕래하니, 사람들이 그를 신선이라 하였다. 그 후 선조 때 청풍 군수를 지냈으며, 아들 이산해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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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址鎔(1870∼?)

조선 말기의 매국노. 자는 경천, 호는 향운, 본관은 전주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1887년 일본에 다녀왔다. 1905년 을사조약에 서명하여 백성들의 규탄을 받고 집이 불타 버렸다. 1910년 경술국치 때 일본 정부에게 백작의 칭호를 받았으며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을사 5적'의 한 사람이다.

이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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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1578)

조선의 학자. 자는 형중, 호는 토정, 본관은 한산이다. 목은 이 색의 후손이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형 이지번에게 배운 후 서경덕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선조 때 뛰어난 행실로 벼슬에 올라 포천 현감을 거쳐 아산 현감을 지냈다. 재물에 욕심이 없어 평생 가난한 생활을 하였고, 의약·복서·천문·지리·음양 등에 통달하였으며 괴상한 행동과 예언 등의 일화가 많다. 이 이와 친하여 성리학을 배우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욕심이 많아 배울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숙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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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稷(1362∼1431)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우정, 호는 형재, 본관은 성주이다. 이인민의 아들이고, 이조년의 증손으로, 우왕 때 16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경순부 주부·예문관 제학 등을 지냈다. 1392년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워 성산 부원군에 봉해졌다. 1403년 태종 때 왕명을 받고 주자소를 설치하여 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다. 그 후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이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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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眞燮(1922∼1983)

방송극 작가·저술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를 수료하고, 합동통신·서울 중앙방송국·서울신문·세계통신 등에서 활약하였다. 1955년 경향신문사 조사부장·문화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57년 안양 촬영소 전속 작가로 활약하였다. 1962년 다시 경향신문사 부국장 겸 기획위원이 되었다. 1965년 대한 공론사 편집위원을 역임하였고, 1973년 이후 KBS 심의위원으로 근무하였다. 1958년 연속 방송극 「장미빛 인생」을 써서 극작가로 등장하였고, 이어 「삭풍의 노래」, 뮤지컬 「사랑의 도표」 「8월의 노래」 「10월의 노래」 등을 발표하여 주목받았다.

이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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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澄玉(?∼1453)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양산이고 6진(六鎭) 설치 때 공이 컸으며, 김종서의 뒤를 이어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 대군이 김종서의 심복이라 하여 파직시키자, 이에 분개하여 난을 일으켰다. 그는 야인들의 후원을 얻어 스스로를 대금 황제라 칭하고 군사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갔으나, 함경도 종성에서 종성 판관 정 종 등의 습격을 받고 아들 셋과 함께 살해되었다. 그가 일으킨 '이징옥의 난'은 조선 초기 최초의 반란으로 후에 '이시애의 난'에 영향을 미쳤다.

이차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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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次頓(506∼527)

신라의 불교 순교자. 성은 박, 일명 거차돈으로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다. 아도가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하려 할 때, 모든 신하들이 이를 반대하였으나 오직 이차돈만이 불교의 공인을 적극 주장하여, 당시 불교에 관심이 있는 법흥왕으로부터 절 짓는 일을 허락받았다. 그런데 절을 짓기 시작한 그 해부터 가뭄과 장마가 겹쳤으며, 질병이 돌기 시작하여 많은 백성들이 죽었다. 그러자 불교를 반대하던 신하들이 이차돈 때문이라고 왕을 충동하여 처형하게 하였다. 그는 죽을 때 \"불법에 신이 있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변이 있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는데, 그의 목을 베니 피가 흰 젖빛으로 변하여 솟구쳤다. 이에 모두 놀라고 감동하여 528년 드디어 불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전설에는 그가 죽을 때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이 경주 북쪽에 있는 금강산이며, 그곳에 817년 헌덕왕 때 승려 혜륭이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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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5∼1451)

조선의 과학자·무신. 호는 불곡이며 본관은 예안이다.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참판이 되었다. 1420년 세종의 명으로 '경자자'라는 새로운 활자를 만들었으며, 1434년 '갑인자'를 만들어 인쇄 발달에 이바지하였다. 그 후 평안도 도절제사로서 여진족을 정벌하고 4군 설치를 건의하여 실현케 하였다. 호조판서로서 오랜 연구 끝에 천문학 기구인 대간의·소간의·혼의·앙부 일귀·자격루 등을 만들었고, 그 밖에 화포를 만드는 등 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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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詹(1345∼140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장가. 자는 중숙, 호는 쌍매당, 본관은 홍주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 검열을 지냈다. 1375년 권력을 남용하는 이인임 등을 탄핵하여 10년간 유배되었다. 그 후 1391년 공양왕 때 다시 벼슬에 올랐으나, 김진양 사건에 관련되어 다시 홍성으로 유배되었다. 조선 건국 후 1398년 태조 때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1402년 하 윤과 함께 「삼국사략」을 편찬하였으며, 뛰어난 문장력으로 「저생전」이라는 소설을 짓기도 하였다.

이청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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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潭(1902∼1971)

승려. 경남 진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진주 공립 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송운사의 아키모토에게서 불도를 닦아 득도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개운사 불교전문강원의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1956년 대한 불교 조계종회 의장·1957년 해인사 주지·1962년 도선사 주지·1968년 조계종 총무원장 등을 지내면서 우리나라 불교정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71년 입적하였고 종단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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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俊(1939~ )

소설가. 전남 장흥 출생. 1966년 서울대학교 독문과 졸업. 1965년 「사상계」 신인작품 모집에 단편소설 「퇴원(退院)」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단편 「임부(姙婦)」 「줄」 「무서운 토요일」 「굴레」 「이어도」 등을 발표, 신인으로서의 작가적 지반을 확고히 하였다. 그의 작품 경향은 「줄」 같은 작품의 계열에서 보이듯이 줄광대의 표현보다는 그 이면, 즉 수련과정의 비정함이나 단호함이 파헤쳐지고 있다. 1986~87년 한양대 국문과 강의를 했고, 주요 작품으로 「별을 보여드립니다」 「소문의 벽」 「조율사(調律師)」 「이어도」 「잔인한 도시」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창작집으로 「별을 보여드립니다」 「예언자」 「남도사람」 「살아 있는 늪」 「소문의 벽」 「시간의 문」 등과 「흐르지 않는 강」 「당신들의 천국」 등의 중·장편집을 간행했다. 동인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창작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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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兌榮(1914∼1998)

여류 변호사. 평북 운산에서 태어나 1949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그 후 미국 남감리교 대학 법과대학원을 수료하고 1952년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1954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959년 국제 여변호사 협회 부회장·이화여대 법정 대학장·가정 법률 상담소장 등을 지내고 가정 법원 조정위원으로 있었다. 1971년 신민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법을 통한 세계 평화 센터'로부터 법을 통한 세계 평화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한국 이혼 제도 연구」 「법률 상담 실기」 등이 있다.

이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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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弼柱(1869∼1932)

독립 운동가·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는 한문을 공부하였다. 20세 때 구한국군에 들어가 8년 동안 장교로 근무하였다. 그 후 기독교 청년회에 들어가, 초대 체육 교사로 있으면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미신 타파와 자립정신을 불어넣고 신생활 운동에 앞장섰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 유치원을 비롯하여 국민학교·야간 부녀학교 등을 운영하였으며, 신사 참배에 항거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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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河潤(1906∼1974)

시인·영문학자. 호는 연포로 강원도 이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호세이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경성여자미술학교 교사가 되었다. 1930년 박용철과 「시문학」 「문예월간」을 주재하면서 해외문학 소개와 함께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중외일보」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동국대학교·덕성여자대학교·서울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으며 국제 펜클럽 대회에 수차 참석하였다. 시집으로 「물레방아」와 번역 시집 「실향의 화원」 「프랑스 시선」 「영국·아일랜드 시선」 등이 있다.

이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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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

이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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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漢福(1897∼1940)

서화가. 호는 수재·무호이며, 본관은 전의이다. 일찍이 조소림·안심전의 문하에서 서화를 배웠으며, 그림은 일본 도쿄 미술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그림뿐 아니라 글씨도 잘 썼는데, 서도는 오창석의 전서를 본받았으며, 특히 화조(花鳥)를 잘 그렸고 서화 감식에도 능하였다. 작품으로 「산수도」 「비파란도」 「절지도」 등이 있다.

이한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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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漢應(1874∼1905)

조선 말기의 외교관·순국 열사.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였으며, 18세에 관립 영어학교를 마치고 26세에 영어학교 교관이 되었다. 1901년 영국·벨기에 공사관의 3등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영국 런던으로 갔다. 이듬해 영·일 동맹이 체결되자 우리 공사에 대한 영국의 태도가 불친절해졌고,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겨 부득이 공사관을 철수하게 되자, 귀국하기를 단념하고 그곳에서 음독 자결하였다. 이 사실이 본국에 알려지자, 뒤이어 민영환·조병세 등도 순국하는 등 동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이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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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漢喆(1808∼?)

조선 말기의 화가. 자는 자상, 호는 희원, 본관은 안산이다. 운재 이의양의 아들로 도화서의 화원이었고 벼슬은 군수를 지냈다. 산수화를 비롯하여 꽃·새·초상화에 뛰어난 재주를 발휘하였다. 일본의 세키노는 그의 산수·인물의 필치를 격찬한 바 있다. 작품으로 「추경독서도」 「정포은 초상」 「소년행마도」 「방화수유도」 등이 있다.

이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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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恒(1499∼1576)

조선의 학자. 자는 항지, 호는 일재, 본관은 성주이다. 일찍이 무과에 뜻을 두어 활쏘기·말타기를 잘 하였으나 30세에 이르러 학문을 시작하였다. 그는 태인에서 어머니와 농사를 지으며 성리학 연구에 힘써 '이기일원론'을 발전시켜 대학자가 되었다. 1566년 명종 때 나라에서 학문이 뛰어난 선비를 뽑을 때 수석으로 뽑혀 임천 군수가 되었다. 그 후 장악원정을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태인에서 죽었다.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항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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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恒寧(1915∼

)

법학자·수필가.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였으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1946년 양산중학교 교장을 거쳐 1954년 고려대학교 교수·고려대학교 법과 대학장이 되었다. 이때 단편소설 「그믐 밤」과 장편소설 「교육가족」을 발표하였다. 1966년 변호사업을 개업하였으며 학술원 회원·펜클럽 중앙위원·경향신문 논설위원 등을 거쳐, 1972년 홍익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1987년 학술원 원로회원이 되었다. 1973년 국민 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저서로 「법철학 개론」 「민법학 개론」이 있으며 소설 「청산곡」과 수필집 「객설론」 등이 있다.

이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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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恒老(1792∼1868)

조선의 학자. 자는 이술, 호는 화서, 본관은 벽진이다. 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팔사략」을 배웠다고 한다. 1840년 헌종 때 경사(經史)에 밝은 선비로 천거되어 휘경원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 벽계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864년 고종 때 조두순의 추천으로 장원서 별제·전라도 도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그는 특히 성리학에 밝았으며, 저서로 「화동역사 합편강목」 60권과 「벽계아언」 12권, 「주자대전 잡의집보」 등이 있다.

이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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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恒福(1556∼1618)

조선의 문신. 자는 자상, 호는 백사·필운·동강, 본관은 경주이다. 고려의 명상 이제현의 후손이며 참찬 이몽량의 아들이다. 어려서는 악동으로 골목 대장 노릇을 하였으나,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학문에 힘썼다. 16세에 어머니가 죽은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이 더욱 깊어져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 소년시절에 한음 이덕형과 재치 있는 장난을 잘하여 '오성과 한음'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의로 있을 당시, 전곡의 출납에 밝았으므로 판서 윤두수에게 칭찬을 받았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 공신의 호를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승지가 되어 왕을 모시고 의주까지 무사히 피란을 갔는데, 그 공으로 피란 도중 개성에서 오성군에 봉해졌다. 그 후 5번이나 병조판서가 되어 활약했으며, 왕의 신임이 두터워져 1602년 오성 부원군에 봉해졌으나, 정인홍 등이 성 혼을 탄핵하자, 그를 변호하다가 화를 입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는 당파 싸움이 심하였는데 광해군이 인목 대비를 폐하려 하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다. 이때 지은 시조를 광해군이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당파 싸움에 초연하였으므로 늘 혼자 외롭고 의롭게 살았으며, 유배된 지 5개월 만에 죽었다. 죽은 후 벼슬이 다시 내려졌으며 많은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의 제자가 쓴 「북천일록」에는 그의 유배지 생활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 「백사집」 「주소계의」 「사례훈몽」 등이 있다.

이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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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海浪(1916∼1989)

연극 연출가. 서울에서 태어나, 1940년 니혼대 예술과를 나와 연극계에 투신하여 한국 연극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1949년 중앙 국립 극단장에 취임하고, 1954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9년 동국대 연극과 부교수로 출강하고, 1963년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1967년 예총 회장, 1971년 동국대 연극과 교수, 같은 해 8대 국회의원(전국 민주공화당)에 당선되었다. 연출 작품은 「밤으로의 긴 여로」 「햄릿」 「오셀로」 등이 있다.

이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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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海朝(1869∼1927)

신소설 작가. 호는 동농·열재이며 필명은 우산거사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신소설 창시자로서 「자유종」을 비롯해서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많은 신소설을 발표하였으며, 베르느의 「철세계」 등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대 소설을 신소설의 형식으로 고쳐 「춘향전」을 「옥중화」로, 「심청전」을 「강상련」으로, 「별주부전」을 「토의 간」 등으로 고쳐 썼다. 대표작으로 「월하가인」 「탄금대」 「봉선화」 등이 있다.

이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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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軒求(1905∼1983)

문학 평론가. 호는 소천, 함북 명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와세다 대학 불문과를 졸업하였다. '해외문학 연구회' '극예술 연구회' 등 동인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조선일보」를 통해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주로 「해외문학」을 통하여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 후 만주일보 부사장·공보처 차장·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 학장 등을 지냈으며, 언론계와 교육계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평론으로 「조선 문학은 어디로」 등이 있으며, 저서로 「문화와 자유」 「모색의 도정」 등이 있다.

이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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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賢輔(1467∼1555)

조선의 문신. 자는 비중, 호는 농암, 본관은 영천이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을 거쳐 정언으로 있을 때, 어지러운 정치를 논하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호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특히 문장에 뛰어나 자연을 노래한 시조가 많이 있는데, 10장으로 전하던 「어부가」를 그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에 실려 있다. 「효빈가」 「농악가」 등이 그의 저서인 「농암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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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鎬雨(1912∼1970)

시조 시인. 호는 이호우(爾豪雨)이며, 경북 청도에서 출생하였다. 1940년 「문장」지에 시조 「달밤」이 추천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후 주로 대구에서 기거하면서 신문사에 몸을 담고 지방 문화 창달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55년 「이호우 시집」을 간행하고 제1회 경북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 누이동생 이영도와 함께 발간한 오누이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중의 1권인 「휴화산」을 발간하였다. 그는 한국의 옛 시조의 제한된 시조 형식을 고수하면서 현대적인 느낌이나 생활의 정서를 담아 새로운 시조를 탄생시켜, 시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개화」 「별」 「바위 앞에서」 등이 있다.

이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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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浩哲(1932~ )

소설가. 함남 원산 출생. 원산고 졸업. 1950년 월남한 이후 1955년 단편 「탈향」이 「문학예술」지에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했고, 대표적인 단편에 「나상」 「핏자욱」 「탈각(脫殼)」 「파열구」 「판문점」 「닳아지는 살들」 「타인의 땅」 「부시장(副市長)」 「부임지로 안가다」 「고여 있는 바닥」 등이 있다. 꾸준한 작품 세계의 발전을 보여주어 1961년 「판문점」으로 현대문학상 신인상을, 1962년 「닳아지는 살들」로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장편에 「60년대의 배당(配當)」 「서울은 만원이다」 등이 있고, 단편집에 「이단자」가 있다. 현재 소설가협회 공동대표와 방송위원으로 있다.

이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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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廓(1590∼1665)

조선의 무신. 자는 여랑, 본관은 전주이다. 3세 때 임진왜란으로 아버지를 여의었고, 장성하여 키가 8척이나 되었으며 힘이 장사였다. 광해군 때 이항복의 권유로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그 후 선전관을 거쳐 수성 도찰방이 되었다. 1623년 이 귀 등과 함께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성공시킴으로써 평산 부사가 되었다. 이 해 부총관으로 금에 갔다가, 조선을 속국으로 취급한 금의 국서를 받아온 죄로 선천에 유배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전하였으며, 화의가 성립된 후 총관·충청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죽은 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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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滉(1501∼1570)

조선의 대학자·문신. 자는 경호, 호는 퇴계, 시호는 문순, 본관은 진보이다. 경북 안동군 도산면에서 출생하였는데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숙부에게 양육되었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박사·호조좌랑·홍문관 수찬 등을 지냈다. 그 후 승진하여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고향에 돌아와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다시 조정에서 불러 홍문관 교리를 지내다가, 인종 때 전한이 되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한때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였으나, 고향에 내려가 양진암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일찍이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를 읽고 여기에 몰두하여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므로 '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1547년 응교를 거쳐 이듬해 풍기 군수로 있던 중 병을 얻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곳에 한서암을 짓고 독서와 사색의 생활을 즐겼다. 1558년 주자가 지은 「역학계몽」을 깊이 연구한 끝에 「계몽전의」를 지었으며 주자와 그 후계자들의 학문을 연구하여, 1560년 「송계원명 이학통록」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그는 주자학의 대가였을 뿐 아니라, 시도 잘 지어 「도산 십이곡」과 같은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한서암에서 공부하고 있던 중, 1560년 다시 대사성·부제학 등의 벼슬에 올랐으며 왕위에 오른 어린 선조에게 왕으로서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를 6조항으로 적은 '무진 육조소'를 올렸다. 또한, 유학의 근본 원리와 실천 방법을 모아 중요한 내용만을 적은 '성학십도'를 지어 왕에게 올리고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 책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최대의 힘을 기울여 지은 책이며, 고향에서 그는 베옷을 입고 지냈고 나들이할 때는 칡으로 만든 짚신과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그는 또한 도산서원을 지어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자기 학설의 잘못된 점은 서슴지 않고 고쳤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 유성룡·기대승과 같은 뛰어난 유학자들이 나왔으며, 그가 지은 「주자서절요」를 비롯하여 많은 책들이 일본에서 번역·간행되어, 그곳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주자학을 만든 중국에서조차 이 황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문학·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의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 「수정천명도설」 「성학십도」 「자성록」 「논 사단칠정서」 「도산 십이곡」 「퇴계집」 「사서석의」 등이 있다.

이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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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송곡, 본관은 태안이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조선 태조 때 병조정랑이 되었다. 변중량과 함께 정권과 병권의 겸임이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여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태종 때 승려 청준이 그린 「역대제왕혼일강리도」에 교정을 더하여 우리 나라 지도에다 일본을 첨부하여 새 지도 「팔도도」를 만들었다. 벼슬이 사간에 이르렀으며 시문에 뛰어났다.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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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孝石(1907∼1942)

소설가.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였으며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예과 시절부터 교우 동인지인 「문우」 「청량」 등에 습작 시 「동(冬)의 시장」 「유월의 조(朝)」 등을 발표하였다. 1925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봄」이 당선되었으며, 1928년 「조선지광」 7월 호에 단편 소설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 후 「북국통신」 「노령근해」 등 경향적인 단편을 발표하여 유진오와 함께 동반 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1931년 조선 총독부 검열계에 근무하다가 친지들의 비난을 받아 한 달 만에 사퇴하고, 함북 경성에 내려가 농업학교 영어 교사가 되었다. 1933년 「조선문학」 창간호에 단편 「돈」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종래의 경향성을 버리고 「메밀꽃 필 무렵」 「산」 「여수」 등 자연에의 귀의와 서정성이 풍부한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때가 효석 문학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체호프·맨스필드·싱그·로렌스·켓셀 등 외국 작가로부터 영향을 받아, 진정한 서구적 현대성을 문학으로써 구상화하여 단편소설의 예술성과 기법면에 신경지를 개척하였다. 평양 대동공전의 교수로 있다가 1942년 36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광복 후 「효석전집」 3권이 출간되었다. 대표작으로 「화분」 「거리의 목가」 「황제」 「성화」 등이 있다.

이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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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厚源(1598∼1660)

조선의 문신. 자는 사심, 호는 우재, 본관은 전주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하였고, 장악원에 보관되어 있던 「악학궤범」을 인쇄하여 여러 사고에 나누어 간직하게 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북벌계획에 참가하여 전함 200여 척을 준비하였고, 그 후 우의정이 되어 송준길·송시열 등의 인재를 등용시켰다.

이흥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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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興烈(1909∼1980)

작곡가. 함남 원산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도요 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초창기 현대 음악의 개척자로서 경성보육학교와 고려대학교 등에서 음악 교수로 있었다. 1963년 숙명여대 음대 교수 및 학장으로 예술원 회원이 되고 1969년 방송가요심사위원장을 거쳐 1970년 방송윤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작곡한 「바위 고개」는 널리 불리어지고 있으며, 저서로 「이흥렬 가곡집」 「음악의 종합 연구」가 있고 가곡집으로 「너를 위하여」 등이 있다.

이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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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熙昇(1897∼1989)

국어학자. 호는 일석이며 경기도 개풍에서 출생하였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 문학부 조선어 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한글학회' 창립 이후 계속 이사직에 있으면서 일본 도쿄 제국대학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연구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4년간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52년 서울대 대학원 부원장으로 학술원 종신 회원이 되었고,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장, 1963년 동아일보사 사장·성균관 대학원장·학술원 부원장 등을 지냈다. 평생을 학문 연구에 이바지한 국어 국문학계의 원로이다. 저서로 「국어 대사전」 「역대 조선 문학 정화」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강의」 등이 있으며, 수필집 「벙어리 냉가슴」과 시집 「박꽃」 등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과 학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인목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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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穆大妃(1584∼1632)

조선 선조의 계비. 성은 김씨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연흥 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선조의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 대군의 어머니이다. 1602년(선조 35)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존호 소성·정의·명렬 등을 각각 받았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인 정인홍 등에 의해 영창 대군과 김제남은 피살되고 인목 대비는 서궁에 유폐되었다. 1623년 이 귀 등에 의하여 인조반정이 이루어지자 대왕대비가 되어 인경궁 흠명정에 기거하다가 죽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금강산 유점사에 인목 대비의 어필인 「보문경」 일부가 전한다.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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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祖(1595∼1649)

조선 제16대 왕(재위 1623∼1649). 선조의 손자이며 선조 때 능양군에 봉해졌다. 1623년 김 유·이 귀 등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자 왕으로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 이 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피란갔다가 돌아왔다.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하여 강화도에 피란하였다가 형제국의 의를 맺고 화의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다가 척화파·주화파와의 치열한 싸움 끝에 인조 자신이 삼전도(송파)에 나와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군신의 의를 맺었다. 이어 소현 세자·봉림 대군의 두 왕자를 선양에 인질로 보내었으며, 청의 요구대로 삼전도에 「대청 황제 공덕비」까지 세웠다. 두 차례의 호란으로 인하여 나라가 어지러웠으나, 송시열·김 육 등의 뛰어난 학자들이 나와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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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宗(1109∼1146) 고려 제17대 왕(재위 1123∼1146). 예종의 맏아들이며, 1115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예종이 죽은 뒤 나이가 어렸으나 이자겸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다. 1126년 이자겸이 궐내에 침입하여 궁실에 불을 지르자, 척준경·최사전 등으로 하여금 이자겸을 잡아 유배시켰다. 또한 묘청의 서경 천도와 금 정벌론에 찬성하여 한때 실행하려 하였으나, 김부식 등의 반대로 중지하였다. 1135년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을 서경 정토대장으로 보내어 이듬해 평정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능에 재질이 있어 음률과 서화에 능하였으며 김부식으로 하여금 「삼국사기」를 편찬케 하였다. 또한 국가 재정을 절약하여 환관을 줄이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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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宗(1515∼1545) 조선 제12대 왕(재위 1544∼1545). 중종의 맏아들로 장경 왕후의 소생이다. 1520년 세자로 책봉되고 1544년 즉위하여 이듬해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다시 설치하였다. 당시는 대윤(윤 임 일파)이 점차 득세하고자 하여 종파 싸움이 치열하였다.

인평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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麟坪大君(1622∼1658)

조선 인조의 셋째 아들. 자는 용함, 호는 송계, 본관은 전주이다. 1636년 병자호란 뒤 청의 간섭이 심해지자, 외교관의 자격으로 청에 가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는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시조도 잘 지어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에 3수가 전한다. 저서로 「송계집」 「연행록」 「산행록」 등이 있다.

인현 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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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顯王后(1667∼1701)

조선 숙종의 계비. 여양 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1681년 왕비가 되었다. 1689년 장희빈의 소생인 왕자 균(후의 경종)의 책봉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폐위 당하여 서인이 되었다. 이를 인현 왕후 폐위 사건이라고 한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 장희빈이 몰락하자 복위되었다. 예의가 바르고 정숙했으며, 인현 왕후를 주인공으로 궁녀가 쓴 소설 「인현 왕후전」이 전한다.

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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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然(1206∼1289)

고려의 고승. 속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견명이다. 자는 회연·일연, 호는 무극·목암이며 시호는 보각, 탑호는 정조로 경북 경산에서 출생하였다. 9세에 해양 무량사에서 승려가 되어 여러 곳을 다니면서 불전을 연구하였다. 고종 때 승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계속 수도에 정진하였다. 1237년 삼중 대사가 되었으며 이어 45세 때 대선사에 올랐다. 그 무렵 몽고의 침입으로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이 불타 없어지자, 현종은 새로 만들게 하였으며 낙성회의 일을 일연에게 맡겼다. 일연은 운해사에서 대장경 낙성회를 열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기도회를 열었는데, 이 때 그의 교리 설명과 열성적인 기도에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78세에 국사에 올랐으나,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 늙은 어머니를 모셨다. 그의 어머니가 죽은 후, 나라에서는 일연에게 경북 군위에다 인각사라는 절을 세워 주었다. 그는 이 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내다가 84세로 죽었다. 그는 고승이며 대학자, 대문학가로서 1백여 권이나 되는 많은 책을 지었다. 그 중 「삼국유사」만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우리 민족의 고대 설화 문학을 한데 모아 만들었으며 신화·전설·민담 등이 모두 실려 있다. 저서로 「계승잡저」 「중편조동오위」 「대장수지록」 등이 있다.

임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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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慶業(1594∼1646)

조선의 장군. 자는 영백, 호는 고송, 본관은 평택이다. 충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24년 이 괄의 난이 일어나자 안현 싸움에서 공을 세워 1등 공신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의주 부윤이 되어 청의 군사를 국경에서 막으려고 원병을 청했으나, 김자점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한산성이 포위되기에 이르렀다. 1642년 청의 군사가 금주를 포위하자, 임경업은 명과 내통하여 청에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이 사실이 탄로되어 명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청이 명의 난징을 점령하자 붙잡혔는데, 청에서는 부귀를 약속하면서 그를 달래었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으므로 가상히 여겨 옥에 가두었다. 때마침 그가 심기원의 모반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인조는 그의 무죄를 알고 석방하려 했으나 김자점의 모함으로 피살되고 말았다. 그는 명나라를 받드는 사상이 강한 장군이었으며,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소설 「임경업전」이 있다.

임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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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巨正(?∼1562)

조선 중기의 의적. 임거정이라고도 하며, 양주의 백정으로 꾀가 많고 담대하였다. 당쟁으로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고 사회의 질서가 어지러워지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모아 우두머리가 되었다. 1559년 명종 때부터 수년간 황해도·경기도 일대의 관청을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가난한 백성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장연·풍천 등지에서 정부군의 토벌을 받았으나, 백성들의 도움으로 무사하였다. 그 후 1562년, 황해도 토포사 남치근의 대규모 토벌 작전으로 월산에서 싸우다가 잡혀 사망하였다.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역사소설이 있으며 「명종실록」에는 임거질정이라 씌어 있다.

임권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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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權澤(1934~ )

전남 장성 출생. 전남 광주 숭일고등학교 졸업.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 그 밖의 작품으로 「전쟁과 노인」 「증언」 「왕십리」 「서편제」 등이 있다. 1974년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증인」), 1976년도 한국 연극영화예술상 감독상(「왕십리」) 등을 수상했으며 86년 제22회 시카고국제영화제에서 「길소뜸」으로 게츠 세계 평화메달상 수상. 제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와 제16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강수연이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임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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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芳蔚(1904∼1961)

명창. 전남 광산 출생. 14세 때 「춘향가」를 배웠다. 그 후 유성준으로부터 「수궁가」 「적벽가」 등을 배웠으며 천부적으로 타고난 아름다운 목소리와 노력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방송에 출연하는 한편, 컬럼비아·빅타 레코드 회사의 전속으로 있으면서 「춘향전」 「심청전」 등의 전집을 제작하였다. 그는 편곡을 비롯하여 작곡에도 재주가 있었으며, 「호남가」 「사별가」에 특히 뛰어났다. 1960년 국악상을 받았다.

임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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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士洪(?∼1506)

조선 연산군 때의 세도가. 본관은 풍천이고 좌찬성 임원준의 아들이다. 그의 아들 임광재는 예종의 딸 현숙 공주의 남편으로 풍천위가 되고, 숭재는 성종의 딸 휘숙 옹주에게 장가들어 풍원위가 되었다. 따라서 임사홍은 1498년 무오사화 이후 권세를 독점하고 있던 유자광과 어깨를 겨루었으며, 사재 감정·도승지 등을 지내고, 또 한문과 중국 말에 능하여 관압사·선위사 등으로 명에 다녀오고 승문원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벼슬에 올라 있는 동안 자주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며 유자광 등과 같이 극형을 당하게 되었으나 왕의 특사로 귀양 정도로 그친 일이 수차례 있었다.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과 모의하여 옛 중신들의 제거를 꾀하여 연산군의 생모 윤비가 죽은 내막을 밀고하여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때 피살되었고, 반정 후 아버지 임원준도 처형되었다.

임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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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尙沃(1779∼1855)

조선의 무역 상인. 자는 경약, 호는 가포, 본관은 전주이다. 정조 때부터 상업에 종사하여, 1810년 순조 때에는 국경 지방에서 인삼의 무역권을 독점하였다. 이 때부터 천재적인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1821년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청에 갔을 때,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 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로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그동안 기민 구제 등의 자선사업으로 천거를 받아 1832년 곽산 군수가 되고, 1834년 의주 수재민을 구제한 공으로 이듬해 구성 부사에 발탁되었으나 비변사의 반대로 물러났다. 이후 빈민 구제와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다. 시로서도 이름이 높았으며, 저서로 「가포집」 「숙중일기」 등이 있다.

임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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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聖九

신극 초창기의 연극인. 이인직의 뒤를 이어 1911년 극단 '혁신단'을 조직하였으며, 김도산·김소랑·박창한 등의 배우를 이끌고 최초의 지방 공연을 가졌다. 남자를 여역(女役)에 대신하였으며 「법지법」 「육혈포 강도」 등의 신파극을 상연하는 등, 1921년 혁신단이 해산될 때까지 연극 운동에 전력하였다.

임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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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聖男(1929~2002)

무용가. 서울 출생. 전주 사범학교 졸업. 니혼 음악학교를 거쳐 오랫동안 일본에서 무용생활을 하다 1951년 '도쿄청년발레단'을 창립, 「백조의 호수」에 왕자역으로 주연했다. 1956년도에 귀국, '임성남발레단'을 창단하여 12회에 걸친 개인 발표회를 개최했고, 5·16 군사정변 이후 국립무용단 단장직을 맡은 후 국립무용단 정기 공연 제6회를 공연한 바 있다. 「살자기 옵서예」에서 안무의 연출을 지도하여 절찬을 받았다. 1968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도미, 2년동안 모던발레를 연구했고, 그 후 서울 예술고등학교 무용과 과장, 무용협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예불(禮佛)」 「오줌싸개의 향연」 등이 있다.

임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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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衍(?∼1271)

고려 중기의 권신. 본관은 진주이며 몽고의 군사를 쳐서 이름을 떨쳤다. 낭장으로 김 준과 함께 최 의를 죽이고 정치를 왕실에 복귀시켜, 그 공으로 위사공신의 호를 받고 추밀원 부사가 되었다. 그 후 김 준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그는 안경공 창을 왕으로 내세웠다가 수개월 만에 몽고의 간섭으로 폐위시켰으며, 이에 몽고에서는 그의 죄를 물으려 불렀으나 가지 않고 아들만 보냈다. 다시 몽고에서 입조를 재촉하자 울분으로 병이 나 죽었다. 죽은 후 참지 정사에 추증되었다.

임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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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永信(1899∼1977)

교육가·정치가.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미국 사우스 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45년 국민당 여자 당수가 되고, 1948년 초대 상공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49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1950년 2대 민의원으로 UN 한국 대표가 되었다. 1961년 대한 여자 청년단장을 지냈다. 1957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1965년 중앙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동년 미국 롱 아일랜드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대한 교육 연합회 회장을 10년간 역임하였다.

임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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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禮煥(1865∼1949)

독립 운동가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연암이며 평남 중화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동학에 들어가 1894년 동학혁명에 참가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2년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민족운동에 노력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임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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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玉仁(1915~ ) 소설가. 함북 길주 출생. 일본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 졸업. 1940년 「문장」에 「봉선화」 「고영(孤影)」 「후처기(後妻記)」로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한 뒤 이어 「전처기(前妻記)」 「산(産)」 등을 발표했고, 해방 후 가정여학교를 창설, 농촌여성 계몽운동에 투신했다. 월남 후 「부인신보」 「부인경향」 편집장을 지내면서 단편 「수원(愁怨)」 「풍선기(風船記)」 「나그네」 「낙과(落果)」 등을 발표했다. 그 후 「그리운 지대(地帶)」 「월남전후」 「일상의 모험」 「힘의 서정」 등의 장편을 발표했으며, 창작집 「후처기」를 간행했다. 1957년 「월남전후」로 자유문학상을, 이후 예술원상, 여류문인상 등을 수상했다.

임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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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完

고려 인종 때의 명신. 본래 송나라 사람으로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원외랑에 이르렀다. 이때에 인종이 서적소를 설치하자 김부식 등과 함께 고문이 되었다. 1135년 국자사업 지제고로 있을 때, 왕에게 묘청이 상하를 현혹시키고 서경에 태화궁을 세우려고 백성들을 괴롭히니 처형해야 한다고 극간하였다.

임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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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仁洙(1919∼1967)

아동문학가·시인.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하였으며, 한국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44년 「봄바람」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동시와 동화를 계속 발표하였다. 그는 기독교적 선의의 바탕에서 허무의 극복을 시도하였다. 작품으로 동화 「눈이 큰 아이」와 시집 「주의 곁에서」 등이 있다.

임정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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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政太子

백제의 마지막 태자. 660년 백제가 망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오우치의 좌경 대부가 되었다. 지금의 규슈 후쿠오카 현에 도읍을 정하여 오우치노도조라 칭하고, 그 후예가 47대를 이어 내려갔다고 한다. 백제 제명왕의 셋째 아들로 '육신여래'를 기원하던 중 '법명여래'의 화신이라는 쇼토쿠 태자를 만나 다타라라는 성을 받고 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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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悌(1549∼1587)

조선의 문신. 자는 자순, 호는 백호, 본관은 나주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으나, 선비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다투는 것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여생을 보냈다. 문장과 시에 뛰어난 천재였다. 우리나라가 중국의 속국과 같은 형태로 있는 것을 못마땅히 여겨 죽은 뒤 곡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저서로 「백호집」 「사화가」 등이 있다.

임 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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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椿

고려 인종 때의 문신. 자는 기지, 서하 사람으로 예천 임씨의 시조이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했고, 1170년 정중부의 난 때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며, 이규보·오세재 등과 함께 '강좌 7현'의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문과 당시(唐詩)에 뛰어났으며, 그의 시문은 「삼한시귀감」에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 설화집 「서하 선생전」 「공유전」 등이 있다.

임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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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海君(1574∼1609)

선조의 맏아들(서자). 이름은 진, 성품이 사나워서 세자에 책봉되지 못하고 아우인 광해군(서자)이 세자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함경도로 피란갔다가 가토에게 포로가 되었다 석방되었다. 1609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 이이첨·정인홍 등의 모함을 받아 영창 대군·김제남 등과 함께 역모죄로 몰려 살해되었다.

임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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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和(1908~1953)

시인·비평가·문학사가. 서울 출생. 보성고보를 중퇴하고 다다풍의 습작시기를 거쳐 1920년대부터 프로문학에 참가하여 문단 활동을 전개했다. 1931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카프의 서기장에 취임, 프로문학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1935년 카프 해산 이후에는 순문학 쪽으로 기울어져 시집 「현해탄」(1938), 비평집 「문학의 윤리」(1940), 「조선문학사」를 집필했다. 또한 이 무렵부터 출판사 「학예사」를 경영하면서 영화에도 관계하고, 친일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에 가담하기도 했다. 광복 후 조선문학건설본부(朝鮮文學建設本部)를 만들어 서기장을 지내고 조선문학가동맹에 참가, 남로당 노선의 문학운동을 전개했다. 1947년 4월경 월북하여 북한에서 문화선정성부장, 조·소문화협회부위원장을 역임하고 6·25 때 종군하다가 1953년 8월 '미제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사형당했다. 시집으로 「현해탄」 이외에 공동시화집 「카프 시인집」 「찬가」 「회상시집(回想詩集)」이 있으며, 그 밖에 평론 「조선신문학사론서설」 「개설조선신문학사」 「신문학상의 방법론」 등이 있다.

자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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慈悲王(?~479)

신라의 제20대 왕(재위 458~479). 자비 마립간이라고도 한다. 눌지왕의 맏아들이다. 459년 쳐들어온 왜구의 군선 100여 척을 월성에서 격퇴하였으며, 463년 다시 삽량성에 침입한 왜구를 벌지·덕지 등을 시켜 격파하였다. 이어 그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많은 성을 쌓았다. 474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자 백제와 동맹을 맺고 군대를 보내 주었다.

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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慈藏

신라 중기의 승려. 성은 김씨로 진골 출신이다. 부모를 일찍 여의자, 처자를 버리고 원녕사를 지어 도를 닦았다. 이때 선덕 여왕이 대보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636년 왕명으로 제자 승실 등 10여 명과 당의 오대산에 가서 불도를 닦고는, 643년 장경 1부와 불구를 가지고 돌아왔다. 분황사 주지로 있으면서 궁중과 황룡사에서 대승론·보살계본 등을 강론하였다. 그 후 대국통이 되어 승려의 규범과 승통의 일체를 주관하였다. 또한 황룡사 9층 탑의 창건을 건의하여 645년에 완성하였으며, 통도사와 금강계단을 세웠다. 전국 각처에 10여 개의 사탑을 세웠고,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관복을 입게 하였다. 이어 650년 진덕 여왕 때 당의 연호 사용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만년에는 강릉군에 수다사를 짓고, 후에 태백산에 석남원(정암사)을 세워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 「아미타경의기」 「출관행법」 「제경계소」 등이 있다.

장경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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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經世(1547~1615)

조선의 문신. 자는 겸선, 호는 사촌, 본관은 흥덕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모를 모시기 위해 금구 군수를 자원하여 내려갔다. 그러나 재직중 실정의 책임으로 파면당했다. 일찍이 이 황의 「도산 십이곡」을 모방하여 충군 애국 성심을 읊은 「강호 연군가」 12곡을 지었다.

장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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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基榮(1917~1977)

언론인·체육인·정치가. 호는 백상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 잠시 은행에도 근무한 적이 있으나, 1952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언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어 1954년 코리아 타임스·한국일보를 창간하여 발행인 겸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58년 이후에는 한국 일간 신문 발행인 협회 이사장·서울경제신문 사장·부총리 겸 경제 기획원 장관·대한 체육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1년 민주공화당 제1지구당 위원장, 1972년 남북 조절위원회 부위원장,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남북 조절위원회 서울측 공동 위원장 대리로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된 수차의 본회담에 참석하였다. 국민 훈장 무궁화장·청조근정 훈장·1등 수교 훈장 등을 받았고 1970년 중화민국으로부터 일급 문화훈장 최고 체육장을 받았다.

장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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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德秀(1895~1947)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설산이며 황해도 재령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1918년 신익희와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국내 애국지사들과 연락을 취하러 국내에 잠입했다가 검거되었다. 이듬해 여운형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여 독립의 타당성을 역설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의 초대 주간이 되어 언론을 통한 민족정신 고취에 전력하였다. 1928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으며, 1936년 동아일보사 부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 송진우·김병로 등과 한국 민주당을 창당하여 민주 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좌익 분자인 종로서 경사 박광옥과 배희범에게 암살당하였다.

장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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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德祚(1914~ )

여류 소설가. 경북 경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중퇴하고 1934년 「개벽」지의 여기자로 입사하여 창작 활동에 전념하였다. 평화신문·영남일보 기자를 거쳐 대구 매일신문의 문화부장과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여류 문인 중 제일 먼저 장편소설과 역사소설을 집필하는 등 정력적인 다작의 작가이다. 1972년 초대 통일 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약혼」 「처」 「여자의 마음」 「낙화암」 등이 있다.

장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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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晩(1566~1629)

조선의 문신. 자는 호고, 호는 낙서, 본관은 인동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균관·승문원·예조좌랑 등을 지냈으며, 1599년 봉산군수가 되었다. 1622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대책을 건의했으나, 오히려 광해군의 분노를 사게 되자 병을 핑계로 고향에 은둔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팔도 도원수로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이 괄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이를 진압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1627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났으나 적을 막지 못한 죄로 부여로 유배되었다. 죽은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무와 재략을 갖춘 무장이었으며 많은 부하를 통솔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저서로 「낙서집」이 있다.

장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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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勉(1899~1966)

정치가. 호는 운석, 본관은 인동이며 인천에서 출생하였다.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YMCA 영어학교를 나온 후 미국에 건너가서 맨해튼 카톨릭 대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교회 일을 보다가, 193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이 되었다. 광복 후 정계에 들어가 민주의원 의원·과도 정부 입법 의원 등을 역임하였고, 1948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 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 한국 수석 대표로 참가하여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승인받았다. 이어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하였으며 미국 맨해튼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 대사로 부임했으며, 이듬해 영국 포덤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6·25전쟁 때는 주미 대사로서 유엔의 지원을 얻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퇴하고 야당 지도자로서 자유당 독재 정권과의 투쟁을 위해 활약하였다. 1955년 신익희 등과 민주당을 조직하여 최고 위원이 되었으며 이듬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년 조병옥과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했다가 낙선되었으나,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제5대 민의원을 거쳐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어 정권을 잡았다. 집권 후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는 정책이 오히려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여, 5·16 군사정변으로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그 후 정치 정화법에 묶여 정치 활동을 금지당하고, 한때 2주당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석방된 후 종교 생활에 전념하다가 간염으로 죽었다. 저서로 번역 작품인 「교부들의 신앙」이 있다.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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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保皐(?~846)

신라 말기의 장군. 궁복·궁파라고도 한다. 일찍이 당나라 서주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에 올랐으나, 중국 해적들에게 잡혀와 노비가 된 신라인들을 보고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국하였다. 해적들의 인신매매 행위를 막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해로의 요충지인 청해(완도)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청해진 대사로 임명된 후 수병들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히 소탕하였다. 837년 희강왕 때 왕위 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후의 신무왕)이 청해진으로 오자, 그와 함께 839년 반란을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을 왕으로 즉위시켰다. 신무왕이 죽은 후 문성왕에 의해 진해 장군이 되어 840년 일본에 최초로 무역사절단을 파견하고 당에도 견당매물사를 보내어 삼각 무역을 실시하였다. 845년 딸을 왕비로 들여보내려 했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어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이듬해 왕이 보낸 장군 염장의 거짓 항복에 속아 살해되었다.

장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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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壽王(394~491)

고구려의 제20대 왕(재위 413~491). 광개토왕의 아들이며, 408년 태자에 책봉되었다. 413년 즉위하여 중국의 진·송·위 등과 사신을 교환하여 국교를 맺었고, 427년 도읍을 평양으로 옮겨 남하정책에 착수하였다. 435년 위가 연을 멸망시키자 고구려에 피해 온 연의 왕 풍홍을 위의 요청으로 죽였다. 475년 승려 도림을 백제에 첩자로 보내어 국고와 백성의 힘을 소모시킨 후,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빼앗았으며 개로왕을 죽여 선대의 원한을 풀었다. 480년 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변을 쳐 고명성 등 7성을 점령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점점 확장되어 남쪽은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하에서 만주의 대부분을 포함한 큰 나라를 건설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종전의 부족제도를 지방제도로 고쳐 5부를 개설하는 등 민정에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재위 79년, 나이 99세로 고구려에서 가장 장수한 왕 중의 한 사람이다.

장승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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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承業(1843~1897)

조선의 화가. 자는 경유, 호는 오원, 본관은 대원이다. 도화서의 화원으로 벼슬은 감찰에 이르렀다. 조선 초기의 안 견, 후기의 김홍도와 아울러 조선 화단의 '3대 거장'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남의 집 심부름꾼으로 있을 때, 그림 공부를 하는 주인집 자제들의 어깨너머로 배워 천재적인 소질로 순식간에 대성하였다. 술을 즐기고 평생 독신생활을 하였으며, 마음에 맞지 않으면 왕명일지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한다. 당시 수많은 화가 중에서도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후세 화가들에게 미친 영향도 대단히 크다. 작품으로 「귀거래도」 「담채산수」 「풍림 산수도」 「어옹도」 등이 있다.

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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蔣英實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 본관은 아산이며 부산 동래의 관노 출신이었다. 모든 일에 과학적인 재능을 나타내어 제련·축성·농기구·무기 등의 수리와 개량에 뛰어났으며, 1423년 세종의 특명으로 상의원 별좌가 되면서 노예의 신분을 벗어났다. 1432년 이 천을 도와 천문 관측대인 간의대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의의 제작을 감독하였다. 1433년 혼천의 제작에 착수하여 1년 만에 완성하였으며, 이듬해 동활자인 경자자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의 주조를 지휘 감독하였다. 또한 김 빈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제작, 완성하였다. 1437년 제작 착수 5년 만에 천체 관측용 대·소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귀와 천평일귀, 해시계인 정남일귀, 공중시계인 앙부일귀 등을 만들었다. 이듬해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의 옥루를 제작 완료하고 경상도 채방 별감이 되어 구리·철의 채광과 제련을 감독하였다.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하였다. 그 공으로 상호군에 임명되었으나, 1442년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왕의 가마가 부서진 책임을 지고 의금부에 투옥되어 장형을 받은 후에 파면당하였다.

장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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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龍鶴(1921~1999) 소설가. 함북 부령 출생. 1944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 경기 고교 교사. 61년 덕성여대 조교수, 62~67년 「경향신문」 논설위원·「동아일보」 논설위원 등을 지낸 지적 작가이다. 1950년 단편 「지동설(地動說)」이 「문예」지에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상징과 우화, 그리고 순수한 관념 세계를 설정, 유동적 문체로 그린 것이 특징이다. 대표작으로 「지동설」 「요한 시집」, 중편 「비인 탄생」 「현대의 야(野)」, 장편에 「원형(圓形)의 전설」(1962) 「태양의 아들」 등이 있다.

장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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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仁煥(1877~1930)

항일 의사.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민비 시해 사건을 계기로 군운이 급속히 쇠퇴함을 보고 새 문명을 배워 나라의 힘을 기르고자 미국에 유학하였다. 1908년 한국 정부의 외교고문이며 일본의 한국 침략을 지지하는 친일주의자인 미국인 스티븐스가 미국에 돌아오자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스티븐스가 일본 영사와 함께 오클랜드 역에 내리자, 한국 청년 전명운이 그보다 먼저 스티븐스를 쇠뭉치로 구타하는 것을 보고 이어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사건 현장에서 체포되어 25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애국심과 예의바른 품행으로 10년 만에 특사로 풀려나왔다. 1927년 조만식 등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가 그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장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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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在奉(1896~1966)

민속 예술인. 경남 충무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 형으로부터 '오광대 탈춤'을 배웠다. 그 후 1945년 통영 오광대를 부활시키고 이를 보존하여, 1964년 눌원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그 해 12월 오광대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자, 제1급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었다. 이 밖에도 문둥탈·말뚝이·비비 양반 등에 특기가 있었다.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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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俊河(1915~1975)

언론인·정치가.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일본 도요 대학 예과를 거쳐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 주석 비서로 활약하였으며, 「사상계」 사장을 지냈다. 1962년 막사이사이 언론상을 수상했고, 1967년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71년 신민당 탈당으로 의원 자격을 상실하였다. 그 후 1975년 등산중 의문의 실족사를 하였다. 저서로 「돌 베개」가 있다.

장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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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志淵(1864~1921)

언론인·애국지사. 자는 순소, 호는 위암, 본관은 옥산이다. 1894년 고종 때 진사가 되어 내부랑·통정 등을 지냈으나, 1898년 관직을 버리고 남궁 억·유 근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였다. 그 후 이상재·이승만 등과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했으며, 1902년 황성신문 사장이 되어 민중계몽과 독립정신 고취를 위해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 11월 20일자에 '시일야 방성 대곡'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게재하여 일본의 흉계를 폭로하고 을사 5적신을 규탄하였다. 이로 인하여 황성신문의 간행이 중지되었으며 그는 3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1906년 윤효정·나수연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일본의 압력이 심해지자,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진주에서 「경남일보」를 창간하고 주필로 있으면서 계속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는 황 현의 시를 경남일보에 실음으로써 간행이 정지되었다. 그 후 마산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유교연원」 「대한 최근사」 「대동기년」 등이 있다.

장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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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澤相(1893∼1969)

정치가. 호는 창랑이며 경북 칠곡에서 태어났다. 영국 애든버러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청구회 회장을 지냈다. 광복 후 수도 경찰청장·제1관구 경찰청장에 취임하여, 좌익 세력 제거와 치안 유지에 힘썼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외무부 장관에 취임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 민의원 부의장이 되었다. 제5·6차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고, 1952년 국무총리로 기용되었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반공 투쟁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재야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병으로 사망,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장헌 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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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세자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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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禧嬪(?∼1701)

숙종의 빈. 숙종이 오래도록 아들이 없자 궁녀이던 그를 가까이하여 1688년 왕자 균(후의 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장소의에서 희빈으로 봉해졌다. 1694년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인현 왕후를 폐위시키고 대신 정비(正妃)가 되었으나, 같은 해 갑술옥사 후 강등되었다가 무당과 함께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차려 놓고 인현 왕후를 저주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숙종 이후 빈이 비로 승격되는 일이 없도록 법을 만들었다.

전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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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光鏞(1919∼1988)

소설가·국문학자. 호는 백사이며 함남 북청에서 출생하였다. 193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별나라 공주와 토끼」가 당선된 후 문학 수업을 시작하였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국문과에 입학한 후 「시탑」 「주막」의 동인으로 문학활동을 하였다.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흑산도」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는 사실적 필치의 바탕 위에서 한국적 상황을 추구하는 작가로 1966년 서울대학교 교수를 거쳐, 1972년 문리대 문학부장이 되었다. 사상계 논문상·동인 문학상 등을 받았으며, 1973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단편집 「흑산도」 「꺼삐딴리」 「나신」과 장편 「창과 벽」 「태백산맥」 등이 있다.

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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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琦(1825∼1854)

조선의 화가. 자는 기옥, 호는 고람이며 본관은 개성이다. 산수화를 잘 그렸고 시도 잘 썼다. 그림은 송·원의 남종파의 화풍을 계승하였다. 그림으로 「자문 월색도」와 「매화 서옥도」 「매화도」 등이 있다.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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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斗煥(1931∼

)

군인·정치가·제11·12대 대통령. 경남 합천에서 출생하였으며, 1955년 육군 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였다. 그 후 미국 특수전학교와 보병학교에 유학하고 돌아와, 1961년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 비서관을 지냈다. 1970년 백마부대 연대장으로 월남전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공수특전단 단장·1978년 제1사단장 등을 거쳐 이듬해 국군 보안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979년 10·26사태를 합동 수사 본부장으로서 수습하고 이듬해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 상임 위원장이 되어 제5공화국의 기틀을 잡았다. 1980년 8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으며, 같은 달 27일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1981년 2월 25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8년 2월까지 재임하였다. 퇴임 후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문제로 책임 추궁을 당하다가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비자금 사건과 관련 1996년 구속 수감되었가 1997년 12월 사면 복권되었다.

전명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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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明雲(1884∼?)

항일 애국지사. 평안도에서 출생하였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 건너갔다가, 1905년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이듬해 미국에 건너가 알래스카 어장의 노무자 등으로 일하다가 애국 단체인 '공립협회' 회원이 되었다. 1908년 한국 정부 외교 고문인 친일파 스티븐스를 살해할 것을 결심하였다. 마침 스티븐스가 워싱턴에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영사와 오클랜드 역에 내리는 기회를 이용하여 쇠뭉치로 얼굴을 강타하고 격투를 벌였다. 이때 스티븐스를 살해하기 위해 온 장인환의 유탄에 맞아 부상당하였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전봉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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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鳳鍵(1928~1988)

시인. 평남 안주 출생. 평양 숭인상고 졸업. 1950년에 「원(願)」 「사월(四月)」 「축도(祝禱)」 등으로 「문예」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후 시 「어느 토요일」 「0157584」 「또 하나의 차폐물과 탄피」 「강물이 흐르는 너의 곁에서」 「강하」 「은하를 주제로 한 바라아시옹」 등을 발표했다. 이후 시집 「춘향연가(春香戀歌)」 「속의 바다」 「돌」 등을 간행, 현대시로서 한국적이며 고전적인 작품을 현대화하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한편 극작에도 관심을 기울여, 시극 「꽃소라」 「모래와 산소」 등을 발표했다. 제3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전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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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琫準(1854∼1895)

동학혁명의 지도자. 별명은 녹두 장군이며 전북 태인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전창혁이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두게 되었다. 30세 때 동학에 들어가 고부 접주가 되어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은거 중인 대원군과도 접촉하여 국정 개혁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892년 조병갑이 고부 군수로 부임하여 갖은 탐학을 자행하자, 1894년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하여 양곡을 풀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부패한 관리를 잡아 가두었다. 이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조병갑 등을 처벌하고 대신 이용태를 안핵사로 보내어 선정을 베풀 것을 약속하자 농민들은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용태 역시 농민들의 재산을 빼앗는 등 횡포가 심해, 전봉준은 그 해 다시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하여 고부의 백산을 본거지로 삼고 부대를 편성하였다. 그러고는 동도 대장이 되어 척왜·척양·부패한 지배계급의 타파 등 4대 강령을 내세우고 부안·정읍·고창·무장·전주 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의 군사가 오고, 동시에 톈진 조약을 핑계로 일본군도 입국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탐관의 응징·시정의 개혁·노비의 해방 등 12개 조목의 실천을 약속받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시정 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다시 궐기를 계획하던 중 청·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군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재궐기하여 12만 명의 군사를 지휘하면서 북쪽 교구장인 손병희의 10만 군사와 힘을 합쳐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다. 동학군은 한때 중부·남부의 모든 지역과 함경도·평안남도까지 세력을 뻗쳤으나, 금구 전투에서 조직적이며, 무기까지 갖춘 일본군에게 패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순창으로 도망쳐 재기를 꾀하다가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 등 지방민의 급습으로 피로리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1895년 사형당하였다.

전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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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淑禧(1919~ ) 수필가. 함남 협곡 출생. 이화여전 문과 졸업. 1938년 단편소설 「시골로 가는 노파」를 「여성(女聲)」에 발표하여 창작활동을 시작했으며, 1954년 수필집 「탕자의 변」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수필활동에 전념했다. 수필의 특징은 다정다한(多情多恨)한 여성심리를 조촐한 필치로 표현하는 데 있다. 주요 수필집으로 「이국(異國)의 정서(情緖)」 「탕자의 변」 「나직한 말소리로」 「영혼의 뜨락에 내리는 비」 「가진 것은 없어도」 등이 있다. 현재 동서문학 대표이며 예술원 학원이다.

전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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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榮澤(1894~1968)

소설가. 호는 늘봄이며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평양 대성중학을 거쳐 일본 아오야마 학원 문학부와 신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 태평양 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18년 김동인·주요한과 함께 우리 나라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를 창간하였으며, 1935년 기독교 잡지 「새 사람」을 발행하였다. 그는 근대 문학 초기의 작가로 리얼하면서도 심리적으로도 따뜻한 인정을 보여주었다. 광복 후 조선 민주당·문교부 편수국장 등을 지냈으며 중앙신학교·감리교 신학교 교수·국립 맹아학교 교장·기독신문 주간·「신생명」지 주필·기독교 문학인 클럽 회장을 지냈다. 1961년 한국 문인협회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문화 포상 대통령상을 받았다. 작품으로 단편 「화수분」 「소」와 장편 「청춘곡」 등이 있으며, 저서로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 「어머니가 그리워」 「의의 태양」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논설집·수필집 등이 있다.

전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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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用先(1888~1965)

국악사. 호는 추산이며 전북 고부에서 출생하였다. 서숙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20세 때부터 단소를 익히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정악(正樂)에 통달하였으며, 후에 '단소 산조 주법'을 창안하였다. 1963년 국립 국악원이 제정한 국악상을 받았다.

전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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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澤鳧(1915~ )

종교인. 함경남도 문천 출생. 1941년 일본 신학교를 중퇴하였다. 52년 월간 잡지 「새벗」,

54년 「사상계」의 주간으로 일했으며 57년부터 20여 년간 서울 기독교 청년회에서 총무 등 여러 중요 직책을 맡았다. 이 밖에 한글 전용, 국어순화 운동, 교남 소망의 집, 정립회관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장애인을 위한 사회운동, 방송심의위원, 지역감정해소 국민운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활동을 하였다. 저서에 「월남 이상재」 「한국 기독교 청년회 운동사」 「한글 성서와 겨레 문화」, 수필집으로 「강아지의 항변」 「무슨 재미로 사나」 「세상은 달라진다」 「이 땅에 묻히리라」 「달을 쏘는 아이」 등이 있다. 현재 교남재단이사장으로 있다.

전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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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鎣弼(1906~1962)

문화재 수집가·교육가. 호는 간송,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휘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9년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오세창의 지도로 문화재 수집과 육영사업에 뜻을 두었다. 한림서원을 경영하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재가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았다. 1940년 보성고등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였으며 광복 후 보성중학교 교장이 되었다. 1954년 문화재 보호위원이 되었으며, 그의 국보 15점을 포함한 수집품은 개인 박물관인 성북동에 있는 보화각에 보존하였다. 1956년 교육 공로자 표창을 받았다.

전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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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惠麟(1934~1965)

여류 수필가·번역 문학가. 평남 순천에서 태어나 경기여중고를 거쳐 서울법대 재학중 독일에 유학하여 뮌헨 대학 독문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서울법대·이화여대·성균관대 강사를 역임하였다. 1956년부터 F.사강 원작 소설인 「어떤 미소」를 비롯하여 E.시나벨의 「한 소녀가 걸어온 길」,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E.케스트러의 「파비안」, L.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W.막시모후의 「그래도 인간은 산다」, H.노바크의 「태양병」 등을 계속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그 밖에 사후에 출판된 작품도 있으며, 반짝이는 재능과 인생을 자살로 마감하였다.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괴로움은 또다시」가 있다.

정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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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京和(1948~ )

바이올린 연주자. 서울 출생. 섬세하면서도 개성이 강한 연주로 전세계 음악 애호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67년 미국 줄리어드 음악원 졸업. 1966년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에서 2등으로 입상, 1968년 리벤트리트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그 후 세계의 유명한 관현악단과 협연했으며, 1992년에는 정명훈과 함께 최초로 국제연합 마약퇴치기구 친선대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정명화·정명훈과 함께 음악가족으로서 유명하다.

정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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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逑(1543~1620)

조선의 문신. 자는 도가, 호는 한강, 본관은 청주이다. 조 식·이 황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1580년 선조 때 창녕 현감으로 부임하여, 좋은 정치를 베풀어 그곳 백성들이 그의 사당을 세웠다. 그 후 충주 목사 등을 거쳐 광해군 때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라는 상소를 올린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백매원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다. 경학을 비롯하여 산수·병진·의약·풍수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특히 예학에 뛰어나 예학에 관한 저술이 많았다.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잘 썼다.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한강집」이 있으며, 편찬 서적으로서 「성현풍범」 「태극문변」 「고금충모」 등이 있다.

정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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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克仁(1401~1481)

조선의 학자. 자는 가택, 호는 불우헌, 본관은 영광이다. 세종 때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문종 때 학행으로 추천을 받았다. 1453년 단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에 이르렀으나,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사퇴하고 고향인 태인으로 내려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472년 성종 때 후진 양성에 노력한 공으로 3품 고관이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 작품인 「상춘곡」을 지었으며, 죽은 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불우헌집」이 있다.

정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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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蘭宗(1433~1489)

조선의 문신·서예가. 자는 국형, 호는 허백당, 본관은 동래이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 열·이조좌랑·예조참판 등을 지냈고, 봉교로 있을 때 정자청과 함께 서얼 출신의 과거응시를 반대하였다. 1467년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이듬해 호조참판이 되었다. 1469년 「세조실록」을 편찬했으며 「예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83년 성종 때 주문 부사로 명에 다녀온 후, 우참찬을 거쳐 이조·공조·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는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글씨로 「흥천사 종명」 「윤자운 신도비」 등이 전한다.

정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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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湛(?~1592)

임진왜란 때의 의병. 자는 징경이며 평해 정씨의 시조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592년 김제 군수가 되었다.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이복남·황 박 등과 함께 웅치를 방어하였다. 이 때 금산을 거쳐 전주를 점령하려는 왜군을 웅치에서 끝가지 방어하다가 다른 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왜군이 그의 충절에 경의를 표하여 '조(弔) 조선국 충간의담'이라는 묘비를 세워 주었다. 그 후 숙종 때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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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道傳(?~1398)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학자. 자는 종지, 호는 삼봉, 본관은 봉화이다. 이 색의 문인으로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 박사에 이르렀다. 1375년 예문 응교·지제교 등을 역임하고, 권신인 이인임·경복흥 등의 친원 배명 정책을 반대하다 회진현에 유백되었다. 1383년 우왕 때 이성계의 참모가 되었으며, 이듬해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다. 1388년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신진 사대부 세력이 집권하게 되자, 이성계의 우익이 되어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권문세족을 조정에서 몰아내는 데 힘썼다. 또한 우왕과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추대하였다. 1391년 정당문학으로 있을 때 정몽주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 정몽주가 살해된 후 풀려나와 조 준·남 은 등과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건국 후 개국 1등 공신이 되었다. 1394년 한양 천도를 주장하여 실현하였으며, 「고려사」 37권을 편찬하였다. 1397년 동북면 도선무 순찰사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역참을 신설했으며 성균 제조가 되었다. 그는 건국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여 새 나라의 문물 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즉 한양 천도 당시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궁문의 칭호, 도성의 8대문 및 성안 48방의 이름 등을 제정하고,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을 지어 치국의 대요와 관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을 제정하였다. 몽금척·수보록·문덕곡 등 수많은 악장을 지어 태조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이 악장은 500년 간 중국에서 연주되었다. 또한 병제를 대폭 개혁하여 진법·진도를 지어 장병을 훈련시켰다. 태조의 서자인 이방석을 추대하고 정실의 왕자들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을 받고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여말 배불론자의 주동자로서 철두철미 불교의 말살을 기도하고 유교로써 문교를 통일하고자 하였다. 저서로 「삼봉집」 「경제육전」 등이 있다.

정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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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斗源(1581~?)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자는 정숙, 호는 호정, 본관은 광주이다.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623년 인조 때 성천 부사가 되었고 이듬해 정묘호란 때에는 전향사가 되어 임진강의 군량미 수송을 맡았다. 1630년 진주사로 명에 갔으며, 이듬해 귀국할 때 홍이포·천리경·자명종 등의 서양 기계와 이탈리아 신부 로드리게스로부터 「천문서」 「직방외기」 「천문도」 등을 얻어 가지고 왔다. 그 후 강원도 관찰사·지중추 부사 등을 지냈다.

정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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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明勳(1953~ )

지휘자이자 피아노 연주자. 서울 출생. 작품해석이 섬세하고 탁월하며, 피아노와 지휘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음악가이다. 미국 메니스 음대·줄리어드 음악대 졸업. 1974년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1975년 줄리어드 음대 상임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1978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관현악단의 부지휘자를 지냈다. 1984년 서독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 수석 지휘자로 활동하였으며, 1989년 프랑스 국립 바스티유 오페라단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누나 명화, 경화와 함께 뛰어난 앙상블의 정(鄭)트리오로도 유명하다. 현재 아시아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다.

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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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夢周(1337~1392)

고려의 학자·충신. 자는 달가, 호는 포은, 시호는 문충, 본관은 연일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수찬 등을 지냈다. 그 무렵 왜구의 침입이 잦았고, 안으로는 원을 섬기려는 파와 명을 섬기려는 두 파로 갈라져 싸움을 일삼는 등 나라 안팎이 매우 어수선하였다. 당시 신망이 높았던 이성계와 힘을 합하여 토지제도를 고쳤으며 '의창'이라는 제도를 마련하여 곡식을 보관했다가 위급할 때 백성들에게 풀어주었다. 1372년 성균관 사성으로 있을 때 명에 사신으로 가서 친선을 맺고 돌아왔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왕위에 오르자, 이인임 등 원을 섬기려던 파들이 정권을 잡아 경남 언양으로 유배되었다. 1377년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로 가서 그곳에 잡혀 있던 우리 나라 사람 수백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 후 1387년 명이 갑자기 철령 이북의 땅을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자, 우왕은 이듬해 최 영·이성계로 하여금 요동 반도의 공격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위화도 회군) 개성으로 돌아가 우왕과 최 영 등을 귀양 보냈다. 정몽주는 백성들이 굶주리고 도적의 무리가 날뛰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는 일에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고려를 멸망시키려는 이성계의 흉계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때에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이 정몽주를 찾아와 이성계의 편이 되어 달라는 시조를 짓고 그의 뜻을 묻자, 정몽주는 「단심가」를 지어 자신의 꿋꿋한 충성심을 표현하였다. 1392년 명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낙마하여 황주에 누워 있게 되자, 그 기회를 이용하여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이 이성계를 그날 밤으로 개성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어 이성계의 태도를 살필 목적으로 부상당한 이성계의 문병을 가장하여 그의 집으로 향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가 죽은 자리에는 뒷날 그의 고결한 절개를 상징하듯 대나무의 싹이 돋아 자랐으며, 그의 피가 떨어진 선죽교의 돌다리에는 붉은 피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는 충신일 뿐 아니라 뛰어난 학자였는데, 이 색·길 재와 함께 '고려의 3은'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 후 태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익양 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저서로 「포은집」이 있다.

정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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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文孚(1565~1624)

조선의 문신. 자는 자허, 호는 농포, 본관은 해주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북평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회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섬멸하였으며, 그 공으로 영흥 부사·길주 목사가 되었다. 1624년 인조 때 초회왕에 대해 지은 시가 이 괄의 난에 관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농포집」이 있다.

정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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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撥(1533~1592)

조선의 장군. 자는 자고, 호는 백운, 본관은 경주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592년 부산진 첨절제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성을 지키려다 장렬하게 죽었다. 늘 검은 옷을 입었으므로 '흑의장군'이라고 하였다. 죽은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정배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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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倍傑

고려 문종 때의 학자. 초계 정씨의 시조이다. 1017년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상서·중추원 부사에 이르렀다. 글방을 열어 제자들을 가르쳐 '홍문공도'라고 불리었는데, 이것은 당시 사학 12도 중의 하나였다.

정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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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飛石(1911~1991)

소설가. 본명은 서죽으로 평북 의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니혼 대학 문과를 중퇴하였다.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성황당」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 초기에는 자연 친화적이면서도 청신한 정감을 바탕으로 한 소설로 주목을 끌었는데, 후기에는 대중 소설로 방향을 바꾸어 정력적으로 작품을 양산하였다. 매일신문·중앙일보 등의 문화부장을 지냈고 1961년 펜클럽 한국 본부 부위원장, 1965년 방송 윤리위원, 1971년 라이온스 클럽 회장 등을 지냈다. 대표작으로 단편 「제신제」 「사랑하는 사람들」 「꽃 모습」 등과 장편 「장미의 계절」 「애정무한」 「자유부인」 「손자병법」 등이 있다.

정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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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尙驥(1678~1752)

조선의 학자. 자는 여일, 호는 농포자, 본관은 하동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고 몸이 약하여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중년 이후 저작에 힘썼는데, 정치·경제·국방·병술·의약·기계·농경 등 전반에 걸쳐 많은 연구를 하였다. 특히 지도 제작에 있어 백리척(百里尺)의 축척법을 쓴 것은 우리나라 지도 제작에 대한 과학적인 큰 공헌이었다. 이 익의 4대 제자의 한 사람이며, 실학파 지리학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저서로 「인자비감」 「농포문답」 「향거요람」 등이 있다.

정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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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敍

고려 인종 때의 문인. 호는 과정, 본관은 동래이다. 조상의 덕으로 내시 낭중을 지냈다. 인종의 왕비인 공예 대후의 여동생이 바로 그의 아내로서 인종의 사랑을 받았다. 1151년 의종 때 정 함·김존중 등의 모함으로 동래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연군의 정을 읊은 「정과정곡」을 지어 유명하다. 1170년 명종 때 죄가 풀리어 다시 등용되었다.

정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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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6~1759)

조선의 화가. 자는 원백, 호는 겸재,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김창집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고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중국의 남화풍에서 출발하였으나, 30세를 전후하여 한국 산수화의 독자적인 특징을 살린 산수 사생의 진경화로 바뀌었다. 여행을 즐겨 금강산 등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심사정·조영석과 함께 '3재'라고 불리었다. 강한 농담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로 하여 암벽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일대에 그쳤다. 문재가 없던 탓으로 다만 서명과 한두 개의 낙관만이 화폭 구석에 있을 뿐, 화제가 없는 것이 이채롭다. 저서로 「도설경해」가 있으며, 작품으로 「여산 초당도」 「금강산 만폭동도」 「내금강도」 「인왕제색도」 「장안연우도」 등이 있다.

정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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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壽銅(1808~1858)

조선의 시인. 자는 경안·하원, 호는 수동, 본관은 동래이다. 본명은 정지윤이며 태어날 때 손바닥에 '수(壽)'자가 새겨져 있어서 스스로 수동이라 이름 붙였다. 자유 분방한 성격으로 유행·풍습에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하였다. 그의 시풍은 권력이나 금력에 대한 저항 속에 날카로운 풍자와 야유로 일관하였고, 그에 얽힌 많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번거로운 문장이나 허황한 형식을 배격하고, 간결한 가운데 격조 높은 시를 썼다. 특히 술을 즐겼고 김흥근·김정희·조두순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저서로 「하원시초」가 있으며 시 작품으로 「관동상매」 「전춘시」 등이 있다.

정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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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壽榮(1743~1831)

조선의 화가. 자는 군방, 호는 지우재, 본관은 하동이다.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렸으며, 「조선 고적도보」에 그의 작품 「춘강소주도」 「금강산 분설담도」 등이 들어 있다.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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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若鏞(1762~1836)

조선의 실학자. 자는 미용, 호는 다산, 교명은 요한, 본관은 나주이다. 16세 때, 당시의 이름난 학자인 이가환·이승훈을 찾아가서 여러 가지 새로운 학문을 배웠다. 특히 이 익의 책을 읽으면서 정치와 경제를 주로 한 실학에 전념하였다. 또한 친구인 이 벽에게 서학과 천주교의 교리를 배웠다. 1789년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정조에게 「중용」을 강의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연천 현감 서용보를 파직시켰으며, 이듬해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청의 신부인 주문모 사건에 관련되어 금정도 찰방으로 쫓겨났다. 그 해 다시 왕의 부름을 받고 규장각에 있으면서 「규장전운」 「옥편」 등을 편찬하였다. 1801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신유박해가 일어나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이 곳에서 그는 다산 기슭에 있는 윤 박의 산정에서 18년 간 경서학에 전념하여 학문의 체계를 세우고 「경세유표」를 비롯하여 「목민심서」 등 1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1818년 이태순의 상소로 풀려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서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는 저술 활동을 통해서 국가의 제도를 바르게 고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 형벌에 신중히 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선비나 지방관리들이 찾아오면 「목민심서」를 주며 백성들을 잘 다스려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의 학문 체계는 사상적으로 유형원과 이 익의 주류를 계승하여 유학의 정신 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다분히 양명학적인 데로 기울어져 있었고, 이 이의 주자학적인 실천윤리와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 북학파의 사상을 흡수하여 집대성하였다. 그리고 이기론에 있어서는 이 황과 이 이의 학설을 합성하고 있다. 죽은 후 규장각 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흠흠신서」 「마과회통」 「모시강의」 「상서고훈」 「매씨서평」 「상서지원록」 등이 있다.

정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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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若銓(1758~1816)

조선의 학자·천주교 전도가. 자는 천전, 호는 일성루, 본관은 나주이다. 정약용의 둘째 형으로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1798년 왕명으로 「영남 인물고」를 편찬하였다. 남인 계통의 학자로 서학에 뜻을 두어 천주교에 입교한 후, 벼슬을 버리고 천주교 전도에만 힘썼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 「송정사의」 「자산어보」 「논어잡」 등이 있다.

정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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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若鍾(1760~1801)

조선의 학자·천주교 순교자. 정약용의 셋째 형으로 이 익의 제자이며 서학을 연구하여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권일신·이덕조 등과 신앙 실천운동에 가담하여 인습 타파와 계급 타파의 사회운동을 촉진하며 천주교 전도에 힘썼다. 이승훈 등과 모의하여 청의 신부 주문모를 맞아들여 전도에 노력하던 중, 1801년 신유박해 때 딸 정혜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며, 그도 이승훈·최필공·최창현 등과 함께 서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정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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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汝立(?~1589)

조선 선조 때의 모반자. 자는 인백, 본관은 동래이다. 성격이 사납고 잔인했으나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경사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 이·성 혼의 문하에서 총애를 받았다. 1583년 예조좌랑이 되었으며, 본래 서인이었으나 집권중인 동인에 아부하여 죽은 이 이를 배반하고 박 순·성 혼 등을 비판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갔다. 그 후 많은 선비들과 접촉하여 점차 성망이 높아지자, 진안 죽도에다 서실을 지어 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에 제한 없이 선비·불평객들을 모아 무술 훈련을 시켰다. 전주 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변경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 후 대동계를 전국으로 확대하는 한편, 이씨가 망하고 정씨 세상이 온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민심을 선동하였다. 1589년 소문이 퍼져 비밀이 누설되자 군사를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려 하였으나 미리 탄로되어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갔다. 그는 진안 죽도로 도망갔다가 관군의 포위 속에서 자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기축옥사가 일어났으며, 이후로 전라도를 반역향으로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정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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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汝昌(1450~1504)

조선의 문신. 자는 백욱, 호는 일두, 본관은 하동이다.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제자가 되어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과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490년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안음 현감을 지냈다. 1498년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로 종성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 후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관을 쪼개고 목을 벰)되었다. 그 후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용학주소」 「주객문답설」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소각되고, 지금은 정 구가 엮은 「문헌공 실기」 속에 그 유집이 전할 뿐이다.

정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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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寅普(1892~?)

사학자·시조 시인. 자는 경업, 호는 위당·담원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0년 중국에서 동양학을 전공하면서 신규식·박은식·신채호 등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과 동포들의 계몽에 힘썼다. 1918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를 비롯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고 국학·동양학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시대일보·동아일보 등의 논설위원으로 총독부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광복 후 국학대학장·초대 감찰 위원장 등을 지내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국문학·한문학·국사학 등에 대해 광범위한 연구를 하였고, 시조와 한시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조선사 연구」 「월남 이상재 선생전」 「조선 문학 원류고」 「담원 시조집」 등이 있다.

정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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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寅燮(1905~1983)

문학 평론가·영문학자. 경남 울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방정환 등과 '색동회' 발기인이 되어 동인지 「어린이」에 동시·동화를 발표하였다. 1926년 유학생인 김진섭 등과 '해외문학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31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산들바람」 「국화」 등 수십 편을 발표하였다. 1946년까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었다. 그 후 중앙대학교 교수·런던 대학교 교수·일본 덴리 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으며, 1953년 런던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6년 국제 연극협회 한국 본부 위원장, 1969년 외국어대학교 언어 연구 소장, 이듬해 국제 펜클럽 아시아 문학 번역국 회장 등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1963년 펜클럽 번역 문학상을 받았다. 저서로 「한국 문단 논고」 「세계문학 산고」 「산넘고 물건너」 「버릴 수 없는 꽃다발」 등이 있다.

정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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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寅承(1897~1986)

국어학자. 호는 건재이며 전북 장수에서 출생하였다. 1925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35년 조선어학회 이사가 되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함흥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 후 광복이 되어 석방되자 「큰사전」 편찬을 주재하였다. 1952년 전북대학교·중앙대학교 교수를 거쳐, 1966년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학술원상·건국 공로상·국민 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국어 교과서와 「중등말본」 「고등말본」 「한글문답」 등을 펴내어 국어 교육에 큰 공을 세웠다.

정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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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麟趾(1396~1478)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백휴, 호는 학역재, 본관은 하동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감찰·예조좌랑 등을 지낸 후, 세종 때 병조좌랑에 전임되었다. 그 후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로 등용되었고, 1425년 집현전 직제학에 올랐다. 1427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정 초와 함께 대통력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을 지어 역법을 개정하였다. 1440년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으며, 1442년 예문관 대제학으로 「사륜요집」을 편찬하였다. 1448년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 지방에 토지 등급을 정했으며,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 대군을 도와 우의정이 되었고 정난 공신 1등으로 하동 부원군에 봉해졌다. 1455년 세조 때에 영의정에 오르고 좌익 공신 2등이 되었으며, 1458년 불교책 간행에 반대하여 부여로 유배되었다. 그 후 풀려나와 다시 부원군이 되었다. 1468년 예종 때 남 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 공신이 되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학자로 천문·역법·아악에 관한 많은 책을 편찬하였으며, 김종서 등과 「고려사」를 편찬했다. 세종을 도와 성삼문·신숙주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컸으며 권 제·안 지 등과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저서로는 「학역재집」 「역대병요」 「역대역법」 등이 있다.

정인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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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仁弘(1535~1623)

조선의 문신. 자는 덕원, 호는 내암, 본관은 서산이다. 대북파의 영수로 선조 때에 황간 현감이 되어 좋은 정치를 베풀었다. 1581년 서인 정 철·윤두수를 탄핵하다 벼슬을 빼앗기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김 면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성주에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쳤다. 이듬해에는 성주·합천·함안 등지를 방어했으며, 1602년 대사헌에 승진하여 공조참판을 지냈다. 남인인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한 것을 탄핵하여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였으며, 홍여순·남이공 등 북인파와 함께 정권을 잡았다. 북인이 소북·대북으로 갈라지자 이산해·이이첨과 함께 대북을 이끌었으며, 1601년 인목 대비에게서 적통인 영창 대군이 출생하자, 적통을 주장하여 영창 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에 대해 그는 광해군의 즉위를 주장하였다. 1607년 소북파 이효원의 탄핵으로 영변에 유배되었다가,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사헌에 등용되어 대북 정권을 수립하였다. 1612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이이첨과 함께 계축옥사를 일으켜 김제남과 영창 대군을 죽게 하였다. 1618년에는 인목 대비를 폐하여 서궁에 유폐시키고 영의정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당하였으며 가산은 모두 몰수당하였고, 이후 대북파는 정계에서 몰락하였다. 저서로 「내암집」이 있다.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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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祖(1752~1800)

조선의 제22대 왕(재위 1777~1800). 영조의 손자이며 사도(장헌) 세자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이고 비는 청원 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효의 왕후이다. 1759년 세손으로 책봉되었으며, 1762년 사도 세자가 죽자 영조의 뒤를 이었다. 1777년 그를 옹호하여 왔던 시파를 벽파가 탄핵하자, 벽파를 추방하였다. 이에 벽파가 음모를 꾸미는 등 왕의 신변까지 위협하자 홍국영으로 하여금 이를 뿌리 뽑게 하였다. 그러나 홍국영이 왕의 총애를 빙자하여 횡포를 자행하고 왕통을 바꾸려 획책하자, 1780년 그를 쫓아냄으로써 홍씨 세도정권을 무너뜨렸다. 그 후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으로 일관했으며 숙종 이후 실각했던 남인을 등용하고 서인(庶人)도 기용하였다. 1791년 신해사옥을 일으켜 천주교를 탄압하였으나 교세는 날로 확장되었다. 그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역대 서적을 보관하고, 활자에 관심이 깊어 임진자 등 많은 활자를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꾀하였다. 서적 편찬에도 힘을 기울여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도 완성하였으며, 「증보 동국 문헌 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등을 간행하였다. 특히 남인 학자들을 우대하여 주자학의 공리 공론적인 학풍을 배격하고 실사구시와 이용 후생을 목표로 하는 실학을 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의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제도 개혁에도 힘써 악형을 금지시키고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궁차 징세법을 폐지하는 한편, 빈민을 구제하는 법도 제정하였다.

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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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宗(923~949) 고려 제3대 왕(재위 946~949). 태조 왕 건의 둘째 아들. 이복 형 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946년 왕 규의 난을 평정하였다. 불교를 지나치게 믿어 여러 사원에 불명경보와 광학보를 설치하도록 양곡 7만 섬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947년 서경에 왕성을 쌓고 도참설을 좇아 그곳으로 천도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다.

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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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宗(1357~1419) 조선 제2대 왕(재위 1399~1400).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 초명은 방과이며 성품이 인자하고 용략이 뛰어나 고려 때 장상까지 지냈다. 조선이 건국되자 영안군에 봉해졌으며,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듬해 태조의 은퇴로 왕위에 올라 도읍을 개성으로 옮겼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동생 방원(후의 태종)을 세자로 삼고 사병을 몰수하여 삼군부에 편입시켰다. 이 해 하 윤의 건의로 관제를 개혁하고 서울 5부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본래 왕위에 야심이 없었으나 방원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정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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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中夫(1106~1179)

고려의 무신. 본관은 해주이며 천민 출신이었으나 기골이 장대하여 인종 때 견룡대정으로 발탁되었다. 이때 나이 어린 김부식의 아들 내시 김돈중에게 촛불로 수염을 태우는 모욕을 받고 그를 때려 눕혀 김부식의 분노를 샀으나 왕의 만류로 화를 면하였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의종 때 상장군에 이르렀다. 당시 의종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연회를 자주 베풀며 무신을 천대하였다. 불평이 쌓인 정중부는 몇 명의 동지와 모의하여 왕이 보현원으로 행차하러 가던 도중 반란을 일으켜 문신들을 모두 죽이고 왕을 폐위시켰다. 이어 의종의 동생인 명종을 즉위시키고 정권을 잡았는데, 이를 '무신의 난' 또는 '정중부의 난'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무신 정치를 실시하여 스스로 참지정사가 되었다. 1173년 김보당이 의종 복위를 꾀하여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고 의종을 살해하였다. 또한 이듬해 조위총의 난도 진압하였다. 후에 문하시중이 되었다가 1175년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1179년 무신인 경대승에게 아들과 사위와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정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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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知常(?~1135)

고려 중기의 문신·시인. 호는 남호이며 본관은 서경이다.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사간 등을 지냈으며 인종 때 기거주에 올랐다. 1127년 역신 이자겸을 축출한 척준경이 그 공을 믿고 횡포해지자, 왕에게 상소하여 유배시켰다. 묘청·백수한의 음양 비술을 깊이 믿어 서경 천도와 금 정벌, 그리고 황제 호칭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1130년 지제고로서 왕명으로 「산재기」를 지었다.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혐의로 김 안·백수한과 함께 김부식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시에 뛰어나 고려 '12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또한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으며 노장 철학을 숭상하였다.

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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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芝溶(1903~?)

시인.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도지샤 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휘문고보 교사로 재직하며 1930년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 「문장」지의 시 추천을 맡아 보았다. 그는 1930년대의 경향파 시의 무잡 속에서 시어의 탁마와 청신한 김각시를 써서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광복 이후 이화여대 문과 과장·「경향신문」 주간·숙명여대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6·25전쟁 때 행방 불명되었다. 그의 고향 옥천에 시비가 세워졌고, 생가가 보존되어 해마다 '지용제' 행사를 열고 있다. 시집 「정지용 시집」 「백록담」이 있다.

정창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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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昌孫(1402~1487)

조선의 문신. 자는 효중이며 본관은 동래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거쳐 집현전 응교로 있을 때 최만리·신석조와 함께 한글 제정을 반대하다 파직되었다. 1445년 복직되었으며, 이듬해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1449년 부제학으로 춘추관 편수관·수사관을 겸직하여 「고려사」 「세종실록」 「치평요람」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대사헌·이조판서 등을 거쳐, 1456년 사위 김 질에게서 들은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모의를 세조에게 고한 공으로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문장과 서예에도 뛰어났다.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관을 쪼개고 목을 벰)되었으나, 중종 때 청백리에 뽑혔다.

정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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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天益

고려 공민왕 때의 목화 재배자. 1363년 사위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목화씨를 심어 3년간 연구 끝에 재배에 성공하였다. 고려에 목화를 처음으로 널리 보급하였으며, 씨를 뽑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도 고안해 내어 면포를 짜내게 하였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무명옷이 널리 입혀지게 되었다.

정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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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澈(1536~1593)

조선의 문신·시인. 자는 계함, 호는 송강, 본관은 연일이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때 계림군(정 철의 둘째 누이의 남편)이 관련되어 그의 일족으로서 아버지가 유배당하자 유배지에 따라다녔다. 그 뒤 기대승·김인후 등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62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556년 함경도 암행어사가 되었으며, 1578년 선조 때 승지에 올랐다. 이때 진도 군수 이 수의 뇌물 사건으로 동인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되었으며, 이때 시인으로서 많은 작품을 썼다. 그가 지은 최초의 가사 「관동별곡」은 금강산을 비롯하여 관동 팔경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읊은 노래이며, 「훈민가」 16수는 백성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지은 것이다. 1583년 예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들의 공격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나 4년간 시조와 가사를 지으며 지냈다. 이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수많은 가사와 시조를 지었다. 1589년 다시 우의정에 등용되어 정여립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1591년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 때 신성군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부름을 받고 의주로 피란하는 왕을 모셨다. 왜군이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냈으며, 1593년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다. 그 후 동인들의 모함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강화도의 송정촌에 머무르며 여생을 보냈다.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윤선도와 더불어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사망 후 관작을 추탈당했다가 광해군 1년에 용서되고 인조 1년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저서로 「송강집」 「송강가사」 등이 있으며 70여 수의 시조가 있다.

정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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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招(?~1434)

조선 세종 때의 문신. 자는 열지, 본관은 하동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으며, 1407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그 후 세종 때 공조와 예조참의를 거쳐 예조참판을 지낸 뒤, 1423년 함길도 도관찰사로 나갔다. 1430년 공조판서로 있을 때 왕명으로 「농사직설」을 편찬하였으며, 정인지와 함께 역법을 개정하였다. 1433년 이 천과 함께 혼천의를 제작했으며 「삼강행실도발」을 편찬하였다. 경사에 밝았으며 역산·복서(거북의 등껍질로 치는 점)에도 통달하였다. 저서로 「회례문무악장」 등이 있다.

정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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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忠信(1575~1636)

조선의 무신. 자는 가행, 호는 만운, 본관은 나주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17세의 나이로 권 율 밑에서 활약하였다. 당시 권 율의 보고서를 갖고 의주로 피란중이던 선조에게 갔다가 이항복의 주선으로 학문과 무예를 닦았다. 그 해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21년 만포 첨사로 국경을 수비하였다. 1624년 이 괄의 난 때 난을 진압한 공으로 1등 진무 공신이 되었으며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627년 정묘호란 때 부원수로 활약하였으며 포도대장이 되었다. 그는 무술에 뛰어났으며 천문·지리·의학·복서에도 밝았다. 저서로 「만운집」 「백사북천록」 등이 있다.

정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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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琢(1526~1605)

조선의 문신. 자는 자정, 호는 약포, 본관은 청주이다. 이 황의 제자로 명종 때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선조 때 교리로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대사헌이 되었으나 정인홍 등과 의견이 맞지 않아 이조참판으로 옮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로 모시었으며 명나라 송응창을 영접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몸소 전쟁터에 나가 사기를 돋우려 했으나, 왕이 그가 연로함을 이유로 만류하였다. 그 후 판중추 부사를 거쳐 3등 호종 공신으로 서원 부원군에 봉해졌다. 경서는 물론 천문·지리·병법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임진왜란 때 이순신·곽재우·김덕령 등 명장을 발탁하였다. 저서로 「악포집」 「용만견문록」 등이 있다.

정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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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平九

조선 선조 때의 발명가. 전라도 김제에서 출생하였다. 지금의 기구와 비슷한 '비거(飛車)'를 발명하여, 임진왜란 때 진주 싸움에서 이를 사용하여 외부와 연락을 하는 한편, 성 안에 갇혀 있던 성주를 30리 밖으로 탈출하게 하였다고 한다.

정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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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夏祥(1795~1839)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 본관은 나주이며 정약종의 둘째 아들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와 형이 순교하여 어머니와 누나 밑에서 자랐다. 1813년 서울로 올라와 여신도 조증이의 집에 머물면서 교회의 재건에 노력하였다. 1816년 동지사를 따라 베이징에 간 이후 9차례나 베이징에 드나들면서 신부 파견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1825년 로마 교황에게 신부 파견의 필요성을 호소하여 이듬해 조선 교회를 베이징 교구에서 분리하여 파리 외방 전교회 산하에 새로이 조선 대리 감목구를 설치하게 하였으며,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감목 대리로 임명케 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3년 중국인 신부 유방제를 맞아들였으며, 1836년 프랑스 모방 신부를 맞아들여 천주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1838년 앵베르 주교 밑에서 이신규 등과 신학교육을 받고 성직자의 대상에 올랐으나 1839년 헌종 때 기해박해로 가족과 함께 붙잡혀 사형되었다. 그가 죽기 전에 쓴 「상재상서」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호교론으로, 1881년 홍콩 교구에서 발간되어, 중국에서 널리 전도에 활용되었다. 1925년 복자의 자리에 올랐다.

정학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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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學游

조선 헌종 때의 문인. 호는 운포이며 정약용의 둘째 아들로 「농가월령가」의 작자로 유명하다.

정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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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漢模(1923~1991)

시인·국문학자. 충남 부여 출생. 호는 일모. 서울대학교 교수, 문예진흥원장, 문공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45년 동인지 「백맥」에 「귀향시편」을 발표하면서 활동하기 시작하였으며, 「시탑」과 「주막」 동인으로도 활동하였다. 시집으로 「카오스의 사족」(1958), 「여백을 위한 서정」(1959), 「아가의 방」(1970), 「원점에 서서」(1989) 등이 있으며, 「현대시론」 「한국 현대시 문학사」 「한국 현대시의 정수」 등 많은 학술서가 있다.

정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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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漢淑(1922~1997)

소설가. 호는 일오. 평북 영변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47년 정한모·전광용 등과 「주막」의 동인을 조직하였으며 이듬해 단편 「흉가」가 「예술조선」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 1953년 중편 「배신」이 조선일보 현상 문예에 당선되었으며, 1955년 단편 「전황당 인보기」, 희곡 「혼항」이 한국일보 신춘 문예에 당선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하였다. 고려대 교수로 있으면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958년 내성문학상을 받았으며, 그 밖에도 흙의 문학상·문화예술상·예술원상·3·1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에 단편 「시몬의 회상」 「고추잠자리」, 장편 「암흑의 계절」 「끊어진 다리」 등이 있다.

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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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玄宗(1939~ ) 서울 출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1974년 「중앙일보」 기자, 77년 서울예전 교수를 거쳐 현재 연세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1965년 「현대문학」에 「독무(獨舞)」 「화음」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사물의 꿈」(1972), 「고통의 축제」(1974), 「나는 별 아저씨」(1978),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1984), 「거지와 광인」(1985),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 등이 있다.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과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정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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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澔(1648~1736)

조선의 문신. 자는 중순, 호는 장암, 본관은 연일이다. 정 철의 현손이며 송시열의 제자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정언 등을 지내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파직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기용될 때 풀려나와 지평·교리 등을 지냈다. 1721년 경종 때 실록청 총재로서 「숙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신임사화로 파직되어 강진에 유배되었다. 1725년 영조 때 노론의 재집권으로 풀려나와 영의정에 이르렀다. 문장과 글씨·시에 모두 능하였다. 저서로 「장암집」이 있으며, 편서로 「문의통고」가 있다.

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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諦觀

고려 초의 승려. 960년 광종 때 송나라 오월왕이 천태종의 3대부가 해외로 흩어져 없음을 알고 경전을 구해 오라고 고려에 사신을 보내자, 이에 제관이 경전을 가지고 송에 갔다. 그는 그곳에서 천태종의 대가인 나계사의 의적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어 10년간 공부하다 죽었다. 이 때문에 중국에는 천태종이 부활했으나, 고려에는 그 전맥이 끊어지게 된 것을 뒤에 의천이 중국에 건너갔을 때 그의 저서를 가지고 돌아와 계승하였다. 그가 지은 「천태사교의」는 천태종의 입문서로서 승려 강원의 필수과목으로 되어 있으며, 중국·일본의 불교 학계에서도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제국대장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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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國大長公主(1259~1297)고려 충렬왕의 왕후. 원나라 세조의 딸로 1274년 원에 체류중이던 세자 심(후의 충렬왕)과 결혼하였다. 그 해 즉위한 충렬왕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이듬해 원성 공주에 책봉되고 무종 때 제국대장 공주에 추봉되고, 충선왕을 낳았다. 고려 왕실과 원 왕실과의 혼인 관계를 이루는 시초가 되었다.

조 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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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1~1425)

고려의 충신. 호는 송산, 본관은 평양이다. 어려서 승려가 되어 여러 절의 주지를 지냈다. 그 후 환속하여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안렴사를 지냈다. 형 조 준이 이성계를 도와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과천의 청계산에 숨었다. 태조 이성계가 벼슬을 내리고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양주의 송산에 숨어 여생을 마쳤다. 죽을 때 자손들에게 묘비에 고려 때의 벼슬만 적고, 조선 때의 훈명은 적지 말라 하였다.

조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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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璥(1727~1787)

조선의 문신. 자는 경서, 호는 하서, 본관은 풍양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대사성이 되었다. 정조 때 공조참판·대사헌 등을 지낸 후 함경도 관찰사로 민폐를 없애고 군무를 충실케 하는 등 좋은 정치를 베풀어 명성을 떨쳤다.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저서로 「하서집」이 있다.

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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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1762)

조선의 승려. 자는 무회, 호는 용담이며, 본성은 김씨이고 본관은 남원이다. 1718년 숙종 때 감로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새봉·영해·낙암·화정 등으로부터 선과 교의 진리를 배워 통달하였다. 이어 지리산 견성암에 들어가 「기신론」을 읽고 크게 깨달은 뒤, 1732년 지리산에 가은암을 짓고 심원사·도림사 등에서 20여 년간 경서를 강연하였다. 1749년 시봉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부안의 실상사에서 죽었다. 사리가 5개 나왔는데, 감로사·파근사·실상사의 탑에 각각 보관되어 있다.

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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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光祖(1482~1519)

조선의 문신·성리학자. 자는 효직, 호는 정암, 시호는 문정, 본관은 한양이다. 김종직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림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515년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승지 등을 지내고 부제학이 되어 소격서의 폐지를 단행하였으며, 유교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고을의 상부 상조를 위해 여씨 향약을 만들어 실시하게 했으며 미신 타파에도 힘썼다. 1519년 대사헌이 되어 현량과를 실시하여 사림파를 대거 요직에 등용시키는 반면,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었다. 특히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이 너무 많다 하여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을 삭제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훈구파의 원망을 받았다. 심 정·홍경주 등 훈구파의 갖은 모함으로, 김 정·김 구 등과 함께 파직당하여 유배되었다.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어 공자묘에 함께 모셔졌다. 이 이는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을 가리켜 '동방 4현'이라 하여 숭배하였다. 저서로 「정암집」이 있다.

조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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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匡振(1772~1840)

조선의 서예가. 자는 정보, 호는 구눌·눌인, 본관은 용담이다. 평양에서 태어나 이광사의 글씨를 배웠다. 일찍부터 김정희와 사귀어 글씨의 평론을 비롯한 서신 교환 등을 하였다. 처음에는 안진경의 체를 본받았으나 후에 행서와 초서에 있어서 청의 유 용을 따랐으며, 예서에 있어서는 장도악을 따랐다. 죽은 후 중국 사신이 동국의 명필이라 하며 찾다가 한탄하며 탑본을 얻어 가지고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다.

조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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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斗淳(1796~1870)

조선의 문신. 자는 원칠, 호는 심암, 본관은 양주이다.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를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다. 1835년 동지부사로 청에 다녀왔으며, 그 후 이조참판·황해도 관찰사·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다. 1849년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헌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1862년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가 계속되어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이정청을 설치하여 총재관이 되어 삼정의 개혁에 전력하였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이명복(후의 고종)의 추대를 적극 주장하여 조 대비와 흥선 대원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1864년 「철종실록」의 편찬 총재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이 되어 「대전회통」을 편찬하였다. 삼군부를 부활시키고 경복궁 영건도감 도제조를 지냈다. 흥선 대원군의 명을 받아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 저서로 「심암집」이 있다.

조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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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晩植(1882~?)

민족 운동가·정치가. 호는 고당, 본관은 창녕이며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평양 숭실중학에 입학하여 재학중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3년간 공부하였으며, 이때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크게 감동을 받아 자기 사상과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오산학교 교사가 되었다. 1919년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지휘하다 잡혀 평양 감옥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 그 후 1923년 김성수·송진우와 함께 '연정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듬해 이들과 '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그 후 숭인중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사직하였다.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나 역시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었으며,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였다. 그 후 많은 후진들과 기독교인들의 무저항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하였다. 광복 후 평남 건국 준비 위원회와 평남 인민 정치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질서 유지와 국민의 지도에 앞장섰다. 한편, 소련 군청정에서 북조선 인민 정치 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고했으나 거절하였다. 그 해 '조선 민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고, 반공 노선을 확립하였으며 반탁 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이에 조선 민주당은 소련 군정청 당국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접수되고 그는 소련군에 의해 고려 호텔에 연금되었다. 그들의 협박과 회유에도 끝까지 굽히지 않았으며 신탁통치에 반대하였다. 월남을 종용하는 제자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동포들을 남겨 두고 홀로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6·25전쟁 때 공산당에게 학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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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末生(1370~1447)

조선의 문신. 자는 근초, 호는 화산, 본관은 양주이다. 태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정언·감찰·헌납 등을 지냈다. 1403년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으며, 그 후 장령·예문관 직제학·승정원 동부대언 등이 되었다. 태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세종 때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조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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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穆(1524~1606)

조선의 학자. 자는 사경, 호는 월천, 본관은 횡성이다. 이 황의 문인으로 명종 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어 유교를 공부하였다. 1571년 선조 때 공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1576년 봉화 현감을 거쳐 1594년 군자감 주부로서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601년 사재감정을 거쳐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생활이 무척 빈곤하였으나 오직 학문에만 전심하여 대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월천집」과 성현의 훈화를 기록한 「곤지잡록」이 있다.

조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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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文命(1680~1732)

조선의 문신. 자는 숙장, 호는 학암, 본관은 풍양이다. 김창협의 문인으로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부교리 등을 거쳐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1727년 「경종실록」 편찬에 참가하였으며, 이듬해 대사성·이조참판 등이 되었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을 수습한 공으로 풍릉 부원군에 봉해졌다. 1730년 우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사은사로 청에 다녀와 좌의정에 올랐다. 관직에 있는 동안 탕평책을 실시하는 데 앞장섰고, 불편 부당한 인사 관리를 했다.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 「학암집」이 있으며 글씨로 청주에 「삼충사 사적비」가 있다.

조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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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敏修(?~1390)

고려 말기의 무신. 본관은 창녕이며, 1361년 공민왕 때 순주 부사로 여러 장군들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2등 공신이 되었다. 1368년 명나라가 원의 서울인 연경을 포위하자 좌상시로서 명의 위협에 대비하였으며,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385년 판문하 부사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에 다녀왔다. 1388년 우왕 때 요동 정벌군의 좌군 도통사로 이성계와 함께 출정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이듬해 이성계 일파의 전제 개혁을 반대하여 창녕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왔다. 다시 우왕의 혈통을 에워싼 논쟁으로 이성계 일파에 대항하다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1390년 창녕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조병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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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秉甲

조선 말기의 탐관. 본관은 양주이며, 1893년 고종 때 고부군수로 부임하여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증축하여 물세를 징수 착복하고,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씌워 재산을 착취하였다. 또한 태인 군수였던 자기 아버지의 비각을 세운다고 금품을 강제 징수하는 등 갖은 학정을 자행하였다. 이에 군민들의 항의를 받았으나 듣지 않아, 이듬해 동학혁명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을 만들었다. 전봉준이 봉기할 때 습격을 받았으나 도망하였다가, 후에 파면당하여 섬으로 유배되었다.

조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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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秉世(1827~1905)

조선 말기의 문신·순국열사. 자는 치현, 호는 산재, 본관은 양주이다. 철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1889년 우의정을 거쳐 1893년 좌의정이 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관제가 개혁되자 사직하고 가평에 은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을사 5적신의 처형을 왕에게 간청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이루지 못하였다. 심상훈·민영환 등과 함께 여러 날 궁궐에 머물며 을사조약의 무효를 상소하다, 왜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해산되었다. 그러자 각국 공사 및 동포에게 보내는 글과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조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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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秉式(1832~?)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공훈, 본관은 양주이다. 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1862년 전라우도 암행어사가 되었으며, 1885년 진주 부사로 청에 가서 흥선 대원군의 석방을 요청하였다. 귀국 후 예조·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외교 활동에 헌신하였다. 1888년 조선 대표로 러시아 대표 웨베르와 한·러 육로 통상 장정을 체결한 뒤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흉년이 들자 방곡령을 선포하여 양곡의 대일 수출을 금지하였다. 이에 일본의 반발을 사서 11만 원의 배상금을 물게 됨으로써 그 책임으로 3개월의 감봉 처분을 받았다. 1891년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동학교도들이 교조인 최제우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호소하자, 오히려 이들을 탄압하여 사태를 긴박하게 만들어 동학혁명이 일어나게 하였다. 뒤에 독립협회를 무고한 사실이 밝혀져 체포령이 내리자 외국인의 집에 피신하였다.

조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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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玉(1894~1960)

독립 운동가·정치가. 호는 유석, 본관은 한양이며 천안에서 출생하였다. 평양 숭실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와이오밍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하였으며, 한인회와 흥사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5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모교의 강사를 지냈으나 좌익교수를 배척하고 사직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1932년 조선일보사 전무 겸 영업국장을 지냈으며 1937년 수양 동지회 사건으로 다시 2년간 복역하였다. 광복 후 송진우·장덕수 등과 한국 민주당을 창당하였으며, 정부 수립 후 대통령 특사·유엔 한국 대표 등을 지냈다. 6·25전쟁 때 내무부 장관으로서 대구 방위 전선에서 진두 지휘하였다. 그 후 이승만 대통령과 의견 충돌로 사직했으며, 이후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민주당 최고위원, 1956년 대표 최고의원이 되어 야당을 이끌어 나갔다. 1960년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신병으로 미국에 건너가 치료하던 중 사망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민주주의와 나」 「나의 회고록」 등이 있다.

조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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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華(1921~2003)

시인. 호는 편운이며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사범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 물리화학과를 졸업하였다. 광복 후 경성사범학교·제물포고등학교·서울고등학교의 교사를 지냈다.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는 도회인의 애상을 평이한 수법으로 노래하여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1955년 중앙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 강사 등을 거쳐 경희대학교 문리대 학장·경희대 교육대학원장·세계 시인 대회장·세계 시인 대회 국제 이사·예술원 회장·문인협회 이사장·계관시인 등으로 활약하였다. 1959년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비롯하여 국민훈장 동백장·모란장·서울시 문화상·3·1 문화상·예술원상·대한민국 문학상·금관 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시집으로 「하루만의 위안」 「인간고도」 「밤의 이야기」 「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 「공존의 이유」 「남남」 등이 있다.

조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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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奉岩(1898~1959)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죽산, 본관은 창녕이며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쥬오 대학을 중퇴한 후 소련 모스크바 동방 노동자 공산대학에서 수업하였다. 3·1운동 때 참가하여 1년간 복역한 후, 1924년 조선 청년 총동맹 중앙간부·조선 공산당 중앙간부 등을 지내다가, 1930년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7년형을 받았다. 광복 후 석방되었으며, 1946년 공산당을 탈당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초대 농림부장관 등을 거쳐 1950년 제2대 민의원이 되었다. 1952년과 1956년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낙선되었다. 이 해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이 되어 정당활동을 하다가,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조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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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錫晋(1853~1920)

조선 말기의 화가. 호는 소림, 본관은 함안이며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조부 조정규로부터 그림을 배워 명성을 떨쳤으며 산수·인물·화조·기명·절지·어해에 이르기까지 모두 능하였다. 고종의 초상화를 그린 공으로 영춘 군수가 되고, 품계가 정3품에 올랐다. 만년에는 후진 육성에 힘썼고, 서화 미술원·서화 협회의 창립 발기인이 되었다. 작품으로 「해림유거도」 「매조도」 「군리도」 등이 있다.

조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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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成煥(1875~1948)

독립운동가. 호는 청사. 본관은 창녕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26세 때 무관학교 학생으로 부패한 군관들을 내쫓으려다 발각되어 복역중, 3년 만에 특사로 풀려나와 참위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907년 김 구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헤이그 특사 파견을 도와 경술국치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9년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부장이 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으며 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대종교인과 독립운동」이 있다.

조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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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世熙(1942~ )

소설가. 경기도 가평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및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돛대 없는 장선(葬船)」이 당선되어 등단. 1975년 「칼날」을 발표한 후, 「뫼비우스의 띠」 「우주여행」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을 발표했다. 그는 70년대 소외된 노동자 빈민의 삶을, 난쟁이와 연결하여 폭로한 작가이다. 동인문학상 수상.

조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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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素昻(1887~?)

독립운동가·정치가. 본명은 용은이며 경기도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으며 조선법학 전수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였다. 그 해 제네바에서 열린 만국 사회당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1922년 임시정부의 내분을 수습하기 위해 안창호·김 구 등과 '시사 책진회'를 조직하였다. 1928년 김 구·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으며, 1937년 독립운동 단체의 연합체인 한국 광복 전선을 결성할 때 한국 독립당 대표로 참가하여 운영 간부에 선출되었다. 광복 후 귀국하여 이승만·김 구 등과 국민의회를 설치하여 상무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1946년 한국 독립당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김 구·김규식과 함께 남북 협상에 찬동하여 평양에 갔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고 정부 수립에 불참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성북구에서 입후보하여 전국 최고 득점으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어 사망하였다.

조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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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涑(1595~1668)

조선의 서화가. 자는 희온, 호는 창강, 본관은 풍양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하였다. 그 후 효종 때 시종으로 뽑혔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그림은 특히 새·짐승·매화·대나무 등을 잘 그렸다. 저서로 「창강일기」 그림으로 「묵매도」 「매작도」 「금궤」 「지상 쌍금도」 등이 있으며, 글씨로 「좌찬성 이계맹 비」 「조회양 사령비」 등이 있다.

조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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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植(1501~1572)

조선의 학자. 자는 건중, 호는 남명, 본관은 창녕이다.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당시 유학계의 대학자로 추앙되었다. 지리산에서 지내면서 성리학을 연구하여 독특한 학문의 체계를 이룩하였다. 1552년 명종 때 이몽량의 천거로 전생서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명종의 부름을 받고 찾아가 치국의 도리를 건의하고 돌아왔다. 만년에는 두류산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그의 제자로 김효원·김우옹 등 저명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선조 때 대사간,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저서로 「남명집」 「남명학기」 「파한잡기」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남명가」 「권선지로가」 등이 있다.

조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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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伸

조선 성종 때의 문인. 자는 숙분, 호는 적암, 본관은 창녕이다. 시와 어학에 능하여 사역원경에 특선되었다. 명의 연경에 7회나 왕래하였으며, 신숙주를 따라갔던 것을 비롯하여 일본에도 3회 왕래하였다. 성종 때 김안국과 더불어 「이륜행실도」를 지었는데 국민 교화의 좋은 자료가 되었다. 만년에는 금산에서 은거하였다. 저서로 「시고」 5권과 「수문쇄록」 등이 있다.

조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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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1777)

조선의 문신. 자는 명서, 호는 영호, 본관은 풍양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감사가 되었다. 1760년 창원의 마산창·진주의 가산창·밀양의 삼랑창 등 곡식 창고를 늘려 백성들이 곡식을 수송하는 폐해를 덜고, 공물의 수납을 공정하게 하여 국고의 충실을 기했다. 후에 예조참의에 이르러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고구마 종자를 구하여, 제주도에 처음으로 재배하게 하여 번식시켰다. 그 후 대사간·이조서 등을 지내다가, 1777년 홍국영 등의 무고로 김해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자기가 하는 일이 정당한 것이면 끝까지 고집하므로 그를 '조고집'이라 불렀다. 저서로 「해차록」 「해행총재」 등이 있다.

조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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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演鉉(1920~1981)

문학평론가.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였으며,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혜화전문학교 2년을 수료하였다. 처음 에는 시 동인지 「시림」 「아」의 동인으로 시를 썼으나, 광복 후 평론을 쓰기 시작하였다. 1946년 김동리·서정주 등과 '청년 문학가 협회'를 결성하였다. 1948년 「문예」지 주간을 거쳐 서울대학교·동국대학교 강사를 지냈다. 1955년 이후 「현대문학」을 주관하는 한편, 동국대학교 교수를 거쳐 1966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그 후 문학 평론가 협회장·펜클럽 한국 본부 부위원장·문인협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3·1 문학상과 예술원상·문화 예술상·국민 훈장 동백장 등을 받았다. 저서로 「한국 현대문학사」 「문학과 생활」 「조연현 문학전집」 「내가 살아온 한국 문단」 등이 있다.

조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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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英茂(?~141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이다. 1392년 공양왕 때 이방원의 명으로 조영규 등과 함께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였다. 그 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3등 개국 공신으로 한산군에 봉해졌다. 1398년 이방원의 심복 부하로서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난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워 1등 좌명 공신이 되었다. 그 후 1408년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413년 우의정을 지내다가 병으로 물러났다.

조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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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榮祐(1686~1761)

조선의 화가. 자는 종보, 호는 관아재, 본관은 함안이다. 숙종 때 진사에 합격하여 첨지중추 부사 돈령부 도정에 이르렀다. 산수·인물을 잘 그려 예조(禮曹)로부터 숙종의 초상을 그리라는 명을 받았으나, 왕명이 아니면 부름에 나가지 않는 것이 고도(古道)라 하여 거절하였다 한다. 겸재·현재와 함께 '3재'로 알려졌으며 문장·서화에 모두 뛰어나 3절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작품으로 「암상포금도」 「죽하기지도」 등이 있으며, 글씨로 「참봉사 윤수열 표」가 있다.

조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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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寧夏(1845~1884)

조선의 문신. 자는 기삼, 호는 혜인, 본관은 풍양으로 조 대비의 조카이다. 사대당의 중요 인물이며, 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 대비의 총애를 받아 1865년 대사성으로 특진하였다. 1873년 호조판서로 있을 때, 민승호 등 민씨 일족과 결탁하여 흥선 대원군의 실정을 탄핵하여 대원군 세력의 추방에 앞장섰다. 이 해 고종의 친정(親政)이 선포되면서 대원군이 실각하자 포도대장·훈련대장 등을 지냈다. 1882년 전권대관으로 일본의 하나 부사를 접견하였으며, 전권대신이 되어 한미·한영·한독 수호 조규를 각각 체결하였다. 이 해 임오군란으로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자, 청에 가서 병사를 요청함으로써 임오군란의 주동자를 색출하였으며, 또한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민씨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 해 다시 진주사로 청에 가서 외교 담당 고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초빙, 입국하게 하였다. 1883년 예조판서에 재임되었으나, 이듬해 갑신정변 때 살해되었다.

조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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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昱(1498~1557)

조선의 학자. 자는 경양, 호는 우암, 본관은 평양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오르지 않고 용문산으로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그의 높은 학식과 인격이 세상에 알려지자 '용문 선생'이라 불리었다. 명종 때 현사로 뽑혀 선무항 내 섬주부직을 받았고, 장수 현감을 지냈다. 당시의 저명한 학자인 이 황·서경덕과도 가깝게 지냈다. 시·그림에도 뛰어났으며 죽은 후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용문집」이 있다.

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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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偉(1454~1503)

조선의 학자. 자는 태허, 호는 매계, 본관은 창녕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성종의 명으로 김종직의 문집을 편찬할 때 「조의제문」을 실어 무오사화의 화근이 되었다. 하정사로 명에 다녀오다 잡혀 의주와 순천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학문이 넓고 깊었고, 문장이 뛰어나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저서로 「매계집」이 있으며, 글씨로 「조계문 묘비」가 있다.

조위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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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位寵(?~1176)

고려 중기의 반란자. 병부상서로 서경 유수를 겸직하고 있던 중, 1170년 정중부 등이 난을 일으켜 횡포를 일삼자, 1174년 명종 때 철령 이북의 40여 성의 호응을 얻어 난을 일으켰다. 이에 중앙에서 평장사 윤임첨이 진격해 오자 이를 격파하고 개경에까지 이르렀으나, 이의방의 역습을 받고 후퇴하였다. 그 후 관군의 공격으로 곤경에 빠졌으며, 금에 원병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1176년 서경이 함락된 뒤에 죽음을 당하였다.

조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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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潤濟(1904~1976)

국문학자. 호는 도남이며 경북 예천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조선어 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4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1960년 한국 교수 협의회 의장·1965년 영남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그 후 학술원 회원을 거쳐 학술원 인문 과학부장이 되었다. 그는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고대 소설과 시가에 대한 사적 연구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 한국 고전 문학의 체계를 세운 한국 최초의 국문학 연구가이기도 하다. 이병도·이희승·이선근 등과 진단학회 결성에 참여하여 진단학보를 발간하였고, 광복 후에도 한국 시가와 국문학사에 대한 연구 저술이 많으며, 초기의 실증주의에서 탈피하여 민족 사관을 주창, 일제 하에서 애국적 입장에 서서 국문학에 관한 학구적 연구를 견지해 왔다. 특히 「한국 문학사」는 가장 방대하고 권위 있는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 후에 학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저서로 「조선 시가사강」 「한국 시가의 연구」 「국문학 개설」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도남잡식」 「교양문선」 등이 있다.

조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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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義卨(1906~1978)

사학자. 평남 용강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도호쿠 제국대학 서양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53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서양사를 연구하였으며, 그리스에서 그리스 사학을 연구하였다. 1954년 학술원 종신 회원이 되고, 1957년 한국 서양사 학회장이 되었다. 1962년 연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4년 연세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저서로 「서양사 개론」 「희랍신화」 「희랍 사회 연구」 「세계기행」 등이 있다.

조 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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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翼(1579~1655)

조선의 문신. 자는 비경, 호는 포저, 본관은 풍양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검열 등을 지냈으며, 1611년 광해군 때 수찬으로 있으면서 정인홍 등이 이언적·이 황의 문묘를 반대하자 이를 탄핵했다가 좌천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좌랑·직제학·형조참의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도망한 죄로 처벌당한 후, 1643년 원손(왕세자의 맏아들)의 보양관이 되었다. 그 후 대사헌·우의정 등을 거쳐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음률·병법·문장 등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포저집」이 있다.

조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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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寅永(1782~1850)

조선의 문신. 자는 의경, 호는 운석, 본관은 풍양이다. 순조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에까지 올랐다. 당시 나이 어린 헌종을 대신하여 순원 왕후가 정사를 맡아보게 되자, 안동 김씨가 세력을 잡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에 맞서 풍양 조씨의 중심 인물이 되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839년 기해박해를 일으켜 크리스트교를 탄압하였으며, 1847년 「국조보감」을 지을 때 공이 컸다.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신이 투철하였으며 문장도 뛰어났다. 저서로 「운석유고」가 있다.

조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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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廷奎(1791~?)

조선 순조 때의 화가. 자는 성서, 호는 임전, 본관은 함안이다. 첨사를 지냈으며, 산수·인물·꽃·새 특히 어해로써 이름이 높았다. 작품으로 「화조도」 「추경산수도」 「어개도」 등이 있다.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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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廷來(1943~ )

소설가. 전남 승주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1970년 단편 「누명(陋名)」 「선생님 기행」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73년 「월간문학」 편집장, 1985~89년 「한국문학」 주간을 지냈으며, 주요 작품으로 「유형(流刑)의 땅」 「불놀이」 「20년을 비가 내리는 땅」 「어떤 전설」 「태백산맥」 등을 발표했다. 그는 분단 문제와 그에 따르는 민족의 비극적 실상을 밀도 있게 파헤치는 데 주력한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을 받았다.

조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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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逡(?~140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명중, 호는 우재, 본관은 평양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1376년 우왕 때 통례문 부사를 거쳐 전법판서가 되었다. 이성계의 신임을 받아 위화도 회군 후 지밀직 사사 겸 대사헌이 되었다. 1392년 공양왕 때 정도전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 건국의 공신이 되었다. 그는 특히 경제에 밝아 고려 말에는 전제 개혁안을 발표하여 문란한 토지 행정의 개편을 주장하였으며, 조선의 토지제도는 그에 의하여 정비되었다. 1397년 하 윤 등과 「경제육전」을 편찬하였다. 1400년 판문하 부사로 태종을 옹립하여 영의정 부사에 오른 후 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조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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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重桓(1863~1944)

근대의 신소설 작가. 호는 일재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경부터 10여 년간 신소설이 유행하던 시절에 주로 일본의 것을 번안하여 신소설을 썼다. 번안 작품이 대부분이었으나 문장이 유창하여 많은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1912년 우리 나라 최초의 희곡 「병자삼인」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대표작으로 「장한몽」 「쌍옥루」 「불여귀」 등이 있다.

조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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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重晦(1711~1782)

조선의 문신. 자는 익장, 본관은 함안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757년 대사간이 되었다. 사도 세자(장헌 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되었을 때, 왕에게 그를 살려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무장으로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와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성품이 곧고 결백하여 주위의 유혹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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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芝薰(1920~1968)

시인. 본명은 동탁이며 경북 양양에서 출생하였다.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친 뒤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불교를 배웠다. 1939년 「문장」지에 「고풍의상」과 「승무」를 추천받아 문단에 등장하였다. 광복 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와 서울여자대학교·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듬해 고려대학교 부설 민족문화 연구소장에 취임하면서부터 민족문화 개발에 주력하였다. 그는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주옥 같은 명시를 많이 남겼다. 그의 시는 주로 자연·무속·선 등을 소재로 한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것이며, 불교 세계에 대한 관심은 종교의식을 일깨워 주어 작품에 반영되었다. 박목월·박두진 등 다른 청록파 시인들이 후에 시 세계의 근본적 변혁을 가져온 데 반하여, 그는 초기의 자연 친화의 시 세계를 비교적 많이 유지하였다. 1956년 자유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청록집」 「조지훈 시선」 등이 있으며, 수필집 「창에 기대어」, 논문집 「한국 민족운동사」 등이 있다.

조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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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沖(1171~1220)

고려의 문신. 자는 감약이며 본관은 횡천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가 되었으며, 1211년 희종 때 대사성·한림학사 등을 지냈다. 1216년 고종 때 추밀원부사를 거쳐 상장군이 되었다. 이 때 거란족이 황해도에 침입하자 부원수로 나가 싸웠으나 패하였고, 다시 서북면 병마사로 출전하여 인주 부근에서 거란족을 무찔렀다. 1219년 몽고군과 연합하여 거란군의 근거지인 강동성을 공격하여 항복받았다. 죽은 후 문하시중에 추증되었다.

조태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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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泰億(1675~1728)

조선의 문신. 자는 대년, 호는 겸재, 본관은 양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북평사·부교리 등을 지냈다. 1709년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때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김일경 등과 함께 1721년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우의정으로 승진하였으나, 노론의 민진원 등의 탄핵으로 벼슬을 잃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영돈령 부사로 있다가 사망하였다. 1776년 영조 때 관작을 추탈당하였다. 저서로 「겸재집」이 있다.

조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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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泰采(1660~1722)

조선의 문신. 자는 유량, 호는 이우당, 본관은 양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옥구 현감·평안 감사 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1713년 지중추 부사로 있을 때 청에 다녀왔다.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경종 즉위 후 연잉군(후의 영조)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소론파와 대립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저서로 「이우당집」이 있다.

조풍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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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 수필가·언론인. 서울 출생. 연희전문 문과 졸업(1938). 1934년 신백수(申百秀) 등과 「삼사문학(三四文學)」 동인으로 문학활동을 시작, 1938년 「젊은 예술가 군상(群像)」이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수필집으로 「명상하는 서민」 「청사수필」 「여성의 적」 「여성의 길」 등을 간행, 현대의 혼돈된 문화를 피하여 동양의 고전적인 면을 추구하였다. 1940년 문예지 「문장」을 편집했으며 을유문화사 주간·「한국일보」 문화부장·「소년한국일보」 주간 등을 역임했다. 추리소설 「심연(深淵)의 안테나」, 소년소설 「붉은 마인」 「소년검객 마억(馬億)」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조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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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憲(1544~1592)

조선의 문신·의병장. 자는 여식, 호는 중봉, 본관은 백천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주 교수를 거쳐 호조·예조좌랑 및 감찰 등을 지냈다. 1582년 보은 현감으로 있을 때, 상소를 올려 노산군(단종)의 후사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을 세울 것을 청했으나 시기하는 자의 무고로 파면당하였다. 1586년 공주 제독이 되어 선비들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니 찾아드는 선비가 많았다. 이때 또 상소를 올려 이 이를 변호하는 한편, 정여립의 행패를 비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벼슬을 내놓고 옥천으로 갔다. 1589년 또 상소를 올려서 시정의 득실을 논하여 길주로 유배되었다. 그 해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선견지명이 있다 하여 석방되었다. 1591년 일본 사신이 왔을 때 왜적에 대비할 방법을 상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시골로 내려가 탄식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보은의 통로를 차단하는 등 공이 컸으나 순찰사 윤석각의 시기를 받고 홍성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에 진을 치고 있는 왜군을 승장 영규와 합세하여 물리쳐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당시 금산에 있는 왜적이 충청도 일대를 석권하리라는 소식을 듣고 영규와 함께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 10리 밖에 이르렀다. 원래는 권 율과 합세하여 협공할 계획이었는데 왜적이 이를 알고 미리 역습해 오자, 700명의 의병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1754년 영조 때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고경명·김천일·곽재우와 함께 '임진 4충신'의 한 사람이다. 저서로 「중봉집」 「조천록」 등이 있다.

조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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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欣坡(1918~1980)

소설가. 본명은 봉순으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본 센슈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경성 방송국 촉탁이 되었다가, 아나운서로 활약하였다. 경기여고 교사·숙명여대 강사를 역임하였고, 1950년 국방부 군무원으로 정훈국 부산 분실 선무 반장 겸 종군 작가로 활동하였다. 이어 교육자로 활동하였고 「현대여성」 주간을 맡았다. 국도신문사·세계일보사·한국경제신문사 등에서 논설 위원으로 활약하고, 공보실 공보 국장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명랑 소설 작가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작품으로 다큐멘터리 「대한 백년」 「만주국」, 장편 「임꺽정전」 「주유천하」, 단편 「봄은 도처에」 등이 있다.

주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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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基徹(1897~1944)

목사.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웅천에서 남학회를 조직하여 애국 사상을 고취하고 3·1운동 때 고향에서 만세 운동을 지휘한 뒤, 예수교 장로회에 재직하며 신앙 운동과 애국 운동을 일으켰다. 중일 전쟁 때 평양 산정현 교회의 목사로 있으면서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며 항일 운동을 하다가 193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주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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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命新

조선 말기의 의학자. 호는 기하이며 경북 상주에서 출생하였다. 학문이 깊고 재능이 많았으며 허 준의 제자로 병을 잘 치료하였다. 저서로 「의문보감」이 있는데, 이 책은 임상 치료학과 의학의 입문서이다.

주세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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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世鵬(1495~1554)

조선의 학자·문신. 자는 경유, 호는 신재, 본관은 상주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부수찬 등을 지내다가 김안로의 배척을 받아 좌천되었다. 그 후 곤양 군수를 거쳐 풍기 군수로 있을 때, 1542년 백운동에 고려 말의 학자 안 향의 사당을 세웠다. 이듬해 백운동 서원(소수 서원)을 창설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1551년 황해 감사로 있을 때 해주에 수양 서원(문헌 서원)을 창설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죽은 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무릉잡고」 「죽계지」 「동국 명신 언행록」 등이 있으며 단가 8수가 전한다.

주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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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時經(1876~1914)

한글학자. 호는 한힌샘이며 황해도 봉산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이회종에게 한문을 배웠으며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 조직에 참여한 후, 이 해 협성회를 만들었다. 1898년 배재학당 만국지지과를 졸업하였고 이어 배재보통과에 입학하였다. 「독립신문」 교정원으로 있으면서 '조선문동식회'를 결성하여 한글 기사체의 통일과 연구에 힘썼다. 1905년에는 국어 연구와 사전 편찬 사업에 관한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하였고, 1907년 어윤적·이능화 등과 학부의 국문 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전 생애를 한글의 문법과 맞춤법의 과학적 연구에 바쳤으며, 많은 제자를 육성하였다. 또한 '조선어 연구회(한글학회의 전신)'를 창설하게 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08년 「국어 문전 음학」을 저술하였으며, 1910년 「국어문법」을 지었다. 이어 최남선이 '광문회'를 창설하자, 여기서 간행되는 국어 관계 서적의 교정과 「말모이(국어사전)」 편찬을 담당하였다. 1914년 「말의 소리」를 저술하였으며 이 해 독립운동 동지들이 수감되자, 해외 망명을 준비하던 중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 「주시경 유고」 등이 있다.

주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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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耀燮(1902~1972)

소설가·교육자. 호는 여심이며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도쿄 아오야마 학원 중학부에 재학중, 이듬해 3·1 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김동인과 함께 「독립신문」을 발간하다가 붙잡혀 감옥 생활을 하였다. 1920년 상하이로 건너가 호강 대학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단편 「추운 밤」을 「개벽」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하여 경향적인 작품을 쓰며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1927년, 상하이 호강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포드 대학원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1931년 「신동아」 주간으로 있으면서 순수 문학으로 전향하였다. 1934년부터 10년간 중국의 보인대학 교수를 지냈다. 광복 후 「코리아 타임스」 주필을 지냈으며 경희대학교 영문과 교수·대한 공론사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표작으로 장편 「길」 「구름을 잡으려고」, 단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아네모네의 마담」 「추물」 등이 있다.

주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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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耀翰(1900~1979)

시인·언론인·정치가. 호는 송아이며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상하이 호강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19년 「창조」의 동인으로 창간호에 발표한 「불놀이」는 우리 나라 최초의 주지시로 평가되고 있다. 1927년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동아일보」 편집국장·「조선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1958년 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0년 부흥부(건설부) 장관·대한 해운공사 사장·전국 경제인 연합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부흥론」이 있으며 시집 「아름다운 새벽」, 평론집 「자유의 구름다리」 「안도산 전집」 등이 있다.

주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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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義植

조선 중기의 가인·시조 작가. 자는 도원, 호는 남곡, 본관은 나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칠원 현감을 지냈으며, 노래와 시조를 잘 짓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노래는 내용이 도덕적이고 건실하였으며, 시조 14수가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 등에 실려 전한다.

죽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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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竹(?~642)

신라 선덕 여왕 때의 무신. 대야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사지 벼슬에 있으면서 대야성의 도독 김품석의 부하로 활약하였다. 642년 백제의 장군 윤 충에게 대야성이 포위되자,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후에 급찬에 추증되었다.

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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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旨

신라 중기의 장군. 죽지랑이라고도 한다. 화랑 출신으로 장군이 되어 649년 진덕 여왕 때 김유신과 함께 도살성에서 백제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파진찬을 거쳐 중시가 되어 기밀 사무를 관장하였다. 661년 태종 무열왕 때 백제의 잔병 소탕전에 참전하였으며 이 해 문무왕이 즉위하자 귀당 총관이 되었다. 668년 나·당 연합군의 고구려 정벌 때 경정 총관으로 참전하였고, 671년 석성에서 당 군사와 싸워 적을 5천여 명이나 죽이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화랑 득오곡이 그를 흠모하여 지은 향가 「모죽지랑가」가 전해진다.

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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準王

고조선의 마지막 왕. 부왕의 아들이며 기자의 자손이다. 한나라 초기 기원전 195년 하북 지방에서 망명하였다고 하는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를 삼았는데, 이듬해 위만이 모반하여 왕검성을 빼앗겼다. 준왕은 바다가 있는 남쪽으로 내려가 마한 지방을 빼앗고 한왕이 되었다고 한다. 준왕이 남쪽으로 내려간 곳이 전라도 익산, 또는 경기도 광주 경안이라고 한다.

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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俊貞(?~576)

신라의 원화(源花). 576년 미녀 2명을 뽑아 원화로 삼을 때 남모(南毛)와 함께 선발되어 각각 300여 명의 무리를 거느렸다. 남모와 아름다움을 다투다가 서로 질투하게 되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독주를 먹여 취하게 한 다음 강물에 던져 죽였다. 후에 이것이 발각되어 사형당하였다. 이로써 원화 제도는 폐지되고 화랑이 생겼다.

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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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宗(1488~1544)

조선 제11대 왕(재위 1506~1544). 성종의 둘째 아들이며 연산군의 동생이다. 1494년 성종 때 진성 대군으로 봉해지고, 1506년 박원종 등에 의해 연산군이 폐위된 후 왕으로 추대되었다. 즉위 초, 부패된 정치를 개혁하기 위하여 1515년부터 조광조를 등용하여 그가 주장하는 지치주의를 표방한 이상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진세력의 과격한 개혁정치는 훈구파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1519년에는 남 곤·심 정 등의 모함에 빠져 기묘사화를 일으켜, 신진세력을 숙청함으로써 개혁정치의 의도는 사라지고 훈구파의 세력만 커져 갔다. 국방 상태도 혼란하여 1510년 3포 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1522년 동래 염장의 왜변·1524년 야인의 침입·이듬해 전라도 일대를 석권한 왜구의 행패 등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였다. 1537년 윤원로 형제가 등장하여 김안로를 추방하였으나, 이들 역시 횡포가 극심하여 1545년 명종 때 을사사화를 일으키게 하였다. 중종은 왕위에 오른 후 미신 타파를 위해 「소학」 「이륜행실」 등을 간행하였으며, 「경국대전」 「대전속록」의 발행으로 법률제도의 확립에 노력하였다. 그 밖에 역사·지리·문학·언어·사회의 각 방면에 걸쳐 많은 문헌이 편찬 간행되었다. 특히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대량의 활자를 만들고 역대 실록의 등사를 마쳤으며, 그것을 사고(史庫)에 비치한 것은 재위 기간 중 중요한 업적으로 꼽힌다.

지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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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訥(1158~1210)

고려의 승려. 호는 목우자, 속성은 정씨이며 시호는 불일보조국사라고도 한다. 조계종의 창시자로 8세에 승려가 되어 도(道)를 구하였다. 1182년 명종 때 승과에 급제하였으나 승려로서의 출세를 포기하고 많은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창평의 청원사에서 「육조 단경」을 읽다가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서 도를 구하기 위하여, 1185년 하가산의 보문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대장경」을 열독하는 등 불도에 전력하며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였다. 이어 지리산 상무주암에 은거하며 외부와의 인연을 끊고 참선하여 선의 참뜻을 깨달았다. 1200년 송광산 길상사에서 11년 동안 제자들에게 설법을 전하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희종이 즉위하여 송악산을 조계산, 길상사를 수선사라 개명하여 하사하고 가사(법복)를 보내왔다. 그는 중생을 떠나 부처가 따로 없음을 강조하여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였다. 승도를 소집하여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사망하니 탑을 세우고 감로라 하였다. 죽은 후 국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진심직설」 「수심결」 「정혜결사문」 「상당록」 「염불요문」 등이 있다.

지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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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錫永(1885~1935)

조선 말기의 학자. 자는 공윤, 호는 송촌, 본관은 충주이다. 1876년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온 박영선에게서 「종두귀감」을 얻어보고 느낀 바 있어, 1879년 부산에 있는 일본 제생의원에 가서 종두법을 배웠다. 그 해 겨울 충북 충주 덕산면에서 우리 나라 최초로 40여 명에게 종두를 실시하였다. 이듬해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종두를 위한 우두의 제조법을 배우고 돌아와 종두법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1883년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와 동래 부사 등을 지냈으며, 1885년 「우두신설」을 저술하였다. 그는 천연두가 유행할 때마다 우두 종법을 실시하여 우리나라 의학 발전에 많은 공을 세웠다. 1899년 경성의학교를 세워 10년간 교장으로 재직했으며, 1905년 「신정국문 6개조」를 고종에게 상소하여 공포하게 하고, 학부 안에 국문 연구소를 설치하였다. 1909년 한자를 국어로 풀이한 「자전석요」를 간행하여 한자 해석의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종두법 시행의 선구자이며 국문의 연구에 공헌한 바가 크다.

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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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嚴(1464~1534)

조선의 승려. 호는 야로, 본관은 부안이며 속성은 송씨이다. 1491년 성종 때 여진족의 침입에 맞서 싸워 크게 이겼다. 그 후 계룡산으로 들어가 조계 대사 밑에서 불도를 닦았다. 연희·정심에게서 교리를 배운 후, 지리산으로 들어가 더욱더 불도를 닦고 연구하였다. 제자들에게 대승경론을 강의하였으며, 1534년 지리산 수국암에서 「법화경」을 강의하다가 죽었다. 저서로 「벽송집」 「가송잡서」 등이 있다.

지증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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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證王(437~514)

신라의 제22대 왕(재위 500~514). 내물왕의 증손이며 법흥왕의 아버지로 지증 마립간이라고도 한다. 502년 순장법을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였으며, 소를 길러 땅을 갈게 하였다. 이듬해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504년 상복법을 제정하였으며, 505년 주·군·현을 정하고 각 주에 군주를 두었다. 509년 서울에 동시(東市)를 두었고, 512년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였다. 시호는 지증인데, 우리나라 최초의 시호이다.

지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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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靑天(1888~1959)

독립운동가. 호는 백산, 본명은 지대형이며 일명 이청천이라고도 한다.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정부 파견 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성 대장이 되어 독립군 간부를 길러냈다. 청산리 싸움 후 일본군의 보복 작전을 피해 헤이룽장으로 이동하였다. 혹하사변이 일어나자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중국군과 협력하면서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대동청년단'을 창설, 청년 운동에 힘썼으며, 무임소 장관·민주 국민당 상임 최고위원·제헌 의원·제2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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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通

신라 성덕왕 때의 승려. 7세에 출가하여 영취산의 낭지 법사에게 나아가 제자가 되었다가, 의상 밑에서 불경의 깊은 뜻을 깨달았다. 원효 대사가 반고사에 있을 때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고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을 지었다고 한다. 의상 대사의 10제자 중의 한 사람이며, 세상에서 10대덕 중 한 사람이라 칭한다. 저서로 「추동기」가 있다.

진덕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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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德女王(?~654)

신라의 제28대 여왕(재위 647~654). 이름은 승만, 갈문왕의 딸이며 연호를 태화로 고쳤다. 648년 김춘추를 당에 보내어 백제를 토벌하기 위한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후부터 당을 모방하여 관리들의 의복도 당의 것을 따랐으며, 여왕이 친히 「태평송」을 지어 당에 보냈다. 650년 당의 연호인 영휘를 사용하여 당의 환심을 샀으며, 652년 김인문을 당에 보내어 친교를 맺었다. 안으로는 김유신과 같은 명장을 기용하여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진성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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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聖女王(?~897)

신라의 제51대 여왕(887~897). 이름은 만, 경문왕의 딸이며 정강왕의 여동생이다. 정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888년 각간 위홍과 대구 화상에게 명하여 향가집 「삼대목」을 편찬하게 하였으나 전하지 않는다.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여 왕실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였으며, 정치의 혼란뿐 아니라 세금 징수와 군사 제도도 매우 문란해졌다. 이 틈을 타서 북원의 도적 양 길의 부하 궁예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였고, 견훤이 모반하여 후백제를 세움으로써 다시 삼국이 맞서게 되었다. 재위 11년 만에 왕위를 감당치 못하고 효공왕에게 물려주고 죽었다.

진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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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再奚(1691~1769)

조선의 화가. 자는 정백, 호는 벽은, 본관은 풍기이다. 도화서의 화원으로서 벼슬이 첨사에 이르렀다. 인물·산수화를 주로 그렸으며 숙종의 전신화를 비롯하여 「월하취적도」 등이 남아 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상훈을 사양하였다.

진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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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智王(?~579)

신라의 제25대 왕(재위 576~579).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 백제의 침공의 자주 받았으나 내리 서성을 쌓고 잘 막아내었다. 중국 진(陳)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였으며 상대등 거칠부에게 국사를 맡겼다.

진평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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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平王(?~632)

신라의 제26대 왕(재위 576~632). 진흥왕의 손자이다. 수나라와 친교를 맺어 원광·담육 등을 유학시켰으며, 609년 수의 원조를 받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수가 망하고 당이 건국되었을 때도 화친 정책을 써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연호를 건복이라 고치고 여러 문물 제도를 개혁하였으며 남산성을 쌓는 등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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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表

신라 중기의 승려. 12세에 금산사로 들어가 숭제 법사 밑에서 불도를 닦았다. 선계산 불사의암에서 고행한 후, 740년 효성왕 때 지장보살의 현신을 맞아 보살계를 받았다. 그 후 영산사에서 도를 닦고 마침내 소원이던 미륵보살의 현신을 맞았다. 752년 경덕왕 때 「점찰경」 2권과 간자(점치는 대쪽) 189개를 받았다. 그 후 경덕왕의 부름으로 궁중에 보살계를 베풀고 불교를 융성하게 하였다. 영심·보종·신방·체진·진해·진선·석충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법상종의 창시자이다.

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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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興王(534~576)

신라의 제24대 왕(재위 540~576). 법흥왕의 동생이며 갈문왕 입종의 아들로 7세에 즉위하여 한때 왕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544년 흥륜사를 창건하고, 이듬해 이사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551년 연호를 개국으로 고쳤고 팔관회를 두었으며, 우륵을 후대하여 음악을 보급하였다. 553년 황룡사를 창건하였으며, 백제의 한강 유역을 침략하여 여러 성을 빼앗았는데, 이에 백제 성왕이 분하게 여겨 쳐들어온 것을 크게 격파하였다. 562년 사다함의 공으로 대가야를 평정하고 주위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대를 강화하였다. 또한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4개의 순수비(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가 전해지고 있다. 576년 화랑제도를 만들어 삼국 통일의 원동력을 이루게 하였다. 황룡사의 장륙상을 주성하는 등 불교의 번창에도 힘이 컸고, 개국을 위시하여 대창·홍제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적인 기상을 나타냈다. 신라 중흥기의 왕이다.

징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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澄儼(1090~1141)

고려의 승려. 호는 복세이며 순종의 넷째 아들이다. 8세 때 흥왕사의 의천에게 가서 승려가 되었으며 불일사에서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 1105년 승통이 되었으며, 홍원사·개태사 등의 주지를 지냈다. 1122년 인종이 즉위하자 5교도 승통이 되었으나, 이자겸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에 은퇴하였다. 1141년 왕명으로 흥왕사에 머물다가 죽었다. 죽은 후 원명 국사에 추증되었다.


차미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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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美理士(1880~1955)

여류 교육자. 본관은 연안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남편이 죽자 크리스트 교인이 되었다.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와 함께 「독립신문」을 발간하였으며, 그 후 캔자스 주의 더스콘 대학 신학과를 졸업하였다. 1917년에 귀국하여 배화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0년 '조선 여자 교육협회'를 설립하였으며, 이어 전국 여자 순회 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계몽 강연회를 가졌다. 이 강연회에서 모은 돈으로 근화(덕성)여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덕성여자대학을 세웠다.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차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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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凡錫(1924~ ) 극작가·연출가. 전남 목포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10여 년간 교편 생활을 하다가,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밀주」로 가작 당선되고, 1956년 「귀향」으로 당선되었다. 그 해에 '제작극회'의 동인으로 극작활동을 시작하였다. 현재 예술원 회원이며, 주요 작품으로는 「껌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1961) 「태양을 항하여」 「불모지」(1958) 「산불」(1962) 「갈매기」(1963) 「청기와집」(1964) 「열대어」(1966) 「장미의 성」(1968) 「대리인」(1969) 등이 있다.

차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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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天輅(1556~1615)

조선의 문신. 자는 복원, 호는 오산, 본관은 연안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사로 뽑혔다. 1589년 통신사 황윤길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벼슬이 봉상시첨정에까지 이르렀다. 그 후 문장이 수려하여 명나라로 발송되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그가 작성하였는데, 재주가 뛰어나 '동방문사'라는 이름으로 명나라에서 불리었다. 특히 한시를 잘 지었으며, 당시 한 호의 글씨와 최 입의 문장과 더불어 '송도 3절'로 불릴 정도로 유명하였다. 1792년 정조 때 왕명으로 그의 저서를 간행하여 반포하게 하였다. 저서로 〈오산집〉 〈오산설림〉 등이 있다.

창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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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王(1380~1389)

고려의 제33대 왕(재위 1388~1389). 우왕의 아들이다. 1388년 우왕이 왕(王)씨의 혈통이 아니고 신 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폐위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때 왕씨 종실에서 왕을 뽑자는 주장이 많았으나, 이 색·조민수 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추대되었다. 후에 이성계에 의해 폐위되어 강화에서 살해되었다.

채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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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東鮮(1901~1953)

작곡가·바이올린 연주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베를린에 유학, 슈테른센 콘세르바토리움에서 리하르트 하르체에게서 바이올린을, 빌헬름 클라테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귀국하여 4회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고, 1932년 작곡 발표회를, 1937년 가곡집을 발간하였다. 현악 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발전을 위해 활약하였고, 1938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 조선 창작곡 발표 대음악제에서 「환상곡 D단조」를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로 발표하였다. 광복 직후 고려음악협회를 조직, 협회장에 선임되었다. 가곡 「망향」, 「모란이 피기까지는」 외에 현악4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 모음곡 등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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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萬植(1904~1950)

소설가. 호는 백릉이며 전북 옥구에서 출생하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교 영문과를 중퇴하였다.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 「새길로」가 추천되면서 문단에 등장하였다. 동아일보의 사회부 기자·개벽사의 편집기자 등으로 근무하면서 동반자적인 작품을 썼다. 1934년경부터 「레디메이드 인생」 「인텔리와 빈대떡」 「탁류」 등 풍자성이 농후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작품은 인간생활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풍자성이 강한 사회소설이 대부분이다. 광복 후에는 작품 활동이 뜸하다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작품에 장편 「천하태평」 「아름다운 새벽」 「배비장전」 「허생전」 등이 있으며, 단편 「옥랑사」 「잘난 사람들」 등이 있다.

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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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壽(1449~1515)

조선의 문신. 자는 기지, 호는 나재, 본관은 인천이다. 1469년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에 올라 춘추관에서 일했으며, 「세조실록」 「예종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음악에도 뛰어나 1475년 성종 때 이조정랑으로서 장악원의 일까지 맡아보았다. 한편 당시 아첨 잘하기로 이름난 임사홍을 몰아내 백성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그 후 충청도 관찰사·예조참판·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504년 연산군 때 갑자사화에 관련되어 유배되었다. 저서로 「나재집」이 있다.

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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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濟恭(1720~1799)

조선의 문신. 자는 백규, 호는 번암, 본관은 평강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무원 부정자를 거쳐 교리 등을 지냈다. 그 후 이조참판·호조참판을 거쳐, 1771년 동지정사로 청에 다녀왔다. 정조 초에 형조판서가 되어 정조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여러 차례 적발해 처벌하였으며, 후에 홍국영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1780년 규장각 제학이 되어 서명응 등과 함께 「국조보감」을 편찬하였다. 이어 예조판서·지중추 부사 등을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1790년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이것을 만류하여 파직되었다가 1792년 복직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파직·유배 등의 처벌을 받았으나, 정조의 신임으로 곧 등용되었으며 판중추 부사로 재직중 죽었다. 1801년 순조 때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하면서 관직을 박탈하였으나, 1823년 복관되었다. 저서로 「번암집」 59권이 있다.

채홍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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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洪哲(1262~1340)

고려의 문신. 자는 무민, 호는 중암, 본관은 평강이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장흥 부사 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불교와 음악을 연구하였다.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밀직부사를 거쳐 정승에까지 이르렀다. 1314년 충숙왕 때 토지와 세금의 제도를 다시 정비할 때, 민전을 횡령하여 거부가 되었다. 그 후 자기집 북쪽에 전단원을 두어 승려들을 살게 하는 한편, 병든 사람들에게 약을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또한 중화당을 지어 과거에 재상을 지낸 국로(國老) 8명을 맞아들여 「자하동신곡」을 지었는데, 이것이 「고려악부」에 전한다.

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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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英(1880~1955)

조선 선조 때의 승려. 호는 뇌묵이며 서산 대사 휴정의 제자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전라도에서 승병을 일으켜 공을 많이 세웠다. 1594년 권 율의 명령으로 남원의 교룡산성을 다시 고쳐 쌓았다. 1794년 정조 때 표충사와 수충사에 서산 대사와 사명당과 함께 그의 진영(얼굴을 그린 화상)을 안치하게 하였다.

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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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容

신라 헌강왕 때의 사람. 879년 왕이 행차하여 개운포에 이르렀을 때, 이상한 생김새와 괴이한 의복을 입은 처용이라는 자가 왕 앞에 나타나 노래하고 춤추면서 왕을 따라 서울까지 왔다. 처용은 급간이라는 벼슬을 받고 달밤이면 나가 춤추고 노래하다가, 마침내는 그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악부에 그의 춤을 '처용무' 또는 '상염무'라고 전한다. 1505년 연산군 때 모든 문서에 '처(處)'자 사용을 엄금하여 처용을 '풍두(豊頭)'라고 하였다.

척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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拓俊京(?~1114)

고려 인종 때의 무신. 곡산 척씨의 시조이다. 어려서 집이 가난하여 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가 계림공(후의 숙종)의 종이 되었다. 1104년 숙종 때 평장사 임 간을 따라 동여진 정벌에 나가 공을 세워 천우위 녹사참군사가 되었다. 1107년 예종 때 중군 병마록사로 윤 관을 따라 동여진을 정벌할 때 길주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공부원외랑이 되었다. 인종 초 이부상서를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1126년 이자겸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갔으나, 왕의 권유로 뜻을 바꾸어 이자겸을 잡아 유배시키고 그 공으로 문하시중에 올랐다. 후에 정지상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가 곡주에서 병으로 죽었다.

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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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鏡子(1924~ )

여류 화가·수필가.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 여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파리 아카데미 고에즈에서 수학하였다. 홍익대 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교수 등을 지냈고 수차례의 개인전을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가졌다. 국전 심사위원·초대작가·국전 운영위원·미전 운영위원 등을 지냈고 예술원 회원으로 있다. 1955년 국전 대통령상, 1964년 문예상 외에 3·1 문화상·예술원상·은관 문화훈장·시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작품으로 「생태」 「꽃무늬」 「정」 「꽃과 병사」 등이 있고, 저서로 「한, 여인 소묘」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천경자 아프리카 기행화문집」 등이 있다.

천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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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寬宇(1925~1991)

언론인·사학가. 충북 제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51년 대한통신 기자를 거쳐 「한국일보」 논설위원·「조선일보」 편집국장·「동아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1971년 「동아일보」 이사로 취임하여 언론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 「썰물 밀물」 「언관사관」 「한국사의 재발견」 등이 있다.

천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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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祥炳(1930~1993)

시인·평론가. 경남 창원 출생. 서울대학교 상과대 수학(1955). 중학 5학년 때 「죽순(竹筍)」에 시 「공상(空想)」 외 1편으로 추천을 받았고, 대학 재학시 송영택(宋永擇) 등과 함께 동인지 「신작품(新作品)」을 발간하였다. 1952년 「문예」에 시 「강물」 「현대문학」에 평론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정식 데뷔했다. 이후 시 「덕수궁의 오후」 「새」 「장마」 「간봄」 「귀천(歸天)」 등과, 평론 「사실의 한계」 「비평의 방법」 「젊은 동양 시인의 운명」 등을 발표하였다.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았고 70년 그의 실종 이후, 친구들이 유고시집으로 「새」를 낸 후에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찾아내었다. 시집으로 「새」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등과 시선집 「주막에서」가 있다.

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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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宗(1831~1863)

조선의 제25대 왕(재위 1849~1863). 휘는 변, 호는 대용재, 전계 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1844년 형 회평군이 옥에 갇혀 죽자, 가족과 함께 강화로 유배되었다. 1849년 덕완군에 피봉되어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 왕후의 명으로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1851년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음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듬해부터 왕이 직접 정치를 하였으나, 정치에 어두워 세도정치는 극도로 문란해졌다. 따라서 삼정은 어지러워지고 도처에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을 착취하여 국가는 도탄에 빠졌다. 이에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여 1862년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나 삼남 일대를 휩쓸었으며, 잇따라 함흥·제주에서도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최제우의 동학은 시대의 뜻에 맞는 사상으로 날로 커져갔다. 1863년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고 최제우를 처형하였으나 동학의 세력은 날로 확대되었다. 철종은 재위 14년 만에 병으로 후사 없이 죽었는데, 세도의 농간으로 국정을 잡아보지 못하였다.

첨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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沾解王

신라의 제12대 왕(재위 247~261). 조분왕의 동생이다. 248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서로 화친하였다. 249년 사량벌국을 쳐서 신라에 통합시켰으나 왜구의 침입을 받았다. 255년 백제의 침공을 받았으며 달벌성을 축조하였다.

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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肖古王(?~214)

백제의 제5대 왕(재위 166~214). 소고왕 또는 속고왕이라고도 하며 개루왕의 맏아들이다. 167년 신라의 서쪽을 침략하였고, 이어 188년부터 여러 차례 신라의 모산성·요거성 등을 침공하였다. 210년 적현성·사도성을 쌓았으며, 214년 1,000여 명의 군사로 말갈의 석문성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곧 말갈의 침입을 받아 술천까지 내습당하였다.

최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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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慶昌(1539~1583)

조선의 문신·시인. 자는 가운, 호는 고죽, 본관은 해주이다. 일찍이 학문에 뛰어나 이 이·송익필 등과 함께 8대 문장가로 손꼽혔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종성 부사를 거쳐 1583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오던 도중 죽었다. 시를 잘 지었으며 피리도 잘 불었다. 어려서 영암 바닷가에 살 때 해적의 무리에게 포위되자 퉁소를 구슬프게 불었는데, 그 연주법이 너무 뛰어나 해적들은 신이 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모두 흩어져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저서로 「고죽유고」가 있다.

최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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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慶會(1532~1593)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선우, 호는 삼계, 본관은 해주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아 금산·무주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 해, 제2차 진주성 싸움에 참가하여 계속 격전을 벌이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자 남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죽은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최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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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光玉(1879~1911)

조선 말기의 문법학자. 1904년 평양 숭실학교 중학부를 졸업하였으며, 주시경과 함께 정부에서 세운 국문 연구소에서 국어 정리에 노력하였다. 「대한문전」을 발간했는데, 이 책은 그의 저작이라고 하나 사실은 유길준의 초고라는 유력한 신설이 있다.

최광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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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匡裕

신라의 학자. 학문이 깊었으며 시도 잘 지었다. 당에 유학하여 학문에 대한 명성이 높았는데, 당에서는 최치원·박인범 등과 함께 '신라 10현'이라 불리었다. 고려 때 발간된 「십초시」 하권에 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고려 때 간행되었다가 조선 문종 때 밀양 부사 이백상이 다시 발간한 것이라고 한다.

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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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圭夏(1919~ )

정치가·제10대 대통령.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하였으며, 1941년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43년 만주 대동학원을 졸업한 후, 194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47년 중앙 식량 행정청 행정실장을 거쳐 이듬해 농림부 양정과장을 지냈다. 1959년 주일 대표부 공사·1967년 외무부 장관·1975년 국무총리 등을 거쳐 1979년 대통령이 됨으로써 공직 생활 30여 년 만에 최고직에 올랐다. 이듬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국정 자문회의 의장·민족사 바로찾기 국민회의장을 역임하였다. 무궁화 대훈장·건국 훈장 등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로부터 최고 훈장 등을 많이 받았다.

최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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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南善(1890~1957)

문학가·사학자. 호는 육당, 본관은 동주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으며, 1904년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동맹 휴학으로 중퇴하였다. 이어 이광수 등 유학생들과 사귀면서 러시아 문학 작품을 탐독하였다. 이때 유학생 회보인 「대한 흥학회보」를 편집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시(신체시)와 시조를 발표하였다. 귀국하여 우리 민족의 시대적 각성을 위한 신문화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인쇄 시설을 구입하여 1908년 신문관을 창설하였다. 여기서 「대한역사」 「대한지지」 「외국지지」등 중요한 책을 출판하였으며, 새 시대의 주인공들을 위하여 1908년 최초의 종합 잡지인 「소년」을 발행하였다. 그는 이 잡지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최초의 신체시를 발표하였으며, 이듬해 안창호와 함께 '청년 학우회'를 설립하여 학우회의 노래를 짓는 등 청소년 지도 운동에 앞장섰다. 1911년에 「소년」이 폐간되었으며, 이듬해 이광수의 도움으로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등을 발간하였으나 총독부의 명령으로 모두 폐간되었다. 1914년 다시 종합 계몽 잡지 「청춘」을 발간하여 새로운 지식의 보급과 민중 계몽을 위해 공헌했으나 1918년 폐간되었다. 그는 신문관에서 많은 책과 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우리 민족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조선광문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 나라의 귀중한 옛 책들을 다시 간행하였으며, 민족문화를 널리 퍼뜨리기 위한 국가적인 사업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당시 「동국통감」 「열하일기」 등을 비롯한 많은 고전이 간행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 다시 「동명」 지와 「시대일보」를 발간하여 일본의 침략 정치를 규탄하고 우리 민족 정신을 불러일으키기에 힘썼다. 1925년 「동아일보」에 사설을 쓰는 한편, 「불함문화론」을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그는 동방 문화의 근원지를 우리나라 단군 신화의 무대인 백두산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일본이 총독부 내에 '조선사 편수위원회'를 둘 때 편수 위원직을 맡았으며, 중추원 참의를 거쳐 일본 관동군이 만주에 세운 건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로 인해 광복 후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며, 「한국역사대사전」을 편찬하던 도중 병으로 죽었다. 최남선이 우리 신문화 운동에 남긴 업적은 매우 크게 평가되고 있으며, 1973년 고려대학교 아시아 문제 연구소에서 「육당전집」이 발간되었다. 저서로 「조선유람기」 「고사통」 「조선 독립운동사」 등이 있으며, 시조집 「백팔번뇌」가 있다.

최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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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訥(1717~1790)

조선의 승려. 자는 이식, 호는 묵암, 본관은 밀양이다. 성은 박씨이며 최눌은 이름이다. 14세 때 낙안 징광사의 돈정에게서 불도를 배우고는 승려가 되었다. 18세 때 만리 대사에게 3족계를 받았으며 그 후 풍암·호암·새봉 등에게 불법을 배우고 진명 대사의 법을 이어받았다. 「제경문답 반착회요」 등을 비롯한 많은 저술을 하여 당시의 불교계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1770년 해남 표충사 원장이 되었고, 송광사에 비가 있다. 저서로 「내외잡저」 10권과 「심성론」 3권, 「문집」 3권 등이 있다.

최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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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萬理

조선 세종 때의 문신. 자는 자명, 호는 강호산인, 본관은 해주이다. 고려의 학자 최 충의 후손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거쳐 집현 부제학·강원 감사 등을 지냈다. 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반포되자, 이듬해 여섯 가지의 이유를 들고 반대 상소문을 올렸다. 또한 관리가 사모를 쓰는 것이 옛 제도에 어긋난다 하여 중국 제도에 따라 시행하게 되었다. 후에 청백리에 뽑혔다.

최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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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鳴吉(1586~1647)

조선의 문신. 자는 자겸, 호는 지천, 본관은 전주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 전적을 지냈다. 그 후 광해군의 정치가 날로 어지러워지자 김 유·이 귀 등과 함께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였다. 그 공으로 1등 공신이 되고 완성군에 봉하여졌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모시고 강화로 피란하였으며, 그 후 대제학·병조판서·한성판윤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을 주장하여 이듬해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우의정이 되어 흩어진 정사를 잘 정리하여 나라가 안정되게 하였으며 좌의정·영의정 등에 이르렀다가 죽었다. 성리학과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글씨에 있어서는 동기창체로 유명하였다. 저서로 「지천집」 19권, 「경서기의」 「병자봉사」 등이 있다.

최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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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茂宣(?~1395)

고려 말 조선 초의 화약 발명가. 본관은 영주이다. 일찍부터 병법을 좋아하여 화약제조법에 몰두하던 중 원나라 사람 이원으로부터 그 제조법을 배웠으며, 여러 차례 조정에 건의하여 1377년 우왕 때 처음으로 화통도감을 설치하게 하였다. 그는 이곳의 주임이 되어 화약을 만드는 동시에 석포·신포·화전·화포·화통·철령전 등 각종 화기를 제조하였다. 또한 이런 화기 등을 실을 수 있는 전함의 감독·건조에도 힘썼다. 1380년 왜구가 대거 침입하자, 나 세 등과 함께 전함을 이끌고 진포에서 왜구 선박 500여 척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벼슬이 지문하부사에 이르렀으며, 조선 태조는 그가 세운 공을 참작하여 영성 부원군을 추증하였다. 저서로 「화약수련법」 「화포법」 등이 있다.

최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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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炳憲(1858~1927)

조선의 기독교 신자. 아펜젤레·존슨 목사로부터 한문으로 된 신약 성경을 얻어 100일 동안 특별 기도를 올리며, 열심히 읽었다. 1892년 존슨 박사에게 세례를 받고 전도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또한 아펜젤러 목사의 신약 성경의 한국말 번역에 적극 협력하였고 배재학당에서 한문을 가르쳤다. 서울 종로에 책점을 설립하는 한편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관을 창립하였다. 1894년에는 「조선 기독교인 회보」 「신학월보」의 주필을 맡아 보다가 1902년에 목사가 되어 정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서 12년 동안 재직하고 신학교 교수로 있다가 사망하였다.

최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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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北 조선 영조 때의 화가. 자는 성기, 호는 성재·기암, 본관은 무주이다. 산수·인물·괴석·고목 등을 두루 잘 그렸는데, 특히 산수를 잘 그려 '최산수'라고 불리었다. 필법이 대담하고 솔직하여 남화의 거장 심사정과 견줄 만한 인물이다. 성격이 괴팍하여 이상한 행동을 잘 하였으며, 폭주가이고 여행을 즐겼다. 칠칠거사로 알려진 많은 일화를 남긴 위인으로, 시에도 뛰어났다. 작품으로 「송음관록도」 「표훈사도」 「마법산수도」 「수경각수도」 「풍설야귀도」 등이 있다.

최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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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士威

고려 현종 때의 문인. 1010년 강 조 등과 함께 30만 군사를 지휘하여 퉁저우로 나가 거란군을 무찔렀다. 그 후 서경유수·이부상서 등을 지내면서 12주 절도사를 없애고 5도호 75도에 백성들을 돌보는 안무사를 두게 하였다. 1022년 복잡한 관직의 명칭을 고치자고 왕에게 건의하여 이를 실시하게 하였다. 죽은 후 태사에 추증되었다.

최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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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常壽(1918~ )

민속학자. 호는 성천이며 부산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오사카 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 한국 민속학회 회장이 되었으며 이때 「민속학보」를 발간하였다. 그 후 외국어대학 조교수·이화여자대학교 강사·미국 아시아 민속학회 이사·경희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우리나라 민속학의 학문적 체계 확립과 세계 민속 학회와의 국제적 교류를 위해 활약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 민속학 연구 총서」 「한국 민간전설집」 「한국과 아라비아와의 관계」 등이 있다. 월남 문화 훈장·지원 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최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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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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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聖模(1874~1936)

독립운동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후 북감리교 목사로서 교회 일을 맡아보았다.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 동안 복역하였다. 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최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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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世珍(1473~1542)

조선의 학자·문신. 자는 공서이며 괴산 최씨의 시조이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중국어에 능통하여 외교문서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1524년 군자감정으로 있으면서 「친영의주」와 「책빈의주」 등을 한글로 풀이하였다. 또한 1527년 「훈몽자회」를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한글의 자음·모음의 이름을 정하고, 순서와 받침 등을 정리한 최초의 저술로 국어학 발달에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1530년 첨지중추 부사로서 「황극경세서집」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1539년 승문원 제조로 「대유대주의」와 「황극경세서설」을 지어 바쳤다. 당대에서 가장 뛰어난 중국어 학자로 사신들을 맞을 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중인(中人) 출신이었기 때문에 생전에는 큰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저서로 「경성지」 「여호경」 「사성통해」 「소학편몽」 「운회옥편」 등이 있다.

최승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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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老(927~989)

고려 초기의 명신. 12세에 논어를 읽는 것을 보고 태조가 원봉성 학사에 올렸다. 988년 성종 때 수문하시중이 되고 청하후에 봉해졌다. 벼슬에 있는 동안 왕에게 청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졌으며, 역대왕의 선악 득실을 28조(시무 28조)로 분석하여 왕께 바친 것으로 유명하다. 죽은 후 태사에 추증되었다.

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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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時亨(1827~1898)

동학의 제2대 교주. 호는 해월, 본관은 경주이며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고아가 되어 고생을 하였으며, 1861년 동학교도가 되었고 이듬해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1864년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안동·울진 등지로 돌아다니며 포교에 힘썼다. 그 후 인제에 가서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단양에서 「용담유사」를 발간하는 등 경전의 완성에 노력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정국이 소란하여 동학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조직 강화에 힘써 육임제(동학 교직의 등급)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여 종교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1892년 손천민·손병희 등의 주장에 따라 충청도 관찰사에게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탐관오리의 숙청 등을 요구하는 글을 보냈으나 묵살당하였다. 1894년 고부 접주 전봉준이 동학혁명을 일으키자, 교주로서 이에 호응하여 10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였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에게 공주에서 패하여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송경인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하였다. 1907년 고종의 특지로 신원되었다.

최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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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臣海(1919~1991)

의사·수필가.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정신과 교실에서 연구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 부속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연구를 계속 하였다. 1956년 국립 청량리 뇌병원 원장이 되었고, 1961년 일본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연세대 외래 교수, 신경 정신과 학회장 등을 지냈다. 그는 틈틈이 생활 수상을 모아 글을 발표하였다. 화랑무공 훈장을 수여받았다. 저서로 「국보 찾아 10만리」, 수필집 「훔친 사과가 맛있다」 「공부 못하는 천재」 「고독을 이겨야 하는 현대인」 등이 있다.

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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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瑩(1316~1388)

고려의 명장. 본관은 창원이다. 처음에는 무인으로서 양광도 도순문사의 휘하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1352년 공민왕 때 조일신이 난을 일으키자 안 우·최 원 등과 함께 이를 진압하여 호군으로서 출세하였다. 1354년 중국 산둥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원에서 원병을 요청하자, 대호군으로서 2,000여 명을 거느리고 나가 적을 전멸시켜 용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후에 2차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시키는 데 공을 세워 전리판서가 되었다. 1358년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를 크게 무찔렀으며, 1376년 홍산에서도 왜구를 격퇴하여 철원 부원군에 봉해졌다. 이후부터 왜구는 최 영을 몹시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왜구의 토벌에 공을 세웠다. 한때 신 돈의 모함으로 지방으로 쫓겨간 일도 있으나, 신 돈이 처형되자 찬성사에 올랐다. 1388년 명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탐내자, 당시 7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 뼘의 땅도 내줄 수 없다고 하여 요동 정벌을 주장하였다. 이 때 최 영은 8도 도통사가 되어 군을 총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우군 도통사인 우왕과 함께 평양까지 출진하였으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최 영은 회군하는 이성계의 군사를 막아 싸웠으나, 마침내 붙잡혀 고봉에 유배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최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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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容信(1909~1935)

여류 농촌운동가. 본관은 경주이며 원산에서 출생하였다. 서울여자 신학교에 재학중이던 1931년에 YWCA 농촌 사업부 파견으로 경기도 화성군 샘골에 가서 농촌 교육을 시작하였다. 1934년 일본 고베 신학교에 유학했으나 신병으로 귀국하여, 샘골에서 요양하면서 농촌 계몽 운동을 하다가 죽었다. 1964년 한국 여성단체 협의회에서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용신 봉사상'을 제정하였다.

최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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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瑀(?~1249)

고려 중기의 권신. 본관은 우봉이며 후에 최 이로 개명하였다. 최충헌의 아들로 1219년 아버지가 죽자, 뒤를 이어 집권하였다. 처음에는 인심을 얻기에 힘썼으나, 1225년에는 자기 집에다 정방을 설치하여 관료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1227년 서방을 두어 문객 중 이름 있는 유생들을 포섭하여 정치에 이용하는 한편, 3번제로 도방을 두어 자신의 신변보호를 담당하게 하였다. 몽고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1232년 왕에게 강화 천도를 청하여 단행하게 하였다. 1234년 강화 천도의 공으로 진양후에 봉해졌으며, 강화 연변에 성을 쌓아 몽고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243년 국자감을 수축하고 양현고에 쌀 3천섬을 내놓는 등 장학에 힘쓰는 한편, 강화에서의 대장경판을 만드는 데 개인의 재산을 희사하여 완성하게 하였다. 후에 횡포가 심하여져서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글씨에도 능하여 해서·행서·초서 등을 잘 썼다.

최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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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閏德(1376~1445)

조선의 무신. 자는 백수, 호는 임곡, 본관은 통천이다.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상호군·동북면 조전병마사 등을 지냈다. 1419년 세종 때 의정부 참찬으로서 삼군 도통사가 되어 체찰사 이종무와 함께 쓰시마를 정벌하였다. 그 공으로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정조사로 명에 다녀왔다. 1443년 만주의 야인 이만주가 국경을 침입하자, 평안도 도절제사로서 이를 대파하여 우의정에 특진되었다. 1435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중추원사로 전임되었다.

최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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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允植(1899~1959)

수학자. 호는 동림이며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8년 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1922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제1부를 졸업하였고, 1926년 도쿄 대학 수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해 귀국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경성공업학교 등의 교사로 있었다. 194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에 이어 대한 수물학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54년 대한 수학회가 창립되자 회장이 되었다. 이 해 학술원 추천 회원이 되었다. 1955년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연구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서울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우리나라 수학자로서는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수학계의 수준 향상을 위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다. 문교부로부터 교육자 근속상을 수여받았다.

최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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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允儀(1102~1162)

고려의 문신·학자. 본관은 해주이며 최 충의 5대손이다. 어려서부터 글에 뛰어나 유명하였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태학박사를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사리에 밝아 당대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저서인 「상정고금예문」은 고종 때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으로 출판되었다.

최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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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恩喜(1904~1980)

여류 언론인.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나 니혼 여자대학 3년 재학중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일본 와세다 대학 법과 통신 강의 2년을 수료하고, 근우회를 창설하여 선전부장을 지냈다. 서울 보건인회 창설 회장·여권 옹호회 창립 선전부장·재건 국민운동 중앙위원·조국 수호 협의회 여성 대표 집행위원·3·1 국민회의 대표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씨 뿌리는 여인」 「여류명인기」 「청춘 회상기」 등이 있다.

최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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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誼(?~1258)

고려 중기의 권신. 본관은 우봉이며 아버지 최 항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정방 정치를 이어받았다. 처음에는 인심을 얻으려고 집과 쌀을 왕에게 바쳤으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 후 우부 승선이 되자, 횡포해지기 시작하여 재물을 약탈하는가 하면 노비에게 낭장의 벼슬을 주었다. 현명한 선비를 잘 대우하지 않고 경박한 유 능 등과 사귀어서 그들의 보고에 따라 살육을 함부로 행하여 원성이 높았다. 마침내 1258년 유 경·김인준 등에 의해 죽음을 당함으로써 4대 60여 년에 걸친 최씨 무신 정권은 끝을 맺었다.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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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益鉉(1833~1906)

조선의 문신. 자는 찬겸, 호는 면암, 본관은 경주이다. 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을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서원을 폐지하려는 대원군의 정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75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이듬해 정부가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1879년 풀려나왔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강력히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그 후 중추원 의관·경기도 관찰사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제자 80여 명을 이끌고 전라북도 순창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한 후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항전중 임병찬 등과 함께 체포되어 쓰시마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이 곳에서 "내 늙은 몸으로 어찌 원수의 밥을 먹겠느냐" 하며 단식하다가 죽었다. 시체가 부산에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나와 통곡하며 맞았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최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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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仁圭(1916~1961)

정치가. 경기도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한 뒤에 미국 뉴욕 대학 상과를 졸업하였다. 1950년 동남아시아 무역 사절단의 정부 대표로 파견되고, 대한 교역사 이사장, 운크라(UNKRA) 미국 주재 한국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에 외자청장이 되었고,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 이 해 9월 교통부 장관이 되었다. 1959년 내무부 장관이 되고 다음 해 정부통령 선거 때 자유당 후보자를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 선거를 총지휘하였다. 이로 인해 4·19혁명이 일어나자 부정 선거의 원흉으로 투옥되고 5·16 군사정변 후 사형당했다.

최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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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仁旭(1920~1972)

소설가. 경상남도 합천 출생. 해인 불교 전문학원(지금의 동국대학교)을 나와 일본의 니혼 대학 종교과를 중퇴하였다. 1938년 「매일신보」에 단편 소설 「시들은 마을」, 이듬해에 「산신령」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광복 후에 문총 중앙위원, 한국 문학가 협회 중앙위원, 서라벌예대와 중앙대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왕성한 창작 의욕을 발휘하여 「개나리」 「동방기(洞房記)」 「동자상」 등을 발표하는 한편, 역사 소설에 전념하여 「초적(草笛)」 「임꺽정」 「만리 장성」 「사명당」 「임진왜란」 등을 신문에 연재했다. 창작집에 「저류(低流)」 「행복의 위치」 「화려한 욕망」 등과 소년소설집 「일곱별 소년」 등이 있다.

최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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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仁勳(1936~ ) 소설가. 함북 회령 출생. 서울대 법대 중퇴. 1959년 「라울전」이 「자유문학」지에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 장편 「광장」으로 문제 작가라는 평판을 받은 이후 「구운몽(九雲夢)」 장편 「회색인(灰色人)」 「크리스마스 캐럴」 「열하일기」 「서유기(西遊記)」 등 문제작을 발표했다 단편 「웃음소리」로 12회 동인문학상을 받았고, 92년 노벨문학상 한국 후보에 올랐으며, 장편 「광장」을 발간했다.

최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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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笠(1539~1612)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입지, 호는 간역, 본관은 통천이다. 이 이의 제자로 명종 때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577년 선조 때 질정관으로 명에 다녀왔으며, 그 후 강릉 부사·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외교문서 작성의 제1인자였으며 명나라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았다. 시에도 뛰어났으며 그의 문장은 차천로의 시, 한 호의 글씨와 더불어 '송도삼절'이라 일컬어진다.

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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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滋(1188~1260)

고려의 문신. 자는 수덕, 호는 동산수, 본관은 해주이다. 최 충의 후손이며 강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 사록을 지냈다. 그 후 이규보의 추천으로 왕명을 글로 작성하는 문한을 맡아 보았다. 당시 집정자인 최 우에게 인정받아 상주 목사가 되어 어진 정치를 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당대에 크게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 「가집」 10권, 「보한집」 3권 등이 있다.

최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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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載瑞(1908~1964)

영문학자·문학평론가. 호는 석경우이며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다. 1931년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런던 대학에 유학하여 영문학을 공부하였다. 1934년부터 시작된 그의 문학평론은 우리 문학에 대한 과학적 비평의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1939년 「인문평론」지를 경영하면서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국민문학」지를 창간하였으며 광복 후 연세대학교·한양대학교의 교수 등을 지냈다. 특히 셰익스피어 연구에 있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평론 「현대시의 생리와 성격」 등과 저서로 「문학원론」 「셰익스피어 예술론」 「문학과 지성」 등이 있다.

최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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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貞熙(1912~1990)

여류 소설가. 함남 단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1년 중앙보육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삼천리」지 기자로 있으면서 「램프」 「정당한 스파이」를 발표하였고 「형상」지에 「성좌」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의 작품은 구성미보다도 작자 자신이 등장 인물의 한 사람이 되어서 자신의 심리를 추구해 나가는 진실한 고백적 성격을 띤 것이 특징이다. 그 후 조선일보 출판부원·주부생활 주간·여류 문인협회 고문 등을 지냈다. 1958년 서울시 문화상·1964년 여류 문학상·1971년 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작품으로 단편집 「천맥」 「풍류 잡히는 마을」, 장편집 「녹색의 문」, 수필집 「사랑의 이력」 「젊은 날의 증언」 등이 있다.

최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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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濟愚(1824~1864)

조선 말기 동학의 창시자. 호는 수운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본래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한때 울산에 내려가 무명 행상을 직업으로 전국 각처를 돌아다녔다. 1855년 철종 때 양산군 천성산 내원암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여, 1860년 천주 강림의 도를 깨닫고 동학을 창시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태평천국의 난과 영·프 연합군의 베이징 침입 사건이 있었다. 이 여파로 우리나라에 대한 열강의 세력 침투가 시작되어 민족적인 위기의식이 조성되어 있었다. 특히 서학(천주교)의 전래는 사상과 풍속이 다른 우리나라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최제우는 서학에 대항하는 유교·불교·선교 등의 교리를 종합한 민족 고유의 신앙인 동학을 창시하였다. 동학은 후에 천도교로 발전하였다. 동학의 근본사상은 '인내천'이다. 즉, 이것은 인본주의를 강조하면서, 성실과 신의로써 새롭고 밝은 세상을 만들자는 외침이었으며 어지러웠던 우리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사상이었다. 또 모든 사람은 평등함을 주장하였는데, 갈수록 신도가 늘어나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마침내 1863년 정부에서는 최제우를 체포하여 이듬해 대구에서 혹세무민의 죄(사람을 속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죄)로 처형하였다. 1907년 순종 때 그의 죄가 풀렸다. 저서로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이 있다.

최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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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震立(1568~1636)

조선의 무신. 자는 사건, 호는 잠와, 본관은 경주이다. 1594년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를 이끌고 서생포에서 왜군을 격멸하였다. 이어 권 율과 함께 도산에서 대승하여 선무공신이 되었다. 그 후 삼군수군통제사를 거쳐 1634년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공주 영장으로서 용인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죽은 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최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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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瓚植(1881~1951)

신소설 작가. 호는 해동초인이며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한성중학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문학에 뜻을 두어, 1907년 상하이에서 발간된 소설집 「설부총서」를 번역하여 우리나라 현대 소설의 토대가 된 신소설 분야를 개척하였다. 1912년에 발표한 「추월색」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신문학 개척에 공헌하였다. 작품으로 「안(雁)의 성」 「금강문」 「춘몽」 등이 있다.

최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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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椿命(?~1250)

고려 고종 때의 충신. 본관은 해주이며 최 충의 후손이다. 1231년 고종 때 자주 부사로서 관민을 이끌고 몽고군에 포위된 성을 지키며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화의를 맺은 뒤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송국섬을 보내어 항복을 하라고 타일렀으나 듣지 않았다. 그를 처형하라는 몽고 관리의 압력으로 서경에 투옥되자 최 우도 그의 처형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몽고에 대해서는 거역했지만 고려에는 충신이니 살려주라는 살리타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후에 1등 공신에 오르고 추밀원 부사에 발탁되었다.

최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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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沖(984~1068)

고려의 문신·학자. 자는 호연, 호는 성재, 본관은 해주이다. 목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013년 국사 수찬관이 되어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또한 1037년 참지정사·수국사로서 「현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047년 문종 때 문하시중이 되어 법률관들에게 율령을 가르침으로써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055년 중서령을 지내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사숙을 열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서 해동공자로 추앙되었다. 또한 그의 제자들을 가리켜 당시 문헌공도라고 하였다. 저서로 「최 문헌공 유고」가 있다.

최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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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忠獻(1149~1219)

고려의 권신. 본관은 우봉이다. 1174년 조위총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별초도령에 등용되었다. 1196년 동생 충수와 함께 권신 이의민 일당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당시 부패된 정치의 개혁을 요구하는 '봉사 10조'를 명종에게 올려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는 정치적 기반을 굳게 한 후에 좌승선과 지어사대사를 겸하였다. 1197년 충성좌리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동생 충수가 자기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하자, 의견 충돌을 일으켜 동생을 살해하였고 독재정권을 강화하였다. 1198년 신종 때 만적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이듬해 지이부사가 되어 군사권과 문무관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1202년 도방을 설치하여 문무관 중에서 용감한 자를 선발하여 신변을 보호하게 하였다. 이듬해 반란을 일으킨 승병들을 유배시키는 등 횡포를 일삼았다. 1205년 희종 때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1209년 학자 이규보를 발탁하여 문화를 일으키는 데 힘썼다. 또한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국정 전반을 감찰함으로써 사실상 중앙 기관의 수뇌가 되었다. 1211년 왕준명 등의 음모로 죽을 뻔하였으며, 희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의 아들인 강종을 즉위시켰다. 강종이 3년 만에 죽자 태자를 왕위에 앉혔는데, 이가 바로 고종이다. 그는 이와 같이 네 임금을 왕위에 앉히고 두 임금을 폐위시키는 등 나라의 정치를 마음대로 행함으로써 최씨 집권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풍속의 순화, 문화의 재흥 등 여러 가지 업적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그가 죽은 후 아들 최 우가 정권을 이어받았다.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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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致遠(857~?)

신라의 학자. 자는 고운·해운이며 경주 최씨의 시조이다. 12세 때 당에 유학하였으며, 17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표수현위를 거쳐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 되었다. 879년 산둥 지방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고변의 종사관을 따라가 「토황소격문」을 써서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이 글로 당나라 사람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으며 884년 귀국하였다. 893년 진성 여왕 때 견당사에 임명되었으나 도둑이 들끓어 가지 못하고, 이듬해 '시무 10조'를 건의하여 정치의 어지러움과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구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어지러운 세상을 비관하여 전국을 유랑하며 풍월을 읊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었다. 고려의 왕 건이 그의 학풍을 듣고 글로써 문답하였다고 하며, 그의 제자들이 고려에서 많은 벼슬을 하였다. 부산의 '해운대'라는 이름은 최치원의 자인 '해운'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저서로 「계원필경」 20권이 있으며, 그는 글씨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는데, 그가 쓴 「난랑비 서문」은 신라 시대의 화랑도를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숭복사·쌍계사·성주사·봉암사 등 4군데의 비석 글씨를 합하여 「4산 비명」이라고 하는데, 모두 걸작품이다.

최치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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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致爀(1809~1878)

조선의 천주교 신자. 교명은 요안이며 공주에서 출생하였다. 1846년 천주교에 입교하였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순교하자 청나라에 있는 프랑스 제독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 떠나는 리델 신부를 수행하여 청에 갔다. 8년간 중국에서 머물며 「한불자전」 및 「한어문전」의 편찬에 종사하였다. 1874년 비밀리에 귀국하여 외국인 신부를 맞아들이려는 운동을 벌이던 중, 만주에 있던 리델 신부와 연락하여 1876년 블랑 신부 등 두 신부를 입국하게 하였다. 이듬해에도 조선 교구 제6대 교구장에 임명된 리델 주교와 로베르·두세 신부를 맞아들여 포교에 힘썼다. 1878년 베이징 외방 전교회와 연락하기 위해 만주로 파견된 밀사가 체포되자, 그도 함께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1880년 그가 쓴 글씨를 자모(子母)로 한, 한국 최초의 「한어문전」이 코스트 신부에 의해 출판되었다.

최학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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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鶴松(1901~1933)

소설가. 호는 서해, 함북 성진에서 태어나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독학을 하였다. 한때는 북간도 지방에서 방랑한 적도 있으나, 귀국하여 방인근이 경영하던 조선문단사에 들어가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1924년 「조선문단」에 「고국」을, 이듬해에는 「탈출기」를 발표하여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그 후 「기아」 「살륙」 「홍염」 「큰물 진 뒤」 등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극빈자의 고투와 자연 발생적인 반항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을 썼다. 당시는 신경향파 문학이 유행한 때여서, 그의 빈궁 문학은 시류를 타고 카프 계의 문인들에게 갈채를 받았다. 1925년 '프로 예맹'에 가입했고, 「중외일보」 기자 「매일신보」 학예부장을 역임하였다. 만년에는 타락과 무궤도한 사생활로 문단에서도 백안시되어 불우하였다. 소설집 「혈흔」이 있다.

최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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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恒(1409~1474)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정부, 호는 태허정·동량, 본관은 삭녕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1443년 정인지 등과 '훈민정음'을 한글로 풀이하였으며 「용비어천가」에 주를 달아 풀이하였다. 1453년 승지로 있을 때, 수양 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데 참여한 공으로 정난공신 1등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어 「공신연곡」 4장을 지어 왕께 바쳤다. 그 후 공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1461년 왕명으로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하여 조선 초기의 법률과 제도를 집대성하였다. 1467년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영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1471년 성종 때 「세조실록」 「예종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평소 겸손하고 과묵했으며 문장에 능하여 명에 보내는 글을 거의 그가 작성했다고 한다. 저서로 「태허정집」이 있다.

최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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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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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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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瀣(1287~1340)

고려의 문신·학자. 자는 언명부, 호는 졸옹, 본관은 경주이다. 최치원의 후손이며 충숙왕 때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요양로 개주판관을 지냈다. 병을 핑계로 귀국하여 검교·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냈다. 만년에는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그는 특히 고려의 저명한 문인들의 글을 모아 「동인지문」 25권을 편찬하였으며, 당대의 문호로서 이제현과 함께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 「졸고천백」 「농은집」 「귀감」 등이 있다.

최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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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海山(1380~1443)

조선의 무신. 본관은 영천이고 최무선의 아들이다. 태조 때 아버지의 유명에 따라 화약 수련법과 화포법을 공부하여 학문과 기술을 터득하였다. 1400년 태종 때 군기시에 등용되어 주부에 올랐다. 1436년 세종 때 동지중추 원사가 되었으며 화차·완구·발화·신포 등의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냈다.

최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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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鉉培(1894~1970)

국어학자. 호는 외솔이며 경남 울산에서 출생하였다. 경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주시경의 조선어 강습원에 들어가 한글을 연구하였다. 1919년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교토 제국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조선어학회 간부로 활약하던 중,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련되어 구속되었다. 광복 후 출옥하여 문교부 편수국장을 지내면서 교과서 편찬을 지도하였다. 그 후 한글학회 이사장·연세대학교 교수·연세대학교 부총장 등을 지냈다. 한글 연구에 일생을 바쳤으며 말본의 체계를 확립하였고 한글 전용 운동에 힘썼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우리 말본」 「한글의 바른 길」 「나라 사랑의 길」 등이 있다.

추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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楸南

고구려의 점쟁이. 보장왕 때 국경 지방의 강물이 거꾸로 흘러서 왕이 점을 치게 하자, 왕비가 음양의 도를 역행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화가 난 왕비는 그를 시험하기 위해 상자 속에 쥐 한 마리를 넣고 그 속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다. 추남이 쥐가 여덟마리가 있다고 하자 왕비가 맞추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를 죽였다. 그 후 쥐의 배를 갈라보니 일곱 마리의 새끼가 들어 있었다. 그는 사형되기 전에 자기가 죽으면 후에 장군으로 태어나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했는데, 그 화신이 바로 신라의 명장 김유신이라고 한다.

충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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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湛(869~940)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승려가 되었다. 889년 진성 여왕 때 무주 영신사에서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 그 후 당에 건너가 정원을 만나고, 효공왕 때 귀국하여 왕사가 되었다. 고려 태조 때에도 왕사가 되었으며, 그가 죽자 태조가 친히 비문을 지어 당 태종의 글씨로 새긴 탑비를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세워주었다.

충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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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談師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 경덕왕의 부름을 받고 왕을 맞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미륵세존에게 드리던 차를 끓여 왕에게 권하고 향가 「안민가」를 지었다. 또 하나의 작품 「찬기파랑가」와 함께 「삼국유사」에 실려 전해진다.

충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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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烈王(1236~1308)

고려의 제25대 왕(재위 1274~1308). 원종의 맏아들이며 1260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1272년 원나라에 갔으며, 1274년에는 원의 제국대장 공주와 결혼하여 살다가 원종이 죽은 뒤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왕권을 강화하였으나 고려는 점점 원의 종속국이 되었다. 1275년 원 세조의 강요로 일본을 치기 위해 배와 장정 등을 준비하였다. 이 정벌 때 원은 고려에 정동행성이라는 관청을 두었는데, 이것은 군사 준비를 감독하는 기관이었다.

충목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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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穆王(1337~1348)

고려의 제29대 왕(재위 1344~1348). 충혜왕의 아들이며 어릴 때 원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1344년 충혜왕이 죽자, 귀국하여 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어머니인 덕령 공주가 대신 정사를 맡아보았다. 권세가들에게 빼앗겼던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기근이 들었을 때 진제도감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또한, 충렬왕·충선왕·충숙왕 등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충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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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宣王(1275~1325)

고려의 제26대 왕(재위 1298~1313). 충렬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원의 계국대장 공주이다. 1277년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이듬해 원에 가서 몽고식 이름을 받았다. 1290년 계국대장 공주와 결혼하였다. 1297년 충렬왕 측근에서 횡포가 심하던 무비 등을 죽이고 기강을 확립하였다. 충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정방을 폐지하고 관제를 혁신하여 자주적인 정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왕비와의 사이가 나빠 다시 아버지인 충렬왕에게 왕위를 주고 원에 가서 머물렀다. 1308년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올랐으며, 조세의 공평·인재 등용의 개방·농잠의 장려·동성간의 결혼 금지 등 혁신적인 정치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원의 생활에 오랫동안 젖어 있던 관계로 곧 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제안 대군에게 정치를 대행시켰다. 이어 원에 갔다가 1313년 귀국하여 충숙왕을 즉위시켰다. 이듬해 원에 가서 만권당을 세우고 서적을 수집하며, 이제현과 조맹부를 비롯한 원의 유학자들을 교유하게 하는 등 문화 교류에 힘썼다.

충숙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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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肅王(1294~1339)

고려의 제27대 왕(재위 1313~1330, 1332~1339). 충선왕의 둘째 아들이며 1313년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정치를 소홀히 하고 사냥·유희만을 일삼아 정치가 문란해졌다. 이 틈을 타 심양왕 고가 왕위 찬탈을 꾀하여 충숙왕의 행실을 원에 고하자, 충숙왕은 원에 불려가 5년간 체류하였다. 그 후 1325년에 귀국, 충숙왕은 심양왕 고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한종유 등 충신들의 반대로 취소하고 1330년 태자 정(후의 충혜왕)에게 양위하였다. 그리고 원에 가서 부마 상주국 일수왕의 호를 받았다. 그러나 원나라의 명으로 1332년 다시 복위되었다.

충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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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定王(1337~1352)

고려의 제30대 왕(재위 1348~1351). 충혜왕의 서자로 충목왕이 후사 없이 죽자 1348년 원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1349년 왜구의 침입과 정치의 문란으로 나라가 혼란하였다. 1351년 윤 택 등의 주장으로 충혜왕의 동생 공민왕이 즉위하였고, 그는 강화도로 유배되어 이듬해 독살당하였다.

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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致益(1862~1942)

승려. 호는 해담이며 속성은 서이다. 19세에 통도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용문사의 해주에게서 경전을 배웠다. 그 후 고운사의 음관의 법을 이어받았다. 1929년 선교 양종 칠교정의 한 사람으로 추대되었으며, 통도사에서 죽었다.

침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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枕流王(?~385)

백제의 제15대 왕(재위 384~385). 근구수왕의 맏아들로 384년 즉위하였다. 그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며,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를 국가적인 문화 사절로 영접하여 백제에 불교가 전래되게 하였다. 이듬해 한산에 절을 창건하였다.

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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坦文(900~975)

고려의 승려. 자는 대오, 속성은 고이며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원효 대사가 살았던 향성산의 옛 절터에 암자를 짓고 수도한 후, 장의사의 신엄에게서 「화엄경」을 배웠다. 914년 15세의 나이로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 고려 태조로부터 별화상이란 칭호를 받았으며, 926년 왕후가 임신을 하자 아들을 낳도록 기도드린 끝에 왕자(후의 광종)를 낳게 되어 더욱 총애를 받았다. 그 후 구룡산사에서 「화엄경」을 강론하여 별대덕이 되었고, 942년 염주·배주 지방에 메뚜기로 인한 피해가 극심하자 「대반야경」을 읽어 이를 물리쳤다. 975년 광종 때 국사에 임명되었다.

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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坦然(1070~1159)

고려의 승려·서예가. 호는 묵암이며 속성은 손이다. 1085년 선종 때 명경과에 급제하였으며, 숙종이 그의 명성을 듣고 세자(후의 예종)를 가르치게 하였다. 1088년 안적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광명사 혜소 국사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각지를 돌아다니며 불교를 연구하였고, 1105년 승과에 급제하였다. 1121년 예종 때 선사가 되었고, 1146년 왕사가 되었다. 서예에도 뛰어나 왕희지의 필체를 따랐으며 김 생 다음가는 명필로 알려졌다. 죽은 후 국사에 추증되었다. 글씨로 「문주원비」 「북룡사비」 「승가굴 증수비」 등이 있다.

탈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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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解王(?~80)

신라의 제4대 왕(재위 57~80). 본래 칭호는 탈해 이사금이다. 다바나국(탐라국)의 왕과 여인국의 왕녀 사이에서 태어난 알이 궤짝에 넣어져 바다에 떠다니던 중, 한 노파에게 발견되어 궤짝 속에서 나온 것이 탈해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8년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고, 10년 대보에 올라 군국정사를 맡아보았다. 남해왕의 유언에 따라 57년 유리왕이 죽은 후 왕위를 물려받았다. 즉위 후 일본과 화친을 맺고 여러 차례 백제를 공격하였다. 65년 시림에서 김알지를 얻어 시림을 계림으로 바꾸었으며 국호를 계림이라 하였다. 77년 황산진에서 가야와 싸워 크게 이겼다.

태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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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王(47~165)

고구려의 제6대 왕(재위 53~146). 일명 국조왕이며 유리왕의 손자이다. 모본왕의 뒤를 이어 7세에 즉위하여 태후가 섭정하였다. 56년 동옥저를 정벌하였고, 72년 달고를 파견하여 조나를 정벌하였다. 121년 요수현을 공격하여 요동 태수를 죽이는 등 영토를 개척하여 부족 국가적 형태에서 중앙 집권적인 형태로 국가 체제를 변혁시켰다. 말년에는 동생 수성(후의 차대왕)에게 양위하고 별궁으로 은퇴하여 태조왕이라 하였다. 119세로 죽어 고구려 역대 왕 중 가장 오래 산 왕이 되었다.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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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1367~1422)

조선의 제3대 왕(재위 1400~1418). 이름은 방원이며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다. 조선의 건국에 공헌이 컸으며, 1392년 정안군에 봉해졌다. 이복 동생 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 방과를 세자로 책봉, 즉위하게 하였다. 1400년 정종 때 방간에 의한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 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후 사병을 폐지하고 숭유억불 정책을 강행하였다. 또한 호패법을 실시하였고 신문고를 설치하였으며, 국방에도 힘을 써 야인을 격파시키는 등 국정을 안정시켰다. 한편, 학문을 장려하여 주자소를 설치하고 동활자인 계미자를 제작하였다. 또한 하 윤 등에게 「동국사략」 「고려사」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대외관계에서는 명나라로부터 고명 금인을 받아서 '조선국왕'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안으로는 왕권의 확립에 힘써서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 데 있어서 크게 이바지하였다. 1418년 세자(후의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태종 무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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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武烈王(604~661)

신라의 제29대 왕(재위 654~661). 무열왕이라고도 하며 성은 김, 이름은 춘추이다. 진지왕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 부인이다. 642년 선덕 여왕 때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이 함락되자, 고구려와 연합하여 백제에 보복하려고 고구려에 갔으나 오히려 갇혔다가 돌아왔다. 그는 외교 수완이 비상하여 여러 차례 당에 내왕하면서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는데, 군사 원조를 약속받아 삼국 통일의 기초적 작업을 진행시켰다. 654년 진덕 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 되었다. 즉위 후 이방부령 양수에게 명하여 율령을 상정하게 하고 60여 조의 이방부격을 제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당나라에 대해서는 계속 친교 정책을 실시하여 깊은 신뢰를 얻고 개부의 동삼사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660년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여 김유신 등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듬해 백제의 부흥군을 격파하였으며 고구려 정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키다가 죽었다. 그의 즉위로 신라 왕권의 전제화가 확립되었으며, 당나라의 율령제도를 모방한 관료 체계가 정비되었다. 또한 9서당이라는 9개 군단을 설치하여 군사조직이 강화되는 등 국가 체제가 확립되었다.

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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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評

고려의 문신. 황해도 연안에서 출생하였으며 사서에 능하여 이사(吏事)를 잘 보았다. 신라 말에 호족 유긍순의 기실(記室)이 되었다. 유긍순이 궁예에게 격파되자,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후에 왕 건을 섬겨 고려 개국에 공을 세우고 순군 낭중이 되었다.

태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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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屹(1710~1793)

조선의 승려. 호는 천봉, 본관은 서흥, 속성은 김이다. 16세에 유덕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도원으로부터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 1729년, 우점에게 학문을 배운 후 이름난 승려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하였다. 그 후 만년에 배천 호국사로 들어가 좌선하다가 해숙의 법을 이어받았다. 죽은 후 정골 2편과 사리 64개가 나왔는데, 호국사·월정사·망월사 등에 각기 나누어 보관하였다.

파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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婆娑王(?~112)

신라의 제5대 왕(재위 80~112). 일명 파사 이사금이며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다. 즉위 후 검소·절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존경을 받았다. 94년 가야가 마두성에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쳤고, 101년 월성을 쌓아 백성들을 그 곳에 옮겨 살게 하였다. 이듬해 음집벌국·실직·압독 등을 병합하였으며, 108년 비지·다벌·초팔 등을 합병하여 국위를 떨쳤다.

편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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片康烈(1892~1928)

독립 운동가. 호는 애사, 본관은 연백이며 황해도 연백에서 출생하였다.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7년 영남 의병장 이강년의 부하로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이 때 전국의 의병들이 양주에 모인 뒤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는데, 앞장서서 용감히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다. 1911년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3·1운동 때에는 황해도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감옥살이를 하였다. 1921년에 만주로 건너가 양기탁 등과 함께 '의성단'을 조직하였으며 중국 창춘에 있는 일본 적십자 병원을 습격하였다. 이어 봉천 시가전 등을 지휘하다가 체포되었다. 신의주에서 7년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심한 고문으로 병을 얻어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평강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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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岡公主

고구려 평원왕의 딸. 어려서 자주 울어 그때마다 평원왕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여 울음을 그치게 하였다. 16세 때 평원왕이 상부의 고씨 집에 출가시키려 하자 이를 거역하고, 궁궐을 뛰쳐나와 바보 온달을 찾아가 결혼하였다. 그 후 온달에게 학문과 무술을 가르쳐 고구려에서 제일가는 장군이 되게 하였다.

평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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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原王(?~590)

고구려의 제25대 왕(재위 559~590). 양원왕의 아들이며 온달의 장인이다. 중국의 진·수·북제·후주 등 여러 나라와 친교를 맺었으며, 586년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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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訓

신라 중기의 승려. 의상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751년 경덕왕 때 불국사가 건립되자 주지로 들어갔다.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표훈은 천궁(天宮)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경덕왕이 그에게 태자를 낳게 해 달라고 하자, 하늘로 올라가서 천제에게 부탁을 올렸다. 천제는 '아들은 낳게 해 주겠으나, 그 아들이 태어나면 나라가 몹시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어 왕후는 태자(후의 혜공왕)를 낳았으며 경덕왕이 죽자 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후 천제의 예언대로 나라가 어지러웠으며 도처에 도적이 들끓었다. 표훈이 죽은 후 신라에는 성인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흥륜사 금당에 신라 10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안치되었다. 저서로 「화엄경 문의 요결 문답」이 있다.

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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品釋(?~642)

신라 선덕 여왕 때의 무신. 김춘추의 사위이다. 대야성의 도독으로 있을 때, 부하인 검일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원한을 샀다. 642년 백제의 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공격해 오자, 검일이 적과 내통하여 성 안의 창고에 불을 질러 성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윤충이 항복하면 죽이지는 않겠다고 하자, 성문을 열어 부하들을 먼저 내보냈으나 복병에 의해 부하들이 모두 전멸되었다. 이에 품석은 처자를 죽인 다음 자결하였다. 이때 성안에 남아 있던 부하 죽죽도 군사를 모아 성문을 닫고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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品日

신라 태종 무열왕 때의 장군. 화랑 관창의 아버지이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아들 관창과 함께 출전하였다. 664년 문무왕 때 김인문 등과 함께 고구려의 돌사성을 공격하였다. 668년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쳐들어갈 때, 귀당총관으로서 공을 세웠으며 백제의 유민들이 소동을 일으킨 63개의 성을 빼앗았다.

피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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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千得(1910~ )

수필가·시인·영문학자. 호는 금아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40년에 상하이 호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에 경성중앙산업학원 교사를 지내면서 시작법과 영시를 연구하였다. 1932년 「신동아」에 「소곡」으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광복 후 경성대학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를 지냈다. 1954년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연구하였으며, 1963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교수를 지냈다. 그는 순수한 정서에 의한 생활의 서정을 시나 수필로 노래하였다.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이고, 문화훈장·인촌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서정시집」 「금아시선」과 수필집 「금아문선」 「산호와 진주」 등이 있다.


하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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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敬德(1897~1951)

학자·언론인. 본관은 진주이며 전북 익산에서 출생하였다.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1925년 미국 하버드 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1928년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귀국하였다. 1931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흥사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과 후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광복 후 「코리아 타임스」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하였고 서울신문사·합동통신사의 사장을 지냈다. 그 후 종합잡지 「신천지」를 발행하였다. 이어 1948년 인도에서 개최된 '범아 문화 대회'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가하였다. 1950년 6·25전쟁 중 미 국무성의 특별 촉탁으로 일본 도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있다가 이듬해 도쿄 병원에서 죽었다.

하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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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瑾燦(1931~ )

소설가. 경북 영천 출생. 전주 사범 및 동아대학 토목과 수학. 1957년 「한국일보」 신춘 문예에 단편 「수난 2대」가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했다. 그의 작품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투철한 작가 정신이 작용하여 1960년대 이후 몇 편의 문제작을 내었다. 1959년 「교육주보」 「교육자료사」 기자를 지냈다. 주요 단편으로 「수난 2대」 「나룻배 이야기」 「흰 종이 수염」 「왕릉(王陵)과 주둔군」 「삼각의 집」 등이 있다.

하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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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伯

전설상의 인물.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외조부이다.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해모수와 사통하자 태백산 남쪽 우발수로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

하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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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緯地(1387~1456)

조선 단종 때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천장, 호는 단계, 본관은 진주이다. 1438년 세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학자가 되었으며,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정치를 보살폈다. 세종의 명으로 집현전에서 「역대병요」의 편집을 착수했는데 수양 대군이 당시 이를 총재하였다. 1453년 수양 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영의정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선산에서 지냈다. 1455년 단종을 폐위시키고 세조가 즉위하여 예조참판으로 부르자 마지못해 취임하였으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받는 대로 별실에다 쌓아 두기만 하였다. 이듬해 성삼문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의 배반으로 붙잡혀 죽었다.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하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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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崙(1347~1416)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대림, 호는 호정, 본관은 진주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영주목을 잘 다스려 안렴사 김 주는 그의 치적을 가장 높이 평가하였다. 1388년 최 영의 요동 정벌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다가 양주로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어 태조가 계룡산으로 도읍을 옮기려 하자 한양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1394년 명나라 태조가 정도전이 보낸 글이 불손하다고 하자, 그가 대신 명나라에 가서 오해를 풀었다. 그 후에도 명나라에 자주 왕래하여 외교에 공이 컸다. 1398년 충청도 관찰사로서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다. 정종이 즉위하자 정당 문학이 되어 정사 1등 공신이 되었고, 1400년 좌의정이 되어 명에 다녀왔다. 1414년(태종 14) 영의정 부사가 되어 70세에 은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하였다. 저서로 「호정집」이 있다.

하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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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應臨(1536~1567)

조선의 문장가. 자는 대이, 호는 청천, 본관은 진주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에 이르렀다. 문장에도 뛰어나 백광훈·이산해·송익필 등과 함께 선조 때의 8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하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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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弘度(1593~1666)

조선의 학자. 자는 중원, 호는 겸재, 본관은 진주이다. 일찍이 조 식에게 「논어」를 배웠으며, 성균관에 들어가 여러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광해군 때 과거에 뜻을 버리고 학문에 힘쓰는 한편, 후배들을 양성하였다. 인조 때 여러 번 벼슬에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암천산에 살면서 집을 짓고 영귀대라고 이름붙였다. 1662년 암행어사로 내려온 남구만과 가까이 지내면서 예론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남구만은 그의 깊은 지식에 감탄하여 현종에게 아뢰니, 왕은 곡식을 하사하여 표창하였다. 저서로 「겸재집」 12권이 있다.

한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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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甲洙(1913~ )

한글학자.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와 일본 중앙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서울대 사범대 강사를 거쳐 음악대 교수, 1949년 한글 학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1953년 미국 동성 훈장·을지 무공 훈장을 받고 1957년 민의원 의장 비서실장·1965년 대한일보 전무·1975년 민속음악 학회장·1982년 국가 제정 추진위원회 부위원장·1989년 서예가 연맹 총재를 역임하였다. 제5회 외솔상·제1회 방송문화상·금성 충무 무공 훈장을 받았다. 저서로 「원본 훈민정음 풀이」 「바른 말 고운 말 사전」 「태극기 해설」 「국어대사전」 등이 있다.

한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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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繼禧(1423~1482)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자순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수찬 등을 지냈다. 그는 학문이 높고 인품이 훌륭하여 세조의 명으로 세자에게 경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1469년 예종 때 남 이를 제거한 공으로 공신이 되었다. 훈구파에 속하는 유학자로서 최 항 등과 함께 「경국대전」 편찬에도 참가하였고 1447년 「의방유취」 30질의 인본 간행을 주관하였다. 성종 때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

한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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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構(163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긍세, 호는 안소당, 본관은 청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1689년 아들 중혁이 인현 왕후의 복위 운동을 하다가 옥에 갇히자, 그도 유배되었다. 1694년 풀려나온 후 80세 때 가선대부가 되었다. 특히 그는 글씨에 뛰어났는데, 정조 때에 그의 글씨를 자본(字本)으로 8만여 자의 활자를 만들어 '한구자'라고 이름붙였다.

한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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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圭卨(?~1930)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순우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포도대장·의정부 찬성 등을 지냈다. 1905년에는 의정부 참정으로 내각을 조직하였다. 그 해 일본의 전권대사인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나라의 여러 대신들에게 을사조약 체결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이에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어 경술국치 때 일본 정부에 의해서 남작 작위가 수여되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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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明澮(1415~1487)

조선의 문신. 자는 자준, 호는 압구정, 본관은 청주이다. 수양 대군의 심복이 되어 1453년 김종서 등을 죽이고 단종을 몰아내는 데 공이 컸다. 세조가 즉위한 이듬해 단종의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성삼문 등 사육신을 죽이는 데 앞장서 병조판서에 올랐다. 1466년 영의정에 이르렀고, 1468년 세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서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1471년 최 항·신숙주 등과 「세조실록」을 완성하였다. 딸 둘이 장순 왕후·공혜 왕후가 되었다. 세조의 총신으로 왕을 보필하여 조선 초기 문화 발전에 많은 공을 세웠다. 갑자사화 때 윤비 폐사에 관련했다 하여 부관참시되었다가 뒤에 신원되었다.

한무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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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茂淑(1918~1993)

여류 소설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산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학생 시절에 그림을 공부하였으나, 1949년 장편 「역사는 흐른다」가 「국제신보」 현상모집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 사변적 문장에 능하고 몰락된 인간상의 부조에 큰 특징을 보였다. 1961년 신문 윤리위원·민족문화 촉진위원 등을 지냈다. 그 후 한·프 협회 이사, 한·일 협회 이사, 한·인도 협회 이사 등을 지냈다. 작품으로 장편 「빛의 계단」과 「축제와 운명의 장소」 등이 있으며, 단편 「감정 있는 심연」으로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한백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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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百謙(1552~1615)

조선의 학자. 자는 명길, 호는 구암, 본관은 청주이다. 일찍이 민 순에게 「소학」과 「근사록」을 배웠다. 1586년 천거에 의하여 중부 참봉이 되고 곧이어 경기전 참봉을 지냈다. 1589년 정여립의 난 때 연좌되어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청주 목사를 지냈다. 그 후 판결사·호조참의를 지냈다. 역학에 밝아 선조 때 「주역전의」의 교정을 보았으며, 「동국지리지」를 지음으로써 실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저서로 「기전고」 등이 있다.

한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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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호

한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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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成俊(1874~1941)

조선 말기의 고수(鼓手). 박순조의 제자가 되어 북을 배웠으며, 북을 잘 쳐 명성이 높았다. 1933년 조선 성악연구회를 창설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노래·민속 무용에도 뛰어났다. 1941년 일본의 '모던 니혼 사'가 제정한 예술상을 탔으며, 만년에는 민속 무용에 전념하였는데 특히 학춤에 뛰어났다.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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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脩(1333~1384)

고려의 서예가. 자는 맹운, 호는 유항, 본관은 청주이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우왕 때 동지밀직에 이르렀다. 그는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다. 또한 학식이 높고 견식이 밝아 사림의 모범이 되었다. 글씨로는 개성의 「노국대장 공주 묘비」 「안심사 사리탑비」 등이 있다.

한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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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勝源(1939~ )

소설가. 전남 장흥 출생.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66년 「신아일보」 신춘 문예에 「가증스런 바다」로 입선, 1968년 「대한일보」 신춘 문예에 「목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1970년 광주 동신중학교 교사를 지냈다. 주요 작품으로 「갯비나리」 「해변의 길손」 「산 자들의 축제」 「겨울 폐사」 「아버지와 아들」 「포구의 달」 「그 바다 끓며 넘치며」 「불의 딸」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 발표. 그는 황폐화된 어촌의 서정적 배경을 중심으로 삶에 대한 토속성과 한의 세계를 다루고 있으며, 고향의 역사적 현실과 숙명을 깊이 있게 파헤치는 작가이다. 한국소설문학상,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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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龍雲(1879~1944)

시인·소설가·독립운동가. 호는 만해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이름은 봉완이며 용운은 법호이다. 18세에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며 28세 때 승려가 되었다. 1908년 일본을 방문하여 약 반년간 신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병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18년 종합잡지 「유심」을 발간하였다.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1925년 그의 기념비적인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였다. 그 후 일제에 대항하는 통일전선인 '신간회'를 창설하고 그 곳의 중앙 집행위원과 경성 지부장을 겸하였다. 1930년 「불교」지를 인수하여 속간하였으며, 1935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을 연재하고, 이어 「후회」 「박명」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문학을 전문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불교적 세계관과 깊은 관조 및 민족적 염원을 노래한 주옥 같은 시들을 남겼다. 1944년 5월 9일 성북동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사망하였다. 1967년 파고다 공원에 그의 비가 세워졌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불교유신론」 「불교대전」 「십현담주해」 「삼국지」 등이 있으며, 1973년 「한용운 전집」 6권이 간행되었다.

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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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雨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선조 때의 기생으로 임 제가 부른 노래에 답한 것이라는 시조 1수가 「청구영언」에 전하고 있다.

한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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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元震(1682~1751)

조선의 학자·문신. 자는 덕소, 호는 남당, 본관은 청주이다. 권상하의 제자이며 학행으로 천거되어 영릉 참봉을 지냈다. 영조 때 경연관으로 선출되었으며 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탕평책에 어긋나는 발언을 하여 파면되었다. 곧 장령·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이기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 이·송시열 두 선생이 주자학의 최고라 하여 김장생의 후손과 논쟁을 벌였다. 또한 천문·지리·병학·산수 등에도 통달하였다.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남당집」이 있다.

한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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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晶東(1894~1976)

아동문학가·동요작가. 평남 강서에서 출생했며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요 「따오기」가 당선된 이후 많은 동요를 발표하였다. 신문·잡지 기자와 교사 생활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동화도 썼다. 1968년 '고마우신 선생님 상'을 받았다. 이듬해 '한정동 아동 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저서로 동요 동화집 「갈잎 피리」가 있다.

한종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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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宗愈(1287~1354)

고려의 문신. 자는 사고, 호는 복재, 본관은 청주이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복부정이 되었다. 1322년 왕위 찬탈을 꾀한 심양왕이 원 황제에게 충숙왕의 잘못을 고해 바쳐, 충숙왕이 원으로 불려가 옥새(왕의 도장)를 빼앗기자, 원에 가서 충숙왕의 환국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명사들과 함께 술에 취하면 「양화사」를 읊었으므로 양화도로 불렀다. 저서로 「복재집」이 있다.

한준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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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浚謙(1557~1627)

조선의 문신. 자는 익지, 호는 유천, 본관은 청주로 인조의 장인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금천 현감으로 있을 때 정여립의 반란이 일어나자, 앞서 정여립의 사위 이진길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다. 그 후 원주 목사·지평 등을 거쳐 1597년 정유재란 때 승지에 이르렀는데, 명나라 제독 마귀를 도와 말먹이와 식량 등을 보급하였다. 그 후 각도의 관찰사를 거쳐, 1605년 호조판서가 되었다. 선조가 죽을 때 한준겸을 비롯하여 일곱 신하들에게 영창 대군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하였는데, 광해군 때 영창 대군이 반역죄로 몰려 죽게 되자 한준겸도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벼슬에 올라 5도 도원수가 되어 국경 지방을 수비하는 데 힘썼다. 1623년 딸이 인조의 비가 되자 영돈령 부사가 되었으며 서평 부원군에 봉해졌다.

한 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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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澄(1886~1944)

한글 학자. 호는 효창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부터 10년간 「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일보」 등의 기자를 지냈다. 1930년 이윤재와 함께 조선어학회 사전을 편찬하는 데 힘썼으며 이어 표준말 사정위원이 되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련되어 옥살이를 하던 중 1944년 함흥 감옥에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한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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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致奫(1765~1814)

조선의 학자. 자는 대연, 호는 옥유당, 본관은 청주이다. 정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청나라 사신으로 가는 한치응을 따라서 고증학의 실사 구시의 학문 탐구 방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왔다. 만년에 「해동역사」 71권을 편찬하였다. 「지리고」는 완성하지 못하였으나, 후에 조카 한진서가 7권을 완성하였다.

한하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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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何雲(1919~1975)

시인. 함남 함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이리 농림학교와 베이징 대학 농학원을 졸업하였다. 1943년 나병으로 귀국하여 함경남도·경기도 도청 등에서 근무하다, 1945년 나병이 재발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1948년 월남하여 방랑생활을 하며 병을 고쳐, 1950년 부평 성계원과 신명보육원을 창설하였다. 1954년 대한 한센 연합 위원장을 지냈다. 대표 작품으로는 「한하운 시초」 「보리피리」 「한하운 전시집」 「나의 슬픈 반생기」 등이 있다.

한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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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亨允(1470~1532)

조선의 문신·서예가. 자는 신경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문신으로 무예에 능한 자를 선발하는 데 뽑혀 참의에 이르렀고 선전관을 겸하였다. 그 후 형조판서·지중추 부사 등을 지냈다. 천성이 청렴·강직하여 바른말을 잘 하였으므로 연산군의 미움을 사 유배된 일도 있다. 글씨에도 뛰어나 왕으로부터 왕희지의 필체첩을 하사받았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글씨로 파주의 「영의정 황보 인 묘비」, 양주의 「명숙공 성 준 묘비」가 있다.

한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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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濩(1543~1605)

조선의 명필. 자는 경홍, 호는 석봉, 본관은 삼화이다. 개성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격려로 붓글씨를 익혀 해서·행서·초서·진서 등 각체에 모두 뛰어났다. 명종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583년 선조 때 와서 별제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사보로서 문서 관계의 일을 맡았으며, 선조도 그의 글씨를 매우 아껴 가평 군수의 벼슬을 내렸다. 당시 그는 명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에 자주 끼어 갔는데, 명나라에서도 그의 이름이 유명해져서 왜란 때 왔던 이여송과 마귀 등도 그의 필적을 구해 가지고 돌아갔다. 한석봉 서체의 특징은 그 때까지 중국의 서체를 모방하던 풍조를 벗어나 호쾌하고 강건한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글씨체를 세운 데 있다. 안평 대군·김 구·양사언과 함께 조선 4대 서가로 꼽힌다. 글씨로 평양의 「기자 묘신비」, 개성의 「선죽교비」, 상주의 「노동비」, 합천의 「박소묘비」 등이 있다.

한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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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確(1403~1456)

조선의 문신. 자는 자유, 호는 간이재, 본관은 청주이다. 그의 누이가 명나라 선종의 후궁이 되자, 초청을 받고 명에 가서 광록시 소경의 벼슬을 지냈다. 세종이 즉위하자 명의 책봉정사가 되어 귀국하여 판한성 부사가 되었다. 그 후 이조판서·좌찬성 등을 거쳐 세조 때 서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1455년 사은사로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양위로 명분을 세워 명나라를 설득하러 연경에 갔다가 귀국 도중에 객사하였다. 그의 둘째 딸은 인수 왕비로 예종의 비였다.

한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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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希愈(?~1306)

고려 말기의 무신. 가주 한씨의 시조이다. 대장군으로 1271년 김방겸을 따라 진도·탐라 등지에서 삼별초를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1274년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앞장서서 활약하였다. 1291년 원에서 반란을 일으킨 합단이 우리 나라로 침입해 오자, 원의 장수 설도간과 함께 이를 막아 공을 세웠다. 후에 충렬왕을 모시고 연경에 갔으며, 그 곳에서 죽었다.

함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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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大勳(1906~1949)

소설가. 호는 일보이며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하였다. 1931년 일본 도쿄 외국어대학 러시아어과를 졸업하였다. 김진섭 등과 「해외문학」의 동인으로서 주로 러시아의 작품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1935년 전후하여 우리 문단에 한때 행동주의가 소개되고 휴머니즘이 논의되자 곧 이헌구·홍효민·김문집 등과 함께 이를 소개하였다. 1935년 3월 「조선일보」에 「지식계급의 불안과 조선문학의 장래」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한국 지식인 연맹의 결성을 주장하였다. 1937년 장편소설 「순정해협」을 「조광」 지에 연재하고 이어 「무풍지대」 「폭풍전야」 등을 발표하였다. 해방 후 「한성일보」 편집국장·군정청 공안국장·군정청 공보국장 등을 역임하고, 1947년 국립 경찰 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재직중 순직하였다. 작품으로 장편 「호반」 「청춘보」 등이 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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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錫憲(1901~1989)

종교 사상가.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0여년 간 오산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였다. 1960년 1월 「사상계」에 집필한 「나라 없는 백성」 필화 사건으로 44일 동안 단식하며 자유당 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던 야인이다. 주로 「사상계」지를 통하여 국민에게 참·의·저항을 외치기도 하고 씨알농장을 경영하면서 농민을 지도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종교인으로서 한일 회담을 반대하였다. 「씨올의 소리」라는 월간 잡지의 발행인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뜻으로 본 한국역사」 「새시대의 전망」 「인간혁명」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등이 있다.

함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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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世煇

조선의 중기의 화가. 본관은 강릉이다. 도화서의 화원으로 별제를 지냈으며, 1719년 숙종 때 통신사 홍치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부용도」를 그렸다고 한다.

함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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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有一(1106~1185)

고려의 관리. 자는 형천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1135년 묘청의 난을 평정할 때 공이 있어 왕 충의 추천으로 내시가 되었다. 명종 때 병부낭중·공부상서 등을 지냈다. 일찍이 교로도감으로 있을 당시 서울에는 무당과 음사(귀신을 모시는 집)가 많아 민심을 현혹시켰다. 그는 이 음사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무당들을 서울 밖으로 내쫓아 미신을 배척한 자로서 유명하였다. 또한 평생 베옷만을 입었으며 질그릇만을 쓰는 등 청빈하게 살았다.

함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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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在韻(1854~1916)

조선 말기의 국악사. 호는 겸와이며 본관은 양근이다. 어려서 강인식으로부터 거문고를 배웠으며, 아버지 함제홍의 재질을 이어받아 거문고의 대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구 한문보를 현행 음조로 번역하는 한편, 악기조성소 감동을 지냈으며 참서관으로 평양 풍경궁에 있었다. 근대 아악의 정통을 이어받은 악리학자, 음악 행정가·연주가로 유명하다. 아악사장으로 있다가 사망하였다.

함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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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台永(1873~1964)

독립운동가·정치가·종교인. 함북 무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법관 양성소를 졸업하였다. 한성재판소 검사가 되어 1898년 독립협회 사건 때 이상재 등의 무죄를 선고하여 파면당하였다. 그 후 대심원·복심법원의 판사를 지냈다. 한일합방 후 기독교에 입교하여 장로가 되었고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였다가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광복 후 1949년 제2대 심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이어 한국신학대 학장을 지냈다. 1952년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으며, 죽은 후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함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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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和鎭(1884~1949)

아악가. 호는 오당, 본관은 양근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거문고의 명인 함재운의 아들로 17세에 장악원 전악이 되어 이병문에게서 거문고를, 명완벽에게서 가야금을 배웠다. 장악·아악사장을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처음으로 국악을 가르쳤다. 광복 후 '대한 국악원'을 창설하고 국악의 발전을 위해 헌신 노력하였다. 저서로 「증보 가곡원류」 「조선 음악 통론」 등이 있다.

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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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明(기원전 12~기원후 9)

고구려 유리왕의 아들. 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힘이 무척 세었다. 8년 황룡국의 왕이 보내준 강궁을 꺾어 힘을 자랑하자, 아버지 유리왕은 황룡국 왕에게 무례한 짓을 저지른 해명을 죽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품에 눌린 황룡국 왕은 그를 살려보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자살하라는 명을 받자 창을 거꾸로 꽂아 놓고 그 위로 말을 달리게 하여 자결하였다. 그가 죽은 곳을 창원이라 하고, 그 자리에 사당을 세웠다.

해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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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慕漱

북부여의 시조. 일찍이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뒤 천제의 아들이라 자칭하였다. 왕이 되어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하백의 딸 유화와의 사이에서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해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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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扶婁

동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설과, 단군과 하백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그는 늙도록 아들이 없어 걱정하였는데, 하루는 곤연에서 큰 돌 밑에 한 아이를 발견하고 데려다가 이름을 금와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그 후 도읍을 동해안의 가섭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였다.

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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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圓(1262~1340)

고려의 승려. 10세 때 승려가 되어 금산사 석굉 대사로부터 불법을 배웠다. 1294년 충렬왕 때 승과에 급제한 뒤 불주사 주지가 되었다. 1305년 원나라 안서왕의 초청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안서왕과 함께 삭방에 가서 2년간 고행하였으며, 그 후 원의 수도로 돌아와 1312년 건립된 대숭은복원사에서 지냈다. 그가 죽은 후 대숭은복원사에는 「고려 제일대사 원공비」라는 비가 세워졌다.

허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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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繼道

고려 말기의 효자. 본관은 김해이며 우왕 때 개성 소윤을 지냈다. 1383년 왜구가 침입하여 나라가 어지러울 때 어머니가 죽었다. 그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 초가집을 짓고 3년간 무덤을 지켰다. 후에 우왕이 이 사실을 알고 그의 고향에 정문(旌門)을 세워 주었다.

허 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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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1529)

조선의 현신. 호는 징와, 본관은 양천이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지평으로 있을 때 중종반정의 원종공신 호를 외람되게 받은 자가 많음을 강경하게 논박하였다.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함경도·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1520년 조윤손이 여연·무창에 정주한 야인을 정벌할 때 그를 후원, 큰 공을 세워 예조판서에 올랐다. 평안도 관찰사에 재직중 사망하였다.

허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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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喬(1567~1632)

조선의 문신. 자는 유악이며 본관은 양천이다. 허 강의 아들이며 효행이 뛰어나 김명원의 추천을 받고 군자감 참봉이 되었다. 그 후 직장·판관 등을 거쳐 거창 현감으로 있을 때, 세력 있는 자들의 은폐로 오랫동안 미결로 있던 살인 사건을 해결하여 곽재우의 탄복을 받았다. 1632년 포천 현감으로 있을 때 죽었으며, 큰 아들은 우의정 허 목이다.

허 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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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筠(1569~1618)

조선의 문신·소설가. 자는 단보, 호는 교산, 본관은 양천이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여류 시인인 허난설헌의 동생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 시강원 설서를 지냈으며,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의정부 참찬까지 올랐다. 1610년 사신을 따라 베이징에 갔다가 천주교 12단(端)을 얻어왔다. 중국 소설들을 탐독하였으며, 시문이 당대에 뛰어나 그의 이름이 명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서얼 출신 이 달에게 시를 배운 탓으로 스스로 서민으로 자처하였다. 1617년 폐모론을 주장했으며, 대북파의 한 사람이었던 하인준 등과 함께 반란을 계획하였다가 참형당하였다. 그가 쓴 「홍길동전」은 조선의 계급 제도 등 사회의 모순을 비판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 소설로서,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 저서로 「성소복부고」 「성수시화」 「도문대작」 등이 있다.

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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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蘭雪軒(1563~1589)

조선의 여류 시인. 자는 경변이며 본관은 양천이다. 본래 이름은 초희이며 난설헌은 호이다. 허 균의 누이로 강릉에서 태어났고 천품이 뛰어났다. 아름다운 용모에 총명하여 어렸을 때 여신동이라고 하였다. 김성립과 결혼하여 두 남매를 낳았으나 모두 잃어 불행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친정집의 재난이 마음을 슬프게 하여 시를 쓰며 괴로운 마음을 달래었다 이 달에게 시를 배웠으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여성의 섬세한 감상을 애닯게 그려 독특한 시의 세계를 이루었다. 27세로 죽었으며, 유언에 따라 광주리에 가득히 지어놓은 시를 태워 버렸다고 한다. 유고집 「난설헌집」에 작품이 실려 전하며, 일설에 「봉선화가」도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허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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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穆(1595~1682)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화보, 호는 미수, 본관은 양천이다. 50세가 될 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힘써 예학에 일가를 이루었다. 1557년 지평을 지낸 뒤, 이듬해 장령에 올라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가 예론에 어긋남을 논박하였다. 1659년 현종 때 송시열과 복상 문제로 맞서다가 삼척 부사로 좌천되었다. 그 후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어 덕·예·형·정 등의 4조에 대한 상소를 한 바 있고, 1677년에는 「경설」 「동사」 등을 지어 숙종에게 바쳤다. 이듬해 판중추 부사가 되어 송시열과 허 적 등을 탄핵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자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에 몰두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죽은 후 유생들이 서원을 세웠다. 일찍이 허 목은 허 적과 같은 남인이었으나, 송시열에 대한 공격에 있어서 허 목은 과격파였고, 허 적은 온건파였다. 그래서 허 목 파는 청남당, 허 적 파는 탁남당이라고 하였다. 저서로 「방국왕조례」 등이 있다.

허백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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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百鍊(1890~1977)

화가. 전남 진도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 3년을 수료하고, 1935~37년 조선전람회에서 수석상을 받았다. 1953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교장을 지냈고 미전 심사위원·예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1966년 예술원상을 받았고, 1973년 회고전을 가졌다.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허 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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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曄(1517~1580)

조선의 문신. 자는 태휘, 호는 초당, 본관은 양천이다. 허 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에 이르렀다. 1575년 동인과 서인 사이에 당쟁이 일어났을 때 김효원 등과 함께 동인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이어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일찍이 김정국이 엮은 「경민편」을 보충하기도 하였으며 「삼강오륜행실」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저서로 「초당집」 「전언주행록」 등이 있다.

허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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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永浩(1954~ ) 산악인이자 탐험가. 충북 제천 출생. 1995년 12월 12일 남극대륙 최고봉인 빈슨 매시프산(해발 5,140m)을 올라 세계 최초로 3대 극점과 7대륙 최고봉을 정복했다. 1994년 1월 남극점, 11월 오세아니아의 카르스텐츠(뉴기니, 4,884m, 1995년 3월 북극점, 9월 유럽의 엘부르스(러시아, 5,642m)를 차례로 올랐다. 1982년 5월에는 히말라야산맥의 마칼루봉(해발 8,481m)을 밟아 처음으로 8,000m 등정에 성공했고, 1983년 10월 마나슬루봉(해발 8,163m) 등정, 중국-네팔 에베레스트 종단 같은 수많은 증정과 탐험 기록을 세웠다.

허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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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煜

조선 중기의 서예가. 호는 취남이며 1710년 숙종 때에 진사가 되었다. 서화 수집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서예에 힘썼는데, 특히 초서에 뛰어났고 시문에도 능하였다.

허 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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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雄(1918~ )

한글 학자·언어 학자. 경남 김해에서 출생하였으며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중퇴하였다. 연세대·서울대·성균관대 교수 등을 거쳐 한글학회 이사장·독립기념관 건립추진회 이사·동아대 대학원 교수를 지냈고 현재는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다. 외솔상·노산문학상·국민훈장 모란장·성곡 학술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중세 국어 연구」 「국어 국문학 사전」 「언어학 개론」 등이 있다.

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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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遠

조선 중기의 과학자. 1705년 숙종 때 관상감 제조로 청나라에 건너가 역관 하 석에게서 역법을 배우고 돌아와 「세초유휘」를 저술, 간행하였다.

허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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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蔿(1855~1908)

조선 말기의 의병장. 호는 왕산, 본관은 김해이며 경북 선산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이은찬·조동호 등과 의병을 일으켜 금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중, 고종의 명으로 해산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이듬해 성균관 박사·의정부 참찬 등을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격문을 돌리다가 체포되었으며, 1907년 이인영 등과 원주에서 전국 의병 연합부대를 조직하여 정식 군대로서의 발족을 선언하였다. 이때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자 그가 대신 군사장이 되었다. 그는 일본의 통감부를 격파하기 위해 3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동대문 밖에 당도하였으나 포위되었다. 포로가 된 그는 재판을 거부하다가 서대문 감옥에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허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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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維(1809~1892)

조선의 서화가·문신. 자는 마힐, 호는 소치, 본관은 양천이다. 진도에서 출생하였으며 벼슬은 지중추 부사에 이르렀다. 문장·그림·글씨에 능하여 '3절'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묵죽에 뛰어났으며, 글씨에 있어서는 김정희의 글씨를 따라 화제(畵題)에 흔히 추사체를 썼다. 작품으로 「하경산수도」 「추강만교도」 「산수병풍」 「노송도병풍」 등이 있다.

허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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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任

조선 선조 때의 명의. 본관은 양천이며 본래 상인 출신이다. 뜸과 침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침을 잘 놓는 의사로 뽑혀 왕을 치료하였다. 1612년 허 준과 함께 의사로서 이름난 사람들을 기록한 「의관록」에 기록되었다. 벼슬은 부평 부사·남양 부사에까지 이르렀다.

허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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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전의. 내의원의 주부·판관 등을 지내면서 궁중의 진료와 방역(防疫)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1493년 성종 때 「의방요록」 3권을 지어 간행하였다.

허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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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積(1610~1680)

조선의 문신. 자는 여차, 호는 묵재, 본관은 양천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사헌부에 있을 때, 뇌물을 받고 인재를 관직에 등용시킨 이경석·이시백 등의 사형을 주청하여 대신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 후 평안 감사를 거쳐 영의정에까지 이르렀으나 얼마 후 사직하고 충주에 내려갔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다시 등용되어 변무사로 청에 다녀왔다. 1678년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허 목과 함께 남인을 지도하다가 허 목의 송시열에 대한 과격론에 반대하여 청남·탁남당으로 분열되자, 탁남당을 이끌었다. 1680년 그의 서자인 허 견이 반역 사건을 일으키자, 이로 인해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 후 죄가 풀려 관작이 복구되었다.

허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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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政(1896~1988)

정치가. 부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프랑스 거주 한국인 거류민 회장·1922년 북미 거주 한국인 교민 총단장 등을 지냈으며, 1923년 「3·1 신보」 사장이 되었다. 광복 후 제헌 국회의원·교통부 장관·국무총리 서리·서울 특별시장 등을 지냈다. 1959년 4차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참석하였고,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과도 정부의 내각 수반 겸 외무부 장관을 거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1963년 국민의 당을 조직하고 당 대표 최고위원을 역임한 뒤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허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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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浚(1546~1615)

조선 중기의 명의·한의학자. 자는 청원이며 본관은 양천이다. 선조 때 전의로 왕실의 진료에 많은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에 다녀와서 1604년 양평군에 봉해졌다. 1608년 선조의 치료를 소홀히 하여 죽게 하였다는 죄로 파직되었으나 곧 광해군의 특명으로 해제되었다. 1610년 16년에 걸친 오랜 연구 끝에 방대한 의학책 「동의보감」 25권을 완성하였다. 의서의 번역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죽은 후 숭록대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신찬 벽온방」 「벽역신방」 등이 있다.

허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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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琛(1444~1505)

조선의 문신. 자는 헌지, 호는 이헌, 본관은 양천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거쳐 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당대의 유명한 학자인 신종호·조 위·유호인 등과 함께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을 떨쳐 세자(연산군)의 신임을 받았다. 1489년에 「삼강행실」을 정리하였으며, 1504년 좌의정이 되었다. 성종 때 윤비 폐위를 반대했기 때문에 갑자사화 때에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연산군의 옳지 못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병이 생겨 사망하였다.

허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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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黃玉(33~189)

대가야국 수로왕의 왕비. 본래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48년에 배를 타고 가야로 와서 왕비가 되었다. 이듬해 태자 등거공을 낳았으며, 그가 가야국에 상륙한 곳은 주포촌이라 불렀고 비단 바지를 벗어 산령에게 제사를 지낸 곳은 능현이라고 불렀다. 아홉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한 아들에게 어머니의 성인 허씨를 주었다고 한다.

헌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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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康王(?~886)

신라의 제49대 왕(재위 875~886). 경문왕의 아들이다. 876년 황룡사에 백고좌를 열어 불경을 강연하게 하였고, 그가 재위하였을 때는 처용무가 유행하고 경주에는 사치와 향락이 심하여 신라는 차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헌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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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德王(?~826)

신라의 제41대 왕(재위 809~826). 소성왕의 동생이며 805년 당나라에 다녀와 병부령이 되었다. 조카인 애장왕이 즉위하자, 섭정을 하다가 809년에 왕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이듬해 제방을 수리하고 왕자를 시켜 불상·불경을 당에 보내어 친당 정책을 썼다. 822년 웅주 도독 김헌창의 반란을 평정하였고, 이듬해 그의 아들 김범문의 모반도 진압하였다. 824년 백 영에게 명하여 패강(대동강)에다 300리에 걸친 장성을 쌓게 하였다.

헌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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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安王(?~861)

신라의 제47대 왕(재위 857~860). 균정의 아들이며 신무왕의 이복 동생이다. 859년 흉년이 들자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며, 제방을 쌓아 농사를 장려하였다. 왕족 응렴(경문왕)을 사위로 삼고 후사가 없자 그에게 양위하고 죽었다.

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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獻宗(1084~1097) 고려의 제14대 왕(재위 1094~1095). 선종의 원자(元子). 어려서부터 서화에 능하고 총명하였다. 1094년 이자의의 난을 평정하였고 다음해 신병으로 숙부 계림공 희(숙종)에게 양위하였다.

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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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宗(1827~1849) 조선의 제24대 왕(재위 1834~1849). 순조의 손자이다. 8세에 즉위하자 순조의 비인 순원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여 정권은 외척 안동 김씨의 손에 있었다. 1839년 천주교를 탄압한 기해박해가 있었으며, 1840년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았다. 재위 기간 동안 정권은 외척의 손에 있었고 나라 안팎이 혼란하였다.

현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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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德秀(?~1215)

고려 중기의 장군. 본관은 연주이다. 어렸을 때 당시 연주 분도 장군 김치규에게 발탁되어 서울로 올라와 공부하였으나 번번이 과거에 떨어졌다. 1174년 조위총이 난을 일으켜 철령 이북에 있는 40여 개의 성이 모두 조위총의 편이 되었으나, 아버지 현담윤과 함께 성을 굳게 지키며 반란군을 맞아 용감히 싸웠다. 그 후 반란군 1만 명에게 포위되었을 때 적을 크게 무찔렀다. 그 공으로 아버지는 장군이 되고 그는 안남도호부 부사가 되었다. 그 뒤 병부상서에 올랐으나 나이가 많아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현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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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錫文(1799~1846)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1836년 헌종 때에 의주로 가서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를 맞아들였다. 그 후 샤스탕 신부를 도와 전도 사업에 힘써 천주교 한양 회장이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아내와 누이가 순교하자 「조선 천주교 순교자 열전」을 집필하였으며, 그 해 앵베르·샤스탕·모방 신부 등도 잡혀 죽었다. 그는 계속 전도에 힘쓰는 한편, 「순교자 열전」 편찬을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상하이까지 피해 다니면서 자료를 정리하여 3년 만에 「기해일기」라는 이름으로 이를 완성하였다.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하이에 가서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를 맞아들였다. 이듬해 김대건 신부와 함께 붙잡혀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925년 로마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위에 올랐다.

현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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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濟明(1902~1960)

음악가. 호는 현석이며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숭실전문학교에 들어가서 선교사들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합창단의 테너로서 각광을 받았다. 그 후 시카고 거언 음악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교단·연주회·강습회 등을 통해 음악 보급에 힘썼다. 1932년 '조선 음악가 협회'를 창설하였고, 1954년 고려 교향악단을 창설하였다. 광복 후 서울 경성음악학교를 세웠으며, 서울대학교 초대 음대 학장을 지냈다. 또한 1957년 시카고 음악대학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고 예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었다. 작품으로 오페라 「춘향전」 「왕자 호동」이 있고, 가곡 「고향 생각」 「그 집 앞」 「바다로 가자」 등이 있다.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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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宗(992~1031) 고려의 제8대 왕(재위 1010~1031).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안종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대량원군에 봉해졌다가 강 조의 추대로 왕위로 올랐다. 그 해 거란의 성왕이 쳐들어오자 강 조로 하여금 방어하게 하였으나, 개경이 함락되어 왕의 친조(왕이 거란의 조정에 들어가 거란 왕을 뵙는 것)를 조건으로 화해하였다. 현종이 친조하지 않자 소배압이 다시 쳐들어왔으나,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크게 이겼다. 이후 현종은 거란에 대해 평화 정책을 썼다. 또한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위해 폐지되었던 팔관회·연등회 등을 부활시켰으며 부처의 힘을 빌려 거란족을 물리치고자 대장경 6천 권을 완성하였다. 그는 농업을 장려하고 지방 제도를 고쳐 거란족의 침입으로 어수선하던 정세를 안정시켜 다음 왕인 덕종과 정종 시대에 황금기를 이룩하게 하였다.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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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宗(1641~1674) 조선의 제18대 왕(재위 1660~1674). 효종의 아들이며 숙종의 아버지이다. 병자호란 이후 아버지 봉림 대군(효종)이 볼모로 가 있던 선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649년 세자에 책봉되어 1660년 즉위하였으다. 재위 기간 동안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심하여 나라 안이 어지럽고 국력은 약화되어 백성들은 질병과 굶주림에 허덕였다. 한편, 두만강 쪽에 자주 침입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냈으며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이어 농업을 진흥시키고자 경기도에 양전(토지 측량)을 실시하였으며, 1668년 김좌명에게 명하여 동철 활자 10만여 자를 주조하였다. 이듬해 송시열의 건의로 동성 통혼을 금하는 등 치적이 있었으나, 격심한 당쟁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과단성 있는 정책이 실시되지 못하였다.

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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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鎭健(1900~1941)

소설가. 호는 빙허이며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도쿄 독일어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외국어학교를 졸업했다. 1920년 「개벽」지에 단편 「희생화」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이듬해 「빈처」를 발표하여 인정을 받았다. 1935년 이상화·박종화 등과 동인지 「백조」를 발간하여 「운수 좋은 날」 「불」 등을 계속 발표함으로써 염상섭과 함께 사실주의 문학을 개척하였다. 그는 특히 단편소설의 명수이며, 문학에 있어서 기교의 가치를 최초로 보여준 작가로 평가된다. 그 후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서 일장기 말살 사건을 일으켜 1년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 「무영탑」 「술 권하는 사회」 등이 있다.

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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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의 왕후

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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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空

신라 중기의 승려. 어릴 때부터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하였으며 승려가 되어서도 삼태기를 지고 취한 채로 다니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므로 사람들이 '부궤화상'이라고 하였고 그의 암자를 '부개사'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원사사에 있으면서 원효가 불교 경전을 지을 때에 의심나는 것을 물으면 가르쳐 주었다. 그는 기적을 많이 행하였는데, 죽을 때도 몸이 공중에 떠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신라의 10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며 흥륜사 금당에 탑이 세워졌다.

혜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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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恭王(756~780)

신라의 제36대 왕(재위 756~780). 경덕왕의 맏아들이며 8세에 즉위하였다. 한때 태후가 섭정을 하였고 당나라와 친교를 맺어 매년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768년 당 태종으로부터 신라 왕에 책봉되었다. 재위 기간 중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흉년이 들었으며 사치스럽고 방탕하여 정치가 문란해졌다. 768년 일길찬 대공의 모반을 비롯하여, 770년 김 융의 모반·775년 김은거의 모반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780년 김지정의 반란 때 왕비와 함께 살해되었다.

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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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灌

고구려 말기의 승려. 중국 수나라에 가서 길장에게 삼론종의 교리를 배우고 돌아왔다. 625년 영류왕 때에 일본에 건너가서 겐코 사에 있으면서 승정이 되었다. 682년 선림사의 도사가 되었고 세이죠사를 창건하였다. 일본 삼론종의 시조이다.

혜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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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能(1562~1636)

조선의 승려. 자는 중열, 호는 양성당, 속성은 남씨이다. 12세에 응철에게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고 8년간 내외 경전을 배워 통달하였다. 산을 좋아하여 두류산·금강산·오대산·치악산 등을 돌아다녔으며 만년에는 천축사의 주지로 있다가 죽었다.

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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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亮

고구려 말기의 승려. 고구려로 국력을 정탐하러 온 신라의 거칠부를 속히 돌아가게 함으로써 잡히는 것을 모면하게 하였다. 그 후 거칠부의 권유로 신라에 귀화하여 진흥왕의 명으로 국통이 되었다. 이어 인왕 백좌강회와 팔관회를 주재하였다.

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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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明 고려 광종 때의 승려. 968년 은진 반약산에 큰 돌이 땅에서 솟아나자 나라에서는 그 돌로 불상을 만들기 위해 전국에 불상을 잘 조각하는 사람을 구하였다. 이에 혜명이 백 명의 기술자를 데리고 공사를 시작하여 37년 후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커다란 불상을 세울 길이 막연하였는데, 하루는 사제촌에서 한쌍의 동자가 진흙으로 3단으로 된 불상을 쌓아가며 세우는 것을 보고 깨우쳐, 마침내 높이 55자 5치의 불상을 세웠다. 이 불상은 나라가 태평하면 온몸에 광채가 나고 흉란이 있으면 땀이 난다고 한다. 이 불상이 바로 지금 충남 은진면 관촉사의 미륵불이다.

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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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明(1861~1937) 조선 말기의 승려. 호는 혜월, 본관은 예산, 속성은 신씨이다. 11세에 덕산 정혜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1884년 경허에게서 지눌의 「수심경」을 듣고 뜻을 깨달았으며 1901년 성우의 법을 이어받았다. 그 후 도리사·파계사·미타암·통도사 등을 다니며 설법을 하다가, 1921년 부산 선암사 주지가 되어 산지를 개간하였다. 그 후 부산 양안암에서 죽었다.

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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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昭(774~850) 신라의 승려. 본관은 전주이며 속성은 최씨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843년 당에 가서 창주 신감 대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810년 숭산 소림사에서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고 종남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830년에 귀국하여 상주 장백사에서 선(禪)을 설법하였다. 그 후 지리산 화개곡에 들어가 옥천사를 짓고 여생을 마쳤다. 후에 정강왕이 최치원으로 하여금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치게 하고 진감(혜소의 시호) 국사비를 세우게 하였다.

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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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素 고려 인종 때의 승려. 대각 국사의 제자로 내외의 모든 경전에 통달하였다. 대각 국사의 행록 10권을 지었으며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김부식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혜소를 찾아와 함께 시를 지었는데, 1천여 편이나 되었다고 한다.

혜소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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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炤國師(972~1054)

고려의 승려. 승명은 정현이며 속성은 이씨이다. 10세 때에 영통사에서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으며 996년 승과에 급제하여 칠장사에 들어가 있었다. 999년 대사가 되었고 덕종 때 승통으로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다. 1046년 문종 때 왕에게 「금고경」을 강의하였으며 가뭄이 들었을 때 불경을 읽어 비를 내리게 하였다. 1049년 왕사가 되었으며, 1054년 국사가 되었다.

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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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諶(1178~1234)

고려의 승려. 자는 영을, 호는 무의자, 속성은 최씨이다. 1201년 신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갔다. 그 후 어머니의 병환으로 집에 머물면서 불경을 탐독하였다. 어머니가 죽은 후 조계산에 들어가 보조 국사 지눌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1210년 지눌이 죽자 왕명으로 수선사로 들어가 그의 뒤를 이어 조계종의 2세가 되었다. 그 후 고종이 즉위하자 선사가 되었으며 이어 대선사에 올랐다. 송광사에 그의 비가 있다. 저서로 「심요」 「무의자 시집」 등이 있다.

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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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慈(?~622)

고구려 말기의 승려. 595년 영양왕 때 일본에 건너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백제의 승려 혜총과 함께 596년 호코사(법흥사)가 세워지자 그 곳에 살면서 포교하였다. 615년 귀국하여 쇼토쿠 태자가 지은 소(죽은 사람을 위해 부처님 앞에 아뢰는 글)를 퍼뜨렸다.

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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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藏(1772~1811)

조선의 승려. 자는 무진, 호는 연파, 속성은 김씨이다. 어려서 대둔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30세에 대흥사의 주지가 되었다. 「주역」 「논어」를 즐겨 읽고 변려문을 잘하였으며 성리학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아암집」이 있다.

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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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哲(785~861)

신라의 승려. 16세에 승려가 되어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듣고 806년에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 814년에는 당에 건너가 서당 지장에게서 심인(부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을 받았다. 그 후 서주에 있는 부사사에서 3년간 대장경을 공부한 후, 839년 귀국하여 곡성 동리산의 대안사에서 불도를 폈다. 이것이 신라 선문 구산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개조가 되었다.

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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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超(704~787)

신라의 승려. 일찍이 당에 건너가, 719년 남인도의 밀교승 금강지에게서 불교 공부를 하였다. 그 후 인도로 가서 불교의 유적지를 두루 순례하며 불교를 연구한 후 당에 돌아갔다. 773년 당의 천복사라는 절에서 금강지와 함께 인도어로 된 불경을 한문으로 옮기는 일을 하였다. 그 후 신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당의 오대산으로 들어가 불경 번역과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힘쓰다가 죽었다. 신라 사람 혜초라는 승려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면서부터이다. 1908년 프랑스의 학자 펠리오 박사가 중국 간쑤 성 지방을 탐사하다가 둔황 명사산 천불동의 석실에서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해 냈다. 이 책은 프랑스 국민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혜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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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聰

백제 위덕왕 때의 승려. 588년 영근·혜식 등과 함께 석가의 유골인 불사리를 가지고 일본에 다녀왔다. 이어 595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고구려 승려 혜자와 함께 3보의 중진이 되었고, 호코사(법흥사)에 머물면서 일본 불교 발전을 위해 많은 공을 세웠다.

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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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通

신라의 승려. 해동 진언종의 시조이다. 젊어서 물개를 잡아 먹고 뼈를 버렸는데 그 뼈가 제집을 찾아가 새끼를 품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문무왕 때 당에 건너가 무외삼장의 신묘한 비법을 배우고 655년에 귀국하였다. 왕의 병사들이 그를 해하려 하자 비법으로 물리쳤으며, 신문왕의 병을 고치는 등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 한다.

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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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便 고구려 말기의 승려.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불도를 펴려 하였으나, 일본 백성이 무지하여 포교가 매우 어려웠다. 584년 백제 사신 녹량이 미륵 불상을 가지고 일본에 왔는데, 일본의 대신이며 불교 신자이던 소가가 절을 짓고 석불을 모셨으나, 봉향할 사람이 없어 마침내 혜편이 뽑혔다. 이에 소가는 그의 세 딸을 혜편에게 보내어 비구니가 되게 하였다. 이것이 일본 비구니의 시초가 되었다.

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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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現(570~627)

백제의 승려. 어려서부터 불도에 전념하여 법화경과 삼론을 깨우치고 신명에 통하였다. 수덕사에 있으면서 강론을 하니 사방에서 사람이 모여와 집 밖까지 신발이 가득할 정도였다. 차차 번잡한 생활이 싫어져 강남의 달라산에 들어가 정좌하며 일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후 시체를 석굴 안에 두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다 먹어버리고 혀만 남겼다 한다. 3년이 지나자 혀가 돌처럼 굳어져서 이를 돌탑 속에 간직하였다고 한다. 그는 당나라에 간 일은 없으나,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당나라의 「고승전」에 그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호동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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好童王子(?~32)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어느 날 옥저로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 태수 최 이의 딸 낙랑 공주와 사랑하게 되었다. 당시 낙랑에는 적병의 침입을 알리는 자명고가 있어 정벌하기 어려웠으므로, 호동이 낙랑 공주를 꾀어 그 자명고를 찢게 하고 쳐들어갔다. 태수가 이를 알고 공주를 죽인 후 항복하였다. 그 후 호동은 원비(元妃)의 시기와 낙랑 공주에 대한 사랑으로 괴로워하다가 자살하였다.

홍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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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可臣(1541~1615)

조선의 문신. 자는 흥도, 호는 만전당, 본관은 남양이다. 명종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강릉 참봉이 되었으며, 1573년 선조 때 예빈 주부를 거쳐 형조좌랑·안산 군수 등을 지냈다. 그 후 수원 부사가 되어 표창을 받았으나 정여립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94년 다시 홍주 목사가 되어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고 1등 공신이 되었다. 광해군 때 영원군에 봉해졌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금오당상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러 사직하였다.

홍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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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景來(1780~1812)

조선의 농민 반란 지도자. 본관은 남양이며 평남 용강에서 출생하였다. 정조 때 사마시에 떨어진 뒤 조정에서의 평안도 출신 배척과 안동 김씨의 심한 횡포에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반란을 도모하였다. 1800년 순조 때 박천의 청룡사에서 양반집의 서자인 우군칙과 만나 시국을 논하다가 서로 뜻이 통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이어 만주 마적단 두목 정시수와 갑부이던 이희저를 포섭하여 가산 다복동을 거사의 본거지로 삼았다. 1811년 흉년으로 민심이 흔들리자 군사 2천명을 이끌고 스스로 평서 대원수라 칭하며 난을 일으켰다. 먼저 가산 군청을 습격하여 군수를 죽이고 평안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안주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정주까지 후퇴하였다. 그 후 관군이 성 밑에 화약을 묻어 폭파하고 공격해 오자 패하여 전사하였다. 이 홍경래의 난은 조선의 대표적인 민란으로 꼽힌다.

홍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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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敬謨(1774~1851)

조선의 문신. 자는 경수, 호는 관암, 본관은 풍산이다. 정조 때 동몽 교관으로 경연에 나가 효경을 강론하였다. 순조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시독관으로 홍문관에 책이 없음을 한탄하고, 「예기」 「주역」 「퇴계집」 등을 왕에게 간행하도록 청하였다. 한때 법성 첨절제사로 벼슬이 좌천되었으나 곧 이조참의에 복직되었다. 일찍이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때 함흥판관 이목원 등의 부정 사실을 살피지 못하였다는 견책을 받기도 하였다. 그 후 병조판서·판돈령 부사 등을 지냈다. 저서로 「관암외사」 「동유사」 「남한지」 등이 있다.

홍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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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啓禧(1703~1771)

조선의 문신. 자는 순보, 호는 담와, 본관은 남양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균역청을 창설하여 병역 세법인 균역법을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757년에 편집당상으로 「열성지」를 편찬하였으며, 왕명으로 「해동악」을 지었다. 저서로 「삼운성휘」가 있다.

홍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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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國榮(1748~1781)

조선의 문신. 자는 덕로이며 본관은 풍산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가 춘방 설서를 겸하였다. 그 후 정후겸 등이 동궁(정조)을 해치려 할 때 동궁을 보호하여 무사히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 공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아 도승지에 올라 정권을 잡았으며, 누이동생을 정조의 빈으로 삼게 하여 세도 정권을 이룩하였다. 대신들은 궁궐로 가기 전에 그의 집에 먼저 들렀고, 모든 정사의 결정이 그의 손을 거쳤다. 그러나 횡포가 날로 심하여지자 벼슬을 빼앗기고 강릉으로 추방되어 죽었다.

홍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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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基兆(1865~1938)

독립 운동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유암, 평남 용강에서 출생하였으며 홍경래의 후손이다. 22세 때 동학에 들어가 황해도·평안도의 접주 등을 지내며 민중 계몽운동에 힘썼다. 3·1 운동 때 천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홍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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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蘭坡(1897~1941)

음악가. 본명은 영후, 본관은 남양이며 수원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조선 정악 전습소 양악부를 수료하고 그 곳 음악 교사가 되었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1920년 「봉선화」를 작곡하고 1922년 '연악회'를 창설하였다. 1925년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으며, 음악 잡지 「음악계」를 발간하였다. 이듬해 일본에 가서 도쿄 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27년 도쿄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1931년 조선 음악가 협회의 상무 이사를 지내고 미국으로 건너가 셔우드 음악대학에서 연구 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1936년 경성 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가 되어 경성 방송 관현악단을 조직하여 서양 음악을 보급하였다. 작품으로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이 있으며, 저서로 「음악만필」 「세계의 악성」 등이 있다.

홍 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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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娘

조선 선조 때의 기생. 1573년 당시 삼당파 또는 팔문장으로 불리던 고죽 최경창이 북도 평사로 경성에 갔을 때 그도 따라가 함께 있었다. 이듬해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오게 되자 그도 쌍성까지 따라와 작별하면서 최경창을 위해 시조 1수를 지었는데, 지금도 전하고 있다.

홍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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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大容(1731~1783)

조선의 실학자. 자는 덕보, 호는 담헌, 본관은 남양이다. 북학파에 드는 실학자로서 일찍이 김원행에게 배워 국학으로 인정되던 주자학을 학문의 기초로 삼았으나 양명학의 지행합일설에 뜻을 두었다. 그는 중국을 통해서 들어오는 새로운 과학 지식을 빼놓지 않고 배웠으며 혼천의를 만들어 하늘을 관측하는 데 힘썼다. 그 무렵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박지원·박제가 등과 함께 실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765년 영조 때 서장관으로 베이징에 가는 숙부를 따라가서 3개월간 머물며 그 곳 선비들과 친교를 맺었으며, 독일인 유송령 등으로부터 각종 서양 문물과 천주당을 구경하였다. 그 후 44세로 벼슬에 올라 영주 군수 등을 지냈다. 그는 경제 정책에서도 균전제를 토대로 하여 농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국가의 재정과 국방을 튼튼히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각 면에 학교를 세워 8세 이상이면 학교에 다닐 수 있어야 한다는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는 주자학과 양명학에 밝았으며 천주교는 배척하였다. 저서로 「담헌기」 「담헌연기」 「유포문답」 등이 있다.

홍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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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萬選(1643~1715)

조선의 실학자. 자는 사중, 호는 유암, 본관은 풍산이다. 벼슬은 장악원장까지 지냈다. 당쟁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았으며 실학을 닦아 선구적 인물이 되었다. 그의 「산림경제」는 농업과 의학에 관한 것으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과학서이고 실학을 연구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홍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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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萬植(1842~1905)

조선 말기의 애국 지사. 자는 백헌, 호는 호운, 본관은 남양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주 목사까지 지냈다. 1884년 동생 홍영식이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게 되자, 아버지 홍순목은 자살하고 그는 자수하여 복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통분한 나머지 음독 자살하였다. 죽은 후 숭정참정 대신에 추증되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홍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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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萬宗

조선 효종 때의 학자. 자는 우해, 호는 현묵자, 본관은 풍산이다. 널리 학문에 뛰어나 많은 책을 저술하였는데 「역대총목」 「순오지」에서는 정 철의 시를 평하기도 하였다.

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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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命喜(1888~?)

충북 괴산 출생. 호는 벽초(碧初). 이광수와 함께 일본 동경 다이세이 중학에서 수학. 1910년 귀국 후 오산 고보 교장, 연희 전문 교수, 중앙 불교 전문의 교수 역임. 「임꺽정(林巨正)」을 「조선일보」(1928. 12. 21~1939. 3. 11)에 연재하여 일약 문단에서 명성을 얻었다. 이광수·최남선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카프 맹원사건 때 연루되어 투옥되었고 시종 친일을 거부하였다. 광복 직후 월북하여 활동하다가 병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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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範圖(1868~1943)

독립 운동가. 평북 자성에서 출생하였으며 1907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에 자극을 받아 갑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삼수·갑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 만주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1920년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전투 끝에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청산리 전투 후에 독립군의 통합운동을 벌여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여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다. 그 후 흑하사변을 당하여 군대를 해산하고 만주와 노령 지방을 방랑하다가 시베리아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홍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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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秉箕(1868~1949)

독립 운동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인암이며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며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간 복역하였다. 1926년 만주 길림성에서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고 고문이 되었으나 붙잡혀 신의주에서 감옥살이를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홍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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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福源(1206~1258)

고려의 역신. 본래 이름은 복량이다. 1218년 고종 때 원나라가 강동성에 침입하였을 때 아버지 홍대순이 자진해 항복하여 적병을 불러들였고, 그도 또한 1231년 살리타가 쳐들어오자 서경 낭장으로 있으면서 적에게 항복하였다. 몽고군이 돌아간 뒤 그는 반란을 일으켜 붙잡혔으나 원나라로 도망하여 동경 총관이 되었다. 그 후 원이 고려를 칠 때마다 그 앞잡이가 되어 들어오므로 '주인을 무는 개'라고 하였다. 후에 몽고에 볼모로 간 영녕공 준과 사이가 나빠지자 몽고 황족 출신인 영녕공 준의 부인이 황제에게 일러바침으로써 황제가 보낸 10여 명의 장사에게 맞아 죽었다.

홍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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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鳳漢(1713~1778)

조선의 문신. 자는 익여, 호는 익익재, 본관은 풍산이다. 사도(장헌) 세자의 장인이다. 영조 때 영의정까지 이르렀으며, 사도 세자를 죽게 한 김귀주 일당을 탄핵하였다. 1763년 청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영조의 정책을 잘 받들어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당파 싸움을 없앨 것과 인재를 뽑아 등용시킬 것을 왕에게 적극 건의하였다. 그는 영조를 도움으로써 조선 후기 문화부흥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홍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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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思九(1875~1895)

조선의 항일 운동가. 자는 우용이고 본관은 남양이며, 경북 순흥에서 출생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되었을 때 안승우를 중심으로 해서 의병이 일어나자 그도 이에 가담하여 제천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홍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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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思容(1900~1947)

시인. 호는 노작이며 수원에서 출생하였다.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921년 「백조」 동인이 되어 「나는 왕이로소이다」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 등을 발표하였다. 또한 '토월회'의 동인이 되어 사극 운동에 참여하였다. 「백조」 간행과 극단 운영에 재산을 다 써버리고 절과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작품에 「꿈이면은」 「봄은 가더이다」 등이 있다.

홍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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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奭周(1774~1842)

조선의 문신. 자는 성백, 호는 연천, 본관은 풍산이다.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수찬·교리 등을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그 후 정사로 청에 다녀와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순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벼슬이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1834년 순조가 죽자 실록청 총재관에 임명되어 「순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주자학에 밝았을 뿐 아니라, 정치·경제·과학 등의 학문에도 이름이 높았다.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풍산세고」 6권, 「상예회수」 10권, 「학강산필저」 4권, 「연천집」 등이 있다.

홍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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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受疇(1642~1702)

조선의 화가·문신. 자는 구언, 호는 호은, 본관은 남양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그림에 뛰어났으며 특히 포도·대나무를 잘 그렸다. 그의 딸이 빌려 온 치마에 간장을 엎질러 울상이 된 것을 보고 그 치마에 다 포도를 그려 팔아 새 비단을 몇 필 사왔다는 일화도 있다. 작품으로 「포도도」가 있다.

홍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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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淳穆(1816~1884)

조선의 문신. 자는 희세, 호는 분계, 본관은 남양이다. 헌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수찬 등을 지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자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1869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당시 수구당 강경파의 우두머리로서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도왔다. 1871년 중국 주재 미국 공사 로와 로저스 제독이 콜로라드 호를 이끌고 통상을 요구하자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그 후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자 등용되어 대원군의 정책 시행을 받들었다. 1884년 아들 홍영식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3일 만에 실각하여 살해되자, 그도 벼슬에서 쫓겨나 자살하였다.

홍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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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彦博(1309~1363)

고려의 문신. 자는 중용, 호는 양파, 본관은 남양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충목왕 때 밀직제학을 거쳐 지신사가 되었다. 1361년 공민왕 때 문하시중으로 있으면서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피란하는 왕을 모셨으며, 왕에게 절제생활을 하도록 권하였다. 1363년 김 용이 흥왕사에서 난을 일으키자, 피하라는 아들의 권고를 물리치고는 “한 나라의 재상이 되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적을 피할 수 있겠느냐”며 최후까지 항거하다가 살해되었다. 죽은 후 정승에 추증되었다.

홍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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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汝諄(1547~1609)

조선의 문신. 자는 자신이며 본관은 남양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 도사가 되었으며, 성절사 하정관으로 명에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북도 순찰사를 지냈으며, 성품이 나빠 대간의 탄핵을 받고 순천에 유배되었다. 북인으로서 임진왜란이 끝나자 유성룡을 몰아내고 정권을 쥐었다. 북인들은 둘로 갈라졌는데, 그는 대북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소북파와 싸움을 벌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홍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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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英植(1855~1884)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중육, 호는 금석, 본관은 남양이다.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로 고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옥당·대교·승지 등을 거쳐 참판이 되었다. 조준영·어윤중 등과 함께 일본을 시찰하였으며, 1883년 특사로 미국에 다녀와 해외 정세에 밝았다. 1894년 개화당 간부로서 우정국이 설치되자 총판이 되었다. 그 해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새 정부를 세우고 우의정이 되었지만, 청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내각이 무너지자 살해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 때 김홍집의 상주로 죄명을 씻고 관에 복귀되어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홍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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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儒(?~936)

고려 초기의 무신. 의성 홍씨의 시조이다. 본래는 궁예의 부하였으나 신숭겸·배현경·복지겸 등과 힘을 모아 왕 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1등 공신이 되었다.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킨 일리천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홍유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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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裕孫(1431~1529)

조선의 문신·시인. 자는 여경, 호는 조총, 본관은 남양이다. 김종직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닦았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세속적인 일에 뜻을 잃고 남효온·이 총 등과 모임을 가지며 노자·장자 등의 학문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때로는 시와 술을 곁들여가며 토론하여 '청담파'라고 불리었다. 무오사화 때 제주에 유배되어 노예가 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풀려 나왔다.

홍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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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允成(1425~1475)

조선의 문신. 자는 수옹, 본관은 회인으로 세종 3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무인의 기질이 있어 사복시 직을 겸하였으며 사복주부에 올랐다. 1453년 수양 대군을 옹위하여 정난의 공을 세우고 여러 벼슬을 거쳐 판사 복시사가 되었다. 1460년 모린위에 여진족이 침입하여 변경을 소란하게 하자 신숙주의 부장으로 이를 토벌하였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성종 즉위 후 인산 부원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좌리공신의 호를 받았다. 용모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나 재물을 탐하고 횡포한 성질이 있어 백성의 원성이 높았다. 세조는 그의 행동에 크게 노하였으나 지난날의 공로가 크다 하여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홍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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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翼漢(1586~1637)

조선의 문신. 자는 백승, 호는 화포, 본관은 남양이다. 인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사서를 거쳐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세워 사신을 보내 오자, 청 사신을 죽임으로써 모욕을 씻자고 주장하였다.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의 주화론을 극구 반대하였다. 결국 남한산성에서 왕이 항복하자 오달제·윤 집 등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가 죽음을 당하니 이들을 '3학사'라고 하였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홍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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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仁祐(1515~1554)

조선의 학자. 자는 응길, 호는 치재, 본관은 남양이다. 서경덕·이 황의 제자로 1537년 중종 때 아버지의 권유로 사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전력하였다. 당시 이름을 떨쳤던 노사신도 그에게 학문을 물었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아버지가 병들자 의서를 연구하여 마침내 약 처방을 손수 하였고 정성껏 간호하였다고 한다 저서로 「관동일록」 「치제유고」 등이 있다.

홍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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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迪(1549~1591)

조선의 문신. 자는 태고, 호는 양재, 본관은 남양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10년간 홍문관에서 일하였다. 특히 경학에 밝아 천재라고 불렀으며, 시와 문장·글씨 등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하의집」 「하의시집」이 있다.

홍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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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鍾宇

조선 말기 수구파의 문신. 자는 재원으로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당시 갑신정변에 실패하여 망명했던 김옥균을 상하이에서 죽이고 중국 경찰에게 붙잡혔다. 그 후 청의 군함으로 귀국하였으며, 그 해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지냈다. 1898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면서 개혁을 주장하자, 그는 '황국협회'를 조직하여 독립협회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성품이 과격하고 대담하였으며, 당시 수구파 정책을 적극 옹호하였다.

홍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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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震(1878~1946)

독립운동가. 호는 만오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법무총장·국무령 등을 지냈다. 1928년 김 구 등과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여 간부로서 활약하였다. 1938년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되어 한국 광복전선이라는 이름으로 발족되자 최고 간부로 활약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홍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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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璡基(1917~1986)

언론인. 서울에서 태어나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전주 지방 판사·법무부 조사국장 겸 한일회담 대표·법무차관·제네바 회담 한국 대표·해무청장·법무부 장관·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1964년 중앙 라디오 방송 사장·중앙일보 부사장을 거쳐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5년 이후 중앙일보·동양방송 사장을 지냈다. 1984년 한국 신문협회 고문을 지냈으며, 국민 훈장 동백장을 서훈받았다.

홍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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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陟

신라 말기의 승려. 일명 남한조사이며 헌덕왕 때 당나라에 가서 지장에게 마음을 수련하는 법을 배운 후 826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 남악(지리산)에 머물면서 불법을 폈다. 후에 흥덕왕과 선광 태자에게 불교의 교리를 믿도록 하였고, 실상사로 들어가 지장의 설법을 이어받아 선종 구산의 하나인 실상산파를 이룩하였다.

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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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雄

신화 속의 인물. 천제자·천왕·천왕랑이라고 한다. 천제 환인의 아들이며 단군의 아버지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는 아버지 환인에게서 천부인 3개와 3천명의 부하를 이끌고 세상에 내려와 태백산 신단수 밑에 신시를 열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 세상을 다스렸다고 한다. 단군 신화에 의하면 웅녀를 맞이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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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因

신화 속의 인물. 환웅의 아버지이며 단군의 할아버지이다. 천제로서 환인의 이름은 불전에서 빌려온 제석신(帝釋神)의 이름에 불과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사람이 사는 세상을 탐내는 아들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주고 세상에 보내어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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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祖(1315~1361)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자는 자춘이며 고려 때의 사람이다. 함경도 쌍성(영흥)에서 세력을 떨치며 원나라의 벼슬을 하고 있었다. 1355년 공민왕 때 처음으로 고려 조정에 들어와 소부윤의 벼슬을 하였다. 그 당시 쌍성에는 원나라의 총관부가 들어와 함경도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의 세력이 점차 약해지자, 환조는 밀직부사 유인우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점령하여 함주 이북을 회복하였다. 이 공으로 1360년 대중대부 사복경이 되어 개경에 있었다. 그 후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가 되어 함경도 지방을 다스리다가 죽었다. 아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환왕이라고 하였으며, 1411년 태종 때 묘호를 환조라고 하였다.

황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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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道淵(?~1885)

조선 말기의 명의. 호는 혜암이며 본관은 창원이다. 서울 무교동에 병원을 내어 명의로서 이름을 떨쳤다. 여러 가지 의서를 저술하여 의학의 대중화에 공을 세웠다. 저서로 「부방편람」 「의종손익」 「의방활투」 등이 있다.

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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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東奎(1938~ ) 시인.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 졸업. 1966년 동대학원 석사. 서울대 영문과 교수. 1958년 「현대문학」에 「시월」 「즐거운 편지」 등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으로 「비가」(1964), 「삼남에 내리는 눈」(1975), 「사랑의 뿌리」(1976),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열하일기」(1982), 「풍장」(1984),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등이 있다. 1991년 서울대 대학신문 주간을 지냈고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상을 받았다.

황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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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秉冀(1936~ )

국악인. 서울 출생.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국악원에서 가야금과 작곡을 연구하였다. 1961년 한국 최초로 서양 오케스트라와 가야금 협주를 하였고, 1965년 하와이 '20세기 음악 예술제'에서 연주를 하고, 미국 주요 도시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가졌다.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 및 이화여대 강사를 거쳐 현재 이화여대 국악과 교수 및 미국 하버드 대학 객원교수로 있다. 1990년 평양 범민족 통일음악회 서울 전통음악 연주단장·서울 90 송년 통일음악회 집행위원장·1994년 국악의 해 조직위원장을 지냈다. 국악상·영화음악상·공연예술 평론가협회 예술가상·중앙문화대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가야금곡집」 5권, 작품으로 가야금곡 「숲」 「석류집」 「비단길」 「전설」 「미궁」 「밤의 소리」 등이 있다.

황보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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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甫仁(?~1453)

조선의 문신. 자는 사겸, 호는 지봉, 본관은 영천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종 때에 북도 체찰사로서 김종서와 더불어 6진을 개척하고 돌아와 영의정이 되었다. 그 후 1452년 문종 때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며, 단종을 잘 보살피라는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보호하다가, 1453년 수양 대군에게 김종서와 함께 살해되었다. 뒤에 숙종이 다시 벼슬에 올리고 영조가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황보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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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甫抗

고려 명종 때의 시인.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떨쳤으며, 이인로·오세재·임춘·함순·이담지·조 통 등과 사귀면서 시작과 술로 세월을 보냈다. 이들은 당시 중국의 '강좌 7현'에 비유되었다.

황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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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嗣永(1775~1801)

조선의 천주교도. 자는 덕소이며 본관은 창원이다. 정약용의 큰 형인 정약현의 사위로 천주교도가 되었다. 1794년 우리 나라에 들어온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가르침을 받아, 알렉산드르라는 교명을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제천의 산중에 피신하여 토굴 속에서 지냈다. 그는 여기에 있는 동안 주문모의 입국 후부터 신유박해에 이르기까지 교세 및 박해의 상황 등을 적어 베이징의 주교 구베아에게 전할 계획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황 심 등과 함께 붙잡혀 모두 처형당하였다. 이 밀서를 '황사영 백서'라고 하며, 이 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박해가 한층 더 엄중해졌다.

황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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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裳

고려 우왕 때의 무신. 본관은 의창이며 충혜왕 때 호군이 되었다. 1362년 공민왕 때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왕을 모시고 피란하였다. 이어 강원도 도만호가 되어 안 우 등과 함께 서울을 다시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워 1등 공신이 되었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친 후, 1377년 우왕 때 서강 도원수로서 왜구를 막는 데 공을 세웠다. 무예에 뛰어나고 용맹스러워 여러 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원나라 순제도 그의 무술에 찬탄하였다고 한다.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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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晳暎(1943~ )

소설가. 만주 신징 출생. 광복 후 귀국. 경북고교를 거쳐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경북고교 재학시 「입시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입선, 1970년 조선일보에 「탑(塔)」이 당선되면서 다시 문단에 나섰다. 1971년 「창작과 비평」에 소설 「객지」를 발표했다. 「객지」는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민중적 차원에 있어서의 현실 파악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작품으로, 이후 현장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국일보」에 소설 「장길산」을 연재하여 역사소설의 한 획을 그었다. 특히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당시의 일을 르포 형식으로 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사선을 넘어」는 80년대 르포 문학의 새 장을 여는 작품이기도 하다. 1989년 북한에 가서 경험한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발표했다.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로 있다.

황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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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錫禹(1895~1959)

시인. 호는 상아탑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하였으며, 1920년 김 억·남궁 벽·오상순·염상섭 등과 문학지 「폐허」의 동인이 되어 상징주의 시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듬해 박영희·변영로·노자영·박종화 등과 동인지 「장미촌」을 창간하였으며, 1929년 동인지 「조선시단」을 창간하였다. 한편, 중외일보·조선일보 기자와 국민대학 교무처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자연송」이 있다.

황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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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順元(1915~2000)

소설가. 평남 대동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처음에는 「단층」의 동인으로 1934년 시집 「목가」와 「골동품」을 출간하였다. 그 후 1940년 「황순원 단편집」을 발간하면서부터 소설로 전환하였다. 초기 소설은 애수나 정감을 간결한 수법으로 다루었으나 후기에 와서는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삼았다. 즉 고아의 세계, 백정의 특수사회, 광복 후 북한의 토지개혁 등을 소재로 삼았다. 표현 수법은 신심리주의적 경향이 짙고 문장의 세련과 긴축이 특징이다. 잡문을 쓰지 않는 작가로 정평이 나 있다. 1960년 경희대학교 교수·학술원 회원·문인협회 이사 등을 지냈고, 1970년 경희대학교 문학부장, 1980~92년 경희대 명예교수를 지냈다. 1954년 자유문학상·1960년 예술원상·국민훈장 동백장을 비롯하여, 아시아 자유문학상·3·1 문화상·대한민국 문학상 본상·인촌상을 수상하였다. 대표작으로 「별」 「소나기」 「학」 「카인의 후예」 「기러기」 「곡예사」 등이 있으며, 저서로 「황순원 전집」 6권이 있다.

황 에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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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 독립 운동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3·1운동 때 많은 기독교인이 투옥되자, 오현관·오현주·이정숙 등과 함께 옥에 갇힌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해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애국부인회의 총무가 되어 의연금을 모집하는 한편, 전국에 지부를 확장하여 독립군 자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 후 '대조선 독립 애국부인회'와 통합 발족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총무부장이 되었다가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황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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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汝獻(1486~?)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헌지, 호는 유촌, 본관은 장수이다. 황 희의 5세손이며,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울산군수 등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는데, 소세양·정사룡 등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당시 이름이 높았다. 그가 지은 「죽지사」는 명나라 사람들에게까지 격찬을 받았다. 저서로 「유촌집」이 있다.

황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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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瑩 고려 숙종 때의 학자. 1103년 숙종 때 중서시랑 등을 지냈으며 사학을 세워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 제자들을 '정경공도'라 불렀는데 고려 12공도 중의 하나였다.

황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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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永祖(1970~ )

마라톤 선수.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손기정 이후 56년 만에 마라톤 우승 신화를 재현했다. 1991년 제16회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의 마라톤경기에서 우승했고, 1992년 2월 일본 벳푸·오이타 마라톤대회에서 우리나라 최고 기록으로 2위를 하였으며, 1994년 10월 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황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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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允吉(153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길재, 호는 우송당, 본관은 장수이다. 황 희의 5세손으로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90년 선조 때 통신정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우리나라를 침입할 것이라고 아뢰었는데, 같이 갔던 김성일이 침입이 없을 것이라고 하자 선조는 김성일의 말만 듣고 적을 맞을 준비를 소홀히 하였다. 2년 후 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황윤길의 말을 믿지 않았음을 크게 후회하였다고 한다.

황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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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胤錫(1729~1791) 조선의 학자. 자는 영수, 호는 이재, 본관은 장수이다. 김원행의 제자로 특히 경학에 밝았다. 영조 때 사마시에 급제하여 익찬에 이르렀다. 저서로 「이재유고」 25권과 「화음 방언 자의해」 「자모변」 등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 국어 연구에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황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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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允石(1929~1961) 최초의 여판사. 본관은 장수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철학·문학에 관심이 컸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을 지망하여 1952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 해 제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1954년 서울 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됨으로써 우리 나라 최초의 여판사가 되었다. 1960년 숙명여고에서 선구여성으로 표창을 받고, 이 해 필리핀에서 열린 세계 여성 법률가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듬해 여성 문제 연구회 실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 해 4월 자택에서 변사하여 그 사인을 둘러싸고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 그 후 여성 단체에서 고인의 뜻을 추모하여 사법고시 준비생을 위한 '윤석 장학회'를 설립하였다.

황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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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晸(1689~1752)

조선의 문신. 자는 양보이며 본관은 장수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지평 등을 지냈다. 1723년 경종 때 진위사의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와서 동부승지·의주 부윤·안동 부사 등을 지냈다. 1749년 영조 때 사신으로 청에 다녀와서 형조참판이 되어 부총관을 겸하였다. 1751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순찰사 등을 겸하였다. 이 때 경상도의 곡식을 운반하여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농사를 장려하여 유랑민을 막았다.

황주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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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周亮(?~1043)

고려 초기의 문신. 호는 경문으로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독원 부사에 이르렀다. 덕종 때 수국사로 있으면서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고려의 역대 왕들에 대한 실록 편찬에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1032년 태조에서 목종까지 7대에 걸친 사적 36권을 완성하였다. 1043년 정종 때 공신의 호를 받았다. 죽은 후 정종의 사당에 함께 모시고 선종 때 개부의 동삼사에 추증되었다.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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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進伊

조선 중종 때의 명기. 본명은 진, 기명은 명월이며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개성 황진사의 서녀라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얼굴이 아름다워 선녀라고 불리어졌다. 그녀가 기생이 된 까닭은 확실하지 않고, 다만 15세 때 동네의 한 총각이 그녀를 사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자, 그를 불쌍히 여겨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여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대학자이며 시인인 서경덕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과 가까이 사귀었으며, 서경덕·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 3절'로 불리었다. 그녀는 시조와 한시에 뛰어나, 인생과 자연·사랑을 시로써 노래하고 읊었다. 짧은 생애를 열정적으로 살다간 여인으로 그녀가 죽자, 임 제 등 후세의 문인들이 시를 지어 추모하였다. 「해동가요」 「청구영언」 「가곡원류」 등에 시조가 실려 전한다. 작품으로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 「영초월시」 등이 있다.

황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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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執中(1533~?)

조선 선조 때의 화가. 자는 시망, 호는 영곡, 본관은 창원이다. 157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특히 포도를 잘 그렸다. 당시 이 정의 대나무와 어몽룡의 매화와 더불어 '3절'로 불리었다. 작품으로 「포도도」가 있다.

황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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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玹(1855~1910)

조선 말기의 학자. 자는 운경, 호는 매천, 본관은 장수이다. 1885년 고종 때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고향에서 이건창 등과 사귀면서 시를 지으며 지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나라를 빼앗긴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유시 4수를 남기고 음독 자살하였다. 1911년 유시집 「매천집」 3권이 김택영과 영남·호남 선비들의 성금으로 출간되었다. 또한 그가 지은 「매천야록」은 광복 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 총서 제1집으로 간행되어 근세사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동비기략」 등이 있다.

황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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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喜(1363~1452)

고려말 조선 초의 명신. 자는 구부, 호는 방촌, 본관은 장수이다. 고려가 망할 무렵에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인격 도야에 남다른 노력을 하였으며 온후한 인품을 지녔다. 고려 무왕 때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학관이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정자·사간 등을 지냈는데, 그가 정치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한 것은 47세에 지신사가 되던 때부터이다. 그는 태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으며, 육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대사헌·한성 판사 등의 요직에 있으면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하여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농사 짓는 법을 개량하고 씨앗을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뽕나무를 많이 심게 하였다. 또한 북방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적을 막기 위한 방비책에 힘썼다. 당시 천민을 차별하지 않는 평등 사상을 내세우는 등 덕망이 높았다. 1413년 세자 양녕 대군을 폐하는 데에 반대하였다가 남원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 후 1422년 세종 때 등용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87세로 영의정에서 물러났을 때, 재물에 욕심이 없어 청빈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집안이 무척 가난하였다고 한다. 이후 청백리의 귀감이 되었으며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방촌집」이 있다.

회안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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懷安大君(?~1421)

조선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방간, 시호는 양희이다. 어머니는 신의 왕후 한씨로 조선 건국 후 회안 대군에 봉해졌다.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을 품고 동생 방원을 질시하던 중,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던 박 포의 거짓 밀고를 믿고, 1400년 군사를 일으켜 방원을 공격하였다. 정종이 이문화를 보내어 달랬으나 듣지 않고 개경에서 싸움을 벌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 결과 패하여 서동으로 도주하다 잡혀 토산현에 귀양갔고, 박 포는 사형당하였다.

효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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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恭王(?~912)

신라 제52대 왕(재위 897~912). 헌강왕의 서자로 897년 진성 여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당시는 궁예와 견훤이 세력을 펴 각축을 벌이던 때로, 신라는 정치가 문란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 상태였다. 897년 궁예에게 패하여 한산주 등 30여 성을 빼앗겼으며, 900년 서남쪽 땅을 견훤에게 빼앗겨 신라의 영토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나 왕은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효령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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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寧大君(1396~1486)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 자는 선숙이며 이름은 보이다. 세종의 형으로 글 읽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태종이 병에 걸리자 손수 약을 달이는 등 곁을 떠나지 않았다. 또한 세종과 우애가 깊었으며 불교를 좋아하여 승도를 모아 불경을 강의하였다. 1464년 원각사가 창건되자 스스로 나가 공사를 감독하였으며 「원각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발간하였다.

효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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曉峰(1888~1966)

승려. 평남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양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판사가 되어 6년간 법관 생활을 하였다. 이때 한 죄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 잘못으로 밝혀지자, 양심의 가책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전국을 방랑하다가, 1925년 금강산 신계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1929년 순천 송광사에서 불교 최고의 과정인 대교과를 공부하였다. 그 후 상원사 등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불법을 편 후, 1941년 송광사에서 대종사의 직위를 받았다. 1954년 불교 종단 정화 준비위원이 되어 불교 정화운동에 앞장섰으며, 1956년 네팔에서 개최된 불교도 대회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였다. 1958년 우리나라 불교계의 최고 지도자가 되어 여러 파로 갈라져 있는 불교계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66년 밀양 표충사에서 죽었는데, 32개의 사리가 나왔다.

효의 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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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懿王后(1753~1821)

조선 정조의 왕비. 본관은 청풍이며 병조판서 김성응의 손녀이다. 10세 때 세손 빈에 봉해졌으며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자식은 낳지 못했으나 성품이 부드럽고 온후하여 신하들의 칭송과 흠모를 받았다.

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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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宗(1619~1659)

조선 제17대 왕(재위 1649~1659). 인조의 둘째아들이다. 병자호란 때 형 소현 세자와 함께 선양에 인질로 잡혀가 8년간 머물렀다. 즉위하자 선양에서의 굴욕을 씻고자 북벌 계획을 세우고 군비를 정비하였다. 송시열·송준길 등을 등용하여 군정에 힘썼으나, 김자점의 밀고로 청에 알려지자 일시 중단되었다. 그 후 흑룡강으로 침입하는 러시아 군을 물리치기 위해 청이 원군을 요청하자, 함께 나선을 정벌하였다. 안으로는 북벌 계획을 버리지 않고 군복 개량 등 북벌 준비를 계속하였고, 호서 지방에서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김 육의 건의로 상평통보를 만들어 화폐를 사용하게 하였다. 「농가집성」 「내훈」 「선조 수정실록」 등을 간행하게 하였고, 제주도로 표류해 온 하멜 일행으로 하여금 서양 무기를 만들게 하였다. 필생의 집념이던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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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靜(1520~1604)

조선의 승려. 자는 현응, 호는 청허·서산, 본관은 완산이다. 속성은 최씨이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지리산에 들어가 불교의 깊은 진리를 깨닫고 승려가 되었다. 29세 때 승과 시험에 합격하여 교종·선종의 판사를 지냈으며 그 후 봉은사의 주지가 되었다. 38세에 승직을 버리고 금강산에 들어가 삼몽사를 짓고 수도에만 힘썼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 때 요승 무업의 무고로 옥에 갇혔으나, 선조가 그 억울함을 알고 석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고령으로 의주에 있는 선조를 찾아가 나라를 구할 것을 맹세하고 8도 16종 도총섭에 임명되었다. 휴정은 곧 전국의 승려들에게 명하여 나라를 위해 궐기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 유정은 관동에서, 처영은 호남에서, 영규는 공주에서 승병을 모았다. 이들 승병들은 각지에서 관군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 1594년 8도 16종 도총섭의 자리를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내다가 85세로 죽었다. 그의 시를 '오도송(도를 깨달은 노래)'이라고 하는데, 깊고 심오한 경지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나라와 백성에 대한 사랑이 담긴 시는 「청허집」 속에 실려 있다. 그는 유교·불교·도교가 일치한다고 하는 '3교 통합론'을 주장하였으며, 우리 나라 불교를 조계종으로 통합하였다. 저서로 「선교결」 「선교석」 「선가귀감」 「운수단」 등이 있다.

흑치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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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齒常之

백제 의자왕 때의 장군. 용맹하고 지략이 있어 의자왕 때 달솔이 되어 풍달군장을 겸하였다. 660년 백제가 망하자 남은 군사들을 모아 임존성에 들어가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다. 그는 100여 개의 성을 다시 찾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나·당 연합군에게 주류성을 빼앗기자 당의 장군 유인궤에게 항복하였다. 그 후 당에 들어가 좌령군 원외장군이 되었고, 678년 돌궐을 정벌하여 공을 세웠다. 그 후 하원도 경략대사 등의 요직을 지냈으나, 그를 시기하는 당나라 신하들의 무고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 죽었다.

흥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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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德王(?~836)

신라의 제42대 왕(재위 826~836). 헌덕왕의 동생으로 왕위에 즉위하자,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삼아 해적의 침입을 방지하게 하였다. 또한 그 해 대렴이 당에서 차 씨앗을 가져오자 이를 재배하게 하여 전국적으로 차가 퍼지게 되었다. 830년 승려 혜소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였으며, 834년 복색 제도를 고치고 백성들에게 검소한 생활을 권장하였다. 후사가 없어 종제인 균정에게 왕위를 물리려 하였으나, 그가 죽자 제륭(희강왕)이 균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흥선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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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宣大院君(1820~1898)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시백, 호는 석파이며 이름은 하응이다. 영조의 현손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 헌종 때 흥선군에 봉해졌으나, 당시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 대비(헌종의 어머니)에게 가까이하여 그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몰래 승낙받았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조 대비의 명으로 고종이 즉위하여 대원군에 오르고, 섭정과 정책 결정권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는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당파와 신분에 관계없이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였다. 또한 당쟁의 소굴인 서원을 47개를 제외하고 모두 철폐하였다. 이어 「대전회통」 「육전조례」 「오례편고」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의 확립을 꾀하였다. 의정부를 부활시키고 비변사를 폐지하였으며, 삼군부를 두어 정권과 군권을 분리하였다. 의복제도를 개량하여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였으며, 세금제도를 뜯어 고쳐 귀족과 서민의 차별 없이 세금을 거두었다. 또한 세금을 받아 옮기는 도중에 일어나는 지방 관리들의 부정을 없애기 위하여 사창을 세워 국고를 충실하게 하였다. 그러나 경복궁의 중건으로 경제가 혼란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졌으며, 천주교를 탄압하여 선교사를 죽임으로써 대외적인 감정을 악화시켰다. 또한 강경한 쇄국 정책을 씀으로써 병인양요·신미양요를 일으키는 등 국제 관계가 나빠지고 외국 문물의 흡수가 늦어졌다. 이러한 실정으로 반대 세력이 생겨나게 되었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게 되자, 며느리인 민비가 반대파와 손을 잡고 1873년 대원군을 탄핵하여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 후 1882년 임오군란으로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민비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사가 출동하여 톈진에 4년간 붙잡혀 있었다. 1885년 귀국한 후 청나라 장군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맏아들 재면을 왕으로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 실패하였다. 1895년 일본 공사 미우라와 짜고 을미사변을 일으켜 정권을 쥐었으나,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미우라 공사가 본국으로 불려가자 정권을 내놓고 은퇴하였다. 아들인 고종이 그의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부자 관계가 나쁜 상태로 죽었다. 1907년 대원왕에 추증되었다.

흥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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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安君(?~1624)

조선 선조의 열 번째 아들. 이름은 제이며 어머니는 온빈 한씨이다. 1624년 이 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들과 내통했다는 설이 있어 대신들이 그를 위리 안치(죄인을 가두는 가시 울타리)하자고 청했으나, 인조는 허락하지 않고 공주로 피란할 때 같이 데리고 갔다. 그는 도망하여 이 괄의 진영에 들어가 한때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 괄이 관군에게 패하자 소천에 숨어 있다가 안사성에게 붙잡혀 압송된 후 도원수 심기원에게 살해되었다.

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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熙宗(1181~1237)

고려의 제21대 왕(재위 1204~1211). 신종의 큰 아들이다. 즉위하여 최충헌을 문하시중에 봉하였는데, 그의 횡포가 심하였으므로 왕은 내시 왕준명 등과 모의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성사하지 못하였다. 1211년 도리어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어 강화 교동으로 유배된 후, 그곳에서 죽었다.